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탄생
래리 쉬너 지음, 김정란 옮김 / 들녘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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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7년 2월 11일



   작년 10월 13일었다.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한 통의 문서를 언론에 공개했다. 미국의 밥 딜런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이 담긴 네 줄짜리 짤막한 문서였다. 선정 이유는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들을 만들어냈기 때문(for having created new poetic expressions within the great American song tradition)이었다. 전 세계의 예술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거칠게 반으로 나누자면, 한쪽은 환호하느라 뒤집어졌고, 다른 한쪽은 문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밥 딜런’이라는 이름이 귓가와 입가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은 그간 정통문학 위주로 수상자를 선정해오던 노벨문학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다. “무엇이 문학인가?” 더 나아가 “무엇이 예술인가?”를 물어보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문학과 예술.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판단의 기준을 세워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딱딱한 고체 같은 개념. 전문적이거나 일상적이거나. 누군가가 어느 쪽을 지지하든 이런 글로 관여할 생각은 (능력도 되지 않을뿐더러) 없다. 정통문학도 읽고, 노랫말 좋은 명곡도 듣는다. 다만 엄격한 잣대에 손사래 치는 본능은 있어서 “밥. 축하해. 그러나 당신도 알지? 당신에게 이 상은 어울리지 않아.”(성기완, <중앙일보>, 2016년 10월 14일 자 칼럼)라고 말한 성기완 교수의 말에 공감하는 정도다.


    책을 곁에 끼고 사는, 또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난해 ‘밥 딜런’은 큰 의미가 있는 이름이자 단어였다. 우리를 분노케 한 상상초월의 사건들이 없었더라면 밥 딜런, 노벨문학상, 예술 등의 단어는 연말까지 뉴스 보도와 언론의 지면을 빌렸을 것이고, 생산적인 논란은 분명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개념을 재고해본다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고리타분해보일지 몰라도. 진지한 논의들은 수면으로 채 떠오르지도 못했다. 비선실세, 문단 내 성폭력,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시쳇말 표현대로라면 ‘다크(dark)한 암흑’들만이 우리를 반응케 했다. 잡아야 기회인데, 그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예술은 과연 무엇인가?”로 이번 수상을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의 ‘의미’에 방점을 찍는 사람들이다. 밥 딜런의 음악 활동과 노랫말이 우리에게 던져준 시대의 메시지들이 지금 이때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 ‘의미파(派)’의 주장이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등록되어 있는 ‘진행 중인 군사분쟁(Ongoing armed conflicts)'의 수만 해도 50여 개가 넘는다. (이 중 거의 절반에 이르는 수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하고 있다.) 2015년에 『오늘의 세계 분쟁』이라는 책을 낸 김재명 박사는 “영구 평화는 무덤에서나 가능하다.”는 칸트의 말을 빌렸다. 이런 의미의 관점에서 본다면 밥 딜런보다 한 해 앞선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벨재단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기린 그의 다성(多聲)적 작품들”(for her polyphonic writings, a monument to suffering and courage in our time)을 높이 샀다고 했다.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여성의 의미, 그리고 체르노빌 사건으로 끔찍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베틀라나의 책에 실려 있다. 그는 고국 벨로루시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작가다.


    재미있는 건, 스베틀라나의 문학사적 위치도 밥 딜런의 경우처럼 특이하다는 점이다. 물론 밥 딜런과 같이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수상자들 중에는 최초로 저널리즘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었다. 기자 출신이고, 취재를 중심으로 작품을 쓰기 때문에 정통문학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밥 딜런은 이른바 ‘갇힌’ 문학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게 한 인물들. 그리고 우리는 개념도 움직이는 실체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환기시키는 사건은 그래서 중요하다.


    방금 말한 ‘갇힌’ 문학을 정통적인 의미가 강조되는 개념이라고 하고 ‘대문자 문학’이라고 불러본다. 우리말에는 대문자가 없으니 여기서는 [문학]이라고 표기하겠다. 그런데 이건 비단 문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양미술사』의 저자 곰브리치도 ‘대문자 미술’인 Art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서론에는 가장 하고 싶은 말이나 중요한 말을 적어놓는 것이 관례인데,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서문은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서양미술사』, 15쪽)라는 단언으로 시작한다. 개념보다는 개별 작품들의 집산으로 ‘미술’이라는 현상을 파악하려는 것이 곰브리치의 의도다. 2001년 작고한 곰브리치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그래서 저 문학의 사건을 봤다면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문학]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첨언해줬을지도 모르겠다.


    곰브리치가 저런 단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며, 딱 하나밖에 없다. Art가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다. 지난 달 타계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개념을 여기로 빌려오자면 저 개념은 ‘액체의 속성(liquid)’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Art는 아주 확고하게 자리 잡은 매력적인 개념 중 하나다. “저 작품 참 예술적이야!”라고 우리가 감탄할 때,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공유하고 있는 은연한 ‘뭔가’가 있다. 아마 그 ‘예술적’이라는 말의 의미 속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순수. 천재. 우월. 엘리트. 고귀. 최고. 미적(美的). 숭고. 경이. 재밌게도 이런 의미망은 움베르코 에코가 『추의 역사』에서 추의 의미와 대비해 나열했던 ‘아름다움’과 비슷하게 쓰이는 스물여섯 개의 유의어들과 포개어진다. ‘예술’은 도덕적 선(善)과도 종종 닿는 것이다.


    이건 예술이 역사에 걸쳐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와 관련이 있다. 역사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지금 우리가 ‘예술’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묶여 있는지, 그래서 그 오랜 개념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예술의 시작점으로 가야 하는데, 그 지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학자들은, 특히 “예술은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고대 그리스를 서장의 주제로 잡는다. 래리 쉬너(Larry Shiner)의 『예술의 탄생』도 그런 책 중 하나. 주로 미술을 공부했던 필자가 읽은 ‘예술의 범주’를 다룬 책 중에서는 가장 추천할 만한 안내서다. (다만 역자가 원제 『The Invention of the Art』를 ‘발명’이 아닌 ‘탄생’으로 번역한 점은 다소 의아했다. ‘탄생’에도 조직 따위가 새로 생긴다는 부차 의미가 있긴 하지만 뭔가 만들어냈다고 할 때는 ‘발명’이 더 친숙하고 으레 쓰는 말이다.)


    여러 분야의 역사책들을 읽어보면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21세기 인류라 생각할지 몰라도 실은 20세기의 산물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20세기, 그 중 도려내야 하는 구태에 묶여 ‘객체’로 사는 이들이 어떤 행태를 하고 다니는지, 우리는 지금 여기서 목도하고 있다. 여하튼 이건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의 일로, 20세기에 걸쳐 갖춰온 서구의 학문체계는 그 이전 시대의 모습을 그저 ‘20세기의 눈’으로 추측해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래서 래리 쉬너가 “고대에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해준다고 한들, 우리는 그런 사회가 대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공감은 더더욱 힘들다.


    『예술의 탄생』은 우리가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추적해보는 책이다.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이 없던 시대에서 시작해, 개념의 분열이 일어난 18세기(이때부터 artist와 artisan의 분리가 서서히 일어남)를 지나, 예술이 거의 신격화된 19세기를 거쳐 순수예술과 공예가 대치했던 20세기, 그리고 예술의 개념이 수많은 것들을 흡수(동화)해 완전히 뒤섞여버린 오늘날에 이른다. 이 글을 읽는 이가 예술을 조금 더 깊이 공부해보려 한다면 자연스레 18세기에 집중할 것인데, 혹시 래리 쉬너의 논의보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싶다면 오타베 다네히사(小田部胤久)의 『예술의 역설 : 근대미학의 성립(芸術の逆説 近代美学の成立)』을 추천한다. 오타베는 이 책의 서문 제목을 ‘예술의 탄생’이라 지었다.


    18세기는 중요하다. 적어도 [예술]이라는 개념의 성립에 있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있던 시기라고까지 표현됐다. 물론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도 지동설을 주장한 철학자와 천문학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다소 어폐는 있으나) ‘고대 예술가’들 중 근대적 개념에 해당하는 특성을 보여주거나 그런 주장을 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18세기는 [예술]의 모든 것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규범으로 제시된 때다. 그 방법은 대체로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지금은 이러한 예술의 시대다.”라는 식의 이분화로 이뤄졌다. 이후 [예술]은 18세기를 양분으로 19세기의 신격화로 이어졌다. 인간 활동의 정점으로 말이다. 박이문 선생은 『예술철학』에 “예술은 이 삶에 있어서의 보다 높은 과제와 진정 형이상학적인 활동을 드러내준다고 나는 믿는다.”고 한 니체의 말을 싣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한국의 독자인 우리에게는 모종의 한계가 느껴진다. 한중일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그리고 인도의 방대한 미술 세계는 이런 식의 이분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서양미학담론이 지배적인 지금, 이런 미술을 논하는 또 다른 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서 추천했던 오타베도 “우리 자신의 사고를 아직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규정하고 있는 ‘근대적인’ 예술관의 특질을 그 내부에서 이른바 소급하여 밝혀내는 것”(오타베 다네히사, 김일림 옮김, 『예술의 역설』, 18쪽)이 자신의 작업이라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독자들이 [예술] 개념의 ‘실체’를 알아가는 이 책의 여정 중 가장 놀랄 만한 부분은 아마도 르네상스일 것이다. 르네상스를 예술 본연의 천재성, 혹은 종교와의 협연 등으로 본 전통적인 책들은 시중에 널려 있고, 그런 관점이 우리에게도 낯익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예술과 사회, 특히 경제사의 연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들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백낙청 선생의 소개로 아르놀트 하우저가 일찍 알려진 바 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독촉을 참아가며, 어떤 때에는 “이 비계 밑으로 던져지길 바라느냐!”(조반니 파니니, 정진국 옮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329쪽)며 윽박지르는 교황의 신경질을 견뎌가면서 고독하게 천장화 작업을 했다. 이런 식의 묘사에는 근대의 ‘천재’이자 ‘예술가’라는 개념이 녹아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교황에게 얼마의 두카트를 받고 작업을 했고, 어떤 재료들에는 또 얼마가 들어갔다는 식으로 바라본다면 르네상스를 향한 환상에는 분명 조금이나마 금이 가기 마련이다.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학자들의 사랑을 받아 예나 지금이나 근대의 개념 속에 자주 들어갔다 나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래리 쉬너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이 없었던 시대의 인물이라고 단언한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말했던 것처럼 르네상스는 시장경제의 활성화와 도시의 부를 원천으로 한 시대. 회자되는 유명한 르네상스 작품들은, 아니 ‘제작품’들은 예술 수요의 증가, 그리고 생산자가 누린 약간의 지위 상승을 등에 업고 있다. 한스 홀바인이나 알브레히트 뒤러 같은 북유럽 최고의 궁정화가들이 있긴 했었지만 그 수는 극히 적었고, 북유럽은 이탈리아와는 달리 대부분 공동작업장, 즉 길드의 규범에 따라야 하는 제작자들로 가득했다. 작업방식의 선택이 다소 자유로웠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변종’ 취급받았던 것이기도 한데) 순수예술의 무한자유라는 개념은 전무했다.


    18세기가 지나자 이제 [예술]은 장인, 생산, 길드, 제작품 등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 되어갔다. 이걸 한 철학 용어로 갈무리할 수 있다면, 그건 ‘무관심’일 것이다. 칸트에 이르러 [예술]은 “그저 단순히 즐길 수 있게 만드는”(래리 쉬너, 김정란 옮김, 『예술의 탄생』, 218쪽) 것이 되었고, 동시대의 실러는 “유희의 최고 형식”(위의 책, 243쪽)이라며 예술을 극도로 이상화했다. 실러에게 예술이란 ‘하느님의 화신’이었다. 이 책에 언급되진 않았지만 훗날 쇼펜하우어는 그 무엇보다도 음악을 권장하면서 “웅장하고 화려한 하모니는 정신의 목욕이라고 할 수 있다.”(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권기철 옮김, 『세상을 보는 방법』, 182쪽)고 했으며, 앞서 필자는 박이문 선생이 옮긴 니체의 문구를 적어놓았다. 19세기에 베토벤은 신이었다. 사변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생시몽주의자, 사회주의자, 심지어는 다윈주의자들까지도 고양된 예술을 인정했다. 이것이 바로 19세기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래리 쉬너가 말했듯 사실 지금까지도 “천재의 이미지는 필요할 때면 늘 존재”(래리 쉬너의 책, 301쪽)한다. 이러한 고양이 완성된 시기를 『예술의 탄생』에서는 1800년에서 1830년 사이로 보고 있다.


    통념과 개념이 갈라지는 것, 이걸 우리는 흔히 그것이 정말로 붕괴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어쨌든 낯설어지는 현상이 도래하는 건 여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뭔가가 우리를 강하게 때렸을 때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공예품을 보고 놀랐다.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사실 서양의 아프리카 식민지화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는 작품이었다. 가봉과 카메룬 남부에 거주하고 있는 팡(Fãn)인들의 가면이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부인한 적이 있긴 했지만 사실 피카소는 파리의 첫 인류학 박물관에 방문해 아프리카의 가면들을 봤었다. 벼룩시장 같은 역겨운 냄새가 났다고 하면서도 그곳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중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피카소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회화의 종말’이라는 단어도 태어났다. 사진 때문이다.


    개념이 무너지자, 그 사이에서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되는 이른바 ‘모더니스트’들이 우후죽순 일어났다. 뒤샹은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던, 민주적 절차를 따른다면서 아예 심사라는 걸 하지 않는 한 전시회에 ‘리처드 머트(Richard Mutt)’라는 가명으로 변기 작품을 냈다가 모더니즘의 아이콘이 됐다. 뒤샹의 저 행위도 중요하지만 사실 ‘리처드 머트 씨의 변기’를 전시할 수 없다는 협회 측에 비어트리스 우드가 던졌던 변호문도 중요하다. 비어트리스는 “머트 씨는 일상의 사물을 가져다가 놓았는데, 이로써 새로운 관점과 작품명 아래 사물의 유용성이 사라지도록 했다. 요컨대 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낸 것이다.”(He took an ordinary article of life, placed it so that its useful significance disappeared under the new title and point of view ― created a new thought for that object.)라고 했다. 이 변호문은 [예술]의 전복을 상징한다.


    마치 고대 로마의 폐허 속에서 일어난 새로운 왕국들처럼, 하지만 고대의 유산을 물려받은 쪽이 늘 있었던 것처럼 [예술]은 순수예술의 범위를 계속 확장해가려는 ‘동화(同化)’의 왕국과 예술이 계속 분리되는 걸 거부하는 저항의 왕국이 서로 싸워가는 와중 연명하고 있었다. 한편, 반(反)기계와 사회이상을 실현하려는 영국의 예술공예운동, 사회목적과 예술을 연결한 독일의 바우하우스, 그리고 노선은 달랐지만 [예술]이 죽은 자리에 유용성을 추구하는 ‘구성’이라는 개념을 잠시 올려놓았던 러시아의 경우처럼 순수예술과 공예의 대립각이 여전히 이어지는 역사도 있었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공예는 분명 예전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인류가 정말 ‘대단위’로 인식의 변화를 겪었던 시기는 1960~70년대일 것이다. 식민지들이 해체되고, 그간 전통과 권위 아래 핍박받았던 약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역사의 거대한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인류는 그 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다원주의’가 무엇인지 고찰할 수 있었다. 후대의 우리는 분명 그 뼈아팠던 행동의 시기에 고마워해야 한다. [예술]이라고 해서 이 시기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예술가들은 일반화에 저항했고, 예술의 권위가 아닌 일상과의 통합을 추구했다. 예술 개념 자체가 추락하기도 했다. 구조주의는 작품이 아닌 ‘텍스트’로 저 세계를 본다. 해체주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양한 건축공법으로 탄생한 세계적인 랜드마크들은 예술과 공예를, 미학과 기능을 굳이 구별해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술]은 여전하다.


    “같은 행동을 계속 되풀이하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래리 쉬너의 책, 394쪽) 구미(歐美)의 예술체계는 다시 오랜 관습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문화계를 소개하는 우리나라 일부 TV 프로그램들도 은연중에 고귀한 예술을 점잖은 자리에 초대한다. ‘원시예술’이라는 개념으로 이른바 ‘폭격’을 맞은 바 있는 아프리카, 폴리네시아, 알래스카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근대화 이후 서구의 이해 체계가 들어가 버린 모든 곳은 그저 서양 기준의 미술시장에 진입하려고만 하는 예술가들의 행위에 전통이 퇴색되어버린, 다시 말하자면 ‘이도저도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 흡사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속 라다크를 보는 것처럼.


    래리 쉬너의 책 후반부에 이르면 순수예술이 더 이상 [예술]임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방식의 시도들을 아우르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예술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동안 우리는 예술의 근대적 의미에만 집중한 나머지 본연의 천재성과 고귀함, 칸트의 표현을 다시 빌려오자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무관심, 취미만이 중요하다고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술은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독자인 우리들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예술가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 속된 표현으로 ‘영업비밀’이 아니었을까? 예술은 정신의 진정한 고양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 노동, 즉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을.


    필자의 동생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나는 순식간에 화면을 지나가는 한 캐릭터의 움직임이 실은 지난한 작업의 물고 물림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인지 예술의 분리, 심지어 예술 생산자의 계층분리(혹은 갈등) 같은 서구 특유의 이분법적 이해에 대해서는 『예술의 탄생』을 읽기 전부터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예술의 생산에 직접 참여하진 않아도, 혹은 예술소비에 아주 전문적이진 않아도 래리 쉬너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된 분리와 계층을 넘어 예술, 종교, 정치, 일상생활 사이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조정”(위의 책, 447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탄생』은, 혹은 이와 같은 책들의 주장은 예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우리의 일상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밥 딜런. 이 둘뿐만이 아니다. 또 누군가가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판단을 시험하려고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또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오래된 역사를 들여다보며, 궁극적으로는 영위하는 삶에 대해 깊이 고찰해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때의 ‘예술’은 지금의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는 또 다를 것이다. 이런 일들은 끝없이 이어질 것인데, 우리가 그 흐름에 삶의 배를 맡긴 채 유유히 떠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면 래리 쉬너와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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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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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0일


    그러고 보니, 늘 상상의 편이었다. 열여덟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지도를 그렸고, 톨킨에 빠진 후로는 잘 읽지도 못하는 원서들을 모으고 있다. 가족과 해리포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상이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또 다른 지도다. 소설이 다 뭐고, 환상은 다 뭐냐는 이른바 ‘상상판 세속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별 매력이 없었다. 잠시 혹하더라도 이내 백지 앞에 앉아 산과 숲, 늪지와 강을 그렸고, 토성을 떠올리며 수많은 달이 있는 세상을 상상했다. 상상은 그 자체로 무한이고, 자유다. 유년과 닿아 있기 때문에 그걸 유치하다느니 쓸모없다느니 치부하는 건 온당치도 않을뿐더러 때론 가혹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상상’이란 단어 뒤에 즐겨 붙이는 단어가 있다. 나래. 문인들이 날개를 칭하는 부드러운 단어. 인간에게 날개는 없다. 그러나 문학의 전통 아래 수많은 펜촉, 그리고 입과 입이 이 표현을 반복해온 건, 알베르토 망겔이 말했듯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데는 아무런 물적 기반도 필요치 않은 것”(알베르토 망겔·자니 과달루피, 최애리 옮김,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 11쪽)이 바로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의 산물이 머릿속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라는 물적 기반이 필요하다. 데이빗 예이츠 감독의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Fantastic Beasts and Where to Find Them)≫에는 본의 아니게 마법세계를 알아버리는 (그저 빵집 하나를 차리고 싶어 했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수많은 신비한 동물들을 직접 보더니 마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뉴트, 난 지금 꿈꾸는 게 아니에요. 내 머리로는 이런 걸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다고요.(Newt, I don't think I'm dreaming. I ain't got the brains to make this up.)


    바닥 카펫이 동그랗게 말려 마치 동굴의 입구처럼 보이자 위대한 상상가 톨킨은 아이들을 위한 소설 『호빗』을 썼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In a hole in the ground there lived a hobbit.” 그러나 이 짤막한 소설을 둘러싼 톨킨의 방대한 세상은 유럽 각지의 고전 신화와 전설, 민담, 그리고 고대 영어와 룬 문자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현실인지 상상 속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보르헤스의 환상적인 단편들 역시 마찬가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993년에 『상상력 사전(원제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이라는 책을 냈다. 인간 세상을 우주에 투영해 역대급 인기를 누린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시리즈는 벌써 40년 째 이어지고 있다. 굳이 조지프 캠벨의 신화집, 혹은 천병희 선생께서 번역하신 고대 그리스 신화들을 읽어보지 않아도, 그리고 주호민의 『신과 함께』를 이불 속에서 훌쩍이며 한 장 한 장 넘겨보지 않아도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현실과 맞닿은 상상을 즐겨했는지 알 수 있다.


    피카소는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감히 장담했다. 그의 성격과 기행, 비범한 작품들을 보면 그는 상상을 실천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대표적인 실천이 바로 ‘아이처럼 그리기’다. 피카소도 수재였다.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그러나 잘 그리지 않기 위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떻게든 못 그려보려고 했다. 물론 이 말에 어폐는 있다. 현대미술에 있어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판단하는 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여정은 결코 완성되지 않을 상상의 실천이었다. 아이 같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세상의 이해를 받지 못했다.


    정현종 시인은 이와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며 얇은 시집 하나를 번역했다. 책을 만져봤거나 펜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누군가에게서라도 한 번 쯤 들어봤을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시들은 하나 같이 다 짧은데, 한참 쥐고 있어야 따뜻해지는 손난로 같다. 네루다의 『질문의 책(원제 : Libro de las Preguntas)에는 움켜쥐면 놓고 싶지 않은 구절들이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하버드 강연록을 『음악의 시학』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먼저는 프랑스어로, 그 다음에는 영어로) 펴냈는데, 이 책에는 창작과 상상에 관한 중요한 조언이 있다. “창작의 전제는 상상이지만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창작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운좋은 발견이 필요할지도 모르나, 이 발견을 온전히 현실화하는 것이 창작이다. (중략) 고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창조적인 상상이다.”(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셸 루트번스타인, 박종성 옮김, 『생각의 탄생』) 상상은 개인에게 주어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의 역량에 따른 무한과 자유의 도구이자, 또한 특권이다. 하지만 이걸 수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작’이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저 단어에 목을 맨 것이 바로 예술이다.


    언젠가는 꼭 자신의 상상을 세상에 내보이리라 잔뜩 벼른 사람들이 있다. 창작에 심장을 내맡긴 사람들이다. 괴짜. 엄동의 산 속에 혼자 펴있는 개나리 같은 사람들. 드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창작과 상상이 원래 그런 속성의 ‘몹쓸’ 것인 까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외로운 사람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긋거나 없애기도 하면서 이 뫼비우스 같은 공간에서 혼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들. 답습하지 않겠다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발붙여 살면서 늘 자기만의 ‘낯설어지기’를 아프도록 반복하는 사람들. 비슷한 건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비슷해질 수밖에 없는 위대한 ‘과거’를 추앙하기도 하는 소심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하지만 누구보다도 큰 꿈 세계가 있는 사람들. 이중적 삶. 갇혀 있는 듯, 원대한 사람들.


    이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나는 그림 그리는 동생과 종종 글 쓴다는 것과 그림 그린다는 것, 통틀어 창작한다는 것을 넋두리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질문의 책』은 동생의 서재에서 집어든 책이었다. 세상에 나올 때에는 비범하여 누구나 매료시켰던 상상의 세계가 나중에는 비근하게 보인다. 시간은 무섭다. 동생은 무뎌지지 않기 위해 이 작은 시집을 서재에 꽂아두고 있었다.


    『질문의 책』은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엉뚱함.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분수와 관련된 두 번째 의미를 빼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거나”“사람, 물건, 일 따위가 현재 일과 관계가 없다.”라는 것인데, 여기서 『질문의 책』의 엉뚱함은 마지막 사전적 의미를 뒤엎는다. 요컨대, 네루다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과 관계한다. 자신이 잊어버린 미덕들로 옷 한 벌을 꿰맬 수 있을 것인지 성찰하다가, 사과꽃이 사과 속에서 죽는 걸 보지 못했을 누군가를 걱정한다. 자신이 더 느리다는 걸 거북이에게 말하기 위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고민도 한다.


    “상상력의 특징을 엉뚱함이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가 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상상력은 그동안 이 세상에 없었던 생각과 관점,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차원을 번개처럼 열어보이기 때문이다.”(파블로 네루다, 정현승 옮김, 『질문의 책』, 158쪽)


    이 엉뚱함, 이 질문들은 네루다가 세상과 맞닿으며 일으킨 독특한 반응이다. 정현승 시인은 그걸 ‘정서적 파동’이라 했다. 하나의 질문이 물가로 여러 겹의 파동을 보내고, 뭍의 독자들은 그 너울에 마음을 실어 무한의 호수로 나아간다. 몸이야 여기 이곳에 있겠지만 질문은 파동이 시작된 곳까지 마음을 이끈다. 그곳이 궁극임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정현승 시인처럼 나 역시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질문의 책』의 물음표가 시작되는 지점을 본다. 수십 편의 보르헤스 단편들에서도 본 환상(環象)의 종착점. 죽음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네루다는 죽음을 향하는 우리의 질문을 ‘시작’하게 하면서 필연의 비극을 영원한 아이들의 놀이로 바꿔버린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위의 책, 95쪽


    마크 오스번 감독의 애니메이션 ≪어린왕자(The Little Prince)≫에는 꼬마 숙녀 주인공이 사하라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봤다는 비행사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어른이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Well, I'm not so sure I want to grow up any more.)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한다. “어른이 되는 게 문제가 아니야. 잊어버리는 게 문제지.(Growing up is not the problem. Forgetting is.) 상상, 엉뚱함, 유년, 죽음, 창작, 예술, 그리고 삶과 궁극.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은 이 그물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거나, 한 뿌리에서 뻗어나간 인간의 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효용을 논하는 이들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마법의 서랍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두 마리가 아니라는 건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비밀인데) 달 속의 토끼를 보기 위해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꺼내온다. NASA는 인간의 내핵이 상상으로 이뤄져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바다의 중심은 어디일까? 왜 파도는 그리로 가지 않나?”(위의 책, 49쪽) 『질문의 책』을 심심풀이로 읽으면 (정현종 시인도 심심풀이로 번역하던 거라고 했으니) 우리는 신기하게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고도 긴 너울에 몸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11월은 몇 살이나 된 것인지 알려줄 신비의 인물을 만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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