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3.01.19

 

 

 

  우리는 중고등학교 사회시간에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해 배운다. 지정학은 국가의 전략으로 활용되는 학문이다. 지정학에 따르면 한 나라의 위치는 단순한 지리가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군사학의 일환으로 봐도 무관한 것이, 지정학자들은 한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게 될 국가전략의 수립에 있어 그 나라가 과연 어느 위치에 포진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옛 칭기즈칸이 서진(西進)할 때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상비군을 배치시킨 것을 본 따 소련은 무려 10년(1979~1989) 동안 11만 명에 이르는 군사를 투입할 정도의 공을 들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었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역사는 반도 국가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꽤 친근한 스토리이다. 아마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를 통해 많은 이들이 두 나라의 역사를 읽었을 것이다.


  이 학문의 여파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계역사의 흐름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지리적 요충지라든가 소위 ‘노른자 땅’이라 불리는 곳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손길이 닿을 수밖에 없고, 그곳에서의 복잡한 역사가 변덕스럽게 흘러갔다는 막연한 이해도 기대할 수 있다. 지정학 못지않게 문화적 관점도 매력적이다. 유교 문화권과 불교 문화권, 그리스도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 그리고 정교 문화권 등 다양한 종교들의 분포로도 역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던 학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이다. 『총, 균, 쇠』는 우리나라 주요대학들의 필독 도서이고, 『문명의 붕괴』는 환경문제와 그 이외의 네 가지 원인들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리뷰에 앞서 그의 주장을 조금 거칠게나마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그에 따르면 문명은 우선 그들이 거주하는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로 붕괴했다. 적어도 환경파괴는 문명의 멸망에 관해서는 필수조건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장도 이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SF영화들의 단골 시나리오 중 하나도 어떤 외계행성의 문명이 환경파괴로 인해 터전을 잃게 되자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우주공간을 떠돌아다니며 다른 행성의 문명을 숙주처럼 이용한다는 내용이다. 다른 네 가지 원인은 기후변화, 적대적 이웃, 우호적 이웃과의 단절, 주민의 반응이다. 다이아몬드는 이러한 진단을 통해 미래의 비극을 예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와 로빈슨(James A. Robinson)이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원제 : Why Nations Fail)』는 세계역사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를 전복시킬 만한 주장을 담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것과도 다르다. 각각 경제와 정치를 연구하는 두 학자는 국가의 존망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는데, 그건 바로 ‘제도(institution)’이다.


  나는 얼마 전 안데스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본 적이 있다. 시리즈 중 하나는 당연히 잉카 문명을, 특히 잉카의 멸망을 소재로 구성되었다.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잉카의 멸망은 유럽 열강들의 남미 정복으로 이어졌고, 식민지화는 오늘날 남미의 현실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얼핏 보면 아따왈빠(Atahuallpa) 왕이 죽은 1533년 8월 29일과 지금 페루인들이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가난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관련이 ‘매우’ 있다.


  우리에게 희미하게만 느껴지는 관련성을 잘 짚어낸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오프닝 장면으로 가난한 페루의 아이들을 보여줬다. 페루의 한 마을에 기차가 정차했다. 그 위에는 유럽 관광객들이 올라타 있다. 아이들은 그 근방을 떠날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파란 눈의 외지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눈치이다. 관광객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던져줬고, 아이들은 기차가 막 달리기 시작한 후에도 미련을 따라 기차 꽁무니를 쫓았다. 아이들의 입과 호주머니에는 사탕이 들어 있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몇 가지의 개념들로 이뤄진 하나의 견고한 관점을 통해 세계의 거의 모든 역사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두 학자는 이 책의 1장과 3장에 자신들이 앞으로 설명할 관점의 대표적인 예를 실었는데, 학설 비교에 해당하는 2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은 사실 자세한 사례 열거에 해당한다.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으므로, 혹 관심은 있으나 시간이 부족한 바쁜 독자라면 적어도 1장과 3장은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의 주장은 이렇게 구성된다. 우선 두 학자는 정치제도가 경제제도를 결정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3장에도 나와 있는 예인데, 남북한의 빈부 차이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북한은 착취적 제도이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15~16세기 콩고 왕국의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가난’이라든지, 17세기 초반의 바베이도스와 같은 경우에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북한은 이걸 조장한다. 정치제도가 그렇기 때문에 경제 역시 착취적(extractive) 경제제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오늘날 포용적(inclusive) 경제제도를 갖고 있다. 다원주의와 중앙집권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옛 사회의 엘리트층들이 두려워했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일어났고,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자유경쟁을 독려하는 인센티브가 북한에 비해 훨씬 잘 갖춰졌다. 물론 박정희 정권을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도 착취적 경제제도에 있었다. 그러나 이 독재의 시대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렬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산업화와 빠른 민주화를 동시에 일정부분 달성할 수 있었다. 북한은 정치제도로 인해 애당초 이러한 발전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 상태이다.


  두 학자는 잉글랜드와 미국, 그리고 프랑스로 대변되는 포용적 제도의 선진국들이 왜 선진국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추적해간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1장에 언급된 남미와 북미의 식민지 진행과정이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북미에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 전략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없었다. 반면, 에스파냐는 오늘날의 남미를 지독한 가난에 빠뜨린 오래된 족쇄들, 예컨대 엔코미엔다, 미타, 레파르티미엔토 데 메르칸시아스, 트라진, 그리고 인두세 같은 살인적인 정책들을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었다. 남미에서는 독점화가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었고, 당연히 일할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러한 ‘닫힌사회’에서는 와트나 에디슨이 나올 수 없다.


  유럽의 역사가 갈림길에 섰던 여러 역사적 상황들이 있다. 그 중 로마의 멸망과 흑사병 창궐은 시대를 구분(고대/중세, 중세/근대)하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갈림길에서 국가나 집단들은 어떤 미래를 꿈꿀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들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역사에는 우발성 역시 있다. 예측하기 힘든 복잡한 상황 속에서 꾸준한 성장을 하는 국가들은 결과적으로 두 학자의 진단처럼 ‘열린사회’를 지향한 국가들이었다. 동유럽은 영주들의 사유지 규모가 서유럽보다 훨씬 컸고, 인센티브로 노동력을 예속시킬 만한 경제적 부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무려 18세기까지 농노제(serfdom)가 존재했었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흑사병 창궐 이후 농노들이 계약을 요구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더니, 1688년에는 세계최초로 포용적 정치제도를 보장하는 명예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독점은 철폐되고, 사유재산은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생겼으며, 산업과 인프라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영국과 다른 나라들의 결정적인 정치제도 상 차이는 강력한 의회의 유무였다. 에스파냐에도 ‘코르테스’가 있었으나, 그들은 왕의 권력 독점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왕을 견제하기에 충분했다. 의회는 왕을 견제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누구라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포용과 착취. 이 두꺼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제목에 두 학자는 “착취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진단과 관점이 별로 낯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과 2~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마저 착취적 제도로 성장하는 한 국가의 놀라운 신화를 목격했다. 바로 소련이다. 소련은 낙후된 공업에 소위 ‘올인’하기 위해 집산화(collectivization)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집산화를 통해 그들은 1928년부터 1960년까지 연간소득이 꾸준히 6%씩 증가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성장을 이룩한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소련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소련의 실패는 ‘제한적 성장’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실패한 나라들의 대부분은 한 때 영광을 누리던 나라들이었다. 로마와 베네치아가 그렇다. 이슬람 문화권의 위대한 제국들도 그러하고, 중국의 역대 왕조들 역시 그렇다. 아프리카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거대한 왕국들, 예컨대 콩고의 쿠바 왕국이나 악숨 왕국 같은 나라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화려했다.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독재와 노예제 때문이다. 설령 이런 형태의 나라가 지금 존속하는 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선진국 반열에 드는 경우는 없다. 발달을 가로막는 장벽은 엘리트층의 두려움이다. 오스만 제국은 반란을 두려워해서 인쇄를 금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백성들이 잘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철도건설을 막았다. 그곳에서는 산업혁명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린사회’를 지향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한 서유럽의 강대국들은 17~19세기에 걸친 식민지 경쟁을 위해 ‘닫힌사회’를 이용했다. 네덜란드는 1621년 동남아 반다 제도에 착취적 경제제도를 심으려는 목적으로 원주민 15,000명을 학살하는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향신료를 생산할 수 있는 적당한 노예들만 남겨놓고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동남아의 이웃 국가들은 일제히 특산품 생산을 중단했다. 네덜란드와 같은 열강들이 쳐들어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성장은 없었다.


  노예제를 따라한 것은 아프리카의 왕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윤리 관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저 왕들은 자국민들을 너무 많이 노예로 팔아버린 탓에 다른 왕국을 침략해 그 포로들로 노예 사업을 추진했다. 노예제는 노예들의 해방 영토인 라이베리아에서도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아파르트헤이트로 유명한 옛 남아공 정부는 의도적으로 원주민들만 모아놓은 자치지구를 낙후시켜 저임금 노동력을 빼 쓰는 방법으로 21세기 바로 직전까지 악행을 일삼았었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오늘날 선진국들이 역사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오랜 시간 투쟁해서 ‘열린사회’를 구축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열린사회’는 식민지 인력과 자원들의 막대한 희생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는 큰 편차를 보인다. 영국, 프랑스,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처럼 포용적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갖춘 선진국들은 선순환의 절차 속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간다. 한 번 개방된 사회가 폐쇄되는 역사적 사례들도 이 책에 소개된 것처럼 많으나, 유혈(流血)을 통해 얻은 가치를 이 나라의 후손들은 결코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착취적 정치제도와 경제제도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창조적 파괴’를 원하면서도 연합세력을 결성하기 힘들다는 이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투명한 미래전망으로 인한 무기력증 때문에 21세기의 한복판에서 고립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악순환이 된다. 암울한 것은, 영국의 경우에는 수 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한 까닭에 엘리트층의 완고함이 조금씩 풀렸지만 가난한 저들은 급진적 방법을 택해 사회 구성원 전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중동은 민주화 바람이 한창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집트의 경우처럼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우연인 것처럼도 보인다. 역사는 방대하며,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흐른다. 두 학자도 이를 분명히 한다. 그들의 이론에 역사의 우발성이 포함되어 있는 까닭은 역사 자체가 때론 우연하기 때문이다. 로마가 멸망했을 때, 당시 ‘촌동네’에 지나지 않았던 잉글랜드에서 17세기의 명예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그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무적함대 아르마다와 부딪히던 그 날, 잉글랜드 사람들 중 그들이 훗날 대서양 무역의 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 이가 있었을까. 에스파냐의 콧대 높은 군주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창녀’라 비하했고, 이번 기회에 잉글랜드에게 제대로 쓴맛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해전에서 철저한 승리를 거둔 건 잉글랜드이다. 바로 그런 일들이 역사에서는 종종 여러 이유들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이 모든 우연한 사건들을 하나로 꿰고 지나가는 것이 바로 두 학자의 이론이다. 착취적 제도는 장기간 존속할 수가 없다. 외부에서 그들을 붕괴시키든지, 아니면 내부에서 어떤 폭발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계는 열리고 있고, 우리는 열린 곳으로 나아가길 권유받는다. 리프킨이나 노르베리-호지 등 유명한 석학들이 세계화에 반대하며 지역사회로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흐름은 비가역적인 듯하다.


  두 학자는 이 이론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포용’과 ‘착취’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지난 역사를 훑고 지나오며 내린 결론처럼, 우리는 미래 역시 그렇게 진행될 것이라 예측해볼 수 있다. 또한 앞선 실패의 사례들, 그리고 오늘날 낙후된 국가들의 고통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를 보다 선명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이 지적하진 않았으나, 사실 ‘열린사회’에도 ‘닫힌사회’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포용적인 우리나라 사회의 어느 구석에는 착취적 제도들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마땅한 인센티브도 없이 거의 반(半)강제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와 이전 세대가 투쟁하여 얻은 권리를,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이다. 이미 얻은 것들은 잘 보이지 않으니, 우리도 아전인수격으로 일종의 ‘엘리트화’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1-21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3.01.15

 

 

  서재에 여러 철학책들이 꽂혀 있다. 나는 그것들 중 대부분을 완독하지 못했다. 읽지 못한 책들의 대부분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계륵과도 같아 차마 버리지는 못한다. 하루는 그것들에게 막연한 동경과 독서의 의무감을 느끼지만 다음 날이면 으레 그렇듯 잊어버리곤 한다. 철학은 내게 그런 존재이다. 늘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 싶으나 실제 그렇진 않으며, 한편으로는 그 드문드문 찾아오는 객인이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그것은 전체인 것도 같고, 부분인 것도 같다.


  마켓에 가면 소위 ‘지름신’ 내리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책을 앞에 두거나 생각을 글로 옮기려고 할 때마다 ‘철학신’이라는 것이 내린다. 물론 이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기 몇 줄에 하루의 무게를 옮겨놓고자 키보드를 누르는 순간, 혹은 펜으로 백지 위에 첫 획을 긋는 순간 우리는 복잡한 현상 속에서 어떤 정돈된 의미를 뽑아내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처럼 철학의 자세, 즉 스탠스(stance)는 철학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달리 적극적이다. 철학은 혼돈 속에 뛰어들 각오가 된 전사의 무기이다. 다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궁극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 마음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철학이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까닭은 본래 뜨거운 사람들의 위대한 구상들로 건축된 ‘꺼지지 않는 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철학적 질문과 ‘철학하기’라는 행동이 한 가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카이로스’이다. 철학은 우리에게 잠시 멈춰 있는, 진공 속의 ‘나만의 시간’을 허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으로부터 우리는 무한에 대하여, 환상에 대하여, 영원과 신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끝없는 사유를 허락받는다. 이것은 막강한 권한이다. ‘생각하는 나’와 ‘실존하는 나’가 일치하는 순간은 오로지 철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때문에 그럴까. ‘일상’은 철학과 너무 동떨어진 단어인 양 여겨져 오고 있다. 일상은 ‘카이로스’가 되기 힘들다. 회사원은 회사원대로의, 대학생은 대학생대로의, 주부는 주부대로의 일상이 있고, 그것은 삶의 대부분을 잠식하기에 충분한 위력과 설득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저들을 반대로 설득하기 위해서 철학은 일상 이상의 감동을 줘야만 한다. 돈, 성공, 유흥 등이 줄 수 없는 단 하나의 감동. 그것은 반드시 효과적이어야만 한다.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묵직한 깨달음을 주기도 하는 두꺼운 철학책들의 틈새에서 철학의 효과를 찾아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은 할 일이 있다. 두꺼운 철학책들의 난해한 문구가 아니라, ‘철학하기’라는 실천을 통해서라면, 분명 철학은 우리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뛰어가는 우리에게 잠시 손을 내밀어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시오.”라고 말을 거는 일부터 시작해서, 저 위대한 철학의 아포리아들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어 하나의 문장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바로 ‘읽는 삶’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을 권유하는 철학이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위력이며, 기술사회의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철학을 갈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Stop!”이 적혀 있는 대중적인 철학책들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나는 성공을 위한 가이드북들보다는 이런 종류의 가볍지만 진중한 철학책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공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실존’이다. 그것은 존재의 전체이다. 이것이 잘 다져진 건물은 성공하지 못해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토대부터 차근차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철학이 제시하는 건축도안을 참조할 필요가 있는데, 세부적인 청사진과 롤모델은 제각각 다를지 몰라도 건축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의 대중적인 철학자 로제-폴 드르와가 쓴 『일상에서 철학하기』에는 앞서 말한 세부적 청사진과 롤모델들이 무려 101가지나 나와 있다. 그러나 사려 깊은 독자라면 책을 꼼꼼히 읽어본 후 101가지나 되는 곁가지들이 실은 몇 안 되는 굵은 가지들로부터 뻗어 나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들 중 몇 개를 질문으로 거칠게 열거해보면 이렇다.


  “는 누구인가?” (이것이 확장되면 “우주(세상)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된다. 드르와의 책에는 ‘나’라는 존재의 실존적 체험에 관한 방법들이 가장 많이 소개되어 있다. 책의 중추를 구성하는 단어는 다름 아닌 ‘나’이다.)
  “순간영원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으로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낯섦익숙함은 무엇인가?” (이것은 “정상과 비정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진짜가짜는 무엇인가?”
  “배회란 무엇인가?” (우리를 ‘유동적 존재’로 만들어보는 질문이다.)
  “경계란 무엇인가?”


  드르와가 위의 질문들을 직접 던져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권유할 뿐이다. 철학은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심오한 질문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 그 이면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질문에 다가가는 모습도 있다. 드르와가 권유하는 행동은 소요시간, 도구, 공간 등이 의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카이로스로 잠시 이탈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어렵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카이로스를 통한 철학을 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그러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의 보호 없이 야생에 던져진 유아와 같은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적으로 던져진 존재 말이다. 그러나 드르와가 제시하는 행동들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할 수 있는 것인데 하지 않았고, 그것을 하면 우리가 원하는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드르와의 권유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애당초 이 책은 씁쓸한 실패를 맛봤을 것이다.


  제시된 방법들은 대체로 ‘나’라는 실존에 집중한 상태에서 주변을 낯설게 만들거나, ‘나’의 옛 기억들을 구성하는 익숙한 것들로부터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해체하거나 ‘나’ 이외의 것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사유가 우주적으로 확장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허탈함과 충격을 의도적으로 경험하기도 한다. ‘나’에게 스스로 칼을 가져다댔다가 나중에는 상처를 스스로 위무(慰撫)하는 것이, 아마 이상하고도 쓸데없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앞서 철학의 스탠스가 매우 적극적이라고 했었는데, 다시 한 번 그 말을 강조해야 할 것 같다. 철학은 심지어 이런 사디즘적이며 변태적인 권유도 한다.


  “물의 무게 속에 당신 전체를 압축해 집어넣어보라. 오직 이 느낌에만 집중하라.”


  그러나 이 아픔 뒤에는, 고통의 순간 뒤에는 평온함이 찾아오게 된다. 물속에 들어가 하나도 빠짐없이 눌려버리고 터져버린 건 나의 몸이 아니다. 나의 근심이다. 근심은 생각인 주제에 우리의 몸을 곯아버리게 만든다. 따라서 철학은 생각을 어루만져 근심을 녹여버리고, 몸을 제 그대로 멀쩡하게 회생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철학은, 미드 애청자들이 시신을 검식하는 CSI의 배우들을 보고 열광할 때에 우리의 시선을 작은 새의 시체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오로지 현재만 있다.”라는 삶의 가치를 찾아내게 한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드르와에게서 동양철학의 향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실제 동양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동양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불교나 노장(老莊)사상 등이 그러하듯 관점의 차이를 역설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만물이 손등과 손바닥 차이라고 주장하고, 장자는 광인(狂人)들을 사례로 들며 이 정상적인 세상을 순식간에 미친 세상으로 바꿔버린다. 철학자의 힘은 여기에 있다. 손을 뒤집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아기도 한다. 그러나 그 행동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혹은 타인의 권유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쉬운 일도 목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귀여운 이 책의 표지에는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체험”이라는 문구가 있다. 나는 국문학도인 탓에 이런 문구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형식주의를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저 문구는 문학사적으로나 철학사적으로나 늘 특별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하고 낯선 것들이 존재하게 된다. 만약 드르와의 권유대로 여러 번의 체험을 통해 우리가 반대편의 세상을 일상의 곁으로 끌어당길 수만 있다면 그 이후의 일상은 분명 놀라울 만큼 변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변할 것이고,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 알 수 없다.


  드르와는 이러한 무거운 주제의 대화들을 ‘심심풀이 책’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해버린다. 얼마나 우습고, 또 우스운가. 그동안 삶에 대해 쩔쩔매던 우리들의 모습은. 드르와의 ‘심심풀이 책’은 우리의 삶을 기차여행으로 만들고, 철학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격하시킨다. 바로 이 격하로부터 우리는 철학의 힘을 느끼고, 위로를 받으며,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렇다. 삶의 척추가 다시 기립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철학을 제외한 채로 걸어 다닐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1-18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8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3.01.10

 

 

  첫째,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
  둘째, 착했다가 나빠지는 사람도 있고, 나빴다가 착해지는 사람도 있다.
  셋째, 그러나 착하고 동시에 나쁜 사람은 없다.

 

  동화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세상은 이렇다. 아이들은 “착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 저 아저씨는 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끌려가?” 아이가 물었다.
  “죄를 지어서 그래. 나쁜 짓을 했거든.”


  그런데 TV 채널을 돌리던 아이는 방금까지만 해도 경찰들의 인도를 받으며 후송 차량에 올라탔던 사람이 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와 열심히 춤을 추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모습을 봤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아이가 말했다.

 

  “어? 엄마, 아까 잘못한 아저씨가 춤추고 있어.”


  어머니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건 나쁜 짓을 하기 전이야.” 정도로 손쉽게 둘러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겨우 그 정도의 대답을 듣고자 질문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그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동화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 착했던 시절에 동시에 나쁜 짓을 해서, 겉보기에는 “착했다가 나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


  아이는 부모가 들여다볼 수 없는 마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혼란을 마주하고 아주 간단한 질문들을 던지며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착했던 사람이 나쁜 짓을 했었을까. 세상에는 착하고 동시에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착하지만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아이의 질문이 비단 그의 것만은 아님을 나는 평생 상기하며 살 것이라 감히 다짐해본다. 어른이란 ‘착하지만 나쁜 것’에 대해 이미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자신한다. 또한 대부분이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우리가 어떨 때에는 착하고, 또 어떨 때에는 나빠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는 것이지.”라고 조언할 것이다. 그들은 불안한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서도 실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속설에 따르자면 여자는 그 믿음으로 아이를 키우고, 남자는 그것으로 아집을 키운다지.


  도덕의 문제는 끝나는 법이 없다. “착하지만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원제 : Il Visconte Dimezzato)』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우리의 대부분이 아노미의 대양 위에서 여유롭게 인생을 즐길 때, 저 이탈리아의 작가는 17세기의 한 전쟁터에서 메다르도 자작을 두 동강냈다.


  소설은 짧고 아주 단순하며,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동시에 환상적인 그로테스크들이 수놓인 기괴한 직물과 같다. 칼비노는 착한 메다르도와 사악한 메다르도를 만들기 위해 그를 전쟁터로 데려가 (별 위엄 없는 황제로부터 ‘중위’로 임명받게 한 뒤) 투르크인들의 대포 앞까지, 그 코앞까지 끌고 갔다. 메다르도는 그곳에서 정확히 둘로 나뉘었다. 그리고 둘 모두 살아남았다. 사악한 메다르도는 들것에 실려가 막사의 의사들로부터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다른 시체더미들 사이에 깔려 있었던 착한 메다르도는 두 무명의 수행자가 향료와 연고로 살려냈다.


  칼비오가 먼저 영지로 돌려보낸 건 사악한 메다르도였다. 그는 무슨 짓을 했을까. 아버지 아이폴로 자작에게 큰 실망과 허탈함을 안겨줘 결국 죽음으로 몰아갔고, 여러 죄목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죽였으며, 방화를 일삼았다. 양어머니이자 유모인 세바스티아나에게 화상을 입혀 마치 문둥병인 것처럼 보이게 한 뒤 그녀를 내쫓는 장면은 악행의 압권이다. 메다르도 자작 때문에 마을은 긴장했고, 장인(匠人) 피에트로키오도는 고문 기구를 만들며 번뇌했다.


  “페스트와 기근”을 외치고 다니는 위그노교도 에제키엘레와 그의 무리들이 “왼쪽 병신”이라 부른 사악한 메다르도 말고, 착한 메다르도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악한 메다르도가 실은 이중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의심했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나 톨킨의 ‘골룸’처럼 말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나’가 친구라 여겼던 늙은 (무늬만) 의사 트렐로니는 우연한 기회이 두 메다르도가 모두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 착한 메다르도를 발견한 사람은 사실 ‘나’였다. ‘나’는 자신이 본 자직의 손이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임을 기억해냈으나 도무지 정리를 하지 못했다.)


  한 명의 메다르도가 한 일은 정확히 갈라진 몸처럼 도덕적으로도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착한 메다르도가 의사 트렐로니에게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달라는 신호로 손수건, 달팽이, 닭들의 하얀 똥을 놓아두면 사악한 메다르도가 그것을 모두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비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메다르도의 선악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메다르도가 죄를 씌워 죽인 이들의 시체가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계속 지켜보길 원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그것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곧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광경을 발견했다. 우리들의 판단력도 여러 감정들로 잘게 부서져 그 시체들을 떼어 내거나 그 커다란 기계가 분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33쪽)


  위그노교도들, 그 중 특히 에제키엘레의 아들인 에사우의 행동은 종교윤리가 제시하는 선악의 개념은커녕 의례조차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오로지 그들만 잘 살면 된다는 안이한 의식이 어떻게 행동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준다. 착한 자작이 노새를 타고 그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에제키엘레는 도덕적으로 살라고 조언하는 자작을 지겨워한다. 그리고 에사우는 사기를 친다.


  “에사우는 노새에게 가서 여물통을 빼앗고 노새를 발로 차서 노새는 조금씩 절뚝거리며 걸어야만 했다. 그는 여물을 원래 있던 데로 갖다 놓으려고 나머지를 숨겨 버렸다. 그들은 여물을 자기들 가격대로 팔 생각이었다. 그리고 착한 반쪽에게는 노새가 벌써 여물을 다 먹어 버렸다고 말했다.(101쪽)


  사악한 메다르도의 명령에 따라 고문 기구를 만들던 피에트로키오도의 혼잣말은 선악의 문제가 비단 메다르도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혹시 내 영혼에 사악함이 있기 때문에 잔인한 기계밖에 만들 수 없는 게 아닐까?(103쪽)


  칼비노는 이렇게 독자들을 ‘악함’으로 잠시 끌고 간다. 문둥병 환자들이 방탕하게 살던 곳으로 쫓겨난 세바스티아나는 착한 메다르도가 매일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잔소리를 하면서 ‘비인간적인 선함’이 사람들을 충분히 질리게 하거나, 혹 선한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악한 반쪽보다 착한 반쪽이 더 나빠. (중략) 대포 포탄이 그를 두 쪼가리로 만든 게 천만 다행이지 뭐야. 자작이 만약 세 조각이 났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겪었을지 알게 뭐람.(109쪽)


  우리는 세 조각이 아니라, 수 천 조각, 아니 수 만 조각으로 나눠진 존재이진 않을까 의심하게 된다. 너무 복잡하니,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더라도 지금의 우리는 아잇적의 간단한 이분법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경험이 축적되는 일은 우리가 이전의 생각보다 훨씬 잘게 쪼개진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는 일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른 까닭에 나는 칼비노가 파멜라와의 결혼을 빌미로 두 자작, 아니 메다르도 자작이 자신과 결투를 하도록 했을 때, 결국 자작을 네 등분으로 잘라버려 우리를 더 깊은 혼란로 내던져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칼비노는 놀랍게도 둘을 다시 붙여버렸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선상(船上)의사 트렐로니의 기술은 녹슬지 않았고, 트렐로니는 피범벅이 된 메다르도 자작의 반쪼가리들을 붙여 정맥과 살과 내장을 꿰매고 무려 1km나 되는 붕대로 감아 결국 자작을 살려냈다. 자작은 이전의 형체를 되찾았다. 그러나 ‘분리’의 경험을 가진 그였다. 칼비노는 전쟁터에서 메다르도를 두 동강냈지만 결국 그를 다시 붙였다. 1+1이 2가 아닌 2 이상의 숫자로 비약되는 즐겁고도 유쾌한 상상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작은 1+1이 그대로 1로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칼비노는 장자(莊子)적 질문도 가능하게 만든다.


  “한 때 나는 착했고, 또한 한 때 나는 사악했으니, 나는 착한가, 아니면 사악한가?”


  칼비노는 말한다. 착하고 사악한 것이 온전한 사람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현명해질 수 없으며, 자작처럼 올바른 통치를 할 수도 없다. 나는 이 간단한 메시지 하나를 손에 쥔 채 방문을 잠그고 남몰래 나의 선함과 나의 사악함을 만나고 싶었다. 그것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제임스 쿡 선장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늙은 의사 트렐로니에게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의무와 도깨비불만 가득한” 세상에 남아 ‘인간’으로 남게 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1-18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8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3.01.09

 

 

  역사적 사건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준다. 에릭 블레어(Eric Blair), 아니 필명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1937년에 이르는 유럽의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오웰의 짧은 글을 읽어보면, 그가 왜 굳이 소설 속에 저널리즘의 뉘앙스를 심어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그는 글을 쓰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행동파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사랑이 담겨져 있다.


  1903년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마흔일곱 해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미켈란젤로만큼만 오래 살았으면 그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동물농장』에는 무너져 가는 전체주의의 결말이 실려 있다. 이를 두고 ‘예언자적 작품’이라고 하던가.  사실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원제 : Why Nations Fail)』을 쓴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 등 경제학 분야에서 역사를 분석하는 석학들에 따르면 소련은 착취적 경제제도 때문에, 중공업으로 전환한 후 이룩한 놀라운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얼마 못 가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붕괴가 문학적으로 ‘예견’될 때에, 독자들은 역사에 한층 고양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듯하다.


  『동물농장』은 그로테스크한 우화이다. 동물들 중 그나마 똑똑한 돼지들이 동물들을 선동해서 농장주인 존즈를 몰아내는 것까지는 제법 그럴싸한 우화라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90년대 영화, 가령 『꼬마돼지 베이브(BABE)』나 『베토벤(Beethoven)』등의 아기자기한 매력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영화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며 『동물농장』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동물들의 행동은 놀라울 만치 사람처럼 ‘진화’한다. 글을 읽고, 현판을 쓰고, 곡식을 분배하며, 풍차를 세운다. 그 중에는 사람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부류와 애당초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은 부류 - 나폴레옹이 특별히 양육한 개와 돼지들 - 가 있어 그들은 결국 ‘진화’에 성공하는 부류의 통치를 받게 된다.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은 “설마 존즈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것은 아닐 거고?”라는 질문으로 몰아붙이면서 부인했겠지만, 동물농장에는 마침내 전체주의에서 볼 수 있는 ‘계급’이 생긴다.


  소설이 길지 않은 만큼 오웰은 사건과의 냉소적 거리를 유지한 채 독자들을 거침없이 ‘동물농장의 파국’으로 끌고 간다. 사건들이 - 인간의 것과 매우 닮았다는 점에서 - 충격을 주고, 오웰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시점은 동물농장 안에만 머물러 있어 복서가 결국 도살을 당했는지, 스노볼이 정말로 프레데릭의 농장과 필킹턴의 농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인지, 독자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나폴레옹이 어떤 돼지 - 사람의 탈을 쓴 돼지 - 인지 알아차린 후부터는 모든 것이 의심된다. 동물들이 당하는 비극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계명이 바뀌고, 자백과 처형으로 수많은 동물들이 도살되고, 암탉들의 시위가 수포로 돌아가고, 상처뿐인 승리에 허황된 의미를 갖다 붙이는 스퀼러의 논변에 동물들은 속아 넘어간다. 다 알지만 그것을 말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하나 같이 늙은 당나귀 벤자민이 되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스퀼러가 길다란 두루마리 통계 숫자 목록을 펴놓고 그간 농장의 각종 식량 생산량이 200퍼센트, 300퍼센트, 혹은 500퍼센트씩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동물들로선 ‘반란’ 이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스퀼러의 발표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동물들은 통계 숫자보다는 먹을 것이나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때가 자주 있었다.”


  『동물농장』은 당대를 고려하면 현실과 1대1의 대응이 가능한 우화이다. 가령, 나폴레옹과 그의 정책을 의심하는 동물들에게 나폴레옹을 찬양할 만한 소식을 전해주는 꼴사나운 스퀼러 같은 경우에는 공산당 시절의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 - 지금도 국영 일간신문으로 있으나, 성격은 다르다 - 라 할 수 있고, 나폴레옹은 스탈린, 그로부터 쫓겨나고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여겨진 돼지 스노볼은 트로츠키일 것이다. 스탈린으로부터 쫓겨나 1940년 결국 멕시코에서 암살당한 트로츠키는 유럽의 각 나라들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야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단독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스탈린과는 정반대의 의견인데, 스노볼도 트로츠키처럼 일종의 연합을 주장했다. 인간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다른 농장에도 비둘기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건들도 현실과 대응된다. 스탈린 정권이 1930년부터 무려 9년 간 진행했던 대숙청도 나폴레옹의 회의 폐지에 반대했던 돼지 네 마리, 달걀 사건을 주도한 암탉 네 마리, 옥수수 이삭 여섯 개를 먹은 거위 한 마리, 나폴레옹을 따르던 늙은 양 한 마리를 죽인 양 두 마리, 먹는 물웅덩이에 오줌을 싼 양 한 마리가 즉석에서 도살당한 이야기와 유사하다. 동물들의 반란을 이끌어내고, 나폴레옹의 독재 이전까지 회의의 마지막을 늘 장식했던 노래 ‘잉글랜드의 짐승들’은 “잉글랜드의 짐승들이여, 아일랜드의 짐승들이여, 온 세계 방방곡곡의 짐승들이여”로 그 대상이 확장된다는 점에서 코민테른을 닮았다. 이 노래는 나폴레옹이 폐지하는데, 스탈린도 대숙청을 통해 결국 1943년에 제 3 인터네셔널을 강제적으로 해산시켰다.


  나폴레옹이 어떤 방식으로 동물들을 기만하는지를 보면 오웰이 대중들의 ‘앎’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주도로 동물농장에는 ‘동물주의’의 원리를 축약한 일곱 계명이 새겨진다.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Whatever goes upon two legs is an enemy.)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Whatever goes upon four legs, or has wings, is a friend.)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No animal shall wear clothes.)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No animal shall sleep in a bed.)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그러나 계명은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의 편의에 따라 수시로 변경되는데, 결국 동물들은 스퀼러가 어느 날 자정 무렵 계명의 현판을 페인트로 고쳐 쓰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문을 몰랐고, 오로지 진실을 아는 이는 늙은 당나귀 벤자민 뿐이었다. 인간들과는 절대 거래하지 않겠다고 내렸던 결정이 번복되는 장면에서는 스퀼러가 동물들에게 다가와 이렇게 설득한다. 아니, 거의 협박에 가깝다.


  “동무들, 그거 혹시 동무들이 잠결에 꾼 꿈 같은 거 아니오? 아니라고 확실히 장담할 수 있소? 동무는 그 결의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있소? 그런 기록이 있소?”


  계명도 이런 식으로 동물들의 ‘무지’를 이용해 고쳐졌다. 나폴레옹이 존즈의 본채에 들어가 침대에서 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제 4계명에는 “시트를 깔고”가 추가(No animal shall sleep in a bed with sheets)되고, 대숙청 이후 제 6계명에는 “이유 없이”가 추가(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without cause)된다. 나폴레옹이 양조법과 알코올 증류법에 관한 책들을 사오라는 지시를 내린 후에 제 5계명에는 “너무 지나치게”가 추가(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to excess)된다. 그러나 최후의 사기는 이보다 궁극적이다. 그것은 오웰의 이상을 배반한 전체주의의 대사기, ‘평등’을 가장한 독재의 사기이다. 제 7계명은 이렇게 바뀌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자신의 의식을 분명하게 밝혔다.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책은 생명력이 없는 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그는 『동물농장』을 통해 당대의 ‘거짓말’을 드러내기 위해 ‘우화(fable)’라는 오래된 문학적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독자들이 무엇에 대한 우화인지 모르고 읽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어떤 역사적 사건, 혹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동물농장』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오웰의 『동물농장』이 성공적인 평가를 받는 까닭은 그가 밝혀내고자 한 ‘거짓말’이 비단 스탈린의 전체주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들, 특히 나폴레옹이 본채에서 지내길 선호한 독재의 시대부터는 주로 스퀼러를 통해 언급되던 ‘거짓말’들은 독자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중들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웰은 ‘문맹(文盲)’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 하지만 결코 극단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19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문맹률은 무려 90%를 넘었기 때문이다 - 장애를 설정했지만 “읽지 못한다.”라는 것이 꼭 독해에 관한 비유로만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현실을 읽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 혹은 그럴 의지조차 없는 안이한 대중들에 관한 따끔한 비유라고도 할 만하다.


  “선전선동은 타인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죄의식을 느낄 이유가 많을수록 선전선동은 더 격렬해진다.”


  『맹신자들(원제 : The True Believer)』을 쓴 에릭 호퍼의 말이다. 볼셰비키, 파시스트, 나치즘 등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재를 원하지 않는 것 같던’ 대중들이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추종하려는 열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등장한 비극적 역사의 단면들이다. 우리는 왜 ‘선동’되는가? 우리는 과연 우리가 가려고 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가? 역사는 누가 이끌어 가는가?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선택권이 있는가?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처음으로 동물들을 선동했던 말 자체는 매우 이상적이다.


  “우리 삶의 이 모든 불행이 인간의 횡포 때문이라는 게 너무도 명백하지 않소? 인간을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의 노동 생산물은 모두 우리 것이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부자가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동물농장』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나폴레옹이 근처의 농장주 대표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카드게임이 시작됐는데, 결국 “동시에 똑같은 스페이드 에이스를 내놓은 것”으로 발단된 싸움이 오웰에게는 이렇게 보였다.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3.01.07

 

 

  요즘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것 같다. 별로 많지 않은 정보들 탓에 불이익을 받았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오늘날 사람들은 넘치는 정보들로 인해 더 큰 위험에 빠져 있다고 운을 땐 바우만은 벤야민의 ‘뱃사람 이야기’와 ‘농사꾼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결론은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인 농사꾼 이야기는 사실 너무 친숙한 것처럼 ‘착각’되므로 우리가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낯선 것’과 ‘친숙한 것’에 대한 재고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우리에게는 ‘확고한 것’도 있지 않을까? 친숙한 것들에게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의심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의심조차 할 수 없는 확고한 것들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둘도 없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누군가가 이것을 흔들거나 “그건 확고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걸 믿는 사람은 심한 경우 생명이 시들어가는 비참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확고한 무엇이 그/그녀를 기사회생시켜준 경험이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내가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원제 : Intelligent Thought)』의 리뷰에서 ‘확고한 것’이라는 새삼스런 표현을 쓴 까닭은 과학과 종교가 우리에게 확고한 무언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스티븐 호킹이나 빅터 스탠저와 같은 소위 ‘천재’라 불리는 대중적 천체물리학자들은 “신은 없다.”는 주장을 매체를 통해 내보내고, 20세기 ‘핫아이콘’ 리처드 도킨스는 마치 마르크스(“종교는 아편이다.”)처럼 종교를 바이러스에 비유해 철저하게 비판했는데 공적 담론에서의 종교 대 과학의 충돌은 누리꾼들이 단순한 가십거리로 읽을 만한 이벤트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저건 확고한 대륙 사이의 충돌이다.


  다만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 책에 자신의 의견을 담은 16명의 과학자들이 논리적으로 비판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즉 ID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첨예한 논쟁거리로 대두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충돌을 다소 낯설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   *   *

 

 

  이 책의 과학자들은 논리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유머러스하면서도 수준 높은 글로 논쟁의 핵심을 소개하며, 그로부터 미래의 패러다임 변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낸다. 한 가지 한계가 있다면, 그건 종교에 대한 반감을 대중들이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한다 하더라도 정작 대중들이 - 심지어 이 책에는 교사나 대학생들까지도 비판하는 대목이 있는데 - 과학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부터도 그러한데, 그들은 꼼꼼하면서도 쉬운 비유로 대중들에게 과학의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대중들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인지 본체를 전연 모른다. 따라서 대중들에게는 과학이 하나의 견고한 제도가 아닌, 하나의 믿음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남아 있다. 물론 이 책을 쓴 사람들도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크 D. 하우저나 스콧 D. 샘슨과 같은 생물학자들은 책의 후반부를 맡아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에 대해 격양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지적 설계론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물론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그것을 ‘이론’이라 부르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겠지만. 지적 설계론 안에도 서로 상반되는 논의가 있어 심지어는 싸우기까지 - 이 책에는 미국 대 호주의 대결이 그려져 있다 - 했다. 이런 경우는 종교적 해석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에 따른 지적 설계론, 혹은 창조론 내부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뭉뚱그려서 이 ‘이론’이 내놓은 관점은 대체로 이렇다.


  이 ‘이론’의 과학자들은 캄브리아기 대폭발, 그러니까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다세포 생명 형태가 폭발적으로 출현한 사실을 신의 창조로 보고자 한다. 그렇게 창조된, 혹은 설계된 수많은 ‘창조물’들 중에서 그들은 유독 인간만이 위대한 까닭을 신의 선택 때문이라 여긴다. 따라서 그들은 종(種) 사이의 진화는 없다는 입장에 서서 인간의 독자적 탄생을 수호하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이 생각보다 그 힘이 약해서 인간의 출현을 설명하기에는 인간 자체가 너무나도 복잡한 존재라는 주장도 한다. 이것이 어떻게, 또 얼마나 간단하게 반박되는지는 첫 번째 글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세밀하면서도 충실한 연구라고 하더라도 이미 저 ‘이론’에서 우리는 과학의 자격을 찾을 수 없다.


  두 번째 글을 쓴 래너드 서스킨드는 그가 말하는 ‘반(反)과학’이 유행하는 이유를 인간의 공포, 그리고 문화전쟁의 패자 - 여성, 흑인, 성적 소수자 등을 내몰았던 이들의 패배를 일컫는다 - 들이 낳은 결과라고 보고 그들이 과학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지식인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을 조장한다며 역공을 퍼붓는다. 그는 과학에게 대중들이 적대감을 품지 못하도록 현명하게 대처하면서도 “무지한 광신도들과는 아예 논쟁하지 말라.”고 동료 과학자들에게 충고한다.


  그렇다면 지적 설계론과 같은 - 한 차례 그 증거의 날조가 폭로되어 심각한 타격을 입은 바 있는 - ‘반과학’이 어떻게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대니얼 C. 데닛이 설명한 아주 간단한 수법을 통해 가능하다. 저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1세기 동안 대중화된 물리학의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오히려 “이해한다.”는 대답을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이해한다고 말한 사람에게 “이해한다면 상세히 설명하라.”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과학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수단으로 삼는다. 요구 받은 사람은 당황할 것이 분명하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저들은 몰아붙인다. “창조자 없는 창조물을 아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요구가 이어진다. “안다면 상세히 설명하라.”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당황 속에서 사람들은 이런 의심을 해봐야한다. “어떻게 완성된 산물이 누군가의 목적과 설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마땅한 의심이다. 그 ‘완성된 산물’이라는 것이 신앙과 닿아 있어 우리의 믿음이나 신념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그 어떤 반론도 수용하지 않는 믿음이나 신념의 증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믿음과 신념은 분명한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과학적 fact는 그것이 반증되지 않는 이상 거부할 수 없다. 다만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과학적 fact를 인정하는 순간 ‘확고한 세계’로부터 이탈할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니콜라스 험프리의 논증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영혼’이라는 것이 진화론 최대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고 다윈도 생각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영혼도 진화론으로 논증이 가능하다는 놀라운 전개까지 나아간다. 그 전개는 다소 어려우니, 결론을 줄여 쓴 이 구절이 그의 논증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의식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특별한 비결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지 않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의식은 인간 스스로를 하나의 ‘소(小)우주’로 여기게끔 진화하는 과정을 담당했고, 인간의 특이성을 이끌어낸 결정적인 ‘인자’라는 것이다. 의식마저 진화론의 영역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독자들은 그의 논증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소 충격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과 자아 등 비물질적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어서 과학이 밝힐 수 없는 최후의 ‘미지의 섬’이 존재하리라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학교 최고의 강의 중 하나로 꼽히는 어떤 철학 강의의 교수로부터 그러한 뉘앙스를 강하게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영혼은 인간만의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은 특별해진다고 주장하며 영혼을 무려 10단계로 나눴다. 영혼의 ‘비물질적 실존’을 믿으면 편안해진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순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 중심적 사고와 환원주의로부터 벗어나는데 큰 장애가 되곤 한다.


  팀 D. 화이트는 우리, 인류, 아니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두발보행 영장류”가 종(種)의 역사상 “최대의 적으로 진화사에 기록될 위치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두 명의 생물학자가 우리에게 제시할 새로운 - 하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이해이다. 진화론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만 이러한 획기적인 사고 전환의 청사진이 기획될 수 있다. 이것은 종교가 할 수 없고, 과학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사고는 검증과 비판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확고한 것이어야 한다. 종교는 검증과 비판에서 자주 ‘열외’된다.


  닐 슈빈과 리처드 도킨스의 어려운 글을 지나 스콧 애트런의 글에 이르면 지적 설계론을 공교육에 도입하려는 일부 주(州)에 대한 신랄할 비판을 만나게 된다. 그의 주장은 이 구절들로 요약된다. 마지막 구절의 위트에는 칼이 담겨져 있다.


  “과학은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서, 혹은 아주 오랫동안 존속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회에서, 결코 종교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류가 자연의 물질적 비밀을 풀기를 원하는 한 종교도 과학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이른바 지적 설계 이론처럼 과학을 서투르게 흉내내는 이론은 과학 교육을 불구로 만들 뿐이다. (중략) 지적 설계를 설파하는 자들은 의도적인 원인을 과학에 재도입하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을 줄이는 결과를 부를 것이다. 사회를 위해 그것은 지적이지 않은 설계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저자인 스티븐 핑커는 이 책에 실을 자신의 글로 “과학은 물론 종교도 도덕 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도덕도 진화한다. 진화를 ‘변화’라고 이해하면 조금 편할 것이, 우리는 어떤 것의 미추(美醜)를 판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겉모습을 봐야 하는데, 이런 단순한 시각적 판단과 기호(嗜好)는 문화마다 다르며, 또한 종(種)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만의 관념인 도덕은 어쩔 수 없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상시 변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도덕성의 변천 과정을 모르고 그것을 하나의 확고한 세계인 것처럼 여기는 우를 범하고 있는데, 그런 까닭에 종교와 도덕의 강력한 결합으로 종교의 권위가 과학 못지않은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과 민족성, 때론 ‘신의 자식’이라는 숭고한 관념으로부터 가공할 만한 수준의 지원을 받곤 한다. 그런데 핑커는 이러한 세태에 대한 반론에 그치지 않는다.그는 더 나아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이 종교와는 달리 도덕성의 토대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하는 대중들에게도 일침을 가한다.


  리 스몰린은 ‘강한 인류 원리’, ‘수학 친화적 원리’, ‘다중우주론’ 등을 소개하면서 한 가지 우리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제시한다.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에는 약 20개의 자유 매개변수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요즘 널리 알려진 ‘쿼크’라는 것도 그 중 하나이고, 전자와 중성미자도 여기 포함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를 구성하진 않는다. 즉, 우리는 어떤 자유 매개변수들을 선택하여 조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이 과정은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과학자들도 “왜 하필?”이라는 의문을 갖곤 한다. 그만큼 ‘우리’는 매우 이례적 구성원이라는 뜻이다.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이 그들의 든든한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아마 최적의 난제가 바로 저 매개변수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스몰린은 “우주가 우주를 낳는다.”는, 조금은 어려운 주장을 소개하면서 “우주도 진화한다.”고 보면 매개변수에 따른 다양한 자연법칙도 우주가 스스로 재생산할 때마다 조금씩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사실 그의 글이 다루는 주제가 가장 난해하다. 이는 나와 같은 초보적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스튜어트 A. 카우프만은 가장 확실한 반론으로 지적 설계론의 전제 자체를 무마시킨다. 지적 설계론의 유명한 개념은 ‘환원 불가능의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다. 이건 쉽게 말해 엄청 복잡하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바로 인간으로의 진화라는 뜻이다. 또 다시 말하자면 저건 창조나 설계의 막강한 근거이다. 복잡한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보통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해하기 너무 어렵고 복잡한 것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그것과 그것을 만든 어떤 것, 혹은 존재에 대한 막연한 경외의 감정을 품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확률의 논리는 진화를 기술할 때에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카우프만은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생물들의 인과적 관계가 없는 특성들의 배위 공간을 미리 말할 수 없다.”


  지적 설계론이 말하는 ‘환원 불가능의 복잡성’의 진화론적 실체는 다름 아닌 자연선택과 변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수많은 DNA들이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조합을 통해 등장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변이를 통해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기괴한 괴물이 등장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리 놀랄 만한 일이 -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에서는 시쳇말로 ‘폭풍난리’가 나겠으나 -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변이가 일어날 만한 환경과 조건이 지구에 갖춰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기괴한 괴물을 볼 일은 전혀 없겠으나, 또 모르는 일이 바로 변이이다.


  세스 로이드는 0과 1을 통해 계산하는 컴퓨터의 정보처리능력을 예로 들면서 우주가 매우 똑똑하다는 재미있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제시하는 개념은 노엄 촘스키의 회귀(recursion)이다. - 이는 문장을 만드는 인간의 사고과정이 반복되고 순환한다는 언어보편적인 주장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운 이라면 ‘회귀’보다는 ‘순환’이라는 번역에 더 익숙할 것이다 - 이건 매우 단순한 과정이다. 0과 1의 반복.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수많은 문장을 만들고, 컴퓨터는 놀라울 정도의 정보처리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로이드에 따르면 “언어와 마찬가지로 생명과 섹스는 다양한 조합들을 무궁무진하게 생산할 수” 있다. 그걸 우주가 한다는 것이 로이드의 설명이다.


  리사 랜들은 교육에 관한 마크 D. 하우저와 스콧 D. 샘슨의 논의를 예비하는 위치에 서서 지적 설계론이 왜 과학이 아닌지를 강조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과학의 대중화 과정에서 본의 아닌 전문용어들에 대한 대중의 오해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 중 대다수는 유해하지 않은데, 그가 보기에 지적 설계론은 위험한 수준에 와 있는 논쟁거리이다. 지적 설계론은 과학에 대한 오해를 오히려 부추긴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목적에 관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현대과학 이래 ‘과학’이라는 모든 영역은 결과에 대해 질문하는 연구이다. 이것이 과학의 ‘목적’이다. 그런데 지적 설계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그런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어떤 사람들을 과학이 원래하기로 되어 있는 질문들을 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하우저와 샘슨 두 생물학자 - 하우저는 진화생물학자이고, 샘슨은 고생물학자 - 는 미국의 교육 현실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하우저는 훌륭한 교과과정을 위해서는 학문의 완결성을 각각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그 학문들이 만나는 접경지대에 새로운 교과목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못 박으면 안 되고, 위와 같은 교과목들이 각각의 학문들에 대한 학생들의 전문적인 이해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교양이 전공보다 중시되어야 할 절대적 이유를 인정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주장은 지적 설계론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사들 중 일부가 “우세한 과학이론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제시할 권리”와 “과학적 견해들에 대해 (학생들이) 입장을 가질 권리”를 운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이론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제시할 권리는 매우 중요하며,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바로 과학이 이러한 비판의 연속을 통해 유지되는 학문이다. 문제는 이런 당연한 주장이 ‘반과학’인 지적 설계론의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의 목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우저는 넌센스라 일축한다.


  마지막 글을 맡은 샘슨은 ‘생태-진화 중심의 대안 교육’을 제창한다. 그가 살펴본 여론조사에 따르면 놀랍게도 “미국인의 대다수가 생물학의 아무것도 납득하지 못한다는 엄청난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면서도 대중은 뭔가 진화론으로부터 효용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기까지 한다. 마치 그들이 종교를 포함한 여러 사상들로부터 삶의 방향을 제시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그러나 진화론에서 효용을 찾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인간 중심의 고전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인간을 ‘신의 뜻’으로부터 우주의 중심에 세우지 않는다. 진화론은 오히려 E.O.윌슨의 용어인 생명사랑(biophilia)을 강조할 근거들로 가득 차 있다.


  “자비나 생명사랑의 필수 전제조건은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의 자리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진화의 작동을 이해하면서 우리의 삶에 특정 의미, 물론 생태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이른바 ‘진화이해력(evolitaracy)’이라 하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왜 생태적 재앙을 막아야 하는지를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샘슨에 따르면 부분에서 전체로 연역하는 전통적인 환원주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 전체에서 부분을 바라보는 다윈주의적 시대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이는 문자 그대로와는 달리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인간이 저질러온 파괴적 역사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빚이 될 것이다.

 

 

*    *    *

 

 

  두꺼운 책은 아니다. 300페이지도 안 된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기에는 결코 쉽지 않다. 또 다른 검색을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검색의 연속이 필요하고, 어려운 과학이론과 용어들을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다가 결국에는 튕겨져 나가는 처참한 장면도 목격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어려움에 더해서 지적 설계론을 둘러싼 논쟁의 무게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사실이다. 가중의 중요성. 따라서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과학적 이해 이상의 사고를 독자들에게 권장하게 되고, 독자들은 지적 설계론을 반박하는 과학계 지성들의 화려한 논증들에만 신경을 쓰면 안 되는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


  인간에게는 수많은 좋은 자질들이 있다. 종교는 그것들을 우리가 발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종교의 일부 행위들에 대한 감독의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지적 설계론은 국소적인 사상을 위해 과학을 종교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과학의 본질을 어기거나, 무리한 출판과 몇 차례의 허위 실험, 조작 등으로 이미 헌법으로부터 “과학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모든 종교가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지적 설계론에 대한 비판의 기사를 나는 웹서핑 중 우연히 한 불교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오용의 사례들로부터 인간이 좋은 자질들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지켜내야만 한다. 그것은 또한 종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p.s  이 책의 부록에는 지적 설계론 논쟁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미국의 사례 중 하나인 어떤 판결문 - 2005년 12월 20일 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키츠밀러 등 대 피고 도버 지역 학군(Kitzmiller et al. v. Dover Area School District) 논란으로 미국에서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 이 실려 있다. 그 중 앞부분이자 내가 가장 중요하다 여긴 부분을 이곳에 옮겨놓는다. 원문은 해당 판결문의 pdf 파일에서 그대로 옮겨왔으며, 번역은 이 책의 역자의 것을 참고했다. 밑의 ID란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의 약자이다.

 

4. 지적 설계는 과학인가 아닌가
  관련 기록과 적용 가능한 판례를 검토한 후 우리는 지적 설계 논증이 사실일 수 있다 해도(여기에 본 법정은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지적 설계가 세 가지 수준에서 실패라고 생각한다. 셋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지적 설계가 과학이라는 판결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 첫째, 지적 설계는 초자연적 인과관계를 끌어들이고 허용함으로써 과학의 수 백 년 된 기본 규칙들을 위반한다. 둘째, 지적 설계의 핵심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논증은 1980년대에 창조과학의 종말을 부른 비논리적이고 결함투성이인 ‘억지 이원론’을 이용한다. 셋째, 진화론을 부정하는 지적 설계의 공격은 과학계에 의해 반박되었다. 아래서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지적 설계가 과학계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적 설계는 동료 검토를 거친 출판물을 발표한 적이 없고, 검증과 연구의 대상이 된 적도 없다.

 

4. Whether ID is Science
After a searching review of the record and applicable caselaw, we find that while ID arguments may be true, a proposition on which the Court takes no position, ID is not science. We find that ID fails on three different levels, any one of which is sufficient to preclude a determination that ID is science. They are: (1) ID violates the centuries-old ground rules of science by invoking and permitting supernatural causation; (2) the argument of irreducible complexity, central to ID, employs the same flawed and illogical contrived dualism that doomed creation science in the 1980's; and (3) ID's negative attacks on evolution have been refuted by the scientific community. As we will discuss in more detail below, it is additionally important to note that ID has failed to gain acceptance in the scientific community, it has not generated peer-reviewed publications, nor has it been the subject of testing and research.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3-09-2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유래』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적 설계론'과 같은 비과학적 주장이 과학에 겂없이(?) 대드는 꼴이 더욱 가관입니다. 다윈의 책들(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과 도킨스의 여러 책들, E.O.윌슨과 스티븐 핑커의 여러 책들도 매우 뛰어난 '과학자'들이 쓴 명저임은 분명한데, (제 생각으로는)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들이라고 해도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여전히 남는 듯하고, 결국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철학적 통찰'로 좀 더 나아가 봐야 '우리의 위치'를 좀 더 속시원하게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제게는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들(제게는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가장 훌륭하다 싶고,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도 좋더군요)과 베르그송의 책 가운데 『창조적 진화』(이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데, 과학-물론 생물학과 진화론이 중심이지요-과 철학과의 관계를 아주 잘 설명해 놓았다 싶어요)가 특히 좋더군요. 다소 주제넘은 댓글일지도 모르지만 (탕기님의 글을 읽고 난 뒤 솔직하게 얘기하고픈)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걸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탕기 2013-09-27 23:25   좋아요 0 | URL
저도 과학자들 중에서 급진적인 논의를 진행시키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 절반의 심정이 듭니다. 한쪽의 마음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진화론을 지지하고, 우주과학을 동경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마음의 다른 한쪽에서는 oren님과 비슷하게 불편한 감정이 생깁니다. 특히 샘 해리스와 같은 과학자들이 내놓는 의견은 과학적 현상으로 도덕을 설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철학적 위치가 위협받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듭니다.

사실 이런 상반된 감정에도, 저는 여전히 한 가지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겠지만 '지적 원칙'이라고나 할까요. 그건 앞으로 과학이 발견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않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과학적 위치가 있고, 철학적 위치가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철학적 위치가 과학적 위치보다 선행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물리/생물/화학적 특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명백한 사실인 듯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철학적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과학이 우리를 규정하는 범위를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된 말로 철학적 사고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지적 설계론만 봐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적 설계론은 철학적(이라고 쓰고 '종교적'라고 읽는) 사고의 바탕에 과학적 사고를 자신들의 기호에 맞게 끌어다오는 오류를 범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oren님도 분개하셨던 것처럼 저 역시 그러한 사고 방식에 대해서 때론 파렴치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데, oren님께서 (솔직하게) 좋은 의견을 적어주시니 저 역시 마음 속으로 아주 기쁩니다. 성별이 어찌 되었든, 나이 차이가 어찌 되었든, 배경이 어찌 되었든 좋은 글친구/생각친구가 한 분 더 생긴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많이 달아주십시오. 저도 oren님의 서재를 자주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