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토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토할 것 같은 건 사르트르가 아니라 나였다. 백지연을 좋아해서 샀던 자기계발서(크리티컬 매스)에는 늘 15도까지만 끓어오르라는 얘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14.9999999도에서 포기할 때 나만이라도 0.1111111만큼만 더 끓어오를 간절함과 끈기와 몰입을 가지라고. 몰라서 그런 게 아닌 거잖아. 나는 그 책을 던졌지만 의미를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스물 아홉과 서른이 내게는 그다지 벅차지 않았고, 평균수명과 절명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갈 일이 더 많이 남은 걸 저주했다. 자기만의 세상에 방을 만들고 들어가 끝내 스스로를 죽이는 간절함을 이해했다. 나는 다만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그래, 지금껏 내가 살 수 있었던 건 용기가 조금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5년 전 영국 드라마 [스킨스]를 보면서 처음 읽으려고 했었다. 거기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존재를 증명해야 할 기로에서 정신착란을 겪고 있었다. 꿈을 찾아야 했고, 세상을 전복시키려 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오면 약과 춤과 자기학대에 골몰했다. 처음에는 퇴폐적이었다. 영국은 무겁지만 어두운 곳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영국 드라마를 배운 나는 BBC 뉴스보다 먼저 그 어린 주인공들이 생각난다. 자기 삶 앞에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 애썼던 어린 영혼들 말이다.
대학 졸업 때까지 내가 욕심낸 전집은 카뮈 뿐인데, 내 20대 안에 카뮈의 사유와 게바라의 용기만 있다면 뭐든 할 것 같았는데, 카뮈만 책장에 나란히 있으면 세상 끝까지라도 갈 것 같았는데, 그의 도시 알제와 프랑스면 그토록 황홀한 여행이 또 없을 것 같았는데, 성큼 다가왔다. 내가, 나라는 존재가, 그리고 사르트르가, 사르트르의 사유가, 사상이, 그가 세상에 뱉어논 <구토>가 구원 같았다. 이 책을 보부아르 두 권(위기의 여자, 제2의 성)을 읽고난 이후 다시 읽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 이토록 버겁고 무겁고 아픈 내가 존재의 증명인데, 얼만큼 더 실존의 증명을 배워야 하는지 궁금했다. 구토는 구토를 유발할 뿐, 읽어낸다 해서 그 속에 답이 없건만, 어리석은 나는 답을 구하려 했다. 내민 손이 하염없이 부끄러워졌을 때 그때 깨달았다. 내가 타고 있는 롤러코스터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애초부터 사르트르에 답은 없었다. 그는 단지 그 사실을 전했다. 책 안에는 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내가 갖고 싶은 것에는 형체가 없었다. 아니 불분명했다. 그때마다 구토가 일었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끊었다. 술에는 그래, 말하고 싶지 않은, 말하지 못하는 아픈 추억이 많다. 그 시절 나는 외롭지는 않았지만 지독히 무서웠다. 그러나 잘 살고 싶었다. 자존심과 고집과 나르시시즘까지 고수해온 모든 것들이 차례로 구겨지고 접힐 때, 울지 말아야 할 곳에서 주저 앉았다. 책은 멀어졌다. 20대의 절반은 그렇게 책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읽었다고 했지만 충분하지 않은 걸 아는 건 나 뿐이다. 섹스와 마약에 쩔어있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시간이 흘러갔다. 대상도 없이 미쳐있었던 모든 찬란했던 순간을 이제와 책에 양보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혼란으로 겨우 덮었는데 올해 맘 먹은 책 네 권(삼십세, 시지프스 신화, 벨자, 구토)을 서른(만으로는 여전히 이십팔세다)이 절반 남은 시점에서 시작하며 나는 좀 성숙해졌다(고 믿고 싶다). 바흐만을 가르쳐준 친구가 있다. 20대 내내 오래 파리와 서울을 오간,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안 자고 일큐팔사를 단숨에 읽어내리던, 실비아 플라스 같은 예민함으로 세상을 견딜 듯했던 친구가 있었다. 전공이 불어였고 파리를 사랑했다. 그애 20대의 절반은 파리였다. 어쩌면 절반보다 더 긴 시간을 파리에서 살았다. 한동안 그를 좋아해서 때로 나는 탐정이 됐었다. 그애가 그의 여자라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탐정놀이는 생각보다 미련하지 않고 집착스럽지도 않고 포기도 빠른 내 덕으로 오래가지 않았다. 내게 파리의 모든 문학과 예술은 그애로 귀결된다.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이 나이에. 더 알아야 할 게 남긴 했나. 마음이 둔탁해지고 못 가진 것만 보이고 닿지도 않을 질투를 시작한다. 5년 전이었다면 '좋아해요'라고 단숨에 고백했을 것이다. 싫은 티를 숨기기 보다 좋은 티를 숨기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스무살에 이미 배웠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모두 알고 있던 마음보다는 크고 싶었다. 숨기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말할 용기 아니 용기를 가질 거란 욕망조차도 잃었다. 어른이 되려는 것일까. 어느 순간 가는 세월을 더는 붙잡지 못할 걸 알았고, 더는 물을 것도 구할 답도 없으니 제발 이 착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고작 그것만이 아니, 그것조차도 불가능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과거의 일이다. 현재의 일이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니까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내 맘을 알아채는 일도 없겠지. 그저 왜 이 순간 내쳐야 했는지, 이제 날 잊었는지에 대해서는 혼자만 생각할 것이다. 미지의 공간에는 아무도 들여놓지 않을 것이고, 달래기 위해 바흐의 칸타타 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고 아스팔트가 끓어오르는 아픈 여름에는 아무래도 고백할 수가 없다. 가을이나 겨울이었다면 시끄러운 명동 어느 거리에서 네 손을 잡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사르트르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묘지기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 때문에 모든 여정을 시작했지만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안내하는 파리관광을 고스란히 답습했던 그 여정은 돌아와서야 실망스러웠지만 괜찮았다. 가보지 못한 몽파르나스의 묘지, 그곳에 시대를 앞선 결혼생활을 했던 유명한 지식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고 처음 알려준 그녀를 다시 볼 일은 없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이 구토스럽다. 차오르는 말을 삼키는 것이 어른이 됐다고 믿는 이것이, 그저 몸이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자위하는 이것이, 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시간들의 반증이다. 지나간 시간은 없다. 다가올 시간도 마찬가지다. 나는 혼자다.
하루, 일생, 지구, 우주. 네 가지 테마로 시간(Time)를 설명하는 BBC 다큐를 틀었다. 이토록 그대로인 나를 자꾸만 다른 무엇이 되도록 강요하는 '시간'이란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시간에 얽매이는 삶을 살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시간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진 못할 터였다. 아무 것도, 그 무엇도, 나를 해갈시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불안하게 내 머리 위로만 내려앉는 것 같을 때에는 늘 그랬듯 방법이 없다. 쌓인 신문에서는 종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으르릉대며 싸우고, 간혹 감동적인 사연이 살아가는 이유를 챙겨준다. [신의 퀴즈]의 어느 주 에피소드는 환각이었다. 독성을 가진 식물, 서서히 파괴하는 식물, 치유하는 식물 등 식물들의 세상도 인간사와 같다. 도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필요한 것과 필요악, 쓰잘데기 없는 것, 나의 무엇을 긍정하고 또 무엇을 부정할 수 있을까. 어떤 식물은 그 향에 노출되면 환각을 보여주는데, 환각 속에서 평소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본다. 지금 그 향에 중독된다면 나는 또다른 나를 볼 것 같다. 바닥에 가라앉은 절망과 고독과 질투와 시기, 그런 것들과 마주할 것 같다. 처녀귀신 보다 악마보다 사탄보다 강시보다 훨씬 겁날 것 같다. 알제리의 독립을 적극 지지해 드골과 대립각을 빚었던 사람, 나처럼 남쪽 항구도시에서 살았던 사람, 보부아르와의 결혼생활에서 보통(대부분)의 남자들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들)를 과감히 내려놓고 삶의 동반자이자 지식인으로서 그녀를 인정했던 사람, 그 무엇보다 자유를 우선했으면서도 책임을 잃지는 않던 사람, 누군가로부터 본질을 결정당하는 게 싫어 노벨상 수상마저도 거부했던 그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내'가 구토라고 말했다. 존재 자체가 구토라고. 존재는 구토를 견디며 앞으로 가는 거라고.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라는 귀중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먹거나 마시고 있지만, 존재하는 데는 어떠한 이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p.209)
로캉탱이 사르트르의 페르소나란 걸 부정할 수 없다. 철학교사, 역사연구가, 항구도시 르 아브르, 연금자, 구토자, 내면 연구자까지 로캉탱의 내면은 사르트르의 그것과 닮았다. 아무리 남의 의식이라지만 따라가는 입장이 만만찮다. 어려우면 내면에 처박히든지 외부로 시선을 돌리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자. 외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내면으로 끌어안아 죽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테니까. 어긋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자. 극단을 택하란 말이다. 소멸시키고 다시 쓰자는 말은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당신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네가 그렇듯 너의 옛날에 나는 관심이 없다. 내 이전에 이미 이름 붙여진 것들과는 싸우고 싶지 않다. 연애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쉽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물들은 명명된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사물은 그로테스크하고, 고집이 세고, 거인같이 거기에 있다. 그것들을 의자라고 부른다든가, 또는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려는 짓은 바보 짓일 것이다. 나는 이름붙일 수 없는 '사물들'의 한복판에 있다. 혼자서 말없이, 아무 방비 없는 나를 사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밑에서, 뒤에서, 위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다. 사물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강요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을 뿐이다. 의자 쿠션 밑 나무틀에 한 줄기 어두운 선이 닿아 있다. 그것은 신비스럽고 장난꾼 같은 모습으로 거의 미소에 가까운 것을 띠고 의자를 타고 뻗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한다. (pp.234-235)
환각은 계속된다. 이런 방법으로 사물을 계속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부정하지 않은 채 세상을 부정하려 하고, 이해되지 않는 관념을 이미지로 환기하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진정성 결여의 체험이다. 사르트르는 로캉탱이 되어 만나는 모든 등장인물을 전복시킨다. 옳다고 생각했던 윤리도덕적 휴머니즘에도 구토한다. 읽는 나는 무력화된다. 무엇이 구원이고 절망이며, 왜 어떤 것은 잠재적인 반면 어떤 것은 발화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밤 이름이 없고 그러므로 부재한다.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속절없는 미친 짓으로 자각된다. 누구나 두 가지(선과 악) 모습을 가졌으면서 왜 어떤 사람은 선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악이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이 순간에도 나는 내 모습이 어떨지를 걱정하고 있다. <구토>는 서울대 추천 고교 필독서다. '고교'생은 무얼 느껴야 할까. 당시의 내가 아니 내게, 사르트르가 있었다면, 홀든이 있었다면, 나는 내 좁은 방을 박차고 나올 수 있었을까. 제도와 관습에 꽁꽁 묶인 학교를 박차고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었을까.
혼란이 술주정처럼 발화하다니, 지금 나는 낭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길어지는 건 생각이 많았다는 증거이자 무슨 생각하는지 몰랐다는 반증이다. 나로서는 이 글을 간추려볼 엄두도 내지 못하겠다. 사르트르는 글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의식과 사상의 흐름이 이토록 멋지게 형상화된 글을 나는 처음 읽어본다. 이 순간에도 나는 진정성을 잃었다. 환각상태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대화가 없다. 고통이 없고 공감이 없고 간절함이 없다. 내 안에 나는 존재하는가. 얼마나 더 서로에게 상쾌한 바람일 수 있을까. 부르고 부르다 지쳐 겨우 들려오는 메아리에도 귀기울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권태는 만나지 못한다. 내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시대에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 이 계절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 난 이렇게 뼛속 깊은 곳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미치도록 화사한 오늘같은 여름날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청춘과 빛과 희망과 행복을 말하는 모든 것들을 불살라야 한다. 아니면 거창한 사랑을 시작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