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1
잡담으로 열어본다.
군대에서였다. 내가 상병이었을 때, 일군의 하사들이 포대(중대)에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은 나보다 어린 87년생이었다. 소위 ‘행정왕고’였던 나에게 그는 많은 걸 물어봤고, 나는 그와 빨리 친해졌다. 업무를 위해 속초 시내로 나갈 때마다 나는 으레 그에게 뭐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어보곤 했으니. 말단 하사인 입장에서 그도 나의 도움이 달가웠으리라. 그런 그가 나에게 몇 번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나는 그 일을 기억한다.
하루는 그가 매우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고 행정실로 들어왔다. 각종 일지를 쓰고 있던 나에게 행정보급관 몰래 눈치를 주더니 기어이 나를 복도로 끌어냈다. 무슨 일이냐고 의아해하며 묻자 그는 나에게 핸드폰을 주며 전화 좀 받아달라고 했다. 전화? 무슨 전화입니까? 일단 받아서 나 훈련 중이라고 나중에 전화 걸라고 좀 해줘라.
받아보니 한 여자의 - 나는 이 표현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 설악산 골바람보다 서린, 경계근무 중인 병사의 군화 발치에 엄습하는 차디 찬 한풍(寒風)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〇〇씨, 자꾸 이렇게 나 피할 거예요? 그러면 내가 전화 않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당신 정말 이렇게 나오기야? 〇〇씨, 내 말 듣고 있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뭔 ‘시츄에이션’인가. 업무로 바빠 죽겠던 나를 그가 간곡히 불러낼 정도의 일이 한 여자의 전화를 받아주는 것? 하사는 행정실 건너편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틈 사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좀 둘러대 봐. 딱 이 표정이다.
통신보안. 나는 일단 군인처럼 딱딱하게 전화를 받고, 그 여자가 확실히 달라진 저 편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며, “누구세요?”라고 하는 틈을 타 “여보세요?”라고 말투를 바꿨다. 통신원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아니면 사기전화를 거는 사람이거나. 내가 아는 한 하사는 애인이 없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임에도 나는 눈대중으로 탄알이 몇 개인지 금방 셀 줄 아는 병사가 된 듯 사건의 전말을 대강 파악했다. 참 곤란하게 됐군. 모른다고만 둘러대자.
지금 훈련 중이라 〇〇하사님은 연병장에 계십니다. 그래요? 언제쯤 와요?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침착하게 대응했다. 여자는 뭔가 메시지를 남기려고 했던 것 같다. 뜸들이더니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하사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면서 무언으로 물었다. 한 고비 넘겼다는 표정을 짓더니 하사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전화 건 여자를 자신은 누군지 모르는데 얼마 전부터 계속 전화를 걸면서 사귀자고 하더라고 말이다. 마침 옆에서 이를 쭉 보고 있던 옆 포대(중대)의 중사 한 명이 “또 걔냐?”라고 말했다.
이후 나는 그녀의 전화를 몇 번 - 한 번은 그녀가 나에게 “목소리 바꿔서 받는 거지?”라고 윽박지르기에 겨우겨우 내가 다른 사람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진을 다 뺀 적이 있다 - 더 대신해서 받았다. 행정실 식구들은 그 여자를 ‘미친년’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임이 일을 잘 할 즈음 되자, 나는 행정실에 출입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대신 포대장(중대장)과 행정보급관을 설득해 막사의 환경미화를 한답시고 속초 시내에 있는 생활용품점과 철물점에 나갔다 오는 시간이 늘어났다. 말년병장으로 늘어져 있지 않기 위해 나는 나름 보람 있는 소일거리를 찾아냈고, 바빴으며, 그 하사와 막사 내에서 마주치는 시간은 줄었다. 듣기로는 그 하사 역시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그 여자’는 잊히는 듯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여자’나 ‘광기’, 혹은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제대 후 접할 때마다 그 여자의 이미지를 곧장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사가 말 못할 부끄러운 일이 베일 속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그 하사가 난잡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확신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면 신분이 말단 하사였기에 부대에서 바르고 때론 고지식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여하튼 그녀의 섬뜩한 목소리는 가을바람에 당연히 날릴 수밖에 없는 낙엽처럼, 내가 가진 ‘여자’라는 이미지의 한 축을 맡아 버티고 서 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인상적인 집착을 목격했다. 그 톤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재밌게도 나는 그런 목소리에 매력을 느꼈었다. 처지가 사람을 만든다니까. 생각했다. 나는 그런 목소리에 대꾸해보고픈 누군가의 애인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 * *
하릴없이 낮잠을 잔 탓에 새벽의 말똥말똥한 눈으로 오정희의 <바람의 넋>을 단숨에 읽고, 나는 이젠 자야지 하며 누웠다가 이번에는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를 읽었다. ‘당신은……’이라는 서술. 나는 단번에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을 떠올렸다. 2인칭이다.
삶을 전연 모르던 6년 전의 내가 ‘노벨문학상’이라는 간판에 홀려 사들었다가 1권도 채 못 읽고 포기했던, 그 긴 작품 속에 두 개의 장이 있다. 하나는 ‘나’에 대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오싱젠이 “당신은……한다.”라고 쓴 부분을 따라 중국의 한 마을로, 오지로 끌려 다니며 받았던 무저항의, 혹은 비가역의 느낌은 잊을 수 없다. 흔히 ‘전지적 시점’이란 말을 쓰는데, 2인칭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구나, 어린 마음으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한편으로 내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여자’였다. 김영하가 ‘당신’이라 부르는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는 남자라면 누구든 소설 속의 그녀와 몸을 섞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그녀의 무서운 - 나중에 가면 ‘당신의 집착’이라 새로이 해석되기도 하는 - 집착을 경험하게 된다. 소설의 여러 전제들 중 나는 그 점이 가장 무서웠다.
나는 갑자기 ‘나’ 없이 홀로 그 전화를 받으려는 하사의 심정을 상상해봤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당신 어디야, 지금 뭐하고 있어, 따위의 질문을 무감각하게 쏟아내는 그 여자의 숨은 노기(怒氣)는 얼마나 끔찍했던가. 소설 속 그녀는 한 번은 자신을 죽이려고, 두 번은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녀의 체취와 육체를 기억해낸다. 나는 “이런 게 사랑의 가장 더러운 면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에는 두 가지의 심상이 나타난다. 굳이 대립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둘은 전연 다르다. 하나는 나비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가 앙코르와트를 잡아먹는 이미지. 모든 것을 하나의 연으로 이어 퍼져나가는 것, 그리고 잠식해가는 것. ‘당신’은 그릇의 미세한 마찰로부터 비극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심지어 저 먼 우주에서의 일까지 발생했다고 본다. 웃긴 연상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미 ‘당신’이 되었고, 웃지 못한다. 작은 씨앗에서 시작해 사원 하나를 통째로 삼킨 ‘판야나무’에게도 ‘당신’은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김영하에 따르면 ‘당신’, 아니 우리에게 이런 존재가 된다.
“거대한 나무가 되어 당신의 뇌를 바수어버리며 자라난, 이제는 제거 불능인 존재.”
남자에게 여자는 ‘씨앗’이 될 수 있다. 여자에게 남자는 ‘씨앗’이 될 수 있다.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에서 서로 살을 섞는 사이가 된 이후로 둘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자는 소위 ‘올인’했고, 남자는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가 변하는 걸 별로 원치 않는다. 여러 가능성을 냉정하게 생각해보려고 하는 습관 때문에 여자의 무조건적인 입수(入水), 몸을 사리지 않는 그 큰 소리의 “첨벙!”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숙고하려고 한다. 만약 여자가 계속 ‘당신’에게 빠지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미칠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남자는 떠나가고, 여자는 그를 찾는다. 체념한 듯 하는 말 속에는 그리움이 심하게 자신의 입 냄새를 풍기고 있다. 누구라도, 저건 체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나 연인 사이에는 그렇다. 나는 널 잊었어.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이 있는지 새삼 기억해내고 싶을 것이다. 저마다의 연인들에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핑계로 심어놓았던 수많은 씨앗들이 우리를 어떻게 부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쓰라렸다.
남자는 다시 전화를 건다. 여자의 육체가 그리워서이다. 남자에게 여자는 사랑의 정신이기도 하고, 사랑의 육체이기도 하고, 혹은 둘 중 하나의 압도적인 우위를 통해 새겨진 잘못된 인상이기도 하고, 여하튼 그렇다. 이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남자는 후회를 하게 된다.
“당신이 내뱉은 말들은 그녀가 휘두른 과도보다 더 위험한 건 아니었을까. 과연 누가 나무이고 누가 부처인가.”
그녀가 과연 ‘당신’을 과도로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그 휘두름은 살해의 의미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죽이지 말라는 역설적인 발악이었을까. 어쩌면 사랑하고 있어도 전연 사랑이 아닌 듯하여 ‘당신’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메시지의 최종적 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걸 제대로 들었다면 사랑은 놀라운 진전을 보였을 텐데.
우리는 의식의 부족으로, 경험의 부족으로, 사랑이 진화할 기회를 매번 놓치곤 한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사랑은 실패하고, 그것은 하나의 포맷이 되어 인류가 달성하지 못한 이데아의 어느 편에 박혀 있는, 보석처럼 빛나는 별자리의 어느 하나의 깜빡임 정도로 항간에 향유된다. 수많은, 그와 관련된 노래들. 너무나도 왜곡되었고, 실체도 없는. ‘일루션’이라 하던가.
나비효과. 사원을 집어삼키는 나무. 그녀가 휘두른 과도. 여자 어머니의 자살기도. 초신성의 대폭발. 앙코르와트. 다시 떡갈나무. 나에게는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이 들어앉았다. 갑자기 아무에게나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