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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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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5일



  가을을 맞아 가족과 길상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오래된 절이 아니라 고풍스럽진 않았다. 아담한 수행공간들은 (모양으로 보든 배치로 보든) 현대적이었고, 대웅전은 마치 방금 머리를 깎은 동자승 같았다. 그러나 이 절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나 사찰이 갖는 의미 이상으로 중요한 공간이 있다. 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마당의 구석에 단아하게 핀 예쁜 꽃 한 송이가 보는 이의 마음을 잡아당기듯. 길상사에 핀 꽃은 사상의 꽃이다.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고 3년 전에 타계한 법정 스님의 꽃. 무언가를 갖거나 지갑을 열어야 존재의 생동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비우고 덜어내라 가르친 그의 ‘무소유’가, 별로 가진 것 없이 세상을 떠난 그의 영정에서부터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 들어가서 법정 스님이 임종을 맞이할 당시 갖고 있었던 유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눈으로 세어보았다. 몇 안 됐지만 그나마 있는 것들도 모두 헤진 채 그간 얼마나 만졌고 얼마나 스쳤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스님을 기린다는 이유로 사찰 측과 불자들이 정성들여 갖다 놓은 스님의 출간물이나 ‘스님의 삶’에 대한 설명문, CCTV 등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일을 한 누군가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받는다. 지고지순의 삶을 동경한 적이 있다면 그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법정 스님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물음이라기보다는 스님과 나의 삶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리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나는 반복해서 물었다. 문자로 드러난 그의 사상은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법정’이라는 단어로 우상화된 이미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의 꽃은 유리창 건너편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이 된다. 무소유는 멋진 것으로, 하지만 우리의 소유는 불가피한 것으로 못을 박으면서.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재고하라고 해도 나는 확신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우리에게 “너는 자꾸자꾸 가져도 돼. 안 갖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갖게 된다고. 남의 것을 빼앗아도 별 상관은 없어. 그렇고 그런 세상이니까.”라고 말하는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건 매한가지이다. 예수는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을 ‘사랑’이라 표현했고, 그보다 앞서 싯다르타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고 열반을 찾았다.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모든 철학자들은 이런 위대한 선인(先人)들을 모티프로 삼는다. 그들은 이전에 존재했으면서도 우리보다 한참을 앞서 나간 이들이었다. 도대체 “갖는다.”라는 것이, ‘소유’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지녔기에 우리에게는 때때로 금기로까지 지목되는가. 소유를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장 속 현대에서 아주 강력한 테제로 주목을 받아왔다. 무소유도 그런 외침 중 하나이다. 우리의 의지박약이, 혹은 문제의식의 부재가 고질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늘 같은 패턴이기에 일각에서는 개인의 변화로 사회의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변화의 중심을 개인에게 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가 얼마나 거대하며, 대부분 나와 얼마나 무관한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굉장히 멀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이 갖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무소유를 비롯한 변화의 테제들을 실천하려면 우리는 그 거리를 서로 좁혀 공감이나 일체감 같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통된 인식은 항간에 얼마든지 떠돌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력이 없다. 인식은 하는데, 다들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말이다. 나는 실천을 개인에게 지나칠 정도로 요구하지 않는 사상가의 주장에 그간 목이 말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뜬구름처럼 존재하는 사회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과 사회의 조합으로 (실패 여부는 차치하고 일단 발화의 단계에서만 보자면 수많은 역사적 혁명들이 그러했듯이)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 주장을 읽을 수 있었다.


  간단명료하고 별로 길지 않은 이 책에서 프롬의 주장을 잡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듯 프롬 역시 산업사회에서 출발한 근대를 실패작으로 본다. 근대의 출범과 함께 당대 사람들이 꿈꿨던 욕망의 삶은 결코 ‘완전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유의 마력은 너무나 강했고, 오늘날의 우리도 그것을 주식으로 삼는다. 프롬은 현대인의 모순을 지적한다. 고통당하면서도 낭비한다. 우리는 한사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파괴적이며,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편에서 낭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24쪽)


  프롬이 보기에 우리는 꽃을 꺾는 사람들이다. 그가 하나의 꽃을 두고 꺾어버리겠다는 서양의 의지와 멀리서 바라보겠다는 동양의 의지를 이 책의 들머리에서 사례로 든 것은 두 세계 사이의 의식 차이를 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마 어느 정도는 두 세계의 의식적 차이가 존재하리라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그보다 프롬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소유를 지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의식 간격이었다. “우유병을 달라고 울고 있는 영원한 젖먹이(위의 책 51쪽)”인 현대인은 꽃을 꺾는 테니슨 시의 화자가 된다. 반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바쇼가 쓴 하이쿠의 화자가 된다.


  이 책에서 저자 프롬의 사유는 일상을 반드시 거쳐 간다.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권력), 지식, 신념,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 (상당부분 겹치기도 하지만) 우리의 소유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예로 든 구절들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학생의 입장인 나는 그가 지식의 소유 방식에 대해 쓴 비판이 어떤 지적보다도 눈에 밟혔다. 독서를 통해 막대한 지식을 쌓아가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도 알맞은 통찰이리라.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 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게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ㅡ학교는 통상 학생들을 인간정신의 최고의 위업에 접하게 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특히 이러한 환상을 기르는 데 솜씨가 뛰어나다.” (위의 책 69쪽)


  종교에 대해 거의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역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또 부득이한 충고(아닌 충고)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의 제 3장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분석을 위해 할애되어 있다. 종교에 대한 중립적인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그 궁극이 어찌 됐든 간에 우리의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소유를 절제하라는 일종의 금욕을 제시한다. 구약도 그렇고, 신약도 그렇다.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이 중요하고, 물질보다는 (그리스도에서는 ‘말씀’으로 풀이되는) 정신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전파한 사상의 골자이다. 이런 삶을 실천하는 것이 누구의 뜻이라는 것, 혹은 그렇게 해야 어디로 간다는 것 등은 차치한다. 그래도 우리는 능동적으로 현세의 “자아 속박과 갈망을 극복(위의 책 100쪽)”하는 형태의 삶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살아가는 것에만 중점을 둔다면 소유하면서 살아가든 아니면 소유 이면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든 별 문제될 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프롬의 주장, 법정 스님의 주장, 혹은 수많은 종교에서 실천하라는 삶의 형태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스스로 날카롭게 긁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그런 주장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리 가져도, 혹은 (갖지 못하더라도) 아무리 추구해도 도무지 마음이 달래지지 않기에 수많은 밤을 불면증에 시달린, 우리와 갖은 정신적 ‘환자’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잠을 푹 자보겠다는 목표를 갖게 갖고 프롬이 이 책에서 말한 ‘소유양식’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서 서서히 ‘존재양식’으로 눈길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면증에 비유하긴 했으나, 우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즉 무언가를 재산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우리를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역시 재산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걸 의미하는 까닭이다.


  우리 스스로를 물건의 형태로 바꿔버리는 일. 내적인 강력한 동력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존재’, 혹은 ‘자아’가 우리 안에서 그걸 용납할 수 있을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우리의 존재 위에 가면을 씌워놓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일들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우리의 비근한 삶이다. 나는 그런 삶을 듣고 보고 느낀다.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프롬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가면을 쓰면서 타인과 경쟁하고, 타인에게 적의를 품고, 타인에게서 공포를 느낀다. 혹은 이 모든 것을 십분 발휘하면서 안도한다. 소유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면서도 정작 우리의 삶을 거대한 환상으로 만든다. 뜬구름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 구름을 걷어내 주겠다고, 삶의 진경을 보여주겠다고 주장하는 위대한 ‘말’들이 우리에게 그 구름처럼 보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진짜와 가짜가 완벽하게 전도(顚倒)된 삶. 이것이 이 책의 제 5~6장에 실린 내용이다.


  개인이 환상을 극복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실천에 있어서는 개인보다 더 큰 규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찌그러져 있고, 눌려 있고, 깨져 있는 우리에게 흡사 극복해내라는 영웅의식을 요구하는 것 같은 그 ‘실천’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이상적이란 말인가. 프롬도 한계를 느꼈다.


  “순전한 정신적인 변혁은 항상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거나 작은 오아시스에 한정되어 왔으며, 또 정신적인 가치의 설교와 그 반대되는 가치의 실천이 결합할 때에는 그것은 더욱 무력했다.” (위의 책 183쪽)


  프롬은 여기서 ‘사회적 성격’이라는 말을 쓴다. 이건 사회구조를 견고하게 만들거나 혹은 때려 부수는 일을 한다. 그는 이것을 집단의 차원에서 공유되는 사상과 행위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집단이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체계로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까? 프롬이 일례로 든 건 바로 ‘종교’다. 우리가 종교에게 헌신하는 태도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동력을 인식할 까닭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어떤 종교인가가 문제되는 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범종교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인간의 발달과 특히 인간적인 힘의 결실을 촉진하는 종교냐, 아니면 인간의 성장을 마비시키는 종교냐(위의 책 184쪽)”가 유일한 문제가 된다.


  그는 오늘날의 종교가 어떤 모습인지를 반추한다. 아무래도 그는 유대인이고 서구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통찰했으나, 우리는 다른 종교들도 모두 갖다 붙일 수 있다. 오늘날 그 어떤 종교가 프롬이 말한 ‘산업종교’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금 나의 서재에는 김경집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과 김근수의 『슬픈 예수』라는 책이 꽂혀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굳이 그 실태를 이 글에서 논하려고 하진 않겠다. 현대의 종교들을 겨냥한 프롬의 날카로운 통찰은 독자들이 자연스레 옛 가르침의 의미와 종교의 올바른 태도를 생각하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프롬을 비롯한 이런 주장들의 끝에 이르러 언제나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어떤 사상이 메아리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구제(救濟)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태도나 행위에 대한 모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프롬의 글을 읽으며 동감하면서도 그가 책의 말미에 제시할 우리의 길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반쯤은 기대도 하고 반쯤은 우려도 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성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가 그렇듯 프롬은 대규모의 변혁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프롬은 아주 당연한 네 가지의 조건을 들며 그것이 충족되면 대변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변혁은 ‘새로운 인간’의 등장, 그리고 기존의 생활습관 포기 등을 조건으로 한다. 그가 정의한 ‘새로운 인간’은 무려 21개의 항목에 걸쳐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나는 ‘뜬구름’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명저를 만났는가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늘 실패의 연속을 두려워하는 소시민적인 성격 탓일 것이고, 실제로 그런 책들을 많이 만난 까닭도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문제는 그의 주장이 아닌 나의 태도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이다. 다음 해에 치러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16강에 진출할 확률이 H조 4개국 중 3위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혹 누군가가 “2002년의 4강 신화를 재현할 수 있을 거야!”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걸 낙관이 아닌 공상으로 취급할 것이다. 심할 경우 우리는 그/그녀의 주장을 포기시키고자 이것저것의 경우를 따져서 알려주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그/그녀의 주장, 혹은 ‘꿈’을 포기시켜야 할까? 다시 말해, 우리는 높은 꿈을 꾸기 위해 확률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가? 계산은 경쟁적 요소이다. 확률은 상인의 진리이다. 프롬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인생은 확률 놀이도 아니려니와 상거래도 아니다.” (위의 책 258쪽)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책의 도입부를 읽으며 가졌던 거의 모든 희망을 책의 말미에 이르러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그가 대안으로 언급한 대부분의 것들은 그 이외의 학자들도, 혹은 비평가들도 사회를 진단하며 내릴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대안을 언급하는 방식도 문제인식과 비판이 대안 제시보다 분량 상 훨씬 많아 글 자체가 가분수로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면, 그건 다 옳은 말이었다. 프롬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또 한 번 세상을 뒤틀어서 본 것이었다. 걷어차 버린 희망의 빈자리에는 독서 내내 내가 쏟아 부었던 정신적 정력과 노력의 양에 비례하는 허무가 찾아온다. 내가 인문학을 접하면서 늘 신경 쓰는 부분도 “그 허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 나는 프롬의 조언을 허무의 발판으로 삼지 않으려고 그의 말미를 붙잡아 읽고 또 읽었다.


  희망이 실낱이라면, 확률적으로 매우 낮은 결승 진출과 같은 것이라면,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여 때론 법정 스님의 까마득한 무소유의 경지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면, 그리고 그 대안의 실천이 너무나도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비전의 매력에 의한 격려에 있다.(위의 책 264쪽)”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모여 아주 큰 꽃을 피우기 전까지 꾸준히 누군가에게 격려를 받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에는 별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수개월 전, 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을 읽다가 엄청난 상실감에 완독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오래된 미래』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기억하며 그녀의 신간을 읽은 탓도 있었고, 책의 대부분이 도무지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을 단호하게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흡사 리프킨의 『엔트로피』에서 말하는 ‘작은 것으로의 귀환’을 연상케 했다. (그녀가 말하는 핵심 주장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프롬의 말미에서 그 상실을 보장받는 힘을 얻었다. 여전히 추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생각의 양이 적을 탓일 것이다. 받아들인 비판보다는 실망 속에 튕겨낸 조언들이 더 많은 탓이리라.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리뷰는 늘 이런 일기로 끝나게 된다. 구차한 패턴인 것 같아 비근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많으나, 질문을 잠시 바꿔본다. 과연 나는 몇 차례나 다짐을 이행했는가.


  프롬의 글은 나 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나의 ‘사회’가 쓴 일기에 대한 선생님의 따끔한 답장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이 답장을 읽느냐가 우리가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따져야 하는 유일한 문제다. 너무나도 유일하므로, 이렇게밖에 쓸 수가 없다. 그러나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건, 수많은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는 뜻밖의 희망이기도 하다. 하나를 두고 절망하느냐, 그 하나를 두고 희망을 갖느냐. 올바른 말을 따르자면 우리의 선택은 두말할 나위 없이 ‘희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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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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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8일



  짤막한 지식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때가 온다. 사람마다 시기는 다르리라. 나는 중학생 때였다. 지도를 좋아하던 나에게는 세계의 곳곳이 그리도 궁금할 수가 없었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곳은 단어와 수식, 그리고 기호로 이뤄진 곳이 아니라 하나하나 이야기가 살아 있는 곳이었다. 나는 왜 그 이야기들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과목을 세계 각지의 이야기 속에서 배울 수 있을 텐데.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이야기를, 재미있는 세상을 알고 있는 선생님들도 그걸 가르치지 않는 교과 과정 속에 우리와 함께 묶여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사이시다. 이제 ‘학생’이라는 공식적인 꼬리표를 머지않아 뗄 나는 부모님과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 푸념하는 시간이 요즘 부쩍 많아졌다. 국어교사이신 두 분은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중요한 건 국어‘시험’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 그 말을 둘러싼 이야기라고.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딱딱한 책보다는 강물처럼 흐르는 이야기책을 더 좋아한다.


  고등학생 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대학’이라는 걸 하고 보니 내가 공부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됐다. 뼈가 저렸다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는 대학의 과정에서 자주 빗나갔다. 수 십 개의 강의 중 단 몇 개만을 제외하면 나는 도무지 배운 것이 없었다. 차근차근 잘 따라가서 취업 준비 열심히 하는 학우들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 알고 있다. 그냥 하는 거란다. 젊음의 패기 같은 것으로. 집안의 기대도 있고, 비싼 학비를 미래에는 꼭 ‘플러스’로 만들어보겠노라는 야무진 다짐도 있었다. 분위기나 사정을 보면 대학생들은 아마 다 알 것이다. 인문학자, 철학자, 그리고 비평가들을 비롯한 세상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대학(大學)’의 의미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대학의 여정에서는 숫자의 의미가 너무나도 현실적이라는 것. 미세먼지가 자욱한 곳에서는 마스크라도 일단 쓰고 봐야 하고, 불이 붙은 나무에는 빨리 물을 끼얹어야 나중에 재생할 기회라도 생긴다. 이런 심정인 것이다. 회계사 시험에 필요한 영어 점수가 5점 모자라 다시 시험을 봐야 했던 한 친구의 앞에서 나는 그가 마치 심장 속까지 빨아들였다가 뱉는 것 같은 담배 연기를 무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배우고 익힌다. 공자에게 가장 중요했던 단어. 무지하여 세상에 휩쓸리던 몽매한 백성들에게, 그리고 세상 판단을 잘못하여 백성들을 잘못 이끄는 통치자들에게 그가 하고 싶었던 말. 오늘날 우리에게는 OMR 카드, 논술, 혹은 면접을 위한 필수 의례. 공자는 이 세상의 ‘학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이해할 것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라 외친 그가, 배우지 않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지식의 유포가 어느 때보다도 용이해 수많은 사람들이 상식을 붙들고 사는, 오늘날은 정말 풍족한 시대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스승’들의 비판을 받는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우리는 배우고 익히라는 당연한 말을, 우리가 늘 하는 행동에 대한 교정을 요구받는가.


  “인격적 자질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 지적 능력은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지적 능력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효과의 본질이 결정된다. 지성을 올바로 규제하려면 당연히 지성과는 다른 자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공부하는 삶』, 43~44쪽)


  100년도 더 전에 한 철학자가 적은 말이다. 그는 신학자였기에 그의 책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중요한 내용들은 ‘신’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지성을 올바로 규제”할 수 있는 자질을 신이 아닌 우리 내면으로 이어놓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종교의 틀에서 살며시 벗어나 바로 곁에 있는 ‘나’에 대해 스스로 논해볼 수 있다. (그리고 세르티양주의 책을 읽어보면 사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자질이 대개 종교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단독적인 ‘신’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불교에서의 진리, 도교에서의 진리도 세르티양주가 말하는 지성을 통제하는 자질의 특징에 들어간다. 경건함, 전체성 같은 것들 말이다. 종교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해서 굳이 그 독자가 세르티양주의 설명에 거북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도 알고 있다. 단편적인 것들만을 배워서는 인생을 알 수가 없다는 사실. 우리에게는 경험을 통한 ‘인생 공부’라는 것이 필요하고, 어른들은 이를 통해 보다 성숙해지고 삶을 깨닫게 된다고 조언한다. 세르티양주는 종교의 선상에서 말을 하지만 우리가 들어야 할 ‘현실적인 조언’들은 오늘날 항간에 널리 알려진 인생 조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성찰이 확연히 깊다는 차이만 있을 뿐. 나는 이왕이면 속 깊은 이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세르티양주의 『공부하는 삶』은 공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룬다. 성찰과 실용을 오고 가는 그의 단호한 말투에서 독자들은 인생의 더할 나위 없는 스승을 만났다는 안도를 느낄 수 있으리라. 누군가는 언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르티양주의 조언에서, 또 다른 이는 언행일치, 혹은 ‘독행(讀行)일치’를 강조하는 그의 따끔한 충고에서 각별한 감정을 느끼고 돌아갔을 것이다. 워낙 많은 양의 비가 내리기에, 한낱 한 사람의 독자일 뿐인 우리가 그 모든 비를 맞을 수는 없다. 비를 전부 맞으려는 욕심을 애당초 내려놓고, 나는 비처럼 내리는 세르티양주의 조언을 한 바퀴 돌며 내가 유독 기억하게 된 빗방울의 촉감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사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던 내가 구태여 이 독서의 기록을 남기게 된 까닭은 그 ‘촉감’ 때문이었다.


  글 쓰는 이들은 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읽은 만큼 쓰지 못한다는 것, 읽기만 하고 쓰지 않아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 수 십 페이지의 글을 써놓고 다음날 그걸 몽땅 지워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 그렇게 욕심을 호되게 꾸짖고 홀로 가슴 아파하면서도 묵묵하게 타인의 문장을 읽어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젊어서 누가 물어보겠냐만) 내게 글쓰기가 왜 힘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글은 정말 쓰기 쉽다. 수식어만 조금 붙여줘도 꽃 피는 것이 문장이다. 그러나 ‘나’와 대화하고, 그 대화를 곱씹고, 시일이 지난 후에 또 생각해보고, 엄청난 생각이 쏟아져 나와 봄날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그려놓고도 그 꽃이 질 때가 되면 스스로 지워야 하는, 이런 모든 과정은 고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는 알 수 없는 대상이다. 어떤 ‘나’를 만나는가, 이것도 글쓰기의 소위 ‘포트 X’, 모든 판도를 바꿔놓는 변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힘든 이유는 글을 쓰지 않아야 할 때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치솟기 때문이다. 욕심은 주인을 기만한다. “지금 써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네가 쓸 수 있는 생애 최고의 문장을 날려버리고 말 거야.” 그것은 달콤하나, 입에 넣는 순간 사라진다.


  “성찰할 수 있을 때는 절대 읽지 마라. 휴식 시간 이외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와 관련이 있는 것만 읽어라. 그리고 내면의 고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적게 읽어라.” (위의 책, 215쪽)


  세르티양주는 읽는 것도 조심하라고 말한다. 나는 평소 작문과 독서의 관계를 논밭의 고랑과 이랑으로 그려왔었다. 독서가 몸을 낮추면 작문이 마음속에 가득 들어차고, 그 반대는 그 반대다. 경험으로도 대략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았다. 많이 읽을 때에는 ‘나’에 대한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온통 책에 대한 생각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서는 일단 ‘나’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시시각각 ‘나’와 연결시키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독서를 통해 ‘나’와 가까워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한 번 다시 생각해보시길. 우리는 ‘읽음’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외부와 긴밀하게 연결되는가?) 타인의 글은 타인의 글이다. 그걸 읽고 재고하여 ‘나’의 어떤 고리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작 ‘나’와 관련된 중요한 생각들은 아주 나중에야 불현듯 찾아온다. 그 순간 글을 쓰다보면 ‘예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의 발단에 고이 꽂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는 ‘집중’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세르티양주는 독서에 집중할 때와 성찰에 집중할 때를 나눴다. 독서, 성찰, 그리고 작문의 관계가 그의 가르침을 통해 더욱 명료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금욕이다. 어쩌면 이것은 종교와 철학에서 말한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담배와 술을 끊으려는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일지도 모른다. 모로 보나 중요한 것이다.


  최근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헤르멘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특히 더욱 궁금해진 것인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위대한 현자나 뛰어난 지성들은 죽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계속 깨닫고 탐구하고자 했을 것인데, 과연 무엇을 그리도 구하고자 했던 것일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모나리자」의 진실을, 혹은 리만에게 가서 미제에 대한 답을 들어보고 싶은 심정. 스스로 구해보지도 않고 미리 답을 듣고자 하는 심보는 아니지만, 돌려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그들을 바라본다는 뜻이리라. 못된 심보, 들쑥날쑥한 체력, 더군다나 세속을 탓하는 소심함, 이렇듯 떨쳐버리고 나가야 하는 것들은 내 마음을 숙주로 삼아 연명한다. 일상의 것들에 아파한다는 것은 참 억울하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위대한 책을 읽고, 속 깊은 생각을 하고,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지우고, 반복되는 담금질에도 나의 조각은 도무지 깎일 기미가 없는 것 같은 때가 많다. 이런 군소리 접고 너도 대접 잘 받으며 살 수 있게 저 ‘물’에 뛰어들라는 비근한 조언을 듣고 있으면 그 말들은 마치 굴원(屈原)의 죽음을 만류한 늙은 어부의 말처럼 늘 귓가에서 제 소리를 낸다. 고독하게 살지 말고, 세상의 흐름 위에 배를 띄워 흘러가라며.


  그러나 나 같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들 역시 나처럼 시선이 다른 길로 흘낏흘낏 넘어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책을, 세르티양주의 조언과 같은 ‘스승’의 말을 또 펴고 다시 펴들어 읽을 것이다. 위안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아프지 말라고 토닥거리는 말이 아니라, 네가 아픈 것과 네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어깨를 나란히 한 친구와도 같다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말이 우리에게는 위안이다.


  “공부의 고통과 공부하는 이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공부다.” (위의 책, 350쪽)


  역설이다. 아픔은 아픔으로 치유되며,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아픔을 낳는다. 그러나 이는 삶이 아픔으로만 꾸며진 집일뿐이라는 비관론이 아니다. 비관론은 “그만 두자.”라는 말이다. 세르티양주는 그만 두지 말라고 한다. 그는 고통보다 치유에 방점을 뒀다. 계속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굴러 떨어진 돌을 다시 어깨에 이고 올라가는 것을, 누군가는 인간 비극의 근원이자, 존재의 한계라 말했다. 카뮈를 뛰어넘어야 궁극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의 글을 읽었고, 그런 강의도 들어봤다. 하지만 아픔을 빼자면, 어느 것도 우리에게 이해될 수도, 우리를 설득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정말이지 아프다! 왜 아픈지 들어보고,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그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삶이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공자의 물음을 “기쁘도다.”라는 우리만의 느낌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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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13.09.10



  교사이신 어머니께서는 아이들과의 상담에 관심이 많으셨기 때문에 MBTI와 애니어그램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신 적이 있었다. MBTI와 애니어그램을 보니 나의 성향은 거의 분명하다. '현자'형이라는 것이다. (MBTI에 따르면 나는 INFJ, 즉 내향적 직관형이고, 애니어그램에 따르면 제 5유형, 즉 현인이다.) 내가 중시하는 가치나 특성들도 현자형에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또렷하게 드러난 나의 성향에 만족했다. 그러나 (우스갯소리이지만) 나는 내가 왜 '현자'가 되지 못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MBTI와 애니어그램은 단순한 성향 분석 프로그램이 아니다. 아마 다른 성향 분석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일 것인데, 이들은 피(彼)검사자의 성향을 본인이 인식하게 하고,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도모하게 해준다. 예컨대, 애니어그램을 보면 나는 몽상가 유형(제 7유형)에게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들은 말은 많은데 대부분 현실불가능한 내용을 제시하고 그치는 경우가 잦으며, 논리가 빈약하여 조금만 지적을 당하면 사상누각처럼 무너져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은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것일 뿐,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제 1유형의 사람들은 나와 달리 몽상가들에게서 활력을 느낀다. 그들이 봤을 때 몽상가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혁신을 즐기며, 대안을 내놓는 사람들이다. 결국 내가 이런 성향 분석 프로그램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내게 피곤하게 느껴지는 몽상가들은 원래 그런 성격의 사람들이므로 내가 그들을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이해의 확장이다. 나를 알고 타인을 알고 있으면 그 사이의 수많은 관계들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설령 가까운 친구나 가족의 성격조차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고민과 스트레스를 삼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일본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만화가 마스다 미리는 2009년에 『주말엔 숲으로(週末,森で)』이라는 소소한 만화책을 하나 냈는데, 그 안에는 우리의 불편한 '관계'에 대처하는 현명한 방법이 하나 그려져 있다. 절친인 하야카와와 세스코는 어느 날 근처의 호수로 카약을 타러 갔는데, 카약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세스코는 자신의 카약이 하야카와의 카약과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지자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자 하야카와는 자신의 카약 위로 세스코의 오른손을 올리게 했고, 자신의 왼손을 세스코의 카약 위로 올렸다. 당연히 두 카약은 부딪히지 않은 채 잘 떠있었다. 우리는 하야카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벌어지지 않을 때는 이렇게 다가가는 방법도 있어.(p.63)" 서로에게 다가가서 두 카약을, 그러니까 나와 타인을 물 위에 고요히 떠있게 하려면 일단 서로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편견을 부수는 일이 항상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MBTI(16개)나 애니어그램(9개)처럼 성향을 여러 가지로 자세하게 나눠 성격 간의 편견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전문적이고, 우리가 학교나 직장에서 대인관계를 맺으며 갖게 되는 가장 비근한 편견은 아무래도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한 것이다. 특히 편견은 외향성보다는 내향성에 더 많이 가해진다.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회식 자리에서 내향적인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양은 엄청나다. 나의 경우에는 대학 강의시간의 조활동이 그렇다. 말을 많이 하거나 진취적이어야 좋은 평가를 받는 조활동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환경이 아니다. 회식 자리에서 높은 정신적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나 나와 같은 대학생들에게는 반드시 개인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고독을 주무기로 하여 창조적이고 깊은 아이디어를 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편견의 수준은 때론 도가 지나칠 때가 있다. 학교에서는 '문제아' 취급을 받거나, 직장에서는 '부적응자'라는 꼬리가 붙는다.


  앞서 나는 성향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전문성을 갖추는 일이 어렵다고 했는데, 솔직히 우리는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한 알맞은 이해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람에 대한 흑백논리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심한 경우 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하길 싫어하는지(혹은 얼마나 직관에 의존하는지) 비관적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대학에서의 전문적인 공부나 직장에서의 전문적인 업무 능력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너는 왜 그렇게 말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고, 또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 보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Quiet)』는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혹은 전 세계의 사회)에 투여되야 하는 예방주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내향성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사회가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그러나 전혀 어렵지 않은 역작이다. 우선 우리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다채로운 사례들이 많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수전은 우선 외향성이 우선시되는 현대사회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부터 알려준다. 이 부분은 성격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지금의 우리야 외향성이 높이 평가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 그러한 경향은 농경사회에서 도시 중심의 화폐경제사회로 빠르게 변화한 지난 100여 년 간에 부각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동적으로 생활패턴이 바뀌면 사람들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웅변술을 지닌 사람을 지도자로 삼길 원하기 마련이다. 이는 거의 100여 년 동안 누적되어 온 선호이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이 리더십을 그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수전은 이러한 경향 속에서 1/3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1/3의 능력이 경시되는 상황에 집중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내향성은 전 세계 성향의 1/3에 해당한다. (이 통계학적 수치가 거슬리는 독자라면, 수전이 언급한 '내향적인 사람이 없었더라면 태어나지 못했을 인류의 소중한 자산'을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뉴턴의 중력의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법칙, 쇼팽의 <녹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배리의 피터팬,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ET』, 페이지의 구글, 롤링의 『해리 포터』)


  심리학자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유명한 경영자들은 사회의 편견과는 달리 주로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관심을 보이는데, 직장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할 피터 드러커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난 효율적인 사람들의 한 가지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에게 '뭔가'가 없다는 점이었다. 즉, 그들은 '카리스마'가 거의 없었고 그 말 자체도 거의 안 썼으며 그 단어가 뜻하는 바대로 행동하지도 않았다.(p.94)" 그럼에도 오늘날 대학과 직장에서는 프레젠테이션 잘 하고, 말 잘 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을 유능한 인재로 평가한다. 그들의 평가가 아주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유능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거다. 그들에게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기여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애당초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수동적 직원에게는 외향적 지도자가, 능동적 직원에게는 내향적 지도자가 어울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도자는 외향적인 사람이다.)


  내향성은 조직을 중시하는 사회문화에서 늘 타격을 받아왔다. 절대적인 사실은 물론 아니겠지만, 우리가 하는 여러 일들 중에는 조직이 아니라 개인에게 맡겼을 때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를 대학과 직장에서는 '개인주의'라는 편견으로 바라보고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조직의 특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수전이 보기에는 이러한 분위기는 업무를 비효율적으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강의의 발표시간만 봐도 그렇다. 조별발표는 여러 의견을 어떻게든 넣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때문에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부분 매우 엉성하다. 때문에 교수의 피드백도 별로 깊지 않다. (오히려 조별발표는 '비주얼'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인의 발표는 그 사람이 자신있는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심도 있고, 교수의 수준 높은 피드백과 학우들의 코멘트가 가능하다. 솔직히 조별발표는 의견조율에 관심을 두지 주제로의 심도 있는 접근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 토론을 위해 열심히 고민거리들을 준비해오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결국 그 중 가장 쉽거나 목소리 큰, 혹은 진취적인 사람의 의견이 절반 이상 반영되기 일쑤다. 그리고 발표는 대개 그 중 한 명이 하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보통 발표자가 맡는다. 발표가 끝나고 학우들과 코멘트를 나누는 모습에서도 이상한 장면이 목격된다. 어떤 질문이 들어오면 주로 그 부분을 준비한 학우만 대답하는 것이다. 모든 조원이 그 발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빈번하다 못해 당연한 현상처럼 되어버렸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코멘트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마저 사라지기도 한다.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직장은 대학생활과는 달리 실적을 내야 하고 늘 보는 사람들 사이에 계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훨씬 강제적이고 외향적인 성향을 띠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조활동의 장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의 장점만을 부각하는 것은 반쪽짜리 성공밖에 되지 않는다. 수전은 '협력이 창의성을 죽일 때'라는 챕터에서 다양한 사례로 나의 이러한 평소 생각을 뒷받침해줬다.


  MBTI와 애니어그램 등 성향 분석 프로그램들의 주안점은 성격의 조정이라기보다는 성격의 이해에 있다.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발전시킨 전문가들도 타고난 기질은 쉽게 바뀔 수 없다는 점에서 공통된 의견을 보여왔다. 예컨대 외향적인 사람은 (대부분 그들을 위해 고안된 사회 구조, 즉 학교나 직장 등에서) 높은 자극을 받아야 일을 잘 한다. 그러나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만의 공간이 보장되어야만 즐겁고, 활동적(그들도 활동적일 수 있다!)이며, 일의 능률을 높일 수가 있다. 민감하고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성향의 사람이 '스위트 스폿(sweet spot : 수전의 용어)'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며 조금씩은 외향적이게, 혹은 내향적이게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일을 하거나 여가를 즐길 때에는 '스위트 스폿'을 찾아가는 자신의 성향을 굳이 굳센 의지를 갖고 교정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수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기질적으로 프로그램 되어(p.257)"있다. 비정상적인 것은 우리의 성향이 아니라, 사회의 편견이다. 우리가 성격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기울어져 있는 사회의 추가 균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옮겨갈 것이다. 수전이 제 3부에서 말한 것처럼 (물론 그녀가 든 사례들은 얼마든지 선택적인 것이고, 우리는 그에 반박할 수 있겠지만) 동양의 우리는 예로부터 내향성을 숭상한 지적 문화의 후손이다. 솔직히 나는 동서양 사이의 외향성과 내향성 차이를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과속화되던 서양이 동양의 지적 문화로부터 자신들의 제동용 도구를 찾은 20세기의 역사를 보면 동양을 고요한 곳으로 생각하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만약 수전의 말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성향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타파할 수 있는 여러 귀중한 자료들을 마치 우리집의 앞마당에서 키운 오이나 고추, 호박 따위를 따듯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내향적 가치는 동양적 가치이다.'라는 명제는 성립하기 어려울 수는 있어도 '동양적 가치는 내향적 가치이다.'라는 명제는 상당 부분 성립하기 때문이다.


  제 4부의 내용은 독자들에게 실용적일 것이다. 특히 그녀가 (유일하게 답안이라 생각하는) 브라이언 리틀(Brian Little) 교수의 '자유특성이론(Free Traits Theory)'은 주목할 만하다. 브라이언 교수에 따르면 "내향적인 사람들도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자기가 아끼는 사람, 혹은 다른 귀중한 것을 위해 외향적인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p.319)" 이 이론은 브라이언 교수가 직접 만든 것인데, 이는 그토록 내향적인 브라이언 교수가 어떻게 열정적인 강의를 할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학생들은 브라이언 교수를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감시(self-monitoring)에도 뛰어났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연기가 '기만'이나 '순응'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브라이언 교수는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전은 이런 자유특성의 활용이 지나칠 경우에는 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건강마저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유특성을 활용해야 할 때와 자신만의 회복 환경을 만들어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일부 독자들은 이를 보고 뻔하고도 당연한 결론이 아니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으나, 그들이 놓친 것은 왜 뻔하고 당연한 결론이 실천에 옮겨지기 어려워 외향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성격 그 나름대로, 그리고 내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인 성격 그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비아냥거린 독자가 부모고 그들의 아이가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자. 결론에 주목하지 못하면 수전이 11장에서 말한 교육과 양육의 문제에도 주목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수전 케인은 TED에서도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어 나는 반가움에 (어설프게나마) 그녀의 강연을 번역해 가족들에게 보여줬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는 집안 내력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문학적인 표현과 훌륭한 비유를 자주 썼다. 그녀가 우리 자신에 비유한 것은 강연의 시작과 함께 들고 나온 가방이었다. 수전은 가방 속에서 마거렛 앳우드, 밀란 쿤데라, 마이모니데스(13세기 스페인의 유대 철학자)의 책을 꺼냈다. 이 행동은 자신의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보여주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이를 이해하고 그녀가 강연의 말미에 청중들에게 들려준 세 번째 조언을 곱씹어보면 그녀가 『콰이어트』를 통해서 결국 말하고자 한 것을 가슴 속에 새겨넣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의 가방에 무엇이 왜 들어 있는지를 잘 살펴보세요. 외향적인 분들의 가방 안에도 책다발이 들어있을 수 있겠죠. 샴페인 잔이나 스카이다이빙 장비가 잔뜩 들어있을 수도 있겠고요. 그게 뭐가 됐든 간에 여러분께서는 기회가 될 때마다 가방 속에 든 물건들을 꺼내서 여러분의 열정과 즐거움으로 우리를 빛내주세요. 하지만 내향적인 분들, 여러분들은 아마 가방 안에 든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지키고 싶은 충동을 느끼실 겁니다. 괜찮아요. 하지만 가끔은, 그냥 가끔은 다른 분들이 볼 수 있도록 가방을 열어주세요. 세상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고,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그 물건들을 필요로 하니까요. (Take a good look at what's inside your own suitcase and why you put it there. So extroverts, maybe your suitcases are also full of books. Or maybe they're full of champagne glasses or skydiving equipment. Whatever it is, I hope you take these things out every chance you get and grace us with your energy and your joy. But introverts, you being you, you probably have the impulse to guard very carefully what's inside your own suitcase. And that's okay. But occasionally, just occasionally, I hope you will open up your suitcases for other people to see, because the world needs you and it needs the things you ca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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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0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3-09-1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가방을 들고 나온 Susan Cain도, 그녀의 그 동영상을 인용한 이 리뷰도, 훌륭합니다.
처음 두줄 속에서 저와 공통점이 두가지나 보이기에 읽기 시작하여 끝줄까지 단숨에 읽었네요.
오래전에 이시형 박사가 쓴 <내성적인 사람이 강하다>라는 책도 있었지요.

탕기 2013-09-11 08:55   좋아요 0 | URL
이시형 박사의 책도 한 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hnine님과 저는 공통점이 많은 것 같군요.^^

아이리시스 2013-09-1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러면.. 탕기님은 절 완전 스트레스로.. 저는 ENFP인데다 가끔 몽상가형 나오거든요. 하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탕기님이 저랑 같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제발 스트레스로 여기지만 말아줘요 ㅋㅋㅋ

이 리뷰 되게 좋아요. ^_______________^

탕기 2013-09-11 18:52   좋아요 0 | URL
아이리님은 몽상가형이시군요. ENFP형이면 외향적 직관형인데, 아이리님과 저는 MBTI도 그렇고 애니어그램도 그렇고, 이론으로만 보자면 완전 상극이에요!! 그래도 아이리님을 스트레스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군요. 옛날에 아틀리에 찾아오실 때도 그렇고 말이죠.^^

2013-09-14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4 1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5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7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자를 읽다 - 신선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장자의 재발견
왕보 지음, 김갑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2013.09.06



  큰 수레가 다가오고 있다.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갈수록 많은 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코앞까지 굴러온 수레를 있는 힘껏 밀었다. 그러나 붙어보기도 전에 수레바퀴에 처참하게 짓눌려버렸다. 수레바퀴는 너무나도 컸고, 수레바퀴를 밀어보겠다고 호기롭게 덤빈 상대는 사마귀였기 때문이다. 이를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 한다. 옛날에 '안합'이라는 현자가 있었는데, 그가 '거백옥'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조언을 청했다. 안합의 고민은 자신이 새로 교육을 맡게 된 태자가 성품이 워낙 포악하다는 것이었다. 거백옥은 걱정하는 안합에게 사마귀의 예를 들어준다. 뛰어남을 뽐내는 순간 태자가 안합 당신을 죽일 것이니 경계하십시오. 안합은 기뻐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잔인했던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정치판에서 살아남으려면 큰 수레바퀴를 피하는 사마귀가 되어야 했다.


  나에게는 이 사마귀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뒀다는 감상에 젖어 지난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사실 별로 인상에 남을 만한 공부는 하지 못했다. 대학에 실망한 이유도 있겠고, 대학공부를 무척 게을리한 이유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별 볼일 없게 생긴 수많은 자갈들이 즐비한 개울에서 아주 소중한 자갈 하나를 손에 쥔 것처럼 두 개의 단어를 대학에서 얻었다. 그 중 하나가 장자(莊子)이다. 사실 학점 때문에 한 학기 커리큘럼에 그냥 껴넣은 과목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기말 시험지에 장자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거의 모든 명사나 주요 문장을 한문으로 적어서 제출했다. 시험공부할 시간의 절반을 한문 외우는데 썼었다. 그만큼 한 학기 동안 장자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내가 20대에 만난 최고의 사상가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30대에는 또 어떤 사상가가 마음 속에 자리잡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제 사설은 거두절미하고, 다시 사마귀 이야기를 좀 해보자. 당랑거철은 여러 문헌에 나오지만 장자(莊子)의 천지(天地)편에도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하면 호접몽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강의 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호접몽은 아주 짧게만 언급된다. 장자를 읽어보면 그가 어떻게 현실세계를 바라봤는지, 문자 그대로 '인간세(人間世)'를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절절하게 다가온다. 왜 장자는 현실을 절절하게 논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현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학자들까지도 장자의 비관적인 시선을 예로 들면서 그를 서양의 니힐리즘과 묶는다. 어쩔 수 없이 뭘 해야 한다고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말야." 이 문장의 단어 하나가 장자에도 나온다. 바로 '부득이(不得以)'이다. "멈출 수 없다."라는 뜻이다. 장자는 거스를 수 없다면 저항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당랑거철도 부득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 둘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장자는 디스토피아에 항복하는 초라한 사상가 정도로 비춰질 것이다.


  차라리 이러한 장자의 모습보다는 굴원(屈原)이 더 멋지지 않은가? 초(楚)나라의 대부였던 굴원은 간신의 농락에 넘어간 왕에게 애국했기 때문에 눈엣가시로 여겨져 양쯔강 이남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는 '창랑(滄浪)'이라는 거센 물살에 몸을 던졌다. 마침 늙은 어부가 막 물에 뛰어들려고 하는 굴원에게 왜 그러냐고 묻자, 굴원은 이렇게 대답한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노부이시여, 창랑의 물이 맑으면 저의 갓끈을 닦겠습니다만 창랑의 물이 더럽다면 저의 발을 닦겠습니다. 어부는 물이 더러우면 같이 더러워지면 된다고 조언했으나, 조언이 어찌 됐든 간에 굴원은 창랑으로 투신했다. 그 날이 5월 5일, 단오이다. 중국에서는 이 날이면 곡식을 강물에 뿌린다.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쪼아먹지 못하도록 말이다. 굴원의 지조와 애국은 한문문화권의 많은 문인과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러나 내가 읽은 장자는 다름 아닌 늙은 어부였다. "대부님, 물이 더러우면 대부님께서도 함께 몸을 더럽히시구려." 장자가 거백옥의 입을 빌려 안합에게 한 조언과 똑같다.


  장자는 생각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권력에 가담하려면 권력에 물들어야 한다는 치졸한 '정치의 생리'를 조언으로 내세웠다는 것이 전혀 믿겨지지 않는다. 그가 「인간세」에서 한 말인데, 문단의 전문을 한 번 옮겨보겠다. 이 역시 거백옥이 안합에게 한 조언 중 하나이다.


  "무릇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광주리로 말똥을 받아내고 대합조개의 껍질로 말오줌을 받아냅니다. 그런데 어쩌다 모기나 등에가 달라붙어 있어서 갑자기 말등을 때리면 놀란 말은 재갈을 끊고 머리를 뒤흔들며 사육사의 가슴을 걷어차 부숴버리기도 합니다. 이는 말을 사랑하는 뜻은 지극하지만 말은 때때로 그 사랑을 잊기 때문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夫愛馬者,以筐盛矢,以蜄盛溺,適有蚊虻僕緣,而拊之不時,則缺銜毀首碎胸。意有所至而愛有所亡,可不慎邪)"


  사실 인간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가치는 고대의 사상가들이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 혹은 초월자를 논하면서 뽑아낸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 국지성 호우라고 비유하면 괜찮을까. 장자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비관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라고 숨김없이 말했다. 그러나 추측해보건대 아마 누군가가 장자에게 현실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고, 장자는 저런 식으로 대답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장자의 진짜 가르침은 구구절절 흘러가는 「인간세」가 아닌 「소요유(逍遙遊)」편에 있다. 인간세는 현실의 비관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장자의 비관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망원경인 소요유를 보면 비관적 현실로부터 멀리 날아오른 장자의 사유를 음미해볼 수 있다. 장자가 사유를 멀리까지 띄울 수 있었던 힘은 '비어 있는 마음', 즉 '허(虛)'이다. 배운 것도, 깨달은 것도 버리는 경지가 '허'이다. 유교와는 이 지점에서 전적으로 반대된다. 유교는 꽉찬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장자는 비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장자』에서는 빈 그릇과 빈 배가 강조되고, 겉모습을 상관하지 않는 신체장애자들, 예컨대 인기지리무신(절름발이에다가 꼽추에다가 언청이), 옹앙대영(목에 항아리처럼 큰 혹이 달린 사람) 등이 등장하여 고민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일화가 많이 있다. 때문에 「인간세」의 일면만을 보고 장자를 니힐리즘 철학자라고 규정하는 건 너무 섣부른 진단이다. 장자의 진면목은 현실을 통째로 역전시키는 힘에 있다. 장자는 그런 사유를 정말 잘하는 철학자였다.


  「소요유」는 그 자체로 풍부한 비유가 담긴 기이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장자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학습(學習)'이라는 단어를 맨앞으로 빼냈다. 「소요유」는 장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첫 인사이다. 짧게 요약해보면 이렇다. 옛날에 북쪽 검은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었다. 엄청 큰 이 물고기는 붕(鵬)이라는 이름의 새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붕의 그 '붕'이다. 붕은 남쪽으로 간다. 즉, 북쪽의 곤이 붕으로 변신해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그 새가 날기 위해서는 마치 큰 배를 띄우기 위해서 많은 물이 쌓여야 하는 것처럼 날개 밑에 바람이 두텁게 쌓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적후(積厚)'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붕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이 많아야 한다. 붕을 사람에 비유하고, 바람을 우리가 도야해야 하는 인격, 혹은 장자가 말하는 도(道)라고 생각해보면 「소요유」에서는 「인간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장자의 광대한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장자 자신도 그런 생각을 매우 큰 것, 즉 현실의 논리가 되기에는 너무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물고기 '곤'과 새 '붕'의 등이 몇 천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크고, 붕이 날아오르는 높이는 무려 9만 리나 된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장자는 현실에서 날아오르기 위해 권력싸움의 모든 걸 털어버리는 것, 즉 '비우는[虛] 것'을 강조했다. 비록 정말 조언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권력에 물들라고 말해줬지만 말이다. (덧붙이자면 장자가 중니(仲尼), 즉 공자의 입을 빌려 공자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안회에게 가르친 '비움'의 조건은 거백옥의 입을 빌려 안합에게 한 조언보다 훨씬 장자답다. 하지만 그 '비움'은 이곳에 적기에는 너무 분량이 많아서 생략했다.) 반면 「소요유」에서는 날개 밑에 바람을 '쌓아야[積]' 한다고 말한다. 비우는 것과 쌓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우리는 현상을 정확히 둘로 나누려는 못된 습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습관은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에 흡수되면서 지적된 것이지만 사실 현대과학의 놀라운 발견을 통해서 서양 스스로가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현상은 이어져 있다. 장자가 그걸 몰랐을리는 없다. 장자에게 비우는 것과 쌓는 것은 연속되는, 혹은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장자에게 있어 철학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은 그 유명한 호접지몽이 나오는 그의 「제물론」 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생략하겠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是]'과 '저것[彼]'이 동시에 생겨난다는 사상이다.) 밭에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과 같다. 다음 해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가을의 열매를 거둬들여야만 한다.


  「인간세」에 대한 오독이 장자를 이해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인간세」에서 시작해 「소요유」로 거꾸로 읽는 방법으로, 학기가 끝난 후 다시 그간 배웠던 것을 복습했었다. 그리고 교수의 추천으로 산 왕보의 『장자를 읽다』를 나란히 놓고, 강의에서 다루지 않았던 구절들까지 곁들여 읽으면서 전체적인 '장자'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려고 나름 끙끙 앓은 적도 있었다. 벌써 지난 겨울방학의 일이다. 한 겨울의 얼음판 위에서 크게 넘어지듯 나는 장자를 읽을 때마다 늘 삐그덕거렸다. 아마 누가 그 모습을 봤다면 난 정말 창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장자를 읽고 있으면 왠지 고향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잔뜩 맞고 있는데,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더니 그 안에 따뜻한 손난로가 들어 있는, 그 느낌이다. 장자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니, 주변이 춥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더불어 장자가 위안이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나'를 바꾸려고 한다. 세계는 크지만 우리의 세상은 작다.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세상을 놔두고, '나'를 세계만큼 크게 만드는 것이 장자의 '프로젝트'이다. 나는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 발생시키는 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사마천은 장자가 옻나무 언덕을 관리하는 관직에 있었고, 짚신을 엮어 팔았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추정컨대, 장자는 굉장히 가난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은 『사기』에서도 별로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그것도 혼자 언급된 게 아니라 한비자랑 엮여서 기록된 것이다.) 초라했다. 인간의 역사는 그를 그렇게 봤다. 그러나 왜 우리는 오늘날에도 "장자, 장자"하며 그의 나비와 꿈을 운운하고, 도저히 머리를 굴려봐도 잘 모르겠을 '도(道)'와 '허(虛)', '덕(德)' 같은 것들을 언급할까. 도가(道家)는 노자(老子)의 "감춰진 덕"인 '현덕(玄德)' 때문에 흔히 검은 이미지로 회자된다. 나는 장자를 그 검은 도화지 위에서 뜨거운 열을 내는 한 줄기 빛에 비유하고 싶다.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공자를 자신의 이야기 속에 끼워넣는 위트를 지닌 사상가, 온갖 자연과 사물에서 나는 소리를 묘사하면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대해 논한 낭만적인 사상가, 도살자가 칼로 소고기를 뼈에서 도려내는 장면에서 자연의 길[天里]를 비유해냈을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난 사상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붙여 항간을 비판한 마음씨 따뜻한 사상가. 이런 사상가라면 살짝 마음을 기대도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장자』 중 가장 오래 마음에 새기고 싶은 구절이 「덕충부(德充符)」에 있어 그걸 옮기고 글을 맺고자 한다.


  "그러므로 덕이 뛰어나면 겉모습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니, 이것을 정말 잊어버렸다고 한다.(故德有所長而形有所忘, 人不忘其所忘而忘其所不忘, 此謂誠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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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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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4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간다고들 한다. 두 가지에 있어 재밌는 표현이다. 하나는 정신이 정말 먼 곳까지 날아가 버릴 정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멀리 날아간 것일까? 약 250만 광년이다. '타임머신'이라는 단어, 혹은 '상대성 이론'이라는 단어가 항간에 널리 퍼지면서 빛의 속도가 얼마인지는 사람들이 대체로 알고 있다. 그 빠른 빛이 250만 년을 날아간 거리는 km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빛은 250만 년 전의 것이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그 당시 지구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가 우리의 모습으로 변할 때까지 달려온 빛이 오늘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빛이다. 사실 이 정도 단위가 되면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다. 안드로메다로 간다는 표현이 재밌는 두 번째 이유는 이거다. 시쳇말로 "정신줄을 놓는다."고 하는데, 우주는 그 무시무시함과 황홀함 외에도 규모 면에서 우리에게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농담으로 이야기를 꺼냈으니 하나 더 해보자면, 우리의 정신이 굳이 안드로메다로 갈 필요는 없다. 안드로메다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 즉 은하수는 약 30억 년 후에 충돌한다. 아니, 여기서 '충돌'은 과학적 표현이라기보다는 타블로이드 신문에서나 할 법한 표현이다. 두 은하가 서로 얽혀서 찢어지는 격렬한 춤을 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30억 년 후, 지구의 밤하늘은 지금보다 더 밝을 것이다.


  나는 우주를 동경하면서 여러 다큐멘터리, 서적,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왔다. 전공은 아니기 때문에 늘 어깨 너머로 듣고 용어를 쉽게 잊어버리는 편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주의 사진을 바라보는 마음은 한결같다. 우주는 나에게 '겸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무심한 우주가 나에게 그걸 선물한 것은 아니다. 내 안에서 발현된 어떤 성향일 것이다. 그런데 이 겸손은 종교적 겸손과는 좀 다르다. 종교가 주는 겸손은 신에의 복종, 즉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지만 우주적 겸손은 오히려 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규모 면에서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표현대로 우리가 하루살이가 되기 때문에 생기는 압도가 그 겸손의 근원지이다.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과 끝내 알아내겠다는 호기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 그것이 인류가 우주를 대하며 갖게 되는 오만 가지 생각의 공통점일 것이다.


  지구에서 우주로 던지는 질문은 지구인의 근본적인 물음들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혹은 뿌리를 흔든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질문은 SF영화나 만화의 허무맹랑한 거짓말 정도로 여기겠지만 사실 그런 질문은 과학자들이 하는 것이다. 가령, "화성이나 혜성의 파편에서 지구의 생명이 시작되지 않았을까?(포자 가설)"라는 질문이나,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는 거대한 얼음지각판이 있는데, 그 밑의 바다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 외계 생명체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이는 1977년 지구의 해저열수공 탐사 계획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열렸을 때, 태양열에 의존하지 않는 생명체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 급속도로 불붙은 질문이다.)" 같은 대담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이는 모두 지구에 기초한 과학적 근거를 우주로 확장시켜 대답을 얻고자 하는 전문적인 시도이다. 항간에서 UFO를 쫓을 때, 과학자들은 SETI 프로젝트로 외계문명의 존재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실측을 통해 현재 수신되는 외계 전파가 있는지 자료를 수집한다. 이는 영화 『콘택트』에서 나온 픽션에 그치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의 고전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질문을 우주에 비춰보는 것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에서 벗어나 (약간은 그 향을 지닌 채로) 과학적인 내용으로 옮겨가고 있다. 저 먼 데모크리토스에서부터 오늘날 그 유명한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추적해볼 수 있다. 천문학자들은 현대과학과 최첨단기술의 최전선에 서서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린다. 지구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은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우주의 비밀을 이미지로 전송해준다. 허블은 성운들 사이에서 아기별이 탄생하는 모습을 적외선으로 찍어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친구이다. 보이저 호가 한 때 아홉 번째 태양계 행성으로 우리의 관심을 받았던 명왕성의 궤도마저 벗어나 저 멀리 오르트 구름 사이로 들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금성의 대기로 들어간 소련의 베네라 7호는 금성의 엄청난 대기압을 몸소 체험하다가 35분 만에 통신이 두절되었다. 카시니 호에 붙어 있던 탐사선 하위헌스 호는 목성의 대표적인 위성 타이탄에 착륙해 그 놀랍고도 끔찍한 위성의 모습을 전송해줬다. 지상에서도 신비의 발견은 계속된다. 우리는 오늘날 전 우주의 95%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우주의 끝을 따라잡더라도 결코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과학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어둠이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죽음을 문득 떠올리게 되는 까닭 말이다. 큰 단위와 아른거리는 먼 물체는 우리에게 어떤 한계,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경계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호기심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공포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놀랍다. 자신도 결국 죽게 될 처지이지만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죽음, 혹은 종말을 놓고 고민한다. 죽음은 공포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기심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죽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끝난다. 우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된다. 조금 억울할 수도 있다. 우주와는 달리 우리는 무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영원하길 바란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나를 이루고 있던 물질들이 대양과 공기, 혹은 바다로 들어가 순환하여 새로 태어날 아기의 분자를 이루게 된다. 이걸 조금 더 넓게 생각해보자. 내셔널지오그래피의 다큐멘터리인 《The Journey To The Edge Of The Universe》에 보면 우리 몸이 '별들의 핵폐기물(stellar nuclear wastes)'로 이뤄졌다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가 우주의 일부인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죽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순환'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 않을까?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옛사람들의 말은 생각보다 '우주적'이다. 만약 이런 이치를 받아들이기가 거북하고 두렵다면 나는 한 권의 책을 권장하고 싶다. 크리스 임피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원제 : How It Ends)』이다. 이 책은 크리스의 2부작 중 하나로 다른 한 권은 (이미 눈치 챘겠지만)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날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은 대개 위트가 넘친다. 그러나 그냥 재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부 과학자들은 리처드 도킨스처럼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여러 굵직하고 예민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주로 'Edge'에 기고하는 과학자들이 그런 문제들을 따지는 걸 좋아한다. 샘 해리스처럼 과학과 도덕을 연결시켜 과학에 기초한 도덕을 제시하려는 급진적인 과학자들도 요즘 대세다. 판도를 그려보자면 도킨스는 이제 고전이 되었고, 해리스가 그의 바통을 넘겨받은 모양새다. 그들의 글을 읽는 건, 사실 종교보다는 과학을 존중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다. 종교나 철학을 배제하더라도 기존의 도덕관념이 저항하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어조가 강하지 않은 과학자다. 독자들이 어렵게 느끼겠다 싶으면 문단의 마지막을 위트 있는 비유로 곧잘 마무리하곤 하는데, 이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간과하거나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근원적인 문제들을 지구 바깥으로 끌어낸다. 크리스는 우주생물학의 권위자다. 이런 과학자들은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을 주로 연구한다. 1970년대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신생 학문이다. 때문에 크리스가 말하는 '세상의 끝'은 생물학적 현상인(이걸 행성이나 항성의 현상으로 이해하면 좀 어긋나겠는데) '죽음'을 우주적 단위로 끌어올린 모습이 된다. 나갔던 문제들이 다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면 어떤 모양이 될까? 독자의 몫이다.


  아무래도 과학책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암기할 목적이 아니라면 전문용어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결국 우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아니 우리가 우주에서 찾아낸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이런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이다. 가령, 복잡한 우주와 생명을 연구하는 현대의 과학은 고전적인 이원론의 붕괴를 가져왔는데,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고대종교들이 이원론적이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 말이다. 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나는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에서 읽은 바 있는데, 그는 줄기세포 연구 반대론자들을 반박할 때, 어디서부터가 생명이고 어디서부터가 생명이 아닌지를 나누는 사고 자체가 문제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특유의 어조로 종교적 폐단을 언급했다. 크리스가 불교의 업보, 즉 카르마를 예로 들면서 이원론을 은근슬쩍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인상 깊게 들은 한 교양강의의 교수도 이 업보에 대해 비판했었는데, 그는 "쥐의 업보라는 것이 있을까? 쥐에게 도덕이라는 것이 있을까?"라고 우리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 즉 이원론을 배제하는 패러다임에서는 경계가 해체된다. 나는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는 죽음의 판정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들려주는데, 그로부터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의 이원론적 판단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72~73쪽에 언급된 세포자살기능인 apoptosis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섬뜩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우주적인 죽음에서 나의 죽음으로 회귀하는 첫 번째 여정에서부터 따끔한 충고를 듣게 된다.


  이원론을 배제하려는 크리스의 입장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삶과 진화를 이야기해야 했다. 그가 진화의 여러 학설들과 연구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이런 내용이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의 진화가 거의 정지된 상태라는 학설에서부터 미래에는 인간 vs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들, 더 나아가 외계문명이 존재할 가능성을 계산한 드레이크의 방정식 등을 통해 인간이 미래에 조우하게 될 여러 상황들, 그리고 재앙들도 언급되어 있다. "인류의 재앙 최악의 시나리오 Top. 10" 과 같은 제목으로 별로 무겁지 않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들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약간씩 언급되면서 죽음이 '나'의 죽음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가령, 약 75억 년 후에는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지금보다 250배 크고 2700배 밝아지는데, 이때 지구와 화성은 아예 잡아먹힌 뒤이기 때문에 크리스는 해왕성의 가장 큰 위성인 트리톤에 미리 부동산을 구입해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건 농담이다. 크리스는 다음 사실을 슬쩍 빼버렸다. 천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지구와 달의 관계와는 달리 트리톤은 해왕성이 자전하는 반대 방향으로 공전하기 때문에 해왕성의 엄청난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도 열심히 갈라지고 부서지는 중이다. 부동산을 구입해둔다고 하더라도 그 땅이 산산조각나면 누가 보상해줄까?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우주의 여러 모습, 특히 종말과 관련된 여러 시나리오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감정이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속임수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겠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준비단계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미래에는 생물학적 한계가 극복되어 철학에서 말하는 H+, 즉 Transhumanism으로 마치 니체가 말한 '초인'과 비슷한 존재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영화 《가타카》는 그런 미래상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 픽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기술의 성장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인체 냉동기술로 수 백 년 후에 깨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이 아니라, 내가 우주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상상력이 내게 주는 안도감, 어떤 일체감 같은 것이 바로 내가 느낀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대로 세상이 어떻게 끝나는가를 열심히 파헤치다보면 크리스가 그의 다른 책에서 논한 세상은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자연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객관적으로 말이다.


  둘은 하나다. 2호선과도 같다. 물론 한 바퀴를 돌면 예전의 나는 없고 나에게서 흩어진 분자들로 구성된 미래인이 그 역에서 기차를 잡아타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서운함을 주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은 거대한 순리에 대한 유머러스한 소개서와도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것은 정말 끝나는 것인가?" 이 책의 옮긴이도 책을 번역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소극적인 자세보다, 죽음의 원인과 결과로부터 그 필연성을 이해하는 적극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지 않을까.(p.414)" 옮긴이가 말한 전자의 자세는 우주가 너무 크니까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식의 소극적인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런 자세는 별 쓸모도 없고, 차라리 자세라기보다는 그냥 비관적이며 소위 '센치'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가 서문에서 한 말처럼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우주를 대하는 비관적 자세는 우리에게 제한된 시각만을 줄 것이다. 우주의 95%를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그것의 1%만 바라보려는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면 죽음은 그만큼 우리에게 좁게 느껴질 것이고, 우리는 예전처럼 그 앞에서 숨 막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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