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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01호 여자 명주는 작업 중 얻은 다리 화상으로 직장을 잃고 병원비로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탕진한 후 홀로 지내시는 엄마와 같이 살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기를 보이는 엄마와 한바탕 싸우고 외출 후 돌아온 어느 오후, 햇살처럼 바닥에 길게 엎드려 죽음을 맞이한 엄마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의 약을 복용 후 자살을 시도했으나 깊은 잠 이후 깨어난 허탈한 그녀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킨 것은 엄마 전화기로 날아든 연금 알림 메세지였다. 기초 연금과 유족 연금을 합쳐 백 만원 가량의 돈을 한번도 부모로부터 지원 받지 못한 인생에 대한 보상이라 자족하며 엄마의 죽음을 유예하기로 한다. 그런 그녀에게 몰랐던 엄마의 연애 상대인 진천 할배와 김장까지 함께 하며 친분을 쌓았던 옆집 총각은 불안 요소로 다가오는데....
702호 남자 준성은 아버지의 뇌졸증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진학한다. 군대를 제대한 하나 뿐인 형은 아버지를 떠넘기고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치매마저 앓고 있는 아버지를 간병하며 20대 중반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고 있다. 설상가상 아버지가 화상으로 자리 보전하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자격증 시험마저 떨어진 날, 대리 운전하던 외제차를 손상시켜 직장을 잃고 합의금까지 종용 받는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진다. 화장실에서 아버지를 목욕시키다 사망 사고를 일으킨 날 702호 여자에게서 아버지의 죽음을 유예하고 아버지의 연금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그것이 아버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는데...
간병과 돌봄으로 무너져 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백세주에 소주를 섞어 오십세주를 만들어 마시며 백 세라는 삶이 먼 미래의 꿈 같은 일임을 비웃던 것이 엊그제의 일인데, 이제 백 세는 별 고민 없이 내뱉은 상투적인 나이가 되어간다. 백 세의 삶에 간병과 돌봄의 문제는 그림자처럼 따라 붙고 얽히고 설키고 뒤엉킨다. 뉴스에 나왔더라면 천하의 패륜으로 치부 될 이야기가 무언의 동조와 응원까지 얻어내는 것은 작가가 끌어가는 스토리 자체의 힘도 있겠지만 패륜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 아무도 자유스럽지 못한 사회가 되어버린 이유도 클 것이다. 글에 인용된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다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사회현상 이라고 부른다." 라는 문구처럼,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깊숙이 곪아가고 있는 감추어 지지 않는 치부이다. 그러기에 명주와 준성의 삶은 패륜일 망정 그래도 삶을 살아가라는 암묵적인 독자의 서글픈 지지를 얻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김서형 배우 주연의 <비닐하우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는 문정은 아들과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어느 노부부의 간병인 일을 한다. 노부부의 남편은 눈이 보이지 않고 아내는 치매를 앓고 있다. 어느 날 치매를 앓던 노인과의 실랑이 중 사고로 노인이 죽게 되고 신고하려던 찰나 엄마와 살고 싶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노인이 죽은 자리에 치매를 앓는 자신의 엄마를 들이게 되고 시체는 비닐하우스에 유기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은 아내가 아니라는 의심을 하지만 결국에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도 치매가 왔다고 착각하여 문정의 엄마와 동반 자살을 한다. 엄마의 죽음을 알아챈 문정은 그녀가 숨긴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아들이 친구들과 숨어든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비극의 소용돌이로 말려 들어가는 문정에 비해 명주와 준성은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또 다른 삶의 탈출구를 찾아 떠난다. 명주를 괴롭히던 원수같은 딸과 준성에게 모든 걸 떠넘긴 형이 그렇듯 정통적인 가족은 점점 해체되어 간다. 간병과 돌봄의 문제에서 이제 가족마저 튕겨져 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롭게 공범이 된 701과 702, 그리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나는 그들의 트럭에 몰래 올라탄 버림받은 치매 노인이 새롭게 가족을 구성하게 된다. 비루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이어진다.
- 어떡해요. 이 할머니?
준성은 명주 아줌마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우리 엄마 삼지 뭐.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