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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ㅣ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2013년 12월 15일
가을을 맞아 가족과 길상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오래된 절이 아니라 고풍스럽진 않았다. 아담한 수행공간들은 (모양으로 보든 배치로 보든) 현대적이었고, 대웅전은 마치 방금 머리를 깎은 동자승 같았다. 그러나 이 절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나 사찰이 갖는 의미 이상으로 중요한 공간이 있다. 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마당의 구석에 단아하게 핀 예쁜 꽃 한 송이가 보는 이의 마음을 잡아당기듯. 길상사에 핀 꽃은 사상의 꽃이다.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고 3년 전에 타계한 법정 스님의 꽃. 무언가를 갖거나 지갑을 열어야 존재의 생동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비우고 덜어내라 가르친 그의 ‘무소유’가, 별로 가진 것 없이 세상을 떠난 그의 영정에서부터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 들어가서 법정 스님이 임종을 맞이할 당시 갖고 있었던 유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눈으로 세어보았다. 몇 안 됐지만 그나마 있는 것들도 모두 헤진 채 그간 얼마나 만졌고 얼마나 스쳤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스님을 기린다는 이유로 사찰 측과 불자들이 정성들여 갖다 놓은 스님의 출간물이나 ‘스님의 삶’에 대한 설명문, CCTV 등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일을 한 누군가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받는다. 지고지순의 삶을 동경한 적이 있다면 그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법정 스님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물음이라기보다는 스님과 나의 삶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리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나는 반복해서 물었다. 문자로 드러난 그의 사상은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법정’이라는 단어로 우상화된 이미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의 꽃은 유리창 건너편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이 된다. 무소유는 멋진 것으로, 하지만 우리의 소유는 불가피한 것으로 못을 박으면서.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재고하라고 해도 나는 확신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우리에게 “너는 자꾸자꾸 가져도 돼. 안 갖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갖게 된다고. 남의 것을 빼앗아도 별 상관은 없어. 그렇고 그런 세상이니까.”라고 말하는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건 매한가지이다. 예수는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을 ‘사랑’이라 표현했고, 그보다 앞서 싯다르타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고 열반을 찾았다.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모든 철학자들은 이런 위대한 선인(先人)들을 모티프로 삼는다. 그들은 이전에 존재했으면서도 우리보다 한참을 앞서 나간 이들이었다. 도대체 “갖는다.”라는 것이, ‘소유’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지녔기에 우리에게는 때때로 금기로까지 지목되는가. 소유를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장 속 현대에서 아주 강력한 테제로 주목을 받아왔다. 무소유도 그런 외침 중 하나이다. 우리의 의지박약이, 혹은 문제의식의 부재가 고질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늘 같은 패턴이기에 일각에서는 개인의 변화로 사회의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변화의 중심을 개인에게 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가 얼마나 거대하며, 대부분 나와 얼마나 무관한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굉장히 멀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이 갖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무소유를 비롯한 변화의 테제들을 실천하려면 우리는 그 거리를 서로 좁혀 공감이나 일체감 같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통된 인식은 항간에 얼마든지 떠돌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력이 없다. 인식은 하는데, 다들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말이다. 나는 실천을 개인에게 지나칠 정도로 요구하지 않는 사상가의 주장에 그간 목이 말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뜬구름처럼 존재하는 사회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과 사회의 조합으로 (실패 여부는 차치하고 일단 발화의 단계에서만 보자면 수많은 역사적 혁명들이 그러했듯이)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 주장을 읽을 수 있었다.
간단명료하고 별로 길지 않은 이 책에서 프롬의 주장을 잡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듯 프롬 역시 산업사회에서 출발한 근대를 실패작으로 본다. 근대의 출범과 함께 당대 사람들이 꿈꿨던 욕망의 삶은 결코 ‘완전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유의 마력은 너무나 강했고, 오늘날의 우리도 그것을 주식으로 삼는다. 프롬은 현대인의 모순을 지적한다. 고통당하면서도 낭비한다. 우리는 한사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파괴적이며,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편에서 낭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24쪽)
프롬이 보기에 우리는 꽃을 꺾는 사람들이다. 그가 하나의 꽃을 두고 꺾어버리겠다는 서양의 의지와 멀리서 바라보겠다는 동양의 의지를 이 책의 들머리에서 사례로 든 것은 두 세계 사이의 의식 차이를 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마 어느 정도는 두 세계의 의식적 차이가 존재하리라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그보다 프롬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소유를 지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의식 간격이었다. “우유병을 달라고 울고 있는 영원한 젖먹이(위의 책 51쪽)”인 현대인은 꽃을 꺾는 테니슨 시의 화자가 된다. 반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바쇼가 쓴 하이쿠의 화자가 된다.
이 책에서 저자 프롬의 사유는 일상을 반드시 거쳐 간다.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권력), 지식, 신념,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 (상당부분 겹치기도 하지만) 우리의 소유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예로 든 구절들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학생의 입장인 나는 그가 지식의 소유 방식에 대해 쓴 비판이 어떤 지적보다도 눈에 밟혔다. 독서를 통해 막대한 지식을 쌓아가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도 알맞은 통찰이리라.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 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게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ㅡ학교는 통상 학생들을 인간정신의 최고의 위업에 접하게 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특히 이러한 환상을 기르는 데 솜씨가 뛰어나다.” (위의 책 69쪽)
종교에 대해 거의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역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또 부득이한 충고(아닌 충고)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의 제 3장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분석을 위해 할애되어 있다. 종교에 대한 중립적인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그 궁극이 어찌 됐든 간에 우리의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소유를 절제하라는 일종의 금욕을 제시한다. 구약도 그렇고, 신약도 그렇다.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이 중요하고, 물질보다는 (그리스도에서는 ‘말씀’으로 풀이되는) 정신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전파한 사상의 골자이다. 이런 삶을 실천하는 것이 누구의 뜻이라는 것, 혹은 그렇게 해야 어디로 간다는 것 등은 차치한다. 그래도 우리는 능동적으로 현세의 “자아 속박과 갈망을 극복(위의 책 100쪽)”하는 형태의 삶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살아가는 것에만 중점을 둔다면 소유하면서 살아가든 아니면 소유 이면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든 별 문제될 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프롬의 주장, 법정 스님의 주장, 혹은 수많은 종교에서 실천하라는 삶의 형태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스스로 날카롭게 긁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그런 주장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리 가져도, 혹은 (갖지 못하더라도) 아무리 추구해도 도무지 마음이 달래지지 않기에 수많은 밤을 불면증에 시달린, 우리와 갖은 정신적 ‘환자’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잠을 푹 자보겠다는 목표를 갖게 갖고 프롬이 이 책에서 말한 ‘소유양식’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서 서서히 ‘존재양식’으로 눈길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면증에 비유하긴 했으나, 우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즉 무언가를 재산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우리를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역시 재산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걸 의미하는 까닭이다.
우리 스스로를 물건의 형태로 바꿔버리는 일. 내적인 강력한 동력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존재’, 혹은 ‘자아’가 우리 안에서 그걸 용납할 수 있을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우리의 존재 위에 가면을 씌워놓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일들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우리의 비근한 삶이다. 나는 그런 삶을 듣고 보고 느낀다.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프롬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가면을 쓰면서 타인과 경쟁하고, 타인에게 적의를 품고, 타인에게서 공포를 느낀다. 혹은 이 모든 것을 십분 발휘하면서 안도한다. 소유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면서도 정작 우리의 삶을 거대한 환상으로 만든다. 뜬구름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 구름을 걷어내 주겠다고, 삶의 진경을 보여주겠다고 주장하는 위대한 ‘말’들이 우리에게 그 구름처럼 보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진짜와 가짜가 완벽하게 전도(顚倒)된 삶. 이것이 이 책의 제 5~6장에 실린 내용이다.
개인이 환상을 극복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실천에 있어서는 개인보다 더 큰 규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찌그러져 있고, 눌려 있고, 깨져 있는 우리에게 흡사 극복해내라는 영웅의식을 요구하는 것 같은 그 ‘실천’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이상적이란 말인가. 프롬도 한계를 느꼈다.
“순전한 정신적인 변혁은 항상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거나 작은 오아시스에 한정되어 왔으며, 또 정신적인 가치의 설교와 그 반대되는 가치의 실천이 결합할 때에는 그것은 더욱 무력했다.” (위의 책 183쪽)
프롬은 여기서 ‘사회적 성격’이라는 말을 쓴다. 이건 사회구조를 견고하게 만들거나 혹은 때려 부수는 일을 한다. 그는 이것을 집단의 차원에서 공유되는 사상과 행위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집단이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체계로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까? 프롬이 일례로 든 건 바로 ‘종교’다. 우리가 종교에게 헌신하는 태도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동력을 인식할 까닭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어떤 종교인가가 문제되는 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범종교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인간의 발달과 특히 인간적인 힘의 결실을 촉진하는 종교냐, 아니면 인간의 성장을 마비시키는 종교냐(위의 책 184쪽)”가 유일한 문제가 된다.
그는 오늘날의 종교가 어떤 모습인지를 반추한다. 아무래도 그는 유대인이고 서구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통찰했으나, 우리는 다른 종교들도 모두 갖다 붙일 수 있다. 오늘날 그 어떤 종교가 프롬이 말한 ‘산업종교’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금 나의 서재에는 김경집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과 김근수의 『슬픈 예수』라는 책이 꽂혀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굳이 그 실태를 이 글에서 논하려고 하진 않겠다. 현대의 종교들을 겨냥한 프롬의 날카로운 통찰은 독자들이 자연스레 옛 가르침의 의미와 종교의 올바른 태도를 생각하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프롬을 비롯한 이런 주장들의 끝에 이르러 언제나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어떤 사상이 메아리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구제(救濟)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태도나 행위에 대한 모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프롬의 글을 읽으며 동감하면서도 그가 책의 말미에 제시할 우리의 길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반쯤은 기대도 하고 반쯤은 우려도 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성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가 그렇듯 프롬은 대규모의 변혁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프롬은 아주 당연한 네 가지의 조건을 들며 그것이 충족되면 대변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변혁은 ‘새로운 인간’의 등장, 그리고 기존의 생활습관 포기 등을 조건으로 한다. 그가 정의한 ‘새로운 인간’은 무려 21개의 항목에 걸쳐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나는 ‘뜬구름’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명저를 만났는가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늘 실패의 연속을 두려워하는 소시민적인 성격 탓일 것이고, 실제로 그런 책들을 많이 만난 까닭도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문제는 그의 주장이 아닌 나의 태도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이다. 다음 해에 치러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16강에 진출할 확률이 H조 4개국 중 3위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혹 누군가가 “2002년의 4강 신화를 재현할 수 있을 거야!”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걸 낙관이 아닌 공상으로 취급할 것이다. 심할 경우 우리는 그/그녀의 주장을 포기시키고자 이것저것의 경우를 따져서 알려주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그/그녀의 주장, 혹은 ‘꿈’을 포기시켜야 할까? 다시 말해, 우리는 높은 꿈을 꾸기 위해 확률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가? 계산은 경쟁적 요소이다. 확률은 상인의 진리이다. 프롬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인생은 확률 놀이도 아니려니와 상거래도 아니다.” (위의 책 258쪽)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책의 도입부를 읽으며 가졌던 거의 모든 희망을 책의 말미에 이르러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그가 대안으로 언급한 대부분의 것들은 그 이외의 학자들도, 혹은 비평가들도 사회를 진단하며 내릴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대안을 언급하는 방식도 문제인식과 비판이 대안 제시보다 분량 상 훨씬 많아 글 자체가 가분수로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면, 그건 다 옳은 말이었다. 프롬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또 한 번 세상을 뒤틀어서 본 것이었다. 걷어차 버린 희망의 빈자리에는 독서 내내 내가 쏟아 부었던 정신적 정력과 노력의 양에 비례하는 허무가 찾아온다. 내가 인문학을 접하면서 늘 신경 쓰는 부분도 “그 허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 나는 프롬의 조언을 허무의 발판으로 삼지 않으려고 그의 말미를 붙잡아 읽고 또 읽었다.
희망이 실낱이라면, 확률적으로 매우 낮은 결승 진출과 같은 것이라면,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여 때론 법정 스님의 까마득한 무소유의 경지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면, 그리고 그 대안의 실천이 너무나도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비전의 매력에 의한 격려에 있다.(위의 책 264쪽)”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모여 아주 큰 꽃을 피우기 전까지 꾸준히 누군가에게 격려를 받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에는 별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수개월 전, 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을 읽다가 엄청난 상실감에 완독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오래된 미래』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기억하며 그녀의 신간을 읽은 탓도 있었고, 책의 대부분이 도무지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을 단호하게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흡사 리프킨의 『엔트로피』에서 말하는 ‘작은 것으로의 귀환’을 연상케 했다. (그녀가 말하는 핵심 주장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프롬의 말미에서 그 상실을 보장받는 힘을 얻었다. 여전히 추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생각의 양이 적을 탓일 것이다. 받아들인 비판보다는 실망 속에 튕겨낸 조언들이 더 많은 탓이리라.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리뷰는 늘 이런 일기로 끝나게 된다. 구차한 패턴인 것 같아 비근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많으나, 질문을 잠시 바꿔본다. 과연 나는 몇 차례나 다짐을 이행했는가.
프롬의 글은 나 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나의 ‘사회’가 쓴 일기에 대한 선생님의 따끔한 답장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이 답장을 읽느냐가 우리가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따져야 하는 유일한 문제다. 너무나도 유일하므로, 이렇게밖에 쓸 수가 없다. 그러나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건, 수많은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는 뜻밖의 희망이기도 하다. 하나를 두고 절망하느냐, 그 하나를 두고 희망을 갖느냐. 올바른 말을 따르자면 우리의 선택은 두말할 나위 없이 ‘희망’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