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지혜 - 세계 여러 문화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
마가레테 브룬스 지음, 김정근.조이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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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5



    세상 이곳저곳의 이야기를 알아가는 재미는 크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동면을 위해 한껏 먹어두는 곰처럼 미술을 둘러싼 온갖 이야기들을 찾아다니며 흡수하려고 했다. 덕분에 동서양의 역사와 철학, 종교, 광물질, 나무, 외국어 등을 예전보다는 많이 알게 됐다. 그것들을 긴 시간 소화하면서는 나만의 미술관을 꾸리고 책을 써나갈 수 있겠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학자의 마음, 작가의 시선, 그리고 관객(혹은 독자)의 관심 사이를 오고 가는 상상도 했다. 참 매력적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러 종류의 블록을 앞에 둔 아이가 된 듯하다. ‘저걸 어떤 모양으로 쌓을 수 있을까?’ 조합의 문제를 생각한다. 재료의 모양과 성질을 모르면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나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데카르트가 발견한 명제이자 불변의 딜레마일 수밖에 없는 원점, 아니 바닥 같은 게 보일 것이었다. 미술의 표면을 뚫는 깊은 책들을 읽어갔고, 내가 가진 그 어떤 도구로도 더 이상 파내려갈 수 없는 신비한 물질로 된 표층을 발견했다. 그 표층의 이름은 ‘눈’이었다.


    미술은 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새삼스런 이 문장은 의외로 많은 걸 이야기한다.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눈을 둘러싼 세계다. 따라서 미술만큼 ‘철학하기’ 좋은 분야도 사실 드물다. 미학이라는 것은 그래서 어렵고, 때로는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눈은 가끔 거짓말을 말한다. 어떤 것이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도 분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반면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는 단초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판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못 볼 수도 있고, 아는 것은 아는 대로만 볼 수도 있다. 눈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눈으로는 절대적 진리나 객관을 말할 수 없다. (눈은 진리를 볼 수 없다. 이것이 진리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가능하다.) 따라서 미술도 그러하다.


    마르가레테 브룬스의 『눈의 지혜(Die Weisheit des Auges)』는 눈이 얼마나 다양한 세상을 열게 해주었는지 설명해주는 대단히 깊은 책이다.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눈에 대해 쉽고 간편하게 설명해주겠다고 벼렸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글, 겉핥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근원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때때로 현실과 유리된, 별세계의 이야기 정도로 취급하는데, 잠시라도 시간을 내 그 오류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눈의 지혜>는 나의 별 볼 일 없는 이름을 걸어서라도 필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구석기와 신석기(즉 구상과 추상), 고대 이집트, 동양화, 이슬람, 그리스도교, 르네상스, 현대회화로 구성된 이 책에는 어쩔 수 없이 특정 시대의 일화나 미술, 철학, 역사 등의 전문용어들이 실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사실 재료보다도 그 재료들로 마르가레테가 무엇을 엮어가려고 하는가가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동양화에 대한 그녀의 이해에 감탄하기도 했다. 마치 동양 철학을 전공한 사람처럼 문장을 다룰 줄도 안다.) 눈은 무궁무진하다. 이것이 그녀의 메시지다. 이 책은 영원과도 같은 세계로 필멸의 우리를 초대하는 한 권짜리 손길인 셈이다. 적어도 그에 관해서는 내게 가장 진득한 책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인류의 출현 이후 지금까지의 긴 역사를 통째로 대상으로 한다 가정했을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유형과 무형을 본다. 여기서 ‘무형(無形)’은 정말 형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상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형태,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잡스러운 형태’를 의미한다. 인류가 본 최초의 유형은 누군가가 그려놓은 것이 당연 아니었다. 그리기 이전에는 그려진 형태를 봤을 것이다. 바로 머릿속으로 그려진 형태. 주로 동물이 아니었을까. 어제 동료들과 함께 잡은 야생소의 뿔 달린 머리가 바위 속에 그려져 있다. 최초의 화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눈’ 그 자체였다. 최초의 미술은 화폭이 아닌 머릿속에서 ‘발견’된 것이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이후 미술의 역사는 꽉 채우는 그림, 비워놓는 그림, 옆모습만 그리는 그림, 선원근법을 사용한 그림, 역원근법을 이용한 그림, 직접 보고 그리는 그림, 이상(理想)을 그리는 그림 등 매우 다양한 가지로 진행됐다. 하지만 이들은 단 하나의 단어로 묶어버릴 수 있다. 유형(有形). 미술은 머릿속에서 형태를 그린 최초의 이름 모를 인간의 출현 이후 지금까지 계속 유형에 봉사하고 있다. 심지어는 확인되지 않은 대상까지도 유형의 세계로 끌어다 놨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화다. 그릴 수 없는 대상은 문자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예에서 끝나지 않는다.


    동양도 다르지 않았다. 글씨에서 기(氣)를 느끼는 이들이 있었으며, 아무도 보지 못한 선인(仙人)을 그림에 그려 교훈으로 삼기도 했다. 침묵은 여백이 되었다. 또한 여백으로 침묵하기도 했다. 색채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광물질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며 자본의 움직임에 일조했다. 인간은 이렇게 눈의 노예를 자처했다. 얼마나 굶주렸으면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려고 하다가 그림으로 ‘거짓말’까지 하게 됐을까. 이제는 각도가 변할 때마다 달리 보이는 그림이 전시관에 걸려 관람객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낸다. 똑똑한 작가들은 눈이 사람을 얼마나 기만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한때 우리는 사진으로 시간을 그리는 지경에 이르렀기도 했었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유형의 화폭을 보게 됐다. 이걸 ‘무형’이라 불러도 괜찮은지, 아예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물감을 제멋대로 던져놓고 화단(畵壇)의 고평을 받아 세계적인 화가가 된 한 남자를 두고, 그것이 예술적으로 정말 공정한 일이었는가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유형에서 해방되려는 인간의 움직임은 최대한 무작위에 가까운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유사 이래 인간이 이런 전환을 겪은 적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 폴록은 무작위적인 형상 속에서 작위적 형상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나는 그도 이 치명적 단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최대한 있는 힘을 다해 무당처럼 춤을 추며 물감을 휘갈긴 것이리라. 이후 마크 로스코는 아예 형상을 떠올리지 못하게 색면(色面)만 남겼다. 이와 비슷한 일은 반세기 전 러시아에서도 있었다. 유형에서 도망치려는 인간의 무모한 시도는 추상의 형태와 색만 남기고 다 걷어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생각한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르가레테는 이 문장을 남기고 책을 닫았다.


    “형상. 성스럽고 악마적이고 가치 없고 쓸모없으며 강력한 형상들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사냥꾼과 채집가로 수십 만 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그림이 그려진 동굴을 영원히 떠났고, 새로운 형상을 지닌 채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춤추듯 나아갔던 인간들만큼이나 현재의 인간들도 기본적으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 (마르가레테 브룬스,『눈의 지혜』, 449쪽)


    나는 크게 늘어나고, 동시에 아주 작아지는 세상을 본다. 상이한 형태로 공존이 가능한 절대의 존재를, 마치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그런 기이하면서도 고차원적인, 말도 안 되는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눈은 분명 제한적 생체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인류의 형상 속 역사, 그 춤을 추는 것 같았던 화려했던 역사는 우리에게 깊은 문화적 감흥을 줬다. 인간을 고고한 존재로 만들어 자존감을 심어줬다. 수많은 예술 분야와 서로 조우하면서 우리는 표현할 수 있는 유형을 거의 무한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더 그릴 것인가? 여기서 그만 둘 것인가?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더 그리게 된다. 마르가레테의 마지막 문단에도 답은 나와 있다.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그렇게 “춤추듯” 나아가며 형상을 그릴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우주의 손아귀에서 멸망할 때까지 우리는 형상과 함께 어우러져 주인인 듯 노예인 듯 일생을 영위하다 그 모든 것을 남겨놓고 사라질 것이다. 이따금 미술을 공부하다 감상에 젖을 때면 나는 모니터 속 그림 앞에서 깜빡거리는 눈을 비비곤 한다. 위대한 감옥의 철창을 우리는 뜯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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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마음 - 문태준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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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2



  한 가지 두려움이 있다. 곧 삶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질 것이다. ‘대단히’라는 저 부사의 의미를 나는 잘 모르겠다. 사회생활의 초입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자박자박 걸으며 나름대로 사유한 이 세계의 모습이, 혹은 모양이 서서히 바뀌어갈 것이라는 예상에서 오는 두려움이 크다. 새로 시작하는 것은 늘 그렇듯 적응된다. 도덕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나는 항상 약삭빠르게 적응하곤 했으니. 그러나 문제는, 아니 두려움은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이제부터 뛰기 시작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이 계절 지나가는 것마저 지나치며 살지도 모른다는.


  고집하던 속도가 있었다. 이 공간을 찾아와 기꺼이 누추함을 견뎌주던 나의 몇 안 되는 당신들은 그 속도가 얼마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역설적인 물리. 타인이 보면 멈춰 있는 것만 같고 그리하여 매우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미미한 속도를 사랑했다. 글은 지렁이처럼 쓰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리라. 생각의 밭을 가꾸려면 맨손과 자갈, 그리고 꿈틀거림을 사랑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분히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변에 ‘거느린’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는 주변을 생각하게 되었다. (배운 바) 철학과 닿아보자면 그건 장자에 가까웠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걸 철학적으로 여겨본 적이 (이따금 굳이 글감으로 따져볼 때는 제외하면) 거의 없다. 들판에 세워놓은 나를 지팡이 든 방랑자로 만드는 것에 나는 익숙했다. 목동이 되지 않았다. 나를 세상 위에 띄워놓고 바라보면 나는 더 넓고 큰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나에게 주어진 기회만큼의 적잖은 양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독서가 그런 기회를 줬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나는 읽는 속도만큼 걷거나 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느림보’라는 단어를 참으로 좋아한다.


  “마치 식물이 햇빛의 방향에 따라 순을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듯이,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자란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깐 가장 느릿느릿한 풍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마음도 속도를 늦추는 완보를 하게 된다.” (문태준,『느림보 마음』, 57쪽)


  최근 방송작가 과정을 밟아가면서 나는 나를 새로운 분위기에 몰아넣는 나름의 강행군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익숙지 않은 단어와 과제 사이에, 프로들 사이에, 제작의 입장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중압감 사이에. ‘어른’을 이해해가는 길목에서 나는 벌써 그들이 무엇을 일찌감치 포기했는지, 그리고 생(生)을 위해 자신의 모양을 얼마나 바꿔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학의 보온병 속에서는 어른들의 이기와 무지, 혹은 무감각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의 특권이란 게 별 거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해로부터 반보 물러나서 다시 바라본다. 까닭은 아주 단순하다. 이기하지 않고, 무지하지 않으며, 또한 무감각하지 않은, 그리하여 일상을 쪼개 그 속에서 세상을 분별하고 성찰할 줄 아는 어른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끝없는 도전이며, 그들의 대단한 책임감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은 세간이 몹시 부러워하는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이 아니다. 드러내지 않았어도 그 안에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밭을 부단히 경작하는 어른의 모습이 내가 좇는 이상에 가깝다.


  “구태여 우리 모두가 새벽에 홀로 앉아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 나는 다만 ‘홀로 앉아 있음’의 시간으로 새벽을 선택한 것이다. 비껴 앉는다 함은 한 발짝 물러선다는 뜻이다. 물러선다 함은 뒤를 만들어 뒤를 본다는 뜻이다.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핀다는 뜻이다. 뒤가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적잖이 있다. 그이는 이마를 앞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세로만 이 세상을 살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옹벽이 있다. 옹벽을 만나 옹벽을 종일 고집스레 이마로 밀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문태준, 위의 책, 143쪽)


  그것이야말로 삶의 비밀이지 않을까 싶다. 삶의 새벽을 만드는 것. 아마 작가의 삶을 꿈꾸는 것도 그런 까닭. (프로의 길을 걷는 선배들에 따르면 그 삶은 무척이나 치열하다지만) 누구나 사는 대낮의 삶에서 내 손으로 조용히 태양을 내려 노을을 만든 뒤, 그들에게 새벽을 지을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리라. 문태준 시인이 그 새벽을 나에게 선물한 것처럼. 물론 그 새벽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하루를 서랍 속에 넣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가 새벽의 모습을 뚜렷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새벽은 대낮과는 다른 의미로 한 인생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것은 대체로 멈춤과 느림과 여유, 아득한 고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조우와 관련이 있다. 새벽이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뜻이다.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불면이 아니라면 새벽은 (조금 선정적으로 말하자면) 늘 노곤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잠으로 달래는 시간이다. 우리가 진정한 새벽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그건 과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다. 당신의 삶에 있어 당신 스스로 새벽을 만드는 일. ‘이것을 할 의지가 있는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렇게 할 능력이 되는가?’를 물어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삶은 거대한 바다로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바다로 흐르는 강물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주목할 만한 선각(先覺)의 사례들을 통해 충분히 제시되어왔다. 다양한 말을 통한 일관된 답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큰 위안을 받는다. 잠시 멈추고, 생경한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한편으로는 그 순간의 자신을 보는 것이다. 물리적이며, 또한 정신적인 멈춤이다. 나는 책만큼 그 멈춤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 시인의 이 책은 멈춰 있는 순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걸음이 생기는지 보여준다. 위대한 역설이다.


  “사랑이나 삶은 작은 생선을 굽듯 해야 한다는 말을 이제야 나는 알 것도 같다. 너무 손을 대면, 손 타면 안 된다는 그 말의 귀함을 나는 알 듯도 하다. 애써 성공하려 하지 말고, 애써 실패를 초래하지도 말라는 가 말을 알 것도 같다. 애써 헤어지려 하지 말고 애써 만나려 하지 말라는 그 말을 알 것도 같다. 삶이나 사랑은 강과 같아서 다만 유유히 흐를 뿐이다. 초봄의 새순이 무성해져 녹음을 만들고 그늘을 드리우는 것처럼. 그것이 시간의 변화이다. 나는 이 사실을 나에게 처음으로 용납한다.” (문태준, 위의 책, 337쪽)


  멈춤의 역설로부터 나는 세상을 배운다. 빠른 것이 소위 ‘대세’이고 우리가 습득해야 하는 속도의 기술이라고 하면 나는 얼마든지 그 흐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일상으로 뛰어드는 일은 쉽다. 어른들이 슬그머니 나의 귓가 뒤에 와서 들려주거나, 아니면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그 일들은 빠른 속도에 알맞게 자기 자신의 덜어내는 일과 다름없었다. 아픈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리하여 정말 아프도록 뼈저린 일이리라. 그것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도 나에게는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나는 다져나가야 하는 밭이 내 안에 있음을 안다. 자동차를 무서운 속도로 몰고 가다가 어느 순간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아 멈춘 다음, 근처 밭으로 가 생각의 농부가 된다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할 나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적정 속도로 달려도 양옆으로 차들이 바람에 날린 종잇장처럼 지나가버리는 게 이곳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멈춰 세울 수 있는 비(非)물리적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 생각이 끊어지는 곳이 있다고 했다. 문 시인은 이 책 어딘가에 그곳이 궁금하다는 속마음을 적어두었다. 나는 이 놀라운 세계에서 우리의 삶이 커다란 모습을 갖춰간다고 믿는다. 빨리 지나가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크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못 보고 지나쳐버리는 그 수많은 가능성과 의미의 세계. 한 욕심이 있다면, 그건 이 세계를 놓치기 아깝다는 욕심이다. 씨앗 뿌리고 정성 들여 이 밭 가꾸면서 그렇게 생각해본다. 멈춰 선다. 변화하는 모든 시간의 기름칠로 내 무딘 손이 다시 일을 시작한다. 밭 일구기 좋은 가을이다.


  “여름 매미가 얼음에 대해 알지 못하듯이 나도 소견이 좁아 시절의 오고 감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무딘 마음의 안쪽으로도 가을은 와서 끝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태준, 위의 책,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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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1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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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 대하여 - 가오싱젠의 미학과 예술론
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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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제 속에 있는 말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 저라는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라도 저는 꼭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 어떤 극심한 곤경에 처해서도 글은 계속 썼습니다.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휘몰아치면 다른 문제들은 마음에서 해소되기 마련입니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論創作』, 297쪽)


  나에게 그는 굉장히 멀게만 느껴지는 작가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나는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섭렵하겠다는 (그 나이 때에는 꽤나 순진했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가오싱젠의『영혼의 산(靈山)』은 아쉽지만 고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묻건대, 지금 읽는다 해도, 혹은 황혼이 되어 읽는다 해도 ‘나를 찾는 여정’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정신적 고립의 파탄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부단하면서도 절박한 노력이었을 것인데, 나는 과연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았을까. 혹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의 낮은 기준으로는 저울질 할 수 없는 세상이 많다는 걸 항상 느낀다.


  사실 읽기에 실패한 작품은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독 눈에 밟혔다. 가오싱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혼의 산’이란 아름드리나무들의 울창한 원시림과 시끄럽게 축제를 벌이는 마을, 그리고 곰팡내 나는 여관방의 이미지가 전부다. 그런 까닭에 『창작에 대하여』는 그 높던 누군가에게 느끼던 마음의 거리를 좁혀준 글모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술과 글’에 대한 위안을 받게 되었다.


  “저에게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혼잣말입니다.” (위의 책, 297쪽)


  반드시 그렇진 않겠지만 전방위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작가는 한 가지 장르에만 치중하는 작가보다 ‘예술’이라는 총체적인 현상을 더 폭넓게 이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오싱젠은 그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들 중 한 명이다. 『창작에 대하여』에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에 대한 가오싱젠의 생각과 철학이 녹아들어 있는데, 이는 가오싱젠이 직접 모든 장르의 창작에 참여하여 얻게 된 결과물이지, 다른 이들의 철학과 견해, 혹은 체험을 빌려 쓴 말이 아니다. 가오싱젠의 직업은 ‘작가’라고 한정지을 수가 없다. 악기연주, 무대연출, 소설집필, 회화, 언론, 번역, 평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유년시절에 여러 장르를 접할 수 있었던 배경과 예술에 대한 본능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이라는 작은 예술의 그릇이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가오싱젠의 국적은 현재 프랑스이다.


  ‘중국’은 하나의 정치적 환경이었다. (또한 다른 대부분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오싱젠이 그곳에서 떠났다는 것은 특정한 정치적 환경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문학이 정치로부터 이탈하여 냉철하게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또 다른 환경으로 도망쳤다고 봐야 옳다. 이 책에는 가오싱젠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정치와 문학의 분리’가 여러 문장과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자신의 창작 철학에 대해 설명한 1~2부는 물론이고, 대담 형식의 3부에서도 등장한다. 가오싱젠의 ‘문학 제 1법칙’이라고 (다소 딱딱하지만)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가오싱젠은 문학을 정치에서만 분리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특정한 사조나 사상적 배경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의 미학은 해석미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미학에 대해서도 명제를 연구하거나 미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합니다. 형이상학적 사변이든 언어적 분석이든, 철학자들의 미학 연구는 범주와 개념, 어법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미와 예술을 일종의 언설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작업은 예술창작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위의 책, 124쪽)


  지금 책상 왼편의 서재에는 지난 몇 년 간 미술을 공부하며 읽었던 숱한 미학책들이 꽂혀 있다. 그 공부를 끝내고 다시 몇 년 간 작품들을 감상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던진 질문은 “과연 카라바조나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바로크’나 ‘르네상스’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특정사조 속에서 제한된 형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을까?”였다. 어떤 작가든 마찬가지다. 물론 19~20세기 들어 ‘예술철학’이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예술이 사상적으로 움직이려는 시도가 빈번해지긴 했었다. 아마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면 20세기의 예술이 이처럼 격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미술은 사정이 달랐다. 지금의 우리가 그 시대를 회고하거나 추정하면서 정의(혹은 고착화)하는 작업은, 어쩌면 학문적 차원에서만 효용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는 언제나 해석의 언어들 사이로 도망쳐버리기 마련이니까요.” (위의 책, 125쪽) 그리하여 가오싱젠은 예술이 한없이 주관화된 세계에서 ‘예술의 언어’를 통해 표출되는 오묘한 세계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예술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가의 창조자로서의 본성은 타인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집단의 의지에도 휘둘리지 않고, 그 어떤 공인된 진리를 따르지도 않는다. 권력이나 관념에서 비롯된 그 어떤 강제나 구속도, 예술가의 창조적 본성을 압살하지 못한다. 예술가 개인의 미학만이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며 윤리다.” (위의 책, 195쪽) 이 문장을 읽으면 대단한 자유 속에서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오싱젠 자신도 자본주의 속의 예술을 (특히 문학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며 드러낸 것처럼,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의 세상에 조응하고 있다. 특히 예술이 향유되는 방식에서 가장 그러하다. 예술이 하나의 문화생활 속에서 소통될 수밖에 없는 구조의 특성이 그 한계일 것이다. 이 소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시장(market)’이라는 말을 붙여야만 한다. 벤야민의 ‘복제’, 혹은 ‘아우라’라는 용어 역시 이 시대에는, 그리고 이 시대 이후 언제까지나 유의미하다.


  예술시장 속의 대중은 유행과 기호, 그리고 (가장 중요할 테지만) 가치를 따른다. 조금 씁쓸한 표현이지만 이건 다 ‘값’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볼 수 있는 이들만 알아서 찾아오라는 식의 고가 전시회는 예술시장의 제한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술상품의 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후 발견된 거장의 작품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는 누가 무엇을 주고 얻는가? 이런 전체적인 현상을 살펴보고 나면 ‘자유’와 ‘주관’과 ‘무한’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의 영역은 창작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엄청난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예술가로 살지 말 것을 농담 삼아 조언했던 한 교수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때 창작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몇 년을 보낸 적이 있었기에, 솔직히 이 책을 사들고 처음으로 했던 기대는 ‘나의 창작’에 대한 회고였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두려워지는 수많은 세상 중에 ‘창작’이 있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예술의 자유’라는 확고한 하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강화하는 작업은 예술가가 지켜야 하는 원칙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마저도 일반의 마음으로는 해낼 수가 없다. 나는 학교를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의 겉을, 문자를 훑고 지나갔지만 예술은 분명 어딘가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위안이 된다. 잘 모르지만 누군가가 어디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누가 예술가가 되는가. 흥행여부를 떠나 100년이 지나도 기억될 이는 누구인가. 독자인 우리는 이런 질문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언제나 예술에 기대어 우리의 긴 삶과 작은 세상에 얼마든지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예술이 그러한 수단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예술이 유일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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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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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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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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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아버지와 함께 새벽 4시부터 산을 오르면 새벽 5시 즈음부터 산의 이곳저곳에서 조용히 아침을 맞이하는 산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새로운 세계로 초대받는 기분이 든다. 눈앞을 가리던 어둠이 높은 하늘서부터 옅어지고, 어떤 ‘공간’이 열리는 듯하다. 땀을 식히는 바람, 바람에 더 빨리 흘러 떨어지는 땀. 그 외 모든 것들의 존재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당신도 알 것이다. 이런 걸 ‘개방’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일종의 착각이나 순간적인 인식일 수도 있겠지만, 장자 철학에서 말하는 ‘무문(無門)’의 체험일지도 모르겠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어도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자연을 대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연과의 동화를 느끼는 것은 인생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6~70년대 농촌생활을 한 어르신들께서 나와 같은 젊은 세대들을 안타까워하시는 까닭도 그 동화의 현저한 부족 때문인데, 우리 세대 중 그런 넋두리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실은 속마음으로는 ‘부재’를 느끼고 있다. 수많은 자연의 대상들을 이름 불러가며 살갑게 대할 수 있는 세대적 능력은 정말 낭만적인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인데, 나는 올해 봄까지만 해도 진달래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와 산을 다니면서 직접 보고 향을 맡고 손으로 만져보면서 알게 된 사실들은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추억이다. ‘봄의 보라색’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한 편의 시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자연과의 관계는 ‘인간’이라는 개체의 전체가 자연과 맺고 있는 종합적인 관계로, 이는 쉽게 말해 환경파괴와 불가분에 있는 모든 것이다. 개인의 자연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에 따른 일련의 경험들이 환경파괴를 막는데 중요한 동력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동력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려면 당연히 그 ‘무엇’을 과학적으로 아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작업에 의무나 명령의 표를 붙여놓을 수 있느냐의 여부로 우리는 환경윤리를 논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 표를 붙여야 하는지 논쟁을 해야 하는 여유로운 상황에 있지 않은 듯하다. 수많은 우려와 과학적 고찰이 있었지만 벌써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1962년 미국의 출판사 호튼 미플린에서 한 권의 책이 발행되었다. 당시 저자는 50대 중반의 해양 생물학자. 그녀는 1940년대부터 꾸준하게 한 가지 문제에 매달려오면서 방대한 자료를 모아왔고, 그것을 집대성해서 1962년에 책을 냈다. 이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단순한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엄청난 지진을 일으킨 진앙 그 자체가 되었다. 모두 그녀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20세기 중반부터 ‘환경’이라는 주제를 가진 전 세계적 규모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나서 그녀의 주장을 정책으로 옮기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일련의 정책들을 실행하도록 했다. 1970~80년대에는 헝가리,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영국 등에서 대단위 법적 제재가 발동했다.


  저자는 책 발행 2년 후인 1964년에 쉰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녀를 빼고는 우리가 사는 21세기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행이도 나는 그녀를 대학의 여러 강의에서 상식 정도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고, 마침내 그녀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항간에는 환경 분야의 도서 중에서는 드물게 놀라운 문학적인 성취를 일군 수작이라고 평가한다.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원제 : Silent Spring)』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독자들은 알 것이다. 이 책은 문학적 성취로 논할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에게 <침묵의 봄>이 왜 중요하고 그토록 유명해졌는지는 이 책의 소재 중 하나인 ‘DDT’라는 살벌한 단어에서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    *    *



  사실 194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과학자들은 DDT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DDT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과학 분야의 군비로 개발되었다.)에 대해서 우려를 나타냈고, 미국 정부도 1950년대부터 DDT 사용 규제를 조금씩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규제가 강력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1957년 ≪뉴욕타임스≫지에서 뉴욕 나소 카운티의 DDT 사용 규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보도를 낸 이후 환경문제가 미국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쓰게 된 것이다. (사실 레이첼이 <침묵의 봄>을 쓰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그녀의 친구인 올가 허킨스가 1958년 1월 ≪보스턴 헤럴드≫지에 쓴 편지 때문이었다. 올가는 모기를 죽인다는 명분으로 공중 살포된 DDT 때문에 자기 소유의 새들이 죽었다는  호소문을 신문사에 편지로 보냈고, 레이첼에게 그 편지의 사본을 보내줬다.) 물론 DDT를 제조하는 의약품 회사들이 가만히 있진 않았지만 1970년 12월 2일 미국 정부가 환경보호국(EPA)을 설립하고 DDT를 사용을 규제하는 등 레이첼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큰 빛을 보게 되었다.


  DDT는 살충제이지만 레이첼은 이것을 ‘살생제’라 부른다. 이 공격적인 단어의 어감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은 레이첼의 『침묵의 봄』이 살충제와 같은 화학물질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을 펼치는 책일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물론 레이첼도 경제의 효용을 무시하진 않으며 해충을 억제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녀가 문제로 삼는 것은 ‘과다 사용’이다. 특정 해충으로부터 피해를 입는다면 그 피해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해충을 억제하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인데, 무차별적인 화학약품 살포로 인해 다른 종들이 특정 지역에서 ‘학살’ 당하는 사례가 무수히 많은 것이 문제였다. 레이첼과 같은 학자들만이 당시 이 문제에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DDT 살포로 피해를 받은 여러 지역의 주민들 역시 문제의 심각성을 몸소 체험한 바였다. 그러나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혹은 발생해야만 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정부는 아무래도 경제적 효용성을 별다른 분석 없이 맹종했던 것 같다.


  “인간의 충동적이고 부주의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신중한 속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새로운 변화가 초래된다.”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31쪽)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변화’란 대부분 부정적인 변화일 것이다. 생산 과다의 문제, 축적의 문제, 지표수와 지하수의 문제, 야생동물의 피해, 인간의 피해 등 수많은 문제가 야기되면서도 우리 세대들(과 이전 세대들)은 그러한 현상을 뉴스보도를 통해 한 번 듣고 가볍게 넘겨버리곤 한다. 지속적으로 올바른 환경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은 (우선 나부터도 그러한데) 거의 없다. 이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불행한 사실 그 자체다. “아마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왜곡된 균형감각에 놀랄 것이다.” (위의 책, 33쪽) 그렇다면 레이첼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며, 또한 주장하고 싶어 한 것일까.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사례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사례들의 결과는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치명적인 화학물질의 사용에서 야기된 여러 개체의 급감, 혹은 절멸이 그것이다. 합성 살충제는 제 2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비소 사용의 역사에서도 그렇듯 일반인들은 새로운 약품의 치명성에 대해서 거의 몰랐고, 심지어는 살충제를 몸에 뿌리기까지 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약품 통에 손을 넣었다가 다음 날 죽은 사람도 있다. 책에는 없지만 (부정적인 의미에서) 흥미로운 사례가 뭐가 있을까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몇 가지 발견한 게 있어 옮겨본다.


  다음 인용문은 10%의 DDT가 함유되어 있던 한 파우더 제품 광고를 번역해본 것이다. “벼룩, 이, 개미, 빈대, 바퀴벌레, 파리 등과 같은 기생충들을 박멸합니다. 네오사이드(※ DDT의 옛 이름이다.)를 해충에게 뿌리거나 곤충, 그리고 곤충이 지나다니는 곳에 뿌려두세요. 파우더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제자리에 두세요. 사람과 집의 기생충들을 박멸합니다. 해충이 바로 죽는 건 아니지만 조만간 반드시 죽습니다. 프랑스 제조품. 인간과 온혈동물에게 무해합니다. 확실하고 지속적인 효과. 무취” (Destroys parasites such as fleas, lice, ants, bedbugs, cockroaches, flies, etc.. Néocide Sprinkle caches of vermin and the places where there are insects and their places of passage. Leave the powder in place as long as possible." "Destroy the parasites of man and his dwelling". "Death is not instantaneous, it follows inevitably sooner or later." "French manufacturing"; "harmless to humans and warm-blooded animals" "sure and lasting effect. Odorless.) 이 제품은 치바-가이기 사가 만들었는데, 이 회사 소속의 화학자가 바로 DDT의 살충능력 발견으로 193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스위스의 파울 뮐러(Paul Müller)였다. 나는 이가 옮기는 발진티푸스를 예방하기 위해 한 미군 장교가 병사의 군복 속에 DDT를 뿌려주는 충격적인 사진을 본 적도 있다.

  (링크 : http://en.wikipedia.org/wiki/Ddt#mediaviewer/File:DDT_WWII_soldier.jpg)


  염화탄화수소(DDT로 널리 알려진 것)와 말라티온, 파라티온 등 유기인산은 탄소화학결합으로 탄생한 유독물질인데, 앞서 말한 스위스의 파울 뮐러가 발견한 이래 폭발적인 생산량에 힘입어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농업과 삼업, 어업 등에 투입되었다. 이 유독물질의 가장 큰 문제는 극도로 사소한 양의 차이가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인데, 사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생태계 자체에 미치는 피해의 양과 범위가 우리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연쇄적 중독, 농축, 혹은 잔류와 같은 먹이사슬 상에서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종 이기적’ 생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문제를 우리가 간과할 수는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구 상 전체 종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시각은 분명 더 넓어져야 한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위의 책, 126쪽) 환경윤리와 동물윤리에서 하는 주장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권’과 ‘존엄’에 대한 기존의 인간철학적 논의들이 그리 넓은 시야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레이첼이 직접 언급한 것 같진 않은데, 위와 같은 위험성에 대한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논의가 빗발치고 있는데도 정부가 이를 애써 묵인하고 대단위의 방제 작업을 실시한 것은 한편으로 (혹은 많은 면에서) 화학약품 제조업체와의 이익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레이첼은 정부가 과학적 무지에서 무책임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고 꼬집어 비판했지만 그녀도 자본주의 맥락 하에서 일단 가동된 ‘생산’의 엔진을 꺼버리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령 (이 책에 언급된 여러 사례 중에서 가장 사회적 논쟁이 많았던) ‘불개미 퇴치 사건’의 경우에도 그렇다. 과학자들은 불개미의 피해가 농가들이 불평을 털어놓은 것보다 훨씬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지만 정부는 일단 불개미 퇴치를 시작했고, 미 농무부에서는 불개미 방제 작업에 투입된 약품 때문에 가축피해를 입은 농가들의 또 다른 불평을 부정하고 대단위 방제 작업을 다시 실시했었다. DDT 공중 살포를 반대하는 롱아일랜드 주민들의 재심 요청은 미국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이러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 이 정도면 단순한 무지의 소행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온갖 화학방제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해충은 내성이 생기고 ‘익충’은 박멸된다. 『침묵의 봄』에는 한 챕터가 별도로 울새나 독수리와 같은 새의 절멸에 할애되어 있는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이 갑자기 없어져버리는 과정을 레이첼은 특유의 문학적인 문체를 동원해서 안타깝게 풀어냈다. 그러나 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종합적으로 봐야 하는 것은 생태계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전문적으로 거창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자연을 최대한 이전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일뿐이다. 인간 종에게는 이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화학방제 작업을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적인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레이첼도 그 성공적인 사례들을 여럿 언급한다. 이 사례들의 성공과 화학방제 작업의 실패를 극명하게 비교해놓은 여러 문단을 보면 정부의 정책이 무지의 결과라는 레이첼의 주장은 더욱 견고해진다. 특히 해충을 없애기 위해 익충을 활용하면서 곤충을 ‘자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동맹군’으로 봐야 하는데, 성공적인 방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초음파 이용,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의 활용, 호르몬 주입, 미생물(생물학적 방제) 활용, 천적 이용, 포식곤충과 기생곤충의 이용(전통적인 방법) 등이다. 가령 살충제의 경우에는 해충이 내성을 갖는 기간이 짧게는 6개월에서 보통은 2~3년, 길게는 6년 정도이다. 상당히 짧은 편이다. 이것도 일종의 ‘진화’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대안적인 방제는 ‘자연방제(Biological pest control)’라고 해서 자연의 균형을 유지(다른 종의 멸절을 방지)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거의 확실한 해충 억제의 효능까지 갖고 있다.


  레이첼은 보지 못했겠지만 1970년대 이후부터는 종합방제(Intergrated pest management), 즉 ‘IPM’이 UN의 권고로 세계 각지에서 실시되어 화학약품에 의존하던 방제 작업의 변화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UN 식량농업기구에서는 IPM을 “농업생태계의 잠재적인 교란을 최소화시켜 작물의 건강한 생장을 강조하고, 자연방제의 방법을 증진시키는(emphasizes the growth of a healthy crop with the least possible disruption to agro-ecosystems and encourages natural pest control mechanisms.)” 것이라고 정의했다. ‘유기농’을 생각하면 쉽다. 가격이 비싸서 그렇지 우리나라 소비자들도 대체로 유기농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이는 ‘생산성’에 열을 올리던 이전의 사고에서 우리가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소비자의 입장이 아니라 종 다양성 유지에 동참해야 하는 ‘하나의 개체’라는 인식을 갖기까지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다. 하지만 나는 레이첼의 시대보다 더 진전된 환경 인식을 지닌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편으로는 굳게) 믿고 있다.




*     *     *



  이따금 환경파괴와 훼손을 선정적으로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려는 환경 다큐멘터리들을 본다. 보는 내내 힘들다. 내가 평소 무심결에 하던 파괴와 훼손은 생각도 않고 대규모의 사례들만 비난하기도 한다. 초보적인 ‘인식’ 실수이다. 다행이도 나는 운이 좋아 대학 강의의 여러 분야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선구적인 인식과 고찰들을 접해볼 수 있었다. 내가 열렬한 환경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인식의 전환점에 설 수 있는 기본적인 생각들을 서서히 갖춰가는 과정에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그 과정 말이다. 레이첼의 이 책도 그러하고 가령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나 『희망의 자연』 등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고찰들을 책으로나마 접해보면서 나는 ‘인류적 차원’에서 해야 하는 반성이 무엇인지 그 실루엣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중요하다. 중요한 것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없다. 레이첼의 이 책은 모든 이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이다. ‘추천’이라는 말은 감히 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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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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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5일



  가을을 맞아 가족과 길상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오래된 절이 아니라 고풍스럽진 않았다. 아담한 수행공간들은 (모양으로 보든 배치로 보든) 현대적이었고, 대웅전은 마치 방금 머리를 깎은 동자승 같았다. 그러나 이 절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나 사찰이 갖는 의미 이상으로 중요한 공간이 있다. 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마당의 구석에 단아하게 핀 예쁜 꽃 한 송이가 보는 이의 마음을 잡아당기듯. 길상사에 핀 꽃은 사상의 꽃이다.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고 3년 전에 타계한 법정 스님의 꽃. 무언가를 갖거나 지갑을 열어야 존재의 생동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비우고 덜어내라 가르친 그의 ‘무소유’가, 별로 가진 것 없이 세상을 떠난 그의 영정에서부터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 들어가서 법정 스님이 임종을 맞이할 당시 갖고 있었던 유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눈으로 세어보았다. 몇 안 됐지만 그나마 있는 것들도 모두 헤진 채 그간 얼마나 만졌고 얼마나 스쳤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스님을 기린다는 이유로 사찰 측과 불자들이 정성들여 갖다 놓은 스님의 출간물이나 ‘스님의 삶’에 대한 설명문, CCTV 등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일을 한 누군가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받는다. 지고지순의 삶을 동경한 적이 있다면 그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법정 스님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물음이라기보다는 스님과 나의 삶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리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나는 반복해서 물었다. 문자로 드러난 그의 사상은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법정’이라는 단어로 우상화된 이미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의 꽃은 유리창 건너편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이 된다. 무소유는 멋진 것으로, 하지만 우리의 소유는 불가피한 것으로 못을 박으면서.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재고하라고 해도 나는 확신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우리에게 “너는 자꾸자꾸 가져도 돼. 안 갖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갖게 된다고. 남의 것을 빼앗아도 별 상관은 없어. 그렇고 그런 세상이니까.”라고 말하는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건 매한가지이다. 예수는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을 ‘사랑’이라 표현했고, 그보다 앞서 싯다르타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고 열반을 찾았다.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모든 철학자들은 이런 위대한 선인(先人)들을 모티프로 삼는다. 그들은 이전에 존재했으면서도 우리보다 한참을 앞서 나간 이들이었다. 도대체 “갖는다.”라는 것이, ‘소유’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지녔기에 우리에게는 때때로 금기로까지 지목되는가. 소유를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장 속 현대에서 아주 강력한 테제로 주목을 받아왔다. 무소유도 그런 외침 중 하나이다. 우리의 의지박약이, 혹은 문제의식의 부재가 고질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늘 같은 패턴이기에 일각에서는 개인의 변화로 사회의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변화의 중심을 개인에게 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가 얼마나 거대하며, 대부분 나와 얼마나 무관한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굉장히 멀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이 갖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무소유를 비롯한 변화의 테제들을 실천하려면 우리는 그 거리를 서로 좁혀 공감이나 일체감 같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통된 인식은 항간에 얼마든지 떠돌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력이 없다. 인식은 하는데, 다들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말이다. 나는 실천을 개인에게 지나칠 정도로 요구하지 않는 사상가의 주장에 그간 목이 말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뜬구름처럼 존재하는 사회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과 사회의 조합으로 (실패 여부는 차치하고 일단 발화의 단계에서만 보자면 수많은 역사적 혁명들이 그러했듯이)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 주장을 읽을 수 있었다.


  간단명료하고 별로 길지 않은 이 책에서 프롬의 주장을 잡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듯 프롬 역시 산업사회에서 출발한 근대를 실패작으로 본다. 근대의 출범과 함께 당대 사람들이 꿈꿨던 욕망의 삶은 결코 ‘완전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유의 마력은 너무나 강했고, 오늘날의 우리도 그것을 주식으로 삼는다. 프롬은 현대인의 모순을 지적한다. 고통당하면서도 낭비한다. 우리는 한사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파괴적이며,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편에서 낭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24쪽)


  프롬이 보기에 우리는 꽃을 꺾는 사람들이다. 그가 하나의 꽃을 두고 꺾어버리겠다는 서양의 의지와 멀리서 바라보겠다는 동양의 의지를 이 책의 들머리에서 사례로 든 것은 두 세계 사이의 의식 차이를 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마 어느 정도는 두 세계의 의식적 차이가 존재하리라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그보다 프롬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소유를 지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의식 간격이었다. “우유병을 달라고 울고 있는 영원한 젖먹이(위의 책 51쪽)”인 현대인은 꽃을 꺾는 테니슨 시의 화자가 된다. 반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바쇼가 쓴 하이쿠의 화자가 된다.


  이 책에서 저자 프롬의 사유는 일상을 반드시 거쳐 간다.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권력), 지식, 신념,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 (상당부분 겹치기도 하지만) 우리의 소유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예로 든 구절들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학생의 입장인 나는 그가 지식의 소유 방식에 대해 쓴 비판이 어떤 지적보다도 눈에 밟혔다. 독서를 통해 막대한 지식을 쌓아가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도 알맞은 통찰이리라.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 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게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ㅡ학교는 통상 학생들을 인간정신의 최고의 위업에 접하게 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특히 이러한 환상을 기르는 데 솜씨가 뛰어나다.” (위의 책 69쪽)


  종교에 대해 거의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역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또 부득이한 충고(아닌 충고)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의 제 3장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분석을 위해 할애되어 있다. 종교에 대한 중립적인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그 궁극이 어찌 됐든 간에 우리의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소유를 절제하라는 일종의 금욕을 제시한다. 구약도 그렇고, 신약도 그렇다.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이 중요하고, 물질보다는 (그리스도에서는 ‘말씀’으로 풀이되는) 정신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전파한 사상의 골자이다. 이런 삶을 실천하는 것이 누구의 뜻이라는 것, 혹은 그렇게 해야 어디로 간다는 것 등은 차치한다. 그래도 우리는 능동적으로 현세의 “자아 속박과 갈망을 극복(위의 책 100쪽)”하는 형태의 삶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살아가는 것에만 중점을 둔다면 소유하면서 살아가든 아니면 소유 이면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든 별 문제될 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프롬의 주장, 법정 스님의 주장, 혹은 수많은 종교에서 실천하라는 삶의 형태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스스로 날카롭게 긁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그런 주장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리 가져도, 혹은 (갖지 못하더라도) 아무리 추구해도 도무지 마음이 달래지지 않기에 수많은 밤을 불면증에 시달린, 우리와 갖은 정신적 ‘환자’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잠을 푹 자보겠다는 목표를 갖게 갖고 프롬이 이 책에서 말한 ‘소유양식’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서 서서히 ‘존재양식’으로 눈길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면증에 비유하긴 했으나, 우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즉 무언가를 재산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우리를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역시 재산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걸 의미하는 까닭이다.


  우리 스스로를 물건의 형태로 바꿔버리는 일. 내적인 강력한 동력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존재’, 혹은 ‘자아’가 우리 안에서 그걸 용납할 수 있을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우리의 존재 위에 가면을 씌워놓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일들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우리의 비근한 삶이다. 나는 그런 삶을 듣고 보고 느낀다.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프롬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가면을 쓰면서 타인과 경쟁하고, 타인에게 적의를 품고, 타인에게서 공포를 느낀다. 혹은 이 모든 것을 십분 발휘하면서 안도한다. 소유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면서도 정작 우리의 삶을 거대한 환상으로 만든다. 뜬구름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 구름을 걷어내 주겠다고, 삶의 진경을 보여주겠다고 주장하는 위대한 ‘말’들이 우리에게 그 구름처럼 보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진짜와 가짜가 완벽하게 전도(顚倒)된 삶. 이것이 이 책의 제 5~6장에 실린 내용이다.


  개인이 환상을 극복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실천에 있어서는 개인보다 더 큰 규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찌그러져 있고, 눌려 있고, 깨져 있는 우리에게 흡사 극복해내라는 영웅의식을 요구하는 것 같은 그 ‘실천’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이상적이란 말인가. 프롬도 한계를 느꼈다.


  “순전한 정신적인 변혁은 항상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거나 작은 오아시스에 한정되어 왔으며, 또 정신적인 가치의 설교와 그 반대되는 가치의 실천이 결합할 때에는 그것은 더욱 무력했다.” (위의 책 183쪽)


  프롬은 여기서 ‘사회적 성격’이라는 말을 쓴다. 이건 사회구조를 견고하게 만들거나 혹은 때려 부수는 일을 한다. 그는 이것을 집단의 차원에서 공유되는 사상과 행위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집단이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체계로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까? 프롬이 일례로 든 건 바로 ‘종교’다. 우리가 종교에게 헌신하는 태도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동력을 인식할 까닭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어떤 종교인가가 문제되는 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범종교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인간의 발달과 특히 인간적인 힘의 결실을 촉진하는 종교냐, 아니면 인간의 성장을 마비시키는 종교냐(위의 책 184쪽)”가 유일한 문제가 된다.


  그는 오늘날의 종교가 어떤 모습인지를 반추한다. 아무래도 그는 유대인이고 서구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통찰했으나, 우리는 다른 종교들도 모두 갖다 붙일 수 있다. 오늘날 그 어떤 종교가 프롬이 말한 ‘산업종교’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금 나의 서재에는 김경집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과 김근수의 『슬픈 예수』라는 책이 꽂혀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굳이 그 실태를 이 글에서 논하려고 하진 않겠다. 현대의 종교들을 겨냥한 프롬의 날카로운 통찰은 독자들이 자연스레 옛 가르침의 의미와 종교의 올바른 태도를 생각하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프롬을 비롯한 이런 주장들의 끝에 이르러 언제나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어떤 사상이 메아리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구제(救濟)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태도나 행위에 대한 모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프롬의 글을 읽으며 동감하면서도 그가 책의 말미에 제시할 우리의 길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반쯤은 기대도 하고 반쯤은 우려도 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성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가 그렇듯 프롬은 대규모의 변혁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프롬은 아주 당연한 네 가지의 조건을 들며 그것이 충족되면 대변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변혁은 ‘새로운 인간’의 등장, 그리고 기존의 생활습관 포기 등을 조건으로 한다. 그가 정의한 ‘새로운 인간’은 무려 21개의 항목에 걸쳐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나는 ‘뜬구름’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명저를 만났는가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늘 실패의 연속을 두려워하는 소시민적인 성격 탓일 것이고, 실제로 그런 책들을 많이 만난 까닭도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문제는 그의 주장이 아닌 나의 태도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이다. 다음 해에 치러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16강에 진출할 확률이 H조 4개국 중 3위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혹 누군가가 “2002년의 4강 신화를 재현할 수 있을 거야!”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걸 낙관이 아닌 공상으로 취급할 것이다. 심할 경우 우리는 그/그녀의 주장을 포기시키고자 이것저것의 경우를 따져서 알려주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그/그녀의 주장, 혹은 ‘꿈’을 포기시켜야 할까? 다시 말해, 우리는 높은 꿈을 꾸기 위해 확률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가? 계산은 경쟁적 요소이다. 확률은 상인의 진리이다. 프롬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인생은 확률 놀이도 아니려니와 상거래도 아니다.” (위의 책 258쪽)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책의 도입부를 읽으며 가졌던 거의 모든 희망을 책의 말미에 이르러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그가 대안으로 언급한 대부분의 것들은 그 이외의 학자들도, 혹은 비평가들도 사회를 진단하며 내릴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대안을 언급하는 방식도 문제인식과 비판이 대안 제시보다 분량 상 훨씬 많아 글 자체가 가분수로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면, 그건 다 옳은 말이었다. 프롬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또 한 번 세상을 뒤틀어서 본 것이었다. 걷어차 버린 희망의 빈자리에는 독서 내내 내가 쏟아 부었던 정신적 정력과 노력의 양에 비례하는 허무가 찾아온다. 내가 인문학을 접하면서 늘 신경 쓰는 부분도 “그 허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 나는 프롬의 조언을 허무의 발판으로 삼지 않으려고 그의 말미를 붙잡아 읽고 또 읽었다.


  희망이 실낱이라면, 확률적으로 매우 낮은 결승 진출과 같은 것이라면,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여 때론 법정 스님의 까마득한 무소유의 경지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면, 그리고 그 대안의 실천이 너무나도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비전의 매력에 의한 격려에 있다.(위의 책 264쪽)”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모여 아주 큰 꽃을 피우기 전까지 꾸준히 누군가에게 격려를 받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에는 별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수개월 전, 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을 읽다가 엄청난 상실감에 완독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오래된 미래』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기억하며 그녀의 신간을 읽은 탓도 있었고, 책의 대부분이 도무지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을 단호하게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흡사 리프킨의 『엔트로피』에서 말하는 ‘작은 것으로의 귀환’을 연상케 했다. (그녀가 말하는 핵심 주장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프롬의 말미에서 그 상실을 보장받는 힘을 얻었다. 여전히 추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생각의 양이 적을 탓일 것이다. 받아들인 비판보다는 실망 속에 튕겨낸 조언들이 더 많은 탓이리라.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리뷰는 늘 이런 일기로 끝나게 된다. 구차한 패턴인 것 같아 비근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많으나, 질문을 잠시 바꿔본다. 과연 나는 몇 차례나 다짐을 이행했는가.


  프롬의 글은 나 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나의 ‘사회’가 쓴 일기에 대한 선생님의 따끔한 답장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이 답장을 읽느냐가 우리가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따져야 하는 유일한 문제다. 너무나도 유일하므로, 이렇게밖에 쓸 수가 없다. 그러나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건, 수많은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는 뜻밖의 희망이기도 하다. 하나를 두고 절망하느냐, 그 하나를 두고 희망을 갖느냐. 올바른 말을 따르자면 우리의 선택은 두말할 나위 없이 ‘희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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