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싸움은 조선후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심이 되는 줄기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왕실의 왕위다툼 정도로 인식됐는데 조선후기 들어오면서 공신들의 힘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세력 바람에 따라 당대의 줄기가 이리저리 휘기도 한다. 피바람이 불고 왕이 끌려 내려오고 허수아비 왕이 올라가기도 한다. 고려나 조선전기에 비해 조선후기는, 서민 위주의 정책들이 많고 문화적으로도 한글소설, 판소리, 사설시조 등이 널리 퍼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왕실정치는 그들 중심으로만 돌아갔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을 하루에 몇 번씩 읊으며 조선시대 역사의 맥을 짚어갈 때 나는 알아야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을 분별없이 수용했다. 어느새 야사는 시대의 디테일을 연결시키기 위해 알아야만 하는,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 되어버렸다.


역사는 그를 두고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불운한 세자라 불렀다. 어째서 세자가 다른 곳도 아닌 뒤주에 갇혀 죽어야 했는지 오늘날 그 정도는 상식이다. 놀라운 건 이유를 파헤치고 들어가보면 현 정치상황이 보인다는 것. 지금의 정당정치와 조선후기 당파싸움은 형태가 거의 흡사하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 북학론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으로, 아내 강빈과 정치적 뜻을 함께한 형 소현세자 대신 왕위를 계승한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면서 조선후기 당파싸움이 본격화 된다. 눈을 씻고 봐도 그들의 싸움에 백성이 없다. 우리가 공부하는 역사란 늘 승자 중심, 높은 자 중심, 권력 가진 자 중심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왕권을 누가 계승할 것인가, 실세는 누가 쥐게 되는가, 훗날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등 세 가지로 압축된다.
그래서 왕실에는 피바람이 일상이다. 실제로 왕권이 강했던 시기는 손에 꼽을 정도고 늘 왕조차 안심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조선역사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고려나 조선전기에는 태종, 세조 같은 찬탈로 왕이 된 이들의 궁궐 내 싸움이었고, 왕권이 그때만큼 강하지 않은 조선후기에는 측근세력들이 활기친다. 오로지 권력과 힘. 두 가지를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지리하다. 효종과 현종 때에는 그나마 덜했다 볼 수 있다. 청과의 싸움에 온 나라가 목매고 있었으니 주전론과 주화론(북학론과 북벌론의 대립)이 팽배했을지언정 내부적 다툼은 덜할 수밖에 없었다. 집밖에 나가 싸워 이기려면 가족끼리 똘똘 뭉치는 수 밖에 없다. 붕당정치가 시작된 시기는 임진왜란 즈음 선조나 양난 이후 광해군 시점부터지만 당시에는 안팎으로 흉흉했기에 당파들은 별 의미가 없었다. 시간이 좀 흘러 인조,효종,현종 때에는 비교적 다양한 세력이 공존할 수 있었다. 북벌 다툼은 있었으나 그 바람은 안이 아니라 바깥을 향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향한 구밀복검(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 속에는 칼을 차고 있음)을 알아챌 수 없었다.

앞서 선조 때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에 대한 개혁문제로 소극적 기성사림과 적극적 신진사림의 갈등이 발발한다. 훗날 이조전랑직을 계기로 김효원을 주축으로 하는 신진사림(동인)과 심의겸을 주축으로 하는 기성사림(서인)으로 나뉜다. 또한 정여립 모반사건과 정철의 건저의 문제 등으로 동인이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리된다.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또 편먹기는 얼마나 쉬운지 오늘날에 견주어볼 때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참 대단했구나 싶다. 현종 때에는 효종과 효종비의 죽음에 대한 복상 기간과 궁중의례 적용문제로 서인과 남인의 입장차가 생기는데 1차는 서인이 이기고 2차는 남인이 이긴다. 이를 예송논쟁이라 한다. 예송논쟁 후 잠시 남인이 실권을 잡게 된다. 이후 왕권이 바뀌어 숙종이 오를 때까지 북인과 동인,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며 꽤 균형적인 붕당정치가 운영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숙종 때 경신환국을 계기로 판세는 뒤집힌다. 왕위에 오른 숙종이 당시 집권세력인 남인을 신뢰하지 못해 다시 서인을 불러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숙종 때 집권하게 된 서인은 왕위계승 문제로 다투다 다시 (보수)노론과 (진보)소론으로 갈라진다. 기사환국(경종의 왕위계승 문제)으로 잠시 남인에게 실권이 넘어가기도 하지만 장희빈 소생의 경종 다음으로 경종의 배다른 동생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오래도록 집권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평균수명에 비해 유난히 수명이 길었던 영조 재위기간이 50년 이상이었으니 거의 일당독재화 되었던 셈이다. 영조와 노론의 입장이 늘 같았는지는 모르지만 노론의 입김이 워낙 세서 영조 또한 노론의 눈치를 살피는 현실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소생인 영조가 재위기간 내내 왕좌에서 쫓겨날까 불안해한 건 모두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노론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소론과 남인의 편에 섰던 사도세자는 늘 노론의 음해에 시달렸다. 사도세자가 왕좌를 노리기 위해 그랬는지, 정말로 옳은 소리를 내기 위해 그랬는지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자의 뉘앙스는 후자 쪽이다. 사도세자는 철저히 피해자로만 그려진다.
또한 사도세자는 아내 혜경궁 홍씨가 서인 집안이었기에 장인 홍봉한을 주축으로 한 세력에 늘 견제당했다. 혜경궁 홍씨 또한 지아비가 아닌 가문의 편을 들면서 사도세자는 늘 외로운 싸움을 강행했다. 언제나 가지지 못한 쪽은, 간절한 쪽은 소수인 적이 많다. 영조 또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픈 의지와 욕망이 강한 임금이었기에 노론 못지않게 사도세자의 속마음을 의심했다. 아버지로서의 영조와 이 나라 최고 통치권자의 영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숙종 때 명분 뿐인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다음 왕인 영조도 이어갔지만 서인 중 노론이 거의 모든 정치를 장악하고 있어 사실상 공평하게 힘을 실어주는 붕당정치는 어려웠다.

사도세자는 그 싸움중 음해와 시기 속에 희생되었다. 사도세자가 소론과 남인의 손을 들 때마다 눈엣가시로 여겼던 현 실세 노론은 강경하게 대처했고 하다못해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과 정신병에 대한 거짓 상고를 올리기까지 한다. 물론 실제 사도세자가 그랬을 수도 있다. 역사의 진실을 100% 알 수는 없지만, 사도세자의 삶이 한 나라의 세자로 위엄있게 살아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왕의 아들이었던 셈. 게다가 아내 혜경궁 홍씨 또한 사도세자의 편이 아니었으므로 일평생 어깨에 짐이 두 개 얹혀진 것처럼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 또한 사도세자의 비행과 정신병이 진짜였다고 보면 논할 의미가 상실되는 게 사실이다. 여하간 세상은 노론의 천하일색이었을 것이다. 견제세력 없는 집권세력의 횡포와 만행쯤이야 쉽게 짐작되고도 남는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 후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정조가 되면서, 노론 강경파 대신 소론과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연민과 노론세력에 대한 견제가 그의 정치 원동력이었다. 어느 정도 붕당교체가 일어나면서 새바람이 불어온다. 이때 등장한 남인 중에 정약용과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같은 인물들이 있다. 정조는 양반 뿐 아니라 그동안 세력에서 배제되어 있던 서얼 출신도 과감히 등용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발굴했다. 정조 집권기에는 비교적 영조 때와 비슷하게 어느 정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정당 또한 균형을 이루기 위해 애썼으며, 보잘 것 없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화성으로 이전하는 등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정조의 최대 딜레마는 아버지를 따르면 어머니가 울고, 어머니를 따르면 아버지가 운다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고민과 시름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 것인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는 현명하다.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을 차차 바로잡아가면서도, 어머니의 가문에 피비린내 나는 복수는 하지 않는다. 그는 연산군은 물론이고 광해군과도 달랐다. 지금도 정조는 조선후기를 통틀어 가장 어진 왕으로 평가된다.(세종대왕도 계시긴 하지만 아버지가 태종인데다 수양대군(세조) 같은 아들을 남겼으니 업적을 벗어나서 보면 돌연변이 왕 같다) 정조가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노론 벽파를 배제하고 그동안 정치에서 배제되어 있던 시파와 남인에게 대거 기회를 주었으므로 정조 집권기에는 노론이 칼을 갈고 있었다. 정조의 죽음 후 할아버지 영조의 계비이자 자신의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정약용 등 관련 인물들은 대부분 유배를 당하면서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몰아친다. 조선후기의 역사는 이와 같이 당파싸움을 빼고나면 남는 게 없다. 외부침입으로 인한 전쟁 같은 걸로 힘빼지 않아도 됐으니 왕위계승다툼 대신 백성들과 국가를 위해 에너지를 썼다면 조선사와 근대사는 물론 현대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 같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배경과 붕당정치의 숲을 생생하게 살려놓은 것이 특징이다. 비교적 사도세자의 편에서 서술했고, 뒤주에서 죽었다는 사도세자의 숨겨진 인생을 되살렸다. 내내 생각했다. 그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영조는 정확히 51년 8개월을 왕위에 있었다. 본인의 컴플렉스로 인한 불안과 자체 욕망도 컸지만, 때문에 더 큰 그림을 볼 줄 모르고 자식을 희생시킨 잘못이 크다. 형이었던 경종 독살설에 대한 의심과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실망이 그의 재위기간 중 업적을 많이 가리는 것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어진 사람이라도 직접 자리에 앉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이 잘나고 어진 왕 하나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나는 사도세자의 백성이 되어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모두가 '예스'라고 외칠 때 '노'라고 말하는 왕이었으니 적어도 욕망으로 꽉 찬 탐욕스런 왕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물론 가설이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왕이 된다는 가설을 세우고 나서도 맘 편할 수 없는 배경들이 많다. 영조의 생명줄이 이토록 길었다면 살아생전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했을지 모르겠다. 당시 노론세력이 굉장했고, 세손 이산이 아버지와 뜻을 같이했다면 설사 사도세자가 왕이 되었다고 해도 그는 물론 세손 또한 안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사도세자와 정조가 당시 노론세력을 완전히 잡고 진정한 탕평책을 공고히 한 채로 역사가 흘렀다면 조선후기의 왕조사는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조가 죽자마자 세도정치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고, 세도정치로 인해 흉흉해진 세상에 흥선대원군이 힘을 행사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문' 보다 '무', '글' 보다 '칼'의 성향을 지녔다는 사도세자니까 조선은 지금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 없지만, 그럴 수 있어서 나는 참 재미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타임머신을 타고 가봤으면 싶기도 하고, 권력이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해낼 수 있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당쟁사>는 한국사 수업을 듣던 교수의 조선후기 당쟁을 공부하기 위한 추천도서, 오세영의 <북벌>은 내 관심도서, 읽은 책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