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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5일 토요일




몇 달 전, 나는 글쓰기 내규를 만들었다. 그 내규란 다음과 같다.


    첫째, 불특정한 집단에 여성과 남성이 섞여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면 ‘그녀/그(들)’이라는 혼합 인칭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그/그녀(들)’이라고 표기해서는 안 된다.

    둘째, 양성을 동시에 언급해야 하는 구절에서는 반드시 여성이 남성보다 앞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셋째, ‘여성예술가’, ‘여성작가’, ‘여배우’ 등의 단어는 지양하되, ‘남성예술가’, ‘남성작가’, ‘남배우’ 등의 단어를 하나의 글 안에 병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

    위 내규는 모든 글쓰기에서 실천하도록 강제한다. 단, 부모(父母), 자녀(子女), 남녀(男女)와 같이 이미 굳어져서 순서를 바꾸면 어색한 단어들은 소통을 위해 표준어법을 그대로 지켜 사용한다. 글의 성격 상 순서의 해체를 강행해야 할 경우에는 대괄호 속에 단어를 집어넣어 그 인위성을 밝힌다.


    글은 생각의 수를 놓는 것이다. 생각이 항상 글에 앞선다. 그래서 글쓰기에 실천적 내규를 두면 생각이 글로 나오지 않게 되며,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 내규가 생각에 스며들어 하나의 생각 습관이 된다. 그런 취지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남자다. (이런 표현이 가당하다면) ‘남자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여성을 예술의 뮤즈로 보는 시각에 별다른 저항 없이 살아온 지도 이십여 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동서고금과 현대의 사상을 배우려고만 했지, 그 안에 들어 있는 차별의 시각, 무시의 시각, 혹은 (그녀/그들조차 도무지 생각하지 못한 경우도 있으므로) 논외의 시각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래도 대학을 다녔으니, 굳이 푸코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담론의 함정’이란 건 들어봤다. 맞은편의 담론도 들어서 되도록 객관화시키는,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조정을 권유받았다. 솔직히 나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는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대학(大學)적 사고’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추를 저울에 올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문학을 전공하고, 인문학으로 생각하고, 예술에서 눈을 얻었다. 나 같은 남자는 전적으로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의 20대였다. 그러나 어떤 계기였는지 도통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시대의 분위기였을 수도 있고, 동생의 권유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진리를 갈구하는 여린 마음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관문 때문이었을 수도 있는데) 나는 추하고 일그러진 20세기 중반의 페미니즘 계열 작품들을 다시 찾아보게 됐다.


    나의 옛 미술 블로그를 찾아주시던 분들과 함께 온라인 카페를 만들어 그곳에 ‘여성현대미술가’ 100인의 프로필과 작품을 짤막하게 연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카페지기’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동안의 미술 공부처럼 솔직히 순전한 호기심에 한 일이었다. 그리고 호기심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러했듯이, 금방 시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녀들의 파격이 궁금해진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요 몇 년 사이 내가 조우하게 되는 것들, 즉 새로운 것들은 대체로 충격적인 외양이나 내용을 갖고 있다. 왜 사라 루카스는 오징어 다리처럼 생긴 여성의 하반신 봉제 인형을 의자에 걸쳐 놓은 것일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투명한 플라스틱 집게에 파묻혀 있는데, 왜 그런 가학을 감행한 것일까? 로나 심슨은 하얀 가운을 입은, 양손을 등 뒤로 돌린 여성 흑인의 뒷모습을 그려놓고 왜 <Guarded Condition>이라는 문구를 작품에 그려놓은 것일까? 신디 셔먼과 프리다 칼로는 또 어떠한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추를 통한 직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내게 무언가를 직시하도록 하고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추의 역사』에서 한 모든 말에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에 가서 그가 한 말, “우리에게 추를 인간적 비극으로 이해하도록 권유”(움베르토 에코, 오숙은 옮김, 『추의 역사』, 436~437쪽)하는 작품들이 있다는 주장에는 이견을 달 수 없다. 그녀들은 어떤 “인간적 비극”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예술이 그토록 사모하던 아름다운 여성이 아닌 뭉개지고 일그러진 얼굴, 혹은 신체를 드러내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작업. 그녀들에게서 대체 어떤 비극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성차별에 대한 저항>임을 어렵지 않게 안다. 알 수 있다. 저항이다. 나는 이따금 대중들이 현대미술이 어렵다며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오프/온라인 여기저기서 본다. 쉬운 걸 추구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그녀/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외침이지만, 어렵거나 불편하지 않으면 현대예술은 고전예술에서 떨어져 나온 20세기 ‘조상’들의 기치에서 한참을 벗어나게 된다! 요컨대 그건 ‘저항하는 예술’이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며, 그 충격이 세상을 직시하도록 한다. 우리가 1차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즉, 문제는 많은 이들이 (겉으로는 발을 빼거나 싫어하는 척하면서) 충격을 두려워한다는 것에 있다. 사실 ‘낯섦’ 자체를 길들일 수는 없다. 본성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우리의 곁에는 그 ‘낯섦’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해주는 현명한 사람들이 있다.







점점 글의 온도를 높이겠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화들짝 놀라 금세 도망가는 이들도 있으니.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아래의 이유 때문이다. 전말을 밝혀본다.


    아침에 일어나 온라인으로 신문 기사 하나를 읽었다. 옐로우 페이퍼들을 걸러내느라 쉽게 지치곤 하는 내 눈에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예비한 기사. 분당 조회 수를 쏠쏠히 올릴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단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롭거나 신선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운동, 여성 혐오 발언과 사과, 근래 화두에 오른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 ‘스타파워’로 페미니즘의 선봉에 선 할리우드 배우들…… 그래도 기사를 자세히 보면, 우리 사회에 저항의 움직임이 지속되길 앙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 좋은 세태들은 대부분 우리의 것이고 (단 하나 예외로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이자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인 정희진이 언급되었을 뿐) 잘 팔리는 페미니즘 도서의 8할은 외국도서의 번역본들인 까닭이다. 여성단체 회원과 후원금, 고민상담의 증가 정도만이 최근 분위기에서 이어지는 순방향 피드백이다.


    기사의 댓글을 읽었다. 나는 온라인의 정서가 오프라인의 정서와 크게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만은, 자신은 온라인에 뛰어들어도 ‘저들’과 전혀 다른 오프라인적 인간이라는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다.) 오프라인은 그저 숨기고 사는, 가면의 무대일 뿐이다. 우리는 누구든 폭탄이 될 수 있다. 제발 아렌트를 기억하자. ‘촉발(觸發)’의 계기와 순간이 현실의 우리에게 드물 뿐이다. 자만하지 말자. 현인의 말을 듣자.


    여하튼 댓글들을 읽어보니 가관이었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이분법을 존숭한다. 여기서 ‘이분법’이라 함은 ‘몇 등분하는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나누고 마는 그런 행동을 일컫는다. 이에 대한 존숭은 가상의 맞은편을 무시한다. 가장 나쁜 경우 상대방이나 집단을 인간 이하로 보도록 우리의 눈을 변질시킨다. 동패, 편, 혹은 끼리를 나누는 못된 병폐 역시 여전히 실하고 튼튼하다. 정치의 선동이 널리 효과를 본다. 우리는 정치 후진국이나 사상 후진국의 멍에를 쓰고 있다. 그런 문화는 세상을, 삶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참 쉽게 가르고 본다. 쉽게 가른 뒤, 감정으로 본다. 판단은 뒷전이다.


    그자들도 가명의 힘을 빌렸을 테니, 그 가명과 함께 댓글들을 통째로 옮겨본다. 모두 상당수의 ‘좋아요’를 얻은 것들이다.


    rnrj**** : 권리와 의무도 평등으로...여군 징병제 찬성합니다

    shak**** : 여자가 집해와라 여자가 돈벌어와라. 남자인 내가 혼수해오고 요리 설거지 빨래 청소 육아까지 독박으로 다 해주고 조신하게 가정살림 맡을께.

    line**** : 네 여자들이 집사고 남잔들이 혼수하는세상이 오길바랄께요

    siyo**** : 주로 여자가 바깥일하고 남자는 집안일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여자는 사회에서 자기 능력에따라 평가받고 남자들은 능력있는 여자에게 선택받기위해 여자들에게 얼마나 매력있는가로 가치를 평가받는 사회. 여기서 여자들이 요즘 남자들 너무 편하게 산다며 역차별이라고 빼액대기만 하면 딱 지금 사회의 성별 반전판인데 ㅋㅋ


    띄어쓰기나 맞춤법 모르는 건 둘째 치자. 폰으로 황급히 댓글을 달기도 할 테니. 그런 건 너그럽게 봐주자. 그런데 저 즉각적이면서도 질 낮은 감정의 대응은 앞서 말한 것처럼 ‘좋아요’ 부문의 상위에 올라 있다. 여성 차별의 사고에 젖어 있는 남성들이 유독 이 기사에 기다렸다는 듯, 먹잇감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 한해 특히 이 차별은 현실적인 의무(국가가 준 의무)에서 무한의 양분을 얻는다. 기나긴 역사를 거치며 남성 권력이 설정한 전쟁과 대립의 역사에 오늘날의 여성들이 동참해야 한다는 논리다.


    저들은 역사 공부를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한 것일까? 같은 ‘수컷’으로서, 나는 창피보다는 수치를, 그리고 치욕을 느낀다. 그들은 스베틀라나의 글을 읽으면 뭐라 생각할까? 노벨문학상이 그녀의 이름을 영예로이 해준 까닭을, 그들은 알기는 할까?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들지 않았다. 우연히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더라도, 그건 ‘남자’들의 전쟁 이야기이지, ‘여자’들의 전쟁은 아니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옮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17쪽)


    군복무를 흡족할 만한 추억으로, 전쟁을 영화와 게임 속에서 웅장한 영상과 음향으로 기억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부장의 권리와 피해를 앞뒤로 훈장처럼 달고 사는 이 시대의 수많은 ‘수컷’들에게 위 댓글과 같은 차별적 발언의 함정에 빠질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아니라고? 솔직해지자. 나 역시 한때 여성들 역시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저 바다 건너의 이스라엘을 예로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성의 목소리’를 동아줄 삼아 저 더러운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구원을 누릴 수 있었다. 정신의 목숨을 살려줬으니, 평생 고개 숙여 감사해야 할 일이다.


    말 나온 김에 함정 하나를 더 살펴보자. 가끔 TV 채널을 돌리다보면, 30~50대를 겨냥해서 남녀차별의 상황을 거의 여과 없이 내보내는 원색적인 프로그램들을 만난다. 저급한 ‘떼 토크’의 포맷을 빌린 이 프로그램에서 방청객들은 시나리오대로 공감의 감탄사나 웃음을 연발한다. 아카데미에서 방송을 배우고 나니 그 모습이 더욱 가증스럽다. 숫자에 연연하며,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의 숨 막힘 속에서 ‘대중 공감’이라는 권위에 천착하는 분야. 아무 의미 없어도 재밌으면 된다. 그걸 저들이 쓰는 방송용어로, 즉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말을 쓰지 않기로 했으니 굳이 밝혀놓진 않겠다.


    저들이 하는 대화를 자세히 들어보면, 여성과 남성의 편에서 오고 가는 공방이, 그리고 그 구도가 온라인의 것과 꼭 닮았다. 시청률을 올리려면 어쩔 수 없다는, TV 관계자들이 하는 그런 핑계는 수십 년 간 이어져 오고 있으니 이제 지겨울 법도 하다. 그건 양호한 편이라고 해보자. 하지만 저 토크의 디지털 공간에서는 우리의 사상적 질, 인간 권리, 이런 것들의 상향을 도모할 만한 대화나 논의, 심지어는 반론조차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나도 안다. 그냥 보고 듣고 공감하고 웃으면 끝인 프로그램임을. 더 이상의 기능을 기대할 수 없음을. 그러나 어쩌랴. 그런 영상과 음향과 공감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프로그램은 ‘고착화’의 수단이다. 또한 그 영향이란 차별을 극복하려는 이론과 실천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재밌어서 다수의 대중에게 잘 먹힌다. (Oren님께서 나의 한 졸문에 달아주신)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공범들의 요란한 소동’이다.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대중은 생산보다는 향유하려는 수준에 머문다. 단순한 재단(裁斷)과 적대화의 술수는 비단 정치의 것만은 아니다. 우리 곁에는 두뇌가 잘 돌아가는 이들이 많으며, 우리의 즉각적인 감정과 반응은 그녀/그들의 돈줄이 된다. 이걸 모르고 지갑을 여는 어른은 없겠지.






내가 ‘들어보자’고 한 현인의 말이란 참으로 많아서, 어디서나 맞을 수 있는 비, 혹은 맛 좋은 열매들을 지천으로 맺는 과수의 동산을 떠올릴 수 있을 지경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의 척박한 땅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모습은 실로 그러한데, 열매를 먹지도 않고도 이렇게나 많은 배변을 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나는 궁금하다. 왜 질 좋은 양분을 갈구하며 사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가? 그 중에서 또 실천하는 이들의 수는 왜 그만큼이나 적을 수밖에 없는가? 왜 개인은 대중으로 살길 포기하지 않는 것인가?


    나의 질문은 ‘실생활’이라는 단어의 실체가 갖는 무시무시한 위력에 대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 함정에 빠져 사니까. 살고 있으니 벗어날 수가 없다! 다만 함정에서 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싶었다. 여태 현인의 말을 좇은 건, 순전히 그 때문이다. 아래에서 그 말들을 만나기 전에 잠깐 어딜 들렀다 가야 할 것 같다. 인위적 장치, joker, 그리고 역사의 도박장을. 일부는 내가 급구한 말이고, 또 일부는 어떤 철학자의 말이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과학과 제도를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차별은 차등에서 왔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렇게 된다. 인간은 차등적 존재다. (어폐가 있긴 하다. 자연에는 ‘등급’이라는 단어가 없다. 자연이 아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건 ‘적응’ 밖에 없을 것이다.) 평등은 자연에 없는 단어다. 얼마 전 읽은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에서 우생학을 들여다봤다. 그 이론이 차별 의식으로 옮아가는 정치의 역사는 마땅히 비판하고 싶지만, 우생학의 근거는 부정할 수가 없다. 육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선천의 한계다. 노력을 강조하는 감동적인 설교들이 있지만 그건 ‘마음의 벽’을 허물라는 가르침이다. 과학적이진 않다. 인간은 차등의 성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철저한 생물적 존재. 다시 말하지만 (홉스의 ‘자연 상태’에 대해서는 분명 할 말이 많겠으나, 굳이 개념만 살짝 빌려 쓰자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차등적이다.


    하지만 한 인간에게 있어 어떤 불가능함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 가능함으로 바뀌기도 한다. 우리는 다 그렇게 산다. 봉사, 거래, 선물 등 인간이 구상한 제도의 구원성 덕분에 대부분의 것들이 일상에서는 가능하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의 선조들이 이기심을 발휘하여 ‘도움을 주는 주체’의 권위를 주장했기 때문에, 자연의 차등이 인간의 사회에서는 ‘계급’이라는 값으로 변했다. 그 계급 우월의 거의 모든 수혜자가 바로 남성이었다. 하지만 그건 집단을 이끄는 폭력적 카리스마와 전쟁이 반복되는 인간사의 인위적 결과였다.


    반면 폭력적이지 않은 카리스마가 민중에게 깨달음을 설파하고 다닐 때마다 찾아온 시련과 죽음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라. 또한 그 깨달음이 폭력적 카리스마와 결부되어 지금의 종교 행태를 이루고 있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남성이 ‘여성적’이라고 부른 거의 모든 것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고, 여성의 역할과 생각, 그리고 기능은 그 제한된 환경 속에서 한 발자국도 쉽게 밖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뒤에 인용할 메리 울스턴크레프트도 그렇게 봤다. 일보 전진을 달성한 여성, 혹은 ‘여성적 개체’는 집단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단칼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다수에게 대단히 낯선 존재였기 때문이다.


    차등이 존재한다. 그것이 자연이다. 하지만 인간 제도 안에서 차등이 차별로 변질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인위적인 결과였다. 위대한 철학자 중에도 그 인위성을 무시한 이들은 수없이 많다. 문학적으로 비유해보자면, 그 인위성이란 것은 한 번 달콤한 맛을 본 자들이 대대손손 성찬을 영위하고자 만든 하나의 식탁인 것이다. 고착화된 의례. 수 천 년 간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그런 현상들이 있었고, 때때로 그런 현상들은 인류 보편의 것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차별은 공인되었다. 사사키 아타루 식대로 표현하자면, 그건 분명 ‘역사의 도박장’에서 써온 카드였다. 그 카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생각해보건대, 카드의 대부분은 대체로 joker 정도의 위력을 지녔던 것 같다.


    차별을 극복하려는 후손인 우리에게 있어 조상의 대부분은 차별의 공범이다. 도박의 무대에서 joker를 쥐어봤거나, joker를 가진 자들을 동경한 이들이다. 가정에서든, 그보다 더 넓은 공간에서든. 아니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당수가 타성의 사생아들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녀/그들을 체포할 수가 없다. 이미 세상에 없으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허무맹랑한 농담 따윈 하지 않겠다.


    그보다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우리의 정신이 과연 공범의 심리에서 감정의 굴레를 벗어버릴 수 있겠냐는 질문 앞에 우리를 나체로 세워두자. 다시 말해, 훨씬 더 인위적인 장치를 개발하고 그 장치의 시퀀스 안에 우리를 “위치시킬 수 있는가”를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도발적 테제에 감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는가? 또 우리 중에는?


    우리 이전에 살았던 소수의 선각자들은 계급 차별의 억압에서 대중들을 해방시켰다. 가진 자와 있는 자들은 흠칫 했겠지만, 결국 별로 상관하진 않았다. 역사의 게임에서 활용할 만한 카드가 그녀/그들이 지닌 권력과 재산의 수만큼이나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의 사회에서 누가 주인이냐는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일정의 승리를 거뒀다. 속된 말로 ‘꿀릴’ 경우에는 민주의 감정에 호소하여 굉장한 수의 대중을 소집해 분명한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됐다. 즉, 제도가 보장하거나 대중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안전장치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뜻이다. (규모의 문제를 생각해보자면 사실상 민주에는 완성이 없으므로) 불완전한 모양새이긴 하나, 우리나라의 선배들이 바로 그 증인들이다.


    하지만 이런 안전장치로도 도무지 극복하지 못한 억압들이 있었고, 차별 철폐의 목소리가 나온 지 어언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의 도박장에서는 joker 카드를 내밀며 절대적 위협을 가하는 이들을, 즉 ‘갑질’하는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혐오하고 증오해야 하는 이들은 외양이 그렇게 생긴 이들이 아니라, 바로 저자들이다.


    내가 여기서 ‘300여 년’이라고 한 건 아무래도 18세기의 선구적인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 권리의 옹호(원제 :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를 고려했기 때문이며, 그보다 훨씬 앞선 주장과 실천들이 있었음을 그 표현에 덧대어 굳이 밝혀두어야겠다. 하지만 우리가 읽어야 하는 시대의 문제작들이 대체로 유럽 계몽주의의 발아와 함께 등장했다는 역사의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와 더불어 유럽을 휩쓴 자유와 평등의 이념 속에 여성이 쉽게 동참할 수 없었다는 사실 역시 곱씹어야 한다. 여성은 거의 철저한 의미로서의 타자, 즉 l'autre personne였던 것이다.


    메리의 글을 읽어보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어떤 해당 종파든 상관없이 여성의 ‘창조설’에 대한 확답을 내려야 한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거리를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자.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믿으세요?” 나를 이상하게 보리라. 道를 설파하려고 다니는 사람인가? 기가 세다며 어디 가서 좀 풀지 않겠냐고 손을 잡아끌 사람처럼 쳐다보리라. 그런 반응이 반갑다. 사람들은 좀처럼 저런 창조 설화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은 굉장하며, 놀랍게도 그 신자들 중 대부분은 여전히 여성 사제와 여성 교황을 배출하지 못하는 그 보수성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태도다. 하지만 메리의 시대에 그 문제는 더 절박했다.


    그녀는 거대한 싸움을 했다. 아니, 그건 싸움이라기보다는 정말이지 도박에 가까웠다. 훗날 니체가 사상과 종교를 무너뜨렸을 때보다도 더 고독했다. 니체는 어쨌든 남자였으니까. 굉장히 많이 아는 남자. 나는 그를 존경하기에, 젊었을 때의 그가 프란치스카(어머니)와 엘리자베트(여동생)를 ‘천민’이라고 부르며 신랄하게 비하했었다는 일화를 굳이 언급하고 싶진 않다. 마음으로는.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사실인데. 하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가 메리의 말을 들어보자. 왜 그녀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성이 단순히 남성을 기쁘게 하고 남성에게 복종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결론은 오로지, 그녀가 자신을 남성에게 적합하게 만들고자 다른 모든 고려 사항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중략) 전체적으로 볼 때, 인생의 목적이 이처럼 저열한 토대에 근거한 현실의 원칙들에 의해서 전도되었다는 것을 내 생각처럼 증명할 수 있다면, 여성이 남성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문수현 옮김, 『여성 권리의 옹호』, 74쪽)


    메리는 이 발언에 이어 당시 여성을 억누르고 있는 거대한 담론에 대한 저항심과 공포를 동시에 드러낸다. “종교적이지 못하다거나, 혹은 심지어 무신론적이라는 비난”(메리의 책, 같은 쪽)이 뒤따를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메리가 요목조목 거세게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권장도서의 철학자로 흔히 언급되는 장 자크 루소다. (페미니즘을 두고 너무 요목조목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불평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타성을 비판하려면 요목조목 꼬치꼬치 캐물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유치한 수준의 불평일 뿐이다. 그런 불평은 생각에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이미지에 가해지는 것이기에 맹목적이다. 편승하기에도 쉽다. 이런 것들에 속지 말자.)


    그러나 만약 메리가 쇼펜하우어와 동시대를 살았거나 그보다 후대의 사람이었다면, 나는 저 비난의 화살이 당연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 돌아갔으리라 감히 생각해본다. 권기철 교수가 옮긴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방법』은 니체에게 향할 나의 정신을 예비할 요량으로 매일 펼쳐보며 곱씹는 책. 아무래도 나는 이 철학자를 “위대하다.”는 말 이외로는 표현할 길이 없음을 잘 안다. 하지만 메리의 눈으로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으면 격렬한 불꽃이 일며 날카로운 폭발음을 내는 한 지점이 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이 선천적으로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비록 어떤 여성이 부자연스러운 위치에서 독립해 있어도(참조 : 이건 귀부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쇼펜하우어는 '귀부인'이라는 위치는 쓸모 없는 것으로 봤다.) 한 남성에게 의지하여 지도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요컨대 여성에게는 주인이 필요하다. 젊어서 그 주인은 남성 애인이 되고, 늙으면 그 주인은 고해 신부가 된다.”(아르투르 쇼펜하우어, 권기철 옮김, 『세상을 보는 방법』, 164쪽)


    이건 쇼펜하우어가 어리석어서 (아니, 적어도 메리가 생각한 면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분명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메리보다 후대 사람이다.) 한 말이 아니라, 남성 담론이 지배적이었던 계몽주의의 우산 아래에서 그가 태어나 교육을 받고 사고를 펼쳤기 때문에 한 말이다. 위대한 철학자도 담론 앞에서는 타성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밝혀지는 담론의 절대성. ‘이들은 알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을 가져보지만 워낙 글을 잘 쓰고 거대한 논리와 생각의 틀을 지닌 철학자들이라, 그들이 그걸 숨겼다 할지라도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위대함조차도 그들이 차별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때 쓸 만한 동아줄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18세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었던 메리의 정신은 “굉장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어떤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걸 ‘대상화’하고 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행동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대단히 버거운 과제가 되고 말이지만, 적어도 메리는 우리가 함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대를 일갈한다.


    나는 메리가 이 시대로 살아 돌아온다면 차별을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열변과 응원을 토하고 다닐지, 그런 상상을 해본다. 그녀의 시대보다 나아진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겉으로 보면 제도로 다듬어진 면도 많고, 가정에서 실제로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하거나 이성(異性)을 항상 존중하려는 정직하고도 의로운 이들이 있다.


    하지만 만연해 있는 의식의 수준은 여전히 적대적이다. 차별을 가운데 두고 공방을 벌이는 이들 사이도 적대적이며, 자기 자신을 ‘갑’의 지위에 올려놓는 (굳이 표현하자면) pseudo-갑들이 ‘갑’의 담론에 의지해 살아간다. 다 자기가 옳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지지한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지만. 타성에 젖은 우리에게 훨씬 인위적일 수밖에 없는 ‘평등’이라는 장치가 차별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낯섦을 멀리하려는 우리는 익숙한 차별 속에서 그냥 살아간다. 불특정한 대중으로 남는다. 목소리는 있는데, 듣는 이들은 별로 없다.


    목소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솔직히 묻고 싶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선언운동이, 그것이 과연 그녀/그들에게 강력한 테제로 언제까지 남을 수 있는가? 아니, 이건 무시의 발언이 아니다. 그런 운동을 SNS 선에서라도 실천한 이들은 그나마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훨씬 자각이 있는 이들일 것이다. 언제까지나 응원할 일이다. 또한 나는 ‘저것도 하나의 대중 행동에서 그칠 것이다’라는 의구심을 정말이지 물리고 싶다.


    하지만 불안하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등의 단어가 이미 혐오의 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 괴상한 우리 사회에서, 저 선언은 그저 하나의 저항, 반대에 대한 타격, 혹은 저항의 공감 정도에 그쳐버리는 건 아닐까? 선언의 문제는 그 이후에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즐겨 쓰는 회한의 표현처럼, 그것은 다리 아래로 또 하루의 강물이 흘러가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러기엔 온갖 오욕과 비난을 감수하며 시대의 가치를 설파하고, 그리하여 물에 곱디고운 종이배 하나를 띄워놓은 이들의 노력과 역사가 너무나도 아깝고 또 아까운 것이다.


    오전에 읽은 기사의 댓글에서, 나는 그 종이배를 쉽게 찢어버리는 이들의 폭력적인 손길을 느꼈다. 인간 가치와 정신에 대한 반달리즘이라고 할까? 아니, 반달리즘이라고 하자. 그렇게밖에 부를 수가 없다.






“한국 사회를 성(젠더)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실천하는 것은, 단지 ‘여성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 일상,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민주화 없이, ‘정치’ 개혁이나 역사의 진보가 가능하겠는가? 일상의 정치학의 핵심은 성별 관계, 즉 젠더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리에 저항하는 여성주의는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민주주의를 대립시키지 않은 사유 방식이다.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 사회와 나는 연속선상의 한 몸인데, 어느 지점에서 그 몸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290~291쪽)


    나는 저 분홍색 겉표지의 책을 덮으면서, 나의 이런 졸문도 미미하나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겠다는 위안을 얻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푸코는 자신이 또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다고 믿었기에, 흔히 철학에서 말하곤 하는 ‘전회(轉回)’한다고 믿었기에 그토록 많은 글들을 남겼다. 사사키의 책에서 그 이로를 따라가면서 나 역시 푸코가 겪은 여러 차례의 전회들을 직접 추적할 수 있었다. 실천은 전회를 낳는다. 이것이 진리다. 정희진은 그런 실천이 자신에게는 가당치 않음을 겸손하게 밝혔지만, 나는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글로써 여성주의를 수호하고 실천하는, 이 사회와 사투를 벌이는 인물임을 안다.


    그리고 나는 기대한다. 역사도 전회하지 않을까? 남성이 자의적으로 세워놓은 가치가 무너지지 않을까? 그런 날에는 joker 카드는 쓸모가 없어질 테니, 결국 역사의 도박장은 사라지고 우리에게는 어떤 일원(一元)의 공간이 펼쳐질 것이다. 너무 허무맹랑한가? 지나친 판티지인가? 지금의 상황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건 인정하다. 그러나 메리에게도 그런 ‘상상불가’의 공간이 있었고, 그녀는 엄연히 그 공간을 갈구하며 외쳤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달성된 것들이 있다. 역사를 바로 보면 그것이 불가능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 있다. 완성되지 않을 일도 있다. 인간의 선천적 불가능이 존재하듯, 우리는 인위의 장을 만들어 봉사와 거래와 선물과, 그런 제도들을 통해 가능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메리가 말한 정의로움을 좇을 수밖에 없다. 대단한 수준의 일갈이자 비꼼이다.


    “지성을 갖춘 남성들이여, 정의로우라! 그리고 당신들이 먹이는 말이나 당나귀들의 잔꾀와 여성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말라. 그리고 당신들이 이성의 권리를 부정한 여성에게 무지의 특권을 허용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자연이 지성을 부여하지 않은 곳에서 미덕을 기대했던 이집트의 십장들보다 더 나쁜 사람일 것이다!”(메리의 책, 195쪽)


    나는 남자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라는 SNS적 선언에는 나 자신이 너무 창피하여 차마 동참하진 못하지만, 현명한 여성들이 차별의 타성에 젖어 무지에 빠진 남성(과 여성들)을 깨우치려고 쓴 글과 그 역사를 들여다본다. 머리로는 이론을 읽고 배우며, 가슴으로는 모든 타인에 대한 존중에 정성을 들인다. 그리고 이 사회의 정의를 기대한다. 아직 멀다. 더 가야 한다. 대부분의 것들이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채로 그냥 향유된다.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것들에 대해서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메리를 둘러싼 채 그녀를 방관했던 무수한 이들을 우리는 쉽게 비판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후손이 우리에게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되도록 그런 역사의 반복을 피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일까?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존중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그 운동은 무수한 잔향을 남긴다. 메아리가 오래도록 퍼졌으면 한다. 적어도 자신을 ‘독자’라고 부르는 모든 그녀/그들이 하나의 의무와 그리하여 찾아오는 더 넓고 자유로워지는 권리를 생각하게 할 수 있도록.






p.s 여기까지 먼 이로를 따라오신 분들을 위해 이 졸문에 나온 책들과 더불어 열두 권의 양서들을 링크로 달아둔다.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을 찾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온도가 높은 글들에 호응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순전히 독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여기까지 오신 분들은 그 점에서 모두 훌륭하다. 따라서 여타의 추천은 별도로 해드리지 않는다. 나보다 더 많은 양서들을 읽으신 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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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악의 저편』에 담긴 니체의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들
    from Value Investing 2016-03-06 16:38 
    '페미니즘'에 대한 깊이있는 책들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글을 읽으니 쉽게 댓글을 달기가 어렵군요. 그나마 탕기 님의 글 속에서 제게 익숙한 철학자들의 이름이나마 겨우 몇몇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이 글을 읽는 데 일말의 위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은 아닐 듯합니다. 그 두 사람의 철학자들 가운데 좀 더 후대의 사람이 쓴 한 권의 책을 통해 - 좀 더 정확하게는 그 책 가운데 특히 <제7장, 우리의 덕>을 통해
 
 
비로그인 2016-03-06 0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글솜씨가 엄청난 텍스트의 힘이었군요. 대단하네요. ;^^

마태우스 2016-03-08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라고 합니다. 저도 페미니즘 관심이 많구요 여혐 댓글들에 대해 언젠가 한번 글을 쓰고싶어 열심히 캡쳐하고 있어요. 인용하신 댓글 비슷한 것들이 인터넷을 휘젓고 있더라고요. 암튼 많은 걸 배웠습니다. 이런 멋진 글을 쓰신 분이라면, 장차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책으로 내주심 좋겠네요. 여기서 한번보고 지나가긴 아깝네요

탕기 2016-03-08 11:33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마태우스 님. 여혐 댓글 현상에 대해서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시군요. 그냥 지나치기에는 요즘 그 현상이 유독 강해서 10대 아이들이 그런 것에 자주 노출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평등`이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고 인위적이긴 해도 기존 담론에 저항하기 위해서 꼭 들러야 하는 관문 같은 것일 테고요. 끝도 없는,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많은 부분 공감해주셨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p.s 중구난방이지만 그래도 읽어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칭찬으로만 듣겠습니다 ^^ 저는 <보통독자>가 되어야만 하는 불가능의 목표를 가진 평범한 청년일 뿐입니다. `책은 아무나 쓰나?` `아무나 쓰기도 하지.` 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어서, 양심 상 책을 낸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6년 3월 5일 토요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다음 날, 나는 그 순간을 잊어버린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몇 주, 글을 다 쓸 때까지는 며칠이 걸리지만, 강물 위에서 흩어지는 비누의 거품으로 모든 기억은 사라진다. 남는 건 시간이다. 시간이 전부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모른다.


    “진짜로 존재한다는 느낌, 자신의 영혼이 실제 존재자임을 깨닫는 느낌, 그런 느낌을 그대로 묘사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인간의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열이 난다는 환각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동안 내내 열병처럼 달아오르던 내 일생의 잠이 드디어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 『불안의 서』, 85쪽)


    페르난두는 진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신세를 한탄했다. 1930년 2월 21일. 그 날의 일기를 곱씹었다. 아니, 곱씹어볼 수밖에 없었다. 책 읽고 글 쓰는 나의 마음이 가서 부딪히는 문장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딘가가 아리고, 혀끝에서 피 냄새를 낚아채는 새벽. 정신의 생채기에 드는 연고 같은 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어제도 상처를 만졌던 손으로, 오늘 또 다른 아픔을 보듬는다. 페르난두의 ‘삶’을 나의 ‘독서’로 변환하지만, 그 결론의 값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   *   *



    지금껏 여러 글로 독서를 생각해보려 했으나, 결국 그 글들이란 창피한 흔적과 다름없었고,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서의 순간은 분명 있다. “존재한다.”고 못 박아 선언할 수 있다. 문자를 바라보며, 생각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질식과 돌파와, 아니 그보다는 미궁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낱을 제대로 손에 쥐고 있는지 두려움에 떠는 모든 과정, 순간, 그리고 수많은 자세. 독서의 순간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은 본래 낯설다. “기억을 상실한 채 오랜 시간을 건너뛰어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페르난두의 책, 같은 쪽) 개체로 산다. 집중과 산만, 혹은 이해와 몰이해의 징검다리를 건넌다. 독자의 발밑으로는 강물이 흐른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나는 다리 한가운데서 정신이 들었고,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지금껏 나였던 그 다른 인간보다 지금의 내가 더 영속적인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페르난두의 책, 같은 쪽)


    독서와 작문은 어쩌면 페르난두가 말한 그 다리 위에서 강물을 바라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독서토론이나 낭독이 아니라면 저 작업들은 고독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고독을 틈타 진리의 변경에서 저 높은 진리의 성벽을 넘어가기를, 혹은 어디 구멍이 없나 살폈다가 기어들어가기를 노린다.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했고, 성공의 소문조차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전설의 성도(聖都) 곁에 위치하는 작업은 그렇다. “글을 쓸 때처럼 혼자서 말없이 말하는 것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처럼 상쾌한 감각으로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지각하는 것이다.”(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이재만 옮김, 『공부하는 삶』, 289쪽) 이 성스럽고도 긍정적인 신학자의 조언에서, 나는 ‘진리에 귀 기울임’만 뽑아간다. 그리고 이 작업이야말로 과거의 나보다는 나를 훨씬 전면에 서게 하는 일이다. 아무리 어려운 글을 읽거나 써도, 그 순간만큼은 나와 확실히 대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독서의 보증인 작문과 그 작문의 보증인 독서가 분명한 관계라면, 게다가 그 둘 모두가 무엇보다도 선명한 나와의 조우라면, 왜 우리는 그 모든 작업과 과정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하게 풀어져버리는 비극을 맛봐야만 하는 것인가? 읽음의 확실함, 씀의 확실함, 그리고 조우의 굳건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이 졸문을 구태여 읽어 내려가는 당신에게도 현전한다. 때때로 그것은 심장 뛰는 소리만큼이나 친숙하다. 우리는 읽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 순간도 언젠가는 잊힐 것이며, 제아무리 강렬한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애인의 스치는 살결, 새벽에 엄습하는 죽음의 막연한 공포, 가을의 낙엽과 한 몸으로 구르는 허무함 같은 순간보다는 빨리 잊힌다. 그 순간을 제대로 기억한다고 자랑하는 이들의 오만. 그건 제 혀와 마음을 허투루 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왜일까? 모든 독자들처럼 나 역시 매일 생각했다. 망각의 저주, 아니 망각을 망각하는 저주에서 나는 그것을 차라리 하나의 축복이라 믿기로 하고 거짓부렁의 글을 쓰기도 했다. 뇌와 심장의 용량이니 뭐니 떠들면서 나는 잊을 건 잊고 마는 것이 길게 보면 좋은 일이라고 술회하곤 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잊지 말아야 할 걸 잊거나, 잊고 싶은 걸 거의 영원토록 기억한다. 그것도 불안과 우울을 틈타 마음의 전신을 때리듯 내게 쏟아진다. 망각이 축복이라고? 우리의 여력으로 어찌할 수가 없는 ‘망각’이라는 것이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그저 실수일 뿐이다. 그것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이며, 따라서 개개인마다 다른 국지성 호우일 뿐이다. 내가 맑은 날에도, 당신에게는 비가 내릴 수 있다. 망각의 구름은 저주다.


    독서와 작문에 한해 생각해보면 (그 외의 삶에 대해서는 도무지 말해볼 자신이 없다.) 망각의 비를 뿌리는 자연의 어떤 본성이 있으리라, ‘정신’이라는 자연의 특질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미 한 결론에 이른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것임을 알고 있고, 그 결론을 알게 된 당신 역시 이 글이 하나의 졸문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말겠지만, 모르는 독자들이 너무 많다.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굉장한 것을 추구하고, 읽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술회하며, 자신의 생산력을 자랑 삼아 다량의 글을 쓰고 읽는 자들. 엉겁결에 책의 표면에서 미끄러지며 사는 자들. 허무맹랑한 결론을 모르는 자들. 이 결론을 아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이들의 글을 안다. 첫 머리부터 안다. 그리고 읽지 않는다. 곁에 두지 않아도 되는 얄팍한 정신이다. 그렇지 않아도 들여다봐야 할 우물이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가. 페르난두가 86년 전에 한 결론을, 우리 독자의 정답을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도시를 모른다. 거리들은 낯설다. 이것은 치유될 수 없는 재앙이다.”(페르난두의 책, 같은 쪽) 낯선 정신의 도시. 페르난두는 혹 ‘전설의 성도’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가 부럽진 않다. 부러울 수가 없다. 익숙한 모든 것에서 마음을 해체하고 낯선 공간으로, 그것이 두꺼운 책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광활한 백지와 무수한 문자 사이로 자신을 떨어뜨리는 독자의 삶도 페르난두가 말한 그 ‘낯선 거리’이니까. 순간 자기 자신을 봤거나 혹은 본 것 같은 착각이 이어지고, 그런 순간들이 듬성듬성 하나의 독서와 하나의 작문을 이룬다. “자신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 삶이다. 자신을 거의 모른다는 것, 그것은 생각이다.”(페르난두의 책, 86쪽) 그리고 혹 자신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대단히 낯선 일일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을 제대로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글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녀/그들의 글과 우리 독자는 단 한 번도 완벽한 조우를 해본 적이 없다. 다 낯설다.


    “지금 돌이켜보니 타고난 허황함, 숙명적인 멍청함, 엄청난 무식함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 나는 가히 형이상학적인 충격을 느낀다.”(페르난두의 책, 84쪽)


    낯섦은 불가해(不可解)다. 설명할 수 없도록 결정된 순간들이며, 우리를 (진정 그런 것을 묘사할 수 있다면) 자아의 중심부에서 철저하게 밀어내는 강력한 힘이다. 나는 ‘나’로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 당신 역시 ‘당신’임을 믿는 사람. 설명하려는 순간 낯설어지는 자기 자신을 구태여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 나는 차라리 페르난두와 같은 솔직한 낙담에서 위안을 얻는다. 소음 같은 글들 사이에서 오롯이 정신을 집중해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공간에 그의 글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그와 같은 사람들 역시 그 공간을 공유한다.


    나는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질소 같은 것, 다시 말해 대부분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침묵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 말 없이 내뱉고, 귀 없이 들을 수 있다. 그 점에서 침묵은 공기와 닮았다. 호흡으로 전해진다. 그 침묵이 오래 전부터 녹아들어 여러 곳에서 화석을 드러내는, 나는 그런 사람들의 글을 읽고, 또한 갈구한다. 페르난두는 모르겠다며, 피곤하다며 글을 맺는다.


    “자기의 본질 속에 아직도 침묵이 존재하는 인간은 그 침묵으로부터 외부 세계로 움직여 나아간다. 침묵이 그 사람의 중심이다. 그때 그 움직임은 직접적으로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침묵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침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시인 옮김, 『침묵의 세계』, 70쪽)


    나는 침묵으로 말하길 바란다. 당신의 ‘말없음’에 아무 말 없이 대답하며, 당신 역시 나와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이 문자와 문자 사이에는 낯섦과 침묵이 아니면 아무 것도 소용이 없으며, 다른 모든 것은 위선이요, 가짜 향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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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3-05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현력이 대단한 글입니다. 다소 현란하다는 느낌이지만, 잘 읽었습니다. ;^^

탕기 2016-03-05 23:58   좋아요 0 | URL
시인이시니 물론 문양에 속진 않으시겠지요. 건필하십시오 ^^
 


2016년 2월 23일 화요일




    “눈물을 솟구치게 하는 허벅지. 크고, 엄청나게 크고, 뚜렷한 형체도 없고, 한여름밤처럼 광활하면서도 친근하고, 난롯가인 듯이 따스하며, 여성적인… 그곳 상상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좌절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 사랑과, 어떤 끔찍한 공포가 불러일으킨 전율,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미래 공포에 대해…”(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불안의 서』, 171쪽)


    참으로 말다운 말이어서, 나는 새벽마다 뜯어읽는 페르난두의 마음을 접어 책상에 고아처럼, 아, 그가 슬퍼할 ‘고아’의 모양으로 덩그러니 놓아두고는 이불을 덮었다. 하필이면 내게 왜 모든 것은 이처럼 밤과 같은가. 밤이란 무엇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밀밭처럼 연한 금빛의 내 어린 머릿속”(페르난두의 책, 같은 쪽)에서는 “검은 안개요.”라는 대답만 협곡 반대 사면의 바위를 때리고 골짜기를 맴돌 것이다. 페르난두도 그랬다. 절망의 어조로 그는 ‘바람’을 찾고, ‘어머니’를 찾고, ‘고향’을 찾고, ‘침묵’과 ‘요람’과,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노래로, ‘자장가’로 들려달라고 애원한다. 끊임없이 불안하다. 작가이기에, 그와 동시에 譯者이자 독자이기에. 그리고 내가 어쩔 수 없이 떠올리는 불행한 사람들. 불가역의 시간과, 밀려들어와서 빠져나가지 않는 비현실의 파도와, 그런 것들. 나는 지금 위로를 찾는다.



*   *   *



    나는 페르난두가 신에게의 귀의를 꿈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신의 안에서 글 쓰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 일기에서 신을 찾으며 신을 말하고 신을 뭔가에 비유하지만, 그 모든 작업은 방 안의 홀로 된 시간 속에 있는 그와 세상의 거리만큼 다듬어져 있다. 더군다나 페르난두는 신은 침묵하니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차라리 聖人을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내가 페르난두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바로 나 자신이 神이라는 단어를 아주 작은 상자 안에 고의로 가둬놓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수많은 이들이 기복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 경전의 말씀처럼 신을 죽여 보는 전회 같은 건 체험해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 말의 뜻을 전혀 모른다. 그걸 아는 사람들은 붓다의 죽음을 운운한다. 하지만 그 놀라운 기예를 갖고도 버젓이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와불 속에 갇힌 한 깨달은 자가 너무나도 불쌍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그냥 웃겼다. 뭐 저런 신을 믿어? 이 정도가 딱 좋은 표현. 그 신들은 흡사 광대 같았다. 그래서 그런 신을 믿지 않는 대신, 내가 생각하는 신을 만들었다. 중세에 태어났다면 나는 불의 고온에서 만개했을 한 송이의 꽃 같은 고깃덩어리였으리라.


    여러 종교의 경전을 읽는다. 30대의 목표라며 올해부터 10년 간 실천코자 하는 건, 신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작업이다. 일말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건너지 못할 급류에 노 하나 없이, 엉덩이와 배를 마스트 삼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뛰어든 꼴이다. 아, 매일 미끄러진다. 그리하여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나는 이 급류의 수면 아래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한 존재가 살고 있다고 믿어야만 했다. 덩치가 너무 커서 어디에서든 그녀/그의 어깨를 밟으면 수면 위로 콧구멍이나마 내밀 수 있어야 했다. 숨은 쉬어야지. 그녀/그는 반드시 거인이어야 했다. 급류와 협곡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거인이어야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보고된 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미치광이로 호도할 것을 두려워하여 (한편으로는 기꺼워하며) 책 속에 들어가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나는 다름 아닌 거인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다닌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보고 다닌 건 사람이 아니라, “눈물을 솟구치게 하는 허벅지. 크고, 엄청나게 크고, 뚜렷한 형체도 없고, 한여름밤처럼 광활하면서도 친근하고, 난롯가인 듯이 따스하며, 여성적인…”(페르난두의 글, 재인용) 존재들이긴 했다. 어떻게 그녀/그들을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최소의 생물학적 조건은 이미 쓸모가 없어진,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을. 내가 기억하고 숭배하려고 하는 한, 그녀/그들을 어쩔 수 없이 ‘거인’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죽을 것 같은데도 살고 있는 까닭은, 아무리 깊은 바다라 할지라도 그녀/그들의 어깨가 수면 위에서 파도를 맞으며 육지의 존재들을 보듬는 하나의 섬이기 때문이다. 육지를 밟으며 사는 까닭에 나는 선원(혹은 해적?)을 꿈꾸는 것일 테고.



*   *   *



    페르난두의 새벽을 보내는 당신에게, 굳이 어느 섬에 들렀고 그곳에선 또 얼마나 묵었는지 묻지 않는다. 어차피 대부분이 바다 밑에 가라앉은 이 행성에서 우리가 디딜 육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머지 않은 날에 또 다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법. 똑같은 술집에서 만나 예의 저녁을 시켜놓고, 한 통의 웅성거림으로 거인들을 읊을 수밖에 없는 법. 물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연민을, 바다에 빠져죽은 이들에게는 위령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법.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당신과 나를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신에게 나는 묻는다. ‘왜 당신은 이토록 적은 수의 섬만 남기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 것입니까? 이 불완전한 창조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러면 신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대답한다. 그 대답은 토시 하나 다른 것 없는 말의 갈피를 내일도 지닐 것이다. ‘이 세상은 원래 바다의 것이니라.’ 아,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내일도 다시 묻겠습니다. 신의 답변을 바꾸는 첫 인간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도무지 짜증이란 걸 낼 줄 모르시는군요. 저도 아예 그렇게 빚어주시지 그랬습니까.


    “우리 모두는 삶의 바람이 한번 휘몰아치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에 내려앉는 먼지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단단한 지지대, 우리의 작은 손을 편안히 맡길 수 있는 어떤 다른 손을 간절히 바란다. 시간은 불확실하며, 하늘은 멀기만 하고, 인생은 언제나 낯설기 때문이다.”(페르난두의 책, 321쪽)



*   *   *



    그리하여 나는 독자로 산다. 마지막 단검을 빼든 것이다. 이 세상의 허구한 쓸모없는 것들에 일희일비하는 장난감 인형 같은 삶 속에서 한 권의 픽션과 한 권의 논픽션으로 사는 것이다. 거인의 어깨를 밟는 것이다. 가뭄 들지 않는 살갗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동물인 척 하는 사람들의 광기 사이에서 동물이 아닌 척 하는 광기를 부려보는 것이다. 영원을 읽고, 영원을 쓰며, 끝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동물 같지 않은 동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apothanein thelo.”라는 말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폴론에게 빌었던 영원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한 명의 선원으로, 바람과 별자리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노 젓지 못하는 무능한 선원으로 산다. 대가들의 책 틈에 한 장의 사람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한 권을 이룬 이들 사이에서 언젠가 마침표를 찍고 먼지 사이에 묻힐 때까지. 독자의 공간적 행위. 그건 이렇듯 인위의 작업이다. 책 쉽게 읽는 비법 아는 사람은 어디 나에게도 그 좋은 방법을 좀 알려 달라, 이 사기꾼아. 나는 오늘 한 글자라도 제대로 읽었을까. 그런데 뭘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일까. 내 힘으로는 마칠 수 없는 푸념이라 다시 페르난두의 새벽을 불러온다.


    “내 말을 듣고는 있지만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슬픈 비극인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페르난두의 책, 495쪽)


    당신에게도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오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한 사람의 마침표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을 수 있기를. 나는 항아리 속에서 애절하게 죽고 싶어 했던 고대의 마녀처럼 간절하게 바란다. 당신의 새벽을 위하여. 당신과 나는 섬의 술집에서 곧 다가올 밤을 예비하고 있다. 당신의 흔들리는 동공이 내게 다음 항해에 대해 묻는다. 술잔을 쥔 이 손의 냉증도 당신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항구에는 새벽이 내려온다. 내일의 출항을 위해 배들도 고이 바다 위에 누웠다. 다시 마지막 인삿말을. 당신의 새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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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1일 일요일




    일찍이 박이문 선생께서 한 서문의 자리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신 적이 있다. “슬프게도 타고난 재주가 없어 예술가의 길에서 벗어나 딴 직업을 갖게 되었으면서도 예술에 대한 나의 막연한 향수는 버릴 수 없었으며, 예술은 언제나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가장 멋있는 것으로만 느껴진다.”(박이문,『예술철학』, 10쪽) 아, 이것은 내 마음이다. 미술을 유랑하는 두 발의 힘, 먼 언덕에 걸린 작품을 희미하게나마 바라볼 수 있는 두 눈의 힘, 그리고 미술의 책장을 넘기는 두 팔의 힘, 여하튼 이 노마드의 모든 힘은 동경에서 샘솟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술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술 하는 것’과 ‘예술을 동경하는 것’에는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가. 예술을 동경만 하는 주제에 마치 예술을 하는 것처럼 세상을 속여 예술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요쓰야 괴담(四谷怪談)의 독약 같은, 그리하여 예술과 우리의 결합에 훼방을 놓는 가증스런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런 이들이야 이름을 얻고, 돈을 벌고, 독자들에게 빌붙고, 세상에 아부하고 떠나버리는 먼지일 뿐이지만.) 건너지 못할 강의 한쪽 하안에서 아무리 석벽을 쌓고 석교를 놓으려고 해봐도, 계절마다 찾아오는 홍수처럼 나의 의지를 쓸어가 버리는 것이 있다. 그 위력을 나는 안다. 알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얼마간 나는 그것을 ‘광기’라는 단어가 아니면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다른 단어로 표현할지도 모르겠으나, 어디까지나 그 의미는 내가 넘보지 못하는 순간과 세계에 담겨있으리라. 예술의 대가들에게 갖는 존경은, 내게 이런 것들이다. ‘어렸을 적부터 예술가로 단련되었으면…’이라는 어리석은 후회를 하루에도 수 번 한다. 나에게는 딱지를 떼어내고 아린 상처에서 일부러 피의 맛을 보는 못된 버릇이 있다.


    하지만 다행이도 나는 독약 같은 자가 되지 않았다. 양심을 지켰다. 예술가로 자란 불행 속에 살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차라리 한 명의 훌륭한 칼잡이일 것이다. 베어버리는 쾌감으로 미쳐가다가 제 목을 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라서 차라리 이렇게 빌붙어 사는 삶으로 연명하는 것이다. 불쌍하다, 예술가들이여. 몇 안 되는 예술가 : (일동,  무대 밖을 향해 관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대사는 없으며, 무표정.) 그리하여 행복하다고 말하는 예술가들을, 나를 오른팔을 내밀어 흔들며 이 마당에서 쫓아버린다. 휘이, 저리 가거라. 페소아와 피카르트와 블랑쇼와 소세키와 포와 카잔차키스와 보르헤스와 칼비노와 가오싱젠과 ...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체(오, 불쌍한 니체)가 있어야 할 곳에, 왜 그대가 멀뚱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는가. 염치도 없이. 그러나 그것은 연민의 마음까지는 되지 못하고, 때때로 나는 예술가에게서 아무런 정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으니, 그건 엄연히 동경의 마음 때문이다. 나의 든든한 어리석음 탓이다. 그 짝이 오히려 쓸모가 있는 일. 동경이 제일 크다. 여태 그래왔다. 불쌍하다는 말의 안팎을 굳이 구분하는 않는 까닭도, 그거다.


    이 어리석음. ‘동경’이라는 이름의 어리석음은 예술의 바다를 항해하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한 돛이요, 노를 젓는 강인한 완력이다. 그리하여 나는 단 몇 분이 되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해와 북극성을 바라보며 배의 방향을 구한다. 정 힘들 때면 카시오페이아까지만 본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의 이름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gyrocompass로 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붙인 이름인데, 내 안에 그런 연원이 있는 까닭에 저도 모르게 끌린 단어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gyrocompass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어쨌든 그것은 방향. 보르헤스의 시를 읽을 때부터 나는 언제나 선원(혹은 해적?)이 되고 싶었다. 바다와 예술은 퍽 어울린다. 항해는 나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너에게도 역시 또다른 황금 해변에서          A ti también, en otras playas de oro,

    부식되지 않고 기다리는 보물이 있네          Te aguarda incorruptible tu tesoro:

    광대하고, 막연하고, 피할 길 없는 죽음이     La vasta y vaga y necesaria muerte.


    (보르헤스, 우석균 옮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72쪽.「장님의 자리(Blind Pew)」 中)



*   *   *



    동경은, 한편으로는 무언가에 대해 안달을 내는 것이다. 속에서 열이 나서, 안에서부터 익어가는 것이다. 겉으로는 차분한 척 예술을 읽고 듣고 보면서도, 그 속에 용광로 하나 가져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하나의 시가 생각난다.


    꽃무늬 팬티를 입으시는 어머니를 둔 김경주의 한 시 앞에서 한참을 울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시집을 기억하는 건 〈백야(白夜)〉라는 다른 시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도무지 모를 그 말들 사이에서 침잠의 새벽을 보내다가 불판의 고기를 맨손으로 짚는 광기를 부리며 한 구절을 이면지에 옮겨 적었었다. 김경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풀에게 흉터를 남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제 속의 열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김경주,『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45쪽)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음으로는 정말 수 십 년을 보낸 것 같은 가증스런 상상을 하면서, 바로 오늘 다시 그 시와 구절과 그 날을 떠올린다. 나는 풀이요, 그것도 아주 열병이 나버린 풀이다. 안에서부터 익어가는 기이한 살덩이를 지닌 한 마리의 고기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 나에게 그런 얼토당토않은 흔적을 남기는가. “바람을 버리고 우수수 떨어”지는 이 밤은 (실로 밤이야말로 바람이 지탱하고 있는 어둠이 아닌가) 시인의 눈[眼] 속을 흐르는 겨울열매[雪]가 도무지 이상하지 않은 차디찬 계절. 이 극명한 온도 차가 오히려 속의 안달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인지도.


    예술을 읽는 두 손의 냉증과, 예술을 보는 두 눈 앞을 가로지르는 찬바람과, 하여 그런 것들이 열병을 식혀주기도 하는 이 다행인 계절에, 나는 바람이 아닌 흉터의 결대로 이리저리 꺾이며 춤을 추는 하나의 풀이 된다. 서재에 장작은 충분하다. 화력 앞에서 증기를 뿜어대지 않는 열차는 없다. 나는 이런 글로 굉음을 낸다. 달리고 있다는 증거로 하얀 거품들을 머리 위로 뱉어낸다. 나의 속도대로 예술이 풍경처럼 지나간다. 나를 선로 위에 얹어놓고 강철로 무장시킨 모든 대가들에게, 나는 거치는 모든 역마다 손님들을 내리고 싣는 봉사로 답한다. 그녀/그들은 모두 나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이 추운 왕국의, 열병을 지닌 신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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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좋은 글들과 감상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밤 되세요. *^
 

2016년 2월 13일 토요일



    나에게도 박준의 <미인>이 있었다. 그러나 <미인>이 마음에 앉으니, 언어보다 훨씬 선명한 걸 알게 됐다. 그것은 차라리 소리. 갇힌 공간에서 끊임없이 울려 돌고 도는 음성이었으며, 나는 그 감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어의 그물은 자주 찢어졌다. 잡히는 것도 없는데 허구한 날 찢어졌다. 어부는 성질이 나서 시를 관뒀다, 라고 말하면 될까. 시는 내게서 시작하는데, 안에서 나오는데, 도무지 공간의 메아리는 나의 것일 수가 없어서, <미인>은 시가 될 수 없었다. 시도 <미인>은 될 수 없었다. 박준에게도 성긴 그물을 만지작거린 날들이 있었으리라. 만지작거렸으니 저 정도로 썼지, 그가 훌륭한 낚시꾼이었다면 세상 모든 애가(哀歌)는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물고기 없는 바다는 비현실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배신자가 됐다. <미인>이 떠난 후로도 쓰지 않던 시를 대학 늦깎이 시절 강의 때문에 수 십 편 썼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들어줄 이가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적는다. 차라리 이 공간의 조촐함이 좋다. 나는 당신이 볼 수 없는 어딘가에 숨어 사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도 읽어주니, 당신에게 깊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신이 그 소수 중 한 사람이라, 고마움은 고마움에 겹친다.



*   *   *



    메아리는 공간을 돌고 돌아 어느덧 미세한 잔향만 남기고 더 이상 마음을 울리지 않았다. 잔향을 듣는 귀의 지혜를 잃었다. 배신은 언제나 이렇듯 교묘한 술수를 부린다. 나는 짓궂게 웃고는 눈을 딱 감았다. 시를 쓰자. 혹은 시를 쓴다는 이들 곁에 앉아라도 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그래도 갈구한 날이 있었으니까.


    김승희 시인 앞에서 시를 썼다. ‘정신줄’이라는 걸 놓고 쓰니 칭찬도 받았다. 한 번 만 더 결석하면 F처리 되는 나를 우수한 학생이라 불러줬다. 취향이려니 했다. 자주 대화를 나누던 남학우 여학우와 도무지 모를 말들에 대해 말했다. 모두 자기 것만 발표하고, 다른 사람 것은 몰랐다. 이게 뭐지, 했다. 계속 모르니까, 결국 아는 게 생겼다.


    쓰다 보니, 나는 다시 청각이 예민해졌다. 저 소리들, 뭐라 하는 거야, 뭐라는 거야. 너는 알고 말하느냐, 나는 언제까지 들어야 알 수 있느냐, 아니, 나는 알고 썼느냐. 이 기이한 창작의 공방(工房). 내리치는 망치와 그걸 받는 모루 사이의 굉음에서 메아리의 흔적을, 감금의 추억을 기억해냈다. 그렇다. 돌연 <미인>이 그리워지고, 소리 속에 침묵하던, 오직 침묵만을 실천하던 때가 그리워졌다.


    다시 망각으로 들어가자. 무수한 시집들은 그렇게 내 서재의 무수한 책들 사이에서 얇고 비스듬하게, 아무 의미 없이 꽂혀 있다. 그에 비해 여기까지 돌아온 이 궤적의 거리는, 이 비틀비틀한 거리는 또 얼마나 긴가.



*   *   *



    쓸 때는 많이 읽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도대체 읽지 않으면 쓸 수 없으니, 읽어서 몰라도 일단 ‘읽는다는 것’을 해야 했다. 그만큼 곤욕인 게 또 어디 있는가. 젊은 시인들을 읽고, 난해한 시들을 읽고, 시의 흐름을 보려고 탁류에 고개를 처박고, 대체 숨은 제대로 쉬는지 모르겠는데 끈질기게 수중의 생을 보내다가 새벽 늦게야 이불 속에서 숨을 쉬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 물이 눈에서 떨어지니, 몸 어딘가 액화 과정이 일어나는 기관이 있는 모양이었고, 그게 싫었다. 지겨웠다.


    나를 속이는 것들. 저자들은 나를 바보로 만들 속셈인가보다. 분하다. 나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그런데도 뭘 쓰고 있다. 막스 피카르트가 말한 ‘그 모든 것의 원천’, 침묵이여, 나를 도와다오.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침묵할 수 없는 이 박약한 정신. 밀어내려는 의지와 단절된 말. 그 와중에 일어나는 폭력. 언어 사투. 예술이란 그런 것이었는가. 이러다 미쳐버리겠지. 아주 돌아버려서 훌륭한 시인이 되어버릴 거야. 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읽을 수 없는 글을 쓰면서, 세상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홀로 제정신인 상태로 살아가겠지.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


    요컨대 나는 반 년 정도를 새벽마다 미치며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국문 고전 레포트를 쓰고, 종교분쟁을 연구하고,「莊子」를 읽은 것은 신기였다. 사람이 이렇게 진폭이 큰 소리로 살아도 신체가 부서지지 않다니. 아, 그러고 보니 또 ‘소리’다. 언제나 소리로 돌아온다. <미인>이 내게 가르쳐준 것.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그것은 계절이 지나도 화석처럼 매달려 있는, 엇나간 나뭇잎 같다. 저 창 밖에 한 장이 빗속에 부산스럽다.



*   *   *



    미쳐도 글이 써진다는 것이 미쳐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얘긴 아니겠지만, 여하튼 김승희 시인은 내가 살짝 돌기 시작할 무렵부터 습작에 관심을 가져줬다. “식도는 어둡다.”라든지, “다섯 살이 부서져요, 엄마”라든지, “잠에서 깨면 늘 나는 遠洋의 감옥 속에 있다.”라든지, 이런 구절에서 멈춰서더니 시가 죽고 사는 일에 대해 말해줬다.


    더 미쳐야 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그러나 한 번 미치면, 뭐를 분별하는 건 둘째 치고 어느 선까지 미쳐야 하는지 누가 판단하는가. 여기까지? 여기가 어딘데? 도대체 정신의 공간에 어디 좌표가 있던가. 마름질 할 수 없는 곳에서 자를 들고 서있는 사람만큼 우스꽝스런 광대도 없다. 그런 작자들의 글에 수도 없이 속았고, 이런 공간이든 저런 공간이든 자신을 바보라 드러내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삼태기에 담아 수백이나 된다. 속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단단하게, 곡식 낱알들을 고르며 살아왔다. 이런 광기가, 말하자면 그건 또 광기일 수밖에 없는데, 그 미친 정신과 뜨거움과 운동과 폭력과, 하물며 성스러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들로 나는 함몰의 고비를 늘 상처로 지나왔다.


    그런데 더 미치라니.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저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라고 속으로 말하면서도, 대시인 앞에서는 정중해야 하는 까닭에 더 다듬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다른 강의들 준비로 분주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성적을 확인하고, 나는 그 미소 뒤로는 다시는 미치지 않기로 했다. 관심 가져준 그분께는 고마운 마음이지만, 소설을 가르친 어느 교수의 말대로, 한 명의 독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충실하게. 더 충실하게.



*   *   *



    창작하는 이들은 광인이다. 그녀/그들이 뭐라 항변해도 나는 앞과 같이 확언한다. 모른다면 알려줄 생각이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글은 읽지 않는다. 작품을 통해 거의 미쳐서 공간을 부수고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날아가든 할 것 같은 불가능의 사람들만 만날 것이다. 그 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인>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쳐본 이들이여, 라며 그녀/그들을 어느 공간에 소환한다. 미쳐서 죽은 이들도 바람에 날려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거짓으로 불러놓고, 멀찌감치 그녀/그들의 한가운데서 멀어진다. 공간에서 벗어나진 않는 거리까지. 한 눈에 보일 수 있는 정도면 좋다. 그녀/그들이 뭐라고 서로 말하고 있는지, 무슨 안부를 전하는지, 작품 잘 되냐고 묻는지, 고민은 뭔지, 대체 우리말과 다른 말은 어떻게 통하는지, 그런 건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 어차피 미친 소리일 텐데.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리다. 그 소리를 듣고 싶을 때면 언제든 다가간다. 모습을 보려고 할 때면 또 뒤로 물러난다. 둘 다 실패로 끝나긴 해도, 끊임없이 한다.


    눈치 챈 사람도 벌써 있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녀/그들도 나와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차원이라든가 물리라든가 하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는 나의 서재다.



*   *   *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그래도 서재라고 갖고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독자로 산다. ‘독자됨’이 무엇인지 쉼 없이 묻고 갈구하면서, 광기의 새벽을 떠올린다. 광인들이 극도의 고온에서 건져낸, 하지만 우리는 저 차가운 활자와 헐거운 백지로 붙들고 읽게 되는 책에서 나는 광기와 마주하는 작업은 부단히 한다.


    광기의 독자인가, 잠시 생각해본다. 저 먼 헤겔의 미학, 그걸 난 곧이곧대로 듣진 않지만 작품은 완성됨과 동시에 미완성이라는 그의 말은 옳다. 몫은 독자의 것. 하지만 ‘완성’이라는 단어는 매우 위험하다. 독자도 완성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사실 완성은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왔다. ‘독자가? 독자 주제에?’ 속으로는 이렇게까지 생각한다. 폄하로 들어도 상관없다. 자신의 유능함을 믿는 독자처럼 어리석은 자도 없으니까. 미완성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와 미완성을 읽고 미완인 생을 사는 독자만이 있다. 나는 미완이라 이렇게 쓰며,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솔직함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서평이라며 자신의 얄팍한 이해의 잣대를 들이대고 이런 말과 저런 말을 분간 없이 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아니, 별로 들여다보진 않는데, 서두부터 웃는다. ‘현실을 들먹이며 판타지를 사는 이들이여.’


    참으로 많은 책이 있으며, 많은 작가가 있고, 많은 글이 있지만, 그리하여 우리는 독서의 부족에도 이상하리만치 풍족한 ‘말’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실로 그런가? 지칠 대로 속아서 완전히 지쳐버렸는데도 내일 또 속는 이 굴레의 지겨움.



*   *   *



    당신은 미쳐본 적이 있나요?


    이렇게 물었을 때, 대답하는 이들의 글은 읽지 말라. 제정신인 사람은 이 무대에 설 수 없다.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움직이게 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읽었더니 눈물이 나오더라, 읽었더니 힘들더라,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더라, 하지만 서재에 가만히 꽂아두고 자꾸만 눈을 주더라… 그 작가와는 죽을 때까지 작별하지 말라. 오래도록 읽지 않아도 남는 이들이 있다. <미인>이 있다. 소리가 있다.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울림을 그치지 않는 음성이 돈다. 그런 독자는 행복하다. 몹시도 많은 불행 속에서, 그녀/그들에게는 적어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으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도 않고 묵묵히 글을 쓰는 이들에게 눈을 둬라. 미쳐서 쓰는 사람은, 질문을 듣지 않는다. 들을 수가 없다. 우릴 머쓱하게 만든다. 저기, 그래도 대답은 좀… 안타깝지만 그런 작가는 독자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독자이다, 우리는. 무엇이 우릴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수도 없는 이야기가 있지만, 자꾸 뭘 묻는다. 광인은 그런 우리에게 그동안 미쳤던 흔적을 툭 던진다. 그리고는 그 공간에서 사라진다. 소리처럼 저기 가서 울리고,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가서 울리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녀/그들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좇을 수밖에 없다. 공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무수한 책 앞에서, 서재에서, 당신의 그 공간에서, 단 한 번이라도 확언하듯 책 한 권을 덥석 잡아들고 끝까지 만족한 적이 있었는가? 그렇게나 자신하는가?


    독서는 끝없는 실패다. 아,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녀/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초장’부터 자만이다. 조금은 더 작가와 가까워진 것 같아요다시 읽어보니 이건 바로 그뜻이었겠구나 (‘바로’라고?) 싶더라고요, etc, etc, etc. 단 한 권도, 심지어 단 한 문장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라는 사람들은 그냥 대중문화에 섞여 지내면 된다. 여기는 애당초 그녀/그들의 공간이 아니다. 불평은 무소용이다. 해봤자 광인은 듣지 않는다. ‘미친 길’이라는 건 따로 있는가? 그런 듯도 싶다. 어떻게든 설명해보고 싶지만, 직접 본 적도 없고, 물어봐서 들은 대답도 없다. 하지만 존재한다. 이게 무슨 비과학적 언사인가 싶어도, 사실이다. 독자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살아가는 그녀/그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거요? 보이진 않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이 하나 둘 쌓이면 그 길은 실재가 되고, 우리는 믿게 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독자가 뭘 믿고 읽는지 생각해보면. 저요? 이렇게 처참하게 매일 떨어져 나가면서도 이상하게 나무에 붙어 있더라고요. 왜 그런 것일까, 생각해봤어요. 누군가가 저를 자꾸만 나뭇가지에 도로 데려다주는 것 같아요. 붙어 있으리라는 건지, 다시 떨어지라는 건지, 참, 도통 모르겠네요. 아, 그게 누구냐고요? 미친 사람이지 누구겠어요?


    광인 : 나무 주변에 서식하며,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되돌리는 이를 일컫는 말. 정신 생명 유지의 근원. 그 자체로는 수많은 곡해를 받기 마련이며, 의외로 주목 받는 만큼 이해되지 않는다. 수많은 지구의 영적 존재들은 주변에 낙엽이 뒹굴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나, 광인은 손에 잡히는 낙엽이면 그 무엇이든 다시 나무에 붙인다. 따라서 고통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광인을 멀리한다고 알려져 있다. 광인의 수는 무척 적으며, 주로 숨어지내 소재를 알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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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다. 쓴다. 미친다. 자꾸 미친다, 미친다 하니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더욱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도 서재 밖에서는 잘 살아간다. 바다 밖에서는. <미인>이 없는 곳에서는. 새삼스럽지만 인간은 원래 육지 생물이며, 그 중에서도 거의 막내라서 애당초 물에서는 살 수 없다. 물 속에서 허파로 숨쉬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추신 : 이 이야기는 당신의 공간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됩니다. 광기의 비밀은 당신과 저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가끔 재미로 ‘미친 척’을, 하지만 여기서는 제대로 한 생을 다하여 기꺼이, 그리고 한없이… 미쳐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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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3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해한 산문시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가지 주제에 매달려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쓸 수 있는 필력이 부럽네요. 탕기님은 타고난 글잽이인 것 같고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평론이든 시든 산문이든 나중에 뛰어난 작가가 될 거에요. 저랑 내기할까요. *^^

탕기 2016-02-13 23:01   좋아요 0 | URL
한 권의 독자로 사는 것도 버겁습니다. 뛰어난 작가라니요. 저는 `작가`라 부르는 사람이 몇 없습니다. 그런 제가 작가인 척 하는 불손한 사람은 될 수 없는 노릇이죠. 뭘 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기는 저의 승리입니다. 많은 몫을 걸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 칭찬으로만 듣겠습니다.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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