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일 수요일
한때 문학을 꿈꿨던 나는 ‘죽지 않는 자’를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은인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을 은밀함으로 습작 중인 한 소설이, 그 생각을 풀어내 담아두는 나의 상자다. 인류에게 저주를 새길 만한 위대한 텍스트는 도무지 될 수 없기에, 그 판도라를 조금만 열고 닫아보자면, 소설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죽음을 말해야 하는 시대에 저는 돌아옵니다. 그러니 저는 언제나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바로 옆에 있을 수도 있고, 앞뒤로 걸쳐 입은 의복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거부할 순 있습니다. 매정하게 내치십시오. 주인에게 복종치 않은 종놈을 짚으로 만든 깔개로 돌돌 말아다 치듯이 혼쭐을 내도 좋습니다. 피어나는 먼지 속에서, 온 동네 구석구석을 찌르고 달아나는 비명 틈바구니에서, 한 눈 판 사이 사라지고 마는 성급한 노을의 한 모습처럼 없어지고 난 후일 테니.
그의 이름은, 아니 ‘그’는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최초의 인간이며, 죽지 못하는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비극의 인간이다. 육신이 썩고 장기가 문드러져 죽는다 해도, 단 하나의 망각 없이 새로운 육신의 조합에 옛 정신이 얹혀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수 세대에 걸쳐 존재하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토한다. 한없이 기쁜 얼굴로. 망각은 그에게 선물이었다.
내가, ‘그’의 창조자가 망각을 선물한 이유는, 백여 장을 써내려가는 내내 그가 단 한 번도 울거나 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내하기에는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그에게 “잊으라.”고 간단히 명령했다. 망각을 알게 된 그는 처음으로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사귀며 행복을 만끽한다. (그리고 나는 약간은 오만하게, “그는 인간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행복 속에 하루 종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육신과 정신이 온전하게 결합된 최초의 체험을 했다.”고 썼다.) 그러던 하루는 어쩌면 자신도 결국 죽는 은총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 잠든다.
그리고 나는 지난 주 보르헤스의 한 단편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편집 『알렙』의 첫머리에 놓인 이 소설은, 이런 사연 까닭에 되도록 먼 훗날 읽으려고 아껴두고 있었으나, 바닥나버린 인내의 손으로 저주의 상자를 활짝 열어버렸던 것이다. 몇 번 읽었는지, 이제 와서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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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왈, “하늘 아래에 새로운 것 없도다.”
플라톤이 “앎이란 전부 기억일 뿐”이라 생각했으므로,
솔로몬은 이렇게 회답했다. “색다른 것들은 모두 망각에서 났을 뿐이니라.”
Solomon saith: There is no new thing upon the earth.
So that as Plato had an imagination, that all knowledge was but remembrance;
so Solomon giveth his sentence, that all novelty is but obtivion.
- FRANCIS BACON, Essays, LVⅢ (필자 번역)
다섯 밤과 여섯 새벽을 거치며 거듭 읽은 보르헤스의 (그가 가장 공들인 작품 중 하나인)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의 서두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으며 기억을 잊기도 하므로, ‘새로운 것’이라는 건 애당초 없다는 말. 여기에는 꼬리가 물린 함정이 있다. obtivion. 망각이다. 인간은 한 번 잊으면 도대체 무엇을 잊은 것인지 모른다. 망각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사람들」에는 거대한 역사와 망각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말들>뿐이다.”(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알렙』, 35쪽)
3세기의 로마 군단장인 ‘마르코 플라미니오 루포’라 불린 남자가 있었다. 그가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발을 딛게 된 경위를 밝혀둬야겠다. “모래사장과 비슷한 빛깔을”(보르헤스, 황병하 옮김,『알렙』, 10쪽) 지닌 달 아래에서 마르코는 죽음의 순례자를 만나 신비한 도시의 정체를 듣는다. 고용한 용병들을 거느리고 길을 나섰지만, 한 줌의 주화들은 무수하고도 끔찍한 여정을 견딜 만한 힘을 그들에게 주지 못했다. 도망치거나 죽는 이들이 있었다. 마르코는 홀로 사막에 쓰러져 헛것을 보다 꿈을 꾼다.
깨어나 돌아본 모든 풍경은 그저 불경스러울 따름이었다. 마르코는 전설 속 혈거인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무심한 모래사장에 누워 달과 해가 나의 불행한 운명을 가지고 도박을 하도록”(보르헤스의 책, 15쪽) 체념한 때도 있었으나, 야만의 마을을 탈출하려고 한다. 계획은 성공했다.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유의 사막, 그 무시무시한 땅을 건넜다. 자신을 따라온, 말도 못 하고 구부정할 뿐인 한 혈거인은 차라리 훌륭한 위로가 됐다. 이름 모를 우물 아래로 계단이 있기에 따라 내려가니, 복잡한 미로가 나왔다. 마르코는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길을 찾아 지상으로 올라갔고, 마침내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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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묵시록>, 즉 아포킬륍시스(Apokalypsis)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성벽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도성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성 성벽의 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초석은 벽옥, 둘째는 청옥, 셋째는 옥수, 넷째는 취옥, ∘다섯째는 마노, 여섯째는 홍옥, 일곱째는 감람석, 여덟째는 녹주석, 아홉째는 황옥, 열째는 녹옥수, 열한째는 자옥,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열두 성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는데, 각 성문이 진주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요한묵시록, 21:18-2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本)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를 공부할 무렵에 처음으로 깊이 들여다본, 감히 표현해보건대 ‘이 말도 안 되는’ 환상적인 도시는 아직도 머릿속 선반에 진열되어 있다.
저건 (그리스도교 진영에서는 여전히 사도 요한일 것으로 믿고 있으나) 파트모스의 요한으로 추정되는 자가 묘사한 천상의 예루살렘이다. 초월의 도시다. 사람들은 그런 도시는 문자 그대로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르코도, 아니, 실은 보르헤스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를 앞에 두고 한때 로마의 군단을 이끈 그가 압도당한 이유는, 그리하여 “유례가 없는 어떤 피로감”(보르헤스의 책, 18쪽)을 느낀 이유는 지성의 공포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왜 머리로 무서워했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하나의 도서관이라고 잠깐 비유해 상상해보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야 하는 이 정신의 공간이, 하지만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처럼 어느 곳에도 다다르지 않고 거꾸로 된 층계와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낭하로 이뤄져 있다고 마음으로 그려보라. 형용할 길 없는 기괴함과 막막함과… 차라리 ‘불가해(不可解)’라 불러보자. 마르코는 그 앞에서 “너무도 기괴스러워 동떨어진 사막의 한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것이 존재하고 영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도록 만들고, 한편으로는 천체(天體)를 위태롭게 만든다.”(보르헤스의 책, 19쪽)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좇는 무한함이란 굉장함의 다름이 아니고, 그 굉장함이란 무의미의 다름이 아닌지도 모른다. 언젠가 보르헤스의 단편 「신의 글」의 복기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에게는 의미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 단편의 사제도 혀 끝 벼랑에서 떨어질 ‘신의 글’을 내뱉지 않고 목으로 꿀꺽 삼켜버린다. 죽어가는 인간으로 남는다. 마르코 역시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를 잊어버리기로 했고, 나중의 글에서 밝힌 바대로 결국 잊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막 빠져나온 그의 앞에는 예의 사막에서 졸졸 자신을 따라왔던 그 혈거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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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거인은 모래 위에 기호들을 썼다. 마르코는 해독하지 못했다. 문자란 한정된 모양의 반복 열거로 말을 드러내는 것. 하지만 혈거인의 기호에는 일련의 규칙이 없었다. 가련한 자 같으니라고.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오뒷세우스(율리시스)에, 혈거인을 오디세우스의 충직한 개 아르고스에 비유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혈거인에게 “너는 아르고스다.”라고 그리스어로 가르쳐 봐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우리들의 지각 작용은 같으나 아르고스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조합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다른 대상물들을 축조하지 않나 생각했다.”(보르헤스의 책, 22쪽)
그리하여 혈거인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뜨거운 사막에 한 줄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처음으로 내리는 비를 맞던 아르고스는 하늘을 향한 채 울부짖었다. 어쩌면 그에게 오뒷세우스란, 즉 신화 속 아르고스가 오뒷세우스를 20년이 넘도록 기다렸던 것처럼 (그리고 아르고스는 오뒷세우스의 발치에서 죽는다) 그 주인이란, 바로 비가 아니었을까. 육신을 깨우는 비가 아르고스의 입을 열었다.
Argos, perro de Ulises. Este perro tirado en el estiércol. “율리시스의 수캐, 아르고스. 녀석은 똥 무더기에 엎드려 있소.”(필자 번역, The Penguin Press에서 출간했으며, Andrew Hurley가 영어로 번역한 『Collected Ficctiones of Jorge Luis Borges』의 영문 참조.) 마르코는 <오뒷세이아>에 대해 아느냐고 그리스어로 거듭 추궁한다. 그러자 아르고스의 정체가 밝혀진다. Ya habrán pasado mil cien años desde que la inventé. “내 그걸 만든 지도 어느덧 천백 년이 흘렀구려.”(필자 번역) 그는 우리가 대개 ‘장님’이라고 알고 있는, 그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어 전설의 작가로 회자하곤 하는 호메로스였던 것이다.
마르코는 모든 것을 알게 됐다. <죽지 않는 사람들>이란 바로 그 혈거인들이었으며, 그가 사막에서 본 모래 섞인 개천은 그토록 찾은 <불사의 강>, 그리고 마르코가 본 도시는 호메로스가 혈거인들을 부추겨 지은 패러디적 성격의 “모든 외재적 노고라는 게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표적물”(보르헤스의 책, 25쪽)이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패러디적 성격’이라 표현한 이유는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쓰고 난 후 그 패러디인 개구리와 생쥐의 전쟁, 즉 바트라코뮈오마키아(Batrachomyomachia)를 썼다는 전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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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가 혈거인들에게 도시를 짓게 했다는 구절까지는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아르고스가 호메로스임이 드러난 순간부터 전율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정신의 무릎을 치며 침묵 속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난리의 새벽이었다. 나는 아르고스가 언젠가 말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으리라. 도대체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보르헤스는 이제부터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르고스가 이 단편의 열쇠임을 짐짓 모르는 척 하며 읽어 내려갔지만, 설마 호메로스일 줄이야!
하지만 그 날 내가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는지, 또한 마음속으로 광란을 춤을 추며 얼마나 감탄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맺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무려 나흘이나 헤맸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튿날, 나는 호메로스와 작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사막을 떠난 마르코의 뒷모습까지 확인했다. 일단 그걸 복기하며 나아가본다.
마르코는 아르고스, 아니, 호메로스에게 혈거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배운다. 그녀/그들은 <죽지 않는 자>이므로, 우선 불사성(不死性)을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을 제외하면 피조물의 대부분은 죽음을 모르니, 불사의 존재다. 말장난 같으나, 이는 인간이 죽음에 묶여 있음을 드러내는 역설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가? 보르헤스는 마르코의 입을 빌려 크게 두 개의 죽음을 제시한다. 하나는 아브라함 계통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죽음이다. 현세의 숭배 양식을 계단 삼은, 하늘로 난 길이다. 이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상벌을 규정해놓고 현세를 정의한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다른 단편에서도 종종 관심을 보였던 것처럼 불교와 힌두교의 ‘수레바퀴’를 언급하며 그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말한다. “그 어떤 삶도 전체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지 못한다.”(보르헤스의 책, 26~27쪽) 회귀(回歸). 이것이 혈거인들이 지닌 하나의 교의였던 것이다. 그녀/그들이 터득한 건 냉소다.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과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 그 중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선의 추종자는 곧 악의 추종자. 짝수는 홀수. 명석함은 우둔함으로. 대응의 깨달음이다. 서두에 새겨져 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글귀는 이 자리에 들어앉는다. 나는 너무 단순한 이분법은 아닌가, 의심했다. 세상은 과연 메트로놈 같을까? 짝지어진 가치들로 점철되어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무서운 생각이 아닐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의미가 아닌가? 1에서 1을 빼버리니, 손에 쥐어진 것은 0일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텅 빈 공간. “이런 식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들의 모든 행동들은 정당성을 가지게 되지만 동시에 무심한 어떤 것들로 변하게 된다. 거기에는 도덕적이거나 지적인 우월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보르헤스의 책, 28쪽)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죽음 이후를 상상하며 느껴본 칠흑 같은 공포가 다시 찾아왔다. 어쩌면 단편 「신의 글」에서도 느껴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소설의 사제는 말을 내뱉지 않고 인간으로 남았다. 나는 안도했다. 하지만 <죽지 않는 자들>, 그것은 …… 왜 아르고스는, 왜 호메로스는 사막을 적시는 비를 온몸으로 반기며 울었던 것일까? 어째서 그는 완벽한 평정을 비를 맞으며 부쉈던 것일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애상적이고, 심각하고, 제례적인 것”(보르헤스의 책, 30쪽)을 좇는 자다. 이것이 우리의 의미다. 그러나 마르코는 호메로스와 작별하면서 단 하나의 인사도 없었다. 했더라도 호메로스는 받아주지 않았으리라. 완벽한 평정, 그 영(零)의 세계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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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까지 나는 텅 빈 공간과 무의미를 생각했다. 곧 지워버릴 글들을 쓰고 곧 지워버렸다. 내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일 수도 있기에, 황급히 이 세상에서 떠나보냈다. 그러나 생각은 남는다. 공포의 잔영은 낮은 구름의 그림자처럼 거대하다. 나는 있는 힘껏 그림자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의미를 좇는 인간으로 남고자, 마르코처럼 사막에서 걸어 나오려고 했다. 그건 물론 물리적으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죽는 자>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믿고 있으며, 세상 대부분이 동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지 않는 자>에 대해 알게 됐으니,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내 등에 이상한 무언가가 붙어있는 불쾌가 느껴졌다. 이따금 공포 영화를 보면, 저승으로 들어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저승에 뛰어든 주인공(주로 퇴마사)이 실수로 이승이 아닌 존재를 끌고 나오는 허무맹랑한 레퍼토리가 있다. 그 날 밤, 돌연 그걸 떠올리고는 몸을 움츠렸다.
낮이 되고 빛의 구원이 충만할 즈음, 나는 나머지 이야기를 읽었다. 마르코는 수많은 인생을 산다. 무인(武人)의 삶을 살았고, 신드바드의 이야기를 필사하기도 했으며, 중앙아시아 땅을 거닐기도 했다. 점성학에 정통한 사람이기도 했고, (이 부분은 의미하는 바가 큰데) <일리아스>의 구독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21년 10월 4일 에리트레아의 한 항구에 발을 디딜 때, 이름이 ‘조셉 카르타필루스’였다. 보르헤스가 소설 속 소설을 가장하여 원고 그대로 실었다던 마르코의 기상천외한 이야기, 그 이야기의 저자 카르타필루스 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호메로스는 마르코였으며, 마르코는 카르타필루스였다. 무인의 삶, 한편으로는 <일리아스>와 떨어질 수 없었던 삶이 하나로 뭉쳐진다. 카르타필루스는 항구에서 바로 그 오랜 옛날을 회고한다. “홍해를 마주하고 선 내게 아주 오래된 또 다른 옛 아침들이 떠올랐다. 내가 로마의 군단장이었고, 열병과 마술과 나태가 군인들을 삼켜버렸던 그 시절을 말이다.”(보르헤스의 책, 32쪽)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볼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즉 카르타필루스가 적은 원고에 적혀 있는 이야기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보르헤스는 원고 그대로 옮겼다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고 복기해보면 한 가지 의심쩍은 게 있다. 그는 로마의 군단장이었던 마르코처럼 몇 생애에 걸쳐서는 무인의 삶을 살았고, 한편으로는 <일리아스>와 아주 가까운 인생도 여러 번 살았다. 그 책을 구독했었고, 또 다른 삶에서는 작품의 기원을 두고 논쟁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묻게 된다. 저 둘은 한 명이 아닌가? 왜 카르타필루스의 기억 속에는 서로 혼재된 것 같은 두 가지의 삶이, 마치 혈거인들이 깨달은 ‘대응’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어 있는 것인가?
카르타필루스는 자신의 진술에 거짓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원고의 내용을 진실이라 주장하다. 바로 앞에서 우리가 가졌던 의심이 실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일단 카르타필루스는 마르코 플라미니오 루포였다. 그건 소설의 흐름 상 얼마든 추적할 수 있다. 전개 자체에서 겉으로 드러난 바다. 하지만 여기서 카르타필루스는 자신이 호메로스였음을 알게 된다. 진실을 좇던 그는 이런 생각에 이르자 의미심장한 한 문장을 쓴다.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말들>뿐이다.”(보르헤스의 책,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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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아 있는 말들’이란 대체 무엇일까? 보르헤스는 가짜 후기를 소설 뒤에 덧붙이는 특유의 기법으로 그 말들을 “제자리를 잃고 불구가 된 말들, 다른 사람들의 말들”(보르헤스의 책, 37쪽)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이 저자에게 남겨준 보잘 것 없는 적선”(보르헤스의 책, 같은 쪽)이다. 다시 말해 그 ‘말들’이란 호메로스와 마르코와 조셉 카르타필루스, 그리고 그 사이의 또 다른 삶을 지칭하는 타인의 말이었다. 즉, 그 사람들의 ‘이름’이다. 카르타필루스에게는 수많은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죽지 않는 자>인 그를 대변해줄 수가 없었다. 추측컨대, 그는 끊임없는 삶을 살았으므로 1929년 10월에 (혹은 공주가 한 여행객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때가 10월이니, 어쩌면 그보다 앞서 죽었을 수도 있겠는데) 죽은 후로도 또 다른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방법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렇게 이어지는 또 다른 그는 앞선 시대의 사람들, 예컨대 호메로스와 마르코와 카르타필루스의 삶에 대해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며, 군인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일리아스>와 관련된 학자의 삶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엇도 새로운 것이 없는, 보르헤스가 말했던 그 ‘수레바퀴’가 돌고 돈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우리는 이 단편에 담긴 최대의 미스터리 하나를 풀 수 있다. 마르코가 호메로스를 만났다는 그 미스터리를. 둘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인지 몰랐다. 심지어 마르코는 호메로스를 두고 ‘아르고스’라 불렀다. 소설 속 깨달음은 카르타필루스가 먼 훗날 알게 된 것이며, 따라서 회귀의 깨달음은 이 소설의 연대 상 가장 나중에 일어난 것이다. 보르헤스가 담은 원고가 그 깨달음의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르타필루스가 자신의 글에서 “나는 다시 모든 인간과 똑같은 존재가 되었다.”(보르헤스의 책, 33쪽)라든지, “간단히 말해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보르헤스의 책, 35~36쪽)라고 말한 까닭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읽을 독자들에게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다.”라는 하나의 거대한 일체성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신과 나를 모두 합쳐 0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카르타필루스의 이야기를 믿는 건 어렵다. 나는 믿지 않는다. 이 소설이 가짜가 아니라고 해도. 불가능한 믿음이다. 삶의 의미를 판돈으로 걸어야 하는 도박에 나를 맡길 정도로, 나는 무모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다. 하지만 마르코가 찾았던 그 기괴한,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의 혼돈, 이빨과 내장들과 머리통이 서로를 증오하면서 우글거리고 뒤엉켜 (아마) 서로가 비슷한 형상”(보르헤스의 책, 19쪽)의 도시가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평정의 상태가 도래한다면? 그런 순간이 오게 된다면 어떨까?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인간 개인에게는 이런 두려움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내가 두려움을 갖게 된 건, 세상을 나에게 기울여야만 의미의 물이 고여 내 입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리하여 나는 0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0을 잊을 수는 없다. 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0은 존재한다. 모든 망각되는 것들 중 유일하게.
참고 : 보르헤스는 마르코의 이야기가 조셉 카르타필루스의 영어로 된 원고에 실려 있다고 설정했다. 따라서 황병하는 이 설정에 따라 「죽지 않는 사람들」에 나온 호메로스는 ‘호머(Homer)’로, 일리아스는 ‘일리어드(Iliad)’로, 그리고 오뒷세이아는 ‘오디세이(Odyssey)’로 표기한 것 같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스페인어 원문을 보면 호메로스는 Homero, 일리아스는 La Ilíada, 오뒷세우스는 La Odisea로 표기되어 있다. 영어권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원전 역자들의 영향으로 위와 같은 단어들을 그리스어 발음을 따라 읽는다. 나는 그에 준하고자 위의 글에서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라고 표기했다. y 발음을 'ㅟ'가 아닌 'ㅣ'로 표기하는 선례들이 많으나, 나는 대학 시절 장영란 교수에게 배운 표기를 따라 전자의 'ㅟ'로 표기한다. 물론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 용례에는 'ㅣ'로 표기하라고 되어 있다. (표기법에 무수한 오류가 있음을 굳이 지적하진 않겠다. 한 번 굳어진 표기법은 국민 정서 상 거의 바뀌지 않는다. 또한 표기법 수정이란 수백 억 원은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재정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