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9일




    어제 뉴스에서 일본의 2020 도쿄 올림픽 주최로 전 세계가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한가운데, 일본의 도심에서 강도 높은 반한시위가 벌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우경화는 맹목적 폭력을 가능케 한다. 에릭 호퍼는 『맹신자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험담하거나 꼬치꼬치 캐묻거나 참견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또한 공동체나 국가, 인종문제에 대한 열띤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 문제는 회피하면서 이웃의 어깨에 매달리든 목을 조르려고 덤벼들든 하는 것이다.(p.32)" 현 일본 정권과 극우세력이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더 이상 손가락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의 샴페인 압력처럼 강해지자, 그 손가락을 놓은 대신 어떤 이슈들을 꺼내 국민적 관심의 돌리려고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실패하고 있는지(혹은 이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한 수가 의외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우리는 에릭 호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70여 년 전, 히틀러도 이런 식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보르헤스의 「독일 진혼곡」은 고통을 참아가며 읽어야만 했다. 이 단편은 나치에 가담한 혐의로 총살형을 선고받은 오토 디트리히 주르 린데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신이 왜 나치에 가담하게 되었고, 끔찍한 고문을 저지르는 수용소 부소장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아이히만처럼 뭐라고 변명하지 않는다. 오토는 그것을 매우 지저분한 행동이라는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보르헤스가 순차적으로 조직한 오토의 논리는 반박하기가 무척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타당하다. 물론 이런 교묘한 논리의 최대 약점은 논리의 여러 면을 이어주는 이음새를 제거해주면 논리 전체가 사상누각처럼 무너진다는 것이며,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이음새, 즉 오토의 논리가 지닌 결정적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열쇠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오토가 왜 나치에 가입해 살인마로 변신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해봐야 한다.


    오토의 집안은 대대로 독일(과 프로이센)을 위해 헌신한 군인을 배출했었는데, 가문의 이러한 내력이 오토의 미래를 예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사유방식이나 그가 중간에 고백한 '비폭력적 성향'으로 미뤄보건대, 오토는 군인보다는 사변가에 훨씬 가깝다. 때문에 그는 군인과는 달리 어떤 형이 선고되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오직 독자들에게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받고 싶어 한다. 이 점에서 오토는 나치즘마저 뛰어넘어서 나치즘과 여러 민족주의적 광풍을 포괄할 수 있는 거대한 논점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따라서 오토는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호소력을 갖는다.


    오토는 브람스와 셰익스피어의 다양한 세계, 그 상상력을 좋아했으며, 사상적으로는 쇼펜하우어에 심취했었다. 문학과 사상의 두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감명을 받은 그는 신학의 세계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초반 독일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슈펭글러의 역사관에 반해 호전적이고 독일적(kerndeutsch)인 사상에 빠지게 되고, 결국 1929년에 나치당에 입당한다. 물론 그가 초기당원 시절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그에게는 열혈당원이 갖춰야 하는 폭력성이 전무했다. 그러나 오토가 나치당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시대 인식이 당시 너무나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모로코로 향하던 독일의 잠수함을 힘을 합해 막아세운 사건 이후 '독일다움'을 내세워 사회가 곧 새로운 영웅의 등장과 함께 부강해질 것이며, 언젠가는 독일인이 런던에 입성하게 될 것이라는 사상에 젖어 있었다. 알다시피 이런 정도의 열기는 어마어마한 크기와 두께의 '정당화'를 만들어낸다. 이런 시대에 오토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39년 4월 1일, 그가 탈시트의 소요 사태 도중 (그것도 하필이면 유태교당 뒷길에서) 총상을 입어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는 대신 병원에서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오토는 쇼펜하우어를 도구로 삼았다. 그리스도교를 싫어하고 힌두교와 불교를 좋아한 쇼펜하우어에게서 오토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개별적 목적론'이었다. 모든 것이 인과로 연결되어 있는 동양적 사상은 오토에게 자신의 운명 퍼즐을 구미에 맞게 맞출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총상으로 인해 갖게 된 가공할 만한 복수심을 차마 자신의 신조인 비폭력적 입장으로는 표출할 수 없었기에 논리적으로 그 복수심을 돌려 표현할 수단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얼마나 이 목적론을 갈구했는지는 그의 술회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불행을 자초했다는 생각만큼 뛰어난 위안은 없다. 이러한 개별적 목적론은 우리에게 신비스러운 질서를 드러내 보이며, 불가사의하게도 우리를 신과 혼동하도록 만들어준다.(p.119)" 서로 닿아 있는 사건의 연속을 사유하면서 오토가 결과적으로 도착할 수밖에 없었던 질문은, 당연히 왜 자신이 총상을 입어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치명적인 논리 실수를 저지른다. 자신은 전쟁터에 나가 죽을 운명이 아니라, 다리를 자르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살아남아 다른 의미에서 '나치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 것이다. 그는 사도 바오로의 삶이 단순한 순교자의 삶보다 훨씬 값지며 어렵다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삶이 나폴레옹의 삶보다 역시 훨씬 값지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 수용소의 부소장이 된 건 다리에 총상을 입은 지 2년 즈음 되던 1941년 겨울의 일이었다.


    이 무렵 그에게 있어 나치의 의미는 매우 확고했다. 오토는 "나치즘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옛사람에게 새옷을 입히기 위해 그의 옷을 벗기는 도덕적 행위(p.120)"라고 말했다. 이런 행위는 전쟁터에서 행해지기 마련이다. 이어 부소장이 된 오토는 수용소와 전쟁터의 차이를 '자비심'이라 말한다. 아마 여기서 말하는 '자비'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계속 살려두는 (물론 언젠가는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비극의 방식처럼 죽음에 이르도록 하겠지만) 행위를 의미하는 듯하다. 오토가 경멸하는 것이 바로 이 자비심이다. 그는 짜라투스트라가 초월자가 허락한 자비심마저 거절했다는 신화적 사실을 언급하면서 (마치 자신을 초월자에 비유하는 것 같은데) 자신이 자비심을 베풀기 일보 직전까지, 즉 실수하기 직전까지 갔었던 사례 하나를 마치 보고서를 낭독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다시 말해, '다비드 예루살렘'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자신이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50대의 다비드는 가난한 문인으로 수용소에 이전될 때까지 숱한 박해를 받아왔다.


    그는 오토가 매우 신경 쓴 수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오토는 다비드가 당시 휘트먼에 비견되는 문인이었으나 휘트먼의 우주적 특성과 다비드의 개별에 집중하는 문학적 특성을 구별할 줄도 알았고, 심지어는 오토의 시를 외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가 다비드를 죽인 방식은 독특하다. 대형 수용소에서는 주로 가스실을 이용했지만 오토는 다비드를 미쳐서 죽게 만들었다. 그는 사람이 한 가지만을 계속 생각하면 미친다는 원리를 처벌에 적용해서 다비드를 1942년 말 거의 미치도록 만들었고, 다비드는 다음 해 3월 1일에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우리는 제각각 광인의 죽음에 대해 상상해볼 수 있다.) 오토는 자신이 다비드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비드가 자신의 "영혼이 저주하는 한 지점의 상징(p.122~123)"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영혼이란 자비심이고, 다비드는 그가 거의 자비심을 베풀 뻔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철저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위안적이었기 때문에) 오토는 독일의 패망에 앞서 슬픔보다는 행복을 느끼는 기형적인 나치당원이 되었다. 그가 느낀 행복은 "신비롭고 거의 공포스럽기조차 한(p.124)행복으로, 오토는 그 행복의 이유를 찾기 위해 세 가지의 결론을 언급하고 이들 모두가 정답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첫째는 자신이 벌의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 둘째는 지쳤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여기서 그가 지쳤다고 표현한 것으로 미뤄봐도 그가 오토에게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그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뇌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치밀한 잔인성이 발휘된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는 모든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만 비난하는 것은 우주를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의 것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이 모두는 정답이 아니었고, 오토가 발견한 최종적인 답안은 놀랍게도 'A vs B'라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세계관에서 비롯됐다. 그는 이를 '아리스토텔레스 vs 플라톤'의 대결, 그리고 '히틀러 vs 유대주의의 병'으로, 거의 상징적으로 표현했는데 이 발상에 이르면 호전적이고 독일적이었던 그의 초기 세계관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변질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특별히 나치즘만을 상징하지 않기 때문에 독일이 패망하더라도 '폭력'이라는 것이 남았으므로 그리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나치즘이 "유태주의에 폭력과 칼의 신앙을 가르쳐주었(p.125)"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폭력의 지배 뿐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비굴한 기독교적인 소심함이 아닌 폭력이 지배하기만 하는 것 아닌가.(p.126)"


    여기서 우리는 오토의 치명적인 논리 약점, 그가 '폭력'에 주안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쉽게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오토의 맹신을 제거하더라도 논리와 논리를 통해 이동해서 잔인한 살인마의 길을 걷게 된 그의 과정은 (이런 표현을 용서한다면) 우아할 정도로 정교하다. 이 논리의 연속에는 분명 어떤 매력이 존재한다. 정신에 심미적 요소가 결합하면서 오토는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거울을 바라보며 한 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나치의 (힘겨운) 삶을 살다 죽는 것을 자신의 운명적 사슬이라고, 고집스럽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 사슬을 엮어 간 오토의 방식은 (우리가 겪어보지도 않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나치즘에 대한 분노에 잠시 제동을 건다. 우리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우리에게는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의 얼굴이 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거의 모두가 알고 있다. 뜨겁고 아름다우며 심지어는 유전적으로도 친숙할 수 있는 그 그릇된 길로 우리가 걷지 말아야 하는 것은 비극의 반복을 용납하지 말아야 하는 우리의 당위이다. 나는 오토의 사상을 이해해야만 「독일 진혼곡」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단편을 여러 차례 고통스럽게 읽었고, 결국 그의 논리가 갖는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만 다른 이들이 그 매력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Jin 2015-02-24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단편을 읽은 후에 굉장한 혼란이 왔어요. 보르헤스가 자신이 써온 수많은 글에 반복해서 담아온 이야기들을 왜 나치즘과 이렇게 교묘히 연결시켜 얼핏 당위성을 부여한 것처럼 보이게 했는지 충격적이었고 그의 의도가 무엇일까 계속해서 생각해보게 하더군요. 나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이 시점에서도 그가 창조한 한 나치당원의 말에 홀리는 것을 보면 결국은 아직 나치즘은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다른 형태로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됐달까요...황병하씨 번역이 다소 터프한 면이 있어서 반복해서 읽어도 와닿지 않는 문장들이 꽤 있었는데 이해에 도움이 됐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_^

부물 2016-10-2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의 독일 진혼곡에 대한 명쾌한 해설에 감사합니다. 특히 `이런 교묘한 논리의 최대 약점은 논리의 여러 면을 이어주는 이음새를 제거해주면 논리 전체가 사상누각처럼 무너진다는 것이며,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이음새, 즉 오토의 논리가 지닌 결정적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열쇠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오토가 왜 나치에 가입해 살인마로 변신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해봐야 한다.`는 지점에서 베르나르 키리니의 기름바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인공의 알레고리가 풀리는 열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숙제하면서 이 단락장으로 부터 도움을 받게 되어 감사한 마음을 남깁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