올초, 또는 지난 겨울.

추석쯤 상견례 하고 날 잡을 거야,

말했던 그녀는 그즈음 심심하면 거제로 내려갔다. 사랑에 빠졌을 때 친구 따위는 아웃오브안중 되는 거 그거 여자라면 대부분 알 만큼 안다. 나도 당연히 안다. 맹세코 그래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당하는 기억과 상처주는 기억은 원체 다른 법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처음에는 주말을 보내고 올라오는 낭만 데이트였다가 점점 부산 다녀왔어 할 정도가 되었고, 꼭 그래서는 아니라도 얼굴 못본 지 한참이나 되었다. 사는 게 원래 그렇다. 나이 들면 저마다 감당해야 할 무게가 너무 무거워 친구를 일으켜 세울 힘이 종종 부족해진다. 우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서로 일으켜주며 평생 갈 수 있을까. 언젠가 우리도 제 무게마저 감당못할 날들이 오겠지. 저마다의 행복 속에서 친구의 서글픔 따위 까맣게 잊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살아가는 일은 그런 거니까.   

선착장에서 배로 한 시간 반이 걸린다며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대단한 정성이라며 나는 종종 비웃었고,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았다. 사랑의 이름으로 못 할 일이 없다며 되려 행복해했다. 니가 웃으면 나도 좋아. 정도는 아니지만 아파하는 모습보다는 지금이 낫다고 말해주었다. 여기 공기 좋으니까 내려와, 거제일주 하자. J랑 같이 와도 좋아. / 됐거든.  

 

당시 우린 밥먹듯 통화하며 서로의 일상을 보고하는 사이였는데 때로 떨어져 있어야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이상한 사이이기도 해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뒹굴거리며 떡볶이에 맥주 마시다가 <귀여운 여인>과 <로마의 휴일> 보며 질질짜는 짓 따위는 안해도 되었다. 가끔은 했는지도 모르지만. 다행이었다. 내 생각에 그건 우리 청춘에 대한 마지막 자존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아무리 사랑에 상처 받아도 로맨틱한 프로포즈 받고 예쁜 드레스 입고 멋진 남자와 결혼하고 싶었다. 바로 그 멋진 남자에게로 시집가고 싶었다. 그런 바람 때문에 여전히 두 영화가 적어도 내게 낭만적임 또는 로맨틱함의 절정으로 남아있는지도.(^^) 그녀에게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가 시집을 가거나 말거나, 다 잊고 시험에 몰두했는데 갑자기 기억난 건 이 사진 때문이다. 영화를 뒤적거리는데 사진이 나왔다. 얜 왜 예쁜 얼굴을 안 찍고 뒷모습을 찍은 걸까. 첨에 든 생각은 이거였고 이후 좀 더 농도 다른 생각이 몰려왔다. 이건 작년 사진도 아니고 아마도 더 이전 사진일텐데 그러니까 지금보다 몇 살 더 어렸을 때일텐데 나지만 전혀 나 같지가 않다. 팔다리 길고 손가락도 길고 볼륨 별로 없는 게 나 맞긴 맞는데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2년 뒤 이런 생각을 할 거라 예상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한 살 더 어릴 때가 예뻤구나. 온누리 여자의 마음이란 이런 것. 물론 과거의 나보다 지금이 더 나답구나 싶은 여자도 있고 과거따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지금이 예뻐. 라는 여자도 당연히 있겠지만. 나는 그때 참 예뻤구나. 더 어릴 때는 더 예뻤겠지. 어른들이 젊은 사람을 보면 내가 볼 때 별로 예쁘지도 않고 딱히 변함 없는데도 어째서 예쁘다고 하는지 이해를 못했는데 나 요즘 그런 거 느끼는 스물아홉 증후군앓이 중. 이건 어쩌면 평생 직장 찾는 취업 스트레스 보다 좀 더 심각한 문제일지도 몰라. 취업은 고작 시간을 팔아 돈을 사는 일에 불과하지만(꿈도 사고) <그때 참 예뻤구나>의 문제는 존재 자체의 심오하고 찬란한 문제이기도 하니까.  

 

   

 

사진은 그녀가 찍어주었다. 몇 장은 찍히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멍청한 표정으로도 찍혔다. 신나서 이 옷 저 옷 입어보는 중이었지 싶은데 아마 나도 모르는 새 마네킹 취급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디카가 내꺼였으므로 사진은 고스란히 내게 남아있다.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당장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지만 전화하면 목소리를 들을 수는 있겠지. 어쩌면 전화번호 바꿔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내일 전화해야지. 친구야, 시집 가도 안 미워할게. 사랑해줄게. 너는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어느 남자에게나 넘칠 만큼 사랑받아도 괜찮을 만큼.   

 

읽다 만 책 속에 보통이 있었다. 읽다 만 책이 너무 많아서 쌓고 또 쌓고 또 쌓여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라 몽땅 안 읽어본 책 취급하기로 맘먹는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안면 없는 책이 될 것도 같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의 재출간본. 제목을 왜 바꿨을까. 5초 정도 생각하다 패스한다. 배경 일일이 신경쓰는 타입 아니고, 어차피 읽지 않았고, 소장하지 않아서 문제될 게 없다. 오래 전에 받았고 그보다 덜 오래 전에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끝을 보지 못했다. 사랑에 시간을 비워두지 못할 만큼 늘 맘이 급하고 예민한 상태였기에 사랑노래가 자주 지겹고 애석하게 느껴졌다. 키스는 더 그랬다.  

대학 때 참 예쁘고 똑 부러지던 동생이 있었다. 같은 과 재학중 수업이 같아 함께 구내식당과 매점, 캠퍼스와 도서관, 강의실을 누비며 그 아이는 말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여행을 가자는 바람에 레이스 달린 예쁘고 야한 속옷 세트를 샀어요. 당시 스물 둘. 자기와 나이 차가 좀 있는 남자여서 어린 애처럼 보이기 싫었다고 했다. 여자로 보이고 싶어 준비해갔지만 남자는 사랑을 나눌 생각이 없더라고도 했다. 지켜주고 싶다나 뭐라나. 그녀는 자신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처 받았다고 했다. 정말 좋아했구나. 내가 말했다. 언니 그거 알아요? 키스만으로도 젖게 만드는 남자. 자기가 좋아하는 그 남자가 그만큼 키스를 잘한다는 얘기였겠지만 그건 굉장히 뭐랄까, 다른 사람은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느낌을 느껴본 어린 여자가 말하는 거대한 고백처럼 여겨졌다. 나도 어렸는데 뭘 얼만큼 알 수 있었을까. 남자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나. 사랑하지 않으면 여자에게 키스를 해서는 안된다고. 그 키스 한 번이 당신을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폭풍같이 커다란 늪일 수도 있고, 그녀를 죽고 살릴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애는 죽고 싶어했다고.   

 

물론 그애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다. 키스만으로도 여자를 젖게 만드는 남자가 스물 두 살의 어린 여자애를 사랑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나누는 말들에 대해서는 기억이 전혀 안나지만 키스라는 단어만 생각하면 종종 그애 생각이 난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똑똑한 여자애였다. 자유분방해 보이면서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숨길 줄 모르는 아이라 말은 안했어도 속으로 내가 내내 걱정했었다는 걸 그애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졸업식에서도 못 봤고 이후로도 연락을 못했다. 연락은 물론 인연도 끊어졌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보통씨, 그렇다면 나를 위해 쓴 책이란 말인데 주제가 점점 삼천포로 가고 있다는 생각 안들어요? 어쨌거나 읽지 않아도 모아온 당신이니까 이번에도 모아두고 나서 읽어볼게요. 고마워요. 나를 위해 종교를 말해주어서.( ") 

어차피 당신이 하는 모든 일들은 나를 위한 거겠죠.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이렇게 믿고 싶다. 특히 상대가 남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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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6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9-16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대박이다.... 아이리시스님 얼굴 봤네,
어우 청순에 미인형, 내가 완전 부러워하는 형이잖아요. 팔뚝도 가늘구, 난 그게 젤 부러워요, 홍홍.

어릴때는 정말 친구에게 신경쓰고 힘든 사람에게 신경쓸 에너지가 있었죠,
나이들면서 확실히 각박해지는거 같아요, 그래도 잘 늙으면 어릴 때보다 더 현명하고 따스하게
사람들과 보듬고 지낼 지혜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 중이예요. 그런거 같아요,
나이 들면서 같은 나이라도 엄청 동안과 노안이 있는 것처럼, 마음도 동안과 노안이 있지 않을까...

동안과 노안이란 표현, 조금 어설픈데 무슨 말인지 내맘 잘 알자나요, 아이리시스님? 쪽~~~~~~~~~쪽쪽쪽쪽
(뽀뽀 백번 해도 감사한 마음 다 표현못 할 나의 예쁜 아가씨~)

아이리시스 2011-09-16 13:04   좋아요 0 | URL
마고님, 안녕. 페이퍼 왜 안쓰는 거예요, 버럭!! 인사시기를 놓쳤잖아요. 사진이 예뻐서 저 때의 내가 너무 부러워서 안 올리고는 못 배기는 간절함, 그런 게 문득 솟아났어요. 용기도 났어요. 그리고 저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니까요. 히히. 저 팔뚝 안 가늘어요. 지금을 보여주고 싶다, 진짜..^^ 그런데 손가락도 길고 팔다리도 긴 편이라 많이 먹고 들어가는 편. 갑자기 자뻑모드 -_-;; 나라도 나를 이렇게 대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변명모드 -_-;;

공감해요. 나이 들면서 같은 나이라도 엄청 동안과 노안이 있는 것처럼 마음도 당연히 있죠. 그리고 그 마음이 같은 나이임에도 동안과 노안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마고님 보면 생각나는 건데 추석연휴 끝나자마자 수요일에 폭락했던 장이 어제,오늘 큰 폭 올라오고 있어요. 거참, 저는 이제 손 뗐는데 남 좋은 일 보고 있는 기분도 썩 나쁘지 않네요. 어차피 정글싸움이기도 하고 말이죠. 히히. 저 올해 많이 크고 있어요.

나의 예쁜 아가씨~ 호호호호. 완전 행복해요. 뽀뽀 백번 해줘요. 기다릴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좋은 하루 되세요.^^

비로그인 2011-09-1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인연이라는 게 있을까요? 아이리시스님의 친구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금 막연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필요에 의해 서로를 찾는 순간들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씁쓸함도 입에 남구요. 그래도 살다보면 언젠가 그런 인연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오겠죠? 내일 친구분이랑 거하게 회포를 푸셔요. 나중에 섬생활하는 게 (섬소년?) 제 꿈인데 거제도도 한 번 놀러가봐야겠네요. 거제일주, 좋을 것 같아요.

보통은 이름만 들어본 아저씨에요. [불안]이라는 책을 수학여행 가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욕 좀 먹었어요 ^^) 그 이후로는 만나보지 못했네요. 책상 위에 수도자처럼 앉아 있는 사진이 뇌리를 스치는...

아참, 두 장의 사진에 제목을 붙여봤어요. 한가한 동네 옷집에서의 패션쇼 현장. ㅎㅎ
저는 언젠가 피터팬 복장을 하고 사진을 남기겠어요.

아이리시스 2011-09-16 13: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어느 정도 그런 게 있어요. 나이들수록 필요할 때만 찾는.. 그래도 아직은 필요에 의하지 않고도 투정부리고 진상 떨 수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다행이고 행운이에요. 수학여행 가서 [불안]을 읽다니, 하하하. 말없는수다쟁이님도 엄청 책을 사랑하셨구나? 완벽한 문학소년이었네요.

저기 친구가 하는 옷가게 였어요. 타겟이 30대 이상이어서 우리가 입을 옷은 많지 않았어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거제에 아예 눌러살고 잇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제가 다사다난해서 아직 전화를 못하고 있고, 날이 너무 더워요.-_-;

피터팬 복장 언제 할건데요? 네? 미리 좀 알려줘봐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tella.K 2011-09-1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련된 부산 아가씨였군요.
반갑사옵니다.^^

아이리시스 2011-09-16 13:13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세련이라는 말은 좋은 뜻을 다 포함하고 있는 단어 같아요. 짧은 말 속에 뭔가 꽉 찬 의미가 든 듯해서 좋아요. 오늘은 오랜만에 펄 매니큐어를 발랐어요. 엄마도 발라주구요. 저는 핑크를 좋아하는데 오늘은 그레이펄 이예요. 세련된 손동작을 해야 할 것 같은 날이에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하루 되세요, 스텔라님.^^

페크pek0501 2011-09-1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 제목이 제 마음을 끌어당기네요. 여기서 스텔라님도 보네요.^^^

보통의 책은 다 읽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두 책은 읽지 못했어요.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예요. 이 책으로 많이 배웠어요. 흥미롭고 배울 게 많아요.

오늘 님의 사진도 보고 나이도 알게 되고... 제가 운이 좋은 것 같은데요.

우정과 연애...연애가 시작되면 연애 이외엔 모든 게 시시해져 버려서 친구도 멀어지죠. 그런데 그런 것 다 거치고 아주 늙게 되면 다시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게 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들어요. 60, 70대의 어머님들을 보면 알게 되죠.

좋은 하루 되세요.

아이리시스 2011-09-16 18:46   좋아요 0 | URL
네ㅡ 펙님, 보통 좋죠? 저도 생각해봤는데 감명깊게 맘속을 뚫고 지나갔던 책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뿐인 것 같아요.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불안>, <일의 기쁨과 슬픔>, <공항에서 일주일을> 그리고 위에 있는 <너를 사랑한다는 건>도 읽었던가 읽다 말았던가 한데 덜 좋아서는 아니지만 첫 책이 제일 남아요. 펙님도 그런가봐요. 그래도 여전히 보통이 읽고 싶어요. 이번책은 종교라 어떤 식으로 풀지 더 궁금한데, 표지가 대체적으로 맘에 안든다는 평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ㅋㅋㅋ

우정과 연애론은 저도 동감입니다. 우정이 멀어질 때면 연애가 가까워지고, 연애가 멀어질 때면 우정이 간절해지는. 그래서 늙어갈 수록 동반자가 중요한 것 같고, 마지막까지 함께 가야 할 친구도 소중해요. 관리라는 말 그렇지만 둘 다 잘 관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좋은 하루 보내셨어요?

June* 2011-09-1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hu - ♥
 

아이리시스 2011-09-16 18:47   좋아요 0 | URL
준님, 추석연휴에 뭐했어요? 잘 지냈어요?

cyrus 2011-09-16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이쁘시네요.(+_+) 아이리시스님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나중에 사진을
삭제하시는건 아니시겠죠? ㅎㅎ 예전에 한번 양철나무꾼님이 서재에 실제 모습을 사진으로 올리셨다는데
저는 늦게 들리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

여자의 심리는 정말 복잡미묘한거 같아요. 모태솔로가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만.. ^^;;
남자의 행동에 대해서 동생분이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랜 기간동안 무르익었으면 남자의 행동이 동생분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울테지만요.
모든 연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제 주위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사귄지 100일도 안 되었는데
벌써 몸으로 사랑을 확인하더군요.. ^^;; 그러다가 얼마 못가 깨지게 되고요.

아이리시스 2011-09-16 20:14   좋아요 0 | URL
삭제는 하나마나 누가 확인이나 하나요, 뭐! 정.말. 이쁜 것 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후덜덜. 나무꾼님은 저도 아쉬운데, 그래서 막 조르는 중이거든요. 단계별로 졸라볼까 하구요.ㅋㅋㅋ

아 맞다, 키스 잘했던 그 남자는 동생을 여자로 본 건 아니었대요. 여행을 둘이 떠난 건 맞는 것 같은데 그애 말로는 아무리 예쁜 속옷을 입었어도 침대에서는 물론 손조차 손도 안대더라고 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는 건 그냥 우리 생각인 것 같고, 어떤 남자는 그랬다나봐요.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중이었대요. 그러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 여자가 되고 싶었던 그애는 거절당하기 위해 떠난 여행인 걸 몰랐던 거예요. 남자는 처음부터 밤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은 거지요. 여행을 가니까 당연히 1박 할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하여튼 그애에겐 굉장한 성장통이었던 것 같아요. 사랑에 관한. 이후 연하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그 얘기도 종종 해줬는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예쁘고 똑똑한 여자는 모두 도도하고 지혜롭고 튕길 거라 생각하는데 그애는 예상을 벗어나는 여자였어요, 제가 생각해도요. 우리가 친해진 건 정말 우연이었는데 내 과가 아니다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과하고 성실한 구석에다가 이해 안 가는 행동도 종종 했어요. 그게 참 예뻤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듯 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모습이 이중적이면서도 신비롭잖아요.

아, 몸으로 확인하는 사랑. 그건 현 시대 10대와 20대가 가장 공감하는 내용 아닐까 싶어요. 확인하는 속도에 따라 사랑의 기간도 정해지는..^^

아이리시스 2011-09-16 20:21   좋아요 0 | URL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키스는 왜..................(-_-;) 키스는 되고 잠은 안잔다니 무슨 마음인 거예요? 시루스님. 남자를 대표해서 한 번 말해봐요, 큭큭.

cyrus 2011-09-16 22:36   좋아요 0 | URL
ㅎㅎ 아이리시스님도 못 보셨군요.

댓글을 읽고나니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리고 마지막 댓글은...
그냥 모른척 하고 넘어가주세요 =3=3=3

아이리시스 2011-09-17 01:28   좋아요 0 | URL
네, 그냥 넘어가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꿈꾸는섬 2011-09-1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너무 예쁘다고 쓰려다가 정말 예쁘다로 바꿔 쓸게요.
정말 팔다리도 시원시원하고 완전 부러운 몸매까지 소유하고 계시군요.
저도 가끔 예전 사진보다보면 낯선 느낌 받는데......
전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게 키스하는 남자들은 거의 없다고 보는데, 키스는 아무하고나 안 하지 않나요?
예전 알던 XY의 말이 돈 주고 관계를 가져도 키스는 절대 못하겠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그 사람 말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냥 제 생각에도 키스 아무나하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
게다가 젊은 날의 관계는 지속될 수도 깨질 수도 변수가 너무 많잖아요.

아이리시스 2011-09-17 01:31   좋아요 0 | URL
꿈섬님, 안녕. 추석연휴 잘 보내셨죠? 인사를 깜빡하고 못 여쭤서 마음이 막.. 엉엉엉.
완전 부러운 몸매.는 착각하시는 거구요, 키스는 저야말로 정말 신기해요. 다른 남자와의 키스를 내가 각색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하하하. 돈 주고 관계를 가져도 키스는 절대 못하겠다는 말은 저도 들었는데 아마 처음에는 만나볼까 했는데 나중에 아니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키스도 아무나 하고 하면 큰일나죠. 아, 어떡해.......(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루쉰P 2011-09-19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의 읽는 즐거움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 알라딘에는 미인이 많습니다. 뇌색적 미인인 양철나무꾼님과 시크한 베리베리님 이렇게 2대 얼짱으로 나름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고, 같은 부산 쪽에 꼬마요정님이라 하는 분은 동생 분의 미모로 유추해 보아 미인라 여겨져(동생 사진을 올리셨거든요. ㅋㅋㅋ) 트라이앵글 미인으로 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이리시스님의 사진을 뵈니 알라딘 미인 사대천황으로 정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 네 분의 순위는 없으니 안심하시고 (순위 정했다가는 위험한 사태가 ㅋㅋㅋ) 암튼 오늘은 아이리시스님의 리뷰를 읽고 문득 연락 끊긴 제 생각도 나네요. 아 보고싶다...
근데 불교의 사대천황은 이미지 찾지 마세요. 엄청 무서버요. -.- 그런 의미의 사대천황은 아닙니당...ㅋㅋㅋ

아이리시스 2011-09-19 18:19   좋아요 0 | URL
아아, 루쉰님, 이거 리뷰 아니잖아욧!ㅋㅋㅋ 미인은 모르겠고, 사대천황은 또 바뀔 것 같은데요. 막 루쉰님 머릿속에 순위 매겨진 거 아니에요? 하하하.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일단 저는 루쉰님 보호해줄게요. 그러면 이제 정갈한 글씨로 쓴 메모와 사진을 함께 보내줄래요? 저도 사대천황 시켜줄게요.ㅋㅋㅋ 언제 근무하는 거예요?

알로하 2011-10-12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예쁜 아이리시스님이라고 불러야겠어요.ㅋㅋ29앓이, 겪고 있는 1인으로서 격하게 공감해요! <키스하기 전에~> 이책은 왠지 보다가 말았던 책이네요. <왜 나는 너를~>은 재밌게 읽었는데 이상하게 <키스하기 전에~>는 심심하더라구요. 사랑, 전 이제 스스로가 사랑치에 가깝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들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들도 다 진실은 아니더라구요. 사랑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인생 자체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이 드니까 이게 29앓이의 한 증상인가 싶기도 하고요.

아이리시스 2011-10-12 17:47   좋아요 0 | URL
아아, 그러니까 정말 신기한 우연이게도! 우리 친구란 말이죠?^-^ 그렇구나, 어쩐지! 우리 너무 심하게 앓지는 말고 지나가요. 나중에 이 순간도 추억이 되게요. 제 소원은 사랑치도 좋고 다 좋은데, 제발 별일 없이 잘 지나가는 거예요, 지금이. 꼭 내가 끝날 것만 같은 기분이 아직도 간혹 들어요. 가을 지나고 겨울 오면 더 심해질 지도 모르는데, 알로하님, 힘내요. 우리 힘내자구요. <키스하기 전에~> 저거 잘 안 읽혔어요. 그러니까 보통은 잘 쓰고 다양하게 쓰지만, 이상하게 쭉 잘 읽히는 작가는 아닌 것 같아요.( '')

댈러웨이 2012-11-1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글 안 읽고 사진만 보다가 가요. 또 보러 올거에요. 별에다가 색칠할 거에요.



땡큐.땡큐.땡큐. 오늘 노래 올려줄께요. 페이퍼 쓰고 있는데, 제 방식이 맘에 안들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래요. 하. 심장이 뛰어요. 나 여잔데??? --;

아이리시스 2012-11-14 21:24   좋아요 0 | URL
으히히히 댈러웨이님 이러면 사람들이 누가 ㅎㅎㅎ 썼지, 클릭해서 본단 말이예요(키득키득) 지금도 저렇게 아리따우면 좋겠지만 저 때는 제가 생각해도 아리따웠던 것 같고 지금은 네버! 저렇지 않아요. 별에다가 색칠하지 마요.

앗싸! 그냥 남자해요. 조만간 꽃하고 +@ 해가지고 사들고 저 보러 와요--;;
땡큐. 오늘 노래 잘 들을게요. 댓글이 없으면 안 들은 게 아니라 심취한 걸로..
 

 

 

당파싸움은 조선후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심이 되는 줄기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왕실의 왕위다툼 정도로 인식됐는데 조선후기 들어오면서 공신들의 힘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세력 바람에 따라 당대의 줄기가 이리저리 휘기도 한다. 피바람이 불고 왕이 끌려 내려오고 허수아비 왕이 올라가기도 한다. 고려나 조선전기에 비해 조선후기는, 서민 위주의 정책들이 많고 문화적으로도 한글소설, 판소리, 사설시조 등이 널리 퍼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왕실정치는 그들 중심으로만 돌아갔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을 하루에 몇 번씩 읊으며 조선시대 역사의 맥을 짚어갈 때 나는 알아야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을 분별없이 수용했다. 어느새 야사는 시대의 디테일을 연결시키기 위해 알아야만 하는,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 되어버렸다.

 

 

 

 

 

 

 

 

 

역사는 그를 두고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불운한 세자라 불렀다. 어째서 세자가 다른 곳도 아닌 뒤주에 갇혀 죽어야 했는지 오늘날 그 정도는 상식이다. 놀라운 건 이유를 파헤치고 들어가보면 현 정치상황이 보인다는 것. 지금의 정당정치와 조선후기 당파싸움은 형태가 거의 흡사하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 북학론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으로, 아내 강빈과 정치적 뜻을 함께한 형 소현세자 대신 왕위를 계승한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면서 조선후기 당파싸움이 본격화 된다. 눈을 씻고 봐도 그들의 싸움에 백성이 없다. 우리가 공부하는 역사란 늘 승자 중심, 높은 자 중심, 권력 가진 자 중심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왕권을 누가 계승할 것인가, 실세는 누가 쥐게 되는가, 훗날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등 세 가지로 압축된다.    

그래서 왕실에는 피바람이 일상이다. 실제로 왕권이 강했던 시기는 손에 꼽을 정도고 늘 왕조차 안심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조선역사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고려나 조선전기에는 태종, 세조 같은 찬탈로 왕이 된 이들의 궁궐 내 싸움이었고, 왕권이 그때만큼 강하지 않은 조선후기에는 측근세력들이 활기친다. 오로지 권력과 힘. 두 가지를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지리하다. 효종과 현종 때에는 그나마 덜했다 볼 수 있다. 청과의 싸움에 온 나라가 목매고 있었으니 주전론과 주화론(북학론과 북벌론의 대립)이 팽배했을지언정 내부적 다툼은 덜할 수밖에 없었다. 집밖에 나가 싸워 이기려면 가족끼리 똘똘 뭉치는 수 밖에 없다. 붕당정치가 시작된 시기는 임진왜란 즈음 선조나 양난 이후 광해군 시점부터지만 당시에는 안팎으로 흉흉했기에 당파들은 별 의미가 없었다. 시간이 좀 흘러 인조,효종,현종 때에는 비교적 다양한 세력이 공존할 수 있었다. 북벌 다툼은 있었으나 그 바람은 안이 아니라 바깥을 향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향한 구밀복검(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 속에는 칼을 차고 있음)을 알아챌 수 없었다.    

 

 

 

 

 

 

 

 

 

앞서 선조 때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에 대한 개혁문제로 소극적 기성사림과 적극적 신진사림의 갈등이 발발한다. 훗날 이조전랑직을 계기로 김효원을 주축으로 하는 신진사림(동인)과 심의겸을 주축으로 하는 기성사림(서인)으로 나뉜다. 또한 정여립 모반사건과 정철의 건저의 문제 등으로 동인이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리된다.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또 편먹기는 얼마나 쉬운지 오늘날에 견주어볼 때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참 대단했구나 싶다. 현종 때에는 효종과 효종비의 죽음에 대한 복상 기간과 궁중의례 적용문제로 서인과 남인의 입장차가 생기는데 1차는 서인이 이기고 2차는 남인이 이긴다. 이를 예송논쟁이라 한다. 예송논쟁 후 잠시 남인이 실권을 잡게 된다. 이후 왕권이 바뀌어 숙종이 오를 때까지 북인과 동인,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며 꽤 균형적인 붕당정치가 운영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숙종 때 경신환국을 계기로 판세는 뒤집힌다. 왕위에 오른 숙종이 당시 집권세력인 남인을 신뢰하지 못해 다시 서인을 불러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숙종 때 집권하게 된 서인은 왕위계승 문제로 다투다 다시 (보수)노론과 (진보)소론으로 갈라진다. 기사환국(경종의 왕위계승 문제)으로 잠시 남인에게 실권이 넘어가기도 하지만 장희빈 소생의 경종 다음으로 경종의 배다른 동생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오래도록 집권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평균수명에 비해 유난히 수명이 길었던 영조 재위기간이 50년 이상이었으니 거의 일당독재화 되었던 셈이다. 영조와 노론의 입장이 늘 같았는지는 모르지만 노론의 입김이 워낙 세서 영조 또한 노론의 눈치를 살피는 현실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소생인 영조가 재위기간 내내 왕좌에서 쫓겨날까 불안해한 건 모두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노론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소론과 남인의 편에 섰던 사도세자는 늘 노론의 음해에 시달렸다. 사도세자가 왕좌를 노리기 위해 그랬는지, 정말로 옳은 소리를 내기 위해 그랬는지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자의 뉘앙스는 후자 쪽이다. 사도세자는 철저히 피해자로만 그려진다.  

또한 사도세자는 아내 혜경궁 홍씨가 서인 집안이었기에 장인 홍봉한을 주축으로 한 세력에 늘 견제당했다. 혜경궁 홍씨 또한 지아비가 아닌 가문의 편을 들면서 사도세자는 늘 외로운 싸움을 강행했다. 언제나 가지지 못한 쪽은, 간절한 쪽은 소수인 적이 많다. 영조 또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픈 의지와 욕망이 강한 임금이었기에 노론 못지않게 사도세자의 속마음을 의심했다. 아버지로서의 영조와 이 나라 최고 통치권자의 영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숙종 때 명분 뿐인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다음 왕인 영조도 이어갔지만 서인 중 노론이 거의 모든 정치를 장악하고 있어 사실상 공평하게 힘을 실어주는 붕당정치는 어려웠다.   

 

 

 

 

 

 

 

 

 

사도세자는 그 싸움중 음해와 시기 속에 희생되었다. 사도세자가 소론과 남인의 손을 들 때마다 눈엣가시로 여겼던 현 실세 노론은 강경하게 대처했고 하다못해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과 정신병에 대한 거짓 상고를 올리기까지 한다. 물론 실제 사도세자가 그랬을 수도 있다. 역사의 진실을 100% 알 수는 없지만, 사도세자의 삶이 한 나라의 세자로 위엄있게 살아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왕의 아들이었던 셈. 게다가 아내 혜경궁 홍씨 또한 사도세자의 편이 아니었으므로 일평생 어깨에 짐이 두 개 얹혀진 것처럼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 또한 사도세자의 비행과 정신병이 진짜였다고 보면 논할 의미가 상실되는 게 사실이다. 여하간 세상은 노론의 천하일색이었을 것이다. 견제세력 없는 집권세력의 횡포와 만행쯤이야 쉽게 짐작되고도 남는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 후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정조가 되면서, 노론 강경파 대신 소론과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연민과 노론세력에 대한 견제가 그의 정치 원동력이었다. 어느 정도 붕당교체가 일어나면서 새바람이 불어온다. 이때 등장한 남인 중에 정약용과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같은 인물들이 있다. 정조는 양반 뿐 아니라 그동안 세력에서 배제되어 있던 서얼 출신도 과감히 등용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발굴했다. 정조 집권기에는 비교적 영조 때와 비슷하게 어느 정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정당 또한 균형을 이루기 위해 애썼으며, 보잘 것 없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화성으로 이전하는 등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정조의 최대 딜레마는 아버지를 따르면 어머니가 울고, 어머니를 따르면 아버지가 운다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고민과 시름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 것인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는 현명하다.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을 차차 바로잡아가면서도, 어머니의 가문에 피비린내 나는 복수는 하지 않는다. 그는 연산군은 물론이고 광해군과도 달랐다. 지금도 정조는 조선후기를 통틀어 가장 어진 왕으로 평가된다.(세종대왕도 계시긴 하지만 아버지가 태종인데다 수양대군(세조) 같은 아들을 남겼으니 업적을 벗어나서 보면 돌연변이 왕 같다) 정조가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노론 벽파를 배제하고 그동안 정치에서 배제되어 있던 시파와 남인에게 대거 기회를 주었으므로 정조 집권기에는 노론이 칼을 갈고 있었다. 정조의 죽음 후 할아버지 영조의 계비이자 자신의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정약용 등 관련 인물들은 대부분 유배를 당하면서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몰아친다. 조선후기의 역사는 이와 같이 당파싸움을 빼고나면 남는 게 없다. 외부침입으로 인한 전쟁 같은 걸로 힘빼지 않아도 됐으니 왕위계승다툼 대신 백성들과 국가를 위해 에너지를 썼다면 조선사와 근대사는 물론 현대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 같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배경과 붕당정치의 숲을 생생하게 살려놓은 것이 특징이다. 비교적 사도세자의 편에서 서술했고, 뒤주에서 죽었다는 사도세자의 숨겨진 인생을 되살렸다. 내내 생각했다. 그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영조는 정확히 51년 8개월을 왕위에 있었다. 본인의 컴플렉스로 인한 불안과 자체 욕망도 컸지만, 때문에 더 큰 그림을 볼 줄 모르고 자식을 희생시킨 잘못이 크다. 형이었던 경종 독살설에 대한 의심과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실망이 그의 재위기간 중 업적을 많이 가리는 것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어진 사람이라도 직접 자리에 앉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이 잘나고 어진 왕 하나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나는 사도세자의 백성이 되어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모두가 '예스'라고 외칠 때 '노'라고 말하는 왕이었으니 적어도 욕망으로 꽉 찬 탐욕스런 왕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물론 가설이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왕이 된다는 가설을 세우고 나서도 맘 편할 수 없는 배경들이 많다. 영조의 생명줄이 이토록 길었다면 살아생전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했을지 모르겠다. 당시 노론세력이 굉장했고, 세손 이산이 아버지와 뜻을 같이했다면 설사 사도세자가 왕이 되었다고 해도 그는 물론 세손 또한 안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사도세자와 정조가 당시 노론세력을 완전히 잡고 진정한 탕평책을 공고히 한 채로 역사가 흘렀다면 조선후기의 왕조사는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조가 죽자마자 세도정치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고, 세도정치로 인해 흉흉해진 세상에 흥선대원군이 힘을 행사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문' 보다 '무', '글' 보다 '칼'의 성향을 지녔다는 사도세자니까 조선은 지금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 없지만, 그럴 수 있어서 나는 참 재미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타임머신을 타고 가봤으면 싶기도 하고, 권력이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해낼 수 있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당쟁사>는 한국사 수업을 듣던 교수의 조선후기 당쟁을 공부하기 위한 추천도서,  오세영의 <북벌>은 내 관심도서, 읽은 책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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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 개의 별_카오스와 코스모스
    from 너의 의미 2013-06-27 07:03 
    18세기 조선을, 사화와 붕당을, 숙종과 영조와 정조를, 연암과 다산을 좋아한다. 아마 조선을 통틀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대목일 것이다. 그 복잡한 붕당의 흐름과 권력암투을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있어서는 안될, 없어도 좋을 당파싸움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현대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 또 융합되지 못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무엇보다 이 시대 얘기들은 무궁무진하고 권력구도와 학문, 사상적 일대기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사
 
 
2011-09-12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3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9-13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가설이라고 하지만 사도세자가 왕이 되었으면 한다는 생각은 그리 나쁘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하는 사람이 간신배들에게 쉽게 모략에 빠지고 죽어 나간다는 사실이죠. 독해야 살아 남으니 말이에요.
지금도 정치판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도덕성이라는 뒤주에 갇혀 죽이고 또 다시 세를 나뉘어 너가 옳다 내가 옳다하며 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10.26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곽노현 교육감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발판으로 만들려고 하는 꼼수도 보이니 말입니다. 조선의 당쟁사처럼 권력에 대한 다툼만 있고 민생에 대한 선의 경쟁 따위는 없어진지가 오래죠. 이렇게 쓰다 보니 슬슬 열 받는 것은 사실이네요. ^^ 인간의 권력욕 그 무한한 욕망의 끝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추석 때 정신 없으실 텐데 이런 학구적인 책도 보시고 욕심쟁이 ㅋㅋㅋ

아이리시스 2011-09-14 12:45   좋아요 0 | URL
히히. 루쉰님, 좀 쉬었어요? 수고했어요.^^ 저도 학구적인 사람이 되고싶어요. 방대하고 해박한 예술,문화,역사 블로그 개척이 사실 꿈인데..^^ 저는 천성적으로 루쉰님을 존경하는 루쉰님같지 못해요.ㅠㅠ 그런데 스마트폰 엄청 힘드네요.흑흑. 사도세자는 이름만으로도 아파요. 저는 요즘 네이버블로그해요. 서양미술사 포스팅하는 지인 동생이 있는데 읽고 소화하느라 숙제같아요.ㅋㅋㅋ 너무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경제방송 보고. 가끔 루쉰님 뭐하고 계실까 생각해요. 난 더 학구적인 여자가 될게요. 루쉰님은 자주 오기나 해요! 문제집 리뷰 다음으로 하루키를 보여줄게요.ㅋㅋㅋ 부활은 너무 아까워서 성경처럼 읽고있어요. 혹시 모를까봐서요.^^ 헤브 어 나이스 데이!!!^^
 
[스틸라이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빠의 마을은 고요하고 따스했다. 터미널에서 아빠의 오토바이(스쿠터는 아니다. 자동차에 대해 도통 몰라서 스쿠터와 오토바이의 차이를 모르겠지만 차도 있는데 굳이 오토바이에 셋이 구겨져 타는 이유도 모르겠다. 무서운데ㅠㅠ) 뒤에 올라타고 산고개 하나를 넘으면(좀 길고 구불구불하다) 아주 작은 마을에 들어서는데, 우물가 옆 샛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빨간 지붕의 파란 대문집이 나온다. 오토바이로 산길을 넘는 일이 그렇게 신나는 일인지 몰랐었다. 모두들 왜 그렇게 타지 말라는 오토바이를 타다 죽어가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양동이 포함(가보기도 전에 양동이는 사라졌지만) 여섯 마리의 애기들이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마중 나오고, 앞집은 옛집인데 오래도록 비어있어 들풀이 허리까지 자랐다. 덕분에 풀벌레들도 많다.  

뒷집에는 아주아주 마음씨 좋고 인자하신 할아버지,할머니와 소가 산다. 할아버지,할머니의 뒷집도 비었지만 거긴 주인이 종종 와서 정리하는 것 같다. 아빠는 마을의 외딴 집을 선호했지만 당시 주어진 돈으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부동산에 나와있는 농가주택은 가격이 낮다 싶으면 리모델링을 해야 했고, 가격이 높은 매물은 차라리 그 돈으로 원하는 장소에 새 집을 짓는 게 나을 정도였다. 갈 수 있는 동네의 부동산을 모조리 훑었지만 이미 오를 만큼 오른 시골집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허물어져 금방 스러져갈 듯한 집이라도 집은 집이었다. 어쨌든 아빠는 잠시 쉬어갈 집으로 빨간 지붕의 파란 대문집을 택했고, 전원주택을 향한 꿈은 시작되었다.  

 

읽는 내내 캐나다 퀘백 주의 작은 외딴 마을 스리 파인스가 그런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골에 친가와 외가를 모두 두고있어, 시골마을과 동떨어지지 않은 인생을 산 도시사람이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평생 몇백 번 왔다갔다 했을 친가와 외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친가와 외가는 도시사람인 내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 전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 이사한 아빠의 마을 할머니 몇몇은 친절하고 따스했으며, 옆집에는 베트남 여자와 결혼했었지만 정신이상 증세로 부모와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다, 부인은 제 나라로 도망치고 할아버지가 아들의 아이를 키우며 다른 곳에 산다는 30대 후반의 남자가 혼자 산다. 대화 나누면 멀쩡해 보이는데 멀쩡하지가 않단다. 자식을 안되게 여긴 아버지가 집, 밭, 논을 어느 정도 물려주고 다른 곳으로 가셨다는데 남자는 온전치 못해 밭과 논을 하염없이 놀리다보니 잡초와 풀이 키만큼 자라있다. 이 동네 땅값이 다른 곳에 비해 비쌌으면 비쌌지 농가치고 싼 게 아니라서 아빠가 안타까워 하실 정도다. 집에 있으면 아침,저녁으로 헛소리와 욕을 해댄다. 궁시렁궁시렁. 아빠가 이사온 첫날, 뒷집 할머니는 동네 토박이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 하셨다. 어느새 아빠뿐 아니라 엄마와 동생과 나까지 그렇게 되었다. 그럼,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니까.  

지금은 아빠가 계시고, 훗날 양동이가 빨간 지붕과 파란 대문집을 나섰다 실종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만 빼면 인생에서 별 의미없는 집일지도 모르겠다. [스틸 라이프] 속에 등장하는 스리 파인스를 만나면서 아빠의 마을이 자꾸만 생각났다. 고요하고 조용하고 쓸쓸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정답고 왁자지껄하기도 한 마을이. 이 소설은 들여다보기의 지존이다. 조각퍼즐을 맞춰가는 생생한 방식은 마을을 두렵게 느끼기 보다는 마을 사람이 되어 진실을 파헤치고 싶은 충동에 다가가게 한다.

 

아빠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마을에는 언제부턴가 토박이보다 외지인이 많아졌다고 한다. 양동이를 찾을 때 작은 마을을 모두 훑다시피 했는데 비어있는 집이 훨씬 많았다. 번듯하게 지어놓은 전원주택은 어김없이 사람이 없거나 진돗개 한 마리가 지켰다. 외지인 중에서도 더 외지인이랄 수 있는 내 눈엔 그 광경이 스리 파인스와 겹쳐 보인다. 알고 싶고, 캐묻고 싶고, 녹아들고 싶고, 상관하고 싶다.  

이처럼 짙은 낙엽향과 달콤한 빵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평온한 마을 스리 파인스에서 가장 다정하고 친절한 심성을 지닌 제인 할머니가 숲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가마슈 경감은 사건해결을 위해 후배형사 보부아르와 니콜을 데리고 마을로 온다. 사인을 가늠할 수 없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을 사람들을 신문하지만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에게 선량했던 제인이 살해당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혼란스럽다. 빛이 들지 않아 마약류 열매가 재배되고, 야생동물 사냥꾼들이 소리소문 없이 드나들기도 하는 스리 파인스에서 누군가 죽었다면, 그건 실수로 쏜 사냥용 활이나 총에 맞는 것뿐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의 깊은 갈색 눈에 그녀의 적갈색 점이 있는 갈색 손에 머물렀다. 정원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해서 거칠고 햇볕에 탄 손. 손가락에는 반지도 없었고, 반지를 낀 흔적도 없었다. 그는 갓 죽은 사람의 손을 볼 때면 언제나 아픔을 느꼈다. 그 손이 잡았을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상상이 되는 것이다. 음식, 얼굴들, 문손잡이들, 기쁨이나 슬픔을 표하기 위해 취했을 온갖 손짓. 그리고 마지막 손짓은 틀림없이 자신을 죽인 그 타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건 자기 눈을 가리는 흰머리를 무심결에 쓸어내 본 적이 없을 젊은이들의 손이었다. (p.54)   
   

  

마을을 둘러싼 신비롭고 쓸쓸한 공기는 의도되었다. 죽음을 두고 분노 대신 애처로움을 쓰는 것 또한 작가의 필력이다. 화가 부부 클라라와 피터, 피터의 친한 친구 벤, 심상찮은 분위기를 풍기는 크로프트 가족 등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절대적이면서도 범인이 마을 안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노련미와 세련미를 두루 갖춘 가마슈 경감은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조심스럽게 마을로 녹아드는 방법을 선택한다. 수사의 기본적 핵심인 신문과 마을회의를 통해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과 행동을 살핀다. 오랜 관찰은 마침내 숨겨져 있던 사실을 하나둘씩 끄집어낸다. 마침 제인은 미술 전시회에 그림 한 점을 출품할 예정이었고, 그림은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면서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제인의 의중과, 집안에 사람을 초대하더라도 일정공간 이상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 미스터리로 남는다. 이어 집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조카의 태도와 벤의 어머니이자 오랫동안 병상에 있다 세상을 떠난 티머 해들리의 죽음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삶을 헤쳐 나가지 못하는 그들에게 온갖 변명거리를 제공해주잖아요?" (p.205)  
   

 

   
  "제가 알기로는 스리 파인스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저 사슴길은 우리 가운데 누군가 곪고 있음을 뜻해요. 제인을 쏜 사람은 자기가 사람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걸 사냥 사고로 보이게 하고 싶어했어요. 사슴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제인을 실수로 쏜 것인 양. 그런데 문제는 활을 쏘려면 아주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겨누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요." (pp.224-225)   
   

 

마을 사람들은 각자 최대한 자신의 비밀과 싸운다. 들키기 싫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나 그것들 중 단서로 집어낼 만 한 게 거의 불확실하다는 사실이 문제다. 정황에 의해 살인사건으로 밝혀진 제인의 죽음이 고요한 마을을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수사는 다시 원점에서, 제인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어째서 집을 숨겨야 했을까. 왜 그림을 이제서야 보여주려고 했을까. 집과 그림. 제인이 추수감사절 박람회 날에 그렸다는 그림 <박람의 날>로 시선을 옮기자 쓸만한 단서들이 우루루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림은 아주아주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마을 사람들 중 가장 먼저 클라라가 그림의 비밀을 눈치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싸워온 진실을 향한 열망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살인의 방식과 이유가 궁금한 거라면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보다 덜 자극적이면서도 내밀한 그림 한 편을 영상처럼 감상하는 방법으론 안성맞춤이다.  

퍼즐은 내가 맞추는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퍼즐이 되어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있어주는 것. 그게 바로 열쇠다. 제인이 죽어간 이유. 제인이 죽은 이유. 제인을 죽인 이유는 사소하다. 범인에게는 필사적이었지만 당사자로서는 아주 미묘한 이유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죽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범인은 진실을 가리고 싶었다. 그래서 한 일이 오히려 또렷하게 진실을 엿보여주는 꼴이 되었다. 진실을 뒤집으면 거짓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을 뒤집어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마치 하트 퀸 카드처럼.  

   
  "아무것도요. 어쩌면 제가 바뀌었겠죠. 그게 가능할까요? 제인의 하트 퀸 카드 트릭처럼 그림도 변하는 게 가능할까요? 사실 저도 작품이 끝난 날 밤에 보면 그게 위대한 작품 같아 보이지만 다음 날 아침에 보면 쓰레기 같거든요. 작품은 그대로인데 제가 변한 거죠. 어쩌면 제인의 죽음 때문에 제가 너무 변해서 전에 이 그림에서 보았던 뭔가를 지금은 보지 못하는 거겠죠. (pp.401-402) 
 
   


 
사실 이 작품이 가르친 건 살인과 광기, 탐욕과 도덕 같은 것이 아니라 인내와 관찰이다. 1000피스짜리 그림퍼즐을 맞추는 데에 드는 노력과 시간을 인내와 관찰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하면 꽤 그럴싸한 작품이 된다. 겪어본 사람만 아는 고통이 따를 것이고, 패배를 맛볼 수도 있듯이. 가마슈 경감이 가르친 것 또한,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한사코 숨기려 한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 드러내 보인 것이 중요한 것을 감추어줄 수도 있고, 숨기려고 애쓰다 결국 숨기려 한 것만 들통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은 인내와 관찰 앞에 모두 무너진다는 것. 하지만 사람들은 나아가려고만 하지 인내와 관찰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결말을 향해 치닫는 건 영화에서나 멋지면 그만이다. 실제 삶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 이상이다.  

   
 

"그때 한 가지 인성 유형에 대해 설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정체된' 삶을 사는 사람들 말이죠. 기억나십니까?" 

"예, 기억나요. 성장하지 않는, 발전하지 않는 사람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사람들이죠. 좀체 나아지지 않는 사람들."  

"예, 바로 그거였습니다." 가마슈가 말했다.   

"그들은 자기 인생이 진행되기를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누군가 그들을 구원해 주길 기다려요. 치유해 주길 기다리지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 (p.445) 

 
   

 

뭔가 해야겠다. 여름과 잘 이별하고 다가올 가을을 잘 맞이하는 일이라도 해야겠다. '정체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우린 이다지도 힘겹게 움직이는 것일까. 신나게 칠하던 그림을 완성한 후 붓을 내려놓으니 시원함보다 허탈감이 먼저 든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때면 언제나 쓸쓸해진다. 이 소설처럼. 제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로 인해 이 모든 것을 배웠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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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8-24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이 자그마치 다섯 개!! 가마슈 경감 시리즈가 있다는 건 어디서 들었는데, 읽어본 적은 없어요. 이 참에 한 번 빌려서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저는 뭔가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면서 방학 다 보낸 것 같아요. 이제 개강하면 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죠. 시간표를 아주 꽉꽉 채웠거든요. 좀 걱정되긴 하네요. ( '')~

아이리시스 2011-08-24 21:44   좋아요 0 | URL
자극적인 거 싫어하잖아요, 모두들. 저는 자극적인 걸 좋아하긴 하는 편인데 취향이 좀 변했나봐요. 잔잔하고 잔혹하지 않은 [스틸 라이프]가 괜찮았어요. 예쁜 색칠을 하고 났으니 기지개 켜고 공부 좀 할까요, 이제? 수다쟁이님. 눈 코 뜰새 없이 바빠지는 거 그리워요. 대학 때 저는 그렇게 치열하진 않았던 것 같거든요. 학교가 멀었는데 왔다갔다 하는 것만으로 지쳐서 쓰러지곤 했어요. 맘은 늘 밤새 책을 읽고 고민하고 세상을 보고 싶었는데요. 글도 쓰면서. 저는 늘 제가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을 지도 몰라요. 치열한 건 예쁘고 소중한 거예요. 해야 하는데 하면서 보내는 방학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다른 것도 해봐요, 더 늦기 전에요. 알았죠?^^

2011-08-24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4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4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8-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에 의하면 이 소설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아이리시스님도 별이 다섯 개군요.
근데 전 왠지 읽을 자신이 없네요.
아, 나라는 인간은 기계에서도 점점 멀어지고,
그 좋다는 소설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ㅠㅠ

아이리시스 2011-08-25 19:46   좋아요 0 | URL
네, 스텔라님 별 다섯 개예요. 그런데 저는 별점에 후한 편이고 사실 최근 읽는 책 중에서 제 기준으로 평가해요. 또 꼭 읽고 싶은 것만 읽다보면 엄청 실망하는 적이 없어요. 누구나 한 번씩 소설에 대한 정체기가 있잖아요. 뭘 읽어도 재미없고 싱겁게 느껴지는..... 지금 스텔라님이 그런 건지도 몰라요.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막상 읽으면 감흥 안가는 단계를 몇 번 겪고나면 읽고싶은 마음마저 사라져요. 기계는 얼른 적응하시고, 소설 대신 영화 보시는 건 어때요? 스텔라님 영화리뷰 좋은데............^^

stella.K 2011-08-25 21:15   좋아요 0 | URL
헙, 정말요!
저 귀가 얇아서 그말 믿습니다.룰루라라~!ㅎ

아이리시스 2011-08-25 22:22   좋아요 0 | URL
그럼 많이 써주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어의 노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어의 노래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8-1 프로파일러 토니 힐 시리즈 1
발 맥더미드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그럼요. 그녀의 동기는 살인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배신해서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원한 건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 같이 살 수 있는 남자라고 자기 자신에게 계속 말했죠." (p.477)

  

사람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이유에 관해 생각해봤다. 아, 일단 '고통스럽게'는 빼고 말하자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남는다. 엄청난 장르소설과 범죄시리즈, 공포,호러,스릴러 영화의 단골 소재가 바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과 이유'에 관한 것인데 이 원초적이고 신랄한 이유를 내가 과연 대답할 수 있을까. 할 수도 없고 그러기도 싫다. 그래서 스릴러 소설을 읽는 지도 모르겠다.

계획적인 살인은 보통 단계를 거친다. 인격적 존중을 받지 못한 아이가 자라면서 그 사실이 트라우마가 되고, 상처로 인한 결핍이 타인에 대한 반항이나 광기로 나타나고, 그로인해 당한 만큼 갚아주자는 생각이 깊숙이 자리하고, 마침내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죽인 다음 그 행위가 타당하다고 자인하는 것. 그쯤이면 대충 사이코패스의 살인사건 하나가 발생하는데에 큰 무리가 없다. 문제는 비정상적인 행위를 추측,해결,단죄하기 위해 범인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형사뿐 아니라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야 할만큼 연쇄 살인범의 수법이 교묘하고 잔인해진다는 것이다.

이미 [Wire in the Blood]라는 시리즈로 인기리에 방영되기도 했던 토니 힐 시리즈는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들 중 범죄양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으로 범인의 심리상태에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통해 사건을 추리해서 범인을 잡는데에 일조하는 프로파일러가 주인공이다. 토니는 남자, 동맹자인 형사 캐롤은 여자. 물론 기존 스토리가 보여주는 로맨스를 살짝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두고 있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경찰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속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 소화불량처럼 배가 따끔따끔하게 뭉쳤다. 뭔가 사악하고 극적인 일을, 저들에게 자기들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p.391)   
   

 

게이들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몇 군데 장소에서 잔인하게 고문당한 끔찍한 모습의 사체가 차례로 발견되면서 토니는 사건해결을 위한 특수팀으로 발령받는다. 그는 끔찍한 사건특징들을 통해 연쇄살인범으로 추정하고 캐롤과 함께 수사를 시작한다. 둘의 동맹자적 관계가 아마도 범죄의 단서를 찾고 또 연쇄살인범을 찾아내는 중요한 소통점일 것이다. 제 아무리 잘난 전문가라도 혼자서는 비정상적인 범인의 동선을 파악하기 힘들다. 함께 일하며 그들은 서로의 필요성과 각자 할 일들을 잘 분담해간다.

   
  "그러나 때로 우리 프로파일러는 사물을 다르게 봅니다. 그리고 그 신선한 시각이 모든 다름을 만들어 내지요. 죽은 사람은 말을 합니다. 우리 프로파일러에게 말을 하는 죽은 사람들은 경찰들에게 말을 하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p.22)   
   

 

   
  "당신과 저 둘 다, 함께 있으면, 우린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프로파일링에 처음 직접적으로 입문한 건은 연쇄방화범이었습니다. 대여섯 건의 대형 화재 끝에 전 그가 어떻게 범행을 저지르는지, 왜 저지르는지, 그의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게 됐지요. 그라는 미치광이를 정확히 알게 됐지만, 그에게 이름을 붙인다든지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죠. 그러나 저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제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건 당신이 할 일이었던 겁니다. 제가 할 일은 올바른 방향으로 당신을 이끌어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p.98)   
   

 

사방으로 뛰는 경찰들과 토니의 프로파일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사체는 다시 발견되고, 토니와 캐롤은 각자의 역할과 직업적 고통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점점 가까워진다. 서로에 대한 호감이 바탕에 깔린 직업적 동맹관계다. 작업중 토니의 방에 함께 있을 때 걸려온 정체불명의 여자 전화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충분히 빠져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캐롤은 그에게 충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토니의 비밀은 어쩔 수 없이 캐롤을 밀어내지만 그 또한 캐롤과 다르지 않은 마음이다. 각자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직업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누구보다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둘 다 그렇죠. 최고의 도둑을 잡는 형사는 악당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잖아요. 제가 일을 잘 하려면 나쁜 놈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죠. 그렇다고 그들이 하는 짓을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예요." (p.276)   
   

 

언론으로 흘러드는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에 당국은 비상이 걸리고, 토니의 프로파일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점점 미궁으로 빠질때즈음, 토니가 사라진다. 캐롤은 불길한 낌새를 눈치채고 사건파일을 들여다보며 더 큰 그림을 그려낸다. 토니의 방에서 비로소 단서를 발견한 그녀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토니는 엄청난 상황에 처해있었다.  

게이들이 모이는 장소에 버려졌던, 자신이 게이라는 걸 밝히기 싫었던 이들의 사체는 범인에 대한 충분한 단서였음에도 웬만한 프로파일에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토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가두자, 그 사실을 언론으로 접한 살인마는 자신의 범죄행각이 모욕 받았다고 생각해 오랫동안 토니를 노려온 것으로 판명난다. 자신 또한 끔찍한 고문을 당했을 지도 모르는 희생자가 될 뻔했지만, 프로파일의 핵심이자 자신의 장기인 차분한 대화를 통해 범인 핸디 앤디를 무장해제 시킨다.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살아돌아온 그는 핸디 앤디에 대한 마지막 프로파일과 진실에 대한 해명을 준비한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제가 이 시포드 출신의 크리스토퍼 소프를 압니다. 여기 오기 전 시포드에서 성범죄과 소속이었잖아요. 기억나세요? 이 매춘 두 건 다 제가 체포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소프는 당시 성전환 수술을 한창 하던 중이었어요. 젖꼭지랑 이런 게 다 있었고, 수술을 마저 받기 위해서 돈을 모으려고 하고 있었어요. 매춘할 때 이름이 뭐였는지 아세요? 경위님, 크리스토퍼 소프는 안젤리카 소프랑 결혼한 게 아닙니다. 그가 바로 안젤리카 소프예요." (p.444)   
   

 

이미 벌어진 사건을 두고, 한 인간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왜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차곡차곡 따라가보는 일로서 범인을 잡아들이고 죽은 자의 비밀을 풀어내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다. 토니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직업적 지식을 잘 활용해 사건을 푼 셈이고, 연쇄 살인범의 목표물을 그 분야에서 가장 전문적인 프로파일러로 설정한 점은 긴장과 두려움을 높여주는 장치가 되었다. 토니 힐 시리즈는 연쇄 살인범의 잔인한 고문일지를 빼고는 이 작품을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범죄현장이 생생하다. 독자는 경찰과 프로파일러를 따라 좇아가는 한편, 불행한 연쇄 살인범의 범행현장을 목격하듯이 그의 독백을 통해 찬찬히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에 언젠가 끔찍한 경험을 당한 기억이 드문드문 나겠지만 토니는 이 일로 인해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한층 벗어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때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어야 하는 일을 만들기도 한다. 토니가 당한 납치는 아무리 전문적인 사람이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지는 않다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깨닫게 한다. 핸디 앤디의 끔찍한 고문전략과 범죄일기는 어떤 이유로든 용서받을 수 없다. 행여 그가 이 모든 사건들을 한 번쯤 경험해본 피해자였다 해도. 그렇더라도 이 작품의 출발점은 사랑과 존재다. 사랑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한 인간의 광기와 분노가 발생하는 지점은 결국 결핍이고, 그에 대한 가장 큰 영향력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당신은 날 원했고, 이제 날 가졌어."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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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8-2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결핍의 반대말은 소통인 듯 하죠.
저도 이 책을 읽었는데...전, 쫌 힘들었어요~ㅠ.ㅠ

아이리시스 2011-08-23 14:15   좋아요 0 | URL
아아악, 이거 써서 그런가봐요. 체했어요. 아파요.ㅠㅠ
너무 적나라한 고문묘사 땜에요, 아님 지루해서? 제가 프로파일러가 나오는 미드를 종종 봤는데 [멘탈리스트]도 그렇고 [크리미널 마인드]도 그렇고 비슷한 것 같아요. 책은 별로 본 적이 없.. 흑흑. [wire in the blood]는 못 봤지만 프로파일 방식은 다 비슷한 것 같아서 이 시리즈가 쭉 이렇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차별화된 건 고문일지 뿐인 것 같아요.

나무꾼님, 장르소설 리뷰 어쩜 그렇게 잘쓰시는 거예요? 이거 해보니까 정말 장난 아니에요. 결국 줄거리 나열하고 있잖아요, 저. 이번에는 둘 다 장르소설이어서 한 권은 [스틸라이프]인데, 나무꾼님이 벌써 보신 거. 책 다 읽고나면 리뷰 다시 읽어봐야죠. 호호. 오전 아니 점심 때 보니 더 반가워요!

마녀고양이 2011-08-2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가 상담 전공이잖아요, 가끔 앞으로 분야를 무엇을 정하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프로파일러> 또는 <범죄심리학> 전공은 다들, 수업 한번 듣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요. ㅠㅠ.
책으로 읽는 것과 실전은 영 다른거 같더라구요, 진짜 벌어진 일들을 읽고 있으면 구역질도 나요.
저는 <한국의 연쇄살인범>이라는 책을 읽고 아주 기겁했어요... ^^

그럼에도 장르 소설을 엄청 좋아하니 모순이죠, 아마 장르 소설의 경우, 사람이 아닌 목적물, 사물로 치부하나봐요.
그냥 퍼즐만 보는거죠, 내 뒤통수를 치냐 아니냐 등의.

그리고.......... 인정하기 싫고 무섭기도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유전적 요인도 무시못한다는 의견이 많아요.
환경으로 완전하게 바로잡지 못 하고, 꼭 살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나타날지 모른다는. 그런 경우는
환경 열악으로 범죄자가 되는 사람과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고 배웠네요. 무거운 주제예요, 정말. ㅠㅠ

아이리시스 2011-08-24 11:15   좋아요 0 | URL
아까 신창원이 자살기도 전날 어떤 여자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읽었어요. 죄를 미워해야 할지 사람을 미워해야 할지 그런 딜레마에 빠지는거죠. 내가 피해당사자이거나 유족이라면 그럴 수 없겠지만 아니라고 믿고 사니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나 봐요.

아.... 저 봄에 형소법 강의 듣는데 변사자 검시 부분에서 끔찍한 사체에 관한 예를 여러차례 들었어요. 실제 사건을 대하는 것과 소설을 대하는 것에는 분명 마음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느껴졌어요. 저는 겁이 많은 편이지만, 공포영화나 스릴러,범죄물 보면서 두렵거나 끔찍해하지는 않거든요. 만약 그렇다해도 그냥 소설에 이런 게 있구나 정도지 현실로 연결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두려울 필요가 없는 거겠죠.

마고님 말씀처럼 끔찍한 현장사진만 보여줘도 보통의 일반사람들은 모두 구역질하거나 토하거나 고개를 돌린대요. 호기심과 관심과 실전은 분명 다른 거죠. 사이코패스는 유전적 요인도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살인사건이나 범죄자를 대할 때 환경만 가지고 탓하는 일반인들의 시선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에따라 해결방법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어요? 마고님 덕분에 저 책 급관심이 가요. 소설은 소설이고 이론은 이론이다,라는 말이 딱 제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나는 밖에서는 배우지만 집에서는 그냥 딸이다,와 같은.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드라마나 장르소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로파일러들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요.
중학교 아이들 중에도 장래 희망 직업이 프로파일러인 아이들도 봤구요.

이 사회 모든 문제들, 혹은 역사 속 모든 일들은 결국 소통의 문제인 것 같아요. 가장 어려운 문제인 것도 같구요. 제 생활만 봐도 소통이 잘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곤 하니까요. 그래도 가장 치명적인 건 저렇게 어렸을 적 소통의 부재가 트라우마가 되는 경우죠. 부모로서, 항상 그런 부분이 신경 쓰여요.

그런데 아이리시스님은 이런 소설 읽으면 밤에 잠 잘 주무세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1-08-24 11:43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소설의 나름 반전인데, 여기서 프로파일러가 잡혀가요.ㅠㅠ

저는 읽고나서 까먹나 봐요. 일단 문단속을 다시 하고 잠은 잘자요. 제가 원래 잠은 되게 잘자요. 실제 일이 아니고 그냥 소설일 뿐이라고 생각해버리나 봐요.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잠은 잘자고. 하여튼 저 좀 이상한 것 같아요.ㅋㅋㅋㅋㅋ

그런데 엄마 입장에서 보는 거랑은 확실히 다를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걸 며칠동안 헤매고 다녀도 양동이를 못 찾았을 때 느꼈어요.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나뿐일 경우 세상은 별로 두렵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범죄자들의 환경 또한 무시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슬픈 걸 대하기 싫은 현맘 님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되고, 이해하면서도 저는 무서운 걸 즐기고, 밤에는 문단속에 목을 매고 그러나 봐요. 아이러니 해요. 여름 뿐이지 저 또한 가을에도 장르소설을 읽지는 못할 것 같아요.ㅠㅠ 그냥 트릭 써서 범인 밝혀내는 정도의 가벼움이 좋아요. 학문으로 공부해보고 싶은 적이 저도 몇 번 있지만 그러기에 저는 비위도 약하고, 겁도 많아요.
 

 

 

중학교 때다. 조별로 돌아가며 하는 발표수업. 전지에 시해석을 해서 조장이 발표하는 국어시간. 그날 발표자는 나였다. 남 앞에서 떠드는 건 딱 질색이지만 자의든 타의든 조장이 되었고 반드시 발표를 해야 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또 막상 닥치면 떨지는 않는 편이라서 좋든 싫든 멍석 깔아주면 곧잘 했는데 그날은 선생님께 된통 혼이 났다. 읽지 말고 다 알아듣도록 설명하듯이 하란 말이야. 나는 다시 했다. 거기부터 다시. 나는 또다시 했다. 몇번 실랑이가 반복된 끝에 짜증이 났다. 그러자, 아아, 안 되겠다. 다음 시간까지 더 보충하고 연습해서 다시 하자. 에잇, 그럴꺼면 자기가 하든지. 내가 선생이야? 짜증이 왈칵 솟고 쪽팔림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나는 그냥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는 [청포도]였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지금은 배경지식이 널널하니까 이 시에 대해 혼자서 세 시간도 떠들 수 있지만 중3 때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다 내용보다 발표력에 더 문제가 있었으니 그날 이후 나는 혼자 읽고 또 읽고, 설명하고 또 설명하면서 다음 국어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발표를 끝냈을 때, 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선생님 해도 잘 하겠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흠, 그렇게 잘 했나?ㅋㅋㅋ 앞시간의 쪽팔림을 만회한 건 뛸듯이 기뻤지만 선생님이라니 세상에, 나는 전혀, 네버!!! 선생님 할 생각이 없다고!!! 쳇!!! 흥!!!  

하지만 나는 종종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낭송을 하지는 못했다. 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슴 뛰는 일이었다. 시대를 빼고도 흰색과 푸른색의 시각적 대비, 알알이 열린 청포도 같은 행의 풍성함이 청량하고 따뜻한 기운을 주는 시다. 예쁘고 아름답다. 청포도라니, 청포도. 꺄악!!! 3=3=3=3=3=3 나는 청포도맛 사탕을 엄청 좋아한다.

 

 

그것도 최근엔 영 드문드문, 잊고 있었던 이 시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준 건 어제 방영한 김동완이 이육사 역할로 열연한 광복절 특집 드라마 [절정].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그가 이토록 격렬한 독립운동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시인은 책상에서 글만 다루는 줄 알았지 총을 들고 싸우기도 하고, 옥중에서 고문을 감내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역사 속에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글과 시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진 시대였음에도 내게는 무지한 면이 있었다. 

드라마를 첨부터 본 건 아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자유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안락함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의 절절한 고민과 방황이 드러났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지만 자식의 죽음소식 앞에서도 울음과 함께 밥을 삼키고 하나밖에 없는 여인을 두고 떠날 때에도 뼈저리는 눈물을 참을 줄 알았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고 그 이름을 통해 자신의 목숨과 미래를 부지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뒤에서 눈물을 삼킬지언정 앞에서는 당당하고 진중한 남자로 남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훌륭한 독립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자신의 목숨과 피와 눈물을 조국 앞에 바쳤다. 

자신들을 좇는 친일파 일당을 쏠 기회가 있었건만 그는 한 번 망설이고 두 번 망설이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동지를 잃는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오래도록 시를 쓰자 했고 누군가는 폐병을 앓는 자신에게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 소리쳤지만 그는 순응하지 않았다. 후반 그의 인생은 늘 쫓고 쫓기고 잡혀가고 고문 당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로인해 얻은 폐병은 동지들에게조차 버림받을 위기에 처하고 스스로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자신의 꿈을 지키려 최선을 다한다.    

 

 

 

 

 

 

 

  

 

핍박받던 시절, 한순간 사랑해주고 일평생 떠나버리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란 어떨까. 여인에게도 분노와 열정은 있는 법. 그녀에게도 세상은 바꾸고 싶은 대상이었고, 그녀 안에도 자유를 갖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을 것이란 점은 두말할 필요 없다. 하지만 여인이란 어떤 존재던가. 남자의 기둥, 남자의 쉼터, 남자의 보금자리 아니던가. 여자는 오래도록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떠나버린 남자의 빈자리를 지키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혼자 그의 아이를 낳고, 투정부리는 아이 입안에 밥을 넣어주고, 아프면 들쳐업고 한달음에 의원으로 뛰어가 동동거린다. 그렇게 한순간의 폭풍같은 일상이 지나면 기약없던 남자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온다. 새처럼 자유로운 비상을 시도했다 절망과 체념의 상처로 지쳐 돌아온 남자에게 그녀는 그까짓 일상의 고단함을 단 한톨도 토로할 수가 없다. 없어서 또다시 검은 울음을 삼킨다. 붉은 투지를 불태운다. 살아야 한다고.

이번에는 오래일까 기대와 불안에 휩싸이면 남자는 다시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다. 인사만 없는 게 아니라 기약도 없다. 떠남을 알지만 기약이 없어 붙잡지도 애원하지도 못한다. 잠든 척 울먹인다. 애원할 때도 있었다. 고문을 견뎌내고 석방돼 돌아온 남편을 잠시나마 돌보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그와의 시간 전부였다. 조심스럽게 둘의 미래를 꿈꾸자면 남자는 제 작은 가슴 안의 터질 듯한 열망으로 미쳐버릴 듯하다. 그녀와 같은 행복을 꿈꾸지만 조국의 독립이라는 자유에 대한 열망 또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열병으로 아이를 잃고나도 남자는 멈출 줄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원동력이 된다. 그는 피와 울음으로 꾸역꾸역 밥을 삼킬 뿐이다. 여자는 안다. 남편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떠나는 발걸음은 물론이고 그의 안에 든 열망과 분노, 욕망 또한 자신이 붙잡아 매어둘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 그는 북경에 있는 감옥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죽을 때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길 거부했고 죽기 직전 옥중에서 피로 시를 썼다. 인생 대부분이 그랬듯 완강하고 고고하게.  

 

시를 읽는다.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맞다. 이 때에도 나는 아무도 모르게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온다는 초인을 기다렸었다. 목놓아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나는 기다렸다, 오랫동안, 간절하게. 산맥과 산맥을 넘어 들판에서 들판으로 또 하늘로 세상으로 막 날아오르는 듯한 이 시가 나는 좋았다. 씩씩해서 좋았다. 울컥해서 좋았다. 기다림이 즐거울 것 같았다. 씨를 뿌리고 싶었다. 그랬었다. 하지만 정말 좋았던 시는 이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바로 이 시다. 

 
 
 
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하는 행에선 특히 손에 잡힐 듯한 절묘한 묘사력에 전율이 일어난다. 그의 절정도 이 시를 쓸 때였을까. 그렇다면 무엇의 절정이었을까. 이 시에는 분노와 절망으로 얼룩진 패배감에 몸서리치는 남자의 모습이 절절하기만 한데. 물론 모든 것을 간단히 눌러버리는 불타는 투지도 함께 읽힌다. 우리가 절정이라 부르는 것들은 보통 아주아주 행복할 때가 아니던가. 그에게 있어 절정이란 분노와 슬픔의 최고조였단 말인가. 아아, 다 이해할 수 없겠다. 다 이해할 수 없다고만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이렇게 말해도 내가 뭘 얼마나 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슬픔, 분노, 절망, 패배, 아픔, 가슴벅참, 미래, 희망, 꿈에 대해서.  

어제는 66주년 광복절이었다, 교과과정에 버젓이 한국사가 있음에도 삼일운동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는데 광복절 또한 어린 세대에게 그저 그런 쉬는 날 이상은 아닐 듯. 또한 광복은 좋은 일이지만 누군가의 식민지였다 풀려난 날을 66주년이나 기념한다니, 썩 유쾌하진 않다. 하지만 잊을 수도 없다. 잊어서는 안 된다. 광복이라는 이름을 우리가 어떻게 얻어냈는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도 칭찬 일색, 내용 또한 흠잡을 데 없다. 나는 기념일 특집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지만(진부하다고 생각함) [절정]의 몰입도는 최고였다. 엄마가 거실 컴퓨터로 조용필 노래를 듣고 맞고를 치는 와중에도 나는 꿋꿋이 볼륨을 높여가며 봤다.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함께 고민했고 그의 결단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에는 그가 사랑한 단 한 명의 여인처럼 기다렸다. 그가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 때에 나는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고 그의 고통에는 함께 아팠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독립투사들은 역사 속에 셀 수 없을만큼 많다. 그중엔 잊혀진 이도 있고 기억되는 이도 있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그들의 지난하고 붉었던 삶을 기억해줘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누구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다. 운좋게 그들이 꾸려놓은 세상에 들어와 내가 만든 세상인양 잘 살고 있지만 조금만 빗나갔으면 내가 겪을 수도 있었던 내 인생이다. 소리내어 그의 시를 읽는다. 절정에서 꽃은 꺾인다는 진리를 곱씹으면서.  

 

 

 

 

 

 

 

 

 

+ 김동완은 더 멋있어졌다. 에릭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이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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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8-16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 내내 생리통으로 뒹구느라 TV를 못 봤는데, '절정'... VOD가 올라오면 꼭 봐야겠어요. 그런데 김동완이라면... 예전에 아이돌 그룹 가수였죠? 요새는 연기를 하나 보네요?

아이리시스 2011-08-16 12:23   좋아요 0 | URL
제가 TV를 보면서 썼더니 오타에 비문장 천지인데 조선인님이 계셨군요. 되는데로 고쳤어요. 드라마 괜찮았어요. 김동완은 예전에도 연기를 했었는데 크게 빛을 보진 못했죠. 키가 좀 컸으면 좋았을텐데 그게 좀 아쉬워요. 어제보니 연기는 물이 오른 것 같았는데, 전역하고 처음이니까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1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봤어야 했어요.
그 끈적끈적 비오는 캠핑장에 있지 말고..ㅠㅠ
저 잘 다녀왔어요. 정말 이제는 노는거 끝이예요. 여행다니는게 이렇게 지겨웠던 적이 없네요.
집에 돌아와보니 일년에 한 번 있는 광복절날 태극기도 안 달고 놀러갔었다는게 좀 기분 안좋았어요.
애국자는 아니지만...ㅎㅎ
다시보기로 봐야겠네요.

아이리시스 2011-08-16 13:03   좋아요 0 | URL
저는 [절정] 보지말고 그 캠핑장에 있어야 했어요.ㅠㅠ 재밌었죠? 말은 이렇게 하셔도 완전 즐거우셨을 거예요. 하하하하. 저희집엔 태극기도 없어요. 국경일 올때마다 태극기 제대로 그릴 수 있나 그려보거든요. 정말 맨날 헷갈려요. 이거 좋아요. 저는 몰입이 잘됐어요.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니고 시인을 주인공으로 한 특집드라마가 신기하긴 했어요~ 사진 보여주세요, 사진. 얼마나 즐거웠는지 구경하게요.ㅋㅋㅋ

stella.K 2011-08-16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괜찮았나요?
예전에 압록강은 흐른다의 이미륵을 드라마로 했다 말아 먹은 걸 봐서
아예 볼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요.
저 청포도 시 보니까, 저는 얼마 전 이정이 리메이크해서 부른 <청포도 사랑>이나 생각하구...ㅜ
캬~! 전 이렇게 문학적 소양이 없으니 뭐에다 써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엉엉~

아이리시스 2011-08-16 15:39   좋아요 0 | URL
기대를 안하고 봐서인지 더 좋았어요. 제가 김동완을 원래 좀 좋아하고, 아마 [청포도]에 관한 추억이 있어서였을 거예요. 이육사 드라마라기에 더 집중하고 봤거든요. 언론기사에서도 좋은 평 받는 걸 보면 무리는 없었던 것 같아요. 무난했어요. 이미륵은 누구예요? 아아, 스텔라님이 문학적 소양이 없다고 하시면 저는 어쩌라구요. 저는 전공도 이쪽인데, 엉엉엉.

마녀고양이 2011-08-1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페이퍼 너무 좋아요..
이육사 님은 제가 좋아하는 시인이예요 (하기사 싫어하는 시인이 있긴 할까요? ^^)..
저는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에서 시작하여 '하얀 모시수건'까지 몽롱하게 읽곤 해요.
가장 중요한 해방에 대한 염원이 가득한 시들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향에 대한 꿈 같아서 좋아해요.

하지만..... 그 시절에 살았던 분들, 참 서글퍼요. 그죠?
자의가 아닌 타의와 시대에 의해서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는 자체가 너무 서글프고 속상해요.
어제 드라마 <공주의 남자> 연속 방송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ㅡㅡ;;

아이리시스 2011-08-17 00:17   좋아요 0 | URL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을 수록 우리 시인, 우리 작가들이 좋아져요. 지금이야말로 한국문학전집을 빠뜨림 없이 다시 읽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해요. [무진기행]이랑 [광장], [무정]은 정말 좋아하는데 이제 다른 작품을 발굴할 때!

참, 저도 그래요. 이상향에 대한.. 시대와 연관짓지 않아도 시가 굉장히 멋져요. 서정적이면서도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러면서도 또 신비롭고.

저는 이상하게 [공주의 남자]도 그렇고 [무사 백동수]도 그렇고 요즘 사극이 왜 이렇게 뻔한가 싶어요. 사도세자는 이제야 뭘 좀 할 줄 알았는데 뒤주에서 도망치다 칼에 맞아죽고, 계유정난은 싱겁더라구요. 애들 말투가 어색해서 몰입도 잘 안돼요.ㅠㅠ 그 조신하고 예뻐보이던 문채원이 왜 이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역사를 살아낸다는 자체가 원래 슬프고 서글프고 속상한 건가 봐요, 마고님.

비로그인 2011-08-16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드라마 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놓쳤네요 ㅠㅠ
저는 서정주의 시를 더 좋아했지만 가끔가다 이육사 시를 읽으면 번쩍하니 번개 맞은 듯한 기분이 들곤 해요. 시에 담긴 결연한 정신이 체감되는 그런 느낌이요. 저는 예고편 보면서 신성록이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1-08-17 00:20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 님은 전공차원에서 드라마 보시면 좋을 듯. 서정주도 좋죠. 이상화도 좋고. 저는 서정시인도 좋지만 저항시인도 좋아요. 어릴 때는 전투적이고 강한 시들을 쓰는 시인들이 별로였는데 크면서 오히려 그런 걸 쓰는 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니 그런가 봐요. 시대를 넘어 전해오는 열망과 의지가 멋져요. 물론 그들이 멋져 보이려고 쓴 시들은 아니지만..

예고편 볼 때 김동완이 신성록처럼 보였나 봐요. 아님 나왔는 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1부 초중반은 거의 못본 것 같은데.. VOD 다시 한 번 돌려보려구요.

blanca 2011-08-1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드라마 칭찬이 많더라고요. 꼭 보고 싶었는데 아이리시스님 페이퍼 읽으니 어떻게든 봐야 겠습니다. 뭉클하네요. 이육사 시 너무 좋아요.

아이리시스 2011-08-17 00:31   좋아요 0 | URL
제가 유독 이육사 시를 좋아했다는 생각이 들자 어제 그 드라마 하는 줄도 몰랐는데 우연히 틀어서 보는 내내 이 페이퍼를 써야지 하고 맘 먹었답니다. 블랑카님도 꼭 보세요. 시를 자막으로 처리해줬음 좋았을텐데 내내 낭독만 하더라구요. 그게 좀 아쉬웠답니다.

cyrus 2011-08-1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봤어요. 전 왠만해서 기념일 특집극은 잘 안 보는 편인데 아무래도 너무나 유명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라 안 볼 수가 없었어요. 이육사 평전도 있었네요. 시인의 삶이 더 알고 싶어졌는데 읽어봐야겠어요 ^^

아이리시스 2011-08-17 00:32   좋아요 0 | URL
평전 재밌겠죠? 시루스님이랑 딱 어울리는 책이에요. 드라마 봤으니 이제는 평전?ㅎㅎ

꿈꾸는섬 2011-08-1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드라마 봤어요. 예고하는 것 보고 시간 기억해두었다가 보았죠. 아이들 점심 주는 시간에 2부가 시작되어 앞부분 약간 놓쳤지만 감동 그 자체였어요. 제가 막 울었더니 우리 현수가 엄마 눈물을 닦아주더라구요. 드라마보며 감정이입해서 눈물이 주르륵~~~

아이리시스 2011-08-18 10:44   좋아요 0 | URL
우와, 현수가 귀엽군요. 그 모습이 더 가슴 찡하네요. 드라마도 뭔가가 철렁하면서 가슴이 찡하던데, 아이들 보여주며 역사공부 시켜도 참 좋았겠더라구요. 저는 어릴 때 이런 드라마 싫었는데, 시대상 다루고 인물 일대기 다루는 거요. 위인전도 최고로 싫어하고. 그런데 엄마가 잘 인도해주면 요즘 아이들에게는 텍스트가 워낙 많아서 금방 이해하고 배울 것 같아요. 김동완이 더 좋아졌어요. 어쩌면 좋아요?ㅎㅎ

블루데이지 2011-08-1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아이리시스님...처음인사드려요~
안그래도 못봐서 후회하던 드라마였는데...아이리시스님께서 쓰신 페이퍼를 읽게되어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되네요!
오랜만에 이육사님의 시도 읽고...보기만 해도 가슴따끔따끔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청포도맛 사탕 좋아해요~~ㅋㅋ**

아이리시스 2011-08-18 10:55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 안녕하세요? 이름이 정말 예뻐요. 요즘 컨텐츠는 다 돈을 담보로 하니 저는 다운 받아놨는데 다시 볼 시간이 없네요. VOD도 좀 있음 결제 풀리겠지만.. 시도 좋고, 드라마도 감동이고, 혼자만의 감동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들 공감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예요. 모처럼 청포도맛 사탕 사먹으러 가야겠어요.

고맙습니다, 블루데이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