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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아지면 달라진다 - ‘1조 시간’을 가진 새로운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이충호 옮김 / 갤리온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2011.12.05
시인 고은氏의 독서습관처럼 나는 이 책 저 책을 거의 즉흥적으로 읽는다. 공부할 목적이라면 진득하게 읽기도 하나, 흥미가 빨리 식는 건지, 의지가 약한 건지, 아니면 체력이 좋지 않은 건지, 좌우지간에 여러 손을 빌려 조금씩 지식 동냥을 하는 식객이 딱 내 모습이다. 이런 방랑벽에도 좋은 점은 있다. 어려운 책을 나눠 읽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들어 하마터면 놓치고 지나갔을 숨은 쟁점들에 대해 재고해볼 수 있고, 읽고 있는 여러 책들 중 우연찮게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 있으면 비교해보면서 생각을 넓혀갈 수도 있다. 이것이 나의 변이지만, 사실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이는 법이라니, 속독으로 수많은 책을 섭렵하고 매주 자신의 독서계획을 자랑스럽게 게재하는 유능한 장서가들의 비기가 탐나기도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 까닭에 나에게는 “한 번에 읽었다.” 내지는 여러 날이 걸리더라도 그 책만 주구장창 읽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사랑받는 책들이 몇 권 있다. 그런 책들은 정말 벗처럼 가깝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겠으나, 운이 좋게도 얼마 전 나는 벗을 하나 더 만났다. 클레이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 원제는 <인지잉여(Cognitive Surplus)>인 책이다. 우리가 ‘시민적 책임’ 앞에 열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기에 느낀 것이 많았는지 리뷰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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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읽다보면 인간이 인간으로써의 보장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피눈물 나는 투쟁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후손인 나로서는 이미 보장된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니, 역사의 무지에서 비롯된 이런 오만과 방자를 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역사적 쟁취 뒤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일관되게 흘러왔는지를 되돌아보면 인간은 쟁취한 것에 대한 애착을 투쟁 이후에 너무 빨리 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짧게 줄이자면 “뭘 위해 투쟁했는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수많은 이견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막상 클레이가 하는 말은 다르다. 인간이 산업화와의 투쟁 중 쟁취한, 소위 ‘민주적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를 직시하자는 그의 제안에 우리가 동의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가’라는 자존적 시간을 TV 앞에서 보낸다고, 답하면서도 고개를 숙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여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아직도 부분적 패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막 도심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유재석氏가 촬영진과 함께 나타났다고 하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탄성과 함께 인산인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떻게든 그와 악수를 하거나, “멋있어요!”라고 소리를 치거나, 사진을 찍거나, 혹시나 몰라 싸인을 받을 준비를 할 것이다. 그는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유명인이다. 무엇이 그런 사랑을 만들었을까? 우리의 고독이다. TV는 우리에게 대인 접촉의 기회를, 여가를 활용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을 줄임과 동시에 그로부터 오는 고독을 “유명인이 나의 간접적 친구처럼 느껴지는” 심리로 아주 간단하게 바꿔버림으로써 TV스타를 양산한다. 이 구조는 눈에 보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느끼기에는 힘들다. 그들이 나의 친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매우 간단한 논리이다.
TV시청이 인간에게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바보상자”라 불렸던 적은 오래 전이고, 클레이 역시 그와 관련된 수많은 논문이 이미 발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클레이는 TV 앞에서 수동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적극적인 참여적 시청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추적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아주 간단했다. “TV시청을 수동적으로 하면 안 되겠어.”라고 다짐하는 사소한 선택이 수 백 만 명의 단위로 일어나면 거대한 선택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우리에게도 유명한 위키피디아(Wikipedia)와 최근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는 우샤히디(Ushahidi)가 있다. 두 사례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우리 자신의 역할이다. TV에 길들여진 우리의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문화에 참여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우샤히디를 예로 들며 클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뭔가 도움을 주길 원하며,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도우려고 한다.” 별 노력 없이 TV 앞에서 고독을 해소하려는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클레이는 진(zin:술) 열풍에 휩싸였던 18세기 초 영국 사람들과 비유했다. 우리가 뭔가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cognition)’라고 한다면 지금껏 우리는 자주 그것을 낭비해 인지의 ‘잉여(surplus)’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월드 오브 워크레프트, 흔히 ‘와우(WOW)’라 불리는 전 세계적인 온라인 게임에 매진하는 이들은 최소한 여러 퀘스트(임무)들을 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길드’라는 연대를 형성하고 뭔가를 하기 때문에 시트콤을 보기 위해 30~45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TV 앞에서 깔깔대는 사람들보다는 났다고 본다. TV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비위가 상할 것이다. WOW 중독자들의 ‘전설적인 경험담’은 소위 말하는 “잉여스러움”의 대명사로 우리 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시하자면, 굳은 믿음을 버려야 할 때가 많은 법이다.
중요한 것은 피드백이다. 일방적 소통의 TV는 우리에게 소비할 것을 권장하며, 우리는 그 권장을 관습처럼 이어오고 있다.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시청자 참여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프로그램들이 시청자 중심주의를 외친다.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그 과정에서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쉽게 생각해 그것이 양적으로 충분히 넉넉한가를 긍정적으로 평할 수는 없다. (게다가 시청자 참여의 수단이 TV인가, 아니면 TV가 다른 매체들, 가령 핸드폰이나 인터넷 등을 이용하는 것인가를 따져보면 참여가 TV 고유의 습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민이 참여하는 토론회에 반드시 ‘나’의 의견이 수렴되는 것은 아니고, 그 의견의 양 또한 많지 않다. 다만 일련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문자 투표는 대표성보다는 개별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방금 ‘양(量)’을 말했는데, 클레이는 그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척도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나라 버전의 제목이 “많아지면 달라진다(More is different).”이다. 이것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 이유는 소셜 네트워크의 광범위한 확산에 있다. 실로 (약간의 어폐는 있으나)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어떤 초국적 행동이 발생할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어느 날 A氏가 길을 가다가 B氏가 여러 명의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폰 동영상으로 찍었다. 그것을 유투브에 업로드했더니, 수 십 만의 누리꾼들이 봤다. 이 경우, B氏의 개인적 폭행 경험은 전 세계적으로 ‘폭력’에 대한 생각 재고하기라는 피드백을 낳는다. 우리는 이미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다. 아직은 수준이 미약하긴 하지만 이런 피드백은 “누군가의 피해가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일방적으로 소통되던 TV미디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끓어오르고,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상황이 보장된다. 따라서 문제는 전적으로 ‘양’에 있다. 양이 많은 피드백은 그 어떤 권력의 감시보다 훨씬 강력한 사회적 법망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인지잉여를 되도록 사회적 가치와 시민적 가치에 쓰는 편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바람직하다.
나는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시끄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사회적 행동에 대해, 지젝이 지적한 것과 같이 일관성이 없어 영속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여겼고, 한편으로는 타인의 불편을 유발하면서까지 집단의 이익을 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처사에 불만이었던 터라, 짙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사회가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되었고, 사회가 생각보다 덜 견고하다는 이해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시장통처럼 시끄러운 인터넷과 공론에서 훨씬 질적으로 가치 있는 타당한 의견이 등장하리라 기대하게 된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에서는 갑론을박들이 감정적으로 오고 가고, 그것이 지나친 악플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우리가 인터넷에 거는 기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 생활과 연계된 새로운 형태의 가치창출은 인터넷의 ‘주체적 참여’에서 시작된다.
지난달에 재독한 <자유론>에는 저자 J. S. 밀이 ‘출판의 자유’라는 주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것을 클레이가 말한 ‘대중출판’과 맞닿아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러 종류의 미술책을 읽어보면서 비전공자의 ‘미술 논하기’와 전공자의 것에서 오는 중량감의 차이를 현격하게 느꼈는데, 한편으로는 “어떻게 비전공자의 책이 미술 출판계에 등장해 공전의 히트를 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봤다. 이유는 별로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천편일률적 감상에서 벗어나 보다 친근하게, 독자들이 직접 생각해보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그런 책들에서 상대적으로 ‘주체화’를 더 많이 경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감의 양적 차이’에서 이미 분명하게 입증된다.
네이버에서 미술 블로그를 꾸려가던 무렵, 나의 이웃블로거였던 ‘레스까페(선동기氏)’분은 <처음 만나는 그림>이라는 책으로 최근 <슈퍼블로거>라는 공영방송에도 출연하신 적이 있는,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저자이다. 그는 미술전공자가 아니다. 대중과의 공감으로 성공한 경우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내가 배운 어려운 미술을 쉽게 풀어 해석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나에게 그의 글은 생경한 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시간 날 때마다 홀짝홀짝 차를 마시며 읽을 수 있는 무게의 미술책이 탄생했다. 이런 시도가 반가웠던 까닭은 기존 학계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그건 그들의 입장일 것이고)이 아니라, 미술을 보는 다양한 눈이 비로소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에게 그의 글이 온당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학설과 진위여부를 내세워 학자들이 “잘못된 감상”이라 부르는 부분들을 여럿 찾아낼 수 있겠으나, 그런 시도는 이제 거의 무의미한 상태이고, 나는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겉으로라도 다양성을 옹호하고, 그 다양성 속에 우리가 속해 있음을 알고 큰 안도감을 느낀다. 미술 감상에 일련의 정도(正道)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점, 선, 색의 원리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주체적 참여를 인지하고, 서슴없이 다양하고자 한다. 저마다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어려운 학문을 공부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워진 것은 대단히 기뻐할 만한 이 시대의 현상이다. 미술의 해석은 이미 충분히 해체되어 있다. 얼마 후면 해체된 해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대가 그들의 전성기를 누릴 것이고, 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미술을 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적어도 동시대의 미술을 대할 때에는 자유분방한 놀이로 발전하길 원한다. 물론 이런 자유로움은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를 감상할 때에는 적용되지 않겠으나.)
출판은 수입이 있으니 잠시 접어두고, 위키피디아와 우샤히디와 같은 비영리 웹사이트에 정보를 올리는 사람들의 행동은 우리의 낯익은 경제관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바로 “공짜인데도 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윤만이 반드시 주체적 참여를 낳진 않더라는 좋은 정보를 얻는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의 주체적 참여는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유하고 싶고, 관심 받고 싶고, 토론하고 싶은 것이야말로 주체적 ‘주체’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오래된 인간의 염원을 맘껏 펼치고 있는데, 이것이 불러온 여러 지역의 ‘봄(春)’은 이미 우리에게 소통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충분히 각인시켜줬다. ‘아랍의 봄’도 소셜 네트워크에 참여해 그들에게 정신적 원조, 즉 비물질적 도움을 준 사람들의 내재적 동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들의 민주화 열망은 이미 수많은, 민주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이룩한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했고, 네트워크에 천문학적인 수의 대군을 소집시켰다.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그 대군의 함성을 듣고 ‘아랍의 봄’ 사건에 쉽사리 개입해서 훼방을 놓지 못했다. (우리는 미국이 아랍의 자주적 민주화를 원치 않을 수밖에 없는 경제적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사익을 챙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대의라 느낀 것이다.)
클레이의 주장처럼, 많아지면 정말 달라진다. 우리는 이제 주체가 될 도구를 얻었고, 잘은 모르더라도 시위에 참여해 자신의 주장을 설명할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민주(民主)’라는 단어에서처럼 정말 국가의 주인이 되진 못하더라도 충분히 근거 있고 타당한 화를 낸다면 국가의 지도자를 바꿀 수 있는, 맹자의 역성혁명을 가능케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리더의 자격 역시 바뀌고 있다. 우리는 지금껏 대중이 무능력하다는 비판적 목소리를 들어야했지만 우리는 주체적 능력을 깨닫고 자신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한 여러 근거들을 수집하고, 다른 이들의 능력을 동원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곳에 직접 참여하여 사회적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깨닫고 있다. 때문에 정당에 대한 회의를 묵혀두지 않고 ‘제 3의 정당’이나, 정치계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회적 인물들을 대신 지목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을 표출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정치인들이나 정치전문가들의 의견처럼 놀라운 사실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처음 일어난 일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양적인 측면에서 몹시 고무되었을 뿐이다.
전문가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우리는 “나는 아마추어이다.”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아마추어’라는 단어에서 저급함은 사라졌다. 소수의 출판과 의견 제시만이 가능했고, 그것이 거의 주가 되었던 시대가 이제 종지부를 찍고, 질적으로 평준화된 시대가 서막을 올렸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서브(serve)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는 진정으로 글로벌 시대를 맞이했다. 다양한 언어를 제공하는 사이트들이 있거나, 혹은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무상으로 외국 사이트의 내용을 번역해 올림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주로 영어로 게재되고 있는 <해리포터>의 각종 팬픽션을 볼 수 있다. 그것들 중 상당수는 분명 고전적 관념에 따라 “저급한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그렇게 여기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 더 저급한 것은 우리가 평상시 갖는 수동적 반응이다. 클레이의 말마따나 저들은 다름 아닌 ‘생산’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Please read and review my story.” R&R 말이다. 이건 건설적이다. 이것을 저급하다 말하는 것은 ‘아카데믹’하다. 롤링은 <해리포터>로 돈을 벌었지만 R&R이라 말하는 팬픽션의 저자들은 그런 이득은 원치도 않는다.
클레이가 근거로 삼는 내재적 동기들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이 인간의 이기심을 버리게 한다. 흔히 말하는 경제적 이득을 위하는 욕망을 버리도록 하는 반(反)경제학적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공유지의 비극(p.158 참조)’을 인지하는데서 비롯된다. “사회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덜 이기적으로 절제한다.” 이 지점에서 협력이 추구된다. 클레이는 그 대표적인 예로 스케이트보드 열풍을 일으켰던 1970년대의 Z 보이즈들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상파 화가들을 든다. 이보다 더 현실적인 예는 프리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누리꾼들이다. 이들은 통합조정 가치를 이용해 훨씬 대규모의 작업을 해내기도 한다. 이것을 공공 부문의 작업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순수한 작업은 이미 공산주의 국가들이 해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이 실패한 이후, 우리는 복지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공공+민간’의 적절한 통합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고 있다. 거의 ‘절대자본주의’의 사회처럼 회자되는 이 사회에서도 “공공의 목적을 위해 무상으로 일한다.”는 것은 충분히 존재한다. 이것이 행동경제학이 밝혀낸 의외의 현상이기도 하다.
출판계에는 이것이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 ‘소리바다’ 사건을 두고 도덕적 타락이라고 설명하며 결국 저작권을 지닌 쪽이 승리하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었다. 이것의 전신 격으로 미국에는 ‘냅스터’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두고 클레이는 부정적이고 관습적인 설명을 거둔다. 우리는 “공유가 아주 간단하다면 기꺼이 공유하려고 한다.”고 말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오고 가는 리트윗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또 하나의, 가장 고무적이라 할 수 있는, 내재적 동기는 ‘긍정적 일탈(positive deviance)’로 소개된다. 한 파키스탄 청년이 페이스북을 이용해 시장의 쓰레기를 치우던 것이 사람들의 책임감을 고무시켜 훌륭한 사회적 업적을 유지해갔다는 이야기는 매우 훈훈하다. 이러한 동기에 가격을 책정하면 ‘이기적 동물’일 것 같은 우리에게서는 이상하게도 동기를 유발하는 가치가 감소한다.
소셜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거대한 실천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를 이룬다. 언어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영어의 리트윗이나 정보공유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고, 또한 적극적으로 외국인들과 교류하려는 이들이 많으므로 이러한 실천공동체는 초국가적인 문화를 낳는다. 이로써 우리는 TV를 볼 때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사용할 때에 공동체가 원하거나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훨씬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재빠른 인지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참여적 커뮤니티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인터넷에 기반을 둔 이러한 현상들을 “기껏해야 가상세계인데.”라며 비판하는 낡은 이론들이 있다. 그런 까닭에 클레이는 “페이스북은 페이스북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권위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만약 페이스북에 모여 논의하는 이들이 모두 아마추어라고 해도 클레이의 비유처럼 뇌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병원에 갈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는 달리 역설적이게도 뇌수술과 관련된 정보를 다루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쉬운 접근성과 친근함은 병원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심지어 그 커뮤니티에서는 (바쁜) 의사와는 도저히 나눌 수 없는 이야기도 오고 갈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은 이제 알뜰살뜰 저축하자는 고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지금의 소셜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용어로 변모했다. 그리고 태산이 되면 무언가가 바뀐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인과 경찰은 대중이 어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인다는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위협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최효종氏 사건을 보라.) 만약 그 ‘관심’이라는 것이 여러 공동체들, 가령 각종 노사들이나 일부 연합단체들의 사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대의나 인권과 관련된 문제라면 우리는 시민적 가치를 표방하며 거세게 반응해 결국 정부의 의지나 학계의 권위마저 굴복시킬 수 있다. 그것이 개선이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이러한 가치는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관심이란 어떤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의미 없는 논쟁을 지양하는 노력, 또한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또한 사회적 냉소를 제거해야 한다. 저 차가운 시선은 우리에게 안주할 것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매우 진부한 말이지만 이미 세상은 변했다. 나의 부모님 세대들은 70~80년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땐 그랬지.”라고 운을 다신다. 그런 식으로 나도 할 말은 있다. 486 컴퓨터를 쓰고, 집에서 인터넷을 쓰면 전화는 쓰지 못했던 시절, 2D 게임을 하려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던 시절이 나의 초등학생 때였다.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정도의 시간만 지났는데도 이미 예상보다 많은 양적, 그리고 질적 전환이 이뤄졌다. 우리는 여전히 갈필을 잡지 못할 것이다. 혼돈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혼돈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등장할 엄청난 사회적, 기술적, 혹은 문화적 혁명들이 예견될 때마다 심각한 공포를 느끼고 그것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클레이는 말한다. “상상하라.”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문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