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탄생
래리 쉬너 지음, 김정란 옮김 / 들녘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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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7년 2월 11일



   작년 10월 13일었다.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한 통의 문서를 언론에 공개했다. 미국의 밥 딜런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이 담긴 네 줄짜리 짤막한 문서였다. 선정 이유는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들을 만들어냈기 때문(for having created new poetic expressions within the great American song tradition)이었다. 전 세계의 예술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거칠게 반으로 나누자면, 한쪽은 환호하느라 뒤집어졌고, 다른 한쪽은 문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밥 딜런’이라는 이름이 귓가와 입가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은 그간 정통문학 위주로 수상자를 선정해오던 노벨문학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다. “무엇이 문학인가?” 더 나아가 “무엇이 예술인가?”를 물어보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문학과 예술.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판단의 기준을 세워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딱딱한 고체 같은 개념. 전문적이거나 일상적이거나. 누군가가 어느 쪽을 지지하든 이런 글로 관여할 생각은 (능력도 되지 않을뿐더러) 없다. 정통문학도 읽고, 노랫말 좋은 명곡도 듣는다. 다만 엄격한 잣대에 손사래 치는 본능은 있어서 “밥. 축하해. 그러나 당신도 알지? 당신에게 이 상은 어울리지 않아.”(성기완, <중앙일보>, 2016년 10월 14일 자 칼럼)라고 말한 성기완 교수의 말에 공감하는 정도다.


    책을 곁에 끼고 사는, 또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난해 ‘밥 딜런’은 큰 의미가 있는 이름이자 단어였다. 우리를 분노케 한 상상초월의 사건들이 없었더라면 밥 딜런, 노벨문학상, 예술 등의 단어는 연말까지 뉴스 보도와 언론의 지면을 빌렸을 것이고, 생산적인 논란은 분명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개념을 재고해본다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고리타분해보일지 몰라도. 진지한 논의들은 수면으로 채 떠오르지도 못했다. 비선실세, 문단 내 성폭력,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시쳇말 표현대로라면 ‘다크(dark)한 암흑’들만이 우리를 반응케 했다. 잡아야 기회인데, 그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예술은 과연 무엇인가?”로 이번 수상을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의 ‘의미’에 방점을 찍는 사람들이다. 밥 딜런의 음악 활동과 노랫말이 우리에게 던져준 시대의 메시지들이 지금 이때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 ‘의미파(派)’의 주장이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등록되어 있는 ‘진행 중인 군사분쟁(Ongoing armed conflicts)'의 수만 해도 50여 개가 넘는다. (이 중 거의 절반에 이르는 수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하고 있다.) 2015년에 『오늘의 세계 분쟁』이라는 책을 낸 김재명 박사는 “영구 평화는 무덤에서나 가능하다.”는 칸트의 말을 빌렸다. 이런 의미의 관점에서 본다면 밥 딜런보다 한 해 앞선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벨재단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기린 그의 다성(多聲)적 작품들”(for her polyphonic writings, a monument to suffering and courage in our time)을 높이 샀다고 했다.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여성의 의미, 그리고 체르노빌 사건으로 끔찍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베틀라나의 책에 실려 있다. 그는 고국 벨로루시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작가다.


    재미있는 건, 스베틀라나의 문학사적 위치도 밥 딜런의 경우처럼 특이하다는 점이다. 물론 밥 딜런과 같이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수상자들 중에는 최초로 저널리즘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었다. 기자 출신이고, 취재를 중심으로 작품을 쓰기 때문에 정통문학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밥 딜런은 이른바 ‘갇힌’ 문학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게 한 인물들. 그리고 우리는 개념도 움직이는 실체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환기시키는 사건은 그래서 중요하다.


    방금 말한 ‘갇힌’ 문학을 정통적인 의미가 강조되는 개념이라고 하고 ‘대문자 문학’이라고 불러본다. 우리말에는 대문자가 없으니 여기서는 [문학]이라고 표기하겠다. 그런데 이건 비단 문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양미술사』의 저자 곰브리치도 ‘대문자 미술’인 Art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서론에는 가장 하고 싶은 말이나 중요한 말을 적어놓는 것이 관례인데,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서문은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서양미술사』, 15쪽)라는 단언으로 시작한다. 개념보다는 개별 작품들의 집산으로 ‘미술’이라는 현상을 파악하려는 것이 곰브리치의 의도다. 2001년 작고한 곰브리치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그래서 저 문학의 사건을 봤다면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문학]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첨언해줬을지도 모르겠다.


    곰브리치가 저런 단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며, 딱 하나밖에 없다. Art가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다. 지난 달 타계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개념을 여기로 빌려오자면 저 개념은 ‘액체의 속성(liquid)’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Art는 아주 확고하게 자리 잡은 매력적인 개념 중 하나다. “저 작품 참 예술적이야!”라고 우리가 감탄할 때,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공유하고 있는 은연한 ‘뭔가’가 있다. 아마 그 ‘예술적’이라는 말의 의미 속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순수. 천재. 우월. 엘리트. 고귀. 최고. 미적(美的). 숭고. 경이. 재밌게도 이런 의미망은 움베르코 에코가 『추의 역사』에서 추의 의미와 대비해 나열했던 ‘아름다움’과 비슷하게 쓰이는 스물여섯 개의 유의어들과 포개어진다. ‘예술’은 도덕적 선(善)과도 종종 닿는 것이다.


    이건 예술이 역사에 걸쳐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와 관련이 있다. 역사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지금 우리가 ‘예술’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묶여 있는지, 그래서 그 오랜 개념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예술의 시작점으로 가야 하는데, 그 지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학자들은, 특히 “예술은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고대 그리스를 서장의 주제로 잡는다. 래리 쉬너(Larry Shiner)의 『예술의 탄생』도 그런 책 중 하나. 주로 미술을 공부했던 필자가 읽은 ‘예술의 범주’를 다룬 책 중에서는 가장 추천할 만한 안내서다. (다만 역자가 원제 『The Invention of the Art』를 ‘발명’이 아닌 ‘탄생’으로 번역한 점은 다소 의아했다. ‘탄생’에도 조직 따위가 새로 생긴다는 부차 의미가 있긴 하지만 뭔가 만들어냈다고 할 때는 ‘발명’이 더 친숙하고 으레 쓰는 말이다.)


    여러 분야의 역사책들을 읽어보면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21세기 인류라 생각할지 몰라도 실은 20세기의 산물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20세기, 그 중 도려내야 하는 구태에 묶여 ‘객체’로 사는 이들이 어떤 행태를 하고 다니는지, 우리는 지금 여기서 목도하고 있다. 여하튼 이건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의 일로, 20세기에 걸쳐 갖춰온 서구의 학문체계는 그 이전 시대의 모습을 그저 ‘20세기의 눈’으로 추측해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래서 래리 쉬너가 “고대에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해준다고 한들, 우리는 그런 사회가 대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공감은 더더욱 힘들다.


    『예술의 탄생』은 우리가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추적해보는 책이다.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이 없던 시대에서 시작해, 개념의 분열이 일어난 18세기(이때부터 artist와 artisan의 분리가 서서히 일어남)를 지나, 예술이 거의 신격화된 19세기를 거쳐 순수예술과 공예가 대치했던 20세기, 그리고 예술의 개념이 수많은 것들을 흡수(동화)해 완전히 뒤섞여버린 오늘날에 이른다. 이 글을 읽는 이가 예술을 조금 더 깊이 공부해보려 한다면 자연스레 18세기에 집중할 것인데, 혹시 래리 쉬너의 논의보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싶다면 오타베 다네히사(小田部胤久)의 『예술의 역설 : 근대미학의 성립(芸術の逆説 近代美学の成立)』을 추천한다. 오타베는 이 책의 서문 제목을 ‘예술의 탄생’이라 지었다.


    18세기는 중요하다. 적어도 [예술]이라는 개념의 성립에 있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있던 시기라고까지 표현됐다. 물론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도 지동설을 주장한 철학자와 천문학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다소 어폐는 있으나) ‘고대 예술가’들 중 근대적 개념에 해당하는 특성을 보여주거나 그런 주장을 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18세기는 [예술]의 모든 것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규범으로 제시된 때다. 그 방법은 대체로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지금은 이러한 예술의 시대다.”라는 식의 이분화로 이뤄졌다. 이후 [예술]은 18세기를 양분으로 19세기의 신격화로 이어졌다. 인간 활동의 정점으로 말이다. 박이문 선생은 『예술철학』에 “예술은 이 삶에 있어서의 보다 높은 과제와 진정 형이상학적인 활동을 드러내준다고 나는 믿는다.”고 한 니체의 말을 싣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한국의 독자인 우리에게는 모종의 한계가 느껴진다. 한중일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그리고 인도의 방대한 미술 세계는 이런 식의 이분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서양미학담론이 지배적인 지금, 이런 미술을 논하는 또 다른 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서 추천했던 오타베도 “우리 자신의 사고를 아직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규정하고 있는 ‘근대적인’ 예술관의 특질을 그 내부에서 이른바 소급하여 밝혀내는 것”(오타베 다네히사, 김일림 옮김, 『예술의 역설』, 18쪽)이 자신의 작업이라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독자들이 [예술] 개념의 ‘실체’를 알아가는 이 책의 여정 중 가장 놀랄 만한 부분은 아마도 르네상스일 것이다. 르네상스를 예술 본연의 천재성, 혹은 종교와의 협연 등으로 본 전통적인 책들은 시중에 널려 있고, 그런 관점이 우리에게도 낯익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예술과 사회, 특히 경제사의 연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들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백낙청 선생의 소개로 아르놀트 하우저가 일찍 알려진 바 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독촉을 참아가며, 어떤 때에는 “이 비계 밑으로 던져지길 바라느냐!”(조반니 파니니, 정진국 옮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329쪽)며 윽박지르는 교황의 신경질을 견뎌가면서 고독하게 천장화 작업을 했다. 이런 식의 묘사에는 근대의 ‘천재’이자 ‘예술가’라는 개념이 녹아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교황에게 얼마의 두카트를 받고 작업을 했고, 어떤 재료들에는 또 얼마가 들어갔다는 식으로 바라본다면 르네상스를 향한 환상에는 분명 조금이나마 금이 가기 마련이다.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학자들의 사랑을 받아 예나 지금이나 근대의 개념 속에 자주 들어갔다 나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래리 쉬너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이 없었던 시대의 인물이라고 단언한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말했던 것처럼 르네상스는 시장경제의 활성화와 도시의 부를 원천으로 한 시대. 회자되는 유명한 르네상스 작품들은, 아니 ‘제작품’들은 예술 수요의 증가, 그리고 생산자가 누린 약간의 지위 상승을 등에 업고 있다. 한스 홀바인이나 알브레히트 뒤러 같은 북유럽 최고의 궁정화가들이 있긴 했었지만 그 수는 극히 적었고, 북유럽은 이탈리아와는 달리 대부분 공동작업장, 즉 길드의 규범에 따라야 하는 제작자들로 가득했다. 작업방식의 선택이 다소 자유로웠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변종’ 취급받았던 것이기도 한데) 순수예술의 무한자유라는 개념은 전무했다.


    18세기가 지나자 이제 [예술]은 장인, 생산, 길드, 제작품 등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 되어갔다. 이걸 한 철학 용어로 갈무리할 수 있다면, 그건 ‘무관심’일 것이다. 칸트에 이르러 [예술]은 “그저 단순히 즐길 수 있게 만드는”(래리 쉬너, 김정란 옮김, 『예술의 탄생』, 218쪽) 것이 되었고, 동시대의 실러는 “유희의 최고 형식”(위의 책, 243쪽)이라며 예술을 극도로 이상화했다. 실러에게 예술이란 ‘하느님의 화신’이었다. 이 책에 언급되진 않았지만 훗날 쇼펜하우어는 그 무엇보다도 음악을 권장하면서 “웅장하고 화려한 하모니는 정신의 목욕이라고 할 수 있다.”(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권기철 옮김, 『세상을 보는 방법』, 182쪽)고 했으며, 앞서 필자는 박이문 선생이 옮긴 니체의 문구를 적어놓았다. 19세기에 베토벤은 신이었다. 사변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생시몽주의자, 사회주의자, 심지어는 다윈주의자들까지도 고양된 예술을 인정했다. 이것이 바로 19세기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래리 쉬너가 말했듯 사실 지금까지도 “천재의 이미지는 필요할 때면 늘 존재”(래리 쉬너의 책, 301쪽)한다. 이러한 고양이 완성된 시기를 『예술의 탄생』에서는 1800년에서 1830년 사이로 보고 있다.


    통념과 개념이 갈라지는 것, 이걸 우리는 흔히 그것이 정말로 붕괴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어쨌든 낯설어지는 현상이 도래하는 건 여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뭔가가 우리를 강하게 때렸을 때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공예품을 보고 놀랐다.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사실 서양의 아프리카 식민지화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는 작품이었다. 가봉과 카메룬 남부에 거주하고 있는 팡(Fãn)인들의 가면이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부인한 적이 있긴 했지만 사실 피카소는 파리의 첫 인류학 박물관에 방문해 아프리카의 가면들을 봤었다. 벼룩시장 같은 역겨운 냄새가 났다고 하면서도 그곳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중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피카소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회화의 종말’이라는 단어도 태어났다. 사진 때문이다.


    개념이 무너지자, 그 사이에서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되는 이른바 ‘모더니스트’들이 우후죽순 일어났다. 뒤샹은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던, 민주적 절차를 따른다면서 아예 심사라는 걸 하지 않는 한 전시회에 ‘리처드 머트(Richard Mutt)’라는 가명으로 변기 작품을 냈다가 모더니즘의 아이콘이 됐다. 뒤샹의 저 행위도 중요하지만 사실 ‘리처드 머트 씨의 변기’를 전시할 수 없다는 협회 측에 비어트리스 우드가 던졌던 변호문도 중요하다. 비어트리스는 “머트 씨는 일상의 사물을 가져다가 놓았는데, 이로써 새로운 관점과 작품명 아래 사물의 유용성이 사라지도록 했다. 요컨대 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낸 것이다.”(He took an ordinary article of life, placed it so that its useful significance disappeared under the new title and point of view ― created a new thought for that object.)라고 했다. 이 변호문은 [예술]의 전복을 상징한다.


    마치 고대 로마의 폐허 속에서 일어난 새로운 왕국들처럼, 하지만 고대의 유산을 물려받은 쪽이 늘 있었던 것처럼 [예술]은 순수예술의 범위를 계속 확장해가려는 ‘동화(同化)’의 왕국과 예술이 계속 분리되는 걸 거부하는 저항의 왕국이 서로 싸워가는 와중 연명하고 있었다. 한편, 반(反)기계와 사회이상을 실현하려는 영국의 예술공예운동, 사회목적과 예술을 연결한 독일의 바우하우스, 그리고 노선은 달랐지만 [예술]이 죽은 자리에 유용성을 추구하는 ‘구성’이라는 개념을 잠시 올려놓았던 러시아의 경우처럼 순수예술과 공예의 대립각이 여전히 이어지는 역사도 있었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공예는 분명 예전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인류가 정말 ‘대단위’로 인식의 변화를 겪었던 시기는 1960~70년대일 것이다. 식민지들이 해체되고, 그간 전통과 권위 아래 핍박받았던 약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역사의 거대한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인류는 그 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다원주의’가 무엇인지 고찰할 수 있었다. 후대의 우리는 분명 그 뼈아팠던 행동의 시기에 고마워해야 한다. [예술]이라고 해서 이 시기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예술가들은 일반화에 저항했고, 예술의 권위가 아닌 일상과의 통합을 추구했다. 예술 개념 자체가 추락하기도 했다. 구조주의는 작품이 아닌 ‘텍스트’로 저 세계를 본다. 해체주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양한 건축공법으로 탄생한 세계적인 랜드마크들은 예술과 공예를, 미학과 기능을 굳이 구별해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술]은 여전하다.


    “같은 행동을 계속 되풀이하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래리 쉬너의 책, 394쪽) 구미(歐美)의 예술체계는 다시 오랜 관습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문화계를 소개하는 우리나라 일부 TV 프로그램들도 은연중에 고귀한 예술을 점잖은 자리에 초대한다. ‘원시예술’이라는 개념으로 이른바 ‘폭격’을 맞은 바 있는 아프리카, 폴리네시아, 알래스카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근대화 이후 서구의 이해 체계가 들어가 버린 모든 곳은 그저 서양 기준의 미술시장에 진입하려고만 하는 예술가들의 행위에 전통이 퇴색되어버린, 다시 말하자면 ‘이도저도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 흡사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속 라다크를 보는 것처럼.


    래리 쉬너의 책 후반부에 이르면 순수예술이 더 이상 [예술]임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방식의 시도들을 아우르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예술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동안 우리는 예술의 근대적 의미에만 집중한 나머지 본연의 천재성과 고귀함, 칸트의 표현을 다시 빌려오자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무관심, 취미만이 중요하다고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술은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독자인 우리들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예술가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 속된 표현으로 ‘영업비밀’이 아니었을까? 예술은 정신의 진정한 고양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 노동, 즉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을.


    필자의 동생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나는 순식간에 화면을 지나가는 한 캐릭터의 움직임이 실은 지난한 작업의 물고 물림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인지 예술의 분리, 심지어 예술 생산자의 계층분리(혹은 갈등) 같은 서구 특유의 이분법적 이해에 대해서는 『예술의 탄생』을 읽기 전부터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예술의 생산에 직접 참여하진 않아도, 혹은 예술소비에 아주 전문적이진 않아도 래리 쉬너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된 분리와 계층을 넘어 예술, 종교, 정치, 일상생활 사이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조정”(위의 책, 447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탄생』은, 혹은 이와 같은 책들의 주장은 예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우리의 일상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밥 딜런. 이 둘뿐만이 아니다. 또 누군가가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판단을 시험하려고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또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오래된 역사를 들여다보며, 궁극적으로는 영위하는 삶에 대해 깊이 고찰해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때의 ‘예술’은 지금의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는 또 다를 것이다. 이런 일들은 끝없이 이어질 것인데, 우리가 그 흐름에 삶의 배를 맡긴 채 유유히 떠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면 래리 쉬너와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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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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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0일


    그러고 보니, 늘 상상의 편이었다. 열여덟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지도를 그렸고, 톨킨에 빠진 후로는 잘 읽지도 못하는 원서들을 모으고 있다. 가족과 해리포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상이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또 다른 지도다. 소설이 다 뭐고, 환상은 다 뭐냐는 이른바 ‘상상판 세속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별 매력이 없었다. 잠시 혹하더라도 이내 백지 앞에 앉아 산과 숲, 늪지와 강을 그렸고, 토성을 떠올리며 수많은 달이 있는 세상을 상상했다. 상상은 그 자체로 무한이고, 자유다. 유년과 닿아 있기 때문에 그걸 유치하다느니 쓸모없다느니 치부하는 건 온당치도 않을뿐더러 때론 가혹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상상’이란 단어 뒤에 즐겨 붙이는 단어가 있다. 나래. 문인들이 날개를 칭하는 부드러운 단어. 인간에게 날개는 없다. 그러나 문학의 전통 아래 수많은 펜촉, 그리고 입과 입이 이 표현을 반복해온 건, 알베르토 망겔이 말했듯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데는 아무런 물적 기반도 필요치 않은 것”(알베르토 망겔·자니 과달루피, 최애리 옮김,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 11쪽)이 바로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의 산물이 머릿속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라는 물적 기반이 필요하다. 데이빗 예이츠 감독의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Fantastic Beasts and Where to Find Them)≫에는 본의 아니게 마법세계를 알아버리는 (그저 빵집 하나를 차리고 싶어 했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수많은 신비한 동물들을 직접 보더니 마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뉴트, 난 지금 꿈꾸는 게 아니에요. 내 머리로는 이런 걸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다고요.(Newt, I don't think I'm dreaming. I ain't got the brains to make this up.)


    바닥 카펫이 동그랗게 말려 마치 동굴의 입구처럼 보이자 위대한 상상가 톨킨은 아이들을 위한 소설 『호빗』을 썼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In a hole in the ground there lived a hobbit.” 그러나 이 짤막한 소설을 둘러싼 톨킨의 방대한 세상은 유럽 각지의 고전 신화와 전설, 민담, 그리고 고대 영어와 룬 문자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현실인지 상상 속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보르헤스의 환상적인 단편들 역시 마찬가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993년에 『상상력 사전(원제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이라는 책을 냈다. 인간 세상을 우주에 투영해 역대급 인기를 누린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시리즈는 벌써 40년 째 이어지고 있다. 굳이 조지프 캠벨의 신화집, 혹은 천병희 선생께서 번역하신 고대 그리스 신화들을 읽어보지 않아도, 그리고 주호민의 『신과 함께』를 이불 속에서 훌쩍이며 한 장 한 장 넘겨보지 않아도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현실과 맞닿은 상상을 즐겨했는지 알 수 있다.


    피카소는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감히 장담했다. 그의 성격과 기행, 비범한 작품들을 보면 그는 상상을 실천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대표적인 실천이 바로 ‘아이처럼 그리기’다. 피카소도 수재였다.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그러나 잘 그리지 않기 위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떻게든 못 그려보려고 했다. 물론 이 말에 어폐는 있다. 현대미술에 있어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판단하는 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여정은 결코 완성되지 않을 상상의 실천이었다. 아이 같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세상의 이해를 받지 못했다.


    정현종 시인은 이와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며 얇은 시집 하나를 번역했다. 책을 만져봤거나 펜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누군가에게서라도 한 번 쯤 들어봤을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시들은 하나 같이 다 짧은데, 한참 쥐고 있어야 따뜻해지는 손난로 같다. 네루다의 『질문의 책(원제 : Libro de las Preguntas)에는 움켜쥐면 놓고 싶지 않은 구절들이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하버드 강연록을 『음악의 시학』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먼저는 프랑스어로, 그 다음에는 영어로) 펴냈는데, 이 책에는 창작과 상상에 관한 중요한 조언이 있다. “창작의 전제는 상상이지만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창작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운좋은 발견이 필요할지도 모르나, 이 발견을 온전히 현실화하는 것이 창작이다. (중략) 고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창조적인 상상이다.”(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셸 루트번스타인, 박종성 옮김, 『생각의 탄생』) 상상은 개인에게 주어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의 역량에 따른 무한과 자유의 도구이자, 또한 특권이다. 하지만 이걸 수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작’이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저 단어에 목을 맨 것이 바로 예술이다.


    언젠가는 꼭 자신의 상상을 세상에 내보이리라 잔뜩 벼른 사람들이 있다. 창작에 심장을 내맡긴 사람들이다. 괴짜. 엄동의 산 속에 혼자 펴있는 개나리 같은 사람들. 드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창작과 상상이 원래 그런 속성의 ‘몹쓸’ 것인 까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외로운 사람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긋거나 없애기도 하면서 이 뫼비우스 같은 공간에서 혼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들. 답습하지 않겠다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발붙여 살면서 늘 자기만의 ‘낯설어지기’를 아프도록 반복하는 사람들. 비슷한 건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비슷해질 수밖에 없는 위대한 ‘과거’를 추앙하기도 하는 소심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하지만 누구보다도 큰 꿈 세계가 있는 사람들. 이중적 삶. 갇혀 있는 듯, 원대한 사람들.


    이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나는 그림 그리는 동생과 종종 글 쓴다는 것과 그림 그린다는 것, 통틀어 창작한다는 것을 넋두리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질문의 책』은 동생의 서재에서 집어든 책이었다. 세상에 나올 때에는 비범하여 누구나 매료시켰던 상상의 세계가 나중에는 비근하게 보인다. 시간은 무섭다. 동생은 무뎌지지 않기 위해 이 작은 시집을 서재에 꽂아두고 있었다.


    『질문의 책』은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엉뚱함.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분수와 관련된 두 번째 의미를 빼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거나”“사람, 물건, 일 따위가 현재 일과 관계가 없다.”라는 것인데, 여기서 『질문의 책』의 엉뚱함은 마지막 사전적 의미를 뒤엎는다. 요컨대, 네루다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과 관계한다. 자신이 잊어버린 미덕들로 옷 한 벌을 꿰맬 수 있을 것인지 성찰하다가, 사과꽃이 사과 속에서 죽는 걸 보지 못했을 누군가를 걱정한다. 자신이 더 느리다는 걸 거북이에게 말하기 위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고민도 한다.


    “상상력의 특징을 엉뚱함이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가 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상상력은 그동안 이 세상에 없었던 생각과 관점,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차원을 번개처럼 열어보이기 때문이다.”(파블로 네루다, 정현승 옮김, 『질문의 책』, 158쪽)


    이 엉뚱함, 이 질문들은 네루다가 세상과 맞닿으며 일으킨 독특한 반응이다. 정현승 시인은 그걸 ‘정서적 파동’이라 했다. 하나의 질문이 물가로 여러 겹의 파동을 보내고, 뭍의 독자들은 그 너울에 마음을 실어 무한의 호수로 나아간다. 몸이야 여기 이곳에 있겠지만 질문은 파동이 시작된 곳까지 마음을 이끈다. 그곳이 궁극임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정현승 시인처럼 나 역시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질문의 책』의 물음표가 시작되는 지점을 본다. 수십 편의 보르헤스 단편들에서도 본 환상(環象)의 종착점. 죽음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네루다는 죽음을 향하는 우리의 질문을 ‘시작’하게 하면서 필연의 비극을 영원한 아이들의 놀이로 바꿔버린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위의 책, 95쪽


    마크 오스번 감독의 애니메이션 ≪어린왕자(The Little Prince)≫에는 꼬마 숙녀 주인공이 사하라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봤다는 비행사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어른이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Well, I'm not so sure I want to grow up any more.)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한다. “어른이 되는 게 문제가 아니야. 잊어버리는 게 문제지.(Growing up is not the problem. Forgetting is.) 상상, 엉뚱함, 유년, 죽음, 창작, 예술, 그리고 삶과 궁극.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은 이 그물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거나, 한 뿌리에서 뻗어나간 인간의 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효용을 논하는 이들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마법의 서랍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두 마리가 아니라는 건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비밀인데) 달 속의 토끼를 보기 위해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꺼내온다. NASA는 인간의 내핵이 상상으로 이뤄져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바다의 중심은 어디일까? 왜 파도는 그리로 가지 않나?”(위의 책, 49쪽) 『질문의 책』을 심심풀이로 읽으면 (정현종 시인도 심심풀이로 번역하던 거라고 했으니) 우리는 신기하게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고도 긴 너울에 몸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11월은 몇 살이나 된 것인지 알려줄 신비의 인물을 만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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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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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우리 가족의 한 해는 동생의 생일이 지나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분위기다.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더니 책 제목 두 개를 적어줬다. 한 권은 소설이었다. 코니 윌리스의 SF소설인 『화재감시원』. 평이 좋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다른 한 권은 코델리아 파인의 『젠더, 만들어진 성』이었다. ‘젠더와 성이라고?’ 둘이 다르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그런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트위터에서 성차별/성폭력 문제와 논쟁을 리트윗하고, 여성신문과 같은 언론의 기사를 읽는다. 페미니즘 양서들도 모으고 있다. 서재에는 스무 권의 관련 책이 있고, 그 중 네 권은 픽션이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올 4월부터의 일이다.


    동생은 트위터에서 뭔가 흐름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다. SNS를 하지 않던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몇 차례의 권유를 받아 트위터에 좀 익숙해지고 나서야 그 변화가 무엇인지 알았다. 뜨거운 말들이 오고 갔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이른바 ‘인증샷’들이 즐비했다. 공인과 유명 인사들, 혹은 기업과 단체들의 수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뜨거운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논리적이고 강인했다. 그동안의 편협한 독서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분위기와 흐름. 화들짝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갇혀 있던 곳에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감옥의 이름은 ‘남성판타지’였다. 숟가락으로 탈출 통로를 만드는 영화와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오빠는 어딜 가든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하는 남자가 됐으면 좋겠어.” 그 말의 뜻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페밍아웃’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나에게는 없다. 배가 나아가던 방향만 바꿨을 뿐이다. 앞으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될는지는 하나도 모른다. 언젠가 말했지만 그야말로 헐벗고 초라해진 기분이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을 읽으며 “나를 좀 보듬어주세요.”라고 조를 마음가짐은 아니다. 마음의 알맹이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걸 세심하게 가꿔갈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정원’을 가꾸는 일에는 늘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나는 질문하는 것에 익숙했다. 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대방 역시 나와 비슷한 질문 속에서 명확치 않은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명쾌함은 나의 미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단호한, 열렬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게 하는’ 선언은 늘 버거웠다. 살짝 발을 뒤로 빼고 되도록 가운데에 위치하려는 습관도 있었다. 어쩌다가 모호함의 탐구자가 되었는지를 소급해보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세상 앞에서 질문 던지는 놀이를 어렸을 적부터 즐겨했기에. 하지만 지금은 끓어오르고, 편을 드는 노력을 한다. 이것이 어떤 변화였는지를 설명하고 싶지만 결코 쉽진 않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원제 : We Should All Be Feminists)』는 선언이다. 제목부터가 당위를 주장한다. 4월부터 시작한 트위터, 그리고 5월의 비극. 나는 행동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생각의 이동’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큰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봐도 놀랍다. 아니, 씁쓸하기까지 하다. 자신들을 싸잡아 일반화한다며 각종 학문을 근거로 들며 남성을 옹호하는 남성들의 주장을, 남자인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성판타지 속의 시시콜콜한 농담들이 트위터의 뜨거운 물결에 찬물을 씌우려 들어왔다가 된통 ‘깨지고’ 나가는 광경도 매일 수 십 차례 봤다. 하루는 동생에게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우리나라 남자들 수준이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어.” 아직도 저 밑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은 나의 이런 발언조차 ‘일반화’라며 비난하면서 나를 자신의 편에서 빼버릴 것이다. 물론 개의치 않는다. 내가 그쪽 편이 아니니까. 어제는 부산지하철의 ‘여성배려칸’ 시범도입을 두고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자꾸 배려해주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플랜카드를 들고 서 있는 사진을 봤다. 뭘 그리도 많이 움켜쥐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동생과 종종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오빠가 된 것에 동생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동생이 밤늦게 들어올 때면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가야 마음이 편한 세상이다. 국가기관과 수사기관은 무엇이 ‘여성혐오’인지 전혀 모르는 (아마 판례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드는데) 세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존엄성 개념은 적극적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 때문에 기본역량 개념과도 가깝다. 기본역량은 계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마사 누스바움, 한상연 옮김,『역량의 창조』, 47쪽)라고 했다. 이것은 희망이다. 다시 한 번 치마만다의 책 제목을 생각해본다. 나는 당위를 담은 주장에서 “모두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캐내어봤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사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 결국 공감의 능력이 되는 그 노력이 하찮게 취급된다. 교육부를 발칵 뒤집어놓은 파렴치한 발언에 우리는 더 크게 분노하고 놀라야 했다. 치마만다는 말한다. “우리는 진화했습니다. 그러나 젠더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아직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습니다.”(치마만다의 책, 21쪽) 사실 젠더뿐만 아니라 인권과 동물윤리에 이르는 우리 사회의 초보적 인식에 대해 무수히 말을 쏟아내고 싶다. (예컨대 이달 7일에 정부는 반려동물의 온라인 판매를 허용하는 ‘반려동물 산업 육성’책을 내놓았다가 동물보호단체들의 반발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과학기술에 관해서는 가장 빠른 변화를 이뤄내고 있는 우리는 “현 상태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늘 불편한 일”(치마만다의 책, 43쪽)이라는 핑계만 대며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태도로 일관해오고 있다.


    문제는 그 ‘좋은 것’이라는 뭉뚱그린 표현, 그리고 그 표현이 포함하고 있는 영역이 죄다 남성판타지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거다. 오늘 트위터는 또 폭발했다. 한 외국 남성이 “한국 여자들은 예쁘니까 외모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가 폭격을 맞았다. 문제가 터진다. 논쟁이 시작된다. 자제가 촉구된다. 결국 그렇게 진화되면 지는 쪽은 늘 약자다. 하지만 5월의 비극 이후 트위터에서 여성들은 물러나지 않는다. 나 역시 참하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여성상을 흠모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판타지였다. 치마만다는 분노의 긍정을 본다. 중립과 침묵은 기득을 지켜준다. 나는 적극적으로 편을 들 준비를 한다. 한숨을 쉬며 바라보게 되는 대상은, 4월부터 지금까지의 경험만 놓고 보자면 십중팔구도 아닌 ‘십중십’ 남자였다.


    젠더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며, 또한 대단히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젠더, 그건 족쇄다. 치마만다는 여성성이 강요되는 상황만 말하지 않는다. ‘단단한 남자’가 되어야만 하는 남성성 강요의 문화도 함께 말한다. 물론 그는 여자가 더 많이 타협해야 하는 분위기를 중점으로 말하지만, 우리는 그 지점에서 여성성, 혹은 남성성의 강요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성소수자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난 달 11일에 서울광장에서는 이른바 ‘퀴퍼(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다. 트위터에서는 ‘#문명인이됩시다’라는 태그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축제도 잘 끝났다. 각국 대사들이 와서 참가자와 시민들에게 좋은 말도 들려줬다. 그런데 길 반대편에서는 나라가 멸망할 징조라며 한복 입고 곡성(哭聲)하는 이들이 있었다.


    ‘젠더’라는 족쇄가 풀린다면 치마만다는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한 세상”(치마만다의 책, 28쪽)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공정함은 행복의 조건일 것이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질 수 있는 분위기가 공정함의 조건일 것이다. 사회는 억압받는 자들에게 용기를 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대체 그게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주 쉽게 눌러버리며, 위축된 이들이 발언을 시작하면 중립을 지키는 자세로 침묵하라 타이른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기 전, 나는 그 침묵의 삶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나만 조용히 하면 친척들 와서도 행복하고 잘 웃고 가잖아.” 어머니는 단속받는 여자였다. 아무도 단속하지 않아도 스스로 단속하게 되는 사회. 그 긴 세월을 감옥 속에서 사신 것이었다. 교사이셨던 어머니는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어딜 가든 나는 그걸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스스로를 ‘나’라고 부를 수 없는 삶을 사셨다. 여자가 더 많이 타협해야 한다. 새벽에 방에 들어오신 어머니가 이젠 잠이 올 것 같다며 지쳐 안방으로 가실 때까지 나는 왜 남자가 여자의 고통에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알았다기보다는 여태 몰랐던 나 자신이 무척 수치스러워졌다고 해야 적당하겠다.


    “우리 사회는 일정 연령에 다다른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심각한 개인적 실패로 여기도록 가르칩니다.”(치마만다의 책, 34쪽) 어머니는 그런 ‘실패’를 두려워하셨고, 대신 참는 삶을 사셨다. 지금은 그 후유증을 앓고 계신다. 그 새벽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된다. 잘 잤냐며 인사를 하고 동생을 보다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때가 있다. 되물림 되면 안 되는 어떤 족쇄 속에서 동생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꿈이 있고, 전문 기술도 있으며, 깨어 있는 20대의 한 여성이 위축되도록 단속 받는 사회의 거대한 힘에 언젠가 지쳐 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렵다. 계속 싸워나가야만 겨우겨우 행복해지는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페미니즘은 그래서 연대와 공감을 강조한다. 정희진도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그걸 명확히 한다. 나는 늘 각오해야 한다. 동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연대의 대상이 되어줘야 한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나이가 어려서, 경험이 적어서, 체격이 크지 않아서 내가 받을 숱한 차별과 역경은 비루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남자’니까. ‘나’를 해체시키고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려는 일체의 압박에 어떻게든 저항하겠지만, 동생은 거기에다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압박까지 이겨내야 한다. 치마만다가 ‘파란 마스카라’로 기억하는 친웨 아줌마 이야기는 한 여성이 그 압박에 굴하고 “무한한 아량의 바다”(치마만다의 책, 60쪽)와 같은 사람이 됐다는 슬픈 이야기다. 친웨 아줌마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치마만다는 “세상의 인정을 구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억지로 변형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치마만다의 책, 72쪽)고 다짐했다. 주체로 살고 싶다는 뜻이다.


    세상의 수많은 여성들이 주체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아마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만 해도 그랬다. 5월의 비극으로 우리는 여자의 속사정을 들어볼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를 맞이했었다. 아니, 그런 일이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지만. 나는 많은 남자들이 귀를 열고 그 ‘단단함’의 이미지를 스스로 깬 다음 공감할 준비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하다. 젠더 문제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불편하다.”이다. 배운 사람 티를 내는 이들은 진화생물학을 근거로 반박하고, 계급 문제를 들먹이며 남자들도 힘들다고 호소(트위터의 표현대로라면 ‘징징거리는’)하기도 하며, 여성종속은 오래된 문화라며 반대방향으로 튕겨져 나가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인간을 믿는 편이다.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하고 싶다. 아마 치마만다도 그런 마음으로 책을 썼을 것이다. 아니, 내가 잠시 기만했다. 치마만다와 같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이 인간을 긍정하게 된 것이라 해야 옳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되찾아야 합니다.”(치마만다의 책, 51쪽) 단어는 ‘페미니스트’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희망의 단어다. 우리 사회는 이 단어를 ‘골수’, ‘담배’, ‘꼴통’, ‘XX년’과 같은 미개하기 그지없는 표현으로 매도하고 왜곡해왔다. 대상이 여성이니 오죽 신났을까. 그런데 치마만다는 그 단어를 되찾자고 한다. 원래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어딘가 그 단어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이 이 낡은 단어의 겉면을 씻어줬고, 동생은 그걸 들여다봐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그 단어는 읽거나 보는 게 아니라, 듣고 느끼는 것이었다. 신비하리만치 슬펐다. 내가 그걸 모두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남자니까. 하지만 남자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진심을 다해 끝까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52쪽) 부디 많은 이들이 이 말에서 희망을 찾았으면 한다. 번역의 수고를 해준 김명남은 “21세기 현재 우리가 꼭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다룬”(치마만다의 책, 91쪽) 책이라 소개했다. 나는 ‘주로 잡담만 한다’는 그의 트위터에서 (물론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지만) “생각이 바뀐다는 것, 바뀔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이 희망이 없으면 우리는 치마만다의 책 제목 중 ‘should’에 대해 전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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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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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3일 일요일





기초와 근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기단이 부실해도 고층을 올릴 수 있는, 그런 불가능의 공법은 인간 세계에 없다. 그래서 대가들은 글을 쓰고, 세상은 우리 독자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권한다. 카렌 암스트롱의 말이 옳다면, (이는 그녀가 자신의 저서 『축의 시대』에서 한 주장인데) 위대한 가치의 대부분은 이미 나와 있다. 쏜살같은 21세기를 사는 ‘나’라는 30대 신참이 철학과 문학, 미술 등을 곁에 두고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있는 이유는 그거다. 나를 고리타분하다 말해도, 그런 표현이 싫진 않다. 놓치지 않으려고 읽는다. 알지 못하면 실천도 못한다. 그런 생각으로 산다. 역사와 사상, 그것들을 담은 책을 읽는 이유는 다른 매체와 대부분의 사람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나를 못 믿는다. 기초와 근본이 덜 되었으므로. 그래서 기초와 근본은 낯설다. 결코 적응하지 못하겠지만, 낯선 것을 피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읽고 실패하고 쓴다.


    누군가는 코웃음을 치겠지만, 이게 나의 실존에 대한 접근법이다. 거울을 보면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반사의 상(像)임을 거부하는, 또 다른 내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생각하는 나와 움직이거나 실천하는 나는 같지 않다. 과연 의지박약의 문제일 뿐일까? 그렇게나 약해빠진 사람일까? 불일치의 불꽃이 수없이 이는 이 세상은? 한 철학교수와 모교 근처의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면서 나눈 이야기도 그거였다. 거울 속 또 다른 나를 볼 때마다 느끼는 죄책감 같은 것, 그걸 딱히 종교적으로 해석한 건 아니지만, 여하튼 그런 불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에리히 프롬이 1956년 세상에 내놓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을 추천해줬고, 나는 읽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나고 나서야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며 첫 복기라는 걸 해본다.



*   *   *



    위대한 운동선수들은 한 목소리로 기초를 강조한다. 그녀/그들은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기초를 다듬는 일에 썼다. 현 NBA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스테픈 커리가 화려한 드리블을 구사할 수 있는 건, 어렸을 때부터 양손으로 동시에 두 개의 공을 튕기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보는 우리들이야 그 모습에 눈멀지만… 어른들은 모든 일이 그렇다고 내게 가르쳐줬다. 기초의 유무로 결판이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건 기술에 한한 진리가 아니다. 인간이 수호해야 하는 고귀한 정신과 가치도 우리에게는 기초다. 실존의 난제를 해결해줄 수 있으니, 정신과 가치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혹은 지녀야 하는 (이런 비유가 적합하다면) 최고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기초가 안 된 사람들이 벌여놓은 일들이 어제도 기사에 실렸다. ‘원영이 사건’으로 기가 찬 저녁에, 3개월도 안 된 딸을 학대해 숨지게 한 20대 초반 부부의 이야기가 올라왔다. 판결 따윈 궁금하지도 않다. 기사를 읽어보니, 원치 않은 아이였다고 한다. 새벽 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왔는데 딸이 울어 짜증이 나 바닥에 던지고 할퀴고 꼬집었다고 한다. 변명은 그럴싸하다. 하지만 이건 인간을, 상대를, 생명을 하나의 도구로 절하해버린 사건이다. 저 어린 부부에게 <아이>라는 것은 그 단어의 기초와 근본을 잃어버린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생명임을 인정하여 적어도 연민이라도 했더라면, 저 부부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런 사건들이 줄지어 보도되는 세상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인간 실존 문제를 해결할 최상의 답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본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 있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에리히 프롬, 황문수 옮김, 『사랑의 기술』, 24쪽) ‘나’와 분리되는, 실존적인 불안을 느끼는 존재다. 이러한 불안에는 죄책감과 수치심이 함께 한다. 거울 속의 나를 볼 때마다 내게 엄습했던 죄책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에리히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성기노출의 수치심이 아닌 성(性) 분리의 자각을 의미한다고 봤다. 분리된 인간은 고독의 감옥에 갇힌다. 결합의 방법은 오직 사랑이지만 쉽게 달성하지 못하므로, 이따금 광기에 휩싸이기도 한다.


    모든 이들이 이런 불안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원초적 결합의 상실인 분리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비(非)유아이다. 또한 에리히가 보기에 분리 극복의 해답은 제한되어 있다. 일단 그는 여러 문화권에서 제시된 해답들을 하나씩 역사적으로 살펴본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합일(合一)이다. 말 그대로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외부의 어떤 도움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도취적 합일과 집단과의 합일이 있다.


    전자는 영화 ≪향수(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에 묘사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르누이가 만든 ‘절대 향수’는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 즉 그르누이가 처형되는 장면을 보려고 모여들었던 군중을 나체로 만들고 서로 사랑을 만끽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르누이가 느꼈을 고독이란!) 이 합일은 종종 난폭하기도 하며, 에리히가 ‘몸+정신’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퍼스낼리티>라는 것의 전체를 사용한다. 집단과의 합일은 전자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주로 ‘의례’와 ‘종교’, 혹은 ‘정부’라는 공식제도를 통해 개인이 군중과 합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민족주의, 전체주의는 물론이고, 민주주의도 여기에 포함된다. 공감 누르기, 콘서트 예매, 붉은악마, SNS, 정당활동 참여, 보신각 타종 행사… 그런 의미에서 사실 우리가 ‘개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합일 속에서 차이만 추구하는 것일지도.


    후자의 경우는 평등과 전체를 사상적 개념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위험하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잘 모르고 말하는 이 개념들은 두 가지 함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차이의 소멸이다. 이건 가능한 일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다.”라는 말은 “당신도 나랑 똑같이 해야 한다.”라는 명령으로 비화될 여지가 많다. 두 번째 함정은 이를 통한 인간 개체의 비개성화다. 전체 안에 개인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개인보다 전체가 우선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비판의 여지가 있음에도 매력적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말을 들으면 분리의 불안과 죄책감이 조금은 씻겨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정체 모를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맹목적일 수 있다.


    다른 두 가지 방법에는 ‘노동+오락’, 그리고 창조적 활동이 있다. 특히 에리히는 노동과 오락에 있어 그것의 상투성을 비판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無)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에리히의 책, 34쪽)


    그렇다면 대체 분리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즉 우리의 실존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건 에리히 프롬에게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에리히의 책, 38쪽)이다. 역설이다. 하지만 이런 성숙한 사랑은 ‘공서적 합일’이라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 형태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공서(共棲)는 생물학 용어로 symbiosis, 즉 공생(共生)과 같다. A와 B가 서로를 강하게 결합시키는 미숙한 형태의 사랑인데, 에리히는 이걸 수동적인 마조히즘(복종)과 능동적인 사디즘(가학)으로 나눠 설명한다. 이것에 비해 성숙한 사랑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여기서 에리히가 말한 ‘활동’은 스피노자가 말한 ‘능동적 감정’이다.) 그리고 이 활동은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에리히의 책, 42쪽)이다. 상대방에게 생명을 주는 것. 그렇게 타인을 고양시키는 것. 고양된 타인이 또 다른 타인에게 그렇게 하는 것. 에리히가 본 <참사랑>은 바로 이런 생산적 성격을 가진 사랑이었다.


    능동적 사랑에는 보호, 책임, 존경, 그리고 지식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고루 들어 있어 서로 의존한다. 모성애가 그 대표적인 예인 보호는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연민, 그리고 동정에서 비롯된다. 에리히는 여기서 구약의 요나(Jonah) 이야기를 꺼낸다. 요나는 정의파.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니네베(니느웨) 사람들이 너무나도 싫다. 하지만 ‘하느님’은 요나에게 명한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재앙을 경고하라고. 요나가 따랐을까? 그 길로 도망쳤다가 큰 물고기(혹은 고래)의 배 속에 갇혀버렸다. 다시 풀려난 그는 ‘하느님’에게 화를 냈다. 이런 정의가 또 어디 있습니까?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은 뙤약볕의 요나를 위해 아주까리를 길러줬다가 다음 날 걷어내면서 (햇볕에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요나에게) 이런 명언을 남긴다. 여기서 ‘십이만 명’이란 아주 많다는 뜻이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서 4장 10~11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本)


    <참사랑>, 즉 능동적 사랑에는 이런 동정과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에리히의 책, 46쪽)인 책임, 그 책임을 지배나 소유 따위로 전락시키지 않는 강력한 힘인 존경, 그리고 그 존경의 조건인 지식이 들어 있다. 특히 지식은 인간의 비밀을 알려는 욕망과 부득이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유의 힘으로 바뀔 수도 있다. 분해와 해체, 그 잔인함으로 한 인간에 대한 앎의 욕구가 상대를 파괴시키는 일도 비일비재 했었으니까. 에리히는 그걸 “절망적인 방법”(에리히의 책 49쪽)이라고 했다. <참사랑>에서 지식은 타인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한한다. 그리고 딱 그 선까지만 힘을 쓴다. 카렌 암스트롱도 『신을 위한 변론』에서 역설했었다. 신과의 합일에 있어 신에 대한 지식은 중요치 않다고. 타인과의 합일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참사랑>이란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에리히의 책, 52쪽)이다. 처세를 위한 겸손을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에리히는 말미에서도 역설한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에리히의 책, 162쪽)


    정신분석학의 선상에 있는 에리히가 보기에 한 인간이 발달시켜야 하는 사랑은 어머니에서 아버지, 그리고 그 둘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인간의 발달과도 같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은 한계가 없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에리히의 책, 60쪽)고 생각하는 자기본위성, 즉 egotism에 빠진다. 딱히 그 이외의 것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을 통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랑만 배운다면 부족하다.


    에리히와 정신분석학자들은 보통 6세 이후로 보는데, 여기서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사상, 법률, 질서, 훈련, 모험 등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다. 그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받을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조건적인 사랑도 올바른 형태가 있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줘야 하는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증대시켜야 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허용해야”(에리히의 책, 66쪽)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성숙해진 아이가 나중에는 스스로 어머니가,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게는 이렇게 두 사랑이 병존한다. 에리히에게 사랑은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에리히의 책, 69쪽)



*   *   *



    이어지는 글에서 에리히는 다섯 가지의 ‘사랑의 대상’을 정리한다. 배타성 없는 사랑이자 그가 ‘사랑의 바탕’이라 부른 형제애, 앞서 잠깐 언급한 모성애,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에리히의 책, 77쪽)고 한 성애, 이기심과는 정반대의 사랑인 자기애, 그리고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선(善)인 신에 대한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 다섯 형태를 되짚어보면서 <참사랑>의 윤곽을 다시 그려준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동등한 존재라 하더라도 항상 ‘동등’하지는 않다.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에게는 항상 도움이 필요하다.”(에리히의 책, 71쪽)고 역설한 그에게 있어 가장 기초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나는 이걸 ‘차등의 극복’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은 차등적 존재다. 우생학의 관점에서 그것만은 옳다. 하지만 우리는 그 차등을 ‘동등’이라는 추상의 관념으로 극복할 수 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그러나 그런 극복이 반드시 인위적인, 대단히 이질적인 제도나 개념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이 낯설긴 해도, 우리는 무력(無力)을 동정할 수 있는 인간미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모성애는 불평등의 긍정으로 비화될 여지가 다분하다. 아이를 종속시키는 자아도취적 성격도 있다. 하지만 보호와 책임에 대한 1단계의 모성애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더 나아간다.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은 ‘좋은 일’에 대한 감정을 아이에게 함양시켜주는 것, 에리히가 ‘Happiness’라고 말한 감정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에리히의 책, 73쪽)고 비판했다. 물론 아버지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자신을 초월한 사랑을, 우리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성애는 에리히가 많은 각도에서 비판해온 사랑이다. 특히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에리히의 책, 79쪽)고 했다. 피정복욕을 포함한 정복욕, 허영심, 파괴욕구 등이 이를 자극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일시적인 욕망이 식어버리면 속된 말로 ‘전철을 갈아타기도’ 하는 사랑이다. 또 분리는 느끼니까…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만나면서 성적 교섭을 갖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구한다. <참사랑>이라는 개념에서 한참을 벗어난 사랑이다.


    자기애는 이기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받아온 모양이다. 에리히는 서양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지적한다.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에리히의 책, 83쪽) 앞서 살펴본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봐도,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나 자신에 대한 <참사랑>이라는 뜻에 한해서, 물론 에리히는 그런 의미로 ‘자기애’라는 단어를 썼다. 이기심은 공허, 좌절, (그리고 프로이트에 따르자면)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으며, 실상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에리히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신에 대한 사랑’을 분석한 이유는 <참사랑>의 모습을 <참종교>의 모습에 비유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토테미즘, 우상숭배, 신인동형 숭배의 단계를 무력한 애착인 어머니의 사랑에서 순종적 애착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변화하는 것과 나란히 놓는다. 그리고 종교의 한계를 도출한다. “신이 아버지인 한, 나는 어린아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대한 자폐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중략) 내가 복종할 때 나를 좋아하고, 내가 찬미하면 기뻐하고, 내가 복종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에리히의 책, 97쪽) 그러나 그는 종교, 특히 일신론 계열의 한계에서 오히려 성숙한 사랑을 씨앗을 발견했다.


    앞서 에리히는 성숙한 어머니와 성숙한 아버지가 아이에게 어떤 <참사랑>의 씨앗을 심어주는지 역설했었다. 아이 스스로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한 명의 어머니와 한 명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로부터 사랑을 익히는 것. 이것이 바로 <참사랑>이었다. 그는 종교도 같다고 본다. 그래서 심리학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 어머니에서 아버지로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참종교>와 <참사랑>의 공통전제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원리를 확립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에리히의 책, 108쪽)


    그리고 <참사랑>이 겸손의 태도로 발현되듯 <참종교>는 신에 대한 무지를 진리로 받아들여 겸손하다. 신에 대한 학문은 그녀/그들에게 별다른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녀/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직 신과의 합일. 카발라의 엔 소프(En sof), 혹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절대 무’이다. 에리히는 여기서 그 자신이 ‘인간개조’라고 표현한 명상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된 사상과 책을 접한 이들에게는 에리히가 어떠한 실천적 결론을 내릴지, 이미 저 앞에서부터 내다보였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의 양서’가 된 법정 스님, 틱낫한 스님, 달라이 라마, 라마나 마하르쉬, 아니면 크리슈나무르티 등의 결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실천의 진리.


    이에 실패한 현대사회. 에리히는 그걸 ‘현대서양사회’로 한정했지만 서양의 제도와 습관을 들여온 거의 모든 문화권이 그의 칼날을 면할 길은 없다. 자본주의는 정치적 자유와 시장의 원리로 돌아간다. 단순한 구조다. 물품이 노동의 가치를 뛰어넘고, 집중화되었으며,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에리히의 책, 119쪽)로 산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인간은 집단적이며 표준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규격화를 통해 초월과 합일의 갈망을 못 느끼도록 한다. 자본주의가 외치는 건 이 말 뿐이다. “소비하라!” 굳이 마르크스를 이 자리에 소환할 필요도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피상에 그치며, 그렇게라도 잘 살라는 격언들이 넘친다. TV토크쇼에 나온 연애 상담사들이 하는 말들은 다 겉핥기다. “평생 동안 남남으로 남아 있고, 결코 ‘핵심적 관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 예의 바르게 대우하고 서로 더욱 호의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리히의 책, 122쪽)가 설파된다. 굳이 그런 패널과 성공한 저자들의 책을 언급하진 않겠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은 사랑을 성적 쾌락의 소산이라고 보는, 기술적 단계에만 머물러 있다. 굳이 표현해보자면 ‘19세기적 정신’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소리로 들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때부터 ‘자본주의=인간의 자연적 욕구’라는 명제에 빠져 살았으니까.


    에리히는 일갈한다. 우상숭배적 사랑, 감상적 사랑, 시간에 의한 사랑의 추상화, 투사 메커니즘 활용, ‘사랑≠갈등’이라는 초보적 인식 모두를 일갈한다. 사랑은 우상화가 아니다. 환상 속에 있지도 않다. 고독에서 일순간 해방되려고 맞는 마취제도 아니다. 타인에게 투사할 사랑도 아니다. 피난처 역시 아니다. 에리히의 <참사랑>, 즉 ‘핵심적 경험의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에리히의 책, 138쪽) 가능한 사랑이다. 그것은 도전이요, 움직임이며, 또한 성장이다. 따라서 이런 사랑이 넘치고 있는 오늘날 그와 비슷한 종교는 “중세의 종교적 문화보다는 오히려 우상 숭배를 하는 원시부족에 더 가깝다.”(에리히의 책, 140쪽) 나는 오늘도 신에게 기복하라는 광고를 들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를 누비는 확성기의 소음을, 연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우리에게 신이 동업자일 수가 있는가?



*   *   *



    우리는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다. <참사랑>을 추구하긴 하죠.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녹록치 않은 것, 그걸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에리히도 그 점을 인정한다. 사랑과 정상적 생활(이 단어에 에리히는 작은따옴표를 쳐놨다.)이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도 이론적으로는 동의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랑은 예외일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사회의 재조직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듯하면서도, 그것마저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진 않았다. 다시 우리는 익숙한 답을 듣는다. 사랑은 개인의 경험이며, 전 생애에 걸쳐 훈련해야 하는 것. 익숙한 것을 제멋대로 녹여버리는 우리의 일상이, 사랑을 상실하게 만든다.


    에리히가 제목처럼 ‘The Art of Loving’이라 부른 건 세 가지다. 자기훈련, 정신집중, 그리고 인내. “인간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 결정”(에리히의 책, 150쪽)되는 지금에 와서 시간이 금이라는 미덕은 미덕이 아니라 진리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혹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인내하는 훈련이라고 한다. 그는 뭐라고 했을까? 상념을 제거하고, 호흡을 집중하며, 편안한 상태를 마련하는 명상을 하라고 했다. 순수하지 못한 대화와 음울한 사람을 되도록 피하며, 타인을 경청하라고 했다. 자기 자신에게 민감하여 특히 정신적 상태에 재빠르게 반응하라고도 했다. 교육제도가 이런 능력을 함양하는데 도움을 줘야 하지만 한참 부족하다고도 비판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우리의 일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으며, 그렇게 살게끔 적응하지도 못한다. 결국 에리히는 최후의 답을 내놓는다. 저 세 가지 ‘사랑의 기술’을 달성할 수 있게 우리를 이끄는 것은 ‘최고의 관심’ 뿐이다. 애호가로 사느냐, 명장(名匠)으로 사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결국 나는 『사랑의 기술』에서 그 제목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임을 확인한 것일 뿐일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단지 확인한 것에 지나진 않을 것이라, 나는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건 글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이렇게 쓰고 있는 내가 거울 속의 또 다른 나에게 하나의 정확한 반사상이 되는 건 분명 읽고 쓰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읽고 씀은 불가피하게 지식과 닿아 있으므로, 그것은 에리히의 표현대로라면 딱 그 선까지만 나아간다. 하지만 이후 <참사랑>을 나의 ‘몸+정신’에서 생각해봐야 할 때가 온다면, 나는 수많은 길을 다시 에둘러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그런 의미의 책이다. 다시 말할 수밖에 없겠는데, 그것은 기초와 근본에 대한 책. 사랑의 화려함을 기대했다가는, 양서 앞에서 실망의 실례를 범하게 되는 책. 요컨대, 독자가 보듬어줘야 하는 벚 같은 책이다. 직접 그런 사랑을 실천한 에리히의 이야기가 뒤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단순한 분석가의 비판 저서가 아닌, 정신의 스승이 남긴 양서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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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1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대한 이렇게 자세한 리뷰라니!! 추천을 안 할 수가 없군요!

사실 전 이 책을 7번 읽었습니다. 학부 때 나를 지배한 3인 중 한 사상가로서 그의 전 저작을 모조리 읽었지요. 물론 번역본으로요..ㅎㅎ 세월이 지나고 2010년이 넘어 다시 <사랑의 기술>과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몰랐지만(그저 추종자의 한 사람이었다는..^^) 그때 알았지요. 왜 프롬이 잊혀진 사상가가 됐는지를요. 프롬의 한계를 극명히 깨달았다고나할까요.
프롬은 항상 건전한 상식에 기반하여 논의를 폅니다. 물론 그래서 대중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철학적으로 엄밀히 논증을 요하는 개념을, 프롬은 은근슬쩍 넘아갑니다. 프롬은 대부분의 논의가 개인의 심리 형성이 어떻게 사회 심리로 확대 형성되는지 탐구합니다만, 중요한 개념적 연결고리의 치밀한 논증이 없습니다. 그게 하버마스와의 차이점이자 프롬만의 장점 인듯합니다.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철학서 중에 프롬의 저작처럼 평이한 책은 매우 드물거에요. 그게 저는 치밀한 논증 구조의 부재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프롬의 책을 학위 논문 쓰듯이 본 건 아니라서 개인적인 편견일 뿐입니다.

헌데 분명한 것은 <사랑의 기술>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한 전제로 계속 강조하고 있는 `주체적 자기(자아)`라는 게 도대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냥 건전한 상식에 기반하고 있어, 라캉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논파당하는 거 같습니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프롬이 아닌 라캉의 이론을 공부하는 게 아마도 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안타깝게도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기술>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 명저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신을 위한 인간>을 보완하여 인간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윤곽을 잡았다는 거에서요.

너무 반가운 마음에 헛소릴 지껄였습니다. 리뷰 잘 봤습니다!

탕기 2016-03-14 11:37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yamoo 님. 어서오세요^^

그렇군요. 치밀한 논증에 대해 비판해주신 점 때문인지, 저도 읽는 내내 에리히의 『사랑의 기술』을 철학서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와닿았다고 할까요.

에리히는 어떤 부분에서는 지면을 더 이상 할애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yamoo 님 말씀처럼 아예 개념들을 연결시키지 않고 `점프`를 하기도 하더군요! 본래『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의 취지이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고, 사실 그보다는 어쩌면 그런 사랑을 꾸준히 실천하고자 노력한 에리히의 삶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논증을 제거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본인만 알겠지만요...^^

에리히의 `주체적 자기(자아)`라는 개념도, 생각해보면 정신분석학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그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훨씬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참사랑>과 <참종교>를 유난히 자주 비교하더라고요. 심리학적으로 같다고 하면서 말이죠. 혹시 보편의 자아라는 게 있다면, 그걸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도 얼마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본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실천에 있어서는 에리히도 위대한 정신의 스승들과 같은 궤도를 언급해야만 했었던 것일 테고요.

음. 저는 얼핏 라캉을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라캉파가 얇은(?) 논증의 에리히 프롬을 논파한다는 그런 철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역시 제 수준에서는 말이죠 ^^ 그래도 라캉 역시 여러 번의 전회 끝에 도달한 지점이 여성의 향락, jouissance de l`Autre(대타자 향락)이었죠. 정신분석의 임계점이라면서... 저는 이곳이 에리히가 실천적 의미에서의 사랑을 언급한 정신의 지점과 거의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리히에게서는 라캉과 같은 어마어마한 분석적 전개를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역시 정신의 대가들은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yamoo 님 댓글 덕분에 월요일 아침부터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번 한 주는 기온이 쭉쭉 올라간다고 하더군요. 월요일 기분 좋게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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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7일 월요일





나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단점이 있다. 재 한 줌으로 사라지기 전까지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결점으로, 나는 이런 말을 당신에게서도 똑같이 들을 수 있다. 당신이 그걸 ‘단점’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당신과 내가 왜 그런 단점을 지닌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우리는 눈을 두 개만 갖지 않아도, 그리고 그 두 눈이 모두 정면을 향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시력은 둘째 치자. 왜 우리는 한정된 공간만 상으로 맺히는 구조 속에 갇힌 것인가?


    이런 한탄을 하면 나의 왼편에 있는 누군가는 오른쪽으로 눈만 살짝 굴리면서 나를 안쓰럽게 흘낏 볼 것이다. 물론 일상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걸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겨를도 없다. 거울의 도움을 받아 잘 살고 있고, 사물과 기계들은 정면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에 알맞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이따금 나는 ‘정면을 향한 두 눈’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듣거나 읽는다. 사방으로 눈이 나있는 신화 속 존재의 시각이라든지, 아무리 쳐다봐도 보이지 않는 이벤트 호라이즌이라든지, 동시에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구멍이라든지… 아무리 추상의 개념이라 해도, 예전부터 쭉 봐왔던 수많은 이미지들, 그것이 형태가 됐든 색이 됐든 간에, 그 중 일부를 활용해야만 생각할 수 있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신화와 종교에서 말하는 초월은 (과학에서는 ‘인지불가’라고 말하겠지만) 말 그대로 전혀 그려볼 수가 없다. 눈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새삼스런 자각.


    답답하다. 상징이 등장하고, 우리가 아는 예술사가 이어진 까닭이다. 인간은 기호와 예술이 없으면 태초에도, 진리에도, 그리고 사실 그 무엇에도 다가갈 수가 없다. 단, 아무리 다가가더라도 1/n 따위의 부분 접근 밖에는 할 수 없으므로, 결국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접근법을 격파하는 것을 우리는 ‘초월’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은 전혀 흡족해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과학에서 아주 근사한 문학적 표현 하나를 빌려오자면, 그건 quantum leap, 즉 양자도약이 될 것이다.


    보르헤스는 누군가의 집 지하실에 내려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아래부터 열아홉 번째까지 계단을 세고, 그곳에서 놀라운 세계를 봤다. 이제부터 말할 소설은 「알렙(El Aleph)이다. <알렙>은 근원, 시원, 진리 등에 닿아 있는 단어이며, 여러 언어권에 걸쳐 공통적으로 ‘제 1의 단어’로 여겨졌다. 이 제목은 또한 보르헤스의 전집 『알렙』을 대표한다.


    전집에 실린 다른 단편들은 대부분 이 조촐한 서재 공간의 ‘보르헤스’ 카테고리에 부족하게나마 (그러나 아주 들뜬 마음으로) 복기해뒀다. 글로 곱씹어보지 않은 단편들도 있다. 역량 부족으로 감응하지 못했거나, 이면지의 낙서를 복기로 이어가지 못한 탓에 기약 없는 유예의 상자에다 담아뒀다. 전집 『알렙』의 전체 복기는 동일 제목의 단편을 되짚어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며, 나머지는 아래에 링크로 달아둔다. 생각해보니, 나는 다섯 단편, 즉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아스테리온의 집(La casa de Asterión)「신학자들(Los teólogos)「자이르(El Zahir), 그리고 지금 복기할 「알렙」이 보르헤스 전집의 ‘강물’에서 건져 올린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2016년 3월 2일 :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

  2016년 2월 22일 : 「자이르(El Zahir)

  2016년 2월 19일 :「또 다른 죽음(La otra muerte)

  2016년 2월 28일 : 「신학자들(Los teólogos)

  2016년 2월 16일 : 「신의 글(La escritura del dios)

  2013년 9월 9일 : 「독일 진혼곡(Deutsches réquiem)

  2013년 9월 8일 : 「아스테리온의 집(La casa de Asterión)

  2013년 9월 6일 : 「엠마 순스(Emma Zunz)






*   *   *



    베아뜨리스 비떼브로가 죽었다. 「알렙」. 이건 그녀의 죽음에서 비롯된 이야기. 보르헤스에게 그 죽음은 중요하다. 찢어지는 아픔과 우주의 허황됨을 느꼈으니.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뒤이어지는 글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미망(未忘)의 통증을 우리는 단호히 무시하도록 하자. (다시 말해, 우리는 그걸 무시할 수 없다.) 그의 단편 「자이르」에서처럼 누군가의 죽음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상가(喪家)를 다녀온 보르헤스에게 은빛의 동전인 자이르가 굴러들어왔던 것을 상기해본다. 베아뜨리스가 죽고 없는 가라이 저택에 규칙적으로 들르던 그에게는 베아뜨리스의 사촌인 까를로스 아르헨티도 다네리와 가까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찾아왔다. 이 소설의 제목 <알렙>은 까를로스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까를로스. 출중한 용모에다 열정적이며, 말솜씨가 뛰어난 남자. 하지만 미천하며 무능하고, 맡고 있는 직책이란 한 기이한 도서관의 말단 정도다. 보르헤스는 그의 언변에 감탄하면서도 슬쩍 떠본다. 말 잘 하는 사람에게 갖게 되는 어떤 시기심이나 증오 같은 것이었으리라. (이 감정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짙어지다가 나중에는 보르헤스 자신이 툭 털어놓는다.) 왜 그런 말들을 작품으로 쓰지 않았는가? 까를로스는 이미 썼다고 하면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바로크, 데카당스 등이 언급된 자신의 서시를 자랑했다. 요컨대 그것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시인 마이클 드레이튼이 남긴, 무려 1만 5천행이나 되는 <폴리올비온(Polyolbion)>이라는 장시보다 더 지루하고, “<언어적 과장>이라는 부패한 원칙”(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알렙』, 219쪽)이 가득한, 운율적 결함이 있는 작품이었다. 도대체 까를로스는 무슨 작업을 하는 중일까? 그건 바로 “둥근 지구의 모든 것을 시로 표현”(보르헤스의 책, 215쪽)하는 것이다.


    사실 까를로스가 자신의 시에 대해 자화자찬하는 구절에는 별로 집중할 만한 가치가 없다. 작품보다 그 해석이 더 뛰어난 격이며, 배보다 배꼽이 몇 곱절은 큰 졸렬한 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까를로스의 작품을 인용하기도 하고, 그의 자평을 기억하여 이렇게 종이에 옮겨 적었다. 단편의 분량을 허투루 늘리지 않는 그가, 물론 소설 속 ‘보르헤스’이긴 하지만, 까를로스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그 까닭을 ‘시기심’이라 생각했다. 여간 해서 그런 생각을 할 만한 꼬투리를 심어놓지 않는 대가이긴 해도. 그러나 심증은 의외로 정확하다.



*   *   *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까를로스는 2주 후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한 과자점에서 우유나 마시자고 약속을 했다. 까를로스는 자신의 장시 앞부분을 출간할 계획인데 보르헤스의 친척 중 명망 높은 한 인사(알바로 멜리안 라피누르)에게 추천사를 써주십사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뜻 동의한 보르헤스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고, 그 중 후자를 택했다. 알바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이즈음에 이르면 보르헤스는 까를로스를 일컬어 “그치”(보르헤스의 책, 222쪽)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몇 차례 전화가 울렸다. 짜증 섞인 독촉은 아닐까, 보르헤스는 날카로워진다.


    그러던 10월 말이었다. 까를로스가 전화를 걸었는데, 매우 상기된 목소리였다. 제과점 주인(수니오와 숭그리)이 확장사업을 위해 자신의 집, 즉 가라이 저택을 철거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거의 위기에서 까를로스가 진정으로 걱정한 것은 자신의 장시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한, 집 지하실 귀퉁이에 있는 <알렙>을 잃어버리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그 <알렙>이라는 건 무엇일까?


    “전혀 흐트러짐 없이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있는 곳이지.”(보르헤스의 책, 224쪽) 그리하여 “지상의 모든 장소들이 들어” 있으니, “모든 조명 기구들, 모든 등들, 모든 빛의 원천들”(보르헤스의 책, 225쪽) 역시 들어 있는 것.


    까를로스, 이자가 미쳤구나. 하긴 비떼르보 가(家)의 병력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나의 사랑 베아뜨리스도 그러했고… 그래서 보르헤스는 <알렙>을 보러가겠다고 선언하고는 까를로스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수화기를 내려놨다. 그를 향한 증오심이 “까를로스는 미친 자다.”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통쾌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리라. 바삐 떠날 채비를 하는 보르헤스에게는 <알렙>이라는 걸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 따윈 전혀 없었다.


    가라이 저택에 도착하니 까를로스는 술을 주면서 <알렙> 보는 법을 설명해줬다. “판석이 깔려 있는 바닥에 누워 눈을 그 문제의 층계 19번째 계단에 고정시키게.”(보르헤스의 책, 226쪽) 그렇게 된다면 “연금술사들과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의 소우주요, <작지만 알차다!>라는 우리에게 구체적이고 친숙한 금언”(보르헤스의 책, 같은 쪽)인 <알렙>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미쳤다. 자신은 지하실에서 나가겠다고 했으니, 혹시 나를 시기하여 이 지하실에 가둬 죽일 셈인가? 아니면 방금 마신 술에 독이라도 들어 있는 건 아닌가?


    하지만 보르헤스는 “눈을 감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알렙>을 보았다.”(보르헤스의 책, 228쪽)



*   *   *



    앞서 나는 한탄했었다. 기억하는가? “우리는 눈을 두 개만 갖지 않았어도, 그리고 그 두 눈이 모두 정면을 향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시력은 둘째 치자. 왜 우리는 한정된 공간만 상으로 맺히는 구조에 갇힌 것일까?” 이건 필연적으로 <알렙>이라는 것을,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을 염두에 둔 한탄이었다. 보르헤스도 같은 함정에 빠졌다. “바로 여기서 작가로서의 나의 절망이 시작된다.”(보르헤스의 책, 같은 쪽)


    상징이 등장한다. “모든 새들이기도 한 한 마리의 새”“중심이 모든 곳에 있고, 원주는 그 어떤 곳에도 없는 어떤 구체”“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한 천사”(보르헤스의 책, 228~229쪽에 걸쳐) 보르헤스는 문학으로, 또한 그 허위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본 모든 것을 오염시켜버릴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자각한다. 동시적인 것을 보았는데, 연속적인 언어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보르헤스도 여러 것들을 언급했으니, 나도 하나를 보태어본다. “아뜨만은 / 움직이기도 움직이지 않기도 하며 / 멀리 있기도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며 /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도다.”(이재숙 번역, 『우파니샤드』1권, 60쪽) 직경 2~3cm 정도의 <알렙>에서 보르헤스는 하나의 사물이자 무한한 사물들을 봤다. 그리하여 그가 본 수많은 것들. 우주. 열거의 마지막에 이를수록 보르헤스는 절망하는 듯하다. 경외와 회한은 닿아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모든 지점들로부터 <알렙>을 보았고, 나는 <알렙> 속에 들어 있는 지구를, 다시 지구 속에 들어 있는 <알렙>과 <알렙> 속에 들어 있는 지구를 보았고, 나는 나의 얼굴과 내장들을 보았고, 나는 너의 얼굴을 보았고, 나는 현기증을 느꼈고, 그리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보르헤스의 책, 232쪽)


    보르헤스는 까를로스가 대단하지 않았냐며 촐싹거리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집이 허물어지는 걸 기회 삼아 시골에 내려가서 살라고 조언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그렇게 된다면 까를로스도, <알렙>도, 어쩌면 베아뜨리스도 서서히 잊게 되겠지…


    모든 것을 보았다. <불가해한 우주>라는 걸 알게 됐다. 그가 문득 공포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 세상 모든 것이 이제 낯설지 않으니, “나를 놀라게 할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르헤스의 책, 234쪽)이 인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다. 아, 망각은 축복이다!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의 서두에 새겨진 프랜시스 베이컨의 글귀. obtivion. 보르헤스는 모든 것을 보았으나, 하나씩 잊기 시작했다.



*   *   *



    <후기>라는 제목으로 덧붙여진 보르헤스의 글이 이어진다. 까를로스는 국가문학상을 받으며 보르헤스를 추월해버렸다. 보르헤스의 시기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마 그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는 <알렙>의 본질과 그 이름에 대해 오랜 시간을 고찰한 모양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가라이 가에 있던 <알렙>은 가짜였다고 생각한다.”(보르헤스의 책, 236쪽) 하지만 우리는 속지 말자! 보르헤스는 독자들의 이로를 언제나 이런 식으로 꼬아버린다. 속지 말자.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보르헤스는 버튼 대위(본명은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으로, 내가 알기에 그는 굉장한 천재였다.)가 남긴 한 원고가 브라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에 <알렙>과 유사한 여러 개의 물건들이 언급되어 있었다고 밝힌다. 속지 말자! 여러 개의 <알렙>이라니! 그렇다면 바로 내 방에도, 몇 평도 되지 않은 이 방에도 <알렙>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방의 구석구석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거울도 있고, 구체도 있다. 그보다는 책이 훨씬 많긴 하지만… 혹시 나는 그 물건들을 다른 각도에서 봐야 했던 것일까? 까를로스는 <알렙>을 보려면 시선의 각도가 중요하다고 했다.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주기도 했다. 혹시 나도?


    아니, 그보다 내가 속지 말자고 단단히 벼렸던 이유는 보르헤스가 “우리들의 정신에는 망각으로 뚫려 있는 수많은 구멍들이 있다.”(보르헤스의 책, 239쪽)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알렙>을 봤을 수도 있다. 불가해의 우주를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내 그 엄청난 것에 대한 경외와 회한 속에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르헤스의 기억 속에서 그렇게 베아뜨리스는 변질되어 갔다. 아, 내가 잊은 것들과 <알렙>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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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3-08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네요. ;^^

탕기 2016-03-08 11:34   좋아요 0 | URL
대가의 텍스트 중 쉬운 건 없죠 ^^ 건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