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6일 화요일




    보르헤스의 감옥에 갇혀 나흘을 보내고, 나는 계시라도 받은 듯 재규어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시라니… 불똥이 손등에 튀기라도 한 것처럼, 기름 위로 옮겨 붙는 불의 속도로 수십 장을 써내려가다 마침표의 끝을 잡아 휴지통으로 밀어 넣었다. (아래의 바탕체 글은 그 휴지통에서 발견된 화석 문자의 파편들을 해독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무수한 글들 사이로 감옥의 재규어도 목숨을 다해 사라졌다. 보르헤스의「신의 글(원제 : La escritura del dios)」은 재규어가 갇혀 있던 감옥의 다른 쪽 편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늙은 남자, ‘치나깐’이라는 이름의 피라미드 마술사가 쏟아내는 근원적 비밀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나, 재규어는 감옥에 있다. 원주민들은 뻬드로 데 알바라도에게 제물을 바쳐 그의 노여움을 피할 생각으로 내게 떼거지로 덤벼들었다. 돌로 된 감옥은 깊다. 재단된 돌들로 보건대, 이건 분명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만 언제 파내려가고 쌓아 올린 것인지를 내가 알 길은 없다. 그건 2등분된 이 감옥 다른 쪽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늙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꼬르테스의 부하인 알바라도가 사원을 파괴하고 치나깐을 잡아 감옥에 가둔다. 이 사제(마술사)는 한 마리의 재규어와 함께 거대한 반구(半球) 안에 갇혀 늙어간다.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단순함과의 사투, 그것을 위해 치나깐은 수많은 것들을 기억해내다가 문득 신이 지었다고 알려진 “마술적인 문장 하나”(보르헤스, 황병하 옮김,『알렙』, 165쪽)에 집중한다. 그는 사제였으니. 그리하여 변하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는가를 떠올리다가 반대편 감옥에 있는 재규어를 바라본다. 재규어의 무늬를.


    왜 치나깐은 재규어를 신의 징표라고 생각한 것일까. 과연 재규어의 무늬가, 보기에도 현기증 나는 그 경이로운 무늬가 “변천과 패망을 겪고” “노쇠해”가는 개별적인 것들보다 영원한 것인가. 그럴 순 없다. 나는 재규어의 목소리를 빌려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재규어들은 반짝이는 물건이나 예리한 날 따위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사납게 사냥감을 덮치되, 예의 신성한 대지의 일자를 향한 흠숭은 변치 않는다. 나 또한 죽을 것이고, 이 비밀의 가죽은 다른 누군가의 동맥 속을 맹렬히 흐르는 숨결이 될 것을, 나는 안다. 인간만이 모르고 있다. 치나깐은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영원을 빙자한 재규어들의 교미와 출산과 그 무한한 생산의 그물망에 신이 메시지를 새겨 넣었다니… “재규어들의 살아 있는 껍질”에 신의 문장이 있다니… 치나깐은 감옥에서 몇 해를 살았는가. 알 수 없다. 보르헤스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사제는 신의 글에 사로잡혀 있다. 무엇이 그를 미궁으로 몰아넣었을까. 물론 감옥에 있는 처지가 문자 그대로 그를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는 사제였다. 신의 뜻을 좇는 이. “재규어라는 구체적인 수수께끼보다 신이 쓴 문장의 본질적인 수수께끼가 나로 하여금 더욱 안달이 나도록 만들었다.”(보르헤스, 167쪽) 그 문장이 명백하고도 즉각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치나깐의 믿음에는 조바심이 가득하다. 그렇다. 이 노인은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고, 곧 죽을 것이다. 머지않아 사라짐, 그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죽음일 것이다. 감옥의 비현실 속에서 무너지고, 그는 꿈을 꾼다.


    저 늙은이도 젊은 시절, 즉 생기가 돌고 피가 끓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먹잇감이었던 시절에는 밤마다 고함을 치며 울었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인내보다 훨씬 빨리 지쳐 쓰러졌고, 낮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낮과 밤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였다. 인간은 어둠 속에 있으면 가장 중요한 것부터 잃고, 종내에는 모든 걸 잃어버린다. 나는 저 불쌍한 동물이 허덕이며 지쳐가는 모습을 보고 아주 오래 전 저자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치나깐은 모래들에게 질식당하는, 모래들이 입을 무너뜨리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다. 그 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너는 깨어나기도 전에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모래의 숫자처럼 꿈 또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보르헤스의 글, 168쪽) 하지만 사제는 깬다. 치나깐은 현실에 감사한다. 처음 감옥에 들어왔을 때 저주와 분노를 퍼부었던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그것은 生에 대한 감사인가? 그럴 것이다. 죽음을 머금은 꿈에서 깨어남과 함께 다시 태어난, 치나깐의 새로운 삶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합일이었다. 역자 황병하 씨는 보르헤스가 불교의 입을 빌려 치나깐의 꿈과 깨달음을 소설에 재현해냈다고 풀어썼다. 동감한다. 헤세의『싯다르타』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깨달음은 시공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 동시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깨달음. 그 우주의 구성 방식을 알아 느끼게 되는 기쁨이 이후 몰려온다.


    그 순간 치나깐은 그토록 들여다봤던 재규어의 무늬 속 신의 글을 읽어낸다. 그것은 무작위로 된 40음절, 14개의 단어다. 전지전능의 길로 갈 수 있는 암호다. 여태 그것을 읽어낸 이는 치나깐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는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되었다. 석조 감옥을 무너뜨려 늘 어둠뿐이던 그에게 낮을 선사할 수 있는 힘, 무병장수와 불로장생의 힘, 재규어가 알바라도를 죽일 수 있는 힘, 피라미드와 제국의 재건을 가능케 하는 힘, 스페인으로부터 아스테카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 힘…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신의 글이 치나깐에게 허락한 힘이 될 수 있을까? “신들의 뒤에 있는 얼굴 없는 신”(보르헤스의 글, 170쪽)을 봤다는 치나깐이, 그리하여 합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치나깐이 깨달음 뒤에 쏟아내고 있는 건 온통 복수와 해방, 그리고 되돌림에 대한 것뿐이다. 그는 아직도 감옥의 궁륭 안에 있다. 깨달음이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실패의 꿈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실패한다. 치나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감옥 안에 갇혀, 아니, 인간의 육신 안에 갇혀 진리의 말을 내뱉지 못한다. “우주의 타오르는 구조들을 보았던 사람”(보르헤스의 글, 171쪽)이라고 해도 그 말을 읊는 순간 예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완전한 자가 된다.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진리의 사람. 그녀/그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무도 아닌 그런 존재”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치나깐은 말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의미는 미련을 낳는다. 미련이 결국 더욱 커져서 의미가 그 밑에 깔린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감옥’이라고 부른다면, 그 감옥에서 우리는 미련의 대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산다. 깨달음은 원형 천장의 뚜껑을 열고 나가는 일. 우리는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지만 정말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그저 사람이고 싶은 존재일 뿐인 것은 아닐까.


    치나깐은 궁륭에 갇혀 있다. 이 감옥, 실은 언어로 되어 있는 감옥이다. 말만 뱉으면 나갈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물리적으로 속박하지 않으나, 우리가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 감옥이다. 그걸 ‘신의 말’이라 부른다.


    “이 최초의 언어는 지상의 모든 소리들 위에 궁륭을 만들었고, 자연 전체의 모든 목소리들이 그 안에 함께 모였다. 지상에서 솟아오르는 모든 것이 하늘의 궁륭에 수용되듯이, 지상의 모든 음성들은 언어라는 그 한 하늘에 수용되었다. 모든 음성들이 그 언어의 하늘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일부가 되었고, 따라서 그 하늘 안에서는 어떠한 음성도 이해되었다.”(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시인 옮김,『침묵의 세계』, 63쪽)


    피카르트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지만, 이 말을 치나깐이 갇힌 감옥에 가져다대면 근사한 비극이 완성된다. 40음절 14개의 단어로 된 “억눌림과 광대함의 느낌”(보르헤스의 글, 163쪽)은 인간의 삶이며, 그 비극 안에서만 인간은 의미가 있다. 깨달음은 의미망을 벗어나는 일이다. 신의 글은 아무 의미도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고 싶다면 우리는 언젠가 치나깐과 같은 고민과 그 끝에서 만나는 기나긴 침묵을 끌어안게 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사자(死者)가 된다. 하늘은 높다. 어디까지고 언어가 그 안을 채운다. 치나깐이 내뱉지 않은 말은 어디에라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쉽게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은 차라리 비극 중 다행이다. 보르헤스는 그걸 알려준다. 신의 글을 아는 자는 끝내 침묵하느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