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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16년 3월 13일 일요일
기초와 근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기단이 부실해도 고층을 올릴 수 있는, 그런 불가능의 공법은 인간 세계에 없다. 그래서 대가들은 글을 쓰고, 세상은 우리 독자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권한다. 카렌 암스트롱의 말이 옳다면, (이는 그녀가 자신의 저서 『축의 시대』에서 한 주장인데) 위대한 가치의 대부분은 이미 나와 있다. 쏜살같은 21세기를 사는 ‘나’라는 30대 신참이 철학과 문학, 미술 등을 곁에 두고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있는 이유는 그거다. 나를 고리타분하다 말해도, 그런 표현이 싫진 않다. 놓치지 않으려고 읽는다. 알지 못하면 실천도 못한다. 그런 생각으로 산다. 역사와 사상, 그것들을 담은 책을 읽는 이유는 다른 매체와 대부분의 사람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나를 못 믿는다. 기초와 근본이 덜 되었으므로. 그래서 기초와 근본은 낯설다. 결코 적응하지 못하겠지만, 낯선 것을 피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읽고 실패하고 쓴다.
누군가는 코웃음을 치겠지만, 이게 나의 실존에 대한 접근법이다. 거울을 보면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반사의 상(像)임을 거부하는, 또 다른 내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생각하는 나와 움직이거나 실천하는 나는 같지 않다. 과연 의지박약의 문제일 뿐일까? 그렇게나 약해빠진 사람일까? 불일치의 불꽃이 수없이 이는 이 세상은? 한 철학교수와 모교 근처의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면서 나눈 이야기도 그거였다. 거울 속 또 다른 나를 볼 때마다 느끼는 죄책감 같은 것, 그걸 딱히 종교적으로 해석한 건 아니지만, 여하튼 그런 불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에리히 프롬이 1956년 세상에 내놓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을 추천해줬고, 나는 읽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나고 나서야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며 첫 복기라는 걸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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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운동선수들은 한 목소리로 기초를 강조한다. 그녀/그들은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기초를 다듬는 일에 썼다. 현 NBA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스테픈 커리가 화려한 드리블을 구사할 수 있는 건, 어렸을 때부터 양손으로 동시에 두 개의 공을 튕기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보는 우리들이야 그 모습에 눈멀지만… 어른들은 모든 일이 그렇다고 내게 가르쳐줬다. 기초의 유무로 결판이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건 기술에 한한 진리가 아니다. 인간이 수호해야 하는 고귀한 정신과 가치도 우리에게는 기초다. 실존의 난제를 해결해줄 수 있으니, 정신과 가치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혹은 지녀야 하는 (이런 비유가 적합하다면) 최고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기초가 안 된 사람들이 벌여놓은 일들이 어제도 기사에 실렸다. ‘원영이 사건’으로 기가 찬 저녁에, 3개월도 안 된 딸을 학대해 숨지게 한 20대 초반 부부의 이야기가 올라왔다. 판결 따윈 궁금하지도 않다. 기사를 읽어보니, 원치 않은 아이였다고 한다. 새벽 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왔는데 딸이 울어 짜증이 나 바닥에 던지고 할퀴고 꼬집었다고 한다. 변명은 그럴싸하다. 하지만 이건 인간을, 상대를, 생명을 하나의 도구로 절하해버린 사건이다. 저 어린 부부에게 <아이>라는 것은 그 단어의 기초와 근본을 잃어버린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생명임을 인정하여 적어도 연민이라도 했더라면, 저 부부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런 사건들이 줄지어 보도되는 세상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인간 실존 문제를 해결할 최상의 답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본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 있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에리히 프롬, 황문수 옮김, 『사랑의 기술』, 24쪽) ‘나’와 분리되는, 실존적인 불안을 느끼는 존재다. 이러한 불안에는 죄책감과 수치심이 함께 한다. 거울 속의 나를 볼 때마다 내게 엄습했던 죄책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에리히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성기노출의 수치심이 아닌 성(性) 분리의 자각을 의미한다고 봤다. 분리된 인간은 고독의 감옥에 갇힌다. 결합의 방법은 오직 사랑이지만 쉽게 달성하지 못하므로, 이따금 광기에 휩싸이기도 한다.
모든 이들이 이런 불안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원초적 결합의 상실인 분리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비(非)유아이다. 또한 에리히가 보기에 분리 극복의 해답은 제한되어 있다. 일단 그는 여러 문화권에서 제시된 해답들을 하나씩 역사적으로 살펴본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합일(合一)이다. 말 그대로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외부의 어떤 도움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도취적 합일과 집단과의 합일이 있다.
전자는 영화 ≪향수(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에 묘사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르누이가 만든 ‘절대 향수’는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 즉 그르누이가 처형되는 장면을 보려고 모여들었던 군중을 나체로 만들고 서로 사랑을 만끽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르누이가 느꼈을 고독이란!) 이 합일은 종종 난폭하기도 하며, 에리히가 ‘몸+정신’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퍼스낼리티>라는 것의 전체를 사용한다. 집단과의 합일은 전자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주로 ‘의례’와 ‘종교’, 혹은 ‘정부’라는 공식제도를 통해 개인이 군중과 합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민족주의, 전체주의는 물론이고, 민주주의도 여기에 포함된다. 공감 누르기, 콘서트 예매, 붉은악마, SNS, 정당활동 참여, 보신각 타종 행사… 그런 의미에서 사실 우리가 ‘개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합일 속에서 차이만 추구하는 것일지도.
후자의 경우는 평등과 전체를 사상적 개념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위험하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잘 모르고 말하는 이 개념들은 두 가지 함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차이의 소멸이다. 이건 가능한 일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다.”라는 말은 “당신도 나랑 똑같이 해야 한다.”라는 명령으로 비화될 여지가 많다. 두 번째 함정은 이를 통한 인간 개체의 비개성화다. 전체 안에 개인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개인보다 전체가 우선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비판의 여지가 있음에도 매력적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말을 들으면 분리의 불안과 죄책감이 조금은 씻겨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정체 모를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맹목적일 수 있다.
다른 두 가지 방법에는 ‘노동+오락’, 그리고 창조적 활동이 있다. 특히 에리히는 노동과 오락에 있어 그것의 상투성을 비판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無)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에리히의 책, 34쪽)
그렇다면 대체 분리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즉 우리의 실존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건 에리히 프롬에게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에리히의 책, 38쪽)이다. 역설이다. 하지만 이런 성숙한 사랑은 ‘공서적 합일’이라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 형태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공서(共棲)는 생물학 용어로 symbiosis, 즉 공생(共生)과 같다. A와 B가 서로를 강하게 결합시키는 미숙한 형태의 사랑인데, 에리히는 이걸 수동적인 마조히즘(복종)과 능동적인 사디즘(가학)으로 나눠 설명한다. 이것에 비해 성숙한 사랑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여기서 에리히가 말한 ‘활동’은 스피노자가 말한 ‘능동적 감정’이다.) 그리고 이 활동은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에리히의 책, 42쪽)이다. 상대방에게 생명을 주는 것. 그렇게 타인을 고양시키는 것. 고양된 타인이 또 다른 타인에게 그렇게 하는 것. 에리히가 본 <참사랑>은 바로 이런 생산적 성격을 가진 사랑이었다.
능동적 사랑에는 보호, 책임, 존경, 그리고 지식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고루 들어 있어 서로 의존한다. 모성애가 그 대표적인 예인 보호는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연민, 그리고 동정에서 비롯된다. 에리히는 여기서 구약의 요나(Jonah) 이야기를 꺼낸다. 요나는 정의파.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니네베(니느웨) 사람들이 너무나도 싫다. 하지만 ‘하느님’은 요나에게 명한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재앙을 경고하라고. 요나가 따랐을까? 그 길로 도망쳤다가 큰 물고기(혹은 고래)의 배 속에 갇혀버렸다. 다시 풀려난 그는 ‘하느님’에게 화를 냈다. 이런 정의가 또 어디 있습니까?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은 뙤약볕의 요나를 위해 아주까리를 길러줬다가 다음 날 걷어내면서 (햇볕에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요나에게) 이런 명언을 남긴다. 여기서 ‘십이만 명’이란 아주 많다는 뜻이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서 4장 10~11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本)
<참사랑>, 즉 능동적 사랑에는 이런 동정과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에리히의 책, 46쪽)인 책임, 그 책임을 지배나 소유 따위로 전락시키지 않는 강력한 힘인 존경, 그리고 그 존경의 조건인 지식이 들어 있다. 특히 지식은 인간의 비밀을 알려는 욕망과 부득이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유의 힘으로 바뀔 수도 있다. 분해와 해체, 그 잔인함으로 한 인간에 대한 앎의 욕구가 상대를 파괴시키는 일도 비일비재 했었으니까. 에리히는 그걸 “절망적인 방법”(에리히의 책 49쪽)이라고 했다. <참사랑>에서 지식은 타인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한한다. 그리고 딱 그 선까지만 힘을 쓴다. 카렌 암스트롱도 『신을 위한 변론』에서 역설했었다. 신과의 합일에 있어 신에 대한 지식은 중요치 않다고. 타인과의 합일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참사랑>이란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에리히의 책, 52쪽)이다. 처세를 위한 겸손을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에리히는 말미에서도 역설한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에리히의 책, 162쪽)
정신분석학의 선상에 있는 에리히가 보기에 한 인간이 발달시켜야 하는 사랑은 어머니에서 아버지, 그리고 그 둘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인간의 발달과도 같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은 한계가 없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에리히의 책, 60쪽)고 생각하는 자기본위성, 즉 egotism에 빠진다. 딱히 그 이외의 것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을 통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랑만 배운다면 부족하다.
에리히와 정신분석학자들은 보통 6세 이후로 보는데, 여기서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사상, 법률, 질서, 훈련, 모험 등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다. 그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받을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조건적인 사랑도 올바른 형태가 있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줘야 하는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증대시켜야 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허용해야”(에리히의 책, 66쪽)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성숙해진 아이가 나중에는 스스로 어머니가,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게는 이렇게 두 사랑이 병존한다. 에리히에게 사랑은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에리히의 책,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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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에서 에리히는 다섯 가지의 ‘사랑의 대상’을 정리한다. 배타성 없는 사랑이자 그가 ‘사랑의 바탕’이라 부른 형제애, 앞서 잠깐 언급한 모성애,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에리히의 책, 77쪽)고 한 성애, 이기심과는 정반대의 사랑인 자기애, 그리고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선(善)인 신에 대한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 다섯 형태를 되짚어보면서 <참사랑>의 윤곽을 다시 그려준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동등한 존재라 하더라도 항상 ‘동등’하지는 않다.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에게는 항상 도움이 필요하다.”(에리히의 책, 71쪽)고 역설한 그에게 있어 가장 기초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나는 이걸 ‘차등의 극복’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은 차등적 존재다. 우생학의 관점에서 그것만은 옳다. 하지만 우리는 그 차등을 ‘동등’이라는 추상의 관념으로 극복할 수 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그러나 그런 극복이 반드시 인위적인, 대단히 이질적인 제도나 개념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이 낯설긴 해도, 우리는 무력(無力)을 동정할 수 있는 인간미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모성애는 불평등의 긍정으로 비화될 여지가 다분하다. 아이를 종속시키는 자아도취적 성격도 있다. 하지만 보호와 책임에 대한 1단계의 모성애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더 나아간다.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은 ‘좋은 일’에 대한 감정을 아이에게 함양시켜주는 것, 에리히가 ‘Happiness’라고 말한 감정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에리히의 책, 73쪽)고 비판했다. 물론 아버지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자신을 초월한 사랑을, 우리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성애는 에리히가 많은 각도에서 비판해온 사랑이다. 특히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에리히의 책, 79쪽)고 했다. 피정복욕을 포함한 정복욕, 허영심, 파괴욕구 등이 이를 자극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일시적인 욕망이 식어버리면 속된 말로 ‘전철을 갈아타기도’ 하는 사랑이다. 또 분리는 느끼니까…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만나면서 성적 교섭을 갖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구한다. <참사랑>이라는 개념에서 한참을 벗어난 사랑이다.
자기애는 이기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받아온 모양이다. 에리히는 서양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지적한다.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에리히의 책, 83쪽) 앞서 살펴본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봐도,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나 자신에 대한 <참사랑>이라는 뜻에 한해서, 물론 에리히는 그런 의미로 ‘자기애’라는 단어를 썼다. 이기심은 공허, 좌절, (그리고 프로이트에 따르자면)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으며, 실상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에리히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신에 대한 사랑’을 분석한 이유는 <참사랑>의 모습을 <참종교>의 모습에 비유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토테미즘, 우상숭배, 신인동형 숭배의 단계를 무력한 애착인 어머니의 사랑에서 순종적 애착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변화하는 것과 나란히 놓는다. 그리고 종교의 한계를 도출한다. “신이 아버지인 한, 나는 어린아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대한 자폐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중략) 내가 복종할 때 나를 좋아하고, 내가 찬미하면 기뻐하고, 내가 복종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에리히의 책, 97쪽) 그러나 그는 종교, 특히 일신론 계열의 한계에서 오히려 성숙한 사랑을 씨앗을 발견했다.
앞서 에리히는 성숙한 어머니와 성숙한 아버지가 아이에게 어떤 <참사랑>의 씨앗을 심어주는지 역설했었다. 아이 스스로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한 명의 어머니와 한 명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로부터 사랑을 익히는 것. 이것이 바로 <참사랑>이었다. 그는 종교도 같다고 본다. 그래서 심리학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 어머니에서 아버지로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참종교>와 <참사랑>의 공통전제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원리를 확립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에리히의 책, 108쪽)
그리고 <참사랑>이 겸손의 태도로 발현되듯 <참종교>는 신에 대한 무지를 진리로 받아들여 겸손하다. 신에 대한 학문은 그녀/그들에게 별다른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녀/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직 신과의 합일. 카발라의 엔 소프(En sof), 혹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절대 무’이다. 에리히는 여기서 그 자신이 ‘인간개조’라고 표현한 명상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된 사상과 책을 접한 이들에게는 에리히가 어떠한 실천적 결론을 내릴지, 이미 저 앞에서부터 내다보였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의 양서’가 된 법정 스님, 틱낫한 스님, 달라이 라마, 라마나 마하르쉬, 아니면 크리슈나무르티 등의 결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실천의 진리.
이에 실패한 현대사회. 에리히는 그걸 ‘현대서양사회’로 한정했지만 서양의 제도와 습관을 들여온 거의 모든 문화권이 그의 칼날을 면할 길은 없다. 자본주의는 정치적 자유와 시장의 원리로 돌아간다. 단순한 구조다. 물품이 노동의 가치를 뛰어넘고, 집중화되었으며,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에리히의 책, 119쪽)로 산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인간은 집단적이며 표준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규격화를 통해 초월과 합일의 갈망을 못 느끼도록 한다. 자본주의가 외치는 건 이 말 뿐이다. “소비하라!” 굳이 마르크스를 이 자리에 소환할 필요도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피상에 그치며, 그렇게라도 잘 살라는 격언들이 넘친다. TV토크쇼에 나온 연애 상담사들이 하는 말들은 다 겉핥기다. “평생 동안 남남으로 남아 있고, 결코 ‘핵심적 관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 예의 바르게 대우하고 서로 더욱 호의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리히의 책, 122쪽)가 설파된다. 굳이 그런 패널과 성공한 저자들의 책을 언급하진 않겠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은 사랑을 성적 쾌락의 소산이라고 보는, 기술적 단계에만 머물러 있다. 굳이 표현해보자면 ‘19세기적 정신’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소리로 들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때부터 ‘자본주의=인간의 자연적 욕구’라는 명제에 빠져 살았으니까.
에리히는 일갈한다. 우상숭배적 사랑, 감상적 사랑, 시간에 의한 사랑의 추상화, 투사 메커니즘 활용, ‘사랑≠갈등’이라는 초보적 인식 모두를 일갈한다. 사랑은 우상화가 아니다. 환상 속에 있지도 않다. 고독에서 일순간 해방되려고 맞는 마취제도 아니다. 타인에게 투사할 사랑도 아니다. 피난처 역시 아니다. 에리히의 <참사랑>, 즉 ‘핵심적 경험의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에리히의 책, 138쪽) 가능한 사랑이다. 그것은 도전이요, 움직임이며, 또한 성장이다. 따라서 이런 사랑이 넘치고 있는 오늘날 그와 비슷한 종교는 “중세의 종교적 문화보다는 오히려 우상 숭배를 하는 원시부족에 더 가깝다.”(에리히의 책, 140쪽) 나는 오늘도 신에게 기복하라는 광고를 들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를 누비는 확성기의 소음을, 연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우리에게 신이 동업자일 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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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다. <참사랑>을 추구하긴 하죠.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녹록치 않은 것, 그걸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에리히도 그 점을 인정한다. 사랑과 정상적 생활(이 단어에 에리히는 작은따옴표를 쳐놨다.)이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도 이론적으로는 동의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랑은 예외일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사회의 재조직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듯하면서도, 그것마저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진 않았다. 다시 우리는 익숙한 답을 듣는다. 사랑은 개인의 경험이며, 전 생애에 걸쳐 훈련해야 하는 것. 익숙한 것을 제멋대로 녹여버리는 우리의 일상이, 사랑을 상실하게 만든다.
에리히가 제목처럼 ‘The Art of Loving’이라 부른 건 세 가지다. 자기훈련, 정신집중, 그리고 인내. “인간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 결정”(에리히의 책, 150쪽)되는 지금에 와서 시간이 금이라는 미덕은 미덕이 아니라 진리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혹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인내하는 훈련이라고 한다. 그는 뭐라고 했을까? 상념을 제거하고, 호흡을 집중하며, 편안한 상태를 마련하는 명상을 하라고 했다. 순수하지 못한 대화와 음울한 사람을 되도록 피하며, 타인을 경청하라고 했다. 자기 자신에게 민감하여 특히 정신적 상태에 재빠르게 반응하라고도 했다. 교육제도가 이런 능력을 함양하는데 도움을 줘야 하지만 한참 부족하다고도 비판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우리의 일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으며, 그렇게 살게끔 적응하지도 못한다. 결국 에리히는 최후의 답을 내놓는다. 저 세 가지 ‘사랑의 기술’을 달성할 수 있게 우리를 이끄는 것은 ‘최고의 관심’ 뿐이다. 애호가로 사느냐, 명장(名匠)으로 사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결국 나는 『사랑의 기술』에서 그 제목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임을 확인한 것일 뿐일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단지 확인한 것에 지나진 않을 것이라, 나는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건 글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이렇게 쓰고 있는 내가 거울 속의 또 다른 나에게 하나의 정확한 반사상이 되는 건 분명 읽고 쓰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읽고 씀은 불가피하게 지식과 닿아 있으므로, 그것은 에리히의 표현대로라면 딱 그 선까지만 나아간다. 하지만 이후 <참사랑>을 나의 ‘몸+정신’에서 생각해봐야 할 때가 온다면, 나는 수많은 길을 다시 에둘러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그런 의미의 책이다. 다시 말할 수밖에 없겠는데, 그것은 기초와 근본에 대한 책. 사랑의 화려함을 기대했다가는, 양서 앞에서 실망의 실례를 범하게 되는 책. 요컨대, 독자가 보듬어줘야 하는 벚 같은 책이다. 직접 그런 사랑을 실천한 에리히의 이야기가 뒤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단순한 분석가의 비판 저서가 아닌, 정신의 스승이 남긴 양서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