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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 ㅣ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평점 :
2016년 3월 7일 월요일
나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단점이 있다. 재 한 줌으로 사라지기 전까지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결점으로, 나는 이런 말을 당신에게서도 똑같이 들을 수 있다. 당신이 그걸 ‘단점’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당신과 내가 왜 그런 단점을 지닌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우리는 눈을 두 개만 갖지 않아도, 그리고 그 두 눈이 모두 정면을 향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시력은 둘째 치자. 왜 우리는 한정된 공간만 상으로 맺히는 구조 속에 갇힌 것인가?
이런 한탄을 하면 나의 왼편에 있는 누군가는 오른쪽으로 눈만 살짝 굴리면서 나를 안쓰럽게 흘낏 볼 것이다. 물론 일상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걸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겨를도 없다. 거울의 도움을 받아 잘 살고 있고, 사물과 기계들은 정면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에 알맞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이따금 나는 ‘정면을 향한 두 눈’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듣거나 읽는다. 사방으로 눈이 나있는 신화 속 존재의 시각이라든지, 아무리 쳐다봐도 보이지 않는 이벤트 호라이즌이라든지, 동시에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구멍이라든지… 아무리 추상의 개념이라 해도, 예전부터 쭉 봐왔던 수많은 이미지들, 그것이 형태가 됐든 색이 됐든 간에, 그 중 일부를 활용해야만 생각할 수 있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신화와 종교에서 말하는 초월은 (과학에서는 ‘인지불가’라고 말하겠지만) 말 그대로 전혀 그려볼 수가 없다. 눈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새삼스런 자각.
답답하다. 상징이 등장하고, 우리가 아는 예술사가 이어진 까닭이다. 인간은 기호와 예술이 없으면 태초에도, 진리에도, 그리고 사실 그 무엇에도 다가갈 수가 없다. 단, 아무리 다가가더라도 1/n 따위의 부분 접근 밖에는 할 수 없으므로, 결국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접근법을 격파하는 것을 우리는 ‘초월’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은 전혀 흡족해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과학에서 아주 근사한 문학적 표현 하나를 빌려오자면, 그건 quantum leap, 즉 양자도약이 될 것이다.
보르헤스는 누군가의 집 지하실에 내려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아래부터 열아홉 번째까지 계단을 세고, 그곳에서 놀라운 세계를 봤다. 이제부터 말할 소설은 「알렙(El Aleph)」이다. <알렙>은 근원, 시원, 진리 등에 닿아 있는 단어이며, 여러 언어권에 걸쳐 공통적으로 ‘제 1의 단어’로 여겨졌다. 이 제목은 또한 보르헤스의 전집 『알렙』을 대표한다.
전집에 실린 다른 단편들은 대부분 이 조촐한 서재 공간의 ‘보르헤스’ 카테고리에 부족하게나마 (그러나 아주 들뜬 마음으로) 복기해뒀다. 글로 곱씹어보지 않은 단편들도 있다. 역량 부족으로 감응하지 못했거나, 이면지의 낙서를 복기로 이어가지 못한 탓에 기약 없는 유예의 상자에다 담아뒀다. 전집 『알렙』의 전체 복기는 동일 제목의 단편을 되짚어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며, 나머지는 아래에 링크로 달아둔다. 생각해보니, 나는 다섯 단편, 즉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 「아스테리온의 집(La casa de Asterión)」, 「신학자들(Los teólogos)」, 「자이르(El Zahir)」, 그리고 지금 복기할 「알렙」이 보르헤스 전집의 ‘강물’에서 건져 올린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2016년 3월 2일 :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
2016년 2월 22일 : 「자이르(El Zahir)」
2016년 2월 19일 :「또 다른 죽음(La otra muerte)」
2016년 2월 28일 : 「신학자들(Los teólogos)」
2016년 2월 16일 : 「신의 글(La escritura del dios)」
2013년 9월 9일 : 「독일 진혼곡(Deutsches réquiem)」
2013년 9월 8일 : 「아스테리온의 집(La casa de Asterión)」
2013년 9월 6일 : 「엠마 순스(Emma Zu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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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뜨리스 비떼브로가 죽었다. 「알렙」. 이건 그녀의 죽음에서 비롯된 이야기. 보르헤스에게 그 죽음은 중요하다. 찢어지는 아픔과 우주의 허황됨을 느꼈으니.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뒤이어지는 글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미망(未忘)의 통증을 우리는 단호히 무시하도록 하자. (다시 말해, 우리는 그걸 무시할 수 없다.) 그의 단편 「자이르」에서처럼 누군가의 죽음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상가(喪家)를 다녀온 보르헤스에게 은빛의 동전인 자이르가 굴러들어왔던 것을 상기해본다. 베아뜨리스가 죽고 없는 가라이 저택에 규칙적으로 들르던 그에게는 베아뜨리스의 사촌인 까를로스 아르헨티도 다네리와 가까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찾아왔다. 이 소설의 제목 <알렙>은 까를로스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까를로스. 출중한 용모에다 열정적이며, 말솜씨가 뛰어난 남자. 하지만 미천하며 무능하고, 맡고 있는 직책이란 한 기이한 도서관의 말단 정도다. 보르헤스는 그의 언변에 감탄하면서도 슬쩍 떠본다. 말 잘 하는 사람에게 갖게 되는 어떤 시기심이나 증오 같은 것이었으리라. (이 감정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짙어지다가 나중에는 보르헤스 자신이 툭 털어놓는다.) 왜 그런 말들을 작품으로 쓰지 않았는가? 까를로스는 이미 썼다고 하면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바로크, 데카당스 등이 언급된 자신의 서시를 자랑했다. 요컨대 그것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시인 마이클 드레이튼이 남긴, 무려 1만 5천행이나 되는 <폴리올비온(Polyolbion)>이라는 장시보다 더 지루하고, “<언어적 과장>이라는 부패한 원칙”(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알렙』, 219쪽)이 가득한, 운율적 결함이 있는 작품이었다. 도대체 까를로스는 무슨 작업을 하는 중일까? 그건 바로 “둥근 지구의 모든 것을 시로 표현”(보르헤스의 책, 215쪽)하는 것이다.
사실 까를로스가 자신의 시에 대해 자화자찬하는 구절에는 별로 집중할 만한 가치가 없다. 작품보다 그 해석이 더 뛰어난 격이며, 배보다 배꼽이 몇 곱절은 큰 졸렬한 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까를로스의 작품을 인용하기도 하고, 그의 자평을 기억하여 이렇게 종이에 옮겨 적었다. 단편의 분량을 허투루 늘리지 않는 그가, 물론 소설 속 ‘보르헤스’이긴 하지만, 까를로스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그 까닭을 ‘시기심’이라 생각했다. 여간 해서 그런 생각을 할 만한 꼬투리를 심어놓지 않는 대가이긴 해도. 그러나 심증은 의외로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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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까를로스는 2주 후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한 과자점에서 우유나 마시자고 약속을 했다. 까를로스는 자신의 장시 앞부분을 출간할 계획인데 보르헤스의 친척 중 명망 높은 한 인사(알바로 멜리안 라피누르)에게 추천사를 써주십사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뜻 동의한 보르헤스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고, 그 중 후자를 택했다. 알바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이즈음에 이르면 보르헤스는 까를로스를 일컬어 “그치”(보르헤스의 책, 222쪽)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몇 차례 전화가 울렸다. 짜증 섞인 독촉은 아닐까, 보르헤스는 날카로워진다.
그러던 10월 말이었다. 까를로스가 전화를 걸었는데, 매우 상기된 목소리였다. 제과점 주인(수니오와 숭그리)이 확장사업을 위해 자신의 집, 즉 가라이 저택을 철거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거의 위기에서 까를로스가 진정으로 걱정한 것은 자신의 장시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한, 집 지하실 귀퉁이에 있는 <알렙>을 잃어버리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그 <알렙>이라는 건 무엇일까?
“전혀 흐트러짐 없이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있는 곳이지.”(보르헤스의 책, 224쪽) 그리하여 “지상의 모든 장소들이 들어” 있으니, “모든 조명 기구들, 모든 등들, 모든 빛의 원천들”(보르헤스의 책, 225쪽) 역시 들어 있는 것.
까를로스, 이자가 미쳤구나. 하긴 비떼르보 가(家)의 병력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나의 사랑 베아뜨리스도 그러했고… 그래서 보르헤스는 <알렙>을 보러가겠다고 선언하고는 까를로스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수화기를 내려놨다. 그를 향한 증오심이 “까를로스는 미친 자다.”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통쾌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리라. 바삐 떠날 채비를 하는 보르헤스에게는 <알렙>이라는 걸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 따윈 전혀 없었다.
가라이 저택에 도착하니 까를로스는 술을 주면서 <알렙> 보는 법을 설명해줬다. “판석이 깔려 있는 바닥에 누워 눈을 그 문제의 층계 19번째 계단에 고정시키게.”(보르헤스의 책, 226쪽) 그렇게 된다면 “연금술사들과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의 소우주요, <작지만 알차다!>라는 우리에게 구체적이고 친숙한 금언”(보르헤스의 책, 같은 쪽)인 <알렙>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미쳤다. 자신은 지하실에서 나가겠다고 했으니, 혹시 나를 시기하여 이 지하실에 가둬 죽일 셈인가? 아니면 방금 마신 술에 독이라도 들어 있는 건 아닌가?
하지만 보르헤스는 “눈을 감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알렙>을 보았다.”(보르헤스의 책,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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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는 한탄했었다. 기억하는가? “우리는 눈을 두 개만 갖지 않았어도, 그리고 그 두 눈이 모두 정면을 향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시력은 둘째 치자. 왜 우리는 한정된 공간만 상으로 맺히는 구조에 갇힌 것일까?” 이건 필연적으로 <알렙>이라는 것을,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을 염두에 둔 한탄이었다. 보르헤스도 같은 함정에 빠졌다. “바로 여기서 작가로서의 나의 절망이 시작된다.”(보르헤스의 책, 같은 쪽)
상징이 등장한다. “모든 새들이기도 한 한 마리의 새”, “중심이 모든 곳에 있고, 원주는 그 어떤 곳에도 없는 어떤 구체”,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한 천사”(보르헤스의 책, 228~229쪽에 걸쳐) 보르헤스는 문학으로, 또한 그 허위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본 모든 것을 오염시켜버릴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자각한다. 동시적인 것을 보았는데, 연속적인 언어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보르헤스도 여러 것들을 언급했으니, 나도 하나를 보태어본다. “아뜨만은 / 움직이기도 움직이지 않기도 하며 / 멀리 있기도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며 /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도다.”(이재숙 번역, 『우파니샤드』1권, 60쪽) 직경 2~3cm 정도의 <알렙>에서 보르헤스는 하나의 사물이자 무한한 사물들을 봤다. 그리하여 그가 본 수많은 것들. 우주. 열거의 마지막에 이를수록 보르헤스는 절망하는 듯하다. 경외와 회한은 닿아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모든 지점들로부터 <알렙>을 보았고, 나는 <알렙> 속에 들어 있는 지구를, 다시 지구 속에 들어 있는 <알렙>과 <알렙> 속에 들어 있는 지구를 보았고, 나는 나의 얼굴과 내장들을 보았고, 나는 너의 얼굴을 보았고, 나는 현기증을 느꼈고, 그리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보르헤스의 책, 232쪽)
보르헤스는 까를로스가 대단하지 않았냐며 촐싹거리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집이 허물어지는 걸 기회 삼아 시골에 내려가서 살라고 조언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그렇게 된다면 까를로스도, <알렙>도, 어쩌면 베아뜨리스도 서서히 잊게 되겠지…
모든 것을 보았다. <불가해한 우주>라는 걸 알게 됐다. 그가 문득 공포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 세상 모든 것이 이제 낯설지 않으니, “나를 놀라게 할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르헤스의 책, 234쪽)이 인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다. 아, 망각은 축복이다!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의 서두에 새겨진 프랜시스 베이컨의 글귀. obtivion. 보르헤스는 모든 것을 보았으나, 하나씩 잊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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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라는 제목으로 덧붙여진 보르헤스의 글이 이어진다. 까를로스는 국가문학상을 받으며 보르헤스를 추월해버렸다. 보르헤스의 시기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마 그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는 <알렙>의 본질과 그 이름에 대해 오랜 시간을 고찰한 모양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가라이 가에 있던 <알렙>은 가짜였다고 생각한다.”(보르헤스의 책, 236쪽) 하지만 우리는 속지 말자! 보르헤스는 독자들의 이로를 언제나 이런 식으로 꼬아버린다. 속지 말자.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보르헤스는 버튼 대위(본명은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으로, 내가 알기에 그는 굉장한 천재였다.)가 남긴 한 원고가 브라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에 <알렙>과 유사한 여러 개의 물건들이 언급되어 있었다고 밝힌다. 속지 말자! 여러 개의 <알렙>이라니! 그렇다면 바로 내 방에도, 몇 평도 되지 않은 이 방에도 <알렙>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방의 구석구석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거울도 있고, 구체도 있다. 그보다는 책이 훨씬 많긴 하지만… 혹시 나는 그 물건들을 다른 각도에서 봐야 했던 것일까? 까를로스는 <알렙>을 보려면 시선의 각도가 중요하다고 했다.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주기도 했다. 혹시 나도?
아니, 그보다 내가 속지 말자고 단단히 벼렸던 이유는 보르헤스가 “우리들의 정신에는 망각으로 뚫려 있는 수많은 구멍들이 있다.”(보르헤스의 책, 239쪽)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알렙>을 봤을 수도 있다. 불가해의 우주를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내 그 엄청난 것에 대한 경외와 회한 속에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르헤스의 기억 속에서 그렇게 베아뜨리스는 변질되어 갔다. 아, 내가 잊은 것들과 <알렙>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