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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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우리 가족의 한 해는 동생의 생일이 지나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분위기다.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더니 책 제목 두 개를 적어줬다. 한 권은 소설이었다. 코니 윌리스의 SF소설인 『화재감시원』. 평이 좋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다른 한 권은 코델리아 파인의 『젠더, 만들어진 성』이었다. ‘젠더와 성이라고?’ 둘이 다르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그런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트위터에서 성차별/성폭력 문제와 논쟁을 리트윗하고, 여성신문과 같은 언론의 기사를 읽는다. 페미니즘 양서들도 모으고 있다. 서재에는 스무 권의 관련 책이 있고, 그 중 네 권은 픽션이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올 4월부터의 일이다.


    동생은 트위터에서 뭔가 흐름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다. SNS를 하지 않던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몇 차례의 권유를 받아 트위터에 좀 익숙해지고 나서야 그 변화가 무엇인지 알았다. 뜨거운 말들이 오고 갔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이른바 ‘인증샷’들이 즐비했다. 공인과 유명 인사들, 혹은 기업과 단체들의 수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뜨거운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논리적이고 강인했다. 그동안의 편협한 독서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분위기와 흐름. 화들짝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갇혀 있던 곳에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감옥의 이름은 ‘남성판타지’였다. 숟가락으로 탈출 통로를 만드는 영화와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오빠는 어딜 가든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하는 남자가 됐으면 좋겠어.” 그 말의 뜻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페밍아웃’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나에게는 없다. 배가 나아가던 방향만 바꿨을 뿐이다. 앞으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될는지는 하나도 모른다. 언젠가 말했지만 그야말로 헐벗고 초라해진 기분이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을 읽으며 “나를 좀 보듬어주세요.”라고 조를 마음가짐은 아니다. 마음의 알맹이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걸 세심하게 가꿔갈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정원’을 가꾸는 일에는 늘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나는 질문하는 것에 익숙했다. 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대방 역시 나와 비슷한 질문 속에서 명확치 않은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명쾌함은 나의 미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단호한, 열렬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게 하는’ 선언은 늘 버거웠다. 살짝 발을 뒤로 빼고 되도록 가운데에 위치하려는 습관도 있었다. 어쩌다가 모호함의 탐구자가 되었는지를 소급해보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세상 앞에서 질문 던지는 놀이를 어렸을 적부터 즐겨했기에. 하지만 지금은 끓어오르고, 편을 드는 노력을 한다. 이것이 어떤 변화였는지를 설명하고 싶지만 결코 쉽진 않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원제 : We Should All Be Feminists)』는 선언이다. 제목부터가 당위를 주장한다. 4월부터 시작한 트위터, 그리고 5월의 비극. 나는 행동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생각의 이동’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큰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봐도 놀랍다. 아니, 씁쓸하기까지 하다. 자신들을 싸잡아 일반화한다며 각종 학문을 근거로 들며 남성을 옹호하는 남성들의 주장을, 남자인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성판타지 속의 시시콜콜한 농담들이 트위터의 뜨거운 물결에 찬물을 씌우려 들어왔다가 된통 ‘깨지고’ 나가는 광경도 매일 수 십 차례 봤다. 하루는 동생에게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우리나라 남자들 수준이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어.” 아직도 저 밑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은 나의 이런 발언조차 ‘일반화’라며 비난하면서 나를 자신의 편에서 빼버릴 것이다. 물론 개의치 않는다. 내가 그쪽 편이 아니니까. 어제는 부산지하철의 ‘여성배려칸’ 시범도입을 두고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자꾸 배려해주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플랜카드를 들고 서 있는 사진을 봤다. 뭘 그리도 많이 움켜쥐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동생과 종종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오빠가 된 것에 동생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동생이 밤늦게 들어올 때면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가야 마음이 편한 세상이다. 국가기관과 수사기관은 무엇이 ‘여성혐오’인지 전혀 모르는 (아마 판례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드는데) 세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존엄성 개념은 적극적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 때문에 기본역량 개념과도 가깝다. 기본역량은 계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마사 누스바움, 한상연 옮김,『역량의 창조』, 47쪽)라고 했다. 이것은 희망이다. 다시 한 번 치마만다의 책 제목을 생각해본다. 나는 당위를 담은 주장에서 “모두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캐내어봤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사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 결국 공감의 능력이 되는 그 노력이 하찮게 취급된다. 교육부를 발칵 뒤집어놓은 파렴치한 발언에 우리는 더 크게 분노하고 놀라야 했다. 치마만다는 말한다. “우리는 진화했습니다. 그러나 젠더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아직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습니다.”(치마만다의 책, 21쪽) 사실 젠더뿐만 아니라 인권과 동물윤리에 이르는 우리 사회의 초보적 인식에 대해 무수히 말을 쏟아내고 싶다. (예컨대 이달 7일에 정부는 반려동물의 온라인 판매를 허용하는 ‘반려동물 산업 육성’책을 내놓았다가 동물보호단체들의 반발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과학기술에 관해서는 가장 빠른 변화를 이뤄내고 있는 우리는 “현 상태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늘 불편한 일”(치마만다의 책, 43쪽)이라는 핑계만 대며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태도로 일관해오고 있다.


    문제는 그 ‘좋은 것’이라는 뭉뚱그린 표현, 그리고 그 표현이 포함하고 있는 영역이 죄다 남성판타지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거다. 오늘 트위터는 또 폭발했다. 한 외국 남성이 “한국 여자들은 예쁘니까 외모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가 폭격을 맞았다. 문제가 터진다. 논쟁이 시작된다. 자제가 촉구된다. 결국 그렇게 진화되면 지는 쪽은 늘 약자다. 하지만 5월의 비극 이후 트위터에서 여성들은 물러나지 않는다. 나 역시 참하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여성상을 흠모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판타지였다. 치마만다는 분노의 긍정을 본다. 중립과 침묵은 기득을 지켜준다. 나는 적극적으로 편을 들 준비를 한다. 한숨을 쉬며 바라보게 되는 대상은, 4월부터 지금까지의 경험만 놓고 보자면 십중팔구도 아닌 ‘십중십’ 남자였다.


    젠더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며, 또한 대단히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젠더, 그건 족쇄다. 치마만다는 여성성이 강요되는 상황만 말하지 않는다. ‘단단한 남자’가 되어야만 하는 남성성 강요의 문화도 함께 말한다. 물론 그는 여자가 더 많이 타협해야 하는 분위기를 중점으로 말하지만, 우리는 그 지점에서 여성성, 혹은 남성성의 강요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성소수자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난 달 11일에 서울광장에서는 이른바 ‘퀴퍼(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다. 트위터에서는 ‘#문명인이됩시다’라는 태그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축제도 잘 끝났다. 각국 대사들이 와서 참가자와 시민들에게 좋은 말도 들려줬다. 그런데 길 반대편에서는 나라가 멸망할 징조라며 한복 입고 곡성(哭聲)하는 이들이 있었다.


    ‘젠더’라는 족쇄가 풀린다면 치마만다는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한 세상”(치마만다의 책, 28쪽)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공정함은 행복의 조건일 것이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질 수 있는 분위기가 공정함의 조건일 것이다. 사회는 억압받는 자들에게 용기를 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대체 그게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주 쉽게 눌러버리며, 위축된 이들이 발언을 시작하면 중립을 지키는 자세로 침묵하라 타이른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기 전, 나는 그 침묵의 삶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나만 조용히 하면 친척들 와서도 행복하고 잘 웃고 가잖아.” 어머니는 단속받는 여자였다. 아무도 단속하지 않아도 스스로 단속하게 되는 사회. 그 긴 세월을 감옥 속에서 사신 것이었다. 교사이셨던 어머니는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어딜 가든 나는 그걸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스스로를 ‘나’라고 부를 수 없는 삶을 사셨다. 여자가 더 많이 타협해야 한다. 새벽에 방에 들어오신 어머니가 이젠 잠이 올 것 같다며 지쳐 안방으로 가실 때까지 나는 왜 남자가 여자의 고통에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알았다기보다는 여태 몰랐던 나 자신이 무척 수치스러워졌다고 해야 적당하겠다.


    “우리 사회는 일정 연령에 다다른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심각한 개인적 실패로 여기도록 가르칩니다.”(치마만다의 책, 34쪽) 어머니는 그런 ‘실패’를 두려워하셨고, 대신 참는 삶을 사셨다. 지금은 그 후유증을 앓고 계신다. 그 새벽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된다. 잘 잤냐며 인사를 하고 동생을 보다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때가 있다. 되물림 되면 안 되는 어떤 족쇄 속에서 동생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꿈이 있고, 전문 기술도 있으며, 깨어 있는 20대의 한 여성이 위축되도록 단속 받는 사회의 거대한 힘에 언젠가 지쳐 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렵다. 계속 싸워나가야만 겨우겨우 행복해지는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페미니즘은 그래서 연대와 공감을 강조한다. 정희진도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그걸 명확히 한다. 나는 늘 각오해야 한다. 동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연대의 대상이 되어줘야 한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나이가 어려서, 경험이 적어서, 체격이 크지 않아서 내가 받을 숱한 차별과 역경은 비루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남자’니까. ‘나’를 해체시키고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려는 일체의 압박에 어떻게든 저항하겠지만, 동생은 거기에다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압박까지 이겨내야 한다. 치마만다가 ‘파란 마스카라’로 기억하는 친웨 아줌마 이야기는 한 여성이 그 압박에 굴하고 “무한한 아량의 바다”(치마만다의 책, 60쪽)와 같은 사람이 됐다는 슬픈 이야기다. 친웨 아줌마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치마만다는 “세상의 인정을 구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억지로 변형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치마만다의 책, 72쪽)고 다짐했다. 주체로 살고 싶다는 뜻이다.


    세상의 수많은 여성들이 주체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아마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만 해도 그랬다. 5월의 비극으로 우리는 여자의 속사정을 들어볼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를 맞이했었다. 아니, 그런 일이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지만. 나는 많은 남자들이 귀를 열고 그 ‘단단함’의 이미지를 스스로 깬 다음 공감할 준비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하다. 젠더 문제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불편하다.”이다. 배운 사람 티를 내는 이들은 진화생물학을 근거로 반박하고, 계급 문제를 들먹이며 남자들도 힘들다고 호소(트위터의 표현대로라면 ‘징징거리는’)하기도 하며, 여성종속은 오래된 문화라며 반대방향으로 튕겨져 나가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인간을 믿는 편이다.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하고 싶다. 아마 치마만다도 그런 마음으로 책을 썼을 것이다. 아니, 내가 잠시 기만했다. 치마만다와 같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이 인간을 긍정하게 된 것이라 해야 옳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되찾아야 합니다.”(치마만다의 책, 51쪽) 단어는 ‘페미니스트’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희망의 단어다. 우리 사회는 이 단어를 ‘골수’, ‘담배’, ‘꼴통’, ‘XX년’과 같은 미개하기 그지없는 표현으로 매도하고 왜곡해왔다. 대상이 여성이니 오죽 신났을까. 그런데 치마만다는 그 단어를 되찾자고 한다. 원래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어딘가 그 단어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이 이 낡은 단어의 겉면을 씻어줬고, 동생은 그걸 들여다봐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그 단어는 읽거나 보는 게 아니라, 듣고 느끼는 것이었다. 신비하리만치 슬펐다. 내가 그걸 모두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남자니까. 하지만 남자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진심을 다해 끝까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52쪽) 부디 많은 이들이 이 말에서 희망을 찾았으면 한다. 번역의 수고를 해준 김명남은 “21세기 현재 우리가 꼭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다룬”(치마만다의 책, 91쪽) 책이라 소개했다. 나는 ‘주로 잡담만 한다’는 그의 트위터에서 (물론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지만) “생각이 바뀐다는 것, 바뀔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이 희망이 없으면 우리는 치마만다의 책 제목 중 ‘should’에 대해 전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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