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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책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0월
평점 :
『여행자의 책』을 눈앞에 두고도 정체를 모르다가 한 챕터가 끝나고서야 안다. 아, 이 책, 이토록 신비로운 독특함. 여행기일 줄 알았는데 아니다. 생각과도 다르고 기대와도 다르다. 여행을 (본인이) 닿을 수 있는 삶의 모든 가치와 견주어 보는 습관이 있을 정도로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나)에게는 필연적인 책. 하지만 물리적 이동보다 공간의 변화 없이도 원하는 세상을 얻어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도 다가가기 좋을 책. 여행의 설렘으로 누구에게나 조금 소중할 책. 궁극적으로 여행 책은 모두 이 우주를 듬뿍 담고 있으니. 이 책은 여행과 여행자에 대한 거대한 아포리즘이다. 시중에서 번역본으로 딱 한 권 구할 수 있는 폴 서루의 유명한 저작 『아프리카 방랑』을 읽은 적 있기에 나와 작가의 거리는 비교적 가깝다. 단편소설을 많이 쓴 책에 일가견 있는 '도서관'의 작가 보르헤스의 『픽션들』 이나 『알레프』를 펼쳤다가 소설이 아니라 철학 에세이였구나, 감탄으로 끝내본 독서경험이 있듯, 『아프리카 방랑』 역시 여행 작가가 쓴 기행서라기보다 『슬픈 열대』로 유명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레비-스트로스의 글에서 인류학적인 연구 부분을 빼고 여행 부분만을 떼어놓고 읽을 때 얘기지만.
여행은 편견, 완고함, 편협함에 치명타를 날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여행이 몹시 필요하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광범위하고 건전하며 너그러운 견해는 일생 동안 지구의 한 작은 구석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_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 여행기, 1869』
폴 서루는 『바다에 면한 왕국』에 이렇게 쓴다.
여행은 많은 경우에 시간에 대한 실험이다. 제3세계 나라들에서 나는 내가 과거로 떨어진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든 결코 무시간성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특별한 연도들을 갖고 있다. 터키에서는 1952년, 말레이시아에서는 1937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910년, 볼리비아에서는 1949년이었다. 소련에서는 20년 전이었고, 노르웨이에서는 10년 전, 프랑스에서는 5년 전이었다. 호주에서는 늘 작년이었고 일본에서는 다음 주였다. 영국과 미국은 현재였다. 그러나 현재는 미래를 포함한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장을 읽으면서야 나는 그가 여행을 시간 여행에 빗댄 완전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기차여행에 관한 문장들을 지나 헨리 필딩(1707~1754)의 말을 만난다. 이 책에 밑줄을 그으면 몇 문장이면 될지 모르지만 포스트잇을 붙이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관습과 풍속이 모든 곳에서 똑같다면, 언덕과 계곡과 강이 다르다고 해도, 여행만큼 따분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지구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시점들은 여행자에게 그의 노동에 걸맞는 만족을 거의 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고전 작가들의 여행기는 대체 언제, 얼마만큼의 여행한 후에야 쓰여졌을까. 이 대단한 작가들은 여행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무엇보다 궁금한 건 시대도 장소도 제각각 다른 유명인들의 여행 가방에 무엇이 들었을까 싶은 것. 이에 대한 정보는 유명 작가의 경우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역시 흥미로운 구절들이 많이 있다. 잭 런던은 젊은 시절부터 알코올 중독과 콩팥 질병, 위장 문제가 있었다. 여행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렸는데, 40세에 모르핀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그레이엄 그린은 광적인 우울, 거미에 대한 공포, 새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가 있었다고 한다. 헨리 제임스는 지속적인 변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년기 내내 유럽의 여러 온천을 찾아다녔고, 에벌린 워는 스리랑카로 가는 항해 도중 편집증과 피해망상증이 일어났으며, 이 증상은 『길버트 핀폴드의 시련』이라는 작품을 낳았다.
사실 여행의 기간과 장소 그리고 날짜는 여행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보가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가 궁금한 건 글로 이름을 떨친 유명 작가들이 정작 누구와 여행했는가 이다. 그중에 블륜 커플도 있었을지, 모험이나 미스터리 장르로 환원될 만한 에피소드들이 있었는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친구들과 케이프 코드를 횡단했고, 56세의 앙드레 지드는 26세의 연인과 함께 콩고와 차드를 여행했다. 브루스 채트윈은 『파타고니아』와 『송라인』을 쓰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친구, 안내자와 여행을 갔다고 했지만 실은 동성의 연인이나 아내와 함께 갔다. 키플링 역시 그의 많은 여행에 아내가 함께 했으며, D.H 로렌스와 존 스타인벡, 레비-스트로스도 아내와, 서머싯 몸은 연인과 함께였다.
처음 듣는 얘기지만 일반적으로 영국인 여행의 역사는 햇빛을 찾아 떠난 여행의 역사와 같다고 한다. 영국의 날씨가 대체로 우중충해서 기후 탓이 크다고 하는데, 이 말에 반대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D.H. 로렌스와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은 이 말에 크개 동의했던 것 같다. 여행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행하는 법을 모른다면 걸으면 해결된다. 하지만 평생 여행 한번 하지 않고도 그것을 미덕으로 만든 자들이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80년에 이르는 생애 동안 그의 탄생지인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로부터 160킬로미터 이상 여행한 일이 없었고, 필립 라킨은 영국 해안의 헐에 있는 집에서 벗어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에드거 앨런 포는 영국에서 짧게 젊은 시절을 보냈을 뿐이고, 소로는 결코 미국을 떠나지 않았으며, 에밀리 디킨슨도 거의 집에 매여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이국에 대한 훌륭한 글을 썼다. "집에 머무는 것, 내부에 머무는 것, 제자리를 맴도는 것은 관습적인 여행의 방식에 길들여진 정신을 자극할 수 있다"는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All or Nothing을 모토로 사는, 여행애호가인 나도 충분히 동의할 만한 말이다. 위스망스의 『거꾸로』 에 나오는 주인공은 런던을 여행하기 위해 공들여 계획하지만 나태에 압도되어 파리에 있는 영국풍 술집의 디킨스적인 분위기에 만족한다. 영국 해협을 건너는 지루함에 대해 생각한 그는 여행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여행다운 여행을 이룩하는 데 성공한다.
또 한 편의 아름답고 아련한 작품에 대해 오마주할 생각이다. 여행은 상상에서조차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이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상상력은 여행에 대한 상상력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소설이 '상상 여행' 범주에 포함된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화자는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의 여행담을 들려주는 마르코 폴로이지만 작가의 상상 안에 존재하는 실제의 마르코 폴로와는 다른(변형된) 인물이다. 그리고 음식! 여행지에서의 음식 맛은 절대 잊혀지는 종류의 감각이 아니다. 여행의 유일한 즐거움 중 하나지만 여기 나오는 고슴도치, 고양이, 낙타, 여우, 올빼미 고기와 원숭이의 눈, 코끼리의 코, 원숭이 스튜, 튀긴 사고 딱정벌레, 아시아의 개고기에서 포기, 이만 다음 챕터로.
여행자에게는 자유와 지혜, 규칙이 모두 요구된다. 그리고 어느 기준도 없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앞서 말한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여행을 위해 여행한 게 아니었다. 그는 신화연구자와 인류학자로서 여행했지만 역사에 남아있는 그의 글은 여행을 말할 때 종종 인용된다. 그는 브라질에서 여행을 시작해 인도와 파키스탄을 여행했고,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이었고, 백 살이 넘게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슬픈 열대』에는 여행 문학으로도 전혀 손색 없는 구절이 있다.
여행은 보통 공간의 이동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부적절한 개념이다. 여행은 공간, 시간, 사회 계층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각각의 인상은 이 세 개의 축에 공동으로 연관될 때에만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공간은 본질적으로 3차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여행에 대해 적절한 묘사를 하려면 다섯 개의 축이 필요하다.
여행자가 여행을 통해 자신의 문명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문명과 접촉했던 시대가 있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그러한 예는 점점 줄어들었다. 현대의 여행자는 인도를 방문하든 미국을 방문하든, 생각보다 덜 놀란다.
아마도 그때의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막보다는 내 마음의 사막에 대한 탐험이었다. _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스스로 여행에 대해 가진 로망과 환상을 많이 걷어내야 한다고 늘 생각하지만 어쩌면 여행을 환상으로 만든 건 내가 아니라 여행의 본질인지도.
왜 어떤 장소는 추앙하고 왜 어떤 장소는 홀대하는지, 가보지 않고도 그곳에 대해 훌륭하게 쓴 작가들의 비결이 뭔지 궁금해하다가 여행 고전들을 더 읽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닿았다. 폴 서루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느 책에서 만나든 여행에 관련된 문장은 그저 훑고 지나쳤을 게 분명하지만, 이제 좀 더 주시하게 되겠지. 그것만으로도 굿.
『파타고니아』와 『송라인』, 『토성의 고리』, 『슬픈 열대』, 『맨더빌 여행기』를 비롯해 유명 작가들의 여행기를 찾아볼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펼쳤다가 낯선 이질감에 도로 덮고 나오던 책이 어디 한둘인가만, 『맨더빌 여행기』는 유독 표지까지 기억난다. 그러면 이제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할까. 여행지를 결정해야 하나. 어떤 장소의 이름은 그 이름 자체만으로 여행자를 매혹한다. 어떤 이름은 이유없이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못해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이름을 예로 든다. 바그다드, 만달레이, 타히티, 마르세유, 과테말라시티, 알렉산드리아, 상파울루, 비아리츠.. 왠지 모르게 위험하고 아찔하고 오묘하고 이상할 것 같은 도시들이다. "여행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알베르 카뮈는 썼다. 하지만 정작 자동차 공포증이 있던 카뮈는 멀리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여행하는 조건은 각자 다른 법이고, 말했듯 자유가 가장 우선이다. 폴 서루가 쓴 『여행자의 책』에서 여행은 이렇게 끝난다. 여행의 규칙 혹은 의미 열 가지. 다 나열하진 않겠다. 생각은 각자 다른 법이니. 여행은 몇 가지 깨달음과 통찰을 남기고, 좁은 세상을 달라지게 하고 심지어 변하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영영 끝나지 않는다. 끝났을 때조차도. 물론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과 돌아갈 곳을 알고 있을 때만. 일기를 쓰고 친구를 사귀고 추억을 샀다. 내 여행은 매번 그렇게 끝났다. 사진으로 남기고 기억으로 붙들어 글로 옮겼지만 소용 없었다. 나는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어디에도 어느 한 순간도. 여행에서 머무는 건 내가 아니라 시간일 뿐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