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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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01호 여자 명주는 작업 중 얻은 다리 화상으로 직장을 잃고 병원비로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탕진한 후 홀로 지내시는 엄마와 같이 살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기를 보이는 엄마와 한바탕 싸우고 외출 후 돌아온 어느 오후, 햇살처럼 바닥에 길게 엎드려 죽음을 맞이한 엄마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의 약을 복용 후 자살을 시도했으나 깊은 잠 이후 깨어난 허탈한 그녀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킨 것은 엄마 전화기로 날아든 연금 알림 메세지였다. 기초 연금과 유족 연금을 합쳐 백 만원 가량의 돈을 한번도 부모로부터 지원 받지 못한 인생에 대한 보상이라 자족하며 엄마의 죽음을 유예하기로 한다. 그런 그녀에게 몰랐던 엄마의 연애 상대인 진천 할배와 김장까지 함께 하며 친분을 쌓았던 옆집 총각은 불안 요소로 다가오는데....


702호 남자 준성은 아버지의 뇌졸증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진학한다. 군대를 제대한 하나 뿐인 형은 아버지를 떠넘기고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치매마저 앓고 있는 아버지를 간병하며 20대 중반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고 있다. 설상가상 아버지가 화상으로 자리 보전하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자격증 시험마저 떨어진 날, 대리 운전하던 외제차를 손상시켜 직장을 잃고 합의금까지 종용 받는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진다. 화장실에서 아버지를 목욕시키다 사망 사고를 일으킨 날 702호 여자에게서 아버지의 죽음을 유예하고 아버지의 연금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그것이 아버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는데...


간병과 돌봄으로 무너져 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백세주에 소주를 섞어 오십세주를 만들어 마시며 백 세라는 삶이 먼 미래의 꿈 같은 일임을 비웃던 것이 엊그제의 일인데, 이제 백 세는 별 고민 없이 내뱉은 상투적인 나이가 되어간다. 백 세의 삶에 간병과 돌봄의 문제는 그림자처럼 따라 붙고 얽히고 설키고 뒤엉킨다. 뉴스에 나왔더라면 천하의 패륜으로 치부 될 이야기가 무언의 동조와 응원까지 얻어내는 것은 작가가 끌어가는 스토리 자체의 힘도 있겠지만 패륜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 아무도 자유스럽지 못한 사회가 되어버린 이유도 클 것이다. 글에 인용된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다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사회현상 이라고 부른다." 라는 문구처럼,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깊숙이 곪아가고 있는 감추어 지지 않는 치부이다. 그러기에 명주와 준성의 삶은 패륜일 망정 그래도 삶을 살아가라는 암묵적인 독자의 서글픈 지지를 얻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김서형 배우 주연의 <비닐하우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는 문정은 아들과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어느 노부부의 간병인 일을 한다. 노부부의 남편은 눈이 보이지 않고 아내는 치매를 앓고 있다. 어느 날 치매를 앓던 노인과의 실랑이 중 사고로 노인이 죽게 되고 신고하려던 찰나 엄마와 살고 싶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노인이 죽은 자리에 치매를 앓는 자신의 엄마를 들이게 되고 시체는 비닐하우스에 유기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은 아내가 아니라는 의심을 하지만 결국에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도 치매가 왔다고 착각하여 문정의 엄마와 동반 자살을 한다. 엄마의 죽음을 알아챈 문정은 그녀가 숨긴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아들이 친구들과 숨어든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비극의 소용돌이로 말려 들어가는 문정에 비해 명주와 준성은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또 다른 삶의 탈출구를 찾아 떠난다. 명주를 괴롭히던 원수같은 딸과 준성에게 모든 걸 떠넘긴 형이 그렇듯 정통적인 가족은 점점 해체되어 간다. 간병과 돌봄의 문제에서 이제 가족마저 튕겨져 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롭게 공범이 된 701과 702, 그리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나는 그들의 트럭에 몰래 올라탄 버림받은 치매 노인이 새롭게 가족을 구성하게 된다. 비루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이어진다.

       

- 어떡해요. 이 할머니?

준성은 명주 아줌마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우리 엄마 삼지 뭐.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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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8-14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그맨 안성영이 자녀 교육때문에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낸고 캐나다로 간다는 기사가 나자 많은 이들이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분기탱천 했는데 이런 사람들은 아마도 집에서 노인 병수발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사람들 일 겁니다.
치매나 건강상의 이유로 거동 못하는 노인들을 집에서 간병한다는 것은 웬만한 지극정성이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집에서 24시간 노인 간병을 한다는 것은 힘든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시간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죠.그래서 집에서 노인을 돌보는 개인 간병사의 월급이 3~4백만원을 하는 이유입니다(이분들도 주 6일만 근무함)
요양원 그중에서도 요양병원에 노인들은 모시는 경우는 대게는 집안 형편이 가능하기 떄문이지 가난하면 비용부담으로 요양원(보통 한달 백만원내외)에 모시는 것을 꿈도 못꾸는 사람이 많지요.
노인들의 간병과 돌봄은 개개인에게 맞길 일이 아니라 이제는 복지차원에서 국가가 떠 맡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잉크냄새 2025-08-14 20:44   좋아요 0 | URL
지금 그 개그맨의 일화가 소개된다면 아마 그렇게 분기탱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네요. 십여년 전만 해도 요양병원으로 보낸다는 것은 합법적인 유기나 현대판 고려장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지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죠. 그런 의미에서 간병과 돌봄의 문제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 복지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간병과 돌봄의 문제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안락사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감은빛 2025-08-17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네요. 사회현상이 되어버렸군요. 돌아가신 엄마의 연금으로 살았던 사람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들었던 기억이 나요.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도 생각나고요.

[비닐하우스]라는 영화가 이런 내용이었군요.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사실 저도 가장 무서운 일이 바로 아픈 가족의 간병과 돌봄입니다. 제 주위에 부모님 돌봄 때문에 꼼짝도 못하는 지인들이 몇 분 계시거든요. 이거 거의 감옥이나 다름 없는 것 같아요. 몇 년째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더라구요.

잉크냄새 2025-08-17 11:22   좋아요 0 | URL
요즘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간병과 돌봄의 문제이고 그들이 겪는 우울증 등 정신의학적 측면도 지속적으로 부각되고 있더군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국가 복지 차원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비닐하우스>는 우울하면서도 안타깝고 서글프고, 좀 복합적입니다. 꼭 보시길...

페크pek0501 2025-08-18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다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사회현상 이라고 부른다.˝ 라는 문구. 이 문구를 보니 <플랜 75>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 75세 이상의 노인들을 죽게 만드는 사회를 그린 영화인데 저도 유튜브로 설명만 들었는데도 섬뜩하더군요. 우리의 미래, 일 것 같기도 하고요. 누구나 노인이 되고 누구나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되는 날이 온다는 것, 기억해 놓을 일입니다.^^

잉크냄새 2025-08-18 21:46   좋아요 0 | URL
일본 영화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 그런 영화의 출현이 영화적인 상상일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 마주하게 될 세대갈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직면한 문제를 외면하고 무시하면 어떤 식으로든 분출되고 터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힐 2025-08-2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매, 노인, 돌봄, 요양원 같은 단어가 이제는 친숙해지는 나이가 되었네요.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 했었는데... 저도 비루하지만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 아카바는 국경 도시라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홍해 반대편 불빛은 이집트의 카바 항구로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유일한 항구이다>


이집트로 넘어가는 국경도시인 아카바에 도착한 것은 해질녘이었다. 하루만 머물 예정이었으므로 대충 숙소를 잡고 밖으로 나섰다. 국경의 밤은 뭔가 화려했다. 휘황찬란한 화려함이 아닌 자유로운 화려함이랄까. 다른 중동의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으면서도 뭔가 자유로움이 선사하는 발랄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주류판매점에서 양주를 두 병씩 샀다. 이집트에는 술을 사기 힘들다는 정보(나중에 알고 보니 엉터리였다)를 듣고 두 명의 일행과 함께 총 여섯 병을 샀다. 숙소에 도착하니 숙소 주인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인당 한병이라기에 버릴 수는 없고 3층 베란다에서 각자 한병씩을 마셨다. 동행한 두 명은 세계 여행이 삼년째 접어든 여행 고수 청년과 영국 유학후 육로로 귀국길을 선택한 여대생이었다. 배낭여행 삼개월차인 내가 제일 초보였는데 셋이 합이 잘 맞아 다마스커스부터 이 곳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도심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가지 자리는 이어졌다.


<숙소 베란다에서 술 마시며 바라본 아랍 거리, 술 문화가 없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이다>


아카바를 떠나 홍해를 건너 이집트 뉴웨이바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늦잠 때문에 서둘러 떠난 택시에서 바라본 에머랄드빛 바다와 푸르다 못해 멍든 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쾌속선을 기다리는 시간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한 햇살 속에 아직 가지지 않은 숙취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따리 장수를 연상케하는 수 많은 이집트인들 뒤로 페리에 올라타니 홍해의 푸른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람도 쐬고 술도 깰 겸 두 팔 벌려 타이타닉의 My heary will go on을 하러 뱃머리로 나가니 운행중 갑판에 있을 수 없다고 객실로 모두를 밀어 넣었다. 갑갑한 객실은 만원이었는데 숙취와 객실 가득 피어오르던 향신료 향에 없던 배멀미도 올라올 지경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어느덧 뉴웨이바에 도착해 있었다.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니 옆에서 빤히 바라보던 이집트인이 새우깡 비슷한 걸 건네주어 먹었는데 향신료 범벅이었다. 


뉴웨이바 입국 관리소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외국 여행객이 많지 않아 수속 순서는 금방 찾아왔다. 일행이 먼저 수속을 마치고 뒷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비자 발급 심사원 앞에 서서 여권을 건넸다. 여권의 사진을 보고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고 나도 최대한 미소를 짓기 위해 입고리를 올리는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 큰 덩어리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배낭을 둘러멘 채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출입문을 거칠게 발로 걷어차고 달려나갔다. 폼으로 배낭에 매단 스테인레스 커피잔과 호신용 호루라기가 부딪혀 비명 소리보다 날카로운 금속음을 질렀고 "형님, 뛰지 마"라는 일행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어도 내 눈에는 출입구의 창문을 통해 어두운 복도를 비추던 햇살만이 보였다. 롱테이크 샷을 찍듯 어지러이 흔들리던 햇살이 열리며 드디어 그 햇살 속으로 전속력으로 뛰어들었고 파전 한 조각을 급하게 토해내었다. 숙취와 배멀미와 향신료의 절묘한 콜라보이다. 눈물로 촉촉해진 충혈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총을 멘 채 뒤따라온 군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다른 이유로 놀라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과 얼마전 고란 고원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지역이었다.

<이집트 다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이다.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18m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서 장롱에 처박아 두고 있다>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눈물을 훔치며 다시 그 앞에 섰다. 사실 비자 거부 사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러운 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뭐라 하겠는가. 후회가 밀려왔다. 왜 하필 당신 앞에서인가. 반성하는 의미로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으니 한참을 바라보다 여권에 비자를 붙여주었다. 아, 그는 개인의 자존심보다 국가의 관광 수입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였던 것이었다! 왠지 같은 나라 국적임을 밝히기 싫어하는 것 같은 동행들과 다합으로 향했다. 뉴웨이바에서 승합차에 오른 순간부터 다음 날 잠에서 깰 때까지 기억이 없다. 기억이 돌아온 건 다음날 다합의 게스트하우스였다. 악몽을 꾼 듯 시트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여행후 처음 찾아든 몸의 아우성이었는지 단순한 숙취였는지 지독한 배멀미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 뇌가 쪽팔림에 스스로를 봉인해버린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는 여전히 암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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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5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날 먹은 술과 배멀미와 향신료 냄새들이 합쳐진 결과겠죠. 어쨌든 진짜 당황하셨을듯.... 뒤따라온 군인이 더 섬뜩합니다. 그래도 하루의 기억과 무사함을 바꿨으니 다행이지요.

잉크냄새 2025-08-07 20:43   좋아요 1 | URL
뒤따라온 군인은 그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떠올려보니 제가 동양인이 아니라 아랍인이였으면 위태로운 상황까지도 발생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화약고니까요.

transient-guest 2025-08-06 0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대생에서 뭔가 훈훈한 이야기를 기댔고 가슴속에서 뭔가 차올라왔다는 부분에서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땅에 들어가는 벅찬 감동을 기대했는데 말입니다.ㅎㅎㅎ 89년 냉전이 끝나고부터 2001년 9-11 이전까지의 10년 정도가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았던 시기라고 지금 와서 보니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도 뭔가 90년대스러움이 느껴져서 갑자기 생각해봤습니다.ㅎㅎ 양주 한병을 다 마셨다는 건 일단 꽤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해서요.

잉크냄새 2025-08-07 20:51   좋아요 1 | URL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 여대생은 저를 오라버니라고 깍듯하게 부르곤 했습니다. ㅎㅎ
여행도 시절마다 제각각의 장단과 매력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과거가 여행으로서는 더 매력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불편함,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인간미, 정보의 부재로 획일화되지 않은 여행 루트 등... 요즘 여행은 뭔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느낌입니다.
양주 한병을 나발불던 저때는 2009년 금융위기때입니다. 덕분에 퇴직금을 시원하게 날렸죠. ㅎㅎ30대에 배낭여행을 하고자 퇴사하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transient-guest 2025-08-08 01:59   좋아요 1 | URL
30대라면 양주 한병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네요.ㅎㅎ 2009년이면 한창 남의 밑에서 고생하던 시절이네요.. 그때만 가능했을텐데 전 여행을 거의 못한 것에 대한 후회아닌 후회가 있어 제 soft FIRE이후 10년은 여행을 많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잉크냄새 2025-08-08 18:45   좋아요 1 | URL
soft FIRE이후의 여행 이야기는 길손님이 올려지시면 되겠네요. ㅎㅎ 기대합니다.

마힐 2025-08-08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날, 자유로운 화려함이... 다음 날, 자유로운 부교감 신경으로 다채롭게 활동하게 했군요. ㅎㅎ
너무 재미 있어요. 여행기 계속 연재 부탁드립니다. _()_

잉크냄새 2025-08-08 18:48   좋아요 1 | URL
아주 창자까지 속속들이 내보인 기분입니다. ㅎㅎ
여행기는 느리지만 꾸준한 발걸음으로 하나 하나 채워가볼까 합니다. 마힐님의 응원이 필요해요. ㅎㅎ

카스피 2025-08-09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르단 여행을 가셨다니 넘 부럽습니당.제 친척분도 현재 이집트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데 요즘같은 더위면 그냥 회사 때려치고 한국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가족 생각하면 그럴수 없다고 한탄하시더군요.사진을 보니 요르단도 무척 더워 보이네요^^

잉크냄새 2025-08-10 14:09   좋아요 0 | URL
오래전 이야기를 지금에야 풀고 있습니다. 요르단은 사막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전 새벽녘에 추웠던 기억만 나네요. ㅎㅎ

감은빛 2025-08-17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 큰일날 뻔 했네요. 숙취와 배멀미와 향신료까지. 글 읽으면서 술도 안 마신 저까지 숙취가 느껴질만큼 공감했습니다. 총까지 들고 따라온 군인의 인내심이 고맙네요. 어휴!

잉크냄새님의 이야기들이 정말 재미있네요. 다음 이야기도 기대합니다.

잉크냄새 2025-08-17 11:17   좋아요 0 | URL
총 이야기도 언젠가 한 번 정리해봐야겠어요. ㅎㅎ 군대에 예비군 7년까지 꽉꽉 채운 한국 여행자가 총에 대하여 얼마나 무던한지를... 일례로 인도 파키스탄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에 가장 많이 가는 여행자가 한국과 이스라엘 국적이라고 합니다. 군대가 의무인 두 나라...

여행 이야기는 응원에 힘입어 한 달에 한 번은 정리하려고 노력중입니다. ㅎㅎ
 

윤기가 돌다. 윤기가 흐르다. 윤이 나다. 윤은 가만히 정체하는 빛이 아니라 흐르고-돌고-드러나는 ‘활동성의 빛’이다. 또한 반드시 물체의 표면에 나타나기에 ‘의존적인 빛’이기도 하다. 즉 빛 자체가 윤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 윤은 ‘존재를 떠받치는 밝음’이란 것. 일반적으로 빛이 (전구나 노을, 혹은 영사기처럼) 특정한 중심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뿜어져나오는 데 비해, 윤은 사물의 표면에 고루 퍼진 채 공평하게 드러나는 ‘안온한 빛’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엉덩이 덕에 반들거리는 툇마루처림. -p175-






국민학교 6학년 교실은 오래된 목조 건물 3층이었다. 양쪽으로 목조 계단이 있었고 2층은 교무실로 3층은 6학년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교장실은 2층 복도 바로 옆에 자리해 있었다. 교실 바닥과 복도는 오랜 세월 세대를 이어 닦고 닦아 반짝반짝 윤이 났고 김연아의 트리플 엑셀이 가능할 만큼 미끄러웠다. 목재 바닥의 윤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동 노동(?)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준비물로는 실과 시간에 직접 바느질해 만든 내복 재질의 걸레, 방앗간에서 얻어온 바카스 병에 담긴 들기름 찌꺼기, 그리고 새하얀 양초가 필요했다. 줄을 맞춰 앉아 바닥에 초를 칠하고 걸레에 기름을 묻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닦아 나간다. 1조가 가면 2조가 뒤를 잇고 걸레가 놓친 부분은 무릎팍이 다시 한번 닦아내어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고 지나간다. 어느새 교실과 복도는 들기름의 향긋한 내음과 걸레의 꼬릿한 냄새가 환상적으로 섞인 신비스러운(?) 향으로 가득 찬다.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숙제 검사라도 하듯 바닥 검사를 실시하면 은은한 바닥에서 끄물거리던 눈부심과 햇살 속에 가볍게 피어오른던 먼지의 은하수 길이 시작되곤 했다. 하교길에는 계단에 앉아 엉덩이 미끄럼을 타며 내려갔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 엉덩이를 견뎌냈는지 계단 목재의 모서리는 둥글게 둥글게 변형되고 엉덩이 골을 따라 움푹 파여 있었다. 교장실에서 소리를 치며 나온 교장 선생님이 대머리였던 건 윤기로 떠오른 이 기억의 화룡점정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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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8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따뜻한 글. 읽으며 입에 절로 웃음이 맺히네요.

잉크냄새 2025-07-29 21:46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도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계신 듯 싶네요.
가끔은 이리 낡고 희미한 기억들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카스피 2025-07-28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국민학교 시절 학생들은 청소시간에 왁스나 양초로 바닥이 윤이나게 닦았다고 하더군요.만일 요즘 그랬다간 민원이다 뭐다 생 난리가 났을 겁니다ㅡ,.ㅡ

잉크냄새 2025-07-29 21:47   좋아요 0 | URL
네 그 아동 노동의 산 증인이 접니다. ㅎㅎ

감은빛 2025-07-29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덧이름 감은빛은 반질반질 윤이나는 검은 색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뜨다 감다의 그 감은 빛으로 빛을 감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이 덧이름으로 페이스북을 사용한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어느날 실명으로 감은빛이란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연락을 해와서 놀랐던 적이 있어요. 그분은 아마 저도 실명일거라고 생각하고 연락을 했을텐데, 저는 실명이 아니라고 밝혀서 실망을 안겨드려 안타까웠습니다.

잉크냄새 2025-07-29 21:51   좋아요 0 | URL
가끔 감은빛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네요. 그런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었군요. 그래서 님의 글이 윤이 나는 것들처럼 평안해 보이는가 봅니다.

transient-guest 2025-07-29 23:38   좋아요 1 | URL
순우리말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용‘을 뜻하는 우리말이 ‘미르-남자‘ ‘미리-여자‘라고 알고 있는데 혀에 착착 감기는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 2025-07-31 22:30   좋아요 1 | URL
미르가 용의 순우리말이군요. 그럼 미르의 전설이 수컷용의 전설인거죠?

transient-guest 2025-08-01 06:27   좋아요 0 | URL
그 미르는 어떤 의미로 사용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용‘의 전설에 아마 남자격을 넣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전 그것도 해본 적이 없네요. ㅎㅎㅎ

마힐 2025-07-30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시절, 유리창 청소도 있었잖아요. 창 틀에 앉아 메리야스로 만든 걸레로 빡빡 닦았었는데... 걸레 없는 친구는 자기 양말 한 쪽 벗어서 닦고 그랬어요. ㅎㅎ 이제는 아동 노동 했던 시간도 그리워 지네요.

잉크냄새 2025-07-31 22:32   좋아요 0 | URL
아, 메리야스...ㅎㅎ 역시 유리창은 내복보다 메리야스가 잘 닦였죠.
 


알라딘이 오픈한 시기가 1999년 7월이고 금년이 26년 째이다. 꽤 오랜 역사 속에서 내가 첫 주문한 것이 1999년 12월이니 가히 알라딘 시조새라 할만 하겠다. 그때 구입한 두 권중 <안개 속에는 그리움뿐이다> 라는 시집은 여전히 책장에 꽂혀있다. 또 다른 책은 주식 관련 책인데 아마도 주식 날려 먹고 그 분노를 책에게 풀어버린 것인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하고 허접하나마 글을 쓰는 곳이 이 곳 뿐이니 오래도록 장수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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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18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9년도 가입자라시나 정말 알라딘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으시네요.많은 분들이 서재에 계시다가 떠나가셨는데 26년이란 참 대단하십니다^^

잉크냄새 2025-07-18 22:35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도 시조새가 아니신지요? 전 귀차니즘에 젖어 있는지라 그 동안 많은 우여곡절에도 그냥 찐득하니 여기 눌러 앉아 살고 있네요. ㅎㅎ
아, 문득 26년 동안 스치고 지나간 분들의 안부를 묻고 싶어지네요.

감은빛 2025-07-28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99년 구매내역 인증이군요. 이 화면은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저는 언제 알라딘에 가입하고 책을 샀나 궁금해서 찾아보니 2004년이네요.
그보다 2년 어쩌면 3년 전인 2001년이나 2002년에 누군가가 제게 알라딘을 알려줬었죠.
알라딘을 알면서도 가입을 미뤘던 것은 책은 동네서점에서 사야지 하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어요.

아마 2004년에 알라딘을 가입하고 책을 사기 시작한 것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으면서 익숙하던 동네 서점들을 더는 갈 수 없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잉크냄새 2025-07-28 21:12   좋아요 0 | URL
알라딘 메인화면에서 26주년 클릭하고 당신의 기록 이란 항목 클릭하면 26년 동안의 개인 기록이 정리되어 나타납니다.

저도 처음 인터넷 서점에 대하여 그런 반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회사 기숙사가 시내랑 좀 떨어져 있어 편의상 알라딘에서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발점인듯 합니다.

transient-guest 2025-07-29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저도 해봤습니다. ㅎㅎ 거의 초기에 시작하셨네요.

잉크냄새 2025-07-29 21:44   좋아요 1 | URL
네, 어찌하다보니 거의 알라딘과 궤를 같이하게 되었네요. ㅎㅎ
 

이란 테헤란 공항은 페르시아 문명이 지닌 역사적 무게에 걸맞지 않게 낙후된 느낌이었다. 국경 비자 발급은 중동 특유의 느릿한 행정으로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출장지에서 픽업 나온 택시는 예전 중국의 드럼통 택시를 연상시키듯 낡고 위태로워 보였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택시는 테헤란 외곽도로를 따라 우회하여 북서쪽 황무지로 들어섰는데 쿠션과 서스펜션이 거의 망가진 듯 도로 표면의 윤곽을 엉덩이와 척추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출장지는 그런 황무지를 세 시간 달려 북서쪽 어느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이란은 경제 제재가 풀린 후로도 대금 지불 문제로 수출길이 열리지 않는 중동의 매력적인 시장이다. 주요 기술 선진국과의 경제 교류가 막힌 상황에서 금융 제재를 피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이 부상했고 마침 중국 법인을 가진 회사들이 중동과의 협업이 가능해졌다. 출장의 목적은 1DIN 오디오 품질확보방안을 고객사 사장에게 브리핑 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자체 기술력이 부족한 고객사에 기술 교육 및 불량 수리를 지원하기 위하여 엔지니어와 연구원을 대동한 자리였다. 관세 문제로 완제품이 아닌 SKD(Semi-completed Knock Down)방식의 수출이 이루어져 제품 수출에 비해 불량이 높은 상황이었다. 


고객사 사장은 중동 특유의 이목구비 뚜렷한 인상의 덩치 큰 남자였는데 기름 왕자 특유의 느끼함을 지니고 있었다. 첫 면담 자리에서 환전을 도와준다며 테헤란부터 동행한 운전사를 불렀다. 사장보다 더 덩치가 큰 그에게 육백 달러를 건네고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으니 한참 후 돌아온 운전사가 작은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그때는 중국이나 중동이나 회사간 선물 증여가 당연한 시절이었다. 중국에서는 차를, 중동에서는 파스타치오가 들어있는 실타래처럼 둘러싸인 과자를 서로 교환하던 때이다. '출국할 때 주지, 벌써 주나' 싶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돈이 한가득이다. 순간 돈 액수가 너무 많아 보여 뇌물로 착각하여 손사래를 치니 기름 왕자가 '저 자식 케밥을 잘못 먹었나'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환전해 온 돈이라며 웃었다. 그 당시 환율이 1달러당 32,000리알이었는데 이란은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다르게 작동하여 저 정도의 돈이면 아마도 시장 환율로 환전한 모양이었다. 다음날부터 난 일수 아줌마처럼 노트북과 노트를 다 빼 치우고 돈만 가방에 넣고 숙소와 출장지를 오갔다. 노트북 가방보다 조금 큰 가방은 터질 듯 옆으로 배를 불룩 내밀고 있었다.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케밥 정식으로 먹은 날 계산대에서 가방을 열고 백만 단위가 넘는 돈 (그래봐야 40달러 남짓) 을 세어 넘겨주었는데 왠지 만수르가 된 느낌이었다. 괜히 어깨에 뽕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높아졌다. 

<육백달러의 마법>


기름 왕자는 나에게 주로 자신 회사의 앞으로의 비젼에 대하여 말하길 좋아했는데 그와 놀기에 내 영어가 짧아 주로 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현장에는 현장 사무실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한 구석에 책상과 회의 테이블로 구성되어 있었고 불량 수리 및 교육도 현장 사무실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첫 날 라인 휴식 시간이 되어 작업장을 벗어나 담배를 피우러 가려고 하니 현지 관리자가 만류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앉아 있으니 현장 출입구에서 백색 벨보이 복장을 정식으로 갖춘 말끔한 이란 남자가 쟁반을 받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듯한 백색의 은쟁반에 날씬한 곡선을 자랑하는 콧대 높은 주전자와 본차이나 임을 한껏 자랑하며 반짝이는 찻잔에 파스타치오를 실타래같은 것으로 둘러싼 과자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기름 왕자가 선사하는 이벤트일 것이었다. 10분간의 휴식 시간동안 옆에서 차 시중을 들던 벨보이는 그 이후로도 매일 오전 오후 한 차례씩의 휴식 시간마다 나타나 어색한 차 시중을 들다 사라졌다. 사실 현장 관리 측면에서 조언해야 할 일이었지만 기름 왕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이라 그냥 며칠 동안 만수르가 되기로 했다. 만수르처럼 '후루록' 소리도 내지 않고 우아하게 달큰한 홍차를 마셨다.  


아마 사람이 돈에 대해 품는 어떤 가치는 그 절대치에도 영향을 받지만 부피나 무게처럼 시각적인 영향도 무시 못하는 것 같다. 출장 기간이 1주일인 직원들을 남겨놓고 3일후 먼저 귀국했는데 아직 절반이 넘는 돈을 넘기는 게 왠지 아쉬웠다. 어깨 끈 위에 올려졌던 묵직한 돈의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p.s)이 글을 쓰며 이란 리알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니 현재 달러당 공식환율은 42,000리알 시장환율은 백만리알이 넘는다고 한다. 사진보다 30%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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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09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휴전중이지만 이스라엘과 대치중인데 이란에 다녀오셨는지요? 아님 예전에 다녀오신 글인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테헤란이 쑥대밭이 되었다는데 하루 빨리 원래 모습을 되찾길 바랍니다.

잉크냄새 2025-07-09 19:37   좋아요 0 | URL
2016년 중국 근무할 때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네타냐후나 트럼프 같은 전쟁 미치광이들이 있는 한 중동의 평화는 요원해 보입니다.

transient-guest 2025-07-10 0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에서 일하셨던 건 전에 쓰신 글에서 알고 있었는데 출장도 많이 다니셨나 봅니다.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은 인도-중국-터키와 함께 고대문명의 흔적들, 그리고 이후 서구와는 다르게 발전했던 나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늘 궁금합니다. 다 파괴되고 사라지기 전에 다녀보고 싶습니다. 제가 잠시 일을 도왔던 그쪽 나라 고객이랑 밥을 먹으면 늘 아주 달디 단 차를 마시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잉크냄새 2025-07-10 20:52   좋아요 1 | URL
중동 지역도 여행지로서 매력적인 곳이라고 들었어요. 전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만 돌아서 중앙아시아는 출장으로 다녀온 이란 말고는 가본 적이 없네요. 언젠가 인도-파키스탄을 기점으로 중앙아시아를 관통해서 터키로 넘어가는 길을 걸어보고 싶네요.

transient-guest 2025-07-11 01:49   좋아요 1 | URL
저는 일차 FIRE되면 미국 횡당, 서부 종단열차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남북이 연결되어 대륙으로 철도길이 열리면 부산에서 유럽까지 기차를 타고 가보고 싶은데 살아생전엔 어떻게 가능할 수도 있다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잉크냄새 2025-07-12 21:54   좋아요 1 | URL
미국 대륙 횡단은 예전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한동안 꿈꾸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네요. 포데로사를 타고 떠난 체 게바라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보는 남미 여정과 켈커타로 들어가 인도 내륙을 돌아보는 인도 여정은 꼭 해 보고 싶네요.

감은빛 2025-07-28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많은 돈을 갖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
말씀처럼 만수르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네요. ㅎㅎㅎㅎ
근데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차이가 난다는 것은 독특하네요.
뭔가 이유가 있을테고, 누군가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그 이유까지 궁금해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해외에서 근무하신 것도 독특한 이력일텐데, 여러 나라로 출장도 많이 다니셨군요.
이런 옛날 이야기들 너무 재미있어요. 자주 올려주세요.

잉크냄새 2025-07-28 21:17   좋아요 0 | URL
007 가방을 든다면 모를까 일반 가방에 저 정도 부피면 많이 불편합니다. ㅎㅎ

저도 잘 모르지만 사회가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공식환율과 시장환율이 차이가 큰 것 같아요. 요즘 볼리비아도 환율 차이가 많이 나는 것 봐서는 그런 연관성이 큰 것 같습니다.

업무보다는 여행으로 겪은 일이 더 많죠. 가끔 풀어보려고 노력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