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의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례로 한 권씩이 안 되는 편이다. 언제나 이거 펼쳤다 저거 펼치게 되고 묵히다가 다시 돌아갔다가 아님 내쳐읽다가 비로소 작별한다. 어떤 식으로든 블로그에 소감을 남겨야 진짜 작별하는 느낌이었는데 지난 시간 오래 덜어냈고 또 비워서 이제 꼭 그렇지도 않다. 가장 좋은 독서법은 여러 분야 책을 한 권씩 골라 네다섯 권을 두고 내킬 때마다 돌려읽는 것이다. 사람 기억력이 이틀을 가기가 어려워 이틀 이내 반드시 그책을 다시 잡아 한 장이라도 읽어야 한다는 철칙 아래라면 충분히 가치있는 방법이다. (추리)소설 한 권, 역사책 한 권, 사회학책 한 권, 과학책 한 권 이렇게 하고 나머지는 끌리는 책으로 한 권 더. 거의 대부분 좋아하는 분야 책만 읽다가 다른 책은 밀리고 또 밀리고 그러겠지(만). 그래서 써본다. 지난 시간 털어내기, 지난 책과 이별하기-추리소설 편. 

 

<악의 숲>은 앞선 몇 작품으로 악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듣는 프랑스 스릴러 작가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소설이다. 평점이 그리 높진 않은데 난 좀 의외다. 지식형과 사회고발형이 뒤섞인, 사건과 결과, 일상 속 사건이 전부가 아닌 고인류학, 심리학, 유전학, 정신의학 언어들이 담겼다. 어두운 방안에서 혼자 읽으니 그 기운이 배가 되긴 했겠지만 그후로 더 흥미로운, 오싹한, 뒤가 궁금한, 얼른 끝났으면 좋겠고 되도록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스릴러가 없었다. 오롯이 혼자이던 그밤이 그리워진 거겠지, 그래도 그밤에 누군가 지금처럼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옆에 있어줬다면 덜 무서웠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숲>이 가진 한계는 제법 빨리 범인이 보인다는 점이다. 스릴러에서는 멀쩡하게 제일 오래 등장하는 인물이 범인이기 마련. 스릴러 혼합형 소재로는 특이해보이는 자폐, 유전, 원시라는 키워드가 인도하는 중남미 어두운 역사를 거슬러가는 생생한 묘사는 범인 찾기보다 흥미진진하다. 예전에 읽은 스릴러가 문득 생각난 이유는 <마크드 포 라이프>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은 <악의 숲>과는 장르가 다르고 지식형 소설도 아니며, 요즘 심각한 세계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난민이라는 훌륭한 키워드를 범죄스릴러 소재로는 흔한 마약으로 받는 결정적 실수를 하지만. 그렇게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한 작품으로 변한 데 대해선 아쉬움이 크지만 어쩐지 서글프고 불쌍한 사람들이 오래 남는다.

 

어떤 작품이든 두 번 읽으면 처음 읽을 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아, 다시 읽으니 그 정도는 아닌데 왜 이토록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지? 에 가까운 경우. 한번 좋았던 부분은 언제나 당연히 좋다. 어쩐지 한번 읽고 서랍 깊은 곳에 넣어버린 책 속 기억은 애증으로 양분되어 떠오른다. 왜.

 

 

<마크드 포 라이프>를 끝내고나서 <올빼미는 밤에만 사냥한다>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여행중입니다>와 같은 노르웨이 작가 비외르크의 소설인 걸 알지만, 서늘한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분위기와 숲에서 여섯 살 여자아이의 시체가 발견되는 파격적 설정으로 시작하는 것 치고는 읽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져버린 그리 기억에 남지 않는 작품이었다. <올빼미...>를 몇 장 넘기면서 미아와 뭉크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내가 <나는...>을 지루해했던 이유는 사건을 시리즈 등장인물들과 너무 엮어놨기 때문이다. 유난히 많은 팀원과 각자 사생활 보여주기에 할애하는 지면이 가정사나 섹스는 넣어두고 계속 사건을 물고늘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비외르크의 시리즈는 좀 약하다. 확 당기거나 밀어내지 않는다. 휘몰아치듯 썼다기보다 이렇게 쓰고 싶어 이렇게 계획해서 쓴다는 조심성이 느껴진다. 사실 스릴러 소설로선 좀 실패일지도. 상징적 제목은 좋은데 살인소재의 광기에 비해 뒤로 갈수록 실망스러워진다.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며 결말로 나아가지 않고 궁금증을 증발시켜버리는 식의 허무함이 다음 작품에서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린 이미 북유럽이란 타이틀만으로는 추리소설을 집어들지 않은 지 오래다. 스티그 라르손과 헤닝 만켈, 요 네스뵈를 거치며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낯선 지명과 공기의 차가움, 사회고발적 날카로움, 광기와 불안을 충분히 경험했기에.

 

 

여기까지 글감이 바닥났다 여기고 등록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신기해서 여즉 제대로 읽지도 못하겠는 이름을 가진 작가의 작품이 떠올랐다. 북유럽이라는 키워드로 위 작가와 묶을 순 있겠지만 <부스러기들>과 <마지막 의식>에서는 소설적으로 설정된 시공간적 배경이 강해서인지 공간적 배경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부스러기들>의 공간은 배이고, 사건은 발견된 텅빈 배이다. <마지막 의식>의 소재는 북유럽 신화와 중세 기독교 역사로부터 나온다. 소설 전반에 중세 마녀사냥과 흑마술에 대한 지식이 깔린다.

 

뿌려진 흔적과 단서를 통해 1486년 도미니크회 수도사 요하네스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래머가 집필한 마녀사냥 지침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를 추적하는 데 성공하고, 이 책은 실제로 번역되어 있는 책이다. 주인공이 피해자쪽 변호를 맡은 토라라는 여자인 점은 두 작품의 공통점이지만, 두 작품의 사건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이어서,

 

 

 

 

 

 

 

 

 

이 책들은 진지하게 읽기 시작해 끝을 봤지만 리뷰를 쓸 수 없는 혹은 쓰지 않을 책들이 되었다. 이제 그만 결별하자, 안녕. The END.

 

 

 

 

 

 

다음에 읽을 추리소설은 제프리 디버였다가 이언 랜킨이었다가. 시리즈 순서는 뒤죽박죽된 지 오래.

 

 

 

 

 

 

 

 

 

이미 다른 분야도 쫙 줄을 세워뒀다. 이 독서법은 즉흥이 매력일텐데 난 늘 차후에 읽을 열 권의 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니 언제쯤 이 대기열이 식어들지 궁금할 뿐이다. 독서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그러나 시작도 있다. 진짜 안녕.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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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8 0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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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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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8 09: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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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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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4: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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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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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6: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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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08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을 다 읽자마자 바로 리뷰로 기록해야 합니다. 일주일 이상 지나면 내용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서 리뷰로 기록하기 어려워요. ^^;;

아이리시스 2017-07-11 13:58   좋아요 0 | URL
다른 책도 비슷하지만 추리소설은 특히, 비슷비슷한 소재나 구성 때문에 더 휘발성이 빠르게 오는 것 같아요. 마구잡이로 읽어서 그럴지도^^;;

2017-07-11 16: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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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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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6: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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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7: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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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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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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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2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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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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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열매와 체리를 먹던 지난달부터 여름은 이미 와 있었다. 이미 보름도 더 전에 복숭아와 자두를 먹기 시작했다. 여름은 이미 시작했고, 저런 제목을 쓸 필욘 없었는데, 신호탄이 필요하다. 지난 일 년 삼 개월은 노트북을 거의 켜지 않던 시간이었고 최근에서야 노트북을 켜 뭘 해보려 한다. 주로 기사 검색, 웹툰 보기, 미드 보기에서 다시 꺼지는 경우 많지만. 지난 해 늦은 봄부터 아홉 달 가까이 걸려 자격증 따고 보이는 것보다 목표한 것보다 훨씬 더 먼 꿈을 꾸었다.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삶의 인맥을 열고, 이제 몇 년 더하면 인생 절반을 함께 했다 말할 수 있을 오래 사귄 애인과 결혼하고. 그러고도 반 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안 행사에 불려다니고 원하던 시험은 문앞에서 낙방하고. 그와 동시에 평생의 분신이 될 아기가 찾아왔고, 복잡했고 어쩐지 억울했고 마음과 달리 몸은 한없이 가라앉고. 그렇게 몇 달이 더 흐르고 여전히 시간은 멈춰있고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 시간과 삶은 나를 이끌어주지 않는다.

 

북플은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 가볍고 간단한 기록이라 자주 접속했지만 책을 거의 사지 않았고 하지만 읽을 책은 손길 닿는 곳 어디에나 널려 있었으며, 정기검진을 다니기 시작하고 입덧이 시작되면서 매주 가던 도서관마저 끊었다. 이 순간에도 문자로 희망도서 도착알림을 차곡차곡 넣어주는 고마운 도서관이지만 빌려와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많은 신간들은 유독 남달랐던 애착과 지식욕을 반영하는 물질이고, 이제 그것들로 나를 온전히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짧은 시간,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다 집중력과 열정, 두 가지 모두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둘이라 생각했던 그러나 하나였던 어떤 일만 끝내면 돌아오겠다 생각한 알라딘 블로그에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었다. 이유가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 7년이 넘도록 일상과 생각과 감정을 차곡차곡 쌓았던 보물창고를, 그렇게 잊었다.

 

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욕심도 없었다. 이미 많은 것들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기록하므로. 그저 하던 일을 더 오래 버려둘 엄두가 나지 않을 뿐.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걸 자각했고, 흐르는 시간을 자유롭게 놓쳐버릴 용기가 없었을지도. 정신을 차려보니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며칠 후면 본격적인 여름과 함께 올해 하반기가 시작된다.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 말고, 이 시간의 결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기분은 착각이었을까. 지난 주말, 오랜만에 두 시간 넘게 달려 수목원을 찾았는데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거다. 여름이다, 무언가를 해야겠다, 이대로 시간이 나를 통과하도록 속수무책으로 둘 수는 없다, 는 생각을 한 것이.

 

아기가 간절한 친구는 뜨개질을 배운다며 필요한 거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나는 비타민D 결핍으로 핀잔 들으며 먹거리 검색한다. 시간이 생기면 편하게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는데, 일단 시작하면 성과를 내야하므로 여기서 뭘 더 저지르는 건 욕심 아닐까, 하지도 못할 거면서. 평정심과 건강을 지키며 간헐적으로 외국어 단어나 외우는 게 더 가치있는지도. 그러다보면 나는 결국 책 근처로 돌아오겠지. 몇 달 동안 빌려볼까 살까말까 하면서 망설이던 책들이 저녁에 온다. 오늘이 시작이면 좋겠다.

 

펼쳐볼 때마다 보잘 것 없는 서재에 대해 생각한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고르고 읽고 사모으는데 어째서 심야 이동도서관에 꽂힌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숨고 싶어지는지. 더 잘 고르고 더 잘 읽고싶다. 이 책 좋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정말 좋은 책을 골라 들고 싶게 하니까. 아주 작은 시간도 너무나 사소한 선택도 다 기록되고 있다는 무언의 감시. 기분 좋은 간섭. 내 세상엔 책이 전부가 아니지만 책을 빼놓고는 내 세상을 논할 수 없을 것. 심야. 이토록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시간에. 책.

 

 

이 책이 일종의 메타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 마르케스의 <미로 속의 장군>을 당장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에 책을 읽어나가며 버거운 순간들이 있긴 했다. 심지어 마르케스의 저 작품을 실제로 읽더라도 흥미와 매력을 제대로 느낄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잊을 만하면 나오는 <미로 속의 장군> 줄거리와 인용문은 충분히 이 책을 덮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지한 대만의 독서가가 들려주는 독서讀書라는 행위에 대한 깊고 폭넓은 사유가 낯설면서도 매력적이란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얕게는 (본인이) 책을 고르는 법과 읽는 법, 감상과 글쓰기에서 깊게는 각종 사유로 뻗어나가는 내용도 그렇지만, 이 시대 독서와 책 읽기, 책이라는 자체에 대해 이토록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고 신랄하게 적어나가는 사람이라니, 부러웠다. 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확신을 갖고 나아가는 편이 아니라 도중에 찾는 사람이라서. 사실 확신에 차 있는 듯 보이던 사람들도 정작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견고함을 다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 나아졌다. 무엇이. 어쩌면 영원히 원하는 확신을 쥘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행위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기분이 나아지는 것. 하면 행복한 일들. 되찾기를. 

 

그리고 언젠가, 읽어낸 모든 책은 버려지기를. 숨겨진, 글로 쓴 모든 순간이 지나가기를. 좋았던 추억이 슬픔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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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6-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결혼도 하고, 임신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오늘 북풀에서 아이님 흔적보고
그 생각 잠시 했거든요. 늦었지만 축하해요.
예정일은 언젠가요? 가을쯤...?
암튼 모쪼록 건강했다가 순산하길 바래요. 힘내구요.
왠지 너무 차분합니다.ㅋ

아이리시스 2017-06-29 23:4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한테 낮에 북플 댓글 달고 이것도 쓰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나고 마음도 정리돼서 포스팅 올리고 싶던 차에 댓글이 와서 깜짝 놀랐고요. 아기는 올해를 꽉 채워야 태어납니다.마지막달에 태어날지도.. 고맙고 감사하고 또 사실 저는 그다지 오랜만 아니라서.. 뭔가 차분히 쓰고 읽고 하는 것만 오랜만이지 항상 여기 있던 느낌이라서.. 제 글은 저와 달리 언제나 차분했어요! ^__________^

cyrus 2017-06-2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활동이 너무 뜸해서 섭섭했습니다. 그래도 근황을 접하게 되니 정말 반갑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합니다. 아이리시스님을 처음 만났던 날에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나요. 아무튼 결혼, 임신 소식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셔야 되요. ^^

아이리시스 2017-06-29 23:49   좋아요 0 | URL
cyrus님도요. 한쪽이라도 늘 같은 자리에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거죠. 놀랍게도. 신기하게도. 저도 우리가 첨 만났던 날에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기억 안 나요. 첨이란 다 그런거죠. 늘 한결같은 모습, 힘이 많이 됩니다. 또 봐요, 생각보다 더 자주. :)

2017-06-29 2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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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9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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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6-29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 오랜만이다, 생각하고 왔더니 새로운 소식이 차곡차곡 많이도 쌓였네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읽고 쓰기가 다시금 찾아들어 힘을 주기를 바랍니다 :)

아이리시스 2017-06-30 00:04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에요, 다락방님. 저도 늘 변함없이 같은 자리 지켜주는 다락방님이 고마워요. 만약 제가 없을때도 이곳을 지켜준 분들이 없었다면 제가 돌아온 것도 별 의미가 없었겠죠. 제 시작도요. 어느 정도의 읽기가 뒷받침이 되어야 쓰기도 할 텐데 결심처럼 잘 될지, 많이 기록하고 또 얘기 나누고 싶어요. 더워도 힘내자구요! :)

2017-07-08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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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4: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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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9 14: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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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4: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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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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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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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 아니라 욕실이겠지? 집 넓고 자기 공간이 큰 사람들이 욕조에서 와인 마시며 음악 듣는다는 건 잘 알지만(뭔들 못할까?) 벽걸이 시디플레이어를 설치하고 캐롤 ost를 듣는 이제훈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일부러 다이얼식 전화라니, 버튼식 유선전화는 우리집에도 있지만. 남의 취향에 관심 갖는 거 잉여스러울 때가 많지만(대개 감놔라 배놔라 하고 싶어하니까) 재미있게 보던 <치즈 인 더 트랩>이 분노 유발로 방향을 틀며 끝나기에 삼일절에 다시 <시그널>에 버닝한 후 그동안 쟨 왜 저러고 사나, 뭘 위해 살지? 싶던 해영의 사정이 나오며 완전 좋아져서 금요일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는데 도달한 <씨네21> 1044호. 너는 왜 티븨드라마로 표지모델이 됐니, 땡큐. 하면서 또 생각한다. 그 힘든 상황에 어떻게 그렇게 잘 컸니? 시니컬하긴 했지만 나빴던 적은 없잖아. 어쨌든 지금은 불의에 분노하고 타인(범죄자일지라도)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그런 남자가 됐잖아.

 

 

 

나는 가끔은 비싼 향초, 자주 싸구려 향초를 켜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를 듣고 온갖 형광펜과 색연필을 총동원하여 정성들여 다이어리를 쓴다. 읽은 책에 하트 스티커를 붙이고 간혹 책도장을 찍는다. 중고샵에 내놓을 때 값 떨어질까봐 최근엔 책 훼손을 조금 고민하게 됐다. 인생 끝까지 들고가야 할 책 많지 않은 것 같거든.

 

 

 

자주 간절곶에 간다. 구룡포항과 강구항을 좋아하지만 7번국도는 너무 멀다. 뉘엿뉘엿할 즈음이면 더 좋고 사실 화창한 봄날에도 좋고 아주 추운 겨울날에도 좋다. 어느 순간 카페와 레스토랑이 너무 많이 생겨서 예전처럼 고요하고 한가로운 분위기는 찾을 수 없게 됐지만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바다 덕인지 매력을 완전히 잃진 않았다. 낭만과 소요를 동시에 느끼면 평온해진다. 오랫동안 선적과 하역이 이뤄지는 부둣가 동네에 산다. 부둣가 낚시꾼들과 방파제와 수출입 현장의 분주함 가까이서 어린시절을 보내다보니 세상에서 제일 잔혹한 바다는 해운대. 아침마다 미어터지는 지하철에 실려 센텀으로 출근할 땐 미칠 것 같았다. 광안리, 해운대, 송정, 일광, 태종대, 기장, 다대포, 송도까지 바다 순례는 매번 많이도 한다. 바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가 바다를 버리면 대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산의 매력을 잘 알진 못하지만 바다의 매력은 밤새워 얘기할 수 있다. 섬은 로망으로 충분하다. 제주까지 갈 것도 없이 7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정말 살고 싶은 동네가 많이 나온다. 바닷가 마을에서 사는 건 아직 좀 많이 두렵기는 하지만.

 

 

 

겨울엔 눈꽃 트래킹이 그렇게 좋더니 기온이 바뀌니 금방 봄이 올 것 같아 이렇게 신이날 수가 없다. 산 아래 계곡, 푸른 바람 아래 살려면 꽃은 핑크나 퍼플이 제격이겠지? 푸릇푸릇/ 울긋불긋. 사진 한 장으로 잊고 있던 봄이 되살아난다. 저 예쁜 풍광을 지나 외길로 굽이굽이 산을 오르던 캠핑장 가고오는 길. 한적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에 봄은 더 빨리 찾아오는 것 같았다.

 

 

 

둘이 가는 캠핑에서 독서는 좀 버거운 일이다. 텐트치기도 밥도 설거지도 간식준비도 술상차리기도 나는 거의 하는 게 없지만 둘이 있는데 하나가 책에 빠지면 하나는 외톨이가 되니까. 그렇다고 여러 명 가면? 독서할 일이 있을까? 여기선 해지면 어두워서 책 못 읽는다. 겨울밤 난로 피워놓고 마쉬멜로 구워 먹으며 침낭에 들어가 영화보는 건 행복 그자체다. 온도는 후끈하고 바깥공기는 차갑고 어둠과 밤과 자연 그리고 나는 하나. 이게 다 취향 때문. 밀크티도 좋고 율무차도 좋다. 책을 한가득 빌려 나오면서 도서관 한켠 자판기에서 한 잔 뽑아마시는 밀크티나 율무차는 소소한 행복의 최선. 아직도 금요일이 아니구나. 아, 이번호에 실린 과학자 5인방 기획기사 중에 서민 교수님도 계신다. 『기생수』를 비롯한 몇 개의 텍스트를 소개한다.

 

 

 

 

 

 

 

 

 

 

 

 

 

 

 

 

 

<사울의 아들>은 상영이 끝나기 전에 <쇼아>랑 같이 보고 싶다. 『한 혁명가의 회고록』이 정말 아프면서도 재미있다. 기억해야 한다, 이름 없는 자의 이기지 못한 혁명이 어떤 것이었는지. 묵직한 것들이 자꾸 차올라서 뜨거움이 그리워지는 겨울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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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3 2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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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3 2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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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4 0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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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5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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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3-1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그널이 끝나서 정말 슬픕니다. 정말입니다. 어서 시즌2를 하란 말이다....라고 박해영의 위 사진을 보며 쓸데없는 푸념을..그래도 나는 박해영보다는 이재한을 더 사..아니 좋아합니다.^^

아이리시스 2016-03-15 11:45   좋아요 0 | URL
촘촘하다가 막판에 뭔가 나사가 풀려버려서 드라마란.. 이런 생각했지만 결말도 나쁘지 않았어요. 슬픕니다.. 돈 들여 배우를 키우는게 아니라 돈들여 작가를 키워야하는데... 당연히 이재한형사님이 더 최고입니다^^
 

 

 

 

      "계속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성장하고 있다. 지름길은 없다. 방문객을 확보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존 그루버)

 

      "가시에 찔리지 않고 장미를 모을 수 없다."

 

 

몇 개월에 한번씩 아이디/비번 찾아 들어가는 비공개 트위터에 이런 글이 저장돼 있었다. 하는 일이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할 때 가끔 읽는 문구다. 평균 이상의 위치(지위)에 올라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간절한 처음, 낯선 시작이 있었을 것이다. 크게는 지금 핫한 본회의장의 국회의원들에게도, 작게는 한낱 블로거인 나에게도. 고작 인터넷 서점 블로그 방문객도 고정 확보하려면 기본(2-3년) 이상의 꾸준한 운영이 필요한데, 하물며 타인을 만족시키는 글에 대한 기대감, 타인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글솜씨, 아니 타인을 주객으로 둔 것들을 다 논외로하고도 나를 주객으로 하는 개인 지성의 확보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할까. 한 국가의 흐름이 흘러가는 부정과 비리를 한번의 노력으로 퇴치할 수 없는 것처럼, 1을 잘하는 사람이 2를 잘할 가능성도 큰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들이 흐름을 거스르는 기운이 가득한 나라에서. 어떤 일을 진지하고 꾸준하게 하는 사람의 성장을 누구도 하찮게 여기거나 비난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서재가 만드는 논쟁에서 항상 떨어져있는 이유는 정말 어느 쪽이 옳은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가 잘못했던들 버젓한 수사로 논리있게 꽤 잘 쓰여진 기승전비방글을 옹호하는 게 옳은지, 그렇다고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되는지, 전세계가 지켜보는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한국 유일의 시상자로 나선 이병헌이 뿌듯한지 멋있는지.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댈 기준이나 지적질을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용기보다 중요한 건 이대로 계속 가도 되는지에 대한 강도 높은 고민과 성찰과 행동이다. 앞만 보고 나가는 편이고 낙천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서 불평을 글로 만들어 늘어놓는 데 사실 흥미가 없다. 그래도 북플이 생기고 나타난 좋아요 하향평준화와 인플레이션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호흡이 긴 글을 잘 쓰지 않게 되었고 읽고 싶은 글을 찾기 힘들다보니 책에 더 집중한다. 가끔 서재 친구의 문을 두드리며 떼쓴다. 글 좀 써달라고. 나를 앞으로만 미래로만 끌어당기던, 남몰래 자극 당하고 부러워하던 그런 글들을 많이 써달라고. 맹목적이고 까다로운 독자가 되겠다며.

 

 

읽지 않고 책에 대해 말하는 글에 읽고도 그럭저럭 쓰는 글까지 보태지 말자면서도 한 달에 한두 편 정도를 애써 기록하는 것 같다. 이게 최선인지는 모르겠지만 꼬박꼬박 발자국 찍는 서재 친구들과 이름 모를 이웃들을 위해, 정확히는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일 년에 열두 번 정도는 독서의 발자국을 찍고 싶은 나를 위해. 12월에 중단된 희망도서 신청분들이 속속 도착하고, 어쩌다 책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고 내 생각에도 쫓기고는 있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 무언가를 끄적이는 일이, 어쩔 땐 정말 무언가 이상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일상이 즐겁지만은 않고 책이 많고 생각은 부족하고 의지는 달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믿는 만큼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자서전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물론 자서전은 거의 재미있다. 『온 더 무브』는 술술 잘 넘어가는 추리소설보다 더 빨리 넘어간다. 자칫 관심 없는 자에 대한 일대기처럼 보일 수 있는 사건들조차도 대체로 유쾌하고 즐겁다. 어린 시절의 색스는 무척 흥미롭다. 훈남에다 똑똑하기까지. 의사 부모님 아래 네 형제 중 막내로, 모터사이클을 목숨처럼 좋아했던 것, 너무 똑똑해서 정신분열을 앓는 형을 두려운 동시에 애처로워했으며, 사랑하는 사람-그는 게이였다-에게 정중하게 거절당한 후 육체적 쾌락과 섹스를 인생에서 포기하다시피한 일, 즉흥적 쾌락과 순간적 흥을 위해 마약의 힘을 빌렸지만 헤어진 훗날 중독자로 죽은 옛 연인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일 등의 에피소드도 다채롭지만 정말 흥미로운 건 하나를 잘 하는 사람이 다른 것도 잘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의학, 문학, 수학, 과학에 대한 재능을 여러날 시험하다가 신경학이라는 분야로 접어든 것이다. 누군가 무엇이 되기 전 불확실한 순간을 엿보는 일은 사랑에 빠지기 전의 연인들처럼 두근대는 법이다. 그는 부랑아가 될 수도 있었고 문제아가 될 수도 마약중독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한 분야의 최고가 됐고, 문학가로서도 그이상이다. 의사가 과학에도 뛰어나고 글도 잘 쓴다는 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나를 필요이상 잘 하는 사람이 다른 걸 유난히 못하는 게 사실 더 이상하니까. 그가 대단한 이유는 각각의 분야에서 모두 기대이상의 성과(학술적, 연구적, 대중적 측면)를 이뤄낸 점이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나 2015 아마존 최고의 책이란 타이틀은 영미소설엔 거의 달려있어서 믿으면 손해다. 찾아봤더니 공교롭게도 1위 기간이 43주간이다. 전반에 보여주는 갈등이 지리멸렬하고 지루하다. 전쟁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무조건 포화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고 여긴 탓일까), 『나이팅게일』은 전쟁 한복판이 아니라 전쟁의 한 귀퉁이 혹은 전쟁의 후면에 있던 사람들의 삶 속으로 느리게 스며들어간다. 긴박한 총탄 현장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All the Light We Cannot See』이 더 낫지만 느리고 질기게 스며드는 건 마찬가지다. 문학의 힘이라면 기꺼이 견딘다. 하지만 성질 급한 독자는 얼른 클라이맥스나 자극적인 결론을 보고싶어한다. 중반이 훨씬 넘게 어떤 일이 일어날 기미가 없다. 엄마가 죽고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비안느와 이사벨 자매는 언니가 출산의 실패와 죄책감으로 동생을 또한번 버림으로써 가족해체의 본보기가 된다. 그리고 전쟁이 터진다.

 

전쟁터로 끌려간 남편 앙투안을 기다리며 유일한 친구의 가족을 유대인으로 고발하며 교사로서 딸 소피를 키우며 사는 비안느는 동생 이사벨과 재회한다. 강제로 독일 장교의 숙소로 변한 집에서 그들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전전긍긍한다. 반면 이사벨은 불만과 불평을 거리낌없이 쏟아붓는 유형으로 일상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언니를 늘 불안하게 한다. 사랑과 전쟁 그리고 살아남음. 우연히 접한 지하조직(레지스탕스)에 적극협조한 이후 나이팅게일 작전에 투입되어 물심양면으로 전쟁에 맞선다. 가정을 지키며 두려움에 위축되지 않는 엄마로 딸을 지키는 강인한 삶을 유지하려는 언니 비안느와 굴욕적인 모든 순간을 참을 수 없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위험천만한 시대로 걸어들어간 동생 이사벨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이다.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둘은 달라도 너무 다른 자매다. 결국 전쟁을 겪는 중이거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며 삶을 구축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식상하지만 영미권이 버리지 못하는 2차대전을 다루는 작품은 늘 일깨운다. 전쟁이 나면 결국 단숨에 죽는 게 더 행운이 아닐까. 전쟁이 일어나도 살아있는 한 살아야 한다. 몸서리치게 전쟁이 두려워도 죽는 것만큼이나 자유를 잃는 게 더 두렵다는 것을 되새긴다. 전쟁 자체가 곧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화제가 되던 <태양의 후예> 시놉시스는 늘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떠올리게 했었다. 군인과 간호사(의사), 죽음과 사랑은 황홀하고 매력적인 소재다. 사랑이 일상 때문에 깨어지는 것보다 시대상황 같은 거국적 서사로 금이 가는 걸 볼 때 환호한다. 다시 음미하면서 읽었다. 총탄이 날아오는 긴박한 순간은 사실 없다.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건물과 조종사였던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회상 속 사막과 모래먼지 그리고 위험한 사랑만이 보인다. 결국 누구를 잃어야 하는 경험은 알면서도 아프다. 아름다운 문장들은 한줌 잡기도 벅차서 반복하듯 가라앉고 떠오르다 결국 길을 잃게 한다. 내가 어떻게 당신 연인이 되죠? 물음에 가슴이 쿵하던 때가 있었고, 무심한듯 보던 드라마 첫 회에 사랑에 빠지던-서로 호감을 갖는-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보며 살며시 포개지는 지점이 있기도 했는데, 모르는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게 하려면 조금 더 설득력 있는 개연성이 필요했다.

 

영화 <마지막 사랑>을 참 좋아한다. 돌이 가득한 뜨거운 햇살 아래서의 섹스보다 아름다운 건 상실과 부재와 관능과 환상과 무더위와 파리떼와 끈적임과 불타는 사막이 자동적으로 연상되게 하는 바로 그 이미지텔링이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 환경에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은 거룩하다, 당신이 이 세상에 없는 게 내가 태어나 겪는 가장 아픈 종류의 비극이자 고통이라는 걸 가끔 믿게도 한다. 간혹 액자소설이 아니었으면 하는 의문을 품는다. 이 작품에 관해, 여전히 어설픈 개작의 바람과 욕심이 남아있다.

 

 

 

 

 

 

 

 

 

 

 

 

 

 

 

 

힐러리 맨틀 다음으로 역사소설을 선택한 맨부커의 주인공은 엘리너 캐턴이다. 북플에 표시한 별점이 최고치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무언가를 이룩했다 치자, 최연소면 천재적인 건가. 상은 언제나 대진운이 결정하는 법. 그녀는 겪어보지 못한 시대를 현대로 불러낼 줄 아는 뛰어난 스토리텔러지만 문체적 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녀의 강점은 20대의 젊디젊은 여작가가 역사소설을 써낸 점, 1860년대 뉴질랜드 일확천금을 노리는 남자들의 공간으로 안내하는 점, 살인 미스터리를 소재로 하는 점, 12개의 별자리와 행성(천궁도)을 캐릭터와 연결시켜 암시효과를 주는 점이다. 스물 여덟 살의 작가가 두번째 작품으로 써내기에 수준 이상의 독창성을 갖는 건 사실이다. 별자리와 행성 메타포는 잘 버무려진 소재인가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자칫 평범해질 수 있는 작품을 면면이 훑고 곱씹어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묘사나 문장력은 예상 외다. 대부분의 영미권 문학이 보여주는 문장이 현학적이지 않은 건 그렇다 치자. 하오체가 넘쳐나는 대화 중심에다 캐릭터 중심 서사는 의외로 평범하다.

 

ebook 『젊은 작가의 책』에서 많이 읽히는데 자신은 왜 인기있는지 모르겠는 책에 2011년도 맨부커 수상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를 꼽은 작가가 많았다. 두번 읽었는데도 여전히 왜 대단한지 모르는 나로선 적잖게 반가웠는데 그래서 내 발언에 어떤 타당성을 얻겠단 얘긴 아니고-남의 의견에 기대 자기 발언 타당성을 얻는 게 천박하다고 평소 생각해왔다-, 맨부커는 언어의 제한이 있는 상이다보니 나로선 제3문학권-인도, 아프리카 대륙 등-이 아닌 경우 제대로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소거법으로 알게되는 내 취향인가 보다. 반전 서사와 현대사회가 직면한 뻔한 교훈적 주제에 집착한 나머지 잃은 그저그런 문장력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은 피력해도 좋지 않을까. 힐러리 맨틀이 영국 내밀한 왕실과 정치로 우리를 안내했다면 같은 역사 소설 카테고리에서도 많이 다른 엘리너 캐턴의 소재 발굴은 분명 높이 살 만하다. 인간 최대의 난관인 끊을 수 없는 탐욕과 특별한 시대상황을 인류 보편의 문제로 승화하는 점은 훌륭하지만 『루미너리스』가 가진 단순 문장의 한계에 대한 지적을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게 이 긴 글의 설명인데, 중심축 인물이 존재하고 살인사건이라는 중심 사건이 있지만 초점이 여러 번 변하는 탓에 쭉 읽지 못하고 멈추고 나면 다시 읽을 때 앞을 계속 뒤적이게 된다. 선진국 혹은 자본주의가 짙은 국가가 가진 상업주의-반전 욕망 같은-를 맨부커는 버릴 수 없어보인다. 수전 바이어트의 『소유』나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존 쿳시의 『추락』,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처럼 서사와 문체를 동시에 붙잡는 작품이 2000년 이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을 읽는 건 즐거운 노동이다. 페이지가 아무리 길든, 반복되는 내용이든, 꼼꼼히 보느리 페이지를 들락거려도 여전히 문학은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문학다운 길을 가고 있다.

 

 

 

문학(을 읽는 일)이 시간낭비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전부라는 극단적 평가를 다 이해하는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문학 편애자 혹은 문학 애호가로 살테지만 요즘은 드라마나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어 하루에 동원가능한 시간을 다 빼앗긴다. <어셈블리>를 봤었다. 진상필 의원이 만 하루동안 연단에서 호소하는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는데, 물론 보좌관이 자료를 보충해주고 의원이 비오듯 땀흘리며 곧 쓰러질 것 같은 세세한 부분들도 그렇지만 필리버스터라는 처음 들어본 제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기 때문이었다. 이미 공부를 끝냈던 제도를 만 6개월 만에 현실 국회에서 볼 줄은, 그것도 지지하는 위기의 당 의원이 모두 나서서 고생에 고난을 거듭하는 눈물겨운 역사를 체험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젯밤 틀어두고 잔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의원의 호통치는 목소리에 잠이 깼다. 이 상황이 얼른 막을 내리고 우리 모두가 자유를 잃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 역사의 흐름이 국민과 정치 혹은 정의가 하나된 마음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하고 있다. 디카프리오는 동료들의 환호 속에 상을 받고 케이트 블란쳇은 그렇지 않아 아쉬움이 큰 반면, 그 고통과 절망의 체념을 체험하기 위해 애쓰며 연기했다는 브리 라슨의 연기를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의외라는 작품상 수상작도. 꼬박꼬박 받아보는 씨네21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수상작을 맞히지 못했다. 영화는 늘 그자리에 있었는데 영화제만 끝나면 왜 세상 모든 영화가 다 보고 싶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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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9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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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9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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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2 15: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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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2 15: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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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0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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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0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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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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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2 1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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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16: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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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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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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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5 1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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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5 1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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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출판계 결산을 보면 연말 이전 몇개월간 (평소 같은 기간 혹은 다른 시기(때)에 비해) 문학이 덜 팔렸다고 한다. 나는 문학이 읽는 감수성뿐만 아니라 소화하는 감수성도 있다고 여긴다. 읽는 일은 감정이입으로 가능하지만 리뷰 쓰는 일은 원래 가진 배경 지식과 배경 감수성에 크게 구애 받는다고. 많이 팔렸으면 덜 읽혔을 수도 있지만 덜 팔린 게 많이 읽혔을 리 없으니 결국 문학의 침체기라고 진단하더라. 문득 정말 진한 문학 같은 문학을 읽고 싶어서 그럴때면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고르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이 있는지 선뜻 떠올릴 수 없어 급하게 이북을 결제해 『카인』을 읽었다. 사라마구는 몇 번 시도한 작품들이 있지만 끝을 보지 못한 탓인지 기억에 없다. 제목만 카인인 줄 알았는데 정말 카인(이 구약성경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이야기다. 사라마구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타이틀로 열심히 홍보중이지만 사라마구를 읽는 첫 번째 방법이 이 소설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진심이다. 건조하지만 단호한 문체는 훌륭하지만 소재에 비해 구성이나 이야기하는 방식에 아쉬운 점이 있다. 어쨌거나 책 읽기는 이어져야 하는 법. 진지하게 읽는 사라마구 두번째 작품은 지난해부터 쭉 마음으로만 읽는 중인 『수도원의 비망록』이다. 다른 작품 두 권도 집에 있으니 올해 가진 책들을 읽을 예정이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사실 길게 말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나로선 아주 적거나 거의 없다. 아담과 하와,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이삭 살해(하려는) 현장. 구약을 관통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들을 따라 여행하는 카인과 도시의 여주인이자 모든 것을 삼킬 정도의 힘을 지닌 마녀 릴리스Lilith(아담이 하와와 결혼하기 전의 부인과 이름이 같음)와의 정력적인 사랑의 현장을 교차시킨다. 가진 것 없이 떠도는 흙바닥 밟는 노예였던 카인이 여주인의 안방 침실에서 여러날 보낼 수 있던 이유도 넘치는 정력과 서투름 혹은 비리듬감 때문이다. 젊고 쫓기고 급하고 서툴고 위험한 남자만큼 황홀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카인』은 구약의 여호와의 시험을 그대로 따르며 인간의 잘못과 죄를 묻는 데 초점을 맞춘다. 모든 죄는 인간이 저질러놓고 어째서 문제만 생기면 (인간을 만든) 신을 탓하는가 하고.

 

 

 

 

 

 

 

 

 

 

 

 

 

 

 

『색맹의 섬』은 세 번째 읽는 올리버 색스의 책이고, 이제 이 세상에 그가 없다는 걸 알고 읽는 첫 번째 책이다. 색스(주제와 글쓰기)에게 홀딱 반한 첫 번째 경험이기도 하다. 앞서 두 권을 읽을 땐 어떤 의무감에서 읽었고, 서로 다른 주제임에도 그의 주제와 글쓰기가 겹친다는 생각에 다시 읽을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다시 읽을 날이 오리라는 사실도 알았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거나 침대에서 자신의 다리를 주웠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한 권 더 읽어보려는 건 오로지 '섬'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어 있으며 하필 지금 재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색스는 편두통을 앓던 어린 시절 색각 이상 현상에 종종 시달리며 평생 색깔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색맹의 섬에 대한 존재를 듣게 됐다면 의학적 연구나 개인적인 호기심에 전율했대도 충분히 이해한다. 누군들 그 섬에 가고 싶지 않을까.

 

우연한 기회에 이룬 여행의 시작은 핀지랩(Pingelap)이라는 이름을 가진 섬에 선천성 전색맹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런저런 장애가 되는 사항들을 모조리 뛰어넘은 후에야 가능했다. 사실 온 색깔이 다 보이는 시각으로 색맹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다만 느낄 뿐이다. 조심스럽게 느낀 바를 말해보자면 색맹은 단순히 색을 구별할 수 없는 어떤 증상을 넘어서는 것 같다. 상상이 잘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일러스트 가득한 예쁜 책을 펄럭이며 여행/관찰/연구 등 일석무한조를 체험한다.

 

남태평양 오지 열대섬으로 떠난 두번의 미크로네시아 여행을 기록한 책이다. 제한구역이 많아 허가받은 군인 외에는 제대로 내릴 수도 없는 섬들을 지나쳐간다. 핵실험이 이뤄지고 죽은 땅이 된 곳이 있는 반면, 아름다운 열대섬의 풍광과 동식물이 그대로 보존되는 곳도 있다. 무한한 섬에 대한 열망이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도중 불시착하는 섬만 여러 개-그곳에서의 황홀한 이야기들은 덤. 핀지랩은 어떻게 한때 원주민 전체의 1/3이 전색맹을 앓는 섬이 되었나. 1775년 기록적인 태풍 탓으로 인구 대부분이 죽고 극소수가 살아남은 고립된 섬에서 적은 인구가 오랫동안 근친혼을 이어가다보니 부작용으로 마스쿤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들이 섬 바깥 세상보다 훨씬 많아졌다. 자연이 내려준 보석같은 땅이자 섬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만지고 느끼면서 살아간다. 흑백으로만 나뉘는 빛깔 없는 세계는 아픔과 기적과 감동이 함께 한다. 찌릿하면서도 황홀한 섬 여행기는 여행의 최종목표를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먼 곳으로 조정하게 만든다. 괌도 팔라우도 피지도 나우루도 아닌 내 지도에도 없던 미크로네시아라니. 『색맹의 섬』에 대해서라면 밤을 새서 언제까지라도 말할 수 있다.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소재거리들이 여럿 보이지만 배경의 특수성이나 윤리적으로 생각할거리를 던지는 솜씨로 보면 분명 보존과 보호, 유지와 변화에 관한 눈부신 수작이다. 제약회사인 '보걸'사社는 사장 폭스의 주도 하에 브라질 아마존 밀림으로 과학자를 파견해 신약 개발을 후원하고 있다. 비용을 대는 입장에서 애닉 스웬슨 박사의 팀과 쉽게 연락이 닿지 않아 초조한 중에, 현지 개발 사정을 알기 위해 평소 호기심 많고 성실한 연구원 앤더스 에크먼을 파견한다. 폭스가 연구원이자 연인인 머리나에게 동료 앤더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머리나와 안면있는 앤더스의 아내 캐런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 편지 속엔 아프거나 위험하다는 얘기가 하나도 없었다고, 왜 죽었는지, 어디 있는지 알기 원한다며 머리나를 재촉하고, 폭스는 이런저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앤더스 후임으로 머리나를 보내 사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여곡절끝에 스웬슨 교수와 만나지만 앤더스의 죽음은 사실과 달랐다.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이 사는 열대 우림으로 안내하는 것만으로 이 소설은 신비의 옷을 입는다. 식인 부족이 사는 강 옆 지류에 위치한 라카시족 마을이 스웬슨 박사의 관찰 대상이다. 라카시 여성에게는 폐경이 훨씬 지난 시기, 즉 아무리 늙은 여자라도 죽기 전까지 생식 능력이 있으며, 실제로 생산은 하되 양육은 손주들 몫으로 하고 있다. 이 마을에선 일흔 여성이 배가 부른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현대 여성의 불임과 임신 시기, 임신 연장에 관한 약물을 만드려는 게 그들의 목표다. 소설은 지루하게 연구 목표나 타당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과학자들이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채로 고립돼 살아가는 라카시족에 동화되는 과정, 풍속과 삶에 대한 간섭과 개입의 영역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들을 차근차근 펼쳐놓는다.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의사다(적어도 의학 교육을 받았거나 의학 지식을 가졌다). 부족인의 생명이 위독할 때 문명 사회에서 하던 대로 의사 역할을 할 경우, 사람을 살릴 확률이 높지만 그들이 사람을 살릴 줄 아는 의사인 걸 알게 된 토착민들이 과학자들을 가만히 둘까. 단지 연구 시간을 빼앗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연구/관찰 종료 후 과학자들이 마을을 떠나면 남은 이들은 생명이 위독한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이제껏 아픈 사람에게 통했던 방식, 치료법, 치료하는 사람의 위신이나 믿음이 이전과 똑같이 유지될 수 있을까. 외부 사람들이 오기 전에 부족민에게는 나름의 처방과 처치에 대한 확고한 원칙이 있었고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지혜와 풍속이 있었다. 외부인이 관찰자 역할에서 벗어나거나 개입자가 된다면 부족 마을의 질서는 흐트러지거나 지속되지 못할 게 뻔하다.

 

모든 인물이 제자리에서 확고하게 두드러진다. 이스터라는 귀여운 원시부족 꼬마, 귀머거리 꼬마. 오늘을 기준으로 앞뒤 육개월씩 잡아도 전무후무한 귀요미 캐릭터를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앤 패칫이라는 작가를 충분히 좋아할 수 있다. 스토리상의 허점과 구성상 아쉬움을 보충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으면 거짓말이지만 괜찮다, 이스터는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건 나중에 염려하고 지금은 지구 반대편 끝 어딘가 살고 있는 고집스럽고 영리하면서 자연친화적인 사람들을 생각하겠다. 이스터를 여기 이곳으로 데려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꼭 끌어안은 채 해먹에서 하룻밤 함께 자고 싶은 이스터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어디 못 가게 신발 숨기는 어린아이처럼 아직도 이 귀엽고 영리한 꼬마는 누군가의 물건들을 제 상자 안에 감추며 앤더스가 인내와 사랑으로 가르친 알파벳을 공부하며 때로 제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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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15: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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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16: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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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1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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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1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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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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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5 0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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