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18세기 조선을, 사화와 붕당을, 숙종과 영조와 정조를, 연암과 다산을 좋아한다. 아마 조선을 통틀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대목일 것이다. 그 복잡한 붕당의 흐름과 권력암투을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있어서는 안될, 없어도 좋을 당파싸움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현대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 또 융합되지 못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무엇보다 이 시대 얘기들은 무궁무진하고 권력구도와 학문, 사상적 일대기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사람을 매혹시킨다. 팽팽한 긴장선을 타고 흐르는 시대의 봉인. 영정조 시대를 가르는 두 줄기. 연암과 다산. 이런 전무후무한 라이벌. 매력넘친다, 이분들. 평생 같이 갈 남자를 고르는 거면 조금 더 끌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데, 인간적으로라면 그럴 수 없다. 너무나 상반된 분위기, 성격, 가치관이 그가 곧 그 사람이므로 가능한 것. 단점조차 인정해주고 싶은 연인이랄까. 생애와 시대가 밀착된 운명, 아름다운 블랙홀 속으로 지금 출발.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암과 다산의 생애와 명리학,양자역학적 사주 분석, 문체와 세계관, 사상과 윤리, 곁들어지는 붕당적 흐름까지. 붕당정치의 흐름을 교양 이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데도 연암의 벗들이나 다산의 친인척, 정조 곁의 남자들 이름이 낯선 경우가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들. 그들은 왜 단 한 번도 공식적인 만남이 없었을까. <두개의 별 두 개의 지도>는 이를 시작으로 2년에 한 권씩 3탄을 계획중이란다. 두 별의 생애와 업적, 18세기 정치사상지도와 시대적 흐름 그리고 세계문명권 지성사로 넓혔다가 돌아오는 과정으로. 길고 먼 여행이 되겠지.
물과 불(불을 품은 물과 물을 품은 불). 지혜와 열정. 사건과 사실을 꿰뚫는 힘과 어둠을 밝히는 투시력. 유머와 박학. 좁쌀 한알과 세상 모든 진리. 완격과 급격. 파동과 입자. 수많은 해석과 모호함의 제거. 노론 '벽파'와 남인-성호 '좌파'.
앞이 연암, 뒤가 다산의 특징이다. 두 사람의 출생에 25년이라는 격차가 있었다.
'삼중주'를 위한 세 개의 연대기
연암 : 1737~1805년
정조 : 1752~1800년
다산 : 1762~1836년
이 연대기가 말해주는 것? 맘고생 하면 권력과 재물을 다 가졌더라도 단명한다. 정조처럼. 권력의 중앙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쳤던 연암이 살 만큼 살았고, 군주를 잃고 권력으로부터 멀어져 학자로 변신하여 18년, 해배되고 18년을 더 산 다산이 가장 장수한 걸 보면 욕심과 화를 놓고 편히 지내는 기간이 길어야 오래 살 수 있다. 권력과 재물 없이 길고 가늘게 살면 뭐하냐고 묻진 마시고.
어쨌거나 두 별 사이의 교집합은 조선의 '달' 정조였다. 연암은 느슨한 권력욕, 자유, 호방한 성격, 다산은 강한 집념과 천주교, 정조는 문체반정과 개혁군주로 요약된다. 연암은 쉰 이후 아내가 죽자 생계형 관직에 딱 한 번 진출한 이외에는 관직과 멀어지려 애쓰는 삶을 살았다. 능력이 특출했기에 군주의 부름을 수없이 받지만 한사코 긍정의 응답을 사양한다. 다산은 달랐다. 과거에서 일부러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글을 끄적이다 나오는 연암에 비하면, 다산은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관직으로의 진출을 꿈꾸었다. 대과에 네 번 낙방하지만 합격 후 왕이 내는 과제를 매번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할 만큼 훌륭했다. 정조가 시도한 '초계문신'이나 '문체반정'은 정치와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였지만 '문체반정'은 사실상 흩트러진 조선의 성리학적 기반을 다스리고 군주의 권력을 확고히 하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개혁정치가 아니라 보수정치였던 셈이다.
벗과 가문, <열하일기>와 <목민심서>, 연암협과 다산초당, 문체와 서학(천주교). 성리학적 기반과 강상의 모든 것을 뒤엎고 유일신(군주)을 해체하며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 교리가 사실상 서양의 학문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학문이었기에 더욱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고, 대가없이 목숨 바치는 순교자가 늘어났다. 문체반정은 실패했지만 이 '반정'이 조선 시대의 다른 반정(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과는 다른 모습, 색다른 방향의 개혁구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타이르고 어르고 벌하고 유배하는 식으로 어긋난 것들을 바로잡을 거라 믿었던 어진 군주의 순진한 판단인지는 몰라도. 다산은 원칙주의자에 도덕주의자다. 정조의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타당하다고 여긴 듯하다. 비록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유머와 패러독스를 구사하는 연암의 문체를 군주와 함께 눈감아버림으로서 갈길을 잃어버리지만 말이다. 자신은 배교하지만 피해갈 수 없었던 가족들의 피바람.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던 군주. 군주의 죽음 후 닥친 신유박해. 다산의 삶은 천주교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문체와 서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 세계화와 맞물리지만 성리학적 지반을 뒤흔든다는 이유로 극렬한 변주를 시작했고, 많은 목숨을 희생시킨다. 서학으로부터 비교적 멀리있어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근거를 갖지도 못한 연암, 서학이 아니라면 후반부 인생을 설명할 수도 없는 다산. 이렇게 두 사람. 균열과 불길에 휩싸이며 꿋꿋하게 나아갔던 신념과 평행가도를 달리는 정반대의 삶, 그 운명이 돋보인다.
신기하다. 무신정권과 대동법이 그런 것처럼 연암 출생부터 다산 사망까지 100년. 영조는 조선역사상 가장 긴 52년의 재위기간으로 유명하고, 정조는 스물 다섯에 왕위에 올라 약 25년간 자리를 지킨다. 가장 개혁적인(보수든 진보든) 시도를 했던 두 왕의 사후, 조선이 급격한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그 세도정치기가 60년이 넘어간다는 것도, 이후 외세의 개방요구에 한없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도.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할아버지를 향한 애증을 모두 가졌던 정조는 탕평책, 법전편찬 등 할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가는 의아함을 보여준다. 폭군이 되지 않았다. 권력의 무자비를 휘두르지 않는 대신 학문과 개헉으로서 나아가고 싶어했다. 영정조 시대는 거의 77년이다. 연암과 다산이 왕에게로 통한 행태 역시 다르다. 한쪽은 가능할 때까지 도망갔고, 한쪽은 죽을 때까지 해바라기 사랑을 퍼부었다. 다산을 믿고 의지하고 높이 평가한 건 맞지만 왕이 신하 한 명에게 모든 것을 걸었을 리 없으니 다산의 군주를 향한 사랑이 더 맹목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인 '정조어찰첩'을 통해 밝혀진 걸로만 봐도 정조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맥으로 통치했다. 정조 시대의 측근으로 늘 다산이 등장하는 이유, 정조만 들어도 단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이유, 그게 바로 반복과 주입이 주는 교묘한 세뇌라할 수밖에.
다산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유배지에서다. 군주를 잃은 후 닥친 피바람이 그를 정숙한 학자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연암이 <열하일기>만을 남긴 데 비하면 다산의 저서는 나열하기도 벅찬 양이다. 다양한 주제의 사상적 텍스트들은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그의 시선과 마음은 늘 궁을 향해 있었다. 유배지에서의 많은 나날, 이미 없는 군주를 그리워하며 시대에 대한 애환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까. 연암이 훨훨 날아가듯 썼다면 다산은 주석과 인용을 통한 잘 짜인 백과사전식 구축에 힘을 쏟았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여행하며 붓 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쓴 <열하일기>와 목민관에서 지켜야 할 수령의 도덕적 지침서로 여겨지는 <목민심서>가 서로 다른 문체를 잘 설명해준다. 연암은 자신을 깨진 조각으로 여기며 전체에 필요한 일부가 되려 했다. 호기심 대왕, 유연한 지성, 호방한 성격, 폭발하는 역마살을 가진 그의 인생은 소리없이 흘렀다.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한문소설과 시짓기에 능했고, 성리학과 북벌론이라는 거대담론에 휩싸이지 않았다. 반면 다산은 세세한 사항에 집착했다. 세밀한 디테일과 방대한 주석이야말로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청렴과 절욕, 윤리적 내공 등 덕을 지닌 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도덕성에 기반을 둔 삶이다. 명랑과 진지. 두 사람의 기질은 고루 섞여야 마땅했다.
천 개의 '고원'과 천 개의 '계단', 유머와 패러독스 그리고 리얼리즘과 파토스. 쭉 읽어가다 알만큼 알게 되었을 때 이제껏 알던 모든 지식과 합쳐지면서 이 두 가지의 비교가 결국 두 개의 별을 밝히는 모든 것이라는 결론이 섰고,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개인사, 사상사, 생활상, 정치사까지 훑어내려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백 년의 시간이 순간처럼 여겨지기 시작할 때 나는 비로소 지금까지의 독서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에게는 고문이 어렵다. 적어도 아직은 <목민심서>나 <열하일기>를 읽을 능력은 되지 않는다. 연암과 다산이 지향하는 주제 역시 결국 같은 얘기였겠지만 상당부분 달랐다. 양반과 탐관오리의 무능과 허위를 비판하거나 밑바닥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여러 소설들에 드러난 풍자와 역설이 연암의 소설에서 드러난다면, 적나라하게 표출된 비장한 현실의 재현 속 고난과 분노와 격정을 드러내는 건 다산이었다. 서로 다른 글쓰기는 주제든 문체든 그 자체 측면에서 태생적 한계와 생애,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부조리와 저항 정신만은 꼭 닮았다. 두 사람의 시대를 향한 애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같은 시대를 이토록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다니. 심지어 먼저 간 지인의 묘비명 짓기에도 뛰어났던 이들의 차이는 애도와 증언인데, 지인의 다한 생을 두고 연암이 시를 지었다면, 다산은 증명하고 요약했다. 차이의 향연과 의미의 명징성, 프리랜서와 정규직, 에세이와 백과사전의 차이. 그들이 서로를 건드리지 않거나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러한 차이를 잘 알았고, 결코 융합되지 못하리라 여겼거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후자였으면 좋겠다.

<정조와 18세기>는 스스로를 태양과 달로 표현한 군주 루이 14세와 정조를 비교, 지금껏 개혁군주로 통한 정조에 대한 보수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시각을 담았다고 신문 북세션에서 소개하던 책이다. 심한 학술서 냄새, 이런 책이 교양도서로 자리잡을 리도 없지만 그나마 가장 개혁가였던 정조를 보수주의자로 결론내리면 내 사랑 정조, 그 이미지가 깨어지는 건 슬픈 일인데, 어떤 개체가 반드시 한 가지 평가로 귀결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사도세자가 왕인 나라에 살고 싶다고 썼던 기억난다. 아, 그래서 역사와 시각이 진보하고, 덩달아 독서도 진보하는 거라니까. 고집이 세서 태생상 팔랑귀는 절대 될 수가 없지만 역사를 어쩌나. 자, 제가 나서서 진실을 구하겠습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최근 학계의 다수설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당파정쟁의 희생양이기보다는 살인을 서슴지 않던 미치광이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사코 자결을 거부했고, 그 더운날 뒤주에서 홀로 몸부림치다 외롭게 죽었다는 것. 어쨌거나 왕위를 이어야 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진 세자가 뒤주에 갇혀죽은 사실이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닌데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충격이 거듭되고 있다. 진실은 하나일텐데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시각은 뒤집히지 않는다. 역사의 어떤 사건을 두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부치거나 지나친 소설짓기는 불편한데, 그렇다면 재미로 보면 그만이라는 사극도 문제가 된다고 본다. 김태희가 연기하는 장옥정은 인현왕후와 영혼체인지한 것 같다. 비난하기 위해 읽는다는 말도 있으니 난 언제나 그저 보고 읽을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