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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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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8일





    세 장의 사진으로 열린, 그리고 마담의 증언으로 닫힌 한 남자의 삶이다. 눈이 사방으로 돌아가고 수많은 회로들이 끊임없이 그의, 요조의 몸 안에서 공포의 물질들을 옮기는 기이한 장면이 보인다. 언제부터 그가 그런 아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갖가지 추측이 있지만 상관없다. 사실 ‘언제부터’라는 말도 상관없다. 수기는 불분명하게 시작한다.


    집에서는 익살로, 학교에서는 장난꾸러기이자 그럭저럭 공부 잘 하는 아이로 인기를 얻는다. 순전히 인간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타인에게 웃음을 주는 것은 곧 속이는 것. 나 역시 인간이 두렵다. 일상에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군(群)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공포에 가깝다. 아니면 무시무시한 상상 즈음이려나? 그런데 요조는 그게 자기 자신을 극도로 해치는 지경까지 나아갔다. 화학 물질의 비정상적 활성화.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는 요조의 여러 고백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지지만 그가 유독 예민한 것은 사실이다. 그 예민함이 때론 진실을 보게 한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량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27쪽)


    그걸 보고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아이다. 그런 면이 훗날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였을 거라 말하지만, 그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다. 심지어 그가 잘 생겼다는 말조차 의심스럽다. 아니, 잘 생기긴 했지만 사진 속 그는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니까. 여하튼 인간 사이를 오고 가는 미묘한 기류와 그것의 망각과, 이런 것들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그의 병증은 수시로 드러나고, 이 사람을 신뢰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 탓에 나는 수기를 읽는 내내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   *   *




    타향에 오니 연기가 더욱 쉬워졌지만 문제는 그 연기를 눈치 채는 인간들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다케이치. “부러 그랬지?”라는 그의 말 이후로 불안과 공포가 밀려왔다. 다행이도 요조는 소심하다. 죽이진 못하고 친구가 되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첫 목표가 생겼다. 고흐의 그림을 보더니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40쪽)라고 선언한다. 인간군상을 그리겠다는 어린 의지가 완성한 그림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의미에서 어린왕자가 스쳤다. 어른은 요조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림의 인연이 술, 담배, 창녀, 전당포, 좌익 사상으로 이어졌다. 요조가 도쿄의 바다에 잠겨버렸다. 화방에서 알게 된 여섯 살 연상의 호리키가 트렌드라며 이곳저곳을 데리고 가 거들먹거리며 소개해준다. 요조는 창녀에게서 ‘여자수행’이란 걸 한 탓에 여자들이 꼬이는 남자가 되고, 공산주의 독서회에 출입하다가 농담이 진담이 된 꼴이라더니 정말 행동대 대장이 되어 학업을 소홀히 하기까지 한다. 돈에 쪼들린다. 운동권에서 도망친 그에게 호의를 가져준 여자들은 여럿 있었다. 둘에게는 적당히 비위를 맞췄지만 긴자 카페의 여급 쓰네코는 다르다.


   쓰네코. 연상으로, 남편은 형무소에 있다. “주위에서 차가운 삭풍이 불고 낙엽만이 휘날리는 듯한, 완전히 고립된 느낌의 여자였습니다.”(61쪽) 그녀는 동류다. 불안함이 사라진다. 해방의 밤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라질 것이 아닌가. 상처 입기 전에 먼저 헤어지기로 한 요조, 이 남자는 그런 남자다. 만나지 않기로 작심 이후에도 속으로 혼자 부담스러워하고 그녀가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호리키를 대동한 만남을 계기로 (호리키가 그녀를 궁상맞은 여자로 취급했으므로) 그녀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연 그는 어떻게 했을까? 동류끼리 죽기로 한다. 놀이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그 말이 실행으로 옮겨진 결과는 참담하다. 가마쿠라 바다에서 요조는 살고, 그녀는 죽는다. (다자이의 경험과 같다.) 그녀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만 차라리 죄인으로 포박 당한 기분이 좋다. 그러나 검찰청 취조 때에 한 말끔한 검사가 “진짜야?”라고 묻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시 비참해진다. 다케이치가 떠오른다.



*   *   *



    넙치(시부타)네 2층 삼 첩 짜리 방에 칩거하면서 이제는 하찮은 무명 만화가가 됐다. 갱생하라는 넙치의 말에 호리키 네로 간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가출을 한다. 하지만 정말 호리키 네로 갈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아무 데도 없던 것이다. 그런 요조를 호리키는 한심하게 취급한다. 마침 호리키와 관계된 잡지사의 여자가 오고, 요조는 그 여자, 시즈코의 집에서 정부 같이 산다. 다섯 살 된 딸은 그를 ‘아빠’라 불러준다.


    자립하고 싶지만 갈 곳도 없다. 이 무렵 그는 ‘세상은 곧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인색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조금은 비슷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리라. 샤를 크로의 시 속 두꺼비처럼. 방해한다면 돌아가리라, 생각하면서 외박도 하고 야비한 술꾼이 된다. 달리는 열차에 석탄을 때려 붓는 기관사. 하지만 그렇게 열차가 1년을 달리고 봄이 되니 두 모녀를 놔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가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 요조가! 두 모녀를 행복하게 해주소서. 누가 그를 말종이라 말할 수 있나.


    떠난 그가 다시 정부 행세를 한 것은 이제 당연하게 느껴진다. 필요에 따라 뻔뻔해지고 구색 맞출 수도 있다. “어제까지의 저 자신이 애처로워서 웃고 싶어졌을 만큼 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99쪽) 하지만 이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다. 여전히 인간을 두려워하는 그의 궁색한 변명 정도로 들린다. 유일한 낙이 손님에게 술을 얻어 마시는 것, 그리고 술을 마셔야 나오는 달변으로 이야기하는 것 정도다. ‘조시 이키다(情死, 살았다)’라는 필명으로 아동 잡지에서 음란 잡지에 이르는 곳에 만화를 그려 보낸다. 루바이야트의 시구를 붙인 것은 당연하다. 마시자. 그는 마시지 않으면 볼 수 없으며, 마신다 해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대체 그는 어떤 인간의 쓸모를 갖고 있는가. 교바시 마담의 도움으로 여급 요시코와 결혼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진 그가 호리키와 함께 “같은 수준의 개”(108쪽)로 전락해 여기저기 쏘다니는 건, 열차의 석탄이 전혀 식을 기색이 없던 까닭이리라. 한참 붓다보면 자신이 붓는 지도 모르는 것처럼.


    하지만 요조도 목소리는 낸다. 희극명사니 비극명사니 반의어니 이야기를 하다 죄와 법, 선과 악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 관계를 논한다.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113쪽)이라는 것이다.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그리고 최초로 노기가 분출되었다. 당연 취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치를 챌 수 있다.


    요조, 이 남자는 세상을 ‘죄’라는 단어로 본다. 자신의 죄가 있으므로 당당할 수 없다는 의식. 그런데 그가 언제부터 죄를 지니고 있었는가? 쓰네코가 죽고 자신만 살았을 때 팔목을 옥죄고 있던 수갑의 차가운 느낌에 대한 기억 이후로? 인간을 철저하게 속여 왔다는 그 익살의 경험 때문에? 종종 하느님을 소환하는 걸 보니, 혹 자신의 그런 기벽이 원죄와 닿아 있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아닐까? 모른다. 죄가 그를 가두고 있는, 감시하고 있는 뭔가라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요시코와 한 남자(만화 관련으로 집을 찾던 30세 전후의 상인)가 방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걸 보고도 자신은 ‘텍스트 속 남편’들과는 달리 요시코를 용서하고 자시고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 자신의 눈치를 계속 살필 수밖에 없는, 무구한 신뢰심을 지닌 요시코가 불쌍하기만 하다. 그래서 수면제를 털어 넣고 자살 기도를 했을 것이다. 3일 내내 잠만 자는 미수에 그쳤고, 그때 내뱉은 횡설수설이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가긴 했지만.


    여자 없는 곳에 가서 살 거라고? 이자가 드디어 돌았군. 아주 못 쓰게 되었어.




*   *   *





    큰 눈 내리던 날 밤, 도쿄의 어딘가에서 요조는 각혈을 한다.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지?”(123쪽)이라며 우는 그에게서, 빠져 나가고 싶은 욕망이 보인다. 하지만 항의할 수 없다. 이 세상 나의 모든 불행은 나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방자한 놈인가, 아니면 마음 약한 놈인가. 그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질문을 할 뿐, 여전히 세상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몸을 망치고, 그렇게 산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연민해준 여자는 약국 부인이었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못 쓰는 그녀는 남편이 술로 죽었고 의대생 아들도 같은 병으로 입원해 있다며 (시아버지도 중풍인데 아마 술 때문이었을까?) 요조에게 술 대신 차라리 모르핀을 주사하라 권한다. 차라리 그게 낫다며. 그렇게 요조는 모르핀 중독에 걸리고, “키스해줄게.”라든지 우는 척을 한다든지 해서 엄청난 빚을 지면서까지 얻어다 쓴다. 그리고 부인과 관계까지 맺는다. 모든 건 뒤늦은 후회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도 답장이 없자, 죽자고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의 자살 시도는 애초부터 미수에 그치고 만다. 넙치의 “악마의 육감”(129쪽)이 발동했는지 호리키와 함께 둘이 찾아와서는 묻는다. 각혈했냐고. 호리키의 다정한 미소. 소름이 돋는다. 인간. 아, 인간. 둘은 요조를 정신병원에 보낸다. 드디어 돌아버린 그가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131쪽)이다.


    정신병원. 죄인이 아닌 미치광이가 된 것으로 그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누구에게? 병동에 들어간 이후로 이어지는 짧은 문장들에는 회한이라든가 억울함이라든가 하는 분위기는 없다. 인간실격.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은 수기이니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후에 적은 것이니까. 큰형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려주고는 시골에서 요양할 것을 권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고뇌의 항아리가 비었다. 그러므로 고뇌할 능력도 없어졌다. 요조의 삶을 어렸을 때부터 완전히 꼬아버린 그 ‘능력’이 정신병원에 들어오자 사라졌다.


    지명 없는 곳의 허름한 시골집에서 60세 전후된 못 생긴 식모 테쓰와 살면서 그는 행복도 불행도 느끼지 못한다. 나이는 27세. 겉모습은 40이 넘은 듯. 수기의 말미에 이를수록 모든 건 다 지나가더라는 늙은이의 고백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맥이 없다.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다.



*   *   *



    얼마간 나는 요조에게 깜빡 속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후기는 서문에서 언급된 석 장의 사진과 세 권의 공책(요조의 수기)을 입수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나’의 이야기다. 짧다. 이 이야기는 요조를 일컬어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쪽)라고 술회하는 마담의 증언으로 끝난다. 첫 사진 속 섬뜩한 아이, 두 번째 사진 속의 ‘미남이나 사람 같지 않은’, 그리하여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10~11쪽) 있는 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길하며 특징이 없고 기묘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남자. ‘나’가 보기에 그런 요조는 수기 속에서 의외로 사람들에게 연민을 받거나 동정을 얻는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술집 손님들도 그에게 술을 사줬으니까. ‘나’는 수기를 있는 그대로 잡지에 실을 거라면서도 이 수기에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고 살짝 언급하는데, 이 부분을 거듭 읽다가 걸려 넘어진 것이다. 이 수기에 담긴 내용은 과연 사실일까? 이 글도 익살일까? 익살이야말로 과장이니까.


    하지만 다시 읽을까 생각하던 차에 책을 덮었다. 인심 써서 반쯤 속아준다고 하자. 그래도 진실과 허구가 그렇게 정교하게 나뉘진 않겠지만, 요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으니. 소설이 허구고 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소설이 90년까지는 다자이의 유서로 여겨졌다는 이야기와도 역시 아무런 상관없다. 속이는 것과 죄와 비위와 고립과 연민과, 그런 것들이 ‘요조’라는 하나의 쇠꼬챙이에 한 줄로 꽂혀서는 벽에 가서 콱 박히는 모습이 보인 까닭이다.


    다자이는 5월 12일 이 소설을 탈고하고 한 달 후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자살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성공적이었다. 사체는 일주일 뒤인 19일, 그의 생일에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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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1-29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실격> 영화평은 별론데, 저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손에 꼽을 명장면이 많죠. 말은 이렇게 하고 보고 안 보고는 탕기님 선택~
이미지도 비슷하고(그 유명한 사진 포즈도 흡사!) 산 시기도 비슷했던 김수영과 다자이 오사무를 어설프게 추적하다가 김수영이 일본 유학 중에 동경에서 그들은 모르는 채 스쳐갔을 수도 있겠구나 했죠.
이상의 수기식 소설, 산문도 다자이 오사무와 비슷하단 생각을 많이 했고요.
일본어와 일본식 교육의 영향도 있었을까요.
무엇보다도 사람은 정말 개인이 아니라 시대를 산다고. 히트텍과 무상급식은 지금 사는 사람의 어떤 기억이 되겠죠. 따뜻한 날들 보내시길 바라며....

탕기 2016-01-29 12:47   좋아요 0 | URL
언제 한 번 봐야겠군요!
다자이의 얼굴을 계속 요조에게 덧씌우며 읽어서,굳이 영화를 봐야겠느냐는 고집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화는 또 다르니까요. 추천 고맙습니다 ^^
밖에 나가기 꺼려지는 하늘이지만 agalma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2016-02-02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2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6년 1월 25일



    지난 닷새의 밤은 다섯 페이퍼에 옮겨놓았다. 내 생각의 대부분은 그곳에 있다. 순간을 남기고 싶어 끊어 읽었다. 순간이라는 것이 실은 책을 덮고 이렇게 쓰는 사이 증발해버리고 만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서둘러 적었다. 홀려서 글을 쓴 건 참 오랜만이다. 그래서 지난 닷새의 글은 물기가 약간 있다. 


    하루 5~60여 페이지 정도였으니 짧긴 했지만 두세 번 읽고 생각하고 참조할 것들을 들춰보느라 반 권 정도를 읽은 듯 피로가 매일 몰려왔다. 그래도 구슬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음악은 좋은 벗이다.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모처럼 꿀맛이었다. 그렇게 월요일이 왔다. 폭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 한 주의 시작이다. 다행이도 날씨는 풀리고 있다.



[링크]

  첫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67631

  둘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0615

  셋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4409

  넷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6674

  다섯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8820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은 가벼운 책이다. 어디 들고 다니며 읽기에도 좋다. 하지만 내용이 무섭다. 수 년 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되고 그 파격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팔렸을지는 모르겠다. 항간에서 인문학의 ‘한계’라 쉽게 지적하곤 하는 일상과의 괴리, 실천 가능성, 이런 문제들에서 사사키의 책 역시 자유롭지 않다. 얼핏 보면 붕 떠 있는 말을 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널리 읽힐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저자 본인도 놀란 기색이다. 곳곳에 사사키에 대해 험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요컨대 [문학]하라는 것이다. 대문자 문학. 그것은 읽고 쓰는 것을 말하며, 혁명과 직결된다. 어떻게 [문학]이 혁명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혁명 그 자체인지는 대혁명(종교개혁)의 루터, 고아이자 문맹이었던 장사치 사도 무함마드와 『쿠란』, 성녀 테레지아와 같은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중세 해석자 혁명을 거치다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비난과 농담, 유머, 겸손 등 사사키 특유의 어조를 따라간다. 전문가, 지식인, 종말론자, 원리주의자, 그리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 그들이 하나 둘 이 책의 중심에서 퇴출되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쳐내고 나면 위대한 문인과 경전을 남긴 이들만이 남는다. ‘읽고 쓴’ 이들이다.


    고이 쥐고 있던 [읽기-씀]이라는 구슬을 다시 본다. 사사키의 모든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동감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단언이 많아 여과 없이 느껴지는 지적들은 시원한 곳을 긁어주기까지 했으니, 이 일본의 사상가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 간에 나도 얼마간은 쓰는 사람으로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솔직히 그럴 자신도 없고, 의도도 없다. 언젠가 한 문학 교수가 이런 말을 해 기억한다. 옛글 어딘가에 몇 번 바른 적 있는 대학시절 추억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보통독자’가 되라고 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도 의문이었지만, 여하튼 그의 저 단어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분명하게 전달됐다. 교수는 이어 말했다. 독자가 차라리 쉬워. 작가의 삶보다는 말이야. 나는 저 작가에 [  ] 대괄호를 치지 않는다. 모든 작가를 우러르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사사키가 [문학]이라고 하며 그걸 혁명에 가져다대는 걸 보고, 아니, 그런 글을 읽고 어떻게 내 삶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그는 이전의 『야전과 영원』에서 누차 독자의 자질을 상기시킨 적이 있다. 그런 뜻은 아니었을까? 혁명이라니. 또 한 번 말하게 된다. 그건 내게서 멀다.


    요컨대, 그런 책이다. 닷새를 지나왔다. 지금은 서너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서재에 꽂아뒀다. 치열했던 지난 다섯 글들도 이면지에 뽑아 어딘가에 뒀다. 그리고 내게는 무엇이 남았는가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적어오면서, 그것이 언젠가는 내게 남아 있는 무언가가 되어주길 바라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읽는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쓰는 사람이니. 그렇게 믿고 있다. 저 혁명이 작은 것이라도 좋을 것이다. 시선을 바꾸게 되는 것이어도 좋다. 아니, 그것이면 족하다.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건 책 고르는 일에 조금 더 신중해졌다는 것. 변화는 작게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벌어진 틈이 얼핏 보이는 듯도 하다. 들여다보기에는 무섭지만. 사사키는 그곳에 빛이 있다고 말했다.



*   *   *



    아직 끝내긴 이르다. 짧게 쓰지 못하는 게 버릇인 듯도 하다. 하지만 털어놓다보면 길어진다. 사사키의 책을 읽다 넘어가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두 단어로 추려지는 것 같아 모아봤다. 혹 이 책을 읽다가 사사키의 몇 가지 지적에서 위화감을 느낄 이들이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에 고민을 덧대어놓는다. 가볍게 생각할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읽고 쓰고 예술을 하는 이들은 늘 대면하는 문제이다.


    사사키는 이 말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하자. 종말. 예술 종말론은 20세기 초반의 기현상을 목격한 20세기 중반 즈음의 평론가들이 내놓은 것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던 무렵, 마티스와 피카소, 몬드리안은 충격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암기된 상식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에 앞서 세잔은 또 어떠한가. 인체를 대단히 정교하게 그리고, 풍경을 사진 수준까지 사실적으로 그리던 이들에게서 추상으로의 전환은 기계 발명 이후 급속도로 달라진 일상만큼이나 급박하게 이뤄졌다. 프랑스 미술의 고전적 성향이 파리에서 아직 드셀 무렵, 미국에서는 변기가 전시됐고 그건 아주 유명하다. 왜 일부 예술가들이 그 ‘변기’를 옹호하는 글을 언론에 투고했을까. 어디서부터 진행된 일일까. 이렇게 묻고 보면 참 복잡한 현상이다. 지금의 우리야 쉽게 생각하고 웃을 수 있다. 변기라니.


    이제 예술 앞에 ‘진짜[real]’라는 전통의 권위가 붙게 됐다. 정크아트가 나온 건 이보다 조금 뒤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진짜 예술’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편견, 혹은 권위의 벽이 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평론가들에게 이는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드는 문제였다.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도 문제였으리라. 그런 와중에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원제 : After The End of Art)』가 나왔다. 물론 나는 예술의 ‘진화’이니 하는 것은 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유기체에 빗대는 표현에는 다소 거부감이 있다. 예술가가 일정 부분 타문화의 선례들, 혹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는 과정을 맥락의 소개 없이 보면 혁명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뿐이다. 예술 그 자체는 유기체가 아니다. 그런 비유로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제대로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아니고.


    그러나 이건 처음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변기를 작품으로 내놓는 것은, 그리고 마그리트나 워홀처럼 명백히 그것인 걸 앞에 두고 “그것이 아님.”이라는 제목으로 관람자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이런 기현상의 충격에 평론가들은 너도나도 ‘종말’이란 단어를 썼었다. 그보다 앞선 시대에는 러시아의 말레비치가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사각형을 하나 그리더니 “더 이상 우리 화가들은 그릴 것이 없다. 여기가 회화의 종착점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를 ‘회화의 영도(zero degree)’라 기억한다.


    이건 어떤가? 예술의 종말. 사사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예술이 없어진다는 의미의 ‘종말’이 아니라, 기존의 예술을 일컫는 단어를 /예술/이라는 표기로 일부러 가시화해본다면, 바로 그 /예술/의 종말을 그 비평가들은 의미했던 것이다. 이제 경계는 없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가? 작품으로 승인되는 현상이 거의 무한해졌다. 권위는 남아 있겠지만. 영국 YBA 현상만 놓고 보더라도 열광하는 자들과 경멸하는 자들이 나뉘어 있는 것 자체가 예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자기가 먹다 남긴 사과를 유리 상자 안에 두고는 <실낙원>이라 하질 않나, 네온사인 하나 만들어놓고 작품이라 내걸지 않나.’ 이런 말 안에 두 개의 표정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사키는 별 관심도 주지 않겠지만)시장이 여기에 반응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미술시장의 거품, 작품=사치품의 전락 같은 현실적 문제는 논하지 않겠다. 버거운 일이고, 거기서 거기인 일이다. 나처럼 예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씁쓸한 기삿거리 정도일 뿐이고.


    새로운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종말을 과감히 잘라버리는 게 사사키의 작업이었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완전히 새로울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예기치도 않게 찾아올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생각은 혹여나 도래하게 될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한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 사고는 아닐까? 혹 그런 걸 두려워하는 방어적 사고는 아닐까? 여기에 획기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과학의 발견을 가져다놓으면,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지닌 함의가 어쩌면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나아간다. 지극히 단순하고 전체주의적이며 기만적이기까지 한 종말론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만의 생각일까. 모르겠다. 입에서 자꾸 맴돈다. ‘새로운 것은 없다’라, ‘새로운 것은 없다.’라, 그냥 내뱉고 말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남겨본다.



*   *   *



    루시디. 이 작가는 [문학-정치]의 첨예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상징이다. 여기서 가오싱젠을 한 번 더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한 영화평론을 읽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을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오지 않느냐는 글이다. 혹 그 평론을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딘가 크게 게재됐던 기억이 있는데, 어쨌든.) 어떤 이가 그 밑에 댓글로 “위대한 정치인이 없으니까.”라는 단발의 역정을 적어놔서 웃었다. 생각해봤다. 그보다는 문학과 정치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려는 어떤 습성이 우리에게 들어있는 까닭이 아닐까, 그래서 ‘만들어봤자’인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가오싱젠의 문학론을 읽었던 차다. 『야전과 영원』에서 벤슬라마의 인용으로 지적된 [문학]과 혁명의 관계는 사사키의 이번 책에서도 여지없이 나왔다. 사사키도 이 부분을 거듭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치와 혁명은 뗄 수가 없다. 그러니 [문학]과 정치는 적대적 관계에 있다. 그가 어느 편에 서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책 읽고 쓰는 글 말고 나름 창작이라 해서 붙들고 있는 글들이 몇 있다. 그건 대부분이 톨킨 때문에 적기 시작한 글로, 나는 지난 십 수 년 간 톨킨의 ‘문학론’에서 결코 멀어진 적이 없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태도가 그렇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 서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번역해서 옮겨본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경험에서 전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험에서 이야기의 싹이 돋아나는 과정이라는 건 정말 복잡합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그 과정을 정의하려는 것조차도 불명확하고 애매모호한 증거에서 추측하는 것일 뿐입니다.”(J.R.R. 톨킨, 『The Lord of The Rings』, Foreword, 11쪽)


    이건 톨킨의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그의 환상적인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단정해버린 평론가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분명 톨킨은 그런 연관성을 영국 작가 특유의 공손한 어휘들로 살짝 밀어내면서 문학의 ‘고립되어 있는 섬’을 옹호한다. 그 자신도 그렇게 수 십 년 간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부했고 말이다. 나 역시 현실에서, 그리고 내가 배운 것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건 기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그 영향 관계가 의미하는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뜻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쉽게 말해 “이건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닙니다.”라고 슬쩍 발을 뺀다는 것이다. 이건 소극적인 태도라기보다는 문학적인 태도라고 알고 있었다.


    톨킨보다 훨씬, 정말 훨씬 첨예한 무대에 서있었던 가오싱젠은 그런 말을 더 적극적으로 한다. 그가 중국에서 프랑스로 망명간 작가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중국문학의 현실은 전 세계 앞에 그 나체를 드러내야 했다. 중국 정부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는 충분히 알 만 하다. 그런 그가 대만에 가서 강연을 하다가 문학의 위치에 대해 역설한 부분이다. 참고로 가오싱젠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서양의 문학 풍토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시장마저 거부하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작가 스스로 자각해서 자신의 문학에 덧씌워진 정치적 라벨을 떼어낸다 해도, 곧바로 반대편의 정치적 조류 속으로 말려들기 십상입니다. 그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고유한 문학창작의 의미뿐이죠.”(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창작에 대하여(원제 : 創作論)』, 63쪽)


    혹시 글을 쓰는, 창작하는 이들 중에 ‘작가 고유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이가 있을까?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창작의 기본이 되는 자부심인데? 물론 글을 쓰는 사람, 그러니까 남보다 좀 더 진중하여 때때로 고리타분하다거나 재미없다거나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하는 사람은 글이라는 것이, 또한 말이라는 것이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타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걸 걷어내고 쓴다고 해도 분명 고유의 것이 아닌 게 들어오기 마련이며,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이 타자의 것이다. 하지만 수용하고 배출하는 이 문학의 생리 과정에는 고유의 코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착각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게 작가의 지문 같은 거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해야만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글로 내뱉을 수 있다. 따라서 글 쓰는 이는 영향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어느 영역에서는 결코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밀어낼 수도 있다. 자의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나’라는 창작 공간이 수호되며, 오랜 과정 끝에 작품이 나오게 된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걸 객관적 입장에서 이런저런 것과 연결된다고 말하겠지만, 반대로 작가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그것 역시 자의적인 판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양심적인 작가들은 자신에게서 이미 떠난 작품에 대한 왈가왈부에 고집스러운 태도를 지니지 않겠지만.


    사사키가 벤슬라마를 예로 든 것은 혁명적 가능성을 언급하기 위해서였다. 루시디가 망명을 떠나 아직도 서구-이슬람 구도의 ‘핫아이콘’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문학은 그런 가능성을 얼마든지 보여준다. 이 급진적인 저자가 이보다 4년 정도 나중에 낸 책인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에는 [문학]을 향한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책의 독자가, 그러니까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독자가 문학을 말 그대로 급진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급진적 문학이라, 아니, 문학의 급진적 수용이라…… 이 도발은, 모르겠다. 문제는 내가 아직도 혁명이라는 걸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말이 위안이 된다. 역설이다. 도발을 듣고 기뻐하다니, 내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하긴 책과 함께 글을 쓰며, 나는 어떻게 된 것 같다고 쭉 생각해왔다.



*   *   *



    『이 치열한 무력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으니 말인데, 사사키의 대담자인 ‘가가미’라는 사람의 대답이 있어 옮겨본다. 사사키보다는 연장자이지만 사실 누군지는 모르겠다. 사사키가 “누가 읽을까요?”라며 물었다. 가가미가 말했다.


    “아마 매우 일반적인 사람들일 거야. 지금은 사유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잖아? 사유라는 것이 심심풀이도 시간 낭비도 아닌, 그 자체가 실은 생산적이라는 얘기니까 말이야. 그런 사람들한테 와 닿는 게 있어.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건전하다고 생각해. 이런 종류의 책이 팔리는 건 나쁜 현상이 아니거든.”(사사키 지음, 안천 옮김,『이 치열한 무력을』, 51쪽)


    그 후 둘의 이야기는 실천과 이론을 양분해서 생각하게 하는 행태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책을 읽은 순간부터 혁명의 점화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대한 지각을 열어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결말에 이르게 된다. 뭔가를 자르는, 그리고 치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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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에게 뭘 바라는가.
    from 공 음 미 문 2016-01-25 21:32 
    십중팔구 너희들은 고급독자가 될 뿐일거다 일갈하던 어느 교수님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걸 비웃던 누군가는 작가가 되고, 겁을 먹었던 누군가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그랬지만 그건 예언은 아니었죠.문학에게 혁명이란 사명을 덧씌우는 건 참 재미난 극단이 있어요. 만병통치약이거나 혹은 마지막 수송선이거나 라는 거죠.그런데 말입니다. 또 재미난 지점은 글쓰기가 이 사회와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요구들이 치고 들어온다는 거죠. 왜 현실과 동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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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2016년 1월 19일



    작년 내게 최고의 영화는 <시카리오(원제 : Sicario)>였다. ‘최고’는 연출기법과 배우의 연기와, 그런 것들이 준 의미가 아니었다. 통제하고자 하는 측이 허용한 어마어마한 폭력과 그를 둘러싼 비리, 상부의 결정, ‘늑대들의 땅’에 비유된 현실의 얽히고설킨 배경 역시 오랜 뒷맛으로 남지 못했다. 오히려 감독이 의도한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총격이 오가는 시내의 소음을 뒤로 하고 아이들은 다시 축구 경기를 시작하며, 이를 학부모들은 무심히 지켜본다. 폭력은 자신에게만 찾아오지 않으면 된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총알은 유령이 되어 도시를 날아다닌다. 우리의 불감증을 조작하는, 이미 인간 안에 심어져 있는 화약통에 불을 붙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든 저항해봐야 한다.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 기대로 이 책을 읽었다.


    지그문트 바우만과는 2년 여 만에 다시 만났다. 유동과 액체는 그의 상징이다. 이 단어를 둘러싼 멀미날 것 같은 일상의 ‘뭉글뭉글함’만 기억한다면 어느 독자든 그를 쉽게 소환할 수 있다. 그런 일상을 못 느낀다면 얘기는 다르고. 아, 한 가지 기억해낸 것이 있다. 그의 긴 문장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적응을 하지 못했다면 『모두스 비벤디』는 물론이고, 이제부터 말할 책 『도덕적 불감증(원제 : Moral Blindness)』은 덤비지 못할 복잡한 미로일 것이다. 중문들로 뒤덮인 원문을 고생하며 상대하는 역자의 모습이 얼핏 그려지기도 한다. 여기에다 노학자를 상대하는 혈기왕성한 레오니다스 돈스키스의 담화마저 중문을 쏟아낸다.


    감안해야 할 점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적응이 문제가 되는 책이긴 하다. 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그 가치를 허투루 말하는 건 잘못이다. 결국 ‘그 이야기’를 하는 인문학과 사회비판에 싫증을 내는 이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럽겠지만 이렇게 말해야겠는데, 이 책 역시 그런 결말을 내린다. 하지만 중간의 담화를 뛰어넘는(무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시카리오>의 불감증이 시각적인 것이라면, 방금 언급한 우는 도덕적 불감증에 사로잡혀 거울을 보지 않는, 내적인 불화, 혹은 소비주의적 환멸에 지나지 않을 테니.





*   *   *




    다행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악마는 없다. 특히 <콘스탄틴>, <애나벨>, <인시디어스>처럼 수도 없이 소비된 악마, 종교적 이름의 세속적 악마들은 없다. 강력한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일부의 경험으로 제한되는 ‘악의 체험’은 이 시대에 부단히 가공되고 있다. 재미있긴 하다. 대체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이런 중세적인 악마는 최첨단 과학의 도움을 받아 밝혀지는 구조를 가져야만 하고, 그래서 재밌다.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는 건, 그런 ‘보이는 악마’는 허구임이 밝혀졌고 그 대신 ‘민영화된 악마’, ‘허약한 악마’가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로 밝혀진 까닭이다.


    아이히만에서 조우한 돈스키스와 바우만이 역사(기억)의 조작과 탈도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중간을 건너뛰고 보면 다소 비약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둘은 분명한 관련이 있다. 아이히만.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일 악마와 같은 사람이 원래 아니었다. 그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도덕적 광기가 불어 닥칠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환기시킨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두 학자는 묻는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제시되는 게 바로 ‘기억 조작’이다. 우리가 온전치 못한 기억을 추억하며 사는 건 당연하다. 망각은 축복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런 차원의 기억이 아니라, 역사와 정체성에 관한 기억이 조작되어 바우만이 우려한 것처럼 논리와 우선순위가 떨어져 나간 ‘그릇’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그릇이란 무엇인가? 바로 정체성의 오락화. 호모폴리티쿠스의 ‘호모루덴스’화다. 이 표현은 무섭다. “악마가 사는 복마전의 현관에 도달”(61쪽)했다는 바우만의 진단. 그 조작의 사례로 그는 팔레스타인을 상대하는 이스라엘의 폭력을 든다. 잊지 말자. 그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인 그가 “먼저 공격하는 자가 정상에 선다는, 그리고 그런 자가 계속 정상에 있으면 처벌받지 않는다는”(66쪽) 것마저 배워버린 이스라엘의 통치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을 비판한다. 홀로코스트에서 ‘복수’를 배운 그들을.


    이렇게 연쇄 작용이 일어난다. 누구에겐가 들었다. 정치는 누가 먼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가의 문제라고. 어차피 자신도 꼬리를 물릴 것이고 그렇게 물고 물린 둘은 빙글빙글 돌며 역사의 춤을 출 것이다. 여기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유치한 논쟁은 춤사위를 북돋는 훌륭한 장단이 된다. 돈스키스는 그 관계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무대에서 우리가 보는 건 지속적인 자극이다. 정치적 추문이다. Yellow한 문구들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 감각의 후퇴다. 추문을 생산하는 건 스타를 만드는 것과 같다. 둘은 베를루스코니를 말했지만 우리는 트럼프를 보고 있지 않은가. 정치적 스타와 영웅이 TV에 나와 상대를 언어로 가격하고 선동하면, 그럴수록 우린 ‘탈도덕화’된다. 그들이 겨냥하는 상대는 창조된 허구인 타자들이고, 남는 건 그 타자들이 교묘하게 타격을 받는 가학적인 말이다. 토론, 그런 건 없다. 우린 그런 장면을 싫어한다. 너무 박박 긁어 생채기가 생긴다. 그리고 학자들의 지혜로운 말을 그 위에 바른다.


    우리가 탈도덕화되는 또 다른 이유는 속도사회다. 이 용어는 이제 별로 낯설지 않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시대다. 그러니 도덕적 판단에 따른 오명을 두려워해 자신에게서 그 짐을 덜어버린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슬쩍 벗어나려고 한다. 대신 오명의 고통이 없는 어딘가가 가상으로 마련된다. 탈도덕의 공간. 이건 우리의 양심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정보가 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쓰나미 현상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득불평등 현상이 우리에게 탈도덕화의 유혹을 쏟아 붓는다.


    빠르다. 기억이 사라져버린다. 조작되기 쉽다. 돈스키스는 대학을 바로 그런 시대에야말로 유지해야 할 공간으로 본다. 근대적 감수성을 수호할 장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조국 리투아니아도 우리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 문제는 제 1장과 제 4장에서 수시로 교차된다. 한편 속도사회에서 바우만은 언어를 보호하려고 시도한다. “황급한 삶과 순간의 폭정의 첫 번째 피해자는 언어”(85쪽)라고 확실히 말한다. 한 번에 140개 이상의 문자는 허용하지 않는 특정 공간에 한해서만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다.


    나 역시 바우만의 궤에 포개놓을 의견이 많다. 영화 100자평, 책 100자평, 나는 이런 짧은 문장들로 오가는 ‘인스턴트적’인 담론 현상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짧고 간결해서 시크한 멋까지 풍기는, 흡사 아포리즘을 추종하는 낭만적 문화와도 겹친다 할 수 있는 이런 현상 속에서,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것의 전문가 행세는 두 학자가 말한 기억조작의 위험에서 단 하나도 자유롭지 않다. 이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홀로 떨어져 있으며 정치적인 연루와 극소량의 자유를 유지하는 ‘유랑하는 학자’, 아니 ‘애호가(딜레탕트)’들을 옹호하는 바우만의 다소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발언과 닿는다. 사견이나 나는 이 대목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가 떠올랐다. 물론 어느 정도의 비관은 불가피하다고 봐야 할까. 바우만은 이런 표현을 몇 군데에서 썼다. “강의 다리 밑으로 많은 물이 흘렀다.”(125쪽) 무색하다는 말이리라.




*   *   *




    정치에 대한 맹비난은 돈스키스 쪽에서, 그리고 저항에 대한 비판은 바우만 쪽에서 나온다. 두 논조가 제 2장의 씨줄과 날줄이다. 기술이 정치를 앞질렀다는 돈스키스의 말에 동의한다. 바우만처럼. 이 말은 기술에 의존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고, 굳이 트위터로 온갖 공방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나 여기 있어.” 발언들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여기에다 소비되는 정치까지 붙여놓으면 우리 시대는 두 학자의 말마따나 진정 소비와 온라인의 시대다. 그래도 희망은 찾아봐야 하니 (소비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으므로) 바우만은 인터넷 공간의 혁명성, 우리가 아랍의 봄 사태로 새삼 주목했었던 푸르른 희망의 이름을 들여다본다. 아쉽지만 그는 줄곧 비관적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바우만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대상이 비단 인터넷에 한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저항을, 점거를, 타파를 겨냥한다.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실제 달성된 바가 있다. 20세기의 유명했던 독재자들 중 상징적으로 축출된 이들. 사살된 자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시리아는 참극의 미완이다. 여하튼 이렇게 ‘독재자 없는 정권’을 향한 점거가 성공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건설에 대해서 점거와 저항과 타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붙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정말 무섭고도 완벽에 가까운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리 많은 반대도 대체로 흡수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속도사회에 산다. 빨리 잊힌다. 감정이 먼저 소멸한다. 콘래드의 ‘바다’와 카네티의 ‘바다’, 그 군중의 매력과 힘이 사람들을 똘똘 뭉친다고 하더라도 다음 장면은 영화 <미스트>와도 같다. 안개가 걷혀야 보이는 바로 옆이 군중들에게 현전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정권은 바로 그 점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저항하고 상대해야 하는 정치적 현상과 특정 정치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념과 사상에 따라 다르긴 할 것이지만, 정치는 늘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의 저 “비생산적인 충돌”(163쪽)에, 좌우 진영의 화해 불가능한 싸움에 우리가 브레이크를 걸 순 없는가? 돈스키스가 묻는다. 과연 누가 우릴 대변해주는가? 권력 대행자의 미래는 무엇인가? 하지만 자답으로 돌아가면서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언급할 뿐, 즉 대의제의 의미를 확고히 하라고 조언할 뿐 딱히 내려지는 답은 없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잠깐의 머뭇거림을 본 것 같다. 민주주의는 무섭다. 소비주의와 결합되어 이제 누가 나를 대변하는지 물을 수 없는, 그래서 투표권 거부의 충동마저 느끼는.




*   *   *




    사실 챕터 제목별로 딱 분간되는 책이 아니다. 공포, 정치, 감수성 등의 이름이 여기저기 매듭지어 있다. 정확히 나뉘어져 있으리라 기대해서도 안 되는 책이긴 하다. 나이 지긋한 바우만과 열혈학자 돈스키스가 논하는 건 그 모든 것. 둥실둥실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유동하는 세계니까. 그러나 그 유동성에는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과 그 둘로 인한 굴욕감의 쓰라림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그게 비단 우리만의 문제인가? 우리가 대표라고 뽑아놓은 정치인들은 문제해결법도 모르며(무지), 그걸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고(무기력), 그로 인해 우리에게 실망감(굴욕)을 안겨준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그 무한이동의 자유, 이리저리 흔들림의 자유를 포기한다. 공포를 무시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기대하던 정치는 상업과 손을 잡고 그 공포를 밭에다 뿌려버린다. 우린 열매를 소비하며 풍작을 말한다. 이상한 풍작이다. 먹을 것은 참 많은데 소통이 위축되어 자기 자신을 지갑 속에 넣고 꺼내지 않는다. 이러니 상실된 균형이라는 과제를 누가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문제는 더 있다. 국가는 씨를 뿌려놓고 시장에게 맡기며 알아서 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붙어버린 공포의 그림자는 우리가 알아서 씻어내야 한다. 바우만의 말을 빌려놓는다. “사회적 지위의 심각한 허약성은 오늘날 사적인 문제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원을 이용해 처리하고 극복할 문제로 재정의 되고 있다.”(189쪽)


    한편 국가가 이러한 방기 탓에 스스로 폐점하게 된다는 건 별로 놀라운 귀결도 아니다. 우린 국가의 무능을 묻는다. 그렇게나 기업과 시장에 목을 매면서도, 그 사이에 정작 ‘우리’에게는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기업인의 사면과 낙수 현상을 가증스레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상황을 호전시킬 수가 없다. 나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하루를 집에서 쉬는, 그냥 직장에서 일하는, 거리를 산책하는 이들에게 무책임을 되물을 정도로 정당과 부당의 확단을 내릴 수 없다. 이런 유보 상태가 겨냥하는 대상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다시 돈스키스는 기억의 조작과 상실을 불러온다. 페이스북 현상을 말하면서 말이다. 참여 욕구가 늘어 그만큼 언어는 남발되고, 바우만의 우려처럼 언어는 피를 보면서까지 “설득력 있는 피해자”(217쪽)를 양산한다. 그런 말이 시청률의 우위를 점하며 ‘좋아요♡’를 얻는다. 여기에 들지 못하면 그건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남발되는 언어는 신중하게 배치되고 마름질된 언어만큼이나 왜곡된다. ‘좀비의 언어’라고 하면 될까. 자기가 살아 있는, 피가 도는 말이라 주장하는 창백한 얼굴의. 바우만은 인터넷의 혁명 가능성을 논하면서 현장의 한계까지 나아갔고, 이 지점에서 돈스키스는 순식간에 생겼다가 해체되는 시뮬라시옹의 공간, 그 깨져버린, 점묘적인, 어지러운 공간의 폐해마저 비판한다. 왜곡되는 기억과 상실되는 감정을. 그리하여 그토록 열광하며 반긴 아랍의 봄 앞에서 서양은 왜 그렇게나 무감각했는지를 비판할 수 있다. 어디에 우리의 실체가 있는가.




*   *  *




    죽어가는 대학을 논하는 제 4장은 동떨어진 듯 시작하지만 실은 소비주의 사회, 그리고 매체만능주의 사회와 닿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돈스키스는 영국의 예로 대처 이후 변화된, 죽어가는 대학을 말한다. 바우만은 그걸 ‘대처 시대 이후’로 정정하고자 한다. 긍정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민영화로 국회 쓰레기 대란까지 겪은 대처는 그에 관해서는 거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오늘날을 하나 예로 들어도 된다. 2008년 금융 위기 때에 영국 대학들이 입은 타격은 엄청났고, 현지에서는 합병 이야기가 오가면서 대학이 더 기능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무시무시한 수준의 압박을 받았다. 이는 두 학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은 우리가 그 사태의 피해자인 것처럼만 생각하는 기만적 자세를 비판하며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건 우리가 초래한 사태였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이 소비의 예외 대상인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야만 한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다니는 건 위선이 아닌가? 우리가 화약통을 끌어다놓고 시기적절한 때에 터졌다고 봐야 옳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국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사회 나가기 직전인 지금 이런 말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거 해서 뭐 먹고 살 거냐고. 동기들 중에는 경영 전공으로 활로를 찾은 이들이 많다. 그들은 포기해야 할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어도 大學의 의미를 갈구해본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맹목적으로 그 추세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건 큰 무지에서 비롯된다. 아직 대학은 대학이 해야 할 일을 두고 아예 손을 놓아버리진 않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인 건 맞지만. 그래서 수호해야 할 의미의 기치를 내건 동문, 교수진, 학우들의 저항이 있었고, 필자 동생의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특수한 기관에서는 기능주의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다. 돈스키스를 보면 그게 리투아니아에서도 분명한 문제로 제시되는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든 생각 중 하나는 저 두 학자가 한국 사회를 분석하면 동구의 문제이니 리투아니아의 문제이니 하는 지역적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세계적인 문제 중 하나로 확장해서 해석하진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런 진단을 내릴 것이다. 개그맨 유세윤 씨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선택을 머뭇거리는 패널에게 던진 말처럼 여기는 ‘최강’ 자유주의 국가. 진중권, 홍세화, 강준만, 박노자, 그리고 최근으로 보면 다니엘 튜더와 같은 비판적 필진들은 『도덕적 불감증』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고,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적 세태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초보적 생각도 바우만의 말처럼 환멸과 냉담에 젖은 채 사회에 들어갈 유동적 한 세대, 젊은 세대의 입장이다.




*   *   *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원제 :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을 둘러싼 두 학자의 담화에 앞서 생각난 건 브렉시트(Brexit)였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영국민의 53% 정도가 탈퇴 입장을 표명했다는 한 여론조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럽에서 가속화되는 문제다.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하든, 아니면 한 국가에서 한 민족이 영토를 가진 주권국가로 분리·독립을 선언하려고 하든, 유럽은 분명 통합의 기치를 내걸며 지난 반세기의 얼룩을 함께 치유하고자 했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동향 속에 있다. 우린 경제가 어려우면 나라는 쪼개지고 극우인종주의가 득세한다는 걸 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즉 바우만이 말한 ‘포스트-베스트팔렌 시대’의 민족국가 유령이 계속 떠도는 상황은 국가의 무능과 소멸이 이야기되는 추세에 있다. 종말과 멸망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측의 논지도, 즉 형태론에 반하는 논지도 분명 이해가 되지만 저 두 단어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슈펭글러가 다시 언급된 것이다. 돈스키스가 지금 상황에다 포개어놓은 서구의 몰락은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 ‘문명 유기체론’ 정도로 요약될 슈펭글러의 저 단어는 WWⅠ 이후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문화는 서로 교착이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인종주의와 맞닿는 단어라는 거다. 그 상황이 지금 유럽에 도래했다는 것이 바로 돈스키스의 논점이다. 왜 그가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들을 이 책에서 내내 언급하며 그 망조(亡兆)의 분위기를 구태의연하게 반복적으로 상기시킨 것인지는 사실 ‘서구의 몰락’에 와서야 온전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그가 “반자유주의적인 새벽”(304쪽)이라 부른, 하지만 이미 한 번 겪었던 참상의 새벽이 다시 왔다. 유럽은 지금 극우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서서히 나온 것이 아니라, 때를 그들이 마침내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우만은?


    다행이도 이 노학자는 희망을 보자고 한다. 디스토피아의 제기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유토피아를 찾는 게 아니다. 그건 허황됨이고, 가식이며, 무엇보다도 기만이다! 바우만처럼 비관을 유지하되 역사의 사례에서 얻어낸 긍정적 교훈의 사례를 다시 한 번 우리가 실현할 수 있다는 positive의 분위기가, 그 마력에 휩싸인 상태가 필요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가 말하는 건 “민족·종교적으로 다양한 집단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비슷하게 혼합된 환경”(333쪽)의 구축이다. 민족국가의 연합은 군사의 힘으로도, 경제의 힘으로도 달성된 바가 없다. 경제에 매달리면서 유럽연합이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다. 유럽이 수많은 민족의 장으로 그 역사를 반복해오며 배운 중요한 교훈은 바로 타자와의 공존법이다. 바우만은 그것이 유럽의 유산이라 말한다. 서구의 몰락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비관의 뉘앙스를 풍기던 그가.




*   *   *




    그렇게 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인 입장에서 명확히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원리주의 탓이라, 나는 생각한다. 대학에서 종교비교를 배우며 여러 분쟁들을 조사한 적이 있다. 장문의 과제는 체첸의 것을 고민해서 썼는데, 결국에는 평화로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지만 현실의 원리주의 문제는 일부 맹목적인 사람들에게 워낙 유착된 것이라 그걸 제거한 상태를 상상해보는 것조차 어렵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원리주의는 선택하는 것일까? 선택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라 감히 말한다. 돈스키스는 어니스트 겔너의 용어 ‘모듈형 인간’을, 쉽게 말해 레고처럼 이것저것 갖다가 낄 수 있는 부품형 인간을 제시한다. 선택적 인간, 상호 교체의 가능성, 유혹과 쾌락과, 신뢰의 조작과, 무엇보다도 배반을. 그가 “작은 돈 후안들”(371쪽)이라 부른 유형의 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되지 말라는 충고가 이어진다.


    우리가 이상적인 무언가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품을 가져다가 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원리주의란 없다. 성경에 대한 원리주의는 간결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일부 미국인들에게서 시작된, 독일의 비판적 성경 해석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하나의 선택이었다. 종교에 대한 원리주의는 서구-이슬람의 분명한 대립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제조되었으며, 그들의 서구화와 경제적 고립 사이의 연관성에 강박적으로 집중한, 일부 사람들이 선택한 관념이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야말로 무지와 무기력, 굴욕감이라는 ‘공포의 3요소’에서 뒤따른다.


    돈스키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모듈형 인간의 인간관계는 그른 것이며, 그것은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아는 태도와 타자의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에서 극복될 수 있다. 타인을 거치지 않는 ‘자기에의 앎’은 왜곡된다. 게다가 우린 첩보기관이 아니다. 사생활의 절멸과 소비주의로 촉발된 우리의 문제 해결은 돈스키스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축약해버린 삶에의 태도로 해결된다. 진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부는. 그들 중 대부분은 사회와 세계에 대한, 무엇보다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펼쳤을 것이므로 ‘작은 돈 후안’이라 부를 수는 없다. 나도 진부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이 책에서 두 학자가 서로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던 그 열렬함과 진지함으로. 하지만 그 비관에서 우린 이 책이 비판하는 세계로부터 거리를 둔다. 사랑? 진부해. 그러나 여기서 그치진 않으리라. 그 감수성이 한 번 움직이게 됐으니,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비관 속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우리에게 찾아올 또 한 번의 맥동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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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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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6일


    푸념. 우선 옮긴이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독자가 푸코와 라캉, 르장드르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삶이 사회화되는 과정에 대한 지적 호기심, 성찰의 욕구가 있다면 읽을 수 있다.” (909쪽) 저자 사사키 아타루도 (특히 라캉 부분에서) 거듭 말한 바인데, 독자의 자질이라는 것이 있다. 단순한 지식의 양을 일컫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리라. 시각은 위험하다. 물론이다. 무엇이 시각을 구축했느냐의 여부가 문제다. 따라서 이 책은 사전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나 같은 이는 읽을 만하긴 하지만, 반면 여기서 언급될 라캉, 르장드르, 푸코 등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기저에서부터 뒤흔들고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색안경을 낄, 그런 태세를 얼마든지 갖추고 있는 이들이 읽을 만한 하진 않다. 그것은 옮긴이 안천의 저 문장 중 후자에 해당한다.


    나는 어느 정도 욕구를 충족했다. 또 다른 욕구가 결핍을 낳는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여기서 시작될 여정은 여타의 독서로 도움을 받을 테니. 그러나 이 충족에는 피할 수 없는 푸념의 묘한 맛이 섞여 있다. 피하고 싶은 맛은 아니나, 굳이 사서 맛보고 싶은 맛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사회화되어 있는지는, 내가 이 사회에 어떻게 끼어들어가 있는지는 저들의 시각을 빌려 알게 되었다. 그 맛이 씁쓸하다. 그 전략적 장치들이, 아주 오래된 기술들이 만든 픽션의 견고함 속에 내가 들어 있다. 그 역사의 도박장 속에. 이걸 남에게 설명하기도 사실 뭐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개인’으로 취급된 적은 적었던 듯도 하다. 내게는 번호가 붙어 있고, 관리되는 상황이고, 규율 속에서 장기간 ‘조정’ 받은 적도 있었다. 자유롭다는데, 그걸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유수 인문학자들의 날카로운 일갈로 “그래, 우리 사회는 그런 거였어.”라고 무릎을 친 적도 있다.


    그래서? 어디로 가자는 건가? 만약 내가 가다머였다면 분명한 어조로 “우린 우리 시대 바깥을 볼 수가 없어.”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었으니 “그건 아주 오래된 세계의 판본에 지나지 않아.”라고 반문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알아본 결과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일까? 저자가 ‘이로(理路)’라고 칭하며 제시한 이 두꺼운 논거들이 분명하게 말하는 바, 끝은 없다. 이제 ‘○○의 종말’이라느니 끝이 보인다느니 새 시대를 준비해야 된다느니 하는 말 따위에 나는 속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 유치한 선언은 아마 그런 만큼이나 확고하게 오래도록 내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종말이라고 말한 자들이 선언한 새 시대도 르장드르의 표현대로라면, 또 하나의 ‘판본’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그걸 판본임을 모른 채 “오, 새 시대여, 내게 축복을!”이라고 외치는 게 살기에도 더 편하고. 하지만 이 책은 위험하다. 끝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우릴 막막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야전과 영원(夜戦と永遠)』을 40여 장의 이면지에 꼼꼼하게 적어 곱씹고 고민하며 읽어온 나의 이로(理路)를, 아니, 정정한다, 나의 ‘이로(泥路)’를, 그 진흙탕길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겠다. 쓰다보면 이 책을 덮은 나의 첫 번째 막막함이 그래도 풀어지진 않을까, 이런 또 하나의 막막한 희망이다. 이 막막함은 상당히 물리적이다. 그렇다. 여기까진 술술 써내려왔는데, 이제부터 뭘 써야하는 것일까. 여기까지의 나와 이 아래의 나 사이에는 어떤 서어(齟齬)가 있을지도 모른다.




*   *   *




    말년의 라캉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털어놓은 ‘보로메오 매듭’을 시작으로, 우리는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처음으로 돌아간다. “당신의 처음은 무엇인가?”라는 도통 의미를 모를 질문을 받는다 하자. 물론 의미를 모르겠다는 건 ‘처음’의 정확한 지점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캉은 그걸 <거울>을 보는 시점이라 말한다. 거울을 보지 않은 말을 모르는 이, 그것은 인판스이다. 전제 군주, 그것도 아주 포악한. 미술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히에로니뮈스 보스의 세계”(44쪽)라고 설명하면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시기가 있냐는 거다. 저자는 그걸 소행적 도출일 수도 있다고 분명히 경고한다. 나도 사실 라캉의 이 분석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환희와 증오에 대해서는 딱히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만화 <호문쿨루스>를 본 사람은 생각해봤을까? 주인공은 욕망이 발달한 부분이 유독 크거나 눈을 달고 움직이는 기이한 세계를 보는 눈을 갖게 된다. 나는 저 원초성이 거울 앞에 선 이에게 그려지는 이미지이며, 주인공의 눈은 그 거울의 면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은 접고, 다시 정리하자. 방금 논한 건 상상계의 일이다. 내 모습을 사랑하면서도 저 정지된, 죽은, 결여된 이미지를 보고 “바로 ‘너’가 ‘나’라니!”하며 놀란 가슴에 자아(소타자)를 공격하게 되는 이 막다른 골목 말이다. 이건 어떻게 끝나는가? 우린 저기서 살고 있지 않지 않은가? 여기서 상징계가 나온다. 판사의 판결봉. 대타자가 선언한다. ‘너는 ○○○이다.’ 상상계가 진짜의 개입, 즉 실정법의 개입으로 쓸모없는 망상이 되어 사라져버린 건 당연하다. 정신분석이 다루는 게 사회 속에 있는 걸, 개인의 병은 그리하여 사회의 병인 걸,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선언에서 더 이상 더 갈 길이 없다. 라캉은 인간의 법을 언어의 법이라 결론한다. 그런데 저 둘은 닮았다. 법과 언어의 상징계에서 대타자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언이란 “너는 죽는다.”이고, 이미지와 애증의 상상계에서는 아예 거울 속의 소타자 자체가 죽음의 이미지다. 소타자에 대한 질투와 시니피앙의 무한 엔진, 그 용광로 같은 열광도 닮았다. 메커니즘이 유사하다.


    그렇다면 실재계는? 이건 없는 세계다. 세계는 상징화를 통해 구성되는데, 이것 때문에 못하게 된 것, 상실된 것, 그것이 실재계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우연을 기다려야 한다. 외상과의 우연한 조우가 있으면 주체는 주체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조우’를 뭐라 부르는가? 라캉의 네 접점 중 세 개, 즉 대상 a의 잉여 향락, 팔루스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이다. 향락은 쾌락과 다르다. 긴장을 재생산하며 지속하는 것이다. 라캉이 그 예로 든 그리스도교의 성인(聖人)들의 행동은 다소 충격적이다. 떨림과 긴장이 교차하는, (굳이 쓰자면) 똥 먹기, 나병 환자 씻긴 물 마시기, 이런 것. jouissance란 곧 죽음의 충동과 같다. 여기서 절대적 향락을 주목하자. 이 신화적인 향락은 근친상간, 살인의 금지와 딱 붙었다. “그건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라는 긴장. 금지는 하라는 것이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충동을 치수(治水)하는 게 계율이다. 합법적 향락 만들기 프로젝트.


    팔루스의 향락도, 대상 a의 잉여향락도 모두 향락의 조정기, 즉 레귤레이터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것은 신체 기관에 대한 향락, 권력에 대한 향락, 그리고 찌꺼기에 대한 향락이다. 이런 것들이 합법적이라고? 물론이다. 팔루스의 향락은 상징에 대한 향락이다. 페티시즘과 무한 권력욕이 비합법적인가? 찌꺼기라도 향락하자는데, 가벼운 도착 행위, 여자옷 입기나 남자옷 입기나, 아니면 유니폼을 갖춰 입은 이 일상이나 그런 것들이 죄가 된단 말인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이 ‘코스프레’ 사회가? 아니다. 그럴 일은 없다. 단, 라캉이 이런 향락들을 모두 뒤로 하고 언급한 고귀한 향락이 하나 있다. 바로 여성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이다. 이 단어만은 끝까지 기억하고 이로를 따라가야 한다.


    우선 르장드르의 비판은 견지해놓자. ‘여성의 향락’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교적이다. 그들의 신은 남자가 아닌가. 여기서 <여성>은 지극히 제한적 용어다.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을 실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현실에 없는 건 아닌가 생각까지 해봤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법열에 든 여성을 본 적이 없다. 신을 사랑한다고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그게 신앙의 확증이요, 과시요, 또한 희열이라면. 그러나 정말 신을 사랑하여 저 베르니니의 조각상에서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비로운 그 표정을 한 여성은 못 봤다. 신과의 연애. 그 불온함. 신을 연모하는 그녀들의 말은 상징계에 속하지도 않아서 라캉은 그걸 ‘라랑그(Lalangue)’라는, 잘 모를 용어까지 고안해내며 “언어는 바깥을 내포하고, 언어 바깥에서 비로소 언어가 된다.”(207쪽)라고 말한다. 사실 이 의미를 잘 모르겠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안다는 뜻도 아닌 게, 그건 어쩌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d Des Schweigens)>를 읽고 난 후 내가 갖게 된 어떤 감각적 추정, 아니 경외심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추억은 접고, 여하튼 이 향락을 추구한 신비주의자는 마리아가 되려고 했고, 그것은 사회와 세계를 낳는 진정한 혁명. 여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라캉은 여러 비판을 받지만 그래도 이 ‘여성의 향락’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건 용감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라캉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자 ‘표상과 시체 : 하이데거·블랑쇼·긴츠부르그’라는 괄호의 장을 마련해 “표상은 시체다.”, “우리는 인형이다.”, “이것이 니힐리즘인가?”, “우린 원래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새 인형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어느 정도 환기시킨다. 답답했던 라캉의 장에서 그렇게 작별하는 것이다.




*   *   *




    2부로 넘어왔으니, 당연 르장드르는 정신분석을 맹비난하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 아니다. 딱 옳다. 그러나 계보적 구축과 규범 시스템을 밝혀낸 공로는 인정한다. 그리고 사실 르장드르가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도그마 인류학’의 그 ‘도그마’를 추출해내는 지점도 정신분석 비판의 안에 있었으니, 둘의 관계를 독자인 우리가 아주 삐딱하게 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럼 대체 도그마란 무엇인가?


    우선 르장드르도 상상계와 상징계의 붕괴를 말한다. 대타자와 소타자, 시니피앙과 이미지의 구별이 없으니 라캉의 저 <거울>이란 건 말과 이미지가 섞인, 아주 치밀하게 조립된 장치일 것이다. 그런데 라캉이 광학적 기능을 한 <거울>을 말했다면 르장드르는 더 나아가 그걸 사회와 엮어버린다. 사회=<거울>. 이미지는 그냥 비춰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거울> 면에 텍스트와 함께 직조‘되어’버린 것으로, 거울은 곧 텍스트가 된다. 우리도 텍스트다.


    그러면 남는 질문은 “대타자도 <거울>로 볼 수 있는가?”이다. 우리를 제어하는, 우리를 선언하는 자를, 아니, 신을? 신이 눈에 보일 리는 없다. 보인다면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대타자에게 “너는 ○○다.”라고 선언할, <거울>로 비춰줄 대타자는 없다. 신의 <거울>에서 보이는 건 세계다. <거울>을 봤는데 세계가 보인다니! 이런 (르장드르의 표현대로라면) ‘미친’ 상태는 분명 신화적이다. 따라서 신이라는 건 모든 거울보다 앞서 있는, 앞서 존재하는 <거울>이다. 이걸 르장드르는 <절대적 거울>이라 부른다. 이게 그의 도그마다. 인과성도 없다. 근거도 없다. 설명도 필요 없다. 그런데도 인과성과 근거와 설명이 개시되는 것. 이것이 바로 도그마적 <거울>이다. 인간은 여기서 만들어지며, 이것의 구체화가 엠블럼이고, 엠블럼이 우릴, 군중을 움직이게 한다. 아니, 우리가 엠블럼이다.


    이 도그마를 알았으니, 진짜 이런 게 우리에게 있는지 알아봐야할 차례인데 사실 별로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있다. “근거율은 예술이고, 근거는 미적·감성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295쪽)라는 말은 별 설명 없이 도그마적으로 설치된 엠블럼이 우리의 생사를 좌지우지하기까지 하는, 예로 들게 되면 아주 비근해지는 역사적 사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건 도저히 논리적이지 않아도 되므로 ‘자명한 일’ 역시 아니다. 왜 ‘1’을 ‘1’이라고 세는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최초의 시니피앙을 도입하는 것, 그 공허한 장소를 염두에 주는 것. 정치 기술들은 분명 이런 도움을 받고 있다. 근거율과 인과율이 분할되어 있다. 르장드르의 이 말은 법의 말로 분류된 우리 사회가 “그건 왜 그런 겁니까?”라고 묻는 순간 사상누각이 되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제시한다. 그러니 증거가 되는 텍스트에도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아, 진리는 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텍스트만 있는 것일까? 르장드르는 그래서 책 제목도 『텍스트의 아이들』이라 한 것일까?


    법의 말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수취(收取)하는, 르장드르의 이로를 따라 엄밀히 생각해보면 맞긴 하나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모래 같은, 나약한 이 모습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르장드르가 하나의 ‘판본’에 지나지 않는다며 일격에 산산조각, 그 파편으로 만들어버리는 유럽의 긴 역사를 목격해야 했다. 사실이다. 난 그를 전혀 몰랐다. 라캉이나 푸코는 대학에 '들어는 본' 정도였고, 푸코는 약간 읽기도 했지만 르장드르는, wikipedia 검색도 순탄치 않은 그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너져버린 ‘도그마 인류학에서의 아버지’라는 개념과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게 무너져버리는 모습에 무섭기도 했다. 아주 교묘한 책략과 “아버지가 아이를 낳는다.”라는 픽션과, “닮은 자가 닮은 자를 낳는다.”라는 오래된 법의 문구를 인용한 르장드르의 의도가. 흡사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이가 죽어도 “<거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존재해야 한다.”(341쪽) 왜? 그게 삶을 다듬으니까. 이 위험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도박판이, 다름 아닌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서움은 안도, 절반 정도의 안도로 바뀐다. 결론은 이거다. 르장드르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 저 판본을 만든, 도그마의, 텍스트의 힘을 무시하는 자가 원리주의자다. 그는 전제적인 폭군이 된다. 나-텍스트의 경계도 구분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귀결된다. 오늘 우리는 그 모습을 본다. IS는 지난해 가장 뜨거운 단어였다.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소격하는 자, 소격을 천명하는 자가 필요하다. 그렇다. 해석하는 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꾸란>이 “죽여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아무나 죽이라는 건가? 텍스트와 우리 사이에는 소격이 있어야 한다.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법자의 세상이 된다. 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르장드르의 ‘도그마 인류학’에 따르면 우리는 제정되는 주체, 재설정되는 주체, 그렇게 무한 반복되는 주체들이다. 이렇게 주체가 만들어지는, <거울>과 주체의 관계를 ‘의례’라 부른다. 우리는 이 의례가 없으면 진짜로 ‘말’이라는 걸 할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그게 반드시 말일 필요는 없다. 춤이어도 된다. 언어적인 것만을 법이라 여기는 건 너무 유럽적이다. 이런 분위기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르는 것에서 출현했다. 르장드르는 여기서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에서부터 법학자의 국가, 즉 법치국가의 출현에 이르는 역사를 설명하며 문자화된 법이 갖게 된 절대적인 위력을 보여준다.


    그 결말은 그리스도교의 교회법에서 세속화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단, 우리가 아는 그 세속화는 아니다. 종교와 떨어진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의 세속화는 “종교 자체의 본성과 관련된 광대한 연극적 총체의 일부”(377쪽)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말자. 그리스도교의 규범 공간이 더 오래 살아남고 싶어서 알리바이를 깔아놓은 것 정도로 생각하자. 유럽이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던가? 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아!’ 할 것이다. 신앙의 자유가 어디 진짜 자유던가? 세속화된 근대국가에 종교가 없던가? 이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결론이 나온다. 국가는 찰나다. 명운은 끝났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절대적 준거>가 만들어낸 한 형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형식주의는 사회과학의 위력과 함께, 기능주의의 추상과 함께 <국가>라는 개념이 소탕되는 소란을 틈타 같이 소멸된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의 멸망을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우리를 ‘지배’하는 건 반드시 <국가>일 필요는 없다. 이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은 ‘매니지먼트’가 맡아도 된다. 그리고 매니지먼트는 국가를 비난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떳떳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이거다. 매니지먼트는 믿을 만한가? 필연적인 결론인가?


    아니다. 저자는 살만 루시디 사건을 조망하는 벤슬라마를 잠깐 거쳤다가 다시 르장드르로 돌아오면서 매니지먼트의 보편성은 인정될 수 없다는 논조를 강력하게 조명한다. (벤슬라마도 중요하다. 원리주의-종교의 구별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이는 푸코의 말미에 다시 등장하는 문제이므로 기억해주는 것이 좋다.) <중세 해석자 혁명>이 가동시킨 텍스트의 정보화를 신봉하는 그들은 계보 원리는 몽땅 국가에게 떠넘겨놓고는 <법 권리>까지 밀어내려고 하는데, 이것이, 그러니까 과연 민영화가 재봉건화와 다를 바가 뭐가 있다는 것인가? ‘경영자-상사-부하’가 ‘주인-종자’와 뭐가 다른가? 우리도 그렇게 툴툴거리는데.


    게다가 이들은 “물음의 제도의 폐지를 고하고”(407쪽) 있다. 근거율이자 <거울>이자 소격인 ‘왜’, ‘사랑’, ‘자유’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건 국가주의자의 말이 아니다. 국가는 죽어도 된다. 하지만 해석은 살아야 한다. 텍스트는 얼마든지 픽션이 된다. 그것은 도박이다. 역사의 도박이다. 끝나지 않는 도박. 이 도박장에서 우린 살아남아야 한다. 절멸 금지. 이 도박장에서의 춤, 즉 법과의 열광적인 춤은 바로 사회와 세계를 낳는다는 라캉의 ‘여성의 향락’과 닮았다. 갱신의 희망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   *   *




    드디어 푸코다. 아니다. ‘갈팡질팡하는’ 푸코다. 저자와 함께 그 변화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종류이겠는지를 잘 모를 감동 같은 걸 받았다. 진하진 않다. 푸코를 비난하는 쪽에서 들려온 이 세계의 목소리를 아주 모르는 바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도 옹호해야 할 부분과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가만히 멈춰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판단은 우리 몫이다. 하지만 일단 그 이로는 따라가야 한다. 초기의 푸코에서 후기의 푸코에 이르는 긴 길을 사사키 아타루는 정말 그대로 걸어간다. 설정했다가 폐지했다가 그럼에도 계속 고집을 이어가기도 하고, 아이처럼 맨손으로 정치 문제에 덤벼들었다가 ‘된통’ 당하는 그 모습을 거의 여과 없이 보게 된다.


    곁가지를 다 쳐내는 위험을 감수하자면, 푸코는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의 구분과 이후 그 구분이 ‘통치성’이라는 개념으로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이로를 갖고 있다. 초기의 푸코는 주권권력을, <주권=법 권리>의 개념을 일관되게 비판했다. 너무 낡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감시와 처벌(원제 : Surveiller et punir)』에 제시한 권력은 규율권력이었다. 고문, 살해, 추방의 의례도 아닌, 죄와 관련된 기호를 각인시켜버리는 상징 설치도 아닌, 바로 감옥에 넣어 신체를 훈련시키는 규율. 이 책에서 푸코는 결론짓는다. 권력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만인을 본다. 권력의 기계. 장치. 기계. 정교함으로. 벤담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감옥은 실패하지 않았는가? 범인들이 더 이상 안 들어오던가? 아니다. 그건 범죄를 필연적인 요소로 설정하여 그 비행성을 감시하도록 한다. 아주 교묘하다. 그 positive가.


    이런 까닭에 푸코가 정신분석을 그렇게도 비판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주권적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가정’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뒀으니 “너희들은 낡았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규율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정신의학의 여러 전략들을 꼬집는데, 아홉 개나 되는 항목을 읽고 있으면 주변에 정신의학 전문가나 지지자들이 있는 건 아닌지 눈치를 보게 되는 문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사키 아타루는 갑자기 선언한다. “푸코는 옳다.”(542쪽) 권력의 주구(走狗), 앞잡이, 개 정도로 정신분석이 격하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학과 사회학 역시 같은 범주에 집어넣고 비판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제시된다. 근친상간, 인육식, 그의 상징과 같은 마리 앙투아네트 사건, 자위박멸 캠페인, 핵가족 고안(등장이 아니다. ‘고안’이다.) 등등. 정신분석은 부르주아에게, 사회학은 서민 계급에게 명령하며 사회를 만들어간다. 푸코는 분명하게 말한다. “금지는 틀림없이 지식인이 발명한 것입니다.”(557쪽) 그런데 규율에는, 푸코가 말한 그 권력에는 바깥이 없으니 안에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회는 이제 안으로, 미시적인 수준으로 봐야 한다. 그 안에서 투쟁의 울림소리를, 전쟁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던 푸코가 돌연 ‘생명 정치’라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건 그가 인종주의와 마주한 순간에 찾아온 개념으로, 인종주의-국가의 연결이 일어난 시에이예스의 ‘나시온(민족) 투쟁의 국가화’가 연관되어 있다. 홉스 비판에서 인종주의까지 연결되는 건 당연한 절차인 듯하다. 사회가 전쟁인데, 그 전쟁이 실제 어떤 판도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고찰한 거니까. 그런데 이 ‘생명 권력’이라는 것이 묘하다. 규율 권력처럼 신체에 관여하여 훈련시키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큰 규모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구이다. 이 생물학적 집단에 관여하는 생명 권력은 폭주할 수도 있다. 원자 폭탄의 사례, 유전자 조작과 바이러스 생산의 사례. 이 권력은 대체 누굴 ‘죽일 수’ 있는가? 바로 인종주의가 여기 개입한다. 이어 나치스가 나오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전면적인 죽음으로 가는 국가. 자살 국가. 르장드르도 이런 국가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궁금하다. 과연 저 두 권력의 교차점에는 뭐가 있을까? 바로 성(性)이다. 신체와 인구의 교차점이지 않은가. 바로 이 성이 규격화 권력의 대상이요, 항상 감시 받는 대상. 성은 억압받지 않는다. 주권권력과 관계가 없으니까. 그리고 성 담론이 활성화되는 역사적 사례가 소개된다.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진리 말하기’가 되는 현상까지도. 여기서 푸코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권력의 법적·부정적 표상과 결별”(621쪽)하자는 것이다. 그건 네거티브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푸코는 흔들려 있다. 주권권력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주권=법 권리>를 논하며 나치스를 비판하던 그 모습은?


    푸코가 ‘통치성’이라는 것에 주목한 1978년 2월과 그 이전의 푸코는 분명 다르다. 통치성은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에 이르는, 그가 영토-신체-인구로 나눠 서로 다르다고 했던 세 시기에 고루 들어 있다. 통치술이 문제가 된다. 모든 시기가 그랬던 것이다. 주권과 영토를 중심에 둔 그리스의 신은 이제 그리스도교 사목의 ‘목인’이 되어 16~18세기 통치술의 출현 배경이 된다. “모든 양을 위해 일부 양을 희생하는 사목”(653~654쪽)인 국가이성이 있고, 또 하나로는 사법·군대·외교 이외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폴리스가 있다. (여기서의 폴리스는 아직 police, 경찰이 아니다.) 이윽고 출현하는 자유. 경제학, 자유주의, 자유의 출현으로 통치는 이제 자연에, 아니 경제에 철저하게 준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성은 ‘작은 국가’를 표방한다. 국가가 손대지 못하는 대상을 지정하는 것이다. 이제 진리는 사법의 권한이 아니다. 시장에서 형성되니까. 진리는 가격이니까.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도 실은 조작이다. 우리도 그건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자유가 우리를 옭아매는 저 단어의 ‘역겨운’ 역설 말이다. 자유는 만들어진 것이다. 세큐리티 시스템이란 바로 그걸 효율적으로 만드는 장치다. 그것은 일상의 위험을 언급하여 우리를 규율적 생명장치인 자유의 안에 가두는 한편으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 어서 시장으로 나와라.”라고 설득한다. 자유의 생산은 통제의 생산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다름 아닌 시장의 가능성을, 그 힘을 확고하게 만드는 장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 과연 시장에게 국가나 사회를 만들 만한 강력한 힘이 있는가? 구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시장의 교환 기능은 이제 필요 없어졌다. 교환은 다 하니까. 신자유주의에서 시장은 그것보다는 경쟁의 장소가 된다. 가치냐, 균형이냐 하는 것 따윈 버려둔다는 것이다. 우리도 알지 않은가? 경쟁과 독점, 그 특권적 형식이 뒤범벅되어 있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때론 그 성공의 신화를 우러러보게 만드는 이 시대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민영화의 폐해를. 우린 그 위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직면할 수밖에 없다. 왜? 자유가 이미 강제됐으니까. 창업가의 사회다. 벤처. 그렇다. 여긴 벤처의 사회다. 용감히 도전하라. (그 뒤는 알아서 하라.) 이건 통치술의 효과다. 사회가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다고? 픽션일 뿐인데. 저자는 푸코의 입을 빌려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것은 픽션이기에 전복될 수 있다.


    규율적 생명정치. 실은 이것은 르장드르가 말한 의례 역사의 한 판본에 불과했다. 유럽의 판본. 푸코도 이를 깨닫고는 규율적 생명정치가 “거의 다 종교적 의례를 그 기원으로 한다.”(699쪽)고 수정했다. 이제 푸코는 새로운 권력이 나와 낡은 권력을 소멸시킨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여러 통치술이, 여러 장비가 마련된 역사의 도박장을 그린다. 그리고 이란혁명 때 시아파를 지지한 까닭에, 그 믿었던 이란이 끔찍한 사형을 연이어 실시한 까닭에 푸코는 엄청난 비난을 받지만 이미 깨달은 뒤였다. 낡은 것은 없다. 이슬람의 혁명적 힘을 가능케 한 그 종교의 빛이 정치무대에서는 사라져버림을.


    여기까지 온 푸코가 향한 곳은 저 먼 그리스였다. 사목 권력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제한 없는 복종을 강제하던 그 통치와는 다른 통치가 필요했던 까닭일까. 푸코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중시한 그리스·로마의 통치에서 철학과 영성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보고 잠시 고무되었던 것도 같다. 여기서 생존의 기법, 자기에의 배려, 자기도야=문화=숭배, 이런 말들이 나오며 사회적 실천과 국가 통치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곧 폐지한다. 그런 고대의 문화도 실은 트렌드였으며 처세술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저항과 혁명을 그것이 보증하던가? 그게 매니지먼트 문학과 뭐가 다른가? 자기계발이니, 정신세계이니. 이제 푸코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소격을 유지시키는 몽타주의 여부다. 그 장치가 있어야 원리주의가 아닐 수 있다. 르장드르와 벤슬라마가 다시 소환되며, 원리주의-종교의 명확한 구분 가능성이 언급된다.




*   *   *




    괄호와 결론과 보론. 『야전과 영원』의 후미를 이루는 이 세 개의 장에서 나는 다소 난잡한 형상을 목격했다. 지금도 그 광경 탓에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할 것 같은 심정을 강제로 달래는 중이다. 이렇게 글로 쓰면서. 괄호는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범한 실수와 이를 『천 개의 고원』의 서문에서 시인하는, 즉 그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모습이 묘사된다. 동요하는 자본주의에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제시된 그 분열병적인 미래주의, 혁명 프로그램은 실은 불가능했던 것임을. 오직 투쟁은 라캉의 ‘여성의 향락’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결론에서 다시 소환된 들뢰즈로부터 우리는 언표-가시성의 분리와 그 둘의 강제적인 조우를, 역사상의 우발적 형성과정을 듣게 된다. 이건 르장드르가 앞서 말했던 텍스트와 다르지 않다. 제 3자와 같다. 다이어그램, 기계, 장치, 몽타주 등으로 불리지만 가시성-언표의 이 관계는 잡다한 문맥에서, 잡다한 다이어그램에서 마구잡이로 (하지만 대단히 세심하게 고안된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가져와 섞어 구축되는 새 다이어그램의 정착을 보여준다. 그것이 소멸한다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옆으로 날아간다.”(767쪽) 이 표현이 딱 적절하다. 이미 존재했던 건물(가시성)이 범죄행위에 대한 언표와 조합되어 감옥이 되는 것은 ‘감옥 만들기’ 다이어그램에만 속하는 과정이 아니니까.


    저자는 이렇게 멀게 돌아온 이유를 여기서 말한다. 푸코와 르장드르와 들뢰즈와, 이 셋과 라캉의 물고 물린 비판의 구도는 “그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한 식탁을 준비하기 위해”(770쪽)서였다고 말한다. 무슨 식탁? 내부에서 내부를 만들어내는 <바깥>의 식탁. 창조라는 도박의 행위. 다이어그램의 새로운 고안. 아니, 그것보다는, 나는 이 표현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데, <밤>의 한복판에서 추는 텍스트와의 열광적인 춤 무대, 그 영원한 야전. 라캉을 빌리자면 바로 ‘여성의 향락’의 식탁. 소격의 진리를 견지한 자들이 펼치는 무한의 도박장. 그 역사를 본 것이다.




*   *   *




    그렇다면 과연 그 도박판에 뛰어든 사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가져다가 새 다이어그램을 만들고는 “새 시대가 열렸다!”라고 선언하는 식으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에 한해서 말하자면, 돈만 있으면 될 것이다. 사실 그 이상을 생각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푸코가 본 이상적인 도박 참가자는 따로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디오게네스를 가로지르는 사유에서 그가 건진 것은 견유학파다. 형이상학, 즉 다른 세계의 문제를 탐구하는 정신이 있다. 다른 하나는 ‘생존의 문체론’으로, 이는 삶의 다채로움을, 다른 삶의 문제를 본다. 들뢰즈를 봤으니 하는 말인데, 이는 가시성과 언표의 문제이니 서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견유학파는 이 둘을 동물성=단련으로 연결시켜버린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푸코가 ‘초역사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까지 이 견유학파를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전회였을까. 초역사적 견유학파. 어느 시대에나 있다는 그 개들. “진리를 난폭하게, 폭력적으로, 파렴치하게 표명하는 삶의 양태에 관한 사상”(796쪽)인 그것이 우릴 다른 삶으로 이끈다. 이 집요한 개들이. 저항의 초역사성이. 타자의 감시와 자기의 감시가 같은 개의 삶이, 반항하는 주권자인 개의 감시를 통해서 우리는 저 도박판에서 씻겨 나갈 뻔한, 수도 없이 그럴 뻔 했던 소격의 진리를 수호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주석과 후기를 끝으로 책을 덮었다.


    이건 무엇일까?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문자들을 타이핑하며, 그저 마음을 좀 달래보겠다는 심산으로 서문과 본문과 이 맺음말 사이의 하루 이틀 간격의 서어를 반복하면서, 인정하긴 싫은 마음이긴 하나 도박을 해온 것이란 말일까? 그렇다. 나는 다이어그램을 만들 줄 모른다. 뭘 내걸어야 상대와 승패가 걸린 역사의 한복판에서 서있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안심에 대해 굳이 변론해야겠다. 『야전과 영원』으로 갖게 된 새로운 눈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읽은 이들이 여기까지 나의 진흙탕길[泥路]을 따라와 줬다면, ‘무슨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는가?’라는 들리지 않는 질문에 나처럼 대답할 마음이 있지 않을까? 개처럼 살겠다고. 집요한 개로 <밤>을 살면서 텍스트와 영원한 <춤>을 추겠다고. 언젠가 이 말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오겠다는 심산으로, 아직 나는 어리다며 유보해본다. 나는 대체 어디로 초대된 것일까.





p.s 몇 가지 오타로 보이는 것이 있어 지적한다. ① 인명 표기의 오류다. Emmanuel Joseph Sieyès의 음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시에예스가' 579쪽에 나오고, 586쪽에는 '시에이예스'라고 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인명의 병기는 혼란을 줄 수 있다. 물론 시에예스든 시에이예스든 이 책에서는 딱 한 번만 짧게 나오지만. ② 집단명 표기의 아쉬움이 하나 있다. 보통 우리는 '수니파'라고 한다. sunnah에서 연원한다면 '수나파(703쪽)'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단명은 보통 'sunni'라고 한다. 더 엄밀히 표기하자면 '수니파'보다는 '수니 이슬람'이라고 밝혀주는 것이 더 좋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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