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고 싶은 책은 『나누어진 하늘』인데 얇은데다 한번 읽다만 전력이 있기에 『몸앓이』를 읽게 됐다. 마음과 달리 한번에 읽히지 않아서 한숨 푹푹 나는 문체를 갖고 있고, 내용마저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다지 읽고 싶지 않은 스타일로 전개된다. 개인적으로 독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하의 (히틀러에 의한) 홀로코스트나 강제수용소 관련 문학만을 요구하거나 관심둔 것 같다. 배경을 지우고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든 독일 작품이 선뜻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1929년생 볼프는 분단 독일의 동구권을 대표하는 작가이고, 그녀의 생을 관통한 국가와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배경이 그녀의 문학과 삶을 떠받친다고 해도 맞다. 2002년 출간된 『몸앓이』는 몸을 앓는 주인공을 통해 사회구조의 모순과 병든 사회/국가를 은유한다. 몸과 국가를 유기체로 생각하고, 아픈 팔다리를 떼어내듯 사회의 환부를 도려낼 수 있는가를 묻는다. 바꿔 말하면 몸이 유기체인 것처럼 국가도 그래서 하나가 고장나거나 흔들리거나 잘못되면 다른 것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정신적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 문화(문학/예술)가 필요하다는 게 볼프의 문학적 주장이다. 응집된 문장과 압축된 시어는 진도를 막기도 하지만 독일 특유 진지한 향취를 느끼게 한다. 몸의 치유가 사회악의 사라짐이라는 무조건적인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건 거짓이니까. 대신 아픈 몸을 고치듯 아픈 정신을 문학과 예술적 성취로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고도로 응축된 주제가 얇디얇은 한권의 책에서 빛을 발하는 중이다. 볼프의 작품세계를 그녀의 배경과 놓고 이해하면 1963년 쓰여진 『나누어진 하늘』도 얼마든지 추측가능하다. 몸은 앓고, 하늘은 나누어지고. 몸과 하늘은 두 개가 아닌데 이런 비극이 또 어디. 다만 분량이 길고 분단 현실의 사랑과 노동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시대에 처한 개인의 비극을 짙게 보여준다는 점에 의할 때. 이런 볼프가 환상(신화)소설을 썼다는 데 한번 더 놀라는 데서 fade out.

 

 

 

 

 

 

 

 

 

 

 

 

2. 찰스 디킨스는 1800년대를 살았다. 생몰연대가 1812년~1870년인 디킨스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도 전에 이미 갔는데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 이토록 생생하게 읽히며 우리를 울리는 건 세상이 200여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거나 똑같거나 사람의 삶이라는 게 비슷해서일 것이다. 디킨스는 역시 『올리버 트위스트』라고 생각하면서 여태껏 못 읽고 있다.  영문학사에서 굉장히 많이 언급되는 『황폐한 집』도 그렇고.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산업혁명기 밑바닥(노동자)의 삶을 가감없이 리얼하게 보여준다는 점일텐데 바로 그 이유로 디킨스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톨스토이의 사실주의를 그렇게까지 좋아한 적이 없는 것처럼, 스탕달을 또 그렇게까지 애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뭘 또 그렇게 뒤집어서 탈탈 털어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디킨스 읽기 자세에 스스로 아쉬운 점이 있어서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더 진지하게 읽으려 했다. 예전엔 몰랐던 디킨스의 매력을 하나라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다. 디킨스의 매력이 내게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걸로 한탄하긴 싫지만 두껍긴 두껍다. 지금 이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3. 『나흘』을 좋아하고ㅡ 『등대』를 좋아한다. 인물들이 팔딱거리고 비극적 우리 역사가 획을 긋고 지나가면 이상하게 내 일처럼 가슴이 아리다. 누군가는 나빴고 누군가는 착했는데 나쁜 사람이 잘 살고 착한 사람이 화를 입는다. 기억나지 않는(모르는) 증조 할아버지/할머니 얘기인지도 모르고 옆집 할머니의 어머니 삶인지도 모르고. 두 소설은 애틋한 기억으로 마음안에 남아있고, 두번 세번 읽어 그 기억을 건드리지 않는 한 아마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검은 모래』, 『불타는 섬』, 『비밀정원』/ 『나라 없는 나라』,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목등일기』도 작든크든 멀게든가깝게든 우리 역사와 역사 속 개인들을 건드린다. 근래 몇 년간 내가 읽은 한국소설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장치한 메타포가 난무하는 젊은 작가들의 기대작들은 멀리 하고, 문체의 서정성이 빛나거나 역사라는 아픈 비극이 중도에 놓이거나 차라리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중견작가들이 공모전을 통해 수상한 작품들을 읽었다. 어쩌면 취향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나는 이제 한국문학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취향은 변하는 법이고 나는 더 변덕스러우니 후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한국 문단은 오래도록 문체 중심주의였다. 문체는 능력이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글쓰기는 자꾸 읽고 쓰면 나아지지만 문체는 거의 타고난다. 스토리가 강한 작품이 문체까지 갖추기는 어렵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주위적-예비적 청구의 병합같은 거지만 늘 동시에 요구당한다. 둘다 만족시키면 가장 좋겠지만. 문체가 생각만큼 세련되지 못하다 해도 결국 공부와 연구를 토대로 스토리텔링이 강화된 이 소설들이 미래 한국 문단 한 축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문단 권력은 이렇게 등단한 작가들을 아직 좋아하지 않는 듯하지만, 독자가 읽어야 이들이 강해진다. 정치인이 뭘 해보여야 표를 주겠다는 사람들이 가끔은 어이없다. 유권자가 표를 줘야 그사람이 힘을 갖고 무언가를 해보일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어쨌거나 문단 물줄기도 이제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스토리텔링/문체/장르 등으로 좀 세분화되어 발전했으면 좋겠다. 싹도 나기 전에 끊고 뭉개고 돌덩이같은 기준을 정해놓은 채 끼워맞춰 판단하는 버릇 좀 버리고. 책이란 건 상품으로 만드는 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읽어줘야 의미가 되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세상에 존재하는 소설이 반드시 내게 백퍼센트일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의 경험과 사유와 고통과 노력으로 채워가도 된다.

 

 

 

 

 

 

 

 

 

 

 

 

 

4. 『우리가 고아였을 때』, 『파묻힌 거인』을 읽고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나를 보내지 마』를 다시 읽고 싶어졌는데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내용이 많이 상쇄된 두 작품을 정리하면서 가즈오 이시구로를 정리해도 되겠다는 정리벽에서 나온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이었다. 이제 이시구로의 삼부작 옆줄에 당연하고 완벽하게 『우리가 고아였을 때』, 『파묻힌 거인』을 자신있게 놓는다. 여행과 회상의 형식을 통해 기막힌 모험/추리, 환상 소설을 탄생시킨 한결같음이 이 작가의 무기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라는 제목은 '우리는 모두 부모가 된다'로 바꿔서 부모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만들고, 『파묻힌 거인』은 그게 뭐든 파내야 한다고 속삭인다. 몰라서 평온한 진실같은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파봐야 안다는 게 내 생각. 파헤쳐서 파묻을 것만 정확하고 신속하게 파묻어야 한다,

 

이 작가를 완전히 안다는 생각이 들고나자, 오래 전 읽은 하루키의 소설들(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감는 새- 이상 세 편)을 읽고 싶다. 연관이 없어보임에도 무의식이 그 관련을 자꾸 들먹인다. 그러나 다시 건드리는 게 독배일지 만찬일지 모르고 있다.

 

 

 

 

 

 

 

 

 

 

 

 

 

5. 『어떤 날들』, 『비밀의 계절』, 『사형수가 된 여자』, 『풀이 있는 여름 별장』은 모두 누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순문학 안에서 범죄가 다루어지는 경우로, 한 권 더, 앨런 에스킨스의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초반부를 더할 수도 있는데, 이 작품 후반부는 여느 범죄스릴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양상으로 가므로 주의깊게 비교해야 한다.

 

『스톤 다이어리』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 가계도이긴 하지만 분명 스톤이라는 여자의 한평생을 놀라운 장면전환으로 그려내며, 『돌의 연대기』와 『사랑, 판타지아』를 관통하는 건 알바니아 민중의 삶과 알제리 전투 하의 생활상이다. 따를 주인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점과 이야기 구조가 퍼졌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관성을 가진 점이 조금 닮았다. 『비밀의 계절』에서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튀는(비밀을 지켜주지 않는) 친구를 배제하거나 따돌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고착되는 범죄, 이 범죄는 누군가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고 누군가를 내모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불안하고 뒤틀린 청춘을 표현했다기에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싶다.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나쁜 광기에 불과할 뿐 청춘이라는 이름으로만 할 수 있는 빛나는 추억의 단면이 아닌 것 같다.

 

『풀이 있는 여름 별장』은 사형제도 딜레마를 떠올리게 한다. 단순히 일면있는 여러 가족들이 별장에서 함께 여름을 보내다가 벌어진 어느 사건으로 서로가 서로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데, 사건 불해결로 인해 촉발된 다른 사건이 죄 없는 사형수를 사형집행해버린 상황이 된다. 누군가는 덮어주려 하고 진실은 수면 위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형수가 된 여자』는 그즈음 내가 읽던 『스톤 다이어리』와 함께 읽고 싶다는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기대에 부응하는 줄거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어떤 일로 사형수가 된 여자가 있는데 피해자 엄마가 사형시키면 안 된다는 민원을 끊임없이 넣으며 여자를 구출하려는 순간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순간의 벌 대신 살아있는 고통으로 갚으라는 피해자 가족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가장 최근 읽은 『파란 실타래』는 대가족의 연대기이자 가족간 애증의 에피소드로 똘똘 뭉쳐 한편의 이야기가 된다. 가족이 되기 전의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타인이었고, 아이가 없었을적의 부모는 이후 태어난 자녀가 모르는 모습이다. 단순한 가족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몰랐거나 알 수 없었던 시절을 수채화처럼 차곡차곡 펼쳐놓는다. 앤 타일러는 처음인데 일상 속 작은 이야기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터뜨리는 듯 폭발하는 잔잔함이 매력적이다. 『황금방울새』 포함 (**)권(생각나는 책 추가중)은  리뷰를 남기고 싶은데, 언젠가 써야할텐데, 그날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6. 쓰다보니 에피소드도 아니고 11번까지는 아무래도 무리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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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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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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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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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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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1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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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0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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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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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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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4 0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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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8-0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은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랍니다.
이번에 이 작품을 소개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면서,
BBC에서 공들여 만든 드라마의 일부 영상들을 봤는데,
전체 15부작을 한꺼번에 좌악~ 살펴볼 수 없었던 게 너무나 아쉽더군요.^^
https://youtu.be/WyMY83Qyzws

아이리시스 2020-08-28 22:13   좋아요 1 | URL
oren님 안녕하세요? 독서랑 조금 먼 일상중이지만 저도 한번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