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8일 목요일




    신학논쟁과 이단 단죄의 역사를 들여다볼 계기는 많았다. 어트리뷰트를 알아야 하는 까닭에 미술사를 접하는 동안 나는 화형과 책형 등 온갖 고문으로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했고, 한 교수에게 영화 <아고라(Ágora)>를 추천받아 사상의 악행이 눈앞에서 한동안 아른거리기도 했다. 핏빛줄기가 우기의 계곡처럼 흘러내렸다. 그런 꿈을 꾼 적도 있다. 사막에서 벌거벗긴 채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끌려 다니다가 두 발목이 잘리고는 태양 아래 내던져버린 한 남자. 나는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군중의 하나였다.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단언한다. 사상은 위대하다. 수많은 칼을 지닌 한 신이 생각난다.


    보르헤스의 「신학자들(Los teólogos)」은 고발하는 자와 처형당하는 자의 이야기다. 논쟁의 주제는 신이다. 거의 확정적인 교리로 믿음을 강요당하는, 혹은 이미지로 광고되는 신앙에 흡수되는 이들은 그 시대를 상상하지 못한다. 차라리 그 역사 앞에 이지적 판단으로 일관하려는, 나와 같은 냉담자의 손에 더욱 쓸모 있는 도구가 쥐어졌다고 하겠다. 혼돈의 시대였다. 교부(敎父)가 성립됐다는 건, 그만큼 잘려나간 가지들이 많다는 뜻이다. 교부가 성립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것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어야 하는 시대였다. 그리하여 「신학자들」과 같은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성화와 기록이 남긴 사례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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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 제 12권이 흉노족의 침입에도 불타지 않고 후세에 전해진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가르침이 세상을 흔든다. 그는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을 설파했다. 대관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그런 말을 적었을까? 그는 교부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가 남긴 플라톤의 말에 사람들이 휘말린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교묘하게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려는 말이 아닌, 플라톤이 했다고 알려진 말만 빼서 읽어버린 것이다. 보르헤스는 그걸 압축해놓았다. 잠깐 풀어보자.


    황병하 씨가 ‘신의 도시’라고 번역한 책은 ‘신국(神國)’이라는 단어로 더욱 유명하다. De Civitate Dei. 총 스물두 권으로, 전자 10권은 지상의 나라에 대한 설파를, 후자 12권은 신의 나라[天國]에 대한 설파를 담고 있다. 바야흐로 고트가 로마를 함락했다. 그녀/그들에게 세상은 뒤집어진 채로 썩어가기 시작하는 듯 보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시대를 논증하고자 글을 썼다. 당시 만연했던 윤회 숭배도 그의 겨냥을 받았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사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누누이 플라톤을 위대한 철학자라고 평가하는 구절 속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번역해본다. 라틴어로 된 『De Civitate Dei』의 영어 번역본을 참고했다.


    “예컨대 ‘아카데미’라 불린 아테네의 학당에서 철학자 플라톤이 가르쳤듯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지만 분명한 간격이 있는데) 똑같은 플라톤과 학파, 그리고 똑같은 제자들이 존재하며, 그러므로 또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이 무수한 순환 동안 반복된다는 것처럼 주장한다. 말하건대, 나는 우리가 그러한 말을 믿게 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셨다. 죽음은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며[로마서 6장 9절], 우리는 부활 이후 영원토록 주님의 곁에 있으리니[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절],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분, 성스런 시편에 나와 있듯이, 오, 주님, 저희를 보호하사 저희를 이런 생각들로부터 지켜주소서. 그리하여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윤회의 길이 사악한 까닭은 그자들이 그 철학자들이 상상해낸 윤회를 방편 삼아 돌고 도는 생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가 돌고 도는 길이기 때문이다.”

[라틴 원전] sicut isto saeculo Plato philosophus in urbe Atheniensi et in ea schola, quae Academia dicta est, discipulos docuit, ita per innumerabilia retro saecula multum quidem prolixis interuallis, sed tamen.certis, et idem Plato et eadem ciuitas et eadem schola idemque discipuli repetiti et per innumerabilia deinde saecula repetendi sint. Absit, inquam, ut nos ista credamus. Semel enim Christus mortuus est pro peccatis nostris; surgens autem a mortuis iam non moritur, et mors ei ultra non dominabitur, et nos post resurrectionem semper cum Domino erimus, cui modo dicimus, quod sacer admonet psalmus: Tu, Domine, seruabis nos et custodies nos a generatione hac et in aeternum. Satis autem istis existimo conuenire quod sequitur: In circuitu impii ambulabunt; non quia per circulos, quos opinantur, eorum uita est recursura, sed quia modo talis est erroris eorum uia, id est falsa doctrina.


    보르헤스의 작품에 나오는 무변교도(환상교도)들은 여기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지만 분명한 간격이 있는데) 똑같은 플라톤과 학파, 그리고 똑같은 제자들이 존재하며, 그러므로 또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이 무수한 순환 동안 반복된다.”는 구절만을 차용하여 역사의 순환을 믿었다. 바퀴는 윤회의 상징이었고, 일부 과격한 이들은 뱀까지 숭배했다. 뱀은 당시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징이었다. 따라서 아낄레아의 보좌 주교인 소설 속 아우렐리아노는 이들의 논리에 공박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경쟁자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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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데 빠노니아. 이름부터 당시 있을 수 없는, 가공된 자다. 그는 아우렐리아노의 철저한 미움을 받는다. 즉 후안의 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우렐리아노는 그를 억지스런 강변이나 설파하는 정도의 인물로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그를 능가하고 싶다. 어쩌면 그에게 무변교도들의 득세는 자신의 우위를 증명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리라. 결국 아우렐리아노는 후안 데 빠노니아보다 앞서 이교를 공박하기로 한다. 그렇게 반박문을 적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은 무려 9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자와는 다르게 써야 한다. 놈은 뭐라고 말하더라? 그래, 그 녀석은 늘 자신이 예지자인 척 굴었지. 고결한 분위기. 민중들은 놈의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속아 넘어간 것이지. 미련한 것들. 내가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보좌 주교인 나의 몫이다. 그리하여 아우렐리아노는 삼단논법, 모독적 언사, 동음반복, (nego, autem, nequaquam 따위의) 부정어법, 이교도(그리스) 설화의 예시, 오리게네스와 키케로, 플타크(플루타르코스)의 인용 등으로 반박문을 채워나갔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는 만족했다. 하지만 10일 째 되는 날, 후안 데 빠노니아가 보낸 반박문 사본을 읽은 아우렐리아노는 조소 속에서 또 한 번의 열등감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글이었지만 훨씬 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굴욕감 속에서 그는 수정하지 않은 반박문을 공의회로 보냈고, 후안 데 빠노니아가 공박의 담당자로 임명되었으며, 이 공박으로 무변교 교주라 알려진 에우포르부스가 화형을 당했다. 이 화형식은 아우렐리아노의 철저한 패배와 다름없었다.


    이후 둘은 같은 입장에 서있는 전쟁을 계속했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안주의를 공격할 때도 그랬고,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주장하는 코스마스의 이론에 옹호할 때도 그랬다. 이윽고 아우렐리아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코스마스의 지형학 이론에서 불거진 이단으로, 보르헤스는 여러 이름들을 알려주나 당시에는 대체로 아우렐리아노가 붙인 ‘어릿광대교’로 불린 집단이었다. 이 집단의 득세가 기회였다. 이번에야말로 후안 데 빠노니아를 이길 반박문을 쓰겠다.


     어릿광대교는 금욕주의를 표방한 영지주의의 일파이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에 ‘영지주의’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오리게네스처럼 불구가 되는 (고환을 자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심지어 눈으로부터 느껴지는 온갖 욕정에서 해방되고자 눈을 뽑기도 했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Vreme čuda)』에도 ‘바르티마에우스’라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 그는 맹인이었으나 예수의 기적으로 눈을 얻은 자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얻고 나니 사랑을 잃는구나!”(보리슬라프 페키치, 이윤기 옮김,『기적의 시대』, 128쪽) 이런 금욕주의가 방종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둘은 양면의 관계인가. 살인, 남색, 근친상간, 수간 등을 일삼고 모든 신을 모독했으며, 이상한 경전을 획책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앞서 처단 당한 무변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성서의 구절들을 교묘하게 편집하기도 했으며, 보르헤스가 ‘프로테우스적인 사람들’이라고 한 그녀/그들은 악을 통한 정화를 추구했다. “악한 자가 되지 않는 것은 사탄적인 교만”(보르헤스의 책, 59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왜 이것이 가능한가?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실재는 천국에 있고 현실에 있는 것은 또 다른 ‘같은 사람’이라는 사상을, 즉 ‘이중적 존재’를 주장하는 사상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금욕주의, 다른 한쪽은 방종. 그야말로 혼란이다. “영지주의 집단들은 기독교 가르침의 일부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중략) 영지주의자들의 윤리적 태도는 매우 다양했는데, 한편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금욕주의적인다가도 다른 한편에서는 완전히 방종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폴 존슨, 김주한 옮김, 『기독교의 역사』,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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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폭로하기로 한 아우렐리아노는 또 한 번 열성적으로 고서들을 탐독하면서 인용할 만한 문구들을 골라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똑같은 것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는 문제에 이르러서 무슨 이교적 문장을 보태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말을 적어놓고는 훌륭한 논박이 세워져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그 인용된 문장이 다름 아닌 후안 데 빠노니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 아우렐리아노는 무수한 번민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문장을 빼면 자신의 표현은 쓸모가 없어진다. 표절 시비는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킬 것이 분명하다. 결국 아우렐리아노는 “금세기의 박학한 한 신사가 과실이라기보다는 경솔함으로 인해 이미 언급”(보르헤스의 책, 61쪽)된 것이라는 문구로 무마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범죄가 아닌가! 명백히 후안 데 빠노니아의 그 문장이 들어간 책 제목 자체가 『환상교의 불합리』, 즉 무변교의 교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였다. 아우렐리아노, 그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후안은 어릿광대교의 속임수에 넘어간 한 대장장이의 끔찍한 범죄로 분노에 빠진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의 명제를 철회할 수 없음을 끝까지 고집했다. 무엇이 재판의 ‘핀트’였는지를 그 박학했던 이조차 알지 못했다. 전말을 알았더라면 그는 무변교의 전염병적 이단에 빠지는 일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강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걸 몰랐기에 결국 죽었다. 죽을 때까지 지킨 무엇이 있었다. 그렇게 후안 데 빠노니아의 고집은 사흘이나 꺾일 줄 몰랐다. 그는 화형 당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아우렐리아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안 데 빠노니아의 얼굴을 본다. 하지만 “그는 그 얼굴이 다른 누군가의 얼굴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보르헤스의 책, 63쪽)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쾌유의 감정마저 들었다. 이후의 삶은 마치 자신의 죄를 덜어내려고 하듯 국경과 외지 따위를 전전하며 수행적 삶으로 일관했지만 그럼에도 후안 데 빠노니아를 고발했던 그 범죄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르헤스는 그가 루사디르에서 “시대 착오적”(64쪽) 설교를 했다고 썼는데, 그것이 바로 변론의 일환이었을까? 그러던 아우렐리아노도 불 속에서 죽었다. 히베르니아(아일랜드)의 한 오두막에서 번갯불에 탄 나무들 속에 갇혀 죽은 것이다. 후안 데 빠노니아의 화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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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는 은유로 소설을 닫을 수밖에 없었노라 고백한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는 화형 이후의 대화, 술회, 혹은 고해 등이 이 소설 뒤에 매달려 있는 까닭이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더군다나 ‘천국’이라는 곳에 대해서는 글로 아무리 써봤자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작가는 말한다. 아니, 후안 데 빠노니아와 아우렐리아노가 왜 같은 뜨거움 속에서 죽었는지, 왜 아우렐리아노가 화형 당하는 후안의 얼굴에서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인지, 그리고 여태 언급했던 무변교도의 윤회, 그리고 어릿광대교의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두 존재가 무슨 의미였는지 말한다.


    두 사람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가정하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정통교도와 이단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를 받는 자, 고발자와 희생자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다. 아우렐리아노는 죽은 후 그걸 깨달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에서 말한 그 부활 이후의 순간, 즉 ‘주님’의 곁에 앉게 되는 순간, 모든 벽은 허물어지고 수많은 논쟁은 무의미해지며, 화형이 남긴 잿가루의 쌉싸래한 맛만이 남게 된다는 것을. 보르헤스가 보기에 세상은 여러 종파들이 들끓던 4~5세기의 그곳과 별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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