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닌데 사내의 방에 가지 않았다

간다 하고 가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지,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셔츠 끝단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다 듣고 겨우 누웠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라 생각하였지만

끌어다 덮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였다



------------------------------------------------------------------------------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된다고 안치환은 노래하였다. 굴하지 않고 비껴서지 않으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정호승은 말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근데, 외로움에 우뚝 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이들에게 더 애착이 갈 때가 있다. 열흘 남짓 열리지 않던 옆방 문소리에 머뭇머뭇 다이얼을 돌렸을 사내의 손떨림이라든지, 그 손떨림을 너무 잘 알면서도 외로움이 들켜버릴까 살며시 이불을 끌어 덥는 사내의 미안함이라든지, 두 사내 누구에게도 선뜻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그냥 외로움에 전염되어 버리는 독자라든지.... 외로움의 쓰리쿠션이 천장을 맴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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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5-04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병률 시인의 시집을 갖고 있는데 이 시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좋은 시가 많이 담겼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이란 표현이 참 좋네요...

잉크냄새 2025-05-05 23:28   좋아요 0 | URL
<바람의 사생활>에 수록된 시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병률 시인의 시집중 <바람의 사생활>이 제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5-05-08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행이 좋네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다는 느낌은 저도 가끔 느낍니다.

그리고 잉크냄새님의 마지막 말씀도 인상적이예요.
외로움의 쓰리쿠션이 천장을 맴돌다니.

어느 출장지의 허름한 여관 방에 머물렀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잉크냄새 2025-05-08 20:13   좋아요 0 | URL
시에서 여관을 모텔로 바꾸면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요. 여관만이 지니는 낡고 어둡고 눅눅한 감성이 있잖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예전에 묵었던 어느 허름한 여관방이 떠올랐어요. 지저분한 이불을 덥고 누우면 천장에 쓰리쿠션으로 떠오른던 상념들...아마 외로움도 한 쿠션 했을 겁니다.
 
사로잡는 얼굴들 -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은 생추어리 동물들의 초상
이사 레슈코 지음, 김민주 옮김 / 가망서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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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사람의 인생을 축약한 줄임말로써 쓰여진 단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삶을 인간의 범주로 한정하고 생명 가진 모든 존재에게도 삶이 존재할 것이란 생각을 오래도록 하지 못했다. 인간이 동물에게 삶을 부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고통과 쾌락의 유무였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이성의 시대에도 이성은 오히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척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고통을 느낀다.' 어쩌면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 대한 번민에서 비롯된 자기 합리화였을 수도 있다. 벤담과 다윈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성과 별개로 동물도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각인되기 시작했고 동물권과 동물 복지 등 현대적 의미의 권리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인간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동물을 반려, 실험, 축산동물로 구분해보자. 반려 동물은 아직도 학대와 파양의 문제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삶을 보장받으며 권리와 복지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실험 동물도 부족하나마 고통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며 불필요한 실험의 근절과 인공 피부 등 대체 실험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느린 걸음이나마 그 첫 발은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축산동물은 아직도 요원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앞에 그들의 권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제품으로서 인식되기에 그들에게 늙음은 사치고 낭비이며 비효율이다. 사료값으로 대변되는 재료비와 미식으로 포장된 식탐 앞에 그들은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저 단기간에 살찌우기가 목표인 제품으로 인식된다. 


이 책에 소개되는 동물들은 대부분 축산동물이다. 우연찮게 도살의 위기에서 벗어나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게 된 동물들의 초상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죽음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던 사진작가 이사 레슈코는 마침내 늙음을 맞이한 그들에게서 인간과 같은 삶의 존엄을 느끼고 카메라를 들었다. 그들의 삶을 존중해 그들이 삶의 안식처를 허락하기 전까지, 그들과 같은 눈 높이로 같은 장소에서 생활하며 곁을 내어줄 때까지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들이 눈빛으로 곁을 허락한 순간 자연광에 의지하여 그들의 늙음을 카메라에 담아 내었다. 그들에게도 늙음은 삶의 축복이었다. 허락되지 않던 늙음을 간직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고통과 쾌락 외에 그들의 삶에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늙음.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들도 늙어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 가진 것들은 늙어갈 권리가 있다.  


어떤 동물도 지각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우리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지각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개별성과 고유성이 있는 존재로서 지능과 감정을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지능과 감정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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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4-23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동물들은 늙어 갈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죠. 동물 학대를 금지해야 한다면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어요...

잉크냄새 2025-04-24 19:28   좋아요 0 | URL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고기로 인식되기에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거죠.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앞으로도 어려운 문제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동물학대의 문제는 육식의 문제와 별개로 동물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이지 싶습니다.

감은빛 2025-04-24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참 좋아요! 어제 아침에 읽고 뭐라고 남길까 하고 잠시 고민하는 틈에 갑자기 일이 몰아치기 시작해 밤 늦게까지 다시 알라딘에 들어올 틈을 주지 않더라구요.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새벽이 생츄어리를 비롯해 여러 생츄어리가 만들어지거나 준비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동물권이란 주제에 대해 좀 더 많은 고민과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잉크냄새 2025-04-24 19:25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도 새벽이 생추어리가 언급됩니다. 한국어판이 나올(22년 초판) 당시 한국에는 새벽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더 추가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 책을 읽으며 동물권과 동물 복지가 다른 의미라는 걸 알았어요. 성차별 이후 마지막 남은 차별이 종차별이라고 하네요. 종차별의 극복이 동물권의 완성이겠죠. 쉽지 않은 문제지만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네요.

transient-guest 2025-04-29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은 현실대로 개선해나가고 (사실 모두가 채식을 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되므로) 다만 개인이 또는 단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골과 도시,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등 의식수준의 차이는 결국 현실에서 오는 것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갖추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잉크냄새 2025-04-29 21:52   좋아요 0 | URL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동물권과 동물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전 그 조롱이 양비론이라고 생각해요.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고민하는 것은 채식이든 육식이든 어떤 경우에도 필요하니까요.

transient-guest 2025-04-30 10:00   좋아요 1 | URL
저는 그저 고기를 덜 먹고 동물을 아끼는 것이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앞으로는 반려동물도 보호소에서 입양하지 않으면 키우지 않을 것이란 다짐을 했네요. 제작년에 우연히 친해진 단지의 길고양이-키우다 버린 듯 - 가 우여곡절 끝에 작년 5월부터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다른 길고양이들 보면 얘네들도 어딘가에 입양되면 행복하게 살텐데 하는 생각을 해요. 얻어다 키울지는 모르겠찌만 강아지든 고양이든 상품으로 사올 생각은 이제 완전히 없어요.

잉크냄새 2025-04-30 21:33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사실 저도 실천의 범위가 그 정도일 겁니다. 육식 줄이기, 오리털 안 입기, 가죽 제품 안 쓰기...개인적으로 이런 작은 실천을 해 가고 있어요. 육식 줄이기는 처음에는 기후 온난화에 대한 개인 실천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동물 복지로 그 의미를 확대하게 되었네요. 저도 두 번째 고양이는 제 창문에 새앙쥐를 잡아다 주던 길고양이입니다. ㅎㅎ
 

재작년부터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집에서 동쪽 바다를 제외한 세 방향으로 네 가지 루트를 잡아 왕복 30km의 코스를 기분과 바람에 따라 번갈아 가며 주행중이다. 같은 코스를 일 년 이상 다니다보니 주변 풍경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익숙해진 만큼 또 세세한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의 계절이 되풀이되던 작년에는 유독 국도변에 핀 꽃들에게 눈이 가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꽃의 생멸이 빈번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빈번함 만큼이나 많은 꽃들이 생멸 주기를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벼운 눈맞춤을 이어가던 중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다소 미안함을 느꼈고 작년 늦여름부터 눈맞춤하던 이들의 이름을 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망막에 맺힌 상을 되살려 식물도감을 찾아보며 하나하나 기록하다보니 꽤 많은 꽃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왜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는지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나의 의미가 된다는지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올해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나선다. 작년에 미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초봄에서 한여름까지의 꽃들에게 다시 이름을 불러줄 시간이다.


<작년 한해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국도변에서 만난 꽃들의 이름 -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 꽃들도 아직 꽤 많다>


<들국화라 통칭되는 가을 국도변의 국화 종류가 이리도 많더라. 실제 들국화란 명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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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4-12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쁜 꽃이 아주 다양하군요. 관찰력만이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지요. 글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관찰력을 갖고 세세히 기록하는 자세가 필요한 법. 저도 배우겠습니다.^^

잉크냄새 2025-04-13 10:33   좋아요 1 | URL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냥 지나쳐 버리던 꽃들이 이름을 불러주니 제게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봄 날의 꽃들도 그 의미를 되찾아 볼까 합니다.

transient-guest 2025-04-15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소에는 차를 타고 다니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시절엔 하루에 6-7마일씩 아침에 걷고 달리고 했었는데 정말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감도 좋아지는 걸 느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살던 동네는 10마일 반경 잡고 속속들이 길을 다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잉크냄새 2025-04-15 17:08   좋아요 1 | URL
꽃이 북상하는 속도가 4킬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꽃의 북상 속도가 아닌 자연과 리듬을 맞춰 걸어가야 하는 사람의 속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속도에서만 자연은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사람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한 번 속도를 맞춘 길은 오래도록 그 길을 보여주더군요.

감은빛 2025-04-15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자전거를 언젠가는 꼭 배워야지 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재작년에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해 잠깐씩 연습하다가 며칠 만에 그만뒀고,
작년에도 또 시도하다가 며칠 만에 그만둬 버렸네요.
올해는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꽃들이 참 예쁘네요.
주말에 달리기 할 때 양쪽 천 변에 벚꽃이 멋지게 피어 있었어요.
힘든 몸 상태를 잊으려고 일부러 꽃을 보면서 달렸는데,
그 자리에 그렇게 어여쁘게 피어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잉크냄새 2025-04-15 17:12   좋아요 0 | URL
사실 자전거를 못 타신다는 예전 글에 잠시 의심(?)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ㅎㅎ

걷기도, 달리기도, 자전거도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잠깐만 눈을 돌리고 허리를 숙이면 수줍은 듯 펼쳐진 작은 세상들이 보이게 되더군요. 저도 자전거 페달링이 힘에 부치면 도로변의 꽃들에 눈 맞추며 잠시 숨을 고르게 됩니다.

감은빛 2025-04-23 12:56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님의 의심을 받았군요. ㅎㅎ

며칠 전에 저에게 잠깐씩 자전거를 가르쳐줬던 친구들이
저는 자전거를 아직 ‘못‘타는 것이 아니라
탈 수 있는데 아직은 조금 서툴러서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상태
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주더군요.

저는 제가 혼자서 언제든 원할 때 탈 수 없으니 ‘못‘타는 것이 맞다고
우겼습니다만, 그 녀석들이 아니라고 해서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ㅎㅎㅎㅎ

잉크냄새 2025-04-23 20:24   좋아요 0 | URL
자전거 처음 배울 때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스름 저녁녘 학교 운동장에서 몇 번이고 넘어지며 배우던 때가 그립네요. 그때 뒤에서 잡아주던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참 행복했던 기억중 하나입니다. ㅎㅎ
 

그 곳은 쯔마지에(깨거리)라는 도로변에서 사각형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는 방향으로부터 살펴보면 먼저 꽤 큰 중국 음식점이 있었고 그 옆에 한국 음식점 대장금이 모서리를 끼고 위치해 있었다. 꺽인 모서리를 돌면 토속적인 이름을 붙인 조선족 식당이 있었고 다시 모서리를 끼고 북한 음식점인 대동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 도로변에 이어진 다시 중국 가게는 정확히 무슨 가게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이 중국에 의해 꽉 막힌 지정학적 위치와 세 국가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조선족의 심리학적 상황를 반영하듯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국 음식점 상호는 인기 드라마였던 대장금이 주류를 이루고 궁이나 한성같은 약간은 고전적인 명칭을 고수하고 있었고 조선족은 무지개, 진달래, 해당화 같은 유독 삼음절에 집착한 듯한 토속적인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북한은 대동관, 칠보산 등 국가는 곧 영토임을 반영하듯 지역명을 주로 사용했다.  


<굴뚝 산업이 제거되기 전 텐진은 세계 2위 오염도시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도 퇴근후 쯔마지에로 가끔 타고 다니던 세냥 짜리 전철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직 대북 제재가 이루어지기 전 북한 식당은 출장자들이 으레 한번쯤 들르는 필수 코스였다. 같은 민족이면서 이질적인 그들의 폐쇄된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저녁 한 끼 정도는 꼭 하는 편이었으나 그 호기심은 한두 번 만에 가라앉곤 했다. 먼저 음식이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다. 평양, 함흥 등 지역명을 달고 나오긴 하나 남쪽에 비해 아주 담백하다는 약간의 맛의 차이만 있을 뿐 이국적인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술 또한 솔잎주 등 명칭이나 맛에 대한 호기심에 마셔보긴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싸구려 소주 맛에 금방 잔을 내려놓게 되었다.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북한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철저한 교육을 받은 탓인지 유독 한국인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 몇 번 말을 붙여보다 머쓱하게 말을 거두어 들이곤 했다. 그들은 주로 20대 초중반 평양 출신으로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으며 출신 성분이 꽤나 높은 여성들이었다. 고위층 자녀로서 볼모라는 설도 있었다. 미에 대한 평가도 세월을 타는 것인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면 그녀들은 곱다는 표현이 딱 맞아 떨이지는 분위기였다. 홀서빙과 저녁 공연 시간에 각자 악기를 연주하는 무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주고객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중국 노래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북한 노래는 처음과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 같은 의미로 몇 곡 불려지곤 했다. 한국 노래는 김정일이 좋아했다는 이선희의 'J에게' 와 어떤 이유로 해금되었는지 모르는 노사연의 '만남'이 가끔 연주되곤 했다.  


<악기는 주로 가야금과 전자 기타였고 가끔 트럼펫과 같은 관악기도 등장했다>


이런 호기심의 단계를 넘어서 마니아의 단계에 접어든 분이 계셨으니 천진 공장에 근무하는 총경리였다. 그는 출장자 식사도, 고객 접대도, 주재원 회식도, 점심 식사도 모두 대동관에서 진행하였다. 그의 연령대로 보아 북한이 고향일리는 없고 아마 부모님이 실향민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잠시 돌았으나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년말 망년회조차 대동관에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 동안 올려준 매출을 이유로 VIP로서의 위상을 쯔마지에 만방에 휘날린 쾌거(?)였다고나 할까. 2층 제일 큰 홀에서 진행했는데 북한 여종업원 두 명이 밴드로 참석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술도 몇 순배 돌면서 난 어떤 모습을 쭈욱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참석한 형수님들(주재원 아내) 대여섯분이 여종업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좀 흘렀었고, 상대방의 대화에 호응을 해주는 여성 특유의 감탄사도 들렸었고, 또 다시 중간중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기도 했고, 가벼운 건배 제의도 이루어졌고, 간간히 웃음소리도 들리곤 했다. 술기운인지 어떤 미묘한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들은 김정일이 좋아하던 'J에게' 와 왜 해금인지 알 수 없는 노사연의 '만남'을 같이 부르기도 했다. 마치고 나오는 길 못내 아쉬운 듯 가볍게 마주 잡은 손을 쉽게 놓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만남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 평화는 저런 섬세한 감수성과 친화력에서 올 것이라고.


두달여의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 총경리는 역시 대동관으로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어두운 홀 구석에 모여 눈물을 훔치는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VIP급 총경리가 매니저급 남자 복무원을 닦달하여 물어보니 텐진 지역의 대동관을 폐쇄하고 북한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은 영업을 하지 않았고 일주일여 남은 시간 영업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미지수였다. 돌아오는 길 총경리는 마지막 송별회라도 해야겠다고 굳센 의지를 불태웠다. 난 송별회가 진행되기전 귀국하였고 그 이후 진행 여부는 알 수 없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러 다시 업무로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대동관이 있던 자리는 기념품을 파는 중국가게로 변해있었다.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대장금과 무지개,진달래,해당화는 여전히 영업중이었으나 왠지 지정학적 심리학적 긴장감이 무너진듯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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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0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직 친구가 아니었어요?? 😱

잉크냄새 2025-04-04 21:23   좋아요 0 | URL
네, 변방 아웃사이더라 아직....ㅎㅎ

transient-guest 2025-04-0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에 대한 글을 올리신 걸 보면 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중국어도 배워보고 싶고, 현지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구경도 하면 좋겠다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04-08 20:07   좋아요 1 | URL
땅덩이 넓은 나라는 그 넓이만큼이나 좋던 나쁘던 별의별일이 다 있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다양한 삶과 문화가 존재하더군요. 중국에서의 생과 여행이 저에게는 삶에 다채로운 색채를 더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게스트님의 아이디가 여행과 너무 잘 어울리네요.ㅎㅎ

transient-guest 2025-04-09 03:20   좋아요 1 | URL
ID가 길손이죠.ㅎㅎ 반은퇴를 기점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번 해부터 근처라도 열심히 다니려고 합니다. SV에 있으니 Napa Valley가 조금 무리하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서 한두 달에 한번은 유명한 와이너리 하나씩 가보려고 해요.ㅎ

잉크냄새 2025-04-09 20:06   좋아요 1 | URL
경험상 여행을 멀리 장기적 계획으로 보면 참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 일단 한 걸음 내딪는 걸음으로 여행은 시작됩니다. 좋은 여행 되시길...

감은빛 2025-04-15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한 음식점, 궁금하네요.
말씀처럼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도 북한 사람이 제일 궁금할 것 같아요.

2002년 아시안 게임 당시에 자원활동을 하면서 북한 선수들을 가끔 마주쳤었어요.
키가 엄청 큰 농구선수도 만났었고, 여러 종목의 다양한 선수들을 보았고,
응원단으로 온 여성들도 보고 했었죠.
동포라는 생각, 언젠가는 그들과 거리낌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잉크냄새 2025-04-15 17:05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끈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금강산도 그렇고, 개성공단도 그렇고 정치적 판단의 압박용 카드로만 활용되고 말아 아쉽습니다. 더 세월이 흐른다면 한민족이란 단어도 아득해지는 시절이 올까 막연해집니다.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는 작가들의 한 줄 성명


https://drive.google.com/file/d/16mSC2T0fRUyLH6jZDcoww3_dTiOdxYWg/view?fbclid=IwY2xjawJPMkRleHRuA2FlbQIxMAABHVzybVN0xBXI77WUUMFtERz3PY9kM_9zB4UECaTiiqvsSL25AhLVT2Q-ww_aem_-tUMf_ISwjPxefxDmwSUoQ&pli=1



기억하고 연대하고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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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3-26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기저기 톡방에 공유되었길래 이동 중에 조금씩 봤어요. 어제 밤에 큰 아이는 여기서 자신을 가르쳤고 지금 가르치고 있는 예고 문창과 선생님들과 현재 대학교 문창과 교수들을 다 찾아서 그 분들이 쓴 글을 공유해줬어요.

잉크냄새 2025-03-26 19:52   좋아요 1 | URL
여기저기서 누군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의미있는 것 같아요. 직접 동참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기억하고 연대해주는 것이 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도 한 줄 보태고 싶어도 순 욕만 나올것 같아 신영복 선생님의 글로 한 줄 성명을 대신해 봅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페크pek0501 2025-03-27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인가 신문에서 한강 작가가 파면 촉구에 대한 한 줄 성명을 내놓은 것을 봤네요. 작가 수백 명이 모여 추진하는 것인데 한강 작가한테 연락했더니 메시지를 보내왔대요.

잉크냄새 2025-03-27 20:05   좋아요 1 | URL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문학쪽에서 움직였다는 부분도 의미심장하네요. 용기는 몸뚱아리가 아닌 심장임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