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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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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0일



    이곳은 좌표로 설명하기 애매한 지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곳의 좌표를 애당초 모르고 있다. 모른다는 건 부끄러울 일이 아니지만, 내심 답답한 것이다. xyz의 공간 사이로 무수한 선분들이 뻗어나가고, 나는 그 선분의 흔적 위에 서있는데, 모르겠다. 그래도 내막을 소개해야 하니 정리하자면 이렇다. xyz 중 뭐든 상관은 없다. 첫째는 도킨스 류의 필진들을 통해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비판받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고, 둘째는 카렌 암스트롱과 같은 보다 신중한 학자들이 옹호하는 ‘참종교’에 대한 믿음이며, 마지막은 아예 과학 쪽으로 기울어 있는, 가장 분명하게 도드라진 마음이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공통주제가 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과학은 다르다. 종교와 핀트 자체가 완전히 어긋나 있다. 나는 저 셋의 한가운데 있다.


    설 연휴에 위령미사를 지내고 왔다. 제대 후 7년 만에 간 성당이었다. 어렸을 적 몸에 익은 의례들이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놀라면서도 그 공간은 확실히 옛날과 다르게 느껴졌다. 신부가 미사 집전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우주의 조화와 지구 모든 피조물은 ‘주님’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정의는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 그리스도교가 서양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펼쳐진 그 정의의 전쟁, 말 그대로 승리와 패배로 이뤄진 ‘정의하기’의 맹렬한 싸움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될 뿐이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그 용어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신자는 거의 없다. 일상에 익은 말은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러니 분명 내가 있던 그 오후의 공간에서 신부의 말을 일말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질문을 확장하지 않는다.


    나는 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수많은 현대인 중 한 명이다. 다큐멘터리와 책을 접하고, wikipedia와 Google에서 하릴없이 ‘우주여행’을 한다. 몰라도 보게 된다. 아마 시각적으로 사로잡힌 까닭일 것이다. 과학자들의 감수를 받아 만든 우주 가상 이미지도 그렇고, 한편으로는 새벽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일점의 목성도 그렇다. 그 까마득함의 ‘보임’이라…… 내가 저걸 눈으로 보다니…… 가만히 보면 달은 그 얼마나 유난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생각들. 이 감정은 종교를 통해 본질로 들어가려는 마음, 혹은 철학에서 향하는 그 마음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강렬해서 얼마간 우주를 생각하고 있으면 ‘근본’이라는 단어가 그 옷을 완전히 갈아입어버린다. 입자물리학에서 말하는 기본요소, 우주론에서 말하는 수많은 우주들의 생성과 죽음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단어다. 당연히 여기서는 누가 우주를 만들었는가, 혹은 왜 생성되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이 하나의 공통화폐로 통용되지 못한다. 그 값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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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사 랜들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원제 : Knocking on Heaven's Door)』는 과학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 그리고 그 질문은 어떤 진리를 향하는지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종의 교양서다. 하지만 내용이 교양 수준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의 과학 교양서들을 나열해놓고 보면 이 책은 확실히 사려 깊은 설명, 유머러스한 비유, 간혹 지나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반복·강조하는 저자의 버릇 등 독자들에게 ‘쉬운 책’이라 느껴질 법한 요소들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입자물리학과 관련된 내용의 난이도다. 과학을 좋아하거나 과학을 대학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들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보물 상자다. 나는 지금껏 LHC(대형강입자충돌기)를 이 정도로 상세히 설명해놓은 과학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리사 덕분에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 표준모형 속 입자들을 발견하는 것인지 알게 됐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발견들을 우리가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이점을 준다. 즉, 그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곧 맞이하게 될 것이다.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책의 상세한 내용을 들여다보기에는 자신의 과학 상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디 책을 덮지는 않았으면 한다. 물론 리사가 도킨스 수준의 달필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과학하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의 입장은 중요하게 읽어봐야 할 내용이다. 책의 대부분이 입자물리학과 LHC와 관련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진화하는지, 어떤 이론이 더 가능성 있는 것인지, 앞으로 과학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상향식 접근과 하향식 접근은 무엇인지, 이런 다소 사변적인 의견이 들어간 부분이 오히려 이 책의 방점이 찍힌 곳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모르는 것들과 아는 것들을 나누는 경계를 넘기 위해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60쪽) 리사의 책 앞뒤에 포진하고 있는, 중간 내용들보다 훨씬 뭉뚱그린 면이 있는 글들이 우리 비전문가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내용이다. 칼 세이건의 경험을 빌려 말하건대,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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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에 ‘Heaven’이 들어가는 걸 보고, 처음에는 오해를 했다. 관심을 끌려고 했겠지. 아니면 celestial의 의미가 있는 건가? 아니었다. 반가운 카렌 암스트롱이 이 책에도 나왔다. 리사는 카렌과의 대화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 문자주의에서 시작된 것임을 확인했다. 갈릴레이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의 생각보다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다. 한편, 그 충돌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과학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과학은 물질 우주에 적용된다. 근본구조와 요소에 대한 학문이므로 당연히 유물론적이다. 여기에 ‘초월’이라는 종교의 단어가 들어가면 논리가 어긋난다. 우리나라는 다행이긴 한데, 미국은 이 충돌로 야기된 폭력사태나 교육논란, 특히 교과서 수정과 도입 문제가 굉장히 첨예하다. (도킨스도 바로 저런 문제를 겨냥하여 비판의 수위를 극도로 높인다.) 그런 와중에 리사는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과학은 경험에 근거하고, 종교는 계시에 근거한다. 둘은 근본이 다르므로 양립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과학과 성경이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책이었다.


    “과학은 우리가 무작위적으로 작동하는 우주 공간에 버려진 존재이며, 무작위적으로 주어진 크기를 가진 수많은 물체들 중 하나에 불과함을 늘 상기시킨다.”(113쪽)


    그런 리사가 이 책에서 명백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건 기본요소이다. 교양으로 알게 된 과학지식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들, 예컨대 원자, 원자핵, 중성자, 전자와 같은 것들에 대한 복습으로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전문지식으로 넘어가버리지만, 잘 따라가면 길이 보인다. 모르겠다면 건너뛰어도 좋다. 리사도 본인의 입으로 “이곳은 넘어가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중요한 건 우리 독자들이 ‘스케일(scale)’이라는 용어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면 족하다. 그리고 사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책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용도로 언급된 것도 아니다.


    입자물리학자인 리사는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를 2011년 9월에 냈다. 번역과 국내 발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녀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하튼 그녀는 두 달 뒤에 하버드에서 이 책을 주제로 한 짧은 강의를 하나 했다. 그 강의에서 리사는 스케일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친숙한 1~2m 단위에서 점점 작은 스케일로 옮겨갔는데, 그 와중에 이런 표현을 썼다. much smaller. 하지만 이 표현도 부족했는지 곧 far far smaller라고 정정했다. 대체 얼마나 작기에. 펨토미터. 0을 세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굉장히 작은 이 원자핵의 세계에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듣게 될 쿼크를 만난다. 제임스 조이스의 광팬이라면 알아볼 단어다. 『피니건의 경야』에 나오는 단어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결코 우리에게 익숙해질 수가 없다. 별 상관이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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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사는 일단 작은 세계를 소개해준다. LHC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려면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 작은 세계를 보려면 고에너지가 필요하다. 파장이 짧고 진동수가 높은 파동일수록 에너지가 높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줬다. 리사는 그 이론을 일컬어 “근본적인 이론일 것이다.”(286쪽)라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이 이론의 도움을 받은 실험가들은 LHC에서 매우 작은 세계를 본다.


    그 작은 세계라는 것은 표준모형에 들어있는, 이름도 생소한 여러 입자들을 일컫는다. 단, 힉스 보손은 2013년 3월 14일에 CERN(유럽원자핵연구평의회) 측에서 공식적으로 발견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 책을 낸 시점에서 리사는 그 입자를 이론적으로 추정할 뿐이다. 쿼크와 렙톤으로 이뤄진 페르미온(반정수 스핀을 갖는 입자)과 입자들 사이의 묶이는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 보손(정수 스핀을 가짐)이 표준모형에 들어가며, 전하의 여부, 질량의 경중에 따라 또 세부적으로 나뉜다. 이 모형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큰 난제들이 있다. 리사의 책에도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번에 걸쳐 소개되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무슨 문제를 풀고 싶어 하는지 별 무리 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LHC에서는 무슨 일을 할까?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숙고하고 연구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 중 하나라는 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195~196쪽) LHC는 바로 그 ‘훌륭한 일’을 하는 기계다. 대폭발 이후 1/1조 밀리초 후에 일어난 일을 재현하는 곳이며, 그걸 또 1/1만mm 단위까지 쪼갠다. 순간(瞬間)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이 짧은 순간이 두 양성자가 충돌해 (대부분은 서로 빗겨가지만)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 시간이며, 학자들은 그걸 컴퓨터로 분석하여 어떤 입자들이 생성됐는지를 알아낸다. 새로운 입자를 기대하면서. LHC의 규모, 개발 에피소드, CERN의 이야기, 과학자들이 희열을 느낀 순간 등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LHC에서 블랙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괴담의 과학적 반박까지 곁들이면 더욱 좋다. 리사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LHC가 얼마나 안전하게 위험을 관리하는지,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불확실성을 검토하는지 설명해준다. 이 충돌기를 둘러싼 오랜 갑론을박의 온도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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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을 넘겨도 좋다고 리사가 (대놓고) 말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LHC의 세부적인 설명이 담긴 3부 13장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 과연 그녀의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이 기계가 뭘 하는지 알았으니,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고에너지 영역의 그 무엇이든 포착해내려고 하는 인류 최고 기술의 과학기계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리사의 하버드 강의는 YouTube에서 볼 수 있다. 밑에 링크를 걸어두겠다. 강의 25분 즈음에 LHC의 3D모델이 스크린에 뜬다. 책의 그림과 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그 영상을 잠깐이나마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CMS와 ATLAS는 무엇인지, 리사가 “갱의 조직원들”(358쪽)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던 ‘제트(jet)’라는 현상은 무엇인지, 전자와 광자의 에너지와 위치 정보를 산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텅스텐산납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아보면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13장에 널려 있다. 트리거(trigger) 역할을 하는 컴퓨터를 일종의 스팸메일 필터에 비유한 리사의 유머러스한 설명도 이해를 돕는다.


    13장을 읽고 14장, 즉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읽으면 마음이 훨씬 편할 것이다. 아, 저 기계에서 생성되는 입자는 이런 것들이구나. 하지만 도표로 차분하게 정리된 것과 달리 이 입자들은 전혀 ‘표준적’이지 않다. 오히려 난잡하다. LHC의 검출기에 찍힌 입자들의 궤적을 그래픽으로 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기는커녕 현대미술의 한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다. 리사는 진리를 아름다움과 곧 연결시키곤 하는 우리의 전통에 반기를 든다. 동의할 수 없다. 진리란 “어지러운 현상과 잡다한 입자”(373쪽)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주관. 과학이 알려준 진리는, 우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덕환 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국문학도인 나는 당시 발끈했다. 시인의 노래를 과학의 입장에서 폄하한 것 같은 뉘앙스를 느낀 까닭이었다. “우주는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과학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폐가 있긴 하다. 그러나 과학의 미, 즉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선 대칭성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대칭성이 깨지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 역설의 관계에서 이론은 풍부해진다. 또 하나의 미는 단순성이다. 물리학자들은 만물의 기본요소가 단순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론과 입증을 통해 반복적으로 알게 된 까닭이다. 그쪽의 표현을 빌리자면, 출발점의 입력값이 적으면 예측력이 강해진다. 이 두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이론은 공방의 장에서 주목을 받았다가 도태된다. 그래서 아주 강력하다고 알려진 표준모형마저도 그 너머의 이론에게 자리를 내어주거나 통폐합될 가능성이 있다. 리사가 몇 번이고 강조한 과학의 진화 방식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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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칭성 이론, 테크니컬러 힘, 여분차원. 모두 계층성 문제, 즉 ‘중력은 다른 기본 힘들에 비해 왜 약한가?’에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들이다. ‘미세 조정’으로 다듬을 정도가 아니라, 정말 터무니없이 약해서 과학자들이 수 십 년 간 머리를 싸맨 문제다. 중력. 0을 열여섯 개나 찍어야 될 정도로 큰 차이. 그래서 아주 작은 스케일에서는 중력을 아예 무시해버려도 됐다. 양자역학과 중력의 문제는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이어서 일부 과학자들은 둘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이들을 무모하다고 무시하기도 한 모양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원제 : The Elegent Universe)』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 중 한 쪽에 집중적으로 매달리면서,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경고성 메시지를 애써 무시해왔던 것이다.”(브라이언 그린의 책, 22쪽) 브라이언은 그 책에서 둘을 통합할 초끈이론을 설명하는데, 그 이론은 바로 계층성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한때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리사는 “한 풀 꺾인 과제”(475쪽)라고 평가했지만 3부 20장을 시작하면서는 두 분야의 지속적인 공동 연구를 희망했다.)


    일단 독자의 입장에서 ‘계층성 문제’라는 걸 대략 짐작은 했으니 그걸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는 들어봐야 할 것이다. 리사가 제안한 비틀린(warped) 여분차원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끈이론이 제시한 brane, 그건 물기가 맺힌 샤워 커튼에 비유된다. 그 막과 막 사이를 리사는 ‘the bulk’라고 부르며, 이 네 번째 차원의, 거리가 굉장히 좁은 공간이 중력brane과 약력brane 사이의 차이를 만든다. 즉 이 사이로 중력자의 파동이 급격하게 줄거나 늘어난다. 여분의 차원으로 중력이 빠져나가 극미세 스케일의 중력이 무시해도 될 수준으로 약해진다는 이론이다. 물론 리사의 말마따나 이건 사변적인 이론일 뿐이라 검증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LHC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사변적인 이론에서 실증 단계의 아이디어와 개념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걸 쓸모없다고 하면 리사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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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우주로 나아간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그런 생각은 터무니없을 뿐인 작은 세계에서 숨이 턱 막힌 채 한참을 읽다가 드디어 우주로 나아간다. 하지만 산뜻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막막함이 찾아온다. 내가 새벽마다 목성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1~2m 정도가 딱 좋다. 아무리 강력한 기능을 지닌 관측기계라 하더라도 우주의 끝을 발견한 적은 없다. 얼마나 크기에. 수평선·지평선(horizon)은 관측자나 관측도구가 전진할수록 뒤로 물러나는 법. Observable Universe는 그래서 우리에게 더 큰 우주의 규모를 상정한다. 우주의 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있는데 못 찾았다는 것. (후자의 경우는 우주의 모양이 문제가 될 것이다.) 리사는 이 거대한 우주가 점차 팽창하고 있다는 과학적 발견을 거쳐 우리가 볼 수 없는 96%의 우주까지 밀고 나간다. 작은 곳에서는 오래 머무른 그녀가 우주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도를 높인다. (물론 전문분야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속도는 흡사 급팽창 이론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세계에서도 두 가지 불확실성 문제, 즉 계통과 통계의 문제로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리사도 그걸 별도의 장을 마련해 설명했다. 그러나 우주론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조셉 콘레드의 『암흑의 핵심』을 빌린 리사는 우리가 보는, 말 그대로 관측하는 우주는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dark보다는 invisible이라 해야 옳지만. 여하튼 이 96%의 압도적인 ‘모름’ 때문에 우주의 스케일 역시 텅 빈 공간이 된다. 마치 원자의 대부분이 텅 빈 것처럼. 리처드 파넥은 『4퍼센트 우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우주는 저 밖에 존재하는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리처드의 책, 13쪽) 인류는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두뇌들의 조합으로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것을 밝혀 왔으나,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종교의 단어로 포장하진 않는다. 그저 그녀/그들은 문을 두드릴 뿐이다. 언젠가 열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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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사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스터리하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주 작은 세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에서는 실현될 일이 전혀 없다. 예컨대 원자 안에서 전자는 한 궤도를 돌다가 갑자기 다른 궤도를 돌기 시작한다. 그걸 눈으로 본다면 전자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착각해버릴 지경이다. 미국 FOX TV에서 방영된 ≪Cosmos : A Space Time Odyssey≫에 그 모습이 그래픽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 (관심이 있다면 5화를 보라.) 그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우주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아는 것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재미있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리사의 책, 558쪽) 그리고 발견되지 않은 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우주는 우리보다 항상 똑똑하다는 걸 입증한다. 칼 세이건도 그의 생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TV 시리즈 ≪Cosmos≫에서 “우리는 우주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의 과학 독서였다. 늘 그랬다. 과학책은 덮고 나면 묵직한 설렘을 안겨줬다. 그녀/그들이 글을 훌륭하게 써서 그런 건 아니었다. 도킨스가 예외이긴 한데, 대부분 과학자들은 글을 너무 정직하게 쓰는 나머지 패턴이 빤히 읽힌다. 깊게 해석해야 할 문구라는 건 도무지 찾아볼 수도 없다. 하지만 과학은 그런 꾸밈과 사유가 필요 없다. 오히려 그런 정직함이 진리를 향하는 확실함, 확고함, 굳건함, 이런 느낌의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그녀/그들은 도무지 정확하지 않아 걱정이라고 한탄할 뿐이지만! 일말의 오차마저도 허용치 않는 그 정신은 우리네 도공(陶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 과학이 3년 전 힉스 보손을 발견했다고 선언했을 때, 내 기억에 세상은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 (나는 당시 작은 기사 몇 개를 읽었을 뿐이다. 이해는 둘째 치고.) 샴페인 터지는 소리는 의외로 작았다. 아마 외계인을 발견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리사도 입자물리학의 인지도에 대해 꽤 신경을 쓰는 눈치다. 그렇다면 이 책,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한편으로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과학계의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뒤늦게나마 그 환호에 한 소리를 보탤 순 없을까, 궁리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야기들이 수 십 년 뒤에는 어떻게 회자될 지를 기대하며. 달 없는 밤일수록 찬란해지는, 일점의 목성을 바라보는 일은 그다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링크 : Lisa Randall : Knocking on Heaven's Door - Great Teachers (Harvard University)


p.s 505쪽에 "관측되 우주"라는 오타가 있다. 다음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으면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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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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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일



    1월의 마지막 나흘이 흐르고, 2월의 첫 날은 하나의 닫음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글을 이렇게 몰아서 읽어본 건 칼비노 이후 처음이었다. 사사키. 그가 무슨 말을 반복하는지 알았다. 지우지 못한 의심도 많지만 그간의 오해들도 어느 정도 풀렸고, 내 안에 딱딱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간단한 생각들도 차츰 물러졌다. 언젠가 닦아 없앨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다. 이 기대가 동맥경화를 막아주겠지.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하고 겸손마저 무기로 다루는 이 일본 작가는 확실히 내 생각의 주름 하나를 접어줬다. 그도 한 장의 종이가 실은 여러 번 접혀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비유해보자면 그렇다. 종이접기.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도 좋아하시는 종이접기. 뭔가를 진리라 하여 추구하면 그건 장미 모양이나 학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안에 적힌 문자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속살을 내어주는 일은 없으리라. 대학 때부터 줄곧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


    이 책,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은 그의 네 번째 아날렉타로 일본에서는 2012년에 출간됐다. 『야전과 영원』의 역자 안천 씨께서 수고해주셨으니 번역을 문제 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건 이 둘을 포함해 세 권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언어를 위한 선언조의 변론이라 글의 온도가 꽤 높다. 사사키를 접할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권장되는 책이라고 하더라.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단, 두꺼운 책에 거리를 두지 않는 이들에 한해서 『야전과 영원』을 먼저 읽으라 말하고 싶다. 장황한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니까. 비약이 적은 걸 읽어야 반복해서 읽었을 때 이해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둘과 비교하자면 『이 치열한 무력을』은 정말 중구난방이다. 아날렉타이니까 당연하다. 나머지 선집들도 번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여하튼 이 책은 그냥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대담이 글보다 더 많다. 리듬 따라가기가 용이하다. 대담의 즉흥성이야말로 우리처럼 자극될 만한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작가들과 작품, 그리고 일본어를 잘 모르니 종종 등장하는 농담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이 책은 높은 수준의 대담들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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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이 무슨 자극을 받고 싶어 했는지를 공들여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이겠다. 어렵고 쉬움은 독자마다 다르겠으나, 일단 일본 문학을 풍부하게 알고 있는 이가 읽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사사키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일본어를 못 읽기 때문에 후루이 요시키치를 모르니 불쌍할 뿐이라고 농담 반 진담을 했다. 그 흉내를 내보자면, 이 책에 나온 소설을 일본어로 읽어본 독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게 잘 팔리는 비평책의 함정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 아날렉타에서 자유롭게 펼치며 논하고 있는 여러 작품들은 그 비평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 번 쯤 읽어보고 싶어진다.


    대학에서 김애란 씨와 대담을 가져본 경험이 있다. 이 공간 어딘가에 떨리던 그 소감을 옮겨놨는데, 역시 현장의 힘은 강했다. 소설의 뒷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머뭇거림과 주저 없음을 반복하며 던지던 그녀의 생각, 소설 관념, 철학, 삶, 세계 등, 그런 다채로운 투망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한 사람이 어떤 소설을 어떻게 썼는가를 우리가 물을 때는 겉으로야 “와, 정말 팬이에요!”라는 소녀/소년의 팬심이 겉에 발라져 있지만, 내심 궁금한 거다.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고. 그래서 비평은 한편으로는 그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세상 보는 일의 고뇌, 진통, 그런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은 나중에 직접 읽어보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비평에 참가한 사람을 비평을 통해 읽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다카하시 겐이치로, 오에 겐자부로, 후루이 요시키치의 작품을 부랴부랴 사서 꽂아두고 만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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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는 『야전과 영원』에서 맘껏 발휘했던 가공할 만한 공격력으로, 그 예의 화려한 단언으로 역사와 철학, 그리고 비평을 오고 간다. [달필+달변]인가보다. 사사키의 입이 풀리기 전에 말을 자르라는 사전 경고를 받은 사회자가 있다니. 여하튼 대담을 이끄는 쪽이든 따라가는 쪽이든 재치 있는 반론과 변론, 그리고 긴 역사 이야기를 주저 없이 펼치는데, 그 하나하나가 상대방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작품에 대한 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글을 쓰는 독자라면 그녀/그들이 공유하는 고민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엇나간 고민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온도차로 찬 습기가 물이 되어 흐르고, 그 물이 단비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분명 자극이 되는 책이고, 그만큼 자극적이다. 온통 문제적 작가들만 초대해놓은 책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책을 어제 새벽부터 잠깐씩 읽고 있는데, 서두부터 ‘문제’라는 분위기가 확 풍긴다. 문학과 삶에 대한 확실한 지론이 있거나 어딘가에 오랜 시간 기대어온 독자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독서가 되겠지만, 나처럼 삶의 단 하나의 확신은 부유 밖에 없다며 때론 (기분 상) 높이 떴다가 낮게 가라안기도 하는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고민을 확인할 기회다. 사실 독서라는 게 그렇기도 하다. 자신에게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으면 읽다가 내팽개치는 것이 책이고. 늘 차이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봐라, 저들도 저렇게 다투고 싸우며 글을 쓰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사키의 말마따나 ‘닫힌 회로’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이가 아무래도 이 책을 더 깊게 읽을 가능성이 있다. 철학과 연애에 대한 단편이 조금 있지만 그건 선집에 껴놓은 정도이고, 어떤 글은 결론에 가서 푸시시 식어버리기도 한다. 『야전과 영원』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만능인 줄 알았는데. 뭐, 이런 생각. 여하튼 글을 고민한다는 것 앞에 사사키가 단언하며 당당하게 내놓는 것은 언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역사의 변화다. 국내에 번역된 세 권의 책에서 내내 하는 말이 그거였다. 누군가는 문학이 뭘 하는가에 회의를 갖지만 정작 그 전선에서는, 창작의 참호에서는 그녀/그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치열한 무력을』은 그걸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래도 글을 붙잡고 놓치는 않는다는, 조야한 끈기 정도는 있는 독자로서 나 역시 자극으로 남는 글들을 꾸물꾸물 챙겨 바구니에 담아놓았다.



*   *   *



    여러 글들을 길게 적어 그걸 다 쓸 수는 없고, 일단 이 책이 사사키의 무슨 주장을 담고 있는지 살짝 빼내고 싶은 이들은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을 먼저 읽고 그 뒤에 나오는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읽으면 좋겠다. 전자는 무력(武力)으로 오해하던 이 책의 사납고 뜨거운 제목이 실제로는 (표지에도 떡 하니 나와 있지만) 무력(無力)이었음을 확인해주는 글이다. 3·11을 말한다. 그 앞에서 무력해진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력함이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면서 파울 첼란, 에마뉘엘 레비나스, 브루노 슐츠의 이름이 줄지어 나온다. 무력했지만 승리하게 되는 역설을 증언한다. 정의와 문학과 예술이 한 통에 담긴다. 물론 그 ‘의미’라는 걸 곧 ‘힘’으로 이해해버리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 읽고 나서도 의심이 지워지진 않았다. 체념, 하지만 그로부터 다시 역설로 피어나는 희망. 어차피 다 그런 패턴이었으니까, 사사키 뿐만 아니라.


    그래서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이어 읽으면 좋다. 그의 작품집을 하나 사긴 했는데 번역된 게 한 권 밖에 없다. 사사키의 비평에 언급된 후루이의 초기 장편 3부작과 『산조부(山躁賦)』를 어디 큰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여하튼, 사사키는 지면을 고려한다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후루이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촌락 공동체, 도시, 광기, 재결합, 치유로 이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다.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그려볼 수 있다. 요컨대 후루이는 생(生), 성(聖), 성(性)의 자의성을 말하는 작가다. 자의성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사키가 『야전과 영원』에서 르장드르와 푸코를 빌려가며 그렇게나 반복했었다. 우리를 도박장에 밀어 넣으려고. 아무 근거 없음. 근거율과 인과율의 분리. 하지만 후루이는 그 자의성을 알면서 희망을 갖는다. 낙천이다.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 후루이는 왜 “낙천은 불안과 잘 어울렸다.”(258쪽)라고 한 걸까? 죽음과 삶의 무근거성 앞에서 남는 건 오직 ‘살아남는 것을 사는 것’일 뿐이라는 걸, 공습과 재난의 시대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자의성의 텅 빈 공간을 낙천으로 채워 넣는다.


    사사키가 이 비평 초두에 후루이의 초기 작품 3부작과 후기 『산조부』사이의 단절을 찾아보겠노라 벼렸던 것은 바로 저 메시지, 즉 후루이의 ‘낙천’을 재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후루이는 공습과 재난과 전쟁의 주제를 집요하게 잡고 늘어진 작가. 이어지는 사사키와 후루이의 대담도 글을 쓰는 것에서 시작해 결국에는 대지진 이후의 ‘말’을 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사키는 후루이에게 독자들을 낙천으로 이끌어달라고 한다. 거칠고 공격적인 사사키도 ‘낙천’이라는 말을 쓰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빈 공간을 채운다. 그 채움의 작업은 언어를 지녔다는 자긍심으로 아주 치열하게 불타며 진행된다. 그러나 모두 태우지는 않는 역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자긍심에 대한 사사키의 증언은 이 책 맨 마지막 대담에서 읽을 수 있다. 차이를 느끼며 각자 판단할 부분이다.



*   *   *



    글을 쓰는 이들이 공감할 부분도 있다. 자극이 되는 것과는 좀 다르다. 「말이 태어나는 곳」은 제일 처음 등장하는 대담인데, 글을 쓰지 않는 이들이나 그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읽힐 지도 모르겠다. “말이 태어난다.”라는 말은 좀처럼 일상에 등장하는 법이 없다. 언어의 안팎을 나누는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일상에서 신경 쓰는 일도 별로 없고. 달리 말하면, 글 쓰는 이들은 ‘말이 태어나는 곳’으로 향하며 명확하지 않은 고독으로 들어간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다 그려놓고 레고 조립하듯 쓰는 글이나 PR의 글은 제외한다. 대체 나는 언제 ‘글’이라는 걸 쓰는가?


    이 글만 해도 그렇다. 사사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순전히 뭘 읽었으니까 쓴 것이다. 문제는 최초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사소한 글도 그런데, 우물을 들여다보거나 우물 속에 들어가거나 혹은 우물을 부쉈다가 다시 만들기도 하고, 없는 우물을 저기 있지 않느냐며 박박 우기기도 하는, 온갖 다양한 기벽을 지닌 작가들은 과연 어떨까? 늘 궁금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나 궁금해 하면서도 나는 그 누구의 말도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지독한 신비주의자 정도일까? 고민의 특권? 손 오그라드는 자기 감성? 지금 생각건대, 여러 작가들과의 대담 기회를 스르르 흘려보낸 것을 후회한다. 그만큼 뭘 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으려고 하는, 이 자기두둔의 지독한 생명력은 참 경이로울 정도로 질기다. 그래서 이 대담에 수줍게 반가워한 것이다.


    「말이 태어나는 곳」에서 뚫어져라 들여다본 문장은 이거였다. 되읽다보면 아직도 찌릿한 구석이 있다. 글 앞의 공간에 걸려 있는 어떤 자물쇠가 모습을 갖춰가는 것 같은 상상도 했다. 열쇠는 저마다 있을 테고. “근원적인 발생 장소에 이끼처럼 생겨나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신들. 구마구스의 점균과 오리쿠치의 무스비가 포개지는 장소가 제겐 ‘말이 태어나는 곳’입니다.”(33쪽) 덕분에 미나가타 구마구스(南方熊楠)가 누구인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가 누군지, 무스비(生靈)는 또 뭔지, 흥미로운 정보들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단 하나, ‘점균’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나흘 내내. 말과 이미지가 섞인 것. 과정인 것.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 암수의 구분이 없는 것. 소설이라 시작해놓고 점점 이상해져 몇 달이고 내팽개친 여러 글들 앞에서 느끼던 감정이 ‘점균’에서 하나로 모아졌다고 하면 될까. ‘근원에서 피어난 점균이라니!’ 몇 번이고 외쳐버린 것이었다. 그 탓에 이 대담에서 사사키가 뭔 말을 했는지 다 잊어버렸다.


    하나 더. 소설의 시작과 마무리를 고민하는, 이른바 ‘문창’의 창틀에 목을 매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가울 고민이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라는 긴 제목의 대담에 나온다. 놀랍게도 사사키는 철저한 무계획성으로 소설을 썼고, 꽤 좋은 평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계획성은 하나하나 접어가는 치열함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중층적인 소설을 낳는다. 읽을 때마다 달리 느껴진다는 독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달리 ‘읽힐 수밖에 없는’ 소설. 그런 장치들은 분명 사사키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대담을 하며 나중에야 알게 된 거라고 빼지만.) “안이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마무리”(212쪽)를 거부한다는 사사키의 주장과 [문학]을 거부한다는 다카하시의 주장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도 재밌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하면 열받았거든」은 대단원의 여부로 문학과 소설을 구분하는 다카하시의 논리, 일본 AV와 일본 근대문학의 공통점, ‘사랑하는 힘을 빼앗는’ 명령과 모자이크의 대비, 소세키의 작품 「명암」을 놓고 펼쳐지는 농담 등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   *   *



    사사키의 다른 번역본을 읽은 이라면 이 책에서도 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무서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그렇게 소개할 수 있다. 일본 사회도 그래서 그런 반응이었고, 폭발적인 관심은 극과 극으로 갈라졌다. 그가 얼마나 많은 변론을 했는지는 (사사키 자신이 소설의 세 가지 기원이라며 말했던 그 변론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고, 국내 인문학계의 최전방에 있는 이들도 그를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주시 중이다.


    그의 이름이 뜨겁게 달아오른 이유는 하나다. 무력(無力)함 앞에 ‘치열함’이라는 엇나가버린, 전혀 짝이 맞지 않는 표현을 가져다놓았기 때문이다. 비문이다. 아니, ‘비어(非語)’라고 해야 하나? 이 억지스런 작업을 위해 사사키가 발휘하는 단언의 강도는 수많은 독자들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셌다. 문체 자체에서도 “나는 세다.”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작가를 근래 읽어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사사키라면 이렇게 말했을까? 독자들이 그 치열함의 온도를 알았으면 된 거라고 했을까? 그간 그가 샀던 오해를 풀 변이 하나 있어 옮겨놓는다. “우리 사회는 실제로 법과 ‘법이 보증하는 권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어디까지나 이를 뜻하는 것이지 “언어의 마술적인 포에지에 의해 무한하게 비상하는 상상력”과 같은, 소설을 읽고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고 감격하는 식의 쓸데없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371쪽)


    사사키는 “쓸데없는”이라는 표현을 바로 철회해버리지만 여기서 그는 세상의 작동원리인 말의 힘을 거듭 강조한다. 그걸로 쓰인 작품이 세상을 바꾼다는, 우리가 감상 삼아 쉽게 하는 일시적인 착각을 두둔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틈이 벌어진다. 그가 자꾸 우리를 도박장으로 끌고 가 어디에 걸겠냐고 묻는 것, 그리고 자신은 어디에 걸겠다고 단언하는 것은 무력함을 무의미에서 탈출시키는 한 행위다. 그는 그 틈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틈’을 ‘뒤’로 바꿔 이해해도 좋다. 사사키의 이 책에도 거듭 반복된다.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우리에게는 극히 일부일 뿐인 그 예술을. 바로 그 예술이 타고 난 잿더미에서, 바로 ‘헤겔의 재’에서 보란 듯 소설이 득세하더라고 그는 말한다. 희망을 본다. 언어의 긍지와 말의 힘. 우리가 쉽게 잊는 것들이다. 여기에 그가 아직도 유용하다고 말하는 실러의 예술론까지 더한다면, 아니, 더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문학의 효용론을 논하는 수준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애당초 사사키의 논의에서는 ‘효용’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논외로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술이야말로 답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은 이는 안다. 그 ‘말’이라는 것의 힘을 사사키가 어떻게 증언했는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어떤 여정이 있다. 읽기와 쓰기. 아, 이 교과서 제목 같은 단어들. 그리고 줄곧 생각해왔다. 그는 그걸 삶에 가져다붙인다. 철학이 학문으로 변질되어 삶에서 떨어져나간다. 그렇게 잃어버린 무엇을 기린다. 같은 맥락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사사키처럼 말을 할까, 이런 생각도 해봤다. 동사가 없는 이 책 제목에 알맞은 동사를 넣으시오. 문제가 앞에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쓸 것이다. ‘당신에게.’ 그러고 보니, 나는 답을 잘 쓰는 학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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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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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8일





    세 장의 사진으로 열린, 그리고 마담의 증언으로 닫힌 한 남자의 삶이다. 눈이 사방으로 돌아가고 수많은 회로들이 끊임없이 그의, 요조의 몸 안에서 공포의 물질들을 옮기는 기이한 장면이 보인다. 언제부터 그가 그런 아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갖가지 추측이 있지만 상관없다. 사실 ‘언제부터’라는 말도 상관없다. 수기는 불분명하게 시작한다.


    집에서는 익살로, 학교에서는 장난꾸러기이자 그럭저럭 공부 잘 하는 아이로 인기를 얻는다. 순전히 인간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타인에게 웃음을 주는 것은 곧 속이는 것. 나 역시 인간이 두렵다. 일상에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군(群)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공포에 가깝다. 아니면 무시무시한 상상 즈음이려나? 그런데 요조는 그게 자기 자신을 극도로 해치는 지경까지 나아갔다. 화학 물질의 비정상적 활성화.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는 요조의 여러 고백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지지만 그가 유독 예민한 것은 사실이다. 그 예민함이 때론 진실을 보게 한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량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27쪽)


    그걸 보고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아이다. 그런 면이 훗날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였을 거라 말하지만, 그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다. 심지어 그가 잘 생겼다는 말조차 의심스럽다. 아니, 잘 생기긴 했지만 사진 속 그는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니까. 여하튼 인간 사이를 오고 가는 미묘한 기류와 그것의 망각과, 이런 것들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그의 병증은 수시로 드러나고, 이 사람을 신뢰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 탓에 나는 수기를 읽는 내내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   *   *




    타향에 오니 연기가 더욱 쉬워졌지만 문제는 그 연기를 눈치 채는 인간들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다케이치. “부러 그랬지?”라는 그의 말 이후로 불안과 공포가 밀려왔다. 다행이도 요조는 소심하다. 죽이진 못하고 친구가 되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첫 목표가 생겼다. 고흐의 그림을 보더니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40쪽)라고 선언한다. 인간군상을 그리겠다는 어린 의지가 완성한 그림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의미에서 어린왕자가 스쳤다. 어른은 요조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림의 인연이 술, 담배, 창녀, 전당포, 좌익 사상으로 이어졌다. 요조가 도쿄의 바다에 잠겨버렸다. 화방에서 알게 된 여섯 살 연상의 호리키가 트렌드라며 이곳저곳을 데리고 가 거들먹거리며 소개해준다. 요조는 창녀에게서 ‘여자수행’이란 걸 한 탓에 여자들이 꼬이는 남자가 되고, 공산주의 독서회에 출입하다가 농담이 진담이 된 꼴이라더니 정말 행동대 대장이 되어 학업을 소홀히 하기까지 한다. 돈에 쪼들린다. 운동권에서 도망친 그에게 호의를 가져준 여자들은 여럿 있었다. 둘에게는 적당히 비위를 맞췄지만 긴자 카페의 여급 쓰네코는 다르다.


   쓰네코. 연상으로, 남편은 형무소에 있다. “주위에서 차가운 삭풍이 불고 낙엽만이 휘날리는 듯한, 완전히 고립된 느낌의 여자였습니다.”(61쪽) 그녀는 동류다. 불안함이 사라진다. 해방의 밤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라질 것이 아닌가. 상처 입기 전에 먼저 헤어지기로 한 요조, 이 남자는 그런 남자다. 만나지 않기로 작심 이후에도 속으로 혼자 부담스러워하고 그녀가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호리키를 대동한 만남을 계기로 (호리키가 그녀를 궁상맞은 여자로 취급했으므로) 그녀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연 그는 어떻게 했을까? 동류끼리 죽기로 한다. 놀이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그 말이 실행으로 옮겨진 결과는 참담하다. 가마쿠라 바다에서 요조는 살고, 그녀는 죽는다. (다자이의 경험과 같다.) 그녀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만 차라리 죄인으로 포박 당한 기분이 좋다. 그러나 검찰청 취조 때에 한 말끔한 검사가 “진짜야?”라고 묻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시 비참해진다. 다케이치가 떠오른다.



*   *   *



    넙치(시부타)네 2층 삼 첩 짜리 방에 칩거하면서 이제는 하찮은 무명 만화가가 됐다. 갱생하라는 넙치의 말에 호리키 네로 간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가출을 한다. 하지만 정말 호리키 네로 갈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아무 데도 없던 것이다. 그런 요조를 호리키는 한심하게 취급한다. 마침 호리키와 관계된 잡지사의 여자가 오고, 요조는 그 여자, 시즈코의 집에서 정부 같이 산다. 다섯 살 된 딸은 그를 ‘아빠’라 불러준다.


    자립하고 싶지만 갈 곳도 없다. 이 무렵 그는 ‘세상은 곧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인색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조금은 비슷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리라. 샤를 크로의 시 속 두꺼비처럼. 방해한다면 돌아가리라, 생각하면서 외박도 하고 야비한 술꾼이 된다. 달리는 열차에 석탄을 때려 붓는 기관사. 하지만 그렇게 열차가 1년을 달리고 봄이 되니 두 모녀를 놔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가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 요조가! 두 모녀를 행복하게 해주소서. 누가 그를 말종이라 말할 수 있나.


    떠난 그가 다시 정부 행세를 한 것은 이제 당연하게 느껴진다. 필요에 따라 뻔뻔해지고 구색 맞출 수도 있다. “어제까지의 저 자신이 애처로워서 웃고 싶어졌을 만큼 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99쪽) 하지만 이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다. 여전히 인간을 두려워하는 그의 궁색한 변명 정도로 들린다. 유일한 낙이 손님에게 술을 얻어 마시는 것, 그리고 술을 마셔야 나오는 달변으로 이야기하는 것 정도다. ‘조시 이키다(情死, 살았다)’라는 필명으로 아동 잡지에서 음란 잡지에 이르는 곳에 만화를 그려 보낸다. 루바이야트의 시구를 붙인 것은 당연하다. 마시자. 그는 마시지 않으면 볼 수 없으며, 마신다 해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대체 그는 어떤 인간의 쓸모를 갖고 있는가. 교바시 마담의 도움으로 여급 요시코와 결혼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진 그가 호리키와 함께 “같은 수준의 개”(108쪽)로 전락해 여기저기 쏘다니는 건, 열차의 석탄이 전혀 식을 기색이 없던 까닭이리라. 한참 붓다보면 자신이 붓는 지도 모르는 것처럼.


    하지만 요조도 목소리는 낸다. 희극명사니 비극명사니 반의어니 이야기를 하다 죄와 법, 선과 악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 관계를 논한다.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113쪽)이라는 것이다.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그리고 최초로 노기가 분출되었다. 당연 취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치를 챌 수 있다.


    요조, 이 남자는 세상을 ‘죄’라는 단어로 본다. 자신의 죄가 있으므로 당당할 수 없다는 의식. 그런데 그가 언제부터 죄를 지니고 있었는가? 쓰네코가 죽고 자신만 살았을 때 팔목을 옥죄고 있던 수갑의 차가운 느낌에 대한 기억 이후로? 인간을 철저하게 속여 왔다는 그 익살의 경험 때문에? 종종 하느님을 소환하는 걸 보니, 혹 자신의 그런 기벽이 원죄와 닿아 있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아닐까? 모른다. 죄가 그를 가두고 있는, 감시하고 있는 뭔가라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요시코와 한 남자(만화 관련으로 집을 찾던 30세 전후의 상인)가 방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걸 보고도 자신은 ‘텍스트 속 남편’들과는 달리 요시코를 용서하고 자시고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 자신의 눈치를 계속 살필 수밖에 없는, 무구한 신뢰심을 지닌 요시코가 불쌍하기만 하다. 그래서 수면제를 털어 넣고 자살 기도를 했을 것이다. 3일 내내 잠만 자는 미수에 그쳤고, 그때 내뱉은 횡설수설이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가긴 했지만.


    여자 없는 곳에 가서 살 거라고? 이자가 드디어 돌았군. 아주 못 쓰게 되었어.




*   *   *





    큰 눈 내리던 날 밤, 도쿄의 어딘가에서 요조는 각혈을 한다.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지?”(123쪽)이라며 우는 그에게서, 빠져 나가고 싶은 욕망이 보인다. 하지만 항의할 수 없다. 이 세상 나의 모든 불행은 나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방자한 놈인가, 아니면 마음 약한 놈인가. 그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질문을 할 뿐, 여전히 세상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몸을 망치고, 그렇게 산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연민해준 여자는 약국 부인이었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못 쓰는 그녀는 남편이 술로 죽었고 의대생 아들도 같은 병으로 입원해 있다며 (시아버지도 중풍인데 아마 술 때문이었을까?) 요조에게 술 대신 차라리 모르핀을 주사하라 권한다. 차라리 그게 낫다며. 그렇게 요조는 모르핀 중독에 걸리고, “키스해줄게.”라든지 우는 척을 한다든지 해서 엄청난 빚을 지면서까지 얻어다 쓴다. 그리고 부인과 관계까지 맺는다. 모든 건 뒤늦은 후회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도 답장이 없자, 죽자고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의 자살 시도는 애초부터 미수에 그치고 만다. 넙치의 “악마의 육감”(129쪽)이 발동했는지 호리키와 함께 둘이 찾아와서는 묻는다. 각혈했냐고. 호리키의 다정한 미소. 소름이 돋는다. 인간. 아, 인간. 둘은 요조를 정신병원에 보낸다. 드디어 돌아버린 그가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131쪽)이다.


    정신병원. 죄인이 아닌 미치광이가 된 것으로 그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누구에게? 병동에 들어간 이후로 이어지는 짧은 문장들에는 회한이라든가 억울함이라든가 하는 분위기는 없다. 인간실격.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은 수기이니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후에 적은 것이니까. 큰형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려주고는 시골에서 요양할 것을 권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고뇌의 항아리가 비었다. 그러므로 고뇌할 능력도 없어졌다. 요조의 삶을 어렸을 때부터 완전히 꼬아버린 그 ‘능력’이 정신병원에 들어오자 사라졌다.


    지명 없는 곳의 허름한 시골집에서 60세 전후된 못 생긴 식모 테쓰와 살면서 그는 행복도 불행도 느끼지 못한다. 나이는 27세. 겉모습은 40이 넘은 듯. 수기의 말미에 이를수록 모든 건 다 지나가더라는 늙은이의 고백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맥이 없다.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다.



*   *   *



    얼마간 나는 요조에게 깜빡 속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후기는 서문에서 언급된 석 장의 사진과 세 권의 공책(요조의 수기)을 입수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나’의 이야기다. 짧다. 이 이야기는 요조를 일컬어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쪽)라고 술회하는 마담의 증언으로 끝난다. 첫 사진 속 섬뜩한 아이, 두 번째 사진 속의 ‘미남이나 사람 같지 않은’, 그리하여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10~11쪽) 있는 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길하며 특징이 없고 기묘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남자. ‘나’가 보기에 그런 요조는 수기 속에서 의외로 사람들에게 연민을 받거나 동정을 얻는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술집 손님들도 그에게 술을 사줬으니까. ‘나’는 수기를 있는 그대로 잡지에 실을 거라면서도 이 수기에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고 살짝 언급하는데, 이 부분을 거듭 읽다가 걸려 넘어진 것이다. 이 수기에 담긴 내용은 과연 사실일까? 이 글도 익살일까? 익살이야말로 과장이니까.


    하지만 다시 읽을까 생각하던 차에 책을 덮었다. 인심 써서 반쯤 속아준다고 하자. 그래도 진실과 허구가 그렇게 정교하게 나뉘진 않겠지만, 요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으니. 소설이 허구고 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소설이 90년까지는 다자이의 유서로 여겨졌다는 이야기와도 역시 아무런 상관없다. 속이는 것과 죄와 비위와 고립과 연민과, 그런 것들이 ‘요조’라는 하나의 쇠꼬챙이에 한 줄로 꽂혀서는 벽에 가서 콱 박히는 모습이 보인 까닭이다.


    다자이는 5월 12일 이 소설을 탈고하고 한 달 후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자살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성공적이었다. 사체는 일주일 뒤인 19일, 그의 생일에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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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1-29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실격> 영화평은 별론데, 저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손에 꼽을 명장면이 많죠. 말은 이렇게 하고 보고 안 보고는 탕기님 선택~
이미지도 비슷하고(그 유명한 사진 포즈도 흡사!) 산 시기도 비슷했던 김수영과 다자이 오사무를 어설프게 추적하다가 김수영이 일본 유학 중에 동경에서 그들은 모르는 채 스쳐갔을 수도 있겠구나 했죠.
이상의 수기식 소설, 산문도 다자이 오사무와 비슷하단 생각을 많이 했고요.
일본어와 일본식 교육의 영향도 있었을까요.
무엇보다도 사람은 정말 개인이 아니라 시대를 산다고. 히트텍과 무상급식은 지금 사는 사람의 어떤 기억이 되겠죠. 따뜻한 날들 보내시길 바라며....

탕기 2016-01-29 12:47   좋아요 0 | URL
언제 한 번 봐야겠군요!
다자이의 얼굴을 계속 요조에게 덧씌우며 읽어서,굳이 영화를 봐야겠느냐는 고집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화는 또 다르니까요. 추천 고맙습니다 ^^
밖에 나가기 꺼려지는 하늘이지만 agalma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2016-02-02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2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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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5일



    지난 닷새의 밤은 다섯 페이퍼에 옮겨놓았다. 내 생각의 대부분은 그곳에 있다. 순간을 남기고 싶어 끊어 읽었다. 순간이라는 것이 실은 책을 덮고 이렇게 쓰는 사이 증발해버리고 만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서둘러 적었다. 홀려서 글을 쓴 건 참 오랜만이다. 그래서 지난 닷새의 글은 물기가 약간 있다. 


    하루 5~60여 페이지 정도였으니 짧긴 했지만 두세 번 읽고 생각하고 참조할 것들을 들춰보느라 반 권 정도를 읽은 듯 피로가 매일 몰려왔다. 그래도 구슬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음악은 좋은 벗이다.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모처럼 꿀맛이었다. 그렇게 월요일이 왔다. 폭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 한 주의 시작이다. 다행이도 날씨는 풀리고 있다.



[링크]

  첫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67631

  둘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0615

  셋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4409

  넷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6674

  다섯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8820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은 가벼운 책이다. 어디 들고 다니며 읽기에도 좋다. 하지만 내용이 무섭다. 수 년 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되고 그 파격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팔렸을지는 모르겠다. 항간에서 인문학의 ‘한계’라 쉽게 지적하곤 하는 일상과의 괴리, 실천 가능성, 이런 문제들에서 사사키의 책 역시 자유롭지 않다. 얼핏 보면 붕 떠 있는 말을 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널리 읽힐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저자 본인도 놀란 기색이다. 곳곳에 사사키에 대해 험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요컨대 [문학]하라는 것이다. 대문자 문학. 그것은 읽고 쓰는 것을 말하며, 혁명과 직결된다. 어떻게 [문학]이 혁명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혁명 그 자체인지는 대혁명(종교개혁)의 루터, 고아이자 문맹이었던 장사치 사도 무함마드와 『쿠란』, 성녀 테레지아와 같은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중세 해석자 혁명을 거치다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비난과 농담, 유머, 겸손 등 사사키 특유의 어조를 따라간다. 전문가, 지식인, 종말론자, 원리주의자, 그리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 그들이 하나 둘 이 책의 중심에서 퇴출되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쳐내고 나면 위대한 문인과 경전을 남긴 이들만이 남는다. ‘읽고 쓴’ 이들이다.


    고이 쥐고 있던 [읽기-씀]이라는 구슬을 다시 본다. 사사키의 모든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동감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단언이 많아 여과 없이 느껴지는 지적들은 시원한 곳을 긁어주기까지 했으니, 이 일본의 사상가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 간에 나도 얼마간은 쓰는 사람으로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솔직히 그럴 자신도 없고, 의도도 없다. 언젠가 한 문학 교수가 이런 말을 해 기억한다. 옛글 어딘가에 몇 번 바른 적 있는 대학시절 추억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보통독자’가 되라고 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도 의문이었지만, 여하튼 그의 저 단어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분명하게 전달됐다. 교수는 이어 말했다. 독자가 차라리 쉬워. 작가의 삶보다는 말이야. 나는 저 작가에 [  ] 대괄호를 치지 않는다. 모든 작가를 우러르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사사키가 [문학]이라고 하며 그걸 혁명에 가져다대는 걸 보고, 아니, 그런 글을 읽고 어떻게 내 삶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그는 이전의 『야전과 영원』에서 누차 독자의 자질을 상기시킨 적이 있다. 그런 뜻은 아니었을까? 혁명이라니. 또 한 번 말하게 된다. 그건 내게서 멀다.


    요컨대, 그런 책이다. 닷새를 지나왔다. 지금은 서너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서재에 꽂아뒀다. 치열했던 지난 다섯 글들도 이면지에 뽑아 어딘가에 뒀다. 그리고 내게는 무엇이 남았는가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적어오면서, 그것이 언젠가는 내게 남아 있는 무언가가 되어주길 바라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읽는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쓰는 사람이니. 그렇게 믿고 있다. 저 혁명이 작은 것이라도 좋을 것이다. 시선을 바꾸게 되는 것이어도 좋다. 아니, 그것이면 족하다.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건 책 고르는 일에 조금 더 신중해졌다는 것. 변화는 작게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벌어진 틈이 얼핏 보이는 듯도 하다. 들여다보기에는 무섭지만. 사사키는 그곳에 빛이 있다고 말했다.



*   *   *



    아직 끝내긴 이르다. 짧게 쓰지 못하는 게 버릇인 듯도 하다. 하지만 털어놓다보면 길어진다. 사사키의 책을 읽다 넘어가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두 단어로 추려지는 것 같아 모아봤다. 혹 이 책을 읽다가 사사키의 몇 가지 지적에서 위화감을 느낄 이들이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에 고민을 덧대어놓는다. 가볍게 생각할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읽고 쓰고 예술을 하는 이들은 늘 대면하는 문제이다.


    사사키는 이 말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하자. 종말. 예술 종말론은 20세기 초반의 기현상을 목격한 20세기 중반 즈음의 평론가들이 내놓은 것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던 무렵, 마티스와 피카소, 몬드리안은 충격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암기된 상식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에 앞서 세잔은 또 어떠한가. 인체를 대단히 정교하게 그리고, 풍경을 사진 수준까지 사실적으로 그리던 이들에게서 추상으로의 전환은 기계 발명 이후 급속도로 달라진 일상만큼이나 급박하게 이뤄졌다. 프랑스 미술의 고전적 성향이 파리에서 아직 드셀 무렵, 미국에서는 변기가 전시됐고 그건 아주 유명하다. 왜 일부 예술가들이 그 ‘변기’를 옹호하는 글을 언론에 투고했을까. 어디서부터 진행된 일일까. 이렇게 묻고 보면 참 복잡한 현상이다. 지금의 우리야 쉽게 생각하고 웃을 수 있다. 변기라니.


    이제 예술 앞에 ‘진짜[real]’라는 전통의 권위가 붙게 됐다. 정크아트가 나온 건 이보다 조금 뒤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진짜 예술’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편견, 혹은 권위의 벽이 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평론가들에게 이는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드는 문제였다.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도 문제였으리라. 그런 와중에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원제 : After The End of Art)』가 나왔다. 물론 나는 예술의 ‘진화’이니 하는 것은 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유기체에 빗대는 표현에는 다소 거부감이 있다. 예술가가 일정 부분 타문화의 선례들, 혹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는 과정을 맥락의 소개 없이 보면 혁명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뿐이다. 예술 그 자체는 유기체가 아니다. 그런 비유로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제대로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아니고.


    그러나 이건 처음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변기를 작품으로 내놓는 것은, 그리고 마그리트나 워홀처럼 명백히 그것인 걸 앞에 두고 “그것이 아님.”이라는 제목으로 관람자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이런 기현상의 충격에 평론가들은 너도나도 ‘종말’이란 단어를 썼었다. 그보다 앞선 시대에는 러시아의 말레비치가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사각형을 하나 그리더니 “더 이상 우리 화가들은 그릴 것이 없다. 여기가 회화의 종착점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를 ‘회화의 영도(zero degree)’라 기억한다.


    이건 어떤가? 예술의 종말. 사사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예술이 없어진다는 의미의 ‘종말’이 아니라, 기존의 예술을 일컫는 단어를 /예술/이라는 표기로 일부러 가시화해본다면, 바로 그 /예술/의 종말을 그 비평가들은 의미했던 것이다. 이제 경계는 없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가? 작품으로 승인되는 현상이 거의 무한해졌다. 권위는 남아 있겠지만. 영국 YBA 현상만 놓고 보더라도 열광하는 자들과 경멸하는 자들이 나뉘어 있는 것 자체가 예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자기가 먹다 남긴 사과를 유리 상자 안에 두고는 <실낙원>이라 하질 않나, 네온사인 하나 만들어놓고 작품이라 내걸지 않나.’ 이런 말 안에 두 개의 표정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사키는 별 관심도 주지 않겠지만)시장이 여기에 반응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미술시장의 거품, 작품=사치품의 전락 같은 현실적 문제는 논하지 않겠다. 버거운 일이고, 거기서 거기인 일이다. 나처럼 예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씁쓸한 기삿거리 정도일 뿐이고.


    새로운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종말을 과감히 잘라버리는 게 사사키의 작업이었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완전히 새로울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예기치도 않게 찾아올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생각은 혹여나 도래하게 될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한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 사고는 아닐까? 혹 그런 걸 두려워하는 방어적 사고는 아닐까? 여기에 획기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과학의 발견을 가져다놓으면,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지닌 함의가 어쩌면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나아간다. 지극히 단순하고 전체주의적이며 기만적이기까지 한 종말론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만의 생각일까. 모르겠다. 입에서 자꾸 맴돈다. ‘새로운 것은 없다’라, ‘새로운 것은 없다.’라, 그냥 내뱉고 말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남겨본다.



*   *   *



    루시디. 이 작가는 [문학-정치]의 첨예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상징이다. 여기서 가오싱젠을 한 번 더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한 영화평론을 읽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을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오지 않느냐는 글이다. 혹 그 평론을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딘가 크게 게재됐던 기억이 있는데, 어쨌든.) 어떤 이가 그 밑에 댓글로 “위대한 정치인이 없으니까.”라는 단발의 역정을 적어놔서 웃었다. 생각해봤다. 그보다는 문학과 정치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려는 어떤 습성이 우리에게 들어있는 까닭이 아닐까, 그래서 ‘만들어봤자’인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가오싱젠의 문학론을 읽었던 차다. 『야전과 영원』에서 벤슬라마의 인용으로 지적된 [문학]과 혁명의 관계는 사사키의 이번 책에서도 여지없이 나왔다. 사사키도 이 부분을 거듭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치와 혁명은 뗄 수가 없다. 그러니 [문학]과 정치는 적대적 관계에 있다. 그가 어느 편에 서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책 읽고 쓰는 글 말고 나름 창작이라 해서 붙들고 있는 글들이 몇 있다. 그건 대부분이 톨킨 때문에 적기 시작한 글로, 나는 지난 십 수 년 간 톨킨의 ‘문학론’에서 결코 멀어진 적이 없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태도가 그렇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 서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번역해서 옮겨본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경험에서 전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험에서 이야기의 싹이 돋아나는 과정이라는 건 정말 복잡합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그 과정을 정의하려는 것조차도 불명확하고 애매모호한 증거에서 추측하는 것일 뿐입니다.”(J.R.R. 톨킨, 『The Lord of The Rings』, Foreword, 11쪽)


    이건 톨킨의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그의 환상적인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단정해버린 평론가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분명 톨킨은 그런 연관성을 영국 작가 특유의 공손한 어휘들로 살짝 밀어내면서 문학의 ‘고립되어 있는 섬’을 옹호한다. 그 자신도 그렇게 수 십 년 간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부했고 말이다. 나 역시 현실에서, 그리고 내가 배운 것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건 기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그 영향 관계가 의미하는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뜻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쉽게 말해 “이건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닙니다.”라고 슬쩍 발을 뺀다는 것이다. 이건 소극적인 태도라기보다는 문학적인 태도라고 알고 있었다.


    톨킨보다 훨씬, 정말 훨씬 첨예한 무대에 서있었던 가오싱젠은 그런 말을 더 적극적으로 한다. 그가 중국에서 프랑스로 망명간 작가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중국문학의 현실은 전 세계 앞에 그 나체를 드러내야 했다. 중국 정부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는 충분히 알 만 하다. 그런 그가 대만에 가서 강연을 하다가 문학의 위치에 대해 역설한 부분이다. 참고로 가오싱젠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서양의 문학 풍토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시장마저 거부하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작가 스스로 자각해서 자신의 문학에 덧씌워진 정치적 라벨을 떼어낸다 해도, 곧바로 반대편의 정치적 조류 속으로 말려들기 십상입니다. 그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고유한 문학창작의 의미뿐이죠.”(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창작에 대하여(원제 : 創作論)』, 63쪽)


    혹시 글을 쓰는, 창작하는 이들 중에 ‘작가 고유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이가 있을까?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창작의 기본이 되는 자부심인데? 물론 글을 쓰는 사람, 그러니까 남보다 좀 더 진중하여 때때로 고리타분하다거나 재미없다거나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하는 사람은 글이라는 것이, 또한 말이라는 것이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타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걸 걷어내고 쓴다고 해도 분명 고유의 것이 아닌 게 들어오기 마련이며,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이 타자의 것이다. 하지만 수용하고 배출하는 이 문학의 생리 과정에는 고유의 코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착각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게 작가의 지문 같은 거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해야만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글로 내뱉을 수 있다. 따라서 글 쓰는 이는 영향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어느 영역에서는 결코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밀어낼 수도 있다. 자의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나’라는 창작 공간이 수호되며, 오랜 과정 끝에 작품이 나오게 된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걸 객관적 입장에서 이런저런 것과 연결된다고 말하겠지만, 반대로 작가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그것 역시 자의적인 판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양심적인 작가들은 자신에게서 이미 떠난 작품에 대한 왈가왈부에 고집스러운 태도를 지니지 않겠지만.


    사사키가 벤슬라마를 예로 든 것은 혁명적 가능성을 언급하기 위해서였다. 루시디가 망명을 떠나 아직도 서구-이슬람 구도의 ‘핫아이콘’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문학은 그런 가능성을 얼마든지 보여준다. 이 급진적인 저자가 이보다 4년 정도 나중에 낸 책인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에는 [문학]을 향한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책의 독자가, 그러니까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독자가 문학을 말 그대로 급진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급진적 문학이라, 아니, 문학의 급진적 수용이라…… 이 도발은, 모르겠다. 문제는 내가 아직도 혁명이라는 걸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말이 위안이 된다. 역설이다. 도발을 듣고 기뻐하다니, 내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하긴 책과 함께 글을 쓰며, 나는 어떻게 된 것 같다고 쭉 생각해왔다.



*   *   *



    『이 치열한 무력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으니 말인데, 사사키의 대담자인 ‘가가미’라는 사람의 대답이 있어 옮겨본다. 사사키보다는 연장자이지만 사실 누군지는 모르겠다. 사사키가 “누가 읽을까요?”라며 물었다. 가가미가 말했다.


    “아마 매우 일반적인 사람들일 거야. 지금은 사유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잖아? 사유라는 것이 심심풀이도 시간 낭비도 아닌, 그 자체가 실은 생산적이라는 얘기니까 말이야. 그런 사람들한테 와 닿는 게 있어.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건전하다고 생각해. 이런 종류의 책이 팔리는 건 나쁜 현상이 아니거든.”(사사키 지음, 안천 옮김,『이 치열한 무력을』, 51쪽)


    그 후 둘의 이야기는 실천과 이론을 양분해서 생각하게 하는 행태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책을 읽은 순간부터 혁명의 점화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대한 지각을 열어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결말에 이르게 된다. 뭔가를 자르는, 그리고 치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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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에게 뭘 바라는가.
    from 공 음 미 문 2016-01-25 21:32 
    십중팔구 너희들은 고급독자가 될 뿐일거다 일갈하던 어느 교수님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걸 비웃던 누군가는 작가가 되고, 겁을 먹었던 누군가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그랬지만 그건 예언은 아니었죠.문학에게 혁명이란 사명을 덧씌우는 건 참 재미난 극단이 있어요. 만병통치약이거나 혹은 마지막 수송선이거나 라는 거죠.그런데 말입니다. 또 재미난 지점은 글쓰기가 이 사회와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요구들이 치고 들어온다는 거죠. 왜 현실과 동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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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2016년 1월 19일



    작년 내게 최고의 영화는 <시카리오(원제 : Sicario)>였다. ‘최고’는 연출기법과 배우의 연기와, 그런 것들이 준 의미가 아니었다. 통제하고자 하는 측이 허용한 어마어마한 폭력과 그를 둘러싼 비리, 상부의 결정, ‘늑대들의 땅’에 비유된 현실의 얽히고설킨 배경 역시 오랜 뒷맛으로 남지 못했다. 오히려 감독이 의도한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총격이 오가는 시내의 소음을 뒤로 하고 아이들은 다시 축구 경기를 시작하며, 이를 학부모들은 무심히 지켜본다. 폭력은 자신에게만 찾아오지 않으면 된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총알은 유령이 되어 도시를 날아다닌다. 우리의 불감증을 조작하는, 이미 인간 안에 심어져 있는 화약통에 불을 붙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든 저항해봐야 한다.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 기대로 이 책을 읽었다.


    지그문트 바우만과는 2년 여 만에 다시 만났다. 유동과 액체는 그의 상징이다. 이 단어를 둘러싼 멀미날 것 같은 일상의 ‘뭉글뭉글함’만 기억한다면 어느 독자든 그를 쉽게 소환할 수 있다. 그런 일상을 못 느낀다면 얘기는 다르고. 아, 한 가지 기억해낸 것이 있다. 그의 긴 문장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적응을 하지 못했다면 『모두스 비벤디』는 물론이고, 이제부터 말할 책 『도덕적 불감증(원제 : Moral Blindness)』은 덤비지 못할 복잡한 미로일 것이다. 중문들로 뒤덮인 원문을 고생하며 상대하는 역자의 모습이 얼핏 그려지기도 한다. 여기에다 노학자를 상대하는 혈기왕성한 레오니다스 돈스키스의 담화마저 중문을 쏟아낸다.


    감안해야 할 점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적응이 문제가 되는 책이긴 하다. 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그 가치를 허투루 말하는 건 잘못이다. 결국 ‘그 이야기’를 하는 인문학과 사회비판에 싫증을 내는 이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럽겠지만 이렇게 말해야겠는데, 이 책 역시 그런 결말을 내린다. 하지만 중간의 담화를 뛰어넘는(무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시카리오>의 불감증이 시각적인 것이라면, 방금 언급한 우는 도덕적 불감증에 사로잡혀 거울을 보지 않는, 내적인 불화, 혹은 소비주의적 환멸에 지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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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악마는 없다. 특히 <콘스탄틴>, <애나벨>, <인시디어스>처럼 수도 없이 소비된 악마, 종교적 이름의 세속적 악마들은 없다. 강력한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일부의 경험으로 제한되는 ‘악의 체험’은 이 시대에 부단히 가공되고 있다. 재미있긴 하다. 대체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이런 중세적인 악마는 최첨단 과학의 도움을 받아 밝혀지는 구조를 가져야만 하고, 그래서 재밌다.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는 건, 그런 ‘보이는 악마’는 허구임이 밝혀졌고 그 대신 ‘민영화된 악마’, ‘허약한 악마’가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로 밝혀진 까닭이다.


    아이히만에서 조우한 돈스키스와 바우만이 역사(기억)의 조작과 탈도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중간을 건너뛰고 보면 다소 비약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둘은 분명한 관련이 있다. 아이히만.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일 악마와 같은 사람이 원래 아니었다. 그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도덕적 광기가 불어 닥칠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환기시킨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두 학자는 묻는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제시되는 게 바로 ‘기억 조작’이다. 우리가 온전치 못한 기억을 추억하며 사는 건 당연하다. 망각은 축복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런 차원의 기억이 아니라, 역사와 정체성에 관한 기억이 조작되어 바우만이 우려한 것처럼 논리와 우선순위가 떨어져 나간 ‘그릇’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그릇이란 무엇인가? 바로 정체성의 오락화. 호모폴리티쿠스의 ‘호모루덴스’화다. 이 표현은 무섭다. “악마가 사는 복마전의 현관에 도달”(61쪽)했다는 바우만의 진단. 그 조작의 사례로 그는 팔레스타인을 상대하는 이스라엘의 폭력을 든다. 잊지 말자. 그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인 그가 “먼저 공격하는 자가 정상에 선다는, 그리고 그런 자가 계속 정상에 있으면 처벌받지 않는다는”(66쪽) 것마저 배워버린 이스라엘의 통치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을 비판한다. 홀로코스트에서 ‘복수’를 배운 그들을.


    이렇게 연쇄 작용이 일어난다. 누구에겐가 들었다. 정치는 누가 먼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가의 문제라고. 어차피 자신도 꼬리를 물릴 것이고 그렇게 물고 물린 둘은 빙글빙글 돌며 역사의 춤을 출 것이다. 여기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유치한 논쟁은 춤사위를 북돋는 훌륭한 장단이 된다. 돈스키스는 그 관계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무대에서 우리가 보는 건 지속적인 자극이다. 정치적 추문이다. Yellow한 문구들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 감각의 후퇴다. 추문을 생산하는 건 스타를 만드는 것과 같다. 둘은 베를루스코니를 말했지만 우리는 트럼프를 보고 있지 않은가. 정치적 스타와 영웅이 TV에 나와 상대를 언어로 가격하고 선동하면, 그럴수록 우린 ‘탈도덕화’된다. 그들이 겨냥하는 상대는 창조된 허구인 타자들이고, 남는 건 그 타자들이 교묘하게 타격을 받는 가학적인 말이다. 토론, 그런 건 없다. 우린 그런 장면을 싫어한다. 너무 박박 긁어 생채기가 생긴다. 그리고 학자들의 지혜로운 말을 그 위에 바른다.


    우리가 탈도덕화되는 또 다른 이유는 속도사회다. 이 용어는 이제 별로 낯설지 않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시대다. 그러니 도덕적 판단에 따른 오명을 두려워해 자신에게서 그 짐을 덜어버린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슬쩍 벗어나려고 한다. 대신 오명의 고통이 없는 어딘가가 가상으로 마련된다. 탈도덕의 공간. 이건 우리의 양심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정보가 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쓰나미 현상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득불평등 현상이 우리에게 탈도덕화의 유혹을 쏟아 붓는다.


    빠르다. 기억이 사라져버린다. 조작되기 쉽다. 돈스키스는 대학을 바로 그런 시대에야말로 유지해야 할 공간으로 본다. 근대적 감수성을 수호할 장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조국 리투아니아도 우리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 문제는 제 1장과 제 4장에서 수시로 교차된다. 한편 속도사회에서 바우만은 언어를 보호하려고 시도한다. “황급한 삶과 순간의 폭정의 첫 번째 피해자는 언어”(85쪽)라고 확실히 말한다. 한 번에 140개 이상의 문자는 허용하지 않는 특정 공간에 한해서만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다.


    나 역시 바우만의 궤에 포개놓을 의견이 많다. 영화 100자평, 책 100자평, 나는 이런 짧은 문장들로 오가는 ‘인스턴트적’인 담론 현상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짧고 간결해서 시크한 멋까지 풍기는, 흡사 아포리즘을 추종하는 낭만적 문화와도 겹친다 할 수 있는 이런 현상 속에서,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것의 전문가 행세는 두 학자가 말한 기억조작의 위험에서 단 하나도 자유롭지 않다. 이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홀로 떨어져 있으며 정치적인 연루와 극소량의 자유를 유지하는 ‘유랑하는 학자’, 아니 ‘애호가(딜레탕트)’들을 옹호하는 바우만의 다소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발언과 닿는다. 사견이나 나는 이 대목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가 떠올랐다. 물론 어느 정도의 비관은 불가피하다고 봐야 할까. 바우만은 이런 표현을 몇 군데에서 썼다. “강의 다리 밑으로 많은 물이 흘렀다.”(125쪽) 무색하다는 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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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 대한 맹비난은 돈스키스 쪽에서, 그리고 저항에 대한 비판은 바우만 쪽에서 나온다. 두 논조가 제 2장의 씨줄과 날줄이다. 기술이 정치를 앞질렀다는 돈스키스의 말에 동의한다. 바우만처럼. 이 말은 기술에 의존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고, 굳이 트위터로 온갖 공방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나 여기 있어.” 발언들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여기에다 소비되는 정치까지 붙여놓으면 우리 시대는 두 학자의 말마따나 진정 소비와 온라인의 시대다. 그래도 희망은 찾아봐야 하니 (소비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으므로) 바우만은 인터넷 공간의 혁명성, 우리가 아랍의 봄 사태로 새삼 주목했었던 푸르른 희망의 이름을 들여다본다. 아쉽지만 그는 줄곧 비관적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바우만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대상이 비단 인터넷에 한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저항을, 점거를, 타파를 겨냥한다.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실제 달성된 바가 있다. 20세기의 유명했던 독재자들 중 상징적으로 축출된 이들. 사살된 자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시리아는 참극의 미완이다. 여하튼 이렇게 ‘독재자 없는 정권’을 향한 점거가 성공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건설에 대해서 점거와 저항과 타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붙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정말 무섭고도 완벽에 가까운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리 많은 반대도 대체로 흡수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속도사회에 산다. 빨리 잊힌다. 감정이 먼저 소멸한다. 콘래드의 ‘바다’와 카네티의 ‘바다’, 그 군중의 매력과 힘이 사람들을 똘똘 뭉친다고 하더라도 다음 장면은 영화 <미스트>와도 같다. 안개가 걷혀야 보이는 바로 옆이 군중들에게 현전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정권은 바로 그 점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저항하고 상대해야 하는 정치적 현상과 특정 정치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념과 사상에 따라 다르긴 할 것이지만, 정치는 늘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의 저 “비생산적인 충돌”(163쪽)에, 좌우 진영의 화해 불가능한 싸움에 우리가 브레이크를 걸 순 없는가? 돈스키스가 묻는다. 과연 누가 우릴 대변해주는가? 권력 대행자의 미래는 무엇인가? 하지만 자답으로 돌아가면서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언급할 뿐, 즉 대의제의 의미를 확고히 하라고 조언할 뿐 딱히 내려지는 답은 없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잠깐의 머뭇거림을 본 것 같다. 민주주의는 무섭다. 소비주의와 결합되어 이제 누가 나를 대변하는지 물을 수 없는, 그래서 투표권 거부의 충동마저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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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챕터 제목별로 딱 분간되는 책이 아니다. 공포, 정치, 감수성 등의 이름이 여기저기 매듭지어 있다. 정확히 나뉘어져 있으리라 기대해서도 안 되는 책이긴 하다. 나이 지긋한 바우만과 열혈학자 돈스키스가 논하는 건 그 모든 것. 둥실둥실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유동하는 세계니까. 그러나 그 유동성에는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과 그 둘로 인한 굴욕감의 쓰라림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그게 비단 우리만의 문제인가? 우리가 대표라고 뽑아놓은 정치인들은 문제해결법도 모르며(무지), 그걸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고(무기력), 그로 인해 우리에게 실망감(굴욕)을 안겨준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그 무한이동의 자유, 이리저리 흔들림의 자유를 포기한다. 공포를 무시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기대하던 정치는 상업과 손을 잡고 그 공포를 밭에다 뿌려버린다. 우린 열매를 소비하며 풍작을 말한다. 이상한 풍작이다. 먹을 것은 참 많은데 소통이 위축되어 자기 자신을 지갑 속에 넣고 꺼내지 않는다. 이러니 상실된 균형이라는 과제를 누가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문제는 더 있다. 국가는 씨를 뿌려놓고 시장에게 맡기며 알아서 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붙어버린 공포의 그림자는 우리가 알아서 씻어내야 한다. 바우만의 말을 빌려놓는다. “사회적 지위의 심각한 허약성은 오늘날 사적인 문제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원을 이용해 처리하고 극복할 문제로 재정의 되고 있다.”(189쪽)


    한편 국가가 이러한 방기 탓에 스스로 폐점하게 된다는 건 별로 놀라운 귀결도 아니다. 우린 국가의 무능을 묻는다. 그렇게나 기업과 시장에 목을 매면서도, 그 사이에 정작 ‘우리’에게는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기업인의 사면과 낙수 현상을 가증스레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상황을 호전시킬 수가 없다. 나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하루를 집에서 쉬는, 그냥 직장에서 일하는, 거리를 산책하는 이들에게 무책임을 되물을 정도로 정당과 부당의 확단을 내릴 수 없다. 이런 유보 상태가 겨냥하는 대상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다시 돈스키스는 기억의 조작과 상실을 불러온다. 페이스북 현상을 말하면서 말이다. 참여 욕구가 늘어 그만큼 언어는 남발되고, 바우만의 우려처럼 언어는 피를 보면서까지 “설득력 있는 피해자”(217쪽)를 양산한다. 그런 말이 시청률의 우위를 점하며 ‘좋아요♡’를 얻는다. 여기에 들지 못하면 그건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남발되는 언어는 신중하게 배치되고 마름질된 언어만큼이나 왜곡된다. ‘좀비의 언어’라고 하면 될까. 자기가 살아 있는, 피가 도는 말이라 주장하는 창백한 얼굴의. 바우만은 인터넷의 혁명 가능성을 논하면서 현장의 한계까지 나아갔고, 이 지점에서 돈스키스는 순식간에 생겼다가 해체되는 시뮬라시옹의 공간, 그 깨져버린, 점묘적인, 어지러운 공간의 폐해마저 비판한다. 왜곡되는 기억과 상실되는 감정을. 그리하여 그토록 열광하며 반긴 아랍의 봄 앞에서 서양은 왜 그렇게나 무감각했는지를 비판할 수 있다. 어디에 우리의 실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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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가는 대학을 논하는 제 4장은 동떨어진 듯 시작하지만 실은 소비주의 사회, 그리고 매체만능주의 사회와 닿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돈스키스는 영국의 예로 대처 이후 변화된, 죽어가는 대학을 말한다. 바우만은 그걸 ‘대처 시대 이후’로 정정하고자 한다. 긍정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민영화로 국회 쓰레기 대란까지 겪은 대처는 그에 관해서는 거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오늘날을 하나 예로 들어도 된다. 2008년 금융 위기 때에 영국 대학들이 입은 타격은 엄청났고, 현지에서는 합병 이야기가 오가면서 대학이 더 기능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무시무시한 수준의 압박을 받았다. 이는 두 학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은 우리가 그 사태의 피해자인 것처럼만 생각하는 기만적 자세를 비판하며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건 우리가 초래한 사태였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이 소비의 예외 대상인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야만 한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다니는 건 위선이 아닌가? 우리가 화약통을 끌어다놓고 시기적절한 때에 터졌다고 봐야 옳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국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사회 나가기 직전인 지금 이런 말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거 해서 뭐 먹고 살 거냐고. 동기들 중에는 경영 전공으로 활로를 찾은 이들이 많다. 그들은 포기해야 할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어도 大學의 의미를 갈구해본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맹목적으로 그 추세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건 큰 무지에서 비롯된다. 아직 대학은 대학이 해야 할 일을 두고 아예 손을 놓아버리진 않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인 건 맞지만. 그래서 수호해야 할 의미의 기치를 내건 동문, 교수진, 학우들의 저항이 있었고, 필자 동생의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특수한 기관에서는 기능주의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다. 돈스키스를 보면 그게 리투아니아에서도 분명한 문제로 제시되는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든 생각 중 하나는 저 두 학자가 한국 사회를 분석하면 동구의 문제이니 리투아니아의 문제이니 하는 지역적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세계적인 문제 중 하나로 확장해서 해석하진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런 진단을 내릴 것이다. 개그맨 유세윤 씨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선택을 머뭇거리는 패널에게 던진 말처럼 여기는 ‘최강’ 자유주의 국가. 진중권, 홍세화, 강준만, 박노자, 그리고 최근으로 보면 다니엘 튜더와 같은 비판적 필진들은 『도덕적 불감증』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고,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적 세태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초보적 생각도 바우만의 말처럼 환멸과 냉담에 젖은 채 사회에 들어갈 유동적 한 세대, 젊은 세대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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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원제 :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을 둘러싼 두 학자의 담화에 앞서 생각난 건 브렉시트(Brexit)였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영국민의 53% 정도가 탈퇴 입장을 표명했다는 한 여론조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럽에서 가속화되는 문제다.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하든, 아니면 한 국가에서 한 민족이 영토를 가진 주권국가로 분리·독립을 선언하려고 하든, 유럽은 분명 통합의 기치를 내걸며 지난 반세기의 얼룩을 함께 치유하고자 했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동향 속에 있다. 우린 경제가 어려우면 나라는 쪼개지고 극우인종주의가 득세한다는 걸 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즉 바우만이 말한 ‘포스트-베스트팔렌 시대’의 민족국가 유령이 계속 떠도는 상황은 국가의 무능과 소멸이 이야기되는 추세에 있다. 종말과 멸망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측의 논지도, 즉 형태론에 반하는 논지도 분명 이해가 되지만 저 두 단어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슈펭글러가 다시 언급된 것이다. 돈스키스가 지금 상황에다 포개어놓은 서구의 몰락은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 ‘문명 유기체론’ 정도로 요약될 슈펭글러의 저 단어는 WWⅠ 이후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문화는 서로 교착이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인종주의와 맞닿는 단어라는 거다. 그 상황이 지금 유럽에 도래했다는 것이 바로 돈스키스의 논점이다. 왜 그가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들을 이 책에서 내내 언급하며 그 망조(亡兆)의 분위기를 구태의연하게 반복적으로 상기시킨 것인지는 사실 ‘서구의 몰락’에 와서야 온전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그가 “반자유주의적인 새벽”(304쪽)이라 부른, 하지만 이미 한 번 겪었던 참상의 새벽이 다시 왔다. 유럽은 지금 극우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서서히 나온 것이 아니라, 때를 그들이 마침내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우만은?


    다행이도 이 노학자는 희망을 보자고 한다. 디스토피아의 제기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유토피아를 찾는 게 아니다. 그건 허황됨이고, 가식이며, 무엇보다도 기만이다! 바우만처럼 비관을 유지하되 역사의 사례에서 얻어낸 긍정적 교훈의 사례를 다시 한 번 우리가 실현할 수 있다는 positive의 분위기가, 그 마력에 휩싸인 상태가 필요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가 말하는 건 “민족·종교적으로 다양한 집단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비슷하게 혼합된 환경”(333쪽)의 구축이다. 민족국가의 연합은 군사의 힘으로도, 경제의 힘으로도 달성된 바가 없다. 경제에 매달리면서 유럽연합이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다. 유럽이 수많은 민족의 장으로 그 역사를 반복해오며 배운 중요한 교훈은 바로 타자와의 공존법이다. 바우만은 그것이 유럽의 유산이라 말한다. 서구의 몰락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비관의 뉘앙스를 풍기던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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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인 입장에서 명확히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원리주의 탓이라, 나는 생각한다. 대학에서 종교비교를 배우며 여러 분쟁들을 조사한 적이 있다. 장문의 과제는 체첸의 것을 고민해서 썼는데, 결국에는 평화로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지만 현실의 원리주의 문제는 일부 맹목적인 사람들에게 워낙 유착된 것이라 그걸 제거한 상태를 상상해보는 것조차 어렵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원리주의는 선택하는 것일까? 선택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라 감히 말한다. 돈스키스는 어니스트 겔너의 용어 ‘모듈형 인간’을, 쉽게 말해 레고처럼 이것저것 갖다가 낄 수 있는 부품형 인간을 제시한다. 선택적 인간, 상호 교체의 가능성, 유혹과 쾌락과, 신뢰의 조작과, 무엇보다도 배반을. 그가 “작은 돈 후안들”(371쪽)이라 부른 유형의 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되지 말라는 충고가 이어진다.


    우리가 이상적인 무언가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품을 가져다가 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원리주의란 없다. 성경에 대한 원리주의는 간결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일부 미국인들에게서 시작된, 독일의 비판적 성경 해석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하나의 선택이었다. 종교에 대한 원리주의는 서구-이슬람의 분명한 대립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제조되었으며, 그들의 서구화와 경제적 고립 사이의 연관성에 강박적으로 집중한, 일부 사람들이 선택한 관념이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야말로 무지와 무기력, 굴욕감이라는 ‘공포의 3요소’에서 뒤따른다.


    돈스키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모듈형 인간의 인간관계는 그른 것이며, 그것은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아는 태도와 타자의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에서 극복될 수 있다. 타인을 거치지 않는 ‘자기에의 앎’은 왜곡된다. 게다가 우린 첩보기관이 아니다. 사생활의 절멸과 소비주의로 촉발된 우리의 문제 해결은 돈스키스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축약해버린 삶에의 태도로 해결된다. 진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부는. 그들 중 대부분은 사회와 세계에 대한, 무엇보다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펼쳤을 것이므로 ‘작은 돈 후안’이라 부를 수는 없다. 나도 진부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이 책에서 두 학자가 서로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던 그 열렬함과 진지함으로. 하지만 그 비관에서 우린 이 책이 비판하는 세계로부터 거리를 둔다. 사랑? 진부해. 그러나 여기서 그치진 않으리라. 그 감수성이 한 번 움직이게 됐으니,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비관 속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우리에게 찾아올 또 한 번의 맥동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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