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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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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7일 수요일







[소다테아게넷(育て上げネット)에 소개된 책 무업사회(無業社會)]

출처 : http://www.sodateage.net/





    오늘 통계청의 발표가 있었다. <1월 고용동향>을 보면 1월 청년실업률이 2000년(11%) 이후 최고치인 9.5%를 기록했다. 사실 1월 실업률은 2~4월의 실업률이 얼마나 되는지 내다볼 수 있는 부정적 지표의 기준이 되곤 했다. 졸업자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지만 경기침체의 좁은 문에 머리를 들이밀지 못하는 실업자들 역시 그만큼 생기기 때문이다. 과연 그녀/그들은 ‘무능력자’일까? 취업의 문턱에서 주저하는 무기력한 이들일까? 아니면 실업자들을 구조적으로 양산하고 방치하는 사회의 문제인 것일까?


    여러 논의들이 있다. 그 중 일본에서 청년무업자들을 돕는 구도 게이(工藤 啓)와 젊은 학자 니시다 료스케(西田亮介)는 공저『무업사회(無業社會)』에서 이 대규모 문제를 시스템의 문제로 환원한다. 『무업사회』는 취업하지 않은 상태의 청년들에 대한 게으른 이미지가 투영된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일본 사회의 시스템적 한계 역시 비판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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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업사회는 “누구나 무업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무업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든 사회”(구도와 니시다의 책, 26쪽)를 일컫는 용어다. 이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직업의 문은 그 안으로가 아니라 밖으로 열려 있으며, 직업의 둘레에는 여러 깊은 구렁텅이들이 있는 모습이 된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어느 시대에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저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현재 청년 세대 앞에 놓인 상황은 과거의 어느 세대도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180쪽)이며, 따라서 기존 세대들은 그녀/그들이 단지 게으르고 정신이 박약해서, 그리하여 도전 정신이 없어서 직업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것으로 곡해하곤 한다. 하지만 시대가 다르다. 지금은 지속적인 고도성장과 베이비붐으로 물적·인적 상승이 동반되던 옛날이 아니다.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하다. 저출산과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거품이 빠지면서 일본 사회가 겪었던 충격은 대단했다. “고도경제성장기와 같이 개인과 사회의 계속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32쪽) 일본은 장기 채무 잔고가 약 1천조 엔에 육박한다. (우리나라는 이달 5일 기준으로 국가채무가 600조 원을 돌파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청년 세대를 납세의 주체로 만드는 건 거의 흥망이 걸린 문제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일본과 같은 저출산 저성장 국가들은 일단 정점을 찍은 이후 한없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재정파탄으로 인한 온갖 사회 문제들이 수면 위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성장이 국제 경기 악화로 멈췄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저출산이 동반되어 인구 피라미드의 하체가 약해지는 상황이 덧붙여진 사례는 없었다. 국가는 무업사회를 분명한 문제로 보고 있으며,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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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업자 개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무업상태가 지속되면 인간관계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고립되다 보면 동기부여도, 자극도 받기 힘들다. 지나치게 실패에만 신경 쓰게 된다. 무업기간이 길어져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립은 심화되며, 두 저자에 따르면 무업기간이 3년 이상일수록 취업 방법을 모색하려는 무업자의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듯도 하다. 그런 그녀/그들이 어쩔 수 없이 모이는 곳은 다름 아닌 도서관이다. 대학 도서관에는 별도로 취업준비생들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매캐한 고민의 냄새가 가득한 곳. 흡연실에서는 한숨을 연기로 뿜어대는 이들이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간다. 그곳은 공부의 공간이자, 돈이 그다지 필요 없는 무료의 공간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대학은 잠들어도 도서관은 낮과 밤이 분명치 않다.


    아무 일이나 하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중소기업에는 일자리가 넘쳐나니 그곳에라도 들어가서 일단 일을 시작하라고 조언해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제각각 개성에 따라 재능과 적성에 걸맞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98쪽) 있다. 일하다가 골병드는 것이 가장 무식한 일이라고 어른들에게 들어왔다. 무리한 취직이 한 사람의 삶을 망칠 수도 있다. 어른들도 어느 매체든 설문조사를 할 때면 이렇게 대답한다. 직장 우울증 때문에 살기 힘들다고. 그래도 참는 그녀/그들의 생활력은 나 같은 청년이 보면 참 존경할 만한 일이지만, 청년의 입장에서 본 문제는 그런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세대는 중등교육 과정부터 충분히 겁을 먹어왔다. 우리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학원들의 대나무 숲에서 날카로운 바람을 맞아가며 함께 성장한 세대다.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너무 빠르게 성장했다.


    구도 게이와 니시다 료스케는 고도성장 정지 이후 일본에 등장한 ‘약자로서의 청년 세대’(145쪽)라는 표현을 쓴다. <취직 빙하기>라는 무시무시한 용어는 90년대 말부터 일본에 있었고, 이후 2000년대부터는 고립무원(SNEP) 세대가 증가했다. 당시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취업지원을 해주기 위해 기관 산하 여러 단체들을 운영했는데, 1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성과가 거의 없는 모양이다. 두 저자는 회사 차원의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지만 사실 구도 게이가 운영하는 소다테아게넷(育て上げネット)과 같은 지원 단체에서 도움을 받아도 막상 취업 이후의 상황은 또 다르니 문제다. 아마 구도는 열심히 키워 떠나보낸 딸/아들 같은 청년들이 다시 튕겨져 돌아오는 사례들을 수없이 보며 사회의 장벽을 무수히 탓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청년 무업자를 대상으로 상담이 가능한 공적 기관은 거의 없다.”(116쪽) 이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충분치 않은 국가의 관심을 지적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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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일본의 상황은 그렇게 된 것일까? 이 문제를 들여다보면서 느낀 건 우리와 거의 다르지 않은 사회구조적 배경이다. 두 저자가 ‘일본형 시스템’이라 부르며 지적한 폐해들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신규졸업자 일괄채용, 종신고용, 연공서열형 임근, 기업별 노동조합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적 경영은 우리와 다르지 않으며, 나 역시 튕겨져 나왔다가 재진입이 어렵다고 토로하는 주변의 청년들은 여럿 만나왔다. 기업문화에 맞춰 취업준비를 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문화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심지어 그런 문화에는 들어갈 가치가 없다고 무시하는 이들도 있다. 고학력자일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복지도 문제다. 가입을 강요당하지만 정작 가입 후 자기 책임이 큰 연금제도는 사회경제 발전을 배경으로 설립된 것. 발전이 더뎌지는 와중에는 임기대응으로 방편을 칠 수밖에 없다. 부모님께서도 연금의 폐해에 대해 불만이 많으시다. 모든 어른들이 이 불만에 공감할 것이다. 소수의 특권을 지닌 이들이 아니라면. (오늘도 ‘갑질’ 기사 하나가 뜨거운 논란거리다.)


    국가는 복지를 위해 어떻게든 수입을 늘려야 한다. 워낙 엉뚱한 곳에, 전시행정이나 해외투자 같은 국민의 비난 대상이 되는 분야에 지출하는 양이 터무니없이 많아 일단 그런 행태들을 감시하는 국민이 되어야겠지만, 국민은 일단 국가에게 납세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구성원이다. “국가가 해주는 게 뭐가 있어!”라든지 “헬조선!”이라고 하면 딱히 반박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일단 개념 자체는 그렇다. 따라서 국가도 적극적으로 청년무업 문제에 관여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NPO 선상에서만 활발하다. 이들은 부분적인 해결책만 내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례들은 『무업사회』에도 충분히 실려 있다. 긴급구제, 취직독려, 재진입시스템 구축 등의 대규모 정책은 국가가 도맡아야 한다. 아니, 적어도 NPO보다는 훨씬 규모가 큰 단체가 맡아야 한다. 실천할 의지가 있는 단체가 맡아야 한다. 두 저자는 해결 방안이 그것 “이외에는 없다.”(174쪽)고 단언한다. 더불어 청년무업자들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인식에도 변화를 촉구한다.


    정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 예로 일본 아베 내각 1기 때에는 ‘재도전 담당 장관’이라는 신선한 정책이 제시된 바 있었다고 한다.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두 저자는 그와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제스처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라고 해서 우리와 크게 다르진 않은 듯하다. “칸막이 행정의 폐해를 제거”(184쪽)해달라고 부탁하는 저자들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김이 빠지는 풍선 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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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모두 싣지 못하는 NPO의 현장은 구도와 마츠오 사아키 교수의 대담에서 분명히 느껴진다. 구도와 같이 “현장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189쪽) 이들의 노력으로 직장에 잘 정착한 이들의 사례도 이 책에 실려 있다. 하지만 왜 그러한 움직임은 국가 주도로 실천되지 못하는가. 기업에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기업은 ‘국민’이라는 주체에 대한 책무를 이행하지 않고 국가 밖으로 빠져나가도 상관없는 단체다. 기업윤리와 국가윤리는 다른 차원에 있다. 반면, 국가는 국민이 탄 배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정치가 ‘정치만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되는 것처럼 그 공간을 감싸고 있다. 『무업사회』에서 마주하게 되는 답답한 분위기는 충분히 우리들의 것일 수 있다.


    『무업사회』에는 수많은 통계들이 나온다. 0과 1로 이뤄진 데이터들. 하지만 구도 게이는 그 뒤에 숨겨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그 응축된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본(人本)의 취지인 것이다. 국가가 이런 말을 하고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시대를 바라는 건, 정치와 사회를 잘 모르는 지나친 순진한 바람일 뿐일까. 모르겠다. 무수한 비난들 속에서, 나는 되도록 이 사회를, 이 시간과 이 공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긍정일 수가 없다. 기대를 저버리는 정책자들의 무능과 근근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그리고 우리 시대의 정신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실천들 사이에서 바라볼 뿐이다.


    구도 게이는 한 사람의 청년을 취업시키는 많은 시간과 노력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많은 수고와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의 대답은 늘 ‘그렇다’이다.”(298쪽) 그처럼 사회적 가치를 실현해고자 재야에서 노력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분들의 노고에 고개를 숙이듯 이 책을 덮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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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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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5일 월요일




    들라크루아는 허풍쟁이였던 모양이다.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옥상에서 떨어뜨린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그걸 그려내지 못하는 이는 화가라고 부를 수 없다고. 머릿속의 물건이 아니라, 실제 낙하 중인 물건을 눈에 담아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눈으로 좇기에도 벅찬 그 짧은 시간, 말 그대로 ‘순간’이 아닌가 말이다. 그동안 대체 뭘 그리라는 것인가?


    사실 들라크루아는 떨어지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남자’라고 했다. 그가 남긴 진짜 말은 이렇다.


    “창문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있다. 그가 4층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사이에 그를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영어로는 draw가 아니라 sketch로 번역됐다. 그리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 숙련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걸작을 만들어낼 수가 없을 것이다.”


    화가란 어떤 사람인가? 수많은 철학자, 평론가, 미술학자들의 정의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나는 ‘나에게 화가는?’이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안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것은 미술을 바라보는 나를 다듬어줄 작업이었다. 그런 와중에 들라크루아의 말을 만났고, 어렴풋이 아틀리에의 지독한 유화 냄새가 코에 스쳤다.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방에서 수 년 간 미술을 공부하던 한 청년에게 화가는 그런 존재였다. 춤추듯 날아가는 창밖의 새 한 쌍을 우연히 본 화가. 그녀/그는 황급히 화구(畵具)들을 챙겨 들판으로 뛰어가거나 골목 굽이굽이를 하늘만 바라보며 돈다. 고백하건대, 나는 수많은 완성작들보다는 대가들의 드로잉과 스케치를 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흑연의 매캐한 광물 냄새에서 피어오르는 눈의 세계. 내가 보는 미술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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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읽어야 하는 입장에서 늘 생각하는 건 도대체 알 수 없는, 번뜩이는 창조의 순간이다. 물론 창조의 작업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얼마간 시도 썼었고, 지금은 글도 쓴다. 부모님 덕분에 일찍 음악을 배워 선율을 다룰 줄 알고, 따지고 보면 그림을 아주 못 그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글을 빼면, 도무지 오랜 반복과 깊은 숙련을 해본 것이 없어서 책에 실린 모습 이면의 예술이 내게 속살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생각해보니, 글도 모르겠다. 독자의 삶으로 적잖은 걸 읽고 생각하고 썼지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고 그런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그마저도 모르겠다. 요컨대, 창조가 궁금한 것이다. 그 앞에서는 흡사 관음증 환자처럼 어디 들여다볼 구멍은 없는가, 기웃거리게 된다. 모든 작업은 극도로 은밀하다. 정말 은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된 거, 그림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된 거,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작정했던 것이다. 대학 도서관의 도판들은 너무 작았다. 차라리 확대할 수 있는 모니터로 보는 것이 나아 그렇게 했더니 몇 주 사이에 그냥 눈이 침침해졌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다 보니 화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눈 여겨 본다는 말은 쉽게 쓸 만한 것이 아니다. 작은 색점 위에, 아니 정확히 위는 아니고 그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살짝 빗겨나간 또 다른, 아랫것보다 조금 더 밝은 색점이 있다. 그것을 멀리서보면 화폭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화가가 그 오랜 옛날에 봤던 빛이다. 빛줄기이자, 그 빛을 튕겨낸 한 물체의 표면이다. 미술은 내게 본다는 것의 여러 의미들 중에서 가장 묵직한 뭔가를 알려줬다. 화가는 어두운 우물 속에서도 빛을 볼 것이고, 글자에서도 그림을 찾을 것이다. 어차피 ‘쓴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 안에 포함되는 말이니까.


    미술은 이렇게 의미하는 바가 많다. 한 번 보고 아름답다고 느껴 그 감정을 여러 번 누리고자 전시관을 찾거나 도록을 사서 보는 것도 좋다. 아니, 좋은 일이다. 그런 사람은 그럴 줄 모르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보다 더 풍성한 과일 바구니를 손에 쥔 사람이다. 다채로운 향은 삶의 사계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미술에서 감정만 느끼거나 향기만 맡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 있다. 바로 미술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는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을 통해 가능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의 노력과 조금의 도움이 필요하다.


    조이한과 진중권의 『천천히 그림 읽기』에 이어 옛 공부를 추억하며 두 번째 책을 추천한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다. 그러고 보니 또 진중권이다. 추궁해도 어쩔 수 없다. 추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기존의 이야기들을 밋밋하게 재탕하는 책들은 읽지 않는다. 다행이도 미술은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던 분야라 관련 신간이 나오면 들춰보는데, 몇몇 국내 저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근래 들어는 도판을 많이 넣어 책값만 올리고 내용은 그 값을 전혀 못하는 책들이 많다. 미국과 일본에서 번역되어 들어오는 책들의 높은 수준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가뜩이나 신간이 적다는 게 이쪽의 문제인데. 아쉬움을 달래며 서재를 돌아다녀본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어르신들의 말을 따라하고 싶은 건 아니나, 나에게도 믿고 읽는 저자들이 생긴 모양이다. 이 추천은 미술을 훑는 이들보다는 좀 더 깊어지는 눈을 추구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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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분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너무나도 어려운 현대미술의 이론과 미학을 보고는 ‘그래 네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렇게나 악명이 높은지 한 번 보자.’라는 생각에 악에 받쳐 미술공부를 시작했어요.” 현대미술은 물론이고 미술 다방면의 책을 낸 분의 조언이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 공부를 할 적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못했다고 해야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그분은 미술을 ‘뚫어’보려고 공부를 시작하셨지만 나는 경우가 달랐다. 호주 어학연수 시절에 본 풍경화들의 경이로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Der Mönch am Meer)>을 봤을 때 느낀 감정 같은 것. 앙(仰), 숭(崇), 존(尊) 등의 오래된 신성한 느낌. 시드니의 성 메리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달려들던 그 압도의 순간들. 요컨대 미술은 분명하게, 아주 선명하게 인상을 남기고 떠나갔다. 미술이론을 공부하게 된 건 훨씬 후의 일이다.


    하지만 내게 다가왔던, 미술을 전혀 모르던 어린 고등학생에게 쏟아졌던 어떤 감정들은 미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공부를 하며 알게 됐다. 나의 체험은 진중권의 이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정서적 감동을 받거나, 지각적 쾌감을 얻거나, 지성적 자극을 받거나,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영성의 울림을 얻기도 한다.”(진중권의 책, 15쪽) 가장 후자의 경험은 시대가 지날수록 (전혀 특권인 것이 아닌데도) 소수의 특권처럼 회자될 것이지만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원제 :Pictures & Tears)』을 읽어보면 대단히 낯설거나 동떨어진 것은 아닌 듯도 하다. 여하튼 나의 경우는 정서적 감동에서 시작해 지각적 쾌감을 얻었고, 지금은 지성적 자극을 받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정서적 감동에 머물기를 좋아하며 원한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그런 이들이 2번 지각적 쾌감에서 3번 지성적 자극으로 넘어가도록 독려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양서(良書)’라고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일단 진중권의 미학책은 제외하자. 그의 다른 책들을 읽어본 거의 모든 독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쓸모없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간략하게 쓰는 것 같은데 잘 읽어보면 요약이 아니다. 할 말을 다 하면서도 분명한 임팩트가 매 장 있다. 전문적인 미술사/미학 원서들에는 저자 자신의 주장을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사례들과 (기존 권위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한 장치인) 에두른 말들, 그리고 중언들이 많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이 책은 군더더기가 없다. 그렇다고 인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책 표지에는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 읽기’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자칫 그가 아주 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보는 것처럼 선전이 되어 있는데, 이는 곡해의 소지가 있다. 그가 펼치는 사유의 놀이는 다른 학자들의 이론과 기존의 시각 이곳저곳에 걸쳐 있다. 그만의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 이 책을 읽기 전에 여기 실린 작품들을 눈으로 직접 보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린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아니, 미술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매력이 없는 퍼즐조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런 신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도 다 단련의 일이다. 굉장히 두꺼운 고서를 판독하는 파놉스키의 사진을 언젠가 본 일이 있는데, 그 모습은 한 학자가 작품을 둘러싼 세계와 그 의미망을 알아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독과 겨루는지를 보여준다. 진중권은 그 고독의 시간이 빚은 오랜 전통 위에 서서, 자신이 지적으로 호기심을 가졌던 여러 작품들을 배열해놓고 우리를 열두 장의 놀이 무대에 초대한다. 그렇다면 그 놀이에서 그는 전적으로 우리보다 우위에 있는가? 그럴 순 없다. 누구나 이길 수 있는 무대다. 단, 그처럼 충분한 근거를 카드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독자들은 그 놀이법을 알게 된다. 그것도 무려 열두 번에 걸쳐서. 모든 판을 옮겨놓을 수는 없으니 그 중 가장 오래 발붙여본 무대만 골라서 밑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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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도 사람이다.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서 그림에 숨긴다. 화가도 사람이다. 시대 속에 산다. 그 시대의 눈을 떠나지 못하므로 표현도 얼마간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다. 이 당연하고도 쉬운 말을 간과하지 않으면 그리다 만 것 같은 작품도 뭘 그리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제 1장에 소개된 <조롱당하는 그리스도>의 해석은 우리에게 교훈을 줄 만한 훌륭한 사례다. 내게 백의(白衣)의 화가로 기억되는 프라 안젤리코는 이 그림 속에 여러 개의 ‘주인 없는 손’을 그렸다. 실수일 리는 없다. 그가 실수할 리는 없다. 실수라고 생각하는 관람자도 아마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답은 “다 그리지 않아도 당시 사람들은 알아봤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지만 진중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중세인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것을, 오늘날 우리는 스크린 위에 고해상의 동영상으로 투사한다. 이를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나, 그 발전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영화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외려 관객의 상상력은 줄어드는 게 아닐까?”(진중권의 책, 33~34쪽) 상상은 피안(彼岸)을 바라보는 자의 것이리니……


    제 6장으로 가면 ‘역행하는 미술’이라는 희한한 현상을 볼 수 있다. 피카소는 괴상한 화가였다. 기존의 대가들과 다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대가들과는 ‘다르게’, 어떻게든 빤하지 않게 그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렸다. 그의 중심에는 ‘아프리카’라는 단어가 있었다. 아프리카 공예품들을 전시한 곳에 가서 그가 받은 쇼크는 현대미술의 중대한 사건을 예비했다. 오른손을 버리고 왼손으로도 그렸다. 자신을 화가의 반열에 올려준 첫 번째 계단인 유년의 뛰어났던 회화 실력을 완전히 잘라내려고 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비단 피카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의 기이한 현상과 함께 화가들이 주목한 건 그야말로 괴짜였다. 정신병원의 환자들이 그린 작품에서 영감을 받거나 직접 마약을 하기도 했다. 다르게 그린다는 건 그 정도로 어렵고도 심각한 문제다.


    진중권은 카로토가 그린 한 점의 작품에서 시작해 ‘진화론적 사고’를 전복시킨 20세기 회화까지 단숨에 뛰어간다. 우리의 손에는 미술사학자인 리글의 ‘의지(wollen)’라는 단어가 쥐어진다. 기억하자. 화가에게는 능력이 아닌 의지가 중심이 된다. 만약 A와 같이 그렸다면 그건 A밖에 그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A처럼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129쪽에 나온 뒤뷔페의 작품은 현대미술을 비난하는 일부 대중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만하다. 하지만 미술은 이제 더 이상 재현(representation)이라 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인가! 현대미술의 현상은 고전미학의 시체를 밟고 올라선 거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화가를 ‘의지를 가진 존재’로 바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현대미술의 도래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가 쉽게 하지 못하는 그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훨씬 넓은 품을 열어줄 것이다. 하지만 결단코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낯섦을 잃으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 어려우니 쉽게 설명해주겠다고? 그런 어리석은 말이 또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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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광인의 배(여기서는 푸코에 대한 지식이 살짝 도움이 되지만 몰라도 상관은 없다.), 화가와 주체 사이의 표현 이야기, 풍경화가 역사화로 뒤바뀐 이상한 해석 이야기, 트롱프뢰유, 도상과 엠블럼, 해석 논쟁의 장 앞에서 현대의 새로운 장을 마련해준 고야의 <개>를 둘러싼 이야기…… ‘보는 것’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미술 이외의 이야기들과 함께 잘 버무려져 있다. 엮고 풀어나가는 저자의 방식이야말로 ‘독창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에서 각 장을 여는 작품들 중 서양미술을 교양 삼아 배우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건, 조르조네의 <템페스트(La Tempesta)>,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Madonna dal collo lungo)>, 티치아노의 <신중함의 알레고리(Allegoria della Prudenza)> 정도일 것이다. 판화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뒤러의 작품이 알려진 정도까지. 간간이 유명한 작품들이 양념처럼 나와 이해를 돕긴 한다. 이렇듯 정통 미술사에서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그리하여 대중에게 별로 알려주지 않았던 작품들을 골라 그 위에 지적 호기심의 그물을 쳐놓은 진중권의 솜씨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일개 독자가 그에게 ‘솜씨’라는 표현을 쓰니 발칙해 보이지만, 아마 미술 공부한 사람들은 동감할 것이다. 이 작품들을 이런 식으로 마름질해서 소개하는 건, ‘스투디움’ 속에 ‘푼크툼’을 씨줄과 날줄로 엮는 건 무릎을 칠 만한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재단의 기술을 지닌 저자는, 국내로만 한정해놓고 보자면 거의 없다. 『천천히 그림 읽기』 추천글에서도 쓴 말을 여기서도 다시 하겠는데, “단순한 지식 나열에다가 화려한 컬러도판들, 깔끔한 도표 정리와 가독성 좋거나 특이한 폰트들로 치장한 작금의 미술 상식책들”은 우리의 폭을 넓혀줄 수 없다.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작품에 대한 표준적 해석을 넘어서는 직관을 제공해줄 때, 관객은 남이 찾아놓은 의미를 재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진중권의 책, 22쪽)


    내가 미술 상식책에 의존하는 공부를 오래 전에 관둔 건, 미술이 그보다 훨씬 깊은 우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철학자도 아니면서 이런 말 쓰긴 창피하지만, 나에게도 분명한 전회(轉回)가 있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구르고 나니 한 손에는 어떤 종류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해석의 권위에 대항하는 무기. 물론 기존의 해석들은 훌륭하다. 더할 나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작품 하나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세계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게 해주며,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함부로 넘보지 말라.”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듯도 하다. 세상을 깊이 알아본다는 것이 호기심만으로는 도저히 버틸 만한 작업이 아니듯이.


    하지만 진중권은 분명 푼크툼을, 우리가 작품에서 느끼게 되는 그 사적인 경험을, 작품과 나 사이의 고독한 관계 속에서 느끼는 경험을 재고해보라고 한다. 재고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아니, 그것이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은 ‘교수대 위의 까치’. 제 5장의 놀이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브뤼헐의 작품명이다. 진중권은 그 작품에서 뒤집어진 세상을 보는 브뤼헐의 날카로운 시선을 읽어낸다.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115쪽) 찬 세상이 기이한 모양을 한 교수대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브뤼헐이 그렇게 세상을 보기에 교수대가 3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해석이다. 나는 진중권이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작가는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 우리는 그림을 보고 세상을 본다. 작가가 저마다 다르게 세상을 보는 것처럼 우리도 저마다 다르게 그림을 본다. 그리고 둘은 그림에서 만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과정에서 해석은 열린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본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교수대 위의 까치(De ekster op de galg)>의 교수대가 3차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브뤼헐은 교수대의 왼쪽 기둥을 교묘하게 안에서 바깥으로 휘어지게 그려 우리의 눈에 약간의 착란을 일으킨다. 기둥 그 자체도 고르게 굵지 않아서 (자세히 보면 왼쪽 기둥의 배 부분이 머리 부분보다 미세하게 굵다.) 원근을 깬다. 그런데도 진중권은 교수대에서 부조리를 읽는다. 아니, 부조리를 브뤼헐이 그렸다고 읽는다. 그걸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 반대다. 브뤼헐은 이미 죽었고, 작품은 해석의 눈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부조리하지 않은가. 이 해석은 진중권의 푼크툼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스투디움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미술을 읽는다는 건 그런 가치를 지닌다. 이 책에서 자신의 반쪽을 찾아내길. 독자들에게 이 책을 건네는 내 마음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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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교수대위의 까치였군요. 진중권 문화평론가는 글 하나는 잘 쓰는 평론가입니다. ㅋㅋ
 
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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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2일 금요일




    전공은 아니지만 나는 미술사를 공부했다. 미술을 통해 세상의 복잡함을 알았다. 처음에는 파고들자는 욕심이 컸다. 글로 풀었을 때의 희열도 있었다. 하지만 열의가 차츰 식었고, 많은 분들과 교류했던 미술 블로그도 접었다. 지금은 이런 조촐한 공간에 ‘읽고 씀’을 실천하고자 글을 올리며 몰아붙이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하루에 두 세 개의 미술글을 쓰고 수백 여 장을 읽었다. 작품을 모니터로 뜯어보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다. 돌아봐도 굉장한 열정이었다. 그간의 미술 글들을 모으니 책으로 네 권이 됐고, 귀찮은 탓에 정리를 미뤄둔 글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글들을 읽지 않는다. 서재에 꽂아둔 수십 여 권의 미술책과 대학 도서관에서 출력한 논문들을 들춰보는 일도 별로 없다.


    관심을 두는 곳이 달라진 까닭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변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미술에게 나는 상당히 많은 걸 빚지고 있다. 우선, 미술은 역사다. 무엇보다도 일단은 ‘기술[art]’의 역사라 해야 한다. 미술을 교양 삼아 배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는 시대가 구석기와 신석기다. 그쪽은 거의 고고학이 맡고 있어서 어려운 용어로 낯선 지명들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외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에 소개된 책도 거의 없다. (또한 대학에서도 미술사 전공의 십중팔구가 중세와 르네상스에 치우쳐 있다. 인기가 많으니까. 한편, 현대미술은 머리가 좋은 미학 쪽 사람들이 주로 들여다본다.) 그 시대의 전(前)미술단계 유물들을 보면, 확실히 미술이라는 것은 기술에서 출발했다. 그 목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천재, 창조, 독창 등이 붙은 건 근대에 와서다.


    한편으로 미술은 사고(思考)다. 이 새삼스런 말이 내겐 중요하다. 작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도 그러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비평하는 사람들의 텍스트를 통해 그 시대의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보는 방식’이라 부르면 편하리라. 미술에서 접한 이 두 단어, 즉 역사와 사고를 통해 나는 철학과 문학으로 선회했다. 솔직히 작품이라는 건, 배보다 큰 배꼽일 때가 많다.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느냐, 이런 불평도 이해가 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많은 말을 배우고 작품을 여러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로 세상을 보는, 아니 읽는 방법을 교양 삼아 알아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천천히 그림 읽기』라는 책은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적잖은 독자들이 읽었겠지만. 저자는 조이한과 진중권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술 공부하는 이들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임영방’이라는 석자의 이름이 소위 ‘레전드’로 남아 있듯. 저 두 사람은 서양의 현대이론들을 국내로 들여오는, 일종의 수입 경로 역할을 맡으면서도 그 분야에서 우리말로 쓴 최고의 책이라고 소개되는 여러 책들을 직접 쓰기도 했다. 혹시 미술 공부를 할 이들이 있으면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에 옛 공부를 추억하며 『천천히 그림 읽기』를 다시 한 장 한 장 들여다봤다.



*   *   *



    하나의 미술 작품에서 한 권의 책이 생산된다. 백 수십 여 명의 인물이 그려진 유화든, 단조로운 색면회화든. 작가가 말이 많은 경우도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나 작품만 콘텍스트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우리는 ‘말’이라는 걸로 그림을 보게 되는데, “말로 본다.”는 이 이상한 표현은 사실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말’이 그 언어문화 속 개인을 보호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는 ‘모국어(母國語)’라는 표현을 쓰는데) 어떤 보이지 않는 방어막 같은 거라고 보면, 그 ‘말’이라는 게 통용되지 않는 다른 문화 속의 현상 대부분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이탈리아의 한 오래된 천장에 붙어있는, 어떤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손가락을 맞대려고 하는 순간을 그린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농담을 하는 미술사가들이 있다. (<아담의 창조(Creazione di Adamo)>에 대한 이야기다.) 서양회화의 우월이니 하는 말이 아니다. ‘보는 것’, 즉 우리의 시각 능력에는 현저한 제한이 있다. 모르는 것을 보는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벽을 쳐다보는 것과 비슷한 막막함을 느끼니까.


    카를 융의 『인간과 상징(원제 : Man and His Symbols)』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윤기 씨의 번역이다.

    “문화적 상징은 아직도 그 본래의 신성한 힘numinosity 혹은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 상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은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적 변화를 통해 이 상징들은 편견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 (…중략…) 따라서 심각한 손실을 감수하지 않는 한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카를 융의 책, 137~138쪽)


    결과적으로 우리는 말로 보게 되며, 미술사학과 미학, 그 외에 미술을 둘러싼 여러 해석학들은 그 ‘말로 봄’의 가치를 축적하고 증명해온 학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치라는 것은 “편견과 비슷한” 것들을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하는 것이다. 다른 시대에는 또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명제 하나만 갖고 있으면 된다. 독자들이 미술에서 교양 이상의 무언가를 얻어가고 싶다면, 그 깨달음을 갈구하고 한 두 개 정도의 예시들을 마음속에 넣어두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미술을 공부할 때도, 혹은 훗날 도래할 어떤 충격적인 미술 현상을 접할 때도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보다 투명해질 수 있다.


    내가 조이한과 진중권의 『천천히 그림읽기』를 미술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별로 거창하지 않다. 국내에 이보다 쉽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보는 방법’에 대한 역사를 잘 정리한 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책을 떠올리라고 하면 독자들은 대부분 『미학 오디세이』를 당연히 꼽겠지만, 그 책 실은 대단히 어려운 책이다. 『현대미학 강의』라는 진중권 본인의 책을 좀 쉽게 풀어쓴 버전이라고 하지만 그 분야의 용어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높은 난이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천천히 그림읽기』에 나오는 ‘보는 방법’들도 그 분야의 전문서들을 읽어보면 앞이 캄캄해진다.


    예컨대 이 책의 제 1장에 설명된 미술 형식 분석에서는 당연히 19세기 대가인 뵐플린이 나오는데, 그의 『미술사의 기초개념(원제 : Kunstgeschichtliche Grundbegriffe)』은 그걸 국내에 소개한 박지형 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미없을뿐더러,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이는 비단 뵐플린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어떤 분야의 미술해석이든 상관없이 그림을 전문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쪽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순전히 교양의 후광을 등에 업은 탓이리라, 나는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는 약간의 환상이 덧씌워져 있다. 이 책은 그 환상을 좇는 이들이 실망하지 않고 미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다. 단순한 지식 나열에다가 화려한 컬러도판들, 깔끔한 도표 정리와 가독성 좋거나 특이한 폰트들로 치장한 작금의 미술 상식책들에서는 사실 별로 얻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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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식 분석, 도상해석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여성주의, 기호학, 그리고 현대미술 이론들이 등장한다. 거의 시대순과 일치하게 나열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형식 분석과 도상해석학은 전통이 백년은 훌쩍 넘은 것들로, 다른 해석학들에 비해 유치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지는 말고 해석자 자신의 관점에, 그리고 분석할 텍스트에 충실하려고 한 흔적이구나, 이렇게 살짝 눈감아주면 어떤 독자라도 그 시대의 해석 방법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서는 빙켈만, 뵐플린 등이 나오고, 후자에서는 파놉스키가 나온다. (최근 여러 알라딘 독자들이 파놉스키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단연 미(美)라는 것이 중심이 됐다. 그리고 그 미는 고대 그리스와 필연적으로 연결됐다. 그런 시대에서 창조, 천재, 독창 등의 근대적 개념들이 어떻게 등장한 것인지를 보다 깊게 알아보고 싶으면 오타베 다네히사(小田部胤久)의 『예술의 역설(藝術の逆說)』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일본이 미학 이론 생산과 번역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제 1장과 2장에 나오는 작품들은 서양미술의 상징처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위화감을 느끼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도상해석학을 접하게 되면 중세 미술의 수많은 작품들을 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 유명한 곰브리치는 이 학문에 대해 “당연해 보이던 재현적 의미는 곧 사라지고, 미술가가 창안한 형상이 늘 어떤 의미를 뜻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에케하르트 캐멀린 편집, 이한순 外 옮김,『도상학과 도상해석학(원제 : Ikonographie und Ikonologie)』, 311쪽) 갖게 된다고 했지만, 사실 해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상세한 논쟁에 대해서는 우리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관심 있는 사례들만 보면 될 것이다.



*   *   *



    문제는 정신분석학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학문은 예술작품을 “예술가가 가진 동성애, 근친상간 혹은 살인충동 등을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방식으로 승화”(조이한·진중권의 책, 124쪽)시킨 것으로 본다. 근대미술사는 유수의 철학자와 비평가들의 힘을 빌려 미술이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으로 한 가닥 분화를 일으킨 역사다. 그 시대에 예술가들은 천재의 반열에 오르게 됐는데, 이 흠숭의 분위기는 프로이트 이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여전히 예술과 천재성은 항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을 거쳐 예술은 ‘광기의 산물’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이중의 의미를 갖게 됐다. 미쳐서 멋있거나, 아니면 그냥 미쳤거나. 현대예술은 분명 광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저걸 들여다보려면 부득이하게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물론 두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제 4장은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바깥의 것’들에 대한 이론, 즉 사회학적 관점에 따른 미술이론을 소개하는 장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근래에 이를수록 점점 그 후광을 지워가는 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르네상스를 허구라고 일컫는 이도 있었다. 그런 이론들이 6~70년대에 이르러 서양에서는 주류 연구자들을 배출했음에도 여전히 르네상스의 빛은 강하다.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전통의 힘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미 ‘르네상스’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확고해졌다. 그와 반대로 르네상스를 샅샅이 분석하는 이들은 그 놀라운 작품들이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 주변을 연구하면서 작품을 하나의 ‘생산물’ 정도로 본다. 그 내용이 제 4장에 나온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표현보다는 “계약서에 따라 제작된 작품”(146쪽)이라는 표현이 훨씬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예술을 내적으로만, 마치 자생력이 있는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보는 일련의 시각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예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줬다. 그리고 이렇게 예술의 ‘바깥’을, 아니 ‘환경’을 이해해야 예술이 왜 그 당시 그런 모습을 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린 때때로 마치 그 자체를 존숭하려는 사람처럼 예술을 마냥 우러러 보기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예컨대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이라든지, 그에 앞서 이슬람 문화에서 유럽으로 고대 그리스의 유수 저서 번역본들이 들어왔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 위대한 르네상스는 불가능했다. 이는 르네상스를 하나의 단절된 역사로 보는 시각을 철저하게 금하는 최신 연구의 시각이다. 두 저자도 말한다. “사회학적 접근 방법은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가진 협소한 생각을 깨뜨려 주는 장점이 있다.”(167쪽) 이와 관련된 최고의 저서는 백낙청 씨께서 국내에 번역·소개하신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원제 :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다. 이 책 자체가 우리나라 비평계에 끼친 영향은 두세 번 곱씹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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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페미니즘이 다시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 중요한 화두로 던져졌다. 혐오(嫌惡)에 대해서 보다 많은 이들이 생각해볼 기회이며, 소수와 권리, 그리고 젠더가 자신의 본래 뜻을 이 사회의 장벽 너머로 던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TV 매체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방송작가 아카데미를 다녀본 경험으로 보건대, 역시 TV는 너무 많은 제약을 갖고 있는 매체다.) 여하튼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르테미시아 겐틸레스키, 안젤리카 카우프만 등 저 까마득한 옛 화가들과 수많은 곡해의 중심에 선 현대 전위 예술가들의 위상에 대해 재고할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물론 이 예술가들은 모두 ‘여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작품이 ‘여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그건 작품에 대한 치명적인 결함으로 간주된다. 반면 여성의 작품이라도 ‘남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그건 최고의 찬사로 여겨진다.”(181쪽)


    지금은 창작의 환경이 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균등화되어 있다. 아니,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작가, 예술가, 가수 등의 앞에 ‘여자/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남자/남성’이라는 말에는 괄호를 치는 사람들이다. 의식적으로 신경 쓰지 않으면 절로 그런 말을 쓰게 되니까. 따라서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 예술가들과 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큰 지위를 누릴 수 있는 (비록 남성보다 그 가능성이 훨씬 떨어지긴 하지만) 환경이 아무리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남녀 두 성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에 기인하는지”(211쪽) 생각하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커튼 한 장을 더 치워버려야 한다.


    제 5장에 나온 여성주의 관점의 시각은 바로 제 3장의 정신분석학적 관점과 비교하면서 봐야 한다. 1980년대 여성예술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신디 셔먼이 그러했듯이, 여성예술가들은 신체를 작품 속에 넣어 표현하면서 여성성을 규정하는 정신분석학, 달리 말하자면 그런 관념을 통해 남성성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려고 한 그 학문을 부정했다. 또한 정말 오래도록, 그리고 지금까지도 값이 매겨지는 여성의 신체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으로 그 신체를 혐오하게 제시했다. 급진적인 페미니즘 전위 예술가들이라면 거의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최근 독자들 앞에 제시된 젠더, 인종, 소수 등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던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분모이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보기 힘들다. 당연하다. 기존의 것을 해체하는 작업은 눈으로 보기에도 힘들뿐더러,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거의 어렵다. 하지만 유수의 학자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전통적 미술사에 대한 책을 읽거나 그런 작품을 보는 것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중요한 건 제 5장의 내용일 것이다. 근현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의 양태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저항의 모습, 즉 운동성을 띠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많은 예술가들이 매체의 도움, 전시회의 성공, 세미나 개최 등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저항하는 이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독자인 우리들에게는 그녀/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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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호학으로 미술을 보는 관점은 제 6장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 분야는 거의 암호 해독이다. 흡사 영화 『다 빈치 코드』에 나온, 이런저런 정보들을 모아 역사를 기억해내고 단서를 찾아가는 흥미진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쉬운 분야가 아니다. ‘알레고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수준이면 족하다. 그보다 더 들어가려면 서구 문화의 전통 자체를 통째로 들여다봐야 한다. 하나의 상징이 수많은 상징들과 얼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공을 넘나든다. 또한 기호학은 필연적으로 언어학과 연결되기 때문에 기표, 기의, 지시, 함의 등의 전문용어를 소화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해석 분야 중에서는 가장 학문적이라 할 수 있다. 미술 전문가들 중에서도 이 분야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소개해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마지막으로 제 7장. 현대미술이다. 개략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맛보기로 몇 가지 사례들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허술한 마무리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로 보는 것이 좋다. ‘현대미술’이라는 단어는 워낙 많은 걸 담고 있다. 만약 조이한과 진중권이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을 다하려고 했다면, 이 책은 뒤에 『미학 오디세이』를 덧달고 나왔을 것이다. 둘은 관심 삼아 보려는 독자들에게 알맞은 수준으로 마무리했다. 강조해야 할 것이, 이 장에서는 우리가 ‘저항’이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운동이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뉠 단어다. 전시관에 걸린 작품이 무슨 운동을 하는가, 시와 소설은 그저 시와 소설일 뿐이다, 이런 불평을 하는 이들도 오늘날 수많은 독자/관객들 중 한 부류를 이루고 있으니까. 나 역시 예술을 혁명에 가져다대는 것에 움찔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건, 우리가 주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도덕에 맞도록 행동을 옮기는 것, 즉 수많은 흐름 속에서 저항하는 것이 지니고 있는 힘이다. 그 힘은 분명한 운동성을 갖는다. 마음이 불편하다든가,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다든가. 예술은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읽게 한다. 그녀/그들이 하나의 운동을 생산해내기 위해 쏟아 부은 시간과 정성은 일반인에 비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그걸 철칙으로 알고, 그 창조적 작업을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예술에 대해 실망하면서 불평하는 이유는 알겠지만, 예술이 우리와 함께 저항에 동참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 자체를 마음속에서 지우지 않았으면 한다.


    우스꽝스러운 것도 많다. 저건 나도 그릴 수 있겠다든지, 저런 쓰레기를 (실제 쓰레기를!) 작품이라고 전시한다고, 그래서 돈을 번다고 분통을 터뜨리든지. 그러나 그녀/그들은, 특히 제 7장 이후 지금까지 예술의 궤적을 그려오고 있는 이들은 십중팔구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거칠고 불편하고 낯선 것들이 끊임없이 생산된다는 것은, 우리 주변이 너무나도 확고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비유하자면 ‘고체 사회’라 해도 될 것인데, 예술은 바로 우리의 그 경직된 도형 같은 주변에 균열을 내고 물이 새게 하는 가장 근사하고도 합법적인 (때론 비합법적이기도 한) 수단이자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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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2 2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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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2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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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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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0일



    이곳은 좌표로 설명하기 애매한 지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곳의 좌표를 애당초 모르고 있다. 모른다는 건 부끄러울 일이 아니지만, 내심 답답한 것이다. xyz의 공간 사이로 무수한 선분들이 뻗어나가고, 나는 그 선분의 흔적 위에 서있는데, 모르겠다. 그래도 내막을 소개해야 하니 정리하자면 이렇다. xyz 중 뭐든 상관은 없다. 첫째는 도킨스 류의 필진들을 통해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비판받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고, 둘째는 카렌 암스트롱과 같은 보다 신중한 학자들이 옹호하는 ‘참종교’에 대한 믿음이며, 마지막은 아예 과학 쪽으로 기울어 있는, 가장 분명하게 도드라진 마음이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공통주제가 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과학은 다르다. 종교와 핀트 자체가 완전히 어긋나 있다. 나는 저 셋의 한가운데 있다.


    설 연휴에 위령미사를 지내고 왔다. 제대 후 7년 만에 간 성당이었다. 어렸을 적 몸에 익은 의례들이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놀라면서도 그 공간은 확실히 옛날과 다르게 느껴졌다. 신부가 미사 집전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우주의 조화와 지구 모든 피조물은 ‘주님’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정의는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 그리스도교가 서양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펼쳐진 그 정의의 전쟁, 말 그대로 승리와 패배로 이뤄진 ‘정의하기’의 맹렬한 싸움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될 뿐이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그 용어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신자는 거의 없다. 일상에 익은 말은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러니 분명 내가 있던 그 오후의 공간에서 신부의 말을 일말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질문을 확장하지 않는다.


    나는 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수많은 현대인 중 한 명이다. 다큐멘터리와 책을 접하고, wikipedia와 Google에서 하릴없이 ‘우주여행’을 한다. 몰라도 보게 된다. 아마 시각적으로 사로잡힌 까닭일 것이다. 과학자들의 감수를 받아 만든 우주 가상 이미지도 그렇고, 한편으로는 새벽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일점의 목성도 그렇다. 그 까마득함의 ‘보임’이라…… 내가 저걸 눈으로 보다니…… 가만히 보면 달은 그 얼마나 유난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생각들. 이 감정은 종교를 통해 본질로 들어가려는 마음, 혹은 철학에서 향하는 그 마음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강렬해서 얼마간 우주를 생각하고 있으면 ‘근본’이라는 단어가 그 옷을 완전히 갈아입어버린다. 입자물리학에서 말하는 기본요소, 우주론에서 말하는 수많은 우주들의 생성과 죽음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단어다. 당연히 여기서는 누가 우주를 만들었는가, 혹은 왜 생성되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이 하나의 공통화폐로 통용되지 못한다. 그 값이 없다.



*   *   *



    리사 랜들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원제 : Knocking on Heaven's Door)』는 과학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 그리고 그 질문은 어떤 진리를 향하는지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종의 교양서다. 하지만 내용이 교양 수준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의 과학 교양서들을 나열해놓고 보면 이 책은 확실히 사려 깊은 설명, 유머러스한 비유, 간혹 지나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반복·강조하는 저자의 버릇 등 독자들에게 ‘쉬운 책’이라 느껴질 법한 요소들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입자물리학과 관련된 내용의 난이도다. 과학을 좋아하거나 과학을 대학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들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보물 상자다. 나는 지금껏 LHC(대형강입자충돌기)를 이 정도로 상세히 설명해놓은 과학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리사 덕분에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 표준모형 속 입자들을 발견하는 것인지 알게 됐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발견들을 우리가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이점을 준다. 즉, 그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곧 맞이하게 될 것이다.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책의 상세한 내용을 들여다보기에는 자신의 과학 상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디 책을 덮지는 않았으면 한다. 물론 리사가 도킨스 수준의 달필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과학하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의 입장은 중요하게 읽어봐야 할 내용이다. 책의 대부분이 입자물리학과 LHC와 관련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진화하는지, 어떤 이론이 더 가능성 있는 것인지, 앞으로 과학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상향식 접근과 하향식 접근은 무엇인지, 이런 다소 사변적인 의견이 들어간 부분이 오히려 이 책의 방점이 찍힌 곳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모르는 것들과 아는 것들을 나누는 경계를 넘기 위해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60쪽) 리사의 책 앞뒤에 포진하고 있는, 중간 내용들보다 훨씬 뭉뚱그린 면이 있는 글들이 우리 비전문가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내용이다. 칼 세이건의 경험을 빌려 말하건대,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   *   *



    책 제목에 ‘Heaven’이 들어가는 걸 보고, 처음에는 오해를 했다. 관심을 끌려고 했겠지. 아니면 celestial의 의미가 있는 건가? 아니었다. 반가운 카렌 암스트롱이 이 책에도 나왔다. 리사는 카렌과의 대화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 문자주의에서 시작된 것임을 확인했다. 갈릴레이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의 생각보다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다. 한편, 그 충돌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과학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과학은 물질 우주에 적용된다. 근본구조와 요소에 대한 학문이므로 당연히 유물론적이다. 여기에 ‘초월’이라는 종교의 단어가 들어가면 논리가 어긋난다. 우리나라는 다행이긴 한데, 미국은 이 충돌로 야기된 폭력사태나 교육논란, 특히 교과서 수정과 도입 문제가 굉장히 첨예하다. (도킨스도 바로 저런 문제를 겨냥하여 비판의 수위를 극도로 높인다.) 그런 와중에 리사는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과학은 경험에 근거하고, 종교는 계시에 근거한다. 둘은 근본이 다르므로 양립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과학과 성경이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책이었다.


    “과학은 우리가 무작위적으로 작동하는 우주 공간에 버려진 존재이며, 무작위적으로 주어진 크기를 가진 수많은 물체들 중 하나에 불과함을 늘 상기시킨다.”(113쪽)


    그런 리사가 이 책에서 명백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건 기본요소이다. 교양으로 알게 된 과학지식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들, 예컨대 원자, 원자핵, 중성자, 전자와 같은 것들에 대한 복습으로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전문지식으로 넘어가버리지만, 잘 따라가면 길이 보인다. 모르겠다면 건너뛰어도 좋다. 리사도 본인의 입으로 “이곳은 넘어가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중요한 건 우리 독자들이 ‘스케일(scale)’이라는 용어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면 족하다. 그리고 사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책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용도로 언급된 것도 아니다.


    입자물리학자인 리사는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를 2011년 9월에 냈다. 번역과 국내 발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녀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하튼 그녀는 두 달 뒤에 하버드에서 이 책을 주제로 한 짧은 강의를 하나 했다. 그 강의에서 리사는 스케일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친숙한 1~2m 단위에서 점점 작은 스케일로 옮겨갔는데, 그 와중에 이런 표현을 썼다. much smaller. 하지만 이 표현도 부족했는지 곧 far far smaller라고 정정했다. 대체 얼마나 작기에. 펨토미터. 0을 세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굉장히 작은 이 원자핵의 세계에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듣게 될 쿼크를 만난다. 제임스 조이스의 광팬이라면 알아볼 단어다. 『피니건의 경야』에 나오는 단어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결코 우리에게 익숙해질 수가 없다. 별 상관이 없기도 하다.



*   *   *



    리사는 일단 작은 세계를 소개해준다. LHC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려면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 작은 세계를 보려면 고에너지가 필요하다. 파장이 짧고 진동수가 높은 파동일수록 에너지가 높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줬다. 리사는 그 이론을 일컬어 “근본적인 이론일 것이다.”(286쪽)라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이 이론의 도움을 받은 실험가들은 LHC에서 매우 작은 세계를 본다.


    그 작은 세계라는 것은 표준모형에 들어있는, 이름도 생소한 여러 입자들을 일컫는다. 단, 힉스 보손은 2013년 3월 14일에 CERN(유럽원자핵연구평의회) 측에서 공식적으로 발견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 책을 낸 시점에서 리사는 그 입자를 이론적으로 추정할 뿐이다. 쿼크와 렙톤으로 이뤄진 페르미온(반정수 스핀을 갖는 입자)과 입자들 사이의 묶이는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 보손(정수 스핀을 가짐)이 표준모형에 들어가며, 전하의 여부, 질량의 경중에 따라 또 세부적으로 나뉜다. 이 모형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큰 난제들이 있다. 리사의 책에도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번에 걸쳐 소개되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무슨 문제를 풀고 싶어 하는지 별 무리 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LHC에서는 무슨 일을 할까?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숙고하고 연구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 중 하나라는 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195~196쪽) LHC는 바로 그 ‘훌륭한 일’을 하는 기계다. 대폭발 이후 1/1조 밀리초 후에 일어난 일을 재현하는 곳이며, 그걸 또 1/1만mm 단위까지 쪼갠다. 순간(瞬間)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이 짧은 순간이 두 양성자가 충돌해 (대부분은 서로 빗겨가지만)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 시간이며, 학자들은 그걸 컴퓨터로 분석하여 어떤 입자들이 생성됐는지를 알아낸다. 새로운 입자를 기대하면서. LHC의 규모, 개발 에피소드, CERN의 이야기, 과학자들이 희열을 느낀 순간 등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LHC에서 블랙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괴담의 과학적 반박까지 곁들이면 더욱 좋다. 리사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LHC가 얼마나 안전하게 위험을 관리하는지,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불확실성을 검토하는지 설명해준다. 이 충돌기를 둘러싼 오랜 갑론을박의 온도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   *



    내용을 넘겨도 좋다고 리사가 (대놓고) 말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LHC의 세부적인 설명이 담긴 3부 13장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 과연 그녀의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이 기계가 뭘 하는지 알았으니,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고에너지 영역의 그 무엇이든 포착해내려고 하는 인류 최고 기술의 과학기계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리사의 하버드 강의는 YouTube에서 볼 수 있다. 밑에 링크를 걸어두겠다. 강의 25분 즈음에 LHC의 3D모델이 스크린에 뜬다. 책의 그림과 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그 영상을 잠깐이나마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CMS와 ATLAS는 무엇인지, 리사가 “갱의 조직원들”(358쪽)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던 ‘제트(jet)’라는 현상은 무엇인지, 전자와 광자의 에너지와 위치 정보를 산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텅스텐산납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아보면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13장에 널려 있다. 트리거(trigger) 역할을 하는 컴퓨터를 일종의 스팸메일 필터에 비유한 리사의 유머러스한 설명도 이해를 돕는다.


    13장을 읽고 14장, 즉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읽으면 마음이 훨씬 편할 것이다. 아, 저 기계에서 생성되는 입자는 이런 것들이구나. 하지만 도표로 차분하게 정리된 것과 달리 이 입자들은 전혀 ‘표준적’이지 않다. 오히려 난잡하다. LHC의 검출기에 찍힌 입자들의 궤적을 그래픽으로 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기는커녕 현대미술의 한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다. 리사는 진리를 아름다움과 곧 연결시키곤 하는 우리의 전통에 반기를 든다. 동의할 수 없다. 진리란 “어지러운 현상과 잡다한 입자”(373쪽)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주관. 과학이 알려준 진리는, 우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덕환 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국문학도인 나는 당시 발끈했다. 시인의 노래를 과학의 입장에서 폄하한 것 같은 뉘앙스를 느낀 까닭이었다. “우주는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과학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폐가 있긴 하다. 그러나 과학의 미, 즉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선 대칭성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대칭성이 깨지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 역설의 관계에서 이론은 풍부해진다. 또 하나의 미는 단순성이다. 물리학자들은 만물의 기본요소가 단순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론과 입증을 통해 반복적으로 알게 된 까닭이다. 그쪽의 표현을 빌리자면, 출발점의 입력값이 적으면 예측력이 강해진다. 이 두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이론은 공방의 장에서 주목을 받았다가 도태된다. 그래서 아주 강력하다고 알려진 표준모형마저도 그 너머의 이론에게 자리를 내어주거나 통폐합될 가능성이 있다. 리사가 몇 번이고 강조한 과학의 진화 방식에 따라서.



*   *   *



    초대칭성 이론, 테크니컬러 힘, 여분차원. 모두 계층성 문제, 즉 ‘중력은 다른 기본 힘들에 비해 왜 약한가?’에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들이다. ‘미세 조정’으로 다듬을 정도가 아니라, 정말 터무니없이 약해서 과학자들이 수 십 년 간 머리를 싸맨 문제다. 중력. 0을 열여섯 개나 찍어야 될 정도로 큰 차이. 그래서 아주 작은 스케일에서는 중력을 아예 무시해버려도 됐다. 양자역학과 중력의 문제는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이어서 일부 과학자들은 둘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이들을 무모하다고 무시하기도 한 모양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원제 : The Elegent Universe)』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 중 한 쪽에 집중적으로 매달리면서,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경고성 메시지를 애써 무시해왔던 것이다.”(브라이언 그린의 책, 22쪽) 브라이언은 그 책에서 둘을 통합할 초끈이론을 설명하는데, 그 이론은 바로 계층성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한때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리사는 “한 풀 꺾인 과제”(475쪽)라고 평가했지만 3부 20장을 시작하면서는 두 분야의 지속적인 공동 연구를 희망했다.)


    일단 독자의 입장에서 ‘계층성 문제’라는 걸 대략 짐작은 했으니 그걸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는 들어봐야 할 것이다. 리사가 제안한 비틀린(warped) 여분차원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끈이론이 제시한 brane, 그건 물기가 맺힌 샤워 커튼에 비유된다. 그 막과 막 사이를 리사는 ‘the bulk’라고 부르며, 이 네 번째 차원의, 거리가 굉장히 좁은 공간이 중력brane과 약력brane 사이의 차이를 만든다. 즉 이 사이로 중력자의 파동이 급격하게 줄거나 늘어난다. 여분의 차원으로 중력이 빠져나가 극미세 스케일의 중력이 무시해도 될 수준으로 약해진다는 이론이다. 물론 리사의 말마따나 이건 사변적인 이론일 뿐이라 검증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LHC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사변적인 이론에서 실증 단계의 아이디어와 개념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걸 쓸모없다고 하면 리사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생각해보라.



*   *   *



    이제 우주로 나아간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그런 생각은 터무니없을 뿐인 작은 세계에서 숨이 턱 막힌 채 한참을 읽다가 드디어 우주로 나아간다. 하지만 산뜻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막막함이 찾아온다. 내가 새벽마다 목성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1~2m 정도가 딱 좋다. 아무리 강력한 기능을 지닌 관측기계라 하더라도 우주의 끝을 발견한 적은 없다. 얼마나 크기에. 수평선·지평선(horizon)은 관측자나 관측도구가 전진할수록 뒤로 물러나는 법. Observable Universe는 그래서 우리에게 더 큰 우주의 규모를 상정한다. 우주의 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있는데 못 찾았다는 것. (후자의 경우는 우주의 모양이 문제가 될 것이다.) 리사는 이 거대한 우주가 점차 팽창하고 있다는 과학적 발견을 거쳐 우리가 볼 수 없는 96%의 우주까지 밀고 나간다. 작은 곳에서는 오래 머무른 그녀가 우주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도를 높인다. (물론 전문분야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속도는 흡사 급팽창 이론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세계에서도 두 가지 불확실성 문제, 즉 계통과 통계의 문제로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리사도 그걸 별도의 장을 마련해 설명했다. 그러나 우주론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조셉 콘레드의 『암흑의 핵심』을 빌린 리사는 우리가 보는, 말 그대로 관측하는 우주는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dark보다는 invisible이라 해야 옳지만. 여하튼 이 96%의 압도적인 ‘모름’ 때문에 우주의 스케일 역시 텅 빈 공간이 된다. 마치 원자의 대부분이 텅 빈 것처럼. 리처드 파넥은 『4퍼센트 우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우주는 저 밖에 존재하는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리처드의 책, 13쪽) 인류는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두뇌들의 조합으로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것을 밝혀 왔으나,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종교의 단어로 포장하진 않는다. 그저 그녀/그들은 문을 두드릴 뿐이다. 언젠가 열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   *   *



    불가사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스터리하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주 작은 세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에서는 실현될 일이 전혀 없다. 예컨대 원자 안에서 전자는 한 궤도를 돌다가 갑자기 다른 궤도를 돌기 시작한다. 그걸 눈으로 본다면 전자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착각해버릴 지경이다. 미국 FOX TV에서 방영된 ≪Cosmos : A Space Time Odyssey≫에 그 모습이 그래픽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 (관심이 있다면 5화를 보라.) 그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우주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아는 것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재미있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리사의 책, 558쪽) 그리고 발견되지 않은 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우주는 우리보다 항상 똑똑하다는 걸 입증한다. 칼 세이건도 그의 생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TV 시리즈 ≪Cosmos≫에서 “우리는 우주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의 과학 독서였다. 늘 그랬다. 과학책은 덮고 나면 묵직한 설렘을 안겨줬다. 그녀/그들이 글을 훌륭하게 써서 그런 건 아니었다. 도킨스가 예외이긴 한데, 대부분 과학자들은 글을 너무 정직하게 쓰는 나머지 패턴이 빤히 읽힌다. 깊게 해석해야 할 문구라는 건 도무지 찾아볼 수도 없다. 하지만 과학은 그런 꾸밈과 사유가 필요 없다. 오히려 그런 정직함이 진리를 향하는 확실함, 확고함, 굳건함, 이런 느낌의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그녀/그들은 도무지 정확하지 않아 걱정이라고 한탄할 뿐이지만! 일말의 오차마저도 허용치 않는 그 정신은 우리네 도공(陶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 과학이 3년 전 힉스 보손을 발견했다고 선언했을 때, 내 기억에 세상은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 (나는 당시 작은 기사 몇 개를 읽었을 뿐이다. 이해는 둘째 치고.) 샴페인 터지는 소리는 의외로 작았다. 아마 외계인을 발견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리사도 입자물리학의 인지도에 대해 꽤 신경을 쓰는 눈치다. 그렇다면 이 책,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한편으로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과학계의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뒤늦게나마 그 환호에 한 소리를 보탤 순 없을까, 궁리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야기들이 수 십 년 뒤에는 어떻게 회자될 지를 기대하며. 달 없는 밤일수록 찬란해지는, 일점의 목성을 바라보는 일은 그다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링크 : Lisa Randall : Knocking on Heaven's Door - Great Teachers (Harvard University)


p.s 505쪽에 "관측되 우주"라는 오타가 있다. 다음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으면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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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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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일



    1월의 마지막 나흘이 흐르고, 2월의 첫 날은 하나의 닫음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글을 이렇게 몰아서 읽어본 건 칼비노 이후 처음이었다. 사사키. 그가 무슨 말을 반복하는지 알았다. 지우지 못한 의심도 많지만 그간의 오해들도 어느 정도 풀렸고, 내 안에 딱딱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간단한 생각들도 차츰 물러졌다. 언젠가 닦아 없앨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다. 이 기대가 동맥경화를 막아주겠지.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하고 겸손마저 무기로 다루는 이 일본 작가는 확실히 내 생각의 주름 하나를 접어줬다. 그도 한 장의 종이가 실은 여러 번 접혀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비유해보자면 그렇다. 종이접기.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도 좋아하시는 종이접기. 뭔가를 진리라 하여 추구하면 그건 장미 모양이나 학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안에 적힌 문자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속살을 내어주는 일은 없으리라. 대학 때부터 줄곧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


    이 책,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은 그의 네 번째 아날렉타로 일본에서는 2012년에 출간됐다. 『야전과 영원』의 역자 안천 씨께서 수고해주셨으니 번역을 문제 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건 이 둘을 포함해 세 권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언어를 위한 선언조의 변론이라 글의 온도가 꽤 높다. 사사키를 접할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권장되는 책이라고 하더라.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단, 두꺼운 책에 거리를 두지 않는 이들에 한해서 『야전과 영원』을 먼저 읽으라 말하고 싶다. 장황한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니까. 비약이 적은 걸 읽어야 반복해서 읽었을 때 이해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둘과 비교하자면 『이 치열한 무력을』은 정말 중구난방이다. 아날렉타이니까 당연하다. 나머지 선집들도 번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여하튼 이 책은 그냥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대담이 글보다 더 많다. 리듬 따라가기가 용이하다. 대담의 즉흥성이야말로 우리처럼 자극될 만한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작가들과 작품, 그리고 일본어를 잘 모르니 종종 등장하는 농담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이 책은 높은 수준의 대담들로 이뤄져 있다.



*   *   *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이 무슨 자극을 받고 싶어 했는지를 공들여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이겠다. 어렵고 쉬움은 독자마다 다르겠으나, 일단 일본 문학을 풍부하게 알고 있는 이가 읽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사사키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일본어를 못 읽기 때문에 후루이 요시키치를 모르니 불쌍할 뿐이라고 농담 반 진담을 했다. 그 흉내를 내보자면, 이 책에 나온 소설을 일본어로 읽어본 독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게 잘 팔리는 비평책의 함정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 아날렉타에서 자유롭게 펼치며 논하고 있는 여러 작품들은 그 비평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 번 쯤 읽어보고 싶어진다.


    대학에서 김애란 씨와 대담을 가져본 경험이 있다. 이 공간 어딘가에 떨리던 그 소감을 옮겨놨는데, 역시 현장의 힘은 강했다. 소설의 뒷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머뭇거림과 주저 없음을 반복하며 던지던 그녀의 생각, 소설 관념, 철학, 삶, 세계 등, 그런 다채로운 투망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한 사람이 어떤 소설을 어떻게 썼는가를 우리가 물을 때는 겉으로야 “와, 정말 팬이에요!”라는 소녀/소년의 팬심이 겉에 발라져 있지만, 내심 궁금한 거다.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고. 그래서 비평은 한편으로는 그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세상 보는 일의 고뇌, 진통, 그런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은 나중에 직접 읽어보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비평에 참가한 사람을 비평을 통해 읽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다카하시 겐이치로, 오에 겐자부로, 후루이 요시키치의 작품을 부랴부랴 사서 꽂아두고 만족 중이다.



*   *   *



    사사키는 『야전과 영원』에서 맘껏 발휘했던 가공할 만한 공격력으로, 그 예의 화려한 단언으로 역사와 철학, 그리고 비평을 오고 간다. [달필+달변]인가보다. 사사키의 입이 풀리기 전에 말을 자르라는 사전 경고를 받은 사회자가 있다니. 여하튼 대담을 이끄는 쪽이든 따라가는 쪽이든 재치 있는 반론과 변론, 그리고 긴 역사 이야기를 주저 없이 펼치는데, 그 하나하나가 상대방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작품에 대한 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글을 쓰는 독자라면 그녀/그들이 공유하는 고민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엇나간 고민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온도차로 찬 습기가 물이 되어 흐르고, 그 물이 단비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분명 자극이 되는 책이고, 그만큼 자극적이다. 온통 문제적 작가들만 초대해놓은 책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책을 어제 새벽부터 잠깐씩 읽고 있는데, 서두부터 ‘문제’라는 분위기가 확 풍긴다. 문학과 삶에 대한 확실한 지론이 있거나 어딘가에 오랜 시간 기대어온 독자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독서가 되겠지만, 나처럼 삶의 단 하나의 확신은 부유 밖에 없다며 때론 (기분 상) 높이 떴다가 낮게 가라안기도 하는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고민을 확인할 기회다. 사실 독서라는 게 그렇기도 하다. 자신에게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으면 읽다가 내팽개치는 것이 책이고. 늘 차이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봐라, 저들도 저렇게 다투고 싸우며 글을 쓰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사키의 말마따나 ‘닫힌 회로’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이가 아무래도 이 책을 더 깊게 읽을 가능성이 있다. 철학과 연애에 대한 단편이 조금 있지만 그건 선집에 껴놓은 정도이고, 어떤 글은 결론에 가서 푸시시 식어버리기도 한다. 『야전과 영원』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만능인 줄 알았는데. 뭐, 이런 생각. 여하튼 글을 고민한다는 것 앞에 사사키가 단언하며 당당하게 내놓는 것은 언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역사의 변화다. 국내에 번역된 세 권의 책에서 내내 하는 말이 그거였다. 누군가는 문학이 뭘 하는가에 회의를 갖지만 정작 그 전선에서는, 창작의 참호에서는 그녀/그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치열한 무력을』은 그걸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래도 글을 붙잡고 놓치는 않는다는, 조야한 끈기 정도는 있는 독자로서 나 역시 자극으로 남는 글들을 꾸물꾸물 챙겨 바구니에 담아놓았다.



*   *   *



    여러 글들을 길게 적어 그걸 다 쓸 수는 없고, 일단 이 책이 사사키의 무슨 주장을 담고 있는지 살짝 빼내고 싶은 이들은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을 먼저 읽고 그 뒤에 나오는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읽으면 좋겠다. 전자는 무력(武力)으로 오해하던 이 책의 사납고 뜨거운 제목이 실제로는 (표지에도 떡 하니 나와 있지만) 무력(無力)이었음을 확인해주는 글이다. 3·11을 말한다. 그 앞에서 무력해진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력함이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면서 파울 첼란, 에마뉘엘 레비나스, 브루노 슐츠의 이름이 줄지어 나온다. 무력했지만 승리하게 되는 역설을 증언한다. 정의와 문학과 예술이 한 통에 담긴다. 물론 그 ‘의미’라는 걸 곧 ‘힘’으로 이해해버리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 읽고 나서도 의심이 지워지진 않았다. 체념, 하지만 그로부터 다시 역설로 피어나는 희망. 어차피 다 그런 패턴이었으니까, 사사키 뿐만 아니라.


    그래서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이어 읽으면 좋다. 그의 작품집을 하나 사긴 했는데 번역된 게 한 권 밖에 없다. 사사키의 비평에 언급된 후루이의 초기 장편 3부작과 『산조부(山躁賦)』를 어디 큰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여하튼, 사사키는 지면을 고려한다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후루이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촌락 공동체, 도시, 광기, 재결합, 치유로 이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다.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그려볼 수 있다. 요컨대 후루이는 생(生), 성(聖), 성(性)의 자의성을 말하는 작가다. 자의성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사키가 『야전과 영원』에서 르장드르와 푸코를 빌려가며 그렇게나 반복했었다. 우리를 도박장에 밀어 넣으려고. 아무 근거 없음. 근거율과 인과율의 분리. 하지만 후루이는 그 자의성을 알면서 희망을 갖는다. 낙천이다.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 후루이는 왜 “낙천은 불안과 잘 어울렸다.”(258쪽)라고 한 걸까? 죽음과 삶의 무근거성 앞에서 남는 건 오직 ‘살아남는 것을 사는 것’일 뿐이라는 걸, 공습과 재난의 시대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자의성의 텅 빈 공간을 낙천으로 채워 넣는다.


    사사키가 이 비평 초두에 후루이의 초기 작품 3부작과 후기 『산조부』사이의 단절을 찾아보겠노라 벼렸던 것은 바로 저 메시지, 즉 후루이의 ‘낙천’을 재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후루이는 공습과 재난과 전쟁의 주제를 집요하게 잡고 늘어진 작가. 이어지는 사사키와 후루이의 대담도 글을 쓰는 것에서 시작해 결국에는 대지진 이후의 ‘말’을 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사키는 후루이에게 독자들을 낙천으로 이끌어달라고 한다. 거칠고 공격적인 사사키도 ‘낙천’이라는 말을 쓰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빈 공간을 채운다. 그 채움의 작업은 언어를 지녔다는 자긍심으로 아주 치열하게 불타며 진행된다. 그러나 모두 태우지는 않는 역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자긍심에 대한 사사키의 증언은 이 책 맨 마지막 대담에서 읽을 수 있다. 차이를 느끼며 각자 판단할 부분이다.



*   *   *



    글을 쓰는 이들이 공감할 부분도 있다. 자극이 되는 것과는 좀 다르다. 「말이 태어나는 곳」은 제일 처음 등장하는 대담인데, 글을 쓰지 않는 이들이나 그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읽힐 지도 모르겠다. “말이 태어난다.”라는 말은 좀처럼 일상에 등장하는 법이 없다. 언어의 안팎을 나누는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일상에서 신경 쓰는 일도 별로 없고. 달리 말하면, 글 쓰는 이들은 ‘말이 태어나는 곳’으로 향하며 명확하지 않은 고독으로 들어간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다 그려놓고 레고 조립하듯 쓰는 글이나 PR의 글은 제외한다. 대체 나는 언제 ‘글’이라는 걸 쓰는가?


    이 글만 해도 그렇다. 사사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순전히 뭘 읽었으니까 쓴 것이다. 문제는 최초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사소한 글도 그런데, 우물을 들여다보거나 우물 속에 들어가거나 혹은 우물을 부쉈다가 다시 만들기도 하고, 없는 우물을 저기 있지 않느냐며 박박 우기기도 하는, 온갖 다양한 기벽을 지닌 작가들은 과연 어떨까? 늘 궁금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나 궁금해 하면서도 나는 그 누구의 말도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지독한 신비주의자 정도일까? 고민의 특권? 손 오그라드는 자기 감성? 지금 생각건대, 여러 작가들과의 대담 기회를 스르르 흘려보낸 것을 후회한다. 그만큼 뭘 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으려고 하는, 이 자기두둔의 지독한 생명력은 참 경이로울 정도로 질기다. 그래서 이 대담에 수줍게 반가워한 것이다.


    「말이 태어나는 곳」에서 뚫어져라 들여다본 문장은 이거였다. 되읽다보면 아직도 찌릿한 구석이 있다. 글 앞의 공간에 걸려 있는 어떤 자물쇠가 모습을 갖춰가는 것 같은 상상도 했다. 열쇠는 저마다 있을 테고. “근원적인 발생 장소에 이끼처럼 생겨나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신들. 구마구스의 점균과 오리쿠치의 무스비가 포개지는 장소가 제겐 ‘말이 태어나는 곳’입니다.”(33쪽) 덕분에 미나가타 구마구스(南方熊楠)가 누구인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가 누군지, 무스비(生靈)는 또 뭔지, 흥미로운 정보들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단 하나, ‘점균’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나흘 내내. 말과 이미지가 섞인 것. 과정인 것.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 암수의 구분이 없는 것. 소설이라 시작해놓고 점점 이상해져 몇 달이고 내팽개친 여러 글들 앞에서 느끼던 감정이 ‘점균’에서 하나로 모아졌다고 하면 될까. ‘근원에서 피어난 점균이라니!’ 몇 번이고 외쳐버린 것이었다. 그 탓에 이 대담에서 사사키가 뭔 말을 했는지 다 잊어버렸다.


    하나 더. 소설의 시작과 마무리를 고민하는, 이른바 ‘문창’의 창틀에 목을 매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가울 고민이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라는 긴 제목의 대담에 나온다. 놀랍게도 사사키는 철저한 무계획성으로 소설을 썼고, 꽤 좋은 평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계획성은 하나하나 접어가는 치열함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중층적인 소설을 낳는다. 읽을 때마다 달리 느껴진다는 독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달리 ‘읽힐 수밖에 없는’ 소설. 그런 장치들은 분명 사사키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대담을 하며 나중에야 알게 된 거라고 빼지만.) “안이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마무리”(212쪽)를 거부한다는 사사키의 주장과 [문학]을 거부한다는 다카하시의 주장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도 재밌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하면 열받았거든」은 대단원의 여부로 문학과 소설을 구분하는 다카하시의 논리, 일본 AV와 일본 근대문학의 공통점, ‘사랑하는 힘을 빼앗는’ 명령과 모자이크의 대비, 소세키의 작품 「명암」을 놓고 펼쳐지는 농담 등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   *   *



    사사키의 다른 번역본을 읽은 이라면 이 책에서도 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무서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그렇게 소개할 수 있다. 일본 사회도 그래서 그런 반응이었고, 폭발적인 관심은 극과 극으로 갈라졌다. 그가 얼마나 많은 변론을 했는지는 (사사키 자신이 소설의 세 가지 기원이라며 말했던 그 변론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고, 국내 인문학계의 최전방에 있는 이들도 그를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주시 중이다.


    그의 이름이 뜨겁게 달아오른 이유는 하나다. 무력(無力)함 앞에 ‘치열함’이라는 엇나가버린, 전혀 짝이 맞지 않는 표현을 가져다놓았기 때문이다. 비문이다. 아니, ‘비어(非語)’라고 해야 하나? 이 억지스런 작업을 위해 사사키가 발휘하는 단언의 강도는 수많은 독자들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셌다. 문체 자체에서도 “나는 세다.”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작가를 근래 읽어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사사키라면 이렇게 말했을까? 독자들이 그 치열함의 온도를 알았으면 된 거라고 했을까? 그간 그가 샀던 오해를 풀 변이 하나 있어 옮겨놓는다. “우리 사회는 실제로 법과 ‘법이 보증하는 권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어디까지나 이를 뜻하는 것이지 “언어의 마술적인 포에지에 의해 무한하게 비상하는 상상력”과 같은, 소설을 읽고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고 감격하는 식의 쓸데없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371쪽)


    사사키는 “쓸데없는”이라는 표현을 바로 철회해버리지만 여기서 그는 세상의 작동원리인 말의 힘을 거듭 강조한다. 그걸로 쓰인 작품이 세상을 바꾼다는, 우리가 감상 삼아 쉽게 하는 일시적인 착각을 두둔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틈이 벌어진다. 그가 자꾸 우리를 도박장으로 끌고 가 어디에 걸겠냐고 묻는 것, 그리고 자신은 어디에 걸겠다고 단언하는 것은 무력함을 무의미에서 탈출시키는 한 행위다. 그는 그 틈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틈’을 ‘뒤’로 바꿔 이해해도 좋다. 사사키의 이 책에도 거듭 반복된다.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우리에게는 극히 일부일 뿐인 그 예술을. 바로 그 예술이 타고 난 잿더미에서, 바로 ‘헤겔의 재’에서 보란 듯 소설이 득세하더라고 그는 말한다. 희망을 본다. 언어의 긍지와 말의 힘. 우리가 쉽게 잊는 것들이다. 여기에 그가 아직도 유용하다고 말하는 실러의 예술론까지 더한다면, 아니, 더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문학의 효용론을 논하는 수준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애당초 사사키의 논의에서는 ‘효용’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논외로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술이야말로 답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은 이는 안다. 그 ‘말’이라는 것의 힘을 사사키가 어떻게 증언했는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어떤 여정이 있다. 읽기와 쓰기. 아, 이 교과서 제목 같은 단어들. 그리고 줄곧 생각해왔다. 그는 그걸 삶에 가져다붙인다. 철학이 학문으로 변질되어 삶에서 떨어져나간다. 그렇게 잃어버린 무엇을 기린다. 같은 맥락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사사키처럼 말을 할까, 이런 생각도 해봤다. 동사가 없는 이 책 제목에 알맞은 동사를 넣으시오. 문제가 앞에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쓸 것이다. ‘당신에게.’ 그러고 보니, 나는 답을 잘 쓰는 학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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