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가 돌다. 윤기가 흐르다. 윤이 나다. 윤은 가만히 정체하는 빛이 아니라 흐르고-돌고-드러나는 ‘활동성의 빛’이다. 또한 반드시 물체의 표면에 나타나기에 ‘의존적인 빛’이기도 하다. 즉 빛 자체가 윤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 윤은 ‘존재를 떠받치는 밝음’이란 것. 일반적으로 빛이 (전구나 노을, 혹은 영사기처럼) 특정한 중심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뿜어져나오는 데 비해, 윤은 사물의 표면에 고루 퍼진 채 공평하게 드러나는 ‘안온한 빛’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엉덩이 덕에 반들거리는 툇마루처림. -p175-






국민학교 6학년 교실은 오래된 목조 건물 3층이었다. 양쪽으로 목조 계단이 있었고 2층은 교무실로 3층은 6학년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교장실은 2층 복도 바로 옆에 자리해 있었다. 교실 바닥과 복도는 오랜 세월 세대를 이어 닦고 닦아 반짝반짝 윤이 났고 김연아의 트리플 엑셀이 가능할 만큼 미끄러웠다. 목재 바닥의 윤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동 노동(?)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준비물로는 실과 시간에 직접 바느질해 만든 내복 재질의 걸레, 방앗간에서 얻어온 바카스 병에 담긴 들기름 찌꺼기, 그리고 새하얀 양초가 필요했다. 줄을 맞춰 앉아 바닥에 초를 칠하고 걸레에 기름을 묻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닦아 나간다. 1조가 가면 2조가 뒤를 잇고 걸레가 놓친 부분은 무릎팍이 다시 한번 닦아내어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고 지나간다. 어느새 교실과 복도는 들기름의 향긋한 내음과 걸레의 꼬릿한 냄새가 환상적으로 섞인 신비스러운(?) 향으로 가득 찬다.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숙제 검사라도 하듯 바닥 검사를 실시하면 은은한 바닥에서 끄물거리던 눈부심과 햇살 속에 가볍게 피어오른던 먼지의 은하수 길이 시작되곤 했다. 하교길에는 계단에 앉아 엉덩이 미끄럼을 타며 내려갔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 엉덩이를 견뎌냈는지 계단 목재의 모서리는 둥글게 둥글게 변형되고 엉덩이 골을 따라 움푹 파여 있었다. 교장실에서 소리를 치며 나온 교장 선생님이 대머리였던 건 윤기로 떠오른 이 기억의 화룡점정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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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8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따뜻한 글. 읽으며 입에 절로 웃음이 맺히네요.

잉크냄새 2025-07-29 21:46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도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계신 듯 싶네요.
가끔은 이리 낡고 희미한 기억들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카스피 2025-07-28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국민학교 시절 학생들은 청소시간에 왁스나 양초로 바닥이 윤이나게 닦았다고 하더군요.만일 요즘 그랬다간 민원이다 뭐다 생 난리가 났을 겁니다ㅡ,.ㅡ

잉크냄새 2025-07-29 21:47   좋아요 0 | URL
네 그 아동 노동의 산 증인이 접니다. ㅎㅎ

감은빛 2025-07-29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덧이름 감은빛은 반질반질 윤이나는 검은 색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뜨다 감다의 그 감은 빛으로 빛을 감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이 덧이름으로 페이스북을 사용한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어느날 실명으로 감은빛이란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연락을 해와서 놀랐던 적이 있어요. 그분은 아마 저도 실명일거라고 생각하고 연락을 했을텐데, 저는 실명이 아니라고 밝혀서 실망을 안겨드려 안타까웠습니다.

잉크냄새 2025-07-29 21:51   좋아요 0 | URL
가끔 감은빛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네요. 그런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었군요. 그래서 님의 글이 윤이 나는 것들처럼 평안해 보이는가 봅니다.

transient-guest 2025-07-29 23:38   좋아요 1 | URL
순우리말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용‘을 뜻하는 우리말이 ‘미르-남자‘ ‘미리-여자‘라고 알고 있는데 혀에 착착 감기는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 2025-07-31 22:30   좋아요 1 | URL
미르가 용의 순우리말이군요. 그럼 미르의 전설이 수컷용의 전설인거죠?

transient-guest 2025-08-01 06:27   좋아요 0 | URL
그 미르는 어떤 의미로 사용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용‘의 전설에 아마 남자격을 넣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전 그것도 해본 적이 없네요. ㅎㅎㅎ

마힐 2025-07-30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시절, 유리창 청소도 있었잖아요. 창 틀에 앉아 메리야스로 만든 걸레로 빡빡 닦았었는데... 걸레 없는 친구는 자기 양말 한 쪽 벗어서 닦고 그랬어요. ㅎㅎ 이제는 아동 노동 했던 시간도 그리워 지네요.

잉크냄새 2025-07-31 22:32   좋아요 0 | URL
아, 메리야스...ㅎㅎ 역시 유리창은 내복보다 메리야스가 잘 닦였죠.
 


알라딘이 오픈한 시기가 1999년 7월이고 금년이 26년 째이다. 꽤 오랜 역사 속에서 내가 첫 주문한 것이 1999년 12월이니 가히 알라딘 시조새라 할만 하겠다. 그때 구입한 두 권중 <안개 속에는 그리움뿐이다> 라는 시집은 여전히 책장에 꽂혀있다. 또 다른 책은 주식 관련 책인데 아마도 주식 날려 먹고 그 분노를 책에게 풀어버린 것인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하고 허접하나마 글을 쓰는 곳이 이 곳 뿐이니 오래도록 장수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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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18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9년도 가입자라시나 정말 알라딘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으시네요.많은 분들이 서재에 계시다가 떠나가셨는데 26년이란 참 대단하십니다^^

잉크냄새 2025-07-18 22:35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도 시조새가 아니신지요? 전 귀차니즘에 젖어 있는지라 그 동안 많은 우여곡절에도 그냥 찐득하니 여기 눌러 앉아 살고 있네요. ㅎㅎ
아, 문득 26년 동안 스치고 지나간 분들의 안부를 묻고 싶어지네요.

감은빛 2025-07-28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99년 구매내역 인증이군요. 이 화면은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저는 언제 알라딘에 가입하고 책을 샀나 궁금해서 찾아보니 2004년이네요.
그보다 2년 어쩌면 3년 전인 2001년이나 2002년에 누군가가 제게 알라딘을 알려줬었죠.
알라딘을 알면서도 가입을 미뤘던 것은 책은 동네서점에서 사야지 하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어요.

아마 2004년에 알라딘을 가입하고 책을 사기 시작한 것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으면서 익숙하던 동네 서점들을 더는 갈 수 없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잉크냄새 2025-07-28 21:12   좋아요 0 | URL
알라딘 메인화면에서 26주년 클릭하고 당신의 기록 이란 항목 클릭하면 26년 동안의 개인 기록이 정리되어 나타납니다.

저도 처음 인터넷 서점에 대하여 그런 반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회사 기숙사가 시내랑 좀 떨어져 있어 편의상 알라딘에서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발점인듯 합니다.

transient-guest 2025-07-29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저도 해봤습니다. ㅎㅎ 거의 초기에 시작하셨네요.

잉크냄새 2025-07-29 21:44   좋아요 1 | URL
네, 어찌하다보니 거의 알라딘과 궤를 같이하게 되었네요. ㅎㅎ
 

이란 테헤란 공항은 페르시아 문명이 지닌 역사적 무게에 걸맞지 않게 낙후된 느낌이었다. 국경 비자 발급은 중동 특유의 느릿한 행정으로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출장지에서 픽업 나온 택시는 예전 중국의 드럼통 택시를 연상시키듯 낡고 위태로워 보였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택시는 테헤란 외곽도로를 따라 우회하여 북서쪽 황무지로 들어섰는데 쿠션과 서스펜션이 거의 망가진 듯 도로 표면의 윤곽을 엉덩이와 척추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출장지는 그런 황무지를 세 시간 달려 북서쪽 어느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이란은 경제 제재가 풀린 후로도 대금 지불 문제로 수출길이 열리지 않는 중동의 매력적인 시장이다. 주요 기술 선진국과의 경제 교류가 막힌 상황에서 금융 제재를 피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이 부상했고 마침 중국 법인을 가진 회사들이 중동과의 협업이 가능해졌다. 출장의 목적은 1DIN 오디오 품질확보방안을 고객사 사장에게 브리핑 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자체 기술력이 부족한 고객사에 기술 교육 및 불량 수리를 지원하기 위하여 엔지니어와 연구원을 대동한 자리였다. 관세 문제로 완제품이 아닌 SKD(Semi-completed Knock Down)방식의 수출이 이루어져 제품 수출에 비해 불량이 높은 상황이었다. 


고객사 사장은 중동 특유의 이목구비 뚜렷한 인상의 덩치 큰 남자였는데 기름 왕자 특유의 느끼함을 지니고 있었다. 첫 면담 자리에서 환전을 도와준다며 테헤란부터 동행한 운전사를 불렀다. 사장보다 더 덩치가 큰 그에게 육백 달러를 건네고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으니 한참 후 돌아온 운전사가 작은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그때는 중국이나 중동이나 회사간 선물 증여가 당연한 시절이었다. 중국에서는 차를, 중동에서는 파스타치오가 들어있는 실타래처럼 둘러싸인 과자를 서로 교환하던 때이다. '출국할 때 주지, 벌써 주나' 싶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돈이 한가득이다. 순간 돈 액수가 너무 많아 보여 뇌물로 착각하여 손사래를 치니 기름 왕자가 '저 자식 케밥을 잘못 먹었나'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환전해 온 돈이라며 웃었다. 그 당시 환율이 1달러당 32,000리알이었는데 이란은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다르게 작동하여 저 정도의 돈이면 아마도 시장 환율로 환전한 모양이었다. 다음날부터 난 일수 아줌마처럼 노트북과 노트를 다 빼 치우고 돈만 가방에 넣고 숙소와 출장지를 오갔다. 노트북 가방보다 조금 큰 가방은 터질 듯 옆으로 배를 불룩 내밀고 있었다.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케밥 정식으로 먹은 날 계산대에서 가방을 열고 백만 단위가 넘는 돈 (그래봐야 40달러 남짓) 을 세어 넘겨주었는데 왠지 만수르가 된 느낌이었다. 괜히 어깨에 뽕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높아졌다. 

<육백달러의 마법>


기름 왕자는 나에게 주로 자신 회사의 앞으로의 비젼에 대하여 말하길 좋아했는데 그와 놀기에 내 영어가 짧아 주로 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현장에는 현장 사무실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한 구석에 책상과 회의 테이블로 구성되어 있었고 불량 수리 및 교육도 현장 사무실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첫 날 라인 휴식 시간이 되어 작업장을 벗어나 담배를 피우러 가려고 하니 현지 관리자가 만류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앉아 있으니 현장 출입구에서 백색 벨보이 복장을 정식으로 갖춘 말끔한 이란 남자가 쟁반을 받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듯한 백색의 은쟁반에 날씬한 곡선을 자랑하는 콧대 높은 주전자와 본차이나 임을 한껏 자랑하며 반짝이는 찻잔에 파스타치오를 실타래같은 것으로 둘러싼 과자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기름 왕자가 선사하는 이벤트일 것이었다. 10분간의 휴식 시간동안 옆에서 차 시중을 들던 벨보이는 그 이후로도 매일 오전 오후 한 차례씩의 휴식 시간마다 나타나 어색한 차 시중을 들다 사라졌다. 사실 현장 관리 측면에서 조언해야 할 일이었지만 기름 왕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이라 그냥 며칠 동안 만수르가 되기로 했다. 만수르처럼 '후루록' 소리도 내지 않고 우아하게 달큰한 홍차를 마셨다.  


아마 사람이 돈에 대해 품는 어떤 가치는 그 절대치에도 영향을 받지만 부피나 무게처럼 시각적인 영향도 무시 못하는 것 같다. 출장 기간이 1주일인 직원들을 남겨놓고 3일후 먼저 귀국했는데 아직 절반이 넘는 돈을 넘기는 게 왠지 아쉬웠다. 어깨 끈 위에 올려졌던 묵직한 돈의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p.s)이 글을 쓰며 이란 리알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니 현재 달러당 공식환율은 42,000리알 시장환율은 백만리알이 넘는다고 한다. 사진보다 30%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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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09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휴전중이지만 이스라엘과 대치중인데 이란에 다녀오셨는지요? 아님 예전에 다녀오신 글인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테헤란이 쑥대밭이 되었다는데 하루 빨리 원래 모습을 되찾길 바랍니다.

잉크냄새 2025-07-09 19:37   좋아요 0 | URL
2016년 중국 근무할 때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네타냐후나 트럼프 같은 전쟁 미치광이들이 있는 한 중동의 평화는 요원해 보입니다.

transient-guest 2025-07-10 0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에서 일하셨던 건 전에 쓰신 글에서 알고 있었는데 출장도 많이 다니셨나 봅니다.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은 인도-중국-터키와 함께 고대문명의 흔적들, 그리고 이후 서구와는 다르게 발전했던 나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늘 궁금합니다. 다 파괴되고 사라지기 전에 다녀보고 싶습니다. 제가 잠시 일을 도왔던 그쪽 나라 고객이랑 밥을 먹으면 늘 아주 달디 단 차를 마시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잉크냄새 2025-07-10 20:52   좋아요 1 | URL
중동 지역도 여행지로서 매력적인 곳이라고 들었어요. 전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만 돌아서 중앙아시아는 출장으로 다녀온 이란 말고는 가본 적이 없네요. 언젠가 인도-파키스탄을 기점으로 중앙아시아를 관통해서 터키로 넘어가는 길을 걸어보고 싶네요.

transient-guest 2025-07-11 01:49   좋아요 1 | URL
저는 일차 FIRE되면 미국 횡당, 서부 종단열차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남북이 연결되어 대륙으로 철도길이 열리면 부산에서 유럽까지 기차를 타고 가보고 싶은데 살아생전엔 어떻게 가능할 수도 있다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잉크냄새 2025-07-12 21:54   좋아요 1 | URL
미국 대륙 횡단은 예전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한동안 꿈꾸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네요. 포데로사를 타고 떠난 체 게바라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보는 남미 여정과 켈커타로 들어가 인도 내륙을 돌아보는 인도 여정은 꼭 해 보고 싶네요.

감은빛 2025-07-28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많은 돈을 갖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
말씀처럼 만수르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네요. ㅎㅎㅎㅎ
근데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차이가 난다는 것은 독특하네요.
뭔가 이유가 있을테고, 누군가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그 이유까지 궁금해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해외에서 근무하신 것도 독특한 이력일텐데, 여러 나라로 출장도 많이 다니셨군요.
이런 옛날 이야기들 너무 재미있어요. 자주 올려주세요.

잉크냄새 2025-07-28 21:17   좋아요 0 | URL
007 가방을 든다면 모를까 일반 가방에 저 정도 부피면 많이 불편합니다. ㅎㅎ

저도 잘 모르지만 사회가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공식환율과 시장환율이 차이가 큰 것 같아요. 요즘 볼리비아도 환율 차이가 많이 나는 것 봐서는 그런 연관성이 큰 것 같습니다.

업무보다는 여행으로 겪은 일이 더 많죠. 가끔 풀어보려고 노력중입니다.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 - 2020년 제1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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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펜하임 반디멘 재단 도서관은 클라우스 반디멘이 세운 156개의 도서관중 하나이다. 지역 문화의 보존과 교육 기회의 균등한 제공을 위해 전국에 세워진 도서관은 그 지역 밀착형 이미지를 감안하여 도서관 명칭을 지었다. 그림책 도서관, 영화 도서관, 아랍 문학작품 도서관에서 유추할 수 있듯 지역색과 맥을 같이 했다. 호펜하임 도서관은 153번째로 지어진 한계로 인하여 고심 끝에 결국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 Library For Nowhere Books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 갈 곳이 없는 책들, 분류표에 들어가기 어려운 책들이 주로 선정되었는데 그 명칭에 타당한 수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기형적인 운영에도 도서관은 재정적인 문제에 직면했고 장서량을 늘리기 위한 타개책으로 제안된 것이 도서 기증이었다. 빈센트 쿠프만이라는 한 남자에 의해 시작된 도서 기증은 말 그대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가 직접 타이프라이터로 친 뒤 직접 표지를 만들고 제본해서 묶은 원고, 흔히 사가본이라 부르는 책들이었다. 그렇게 모이기 시작한 지 30여년 도서관 폐관을 앞두고 정리된 빈센트 쿠프만의 컬렉션에 대한 카탈로그와 그 마지막을 같이 한 도서관 이용자들의 이야기이다.


카탈로그는 잘 씌여진 알라딘 리뷰라고 봐도 무방할 터인데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은 <프로스페로의 꿈>이다. 16장(32면)의 낱장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그림의 전후는 어떤 연관성도 없어 보이고 페이지조차 적혀 있지 않다. 제본이 되어 있지 않아 부주의하면 와르르 도서관 바닥에 쏟아질 것이고 그것을 다시 끼워 넣을 독자는 16장의 그림을 이어 붙여 만들 수 있는 20조 개의 이야기 앞에 망연자실해 질 것이다. 75억 인구가 2500가지 순서로 읽어도 일치하지 않을 이야기이고 누군가 100년 동안 100가지 다른 방법으로 읽고, 그 생을 500만번 반복해도 헤아리지 못할 이야기이다.이리 다양하다 보니 우리가 하나의 책 앞에 선다는 것은 그 책의 운명과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책들은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Habent sua fata libelli. -p63-


또 한 권의 책은 <당신이 읽을 수 없는 100권의 책>이다. 사라진 책이나 원고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은 단순한 목록과 책 표지와 서지 정보로만 구성된 책이다. 저자의 상상의 목록만 적혀 있을 뿐 아직 구체적으로 씌여지지 않은 책이니 아마존이나 구글에서 검색 불가능한 책들이다.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에 어디에도 없는 책들의 목록이 수서됨은 당연한 일일지도. 책 제목과 서지 정보를 읽고 관심을 가질 누군가에 의해 책의 운명은 정해진다. 결국은 쓰여질 운명이다. 


당신이 어떤 책을 찾고 있는데 그 책이 세상에 없다면 그 책을 써야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는 것. -p254-


이 도서관과 사가본의 운명은 알라딘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직접 타이핑하고 탈고하여 완성한 글들, 아무도 출판해주지 않는 우리 삶의 사가본, 서재 이웃외에 누구의 피드백도 없이 가만히 먼지가 쌓여가는 글들, 결국 어디에도 없는 글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는 곳. 알라딘.  언젠가 이 곳의 운명이 다하는 날 누군가에게 남겨질 익명의 글들에게 바치는 알라딘과 이웃 서재들의 헌사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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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6-25 0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제 페이지의 글들을 archive할 생각입니다. 갈수록 엉망이고 주절주절 개인적인 이야기를 쓴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기록을 보관했으면 하거든요. 나중에 다시 써볼만한 평도 있을지 모르니까요.ㅎ 이 책 꽤나 흥미가 갑니다.

잉크냄새 2025-06-25 21:01   좋아요 1 | URL
아마 그 마지막 날에는 알라딘도 어떤 식으로든 archive를 제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책 관련 자료와 여행 사진 정리를 notion에 하고 있는데 내가 죽으면 이 자료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합니다. ㅎㅎ

감은빛 2025-07-28 13:49   좋아요 0 | URL
아, 잉크냄새님 노션을 쓰고 계시군요.
저도 최근에 노션 사용법을 배웠어요.
우선 읽은 책들을 한번 정리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겨우 생각만 했을 뿐, 실제로 정리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감은빛 2025-07-28 13:50   좋아요 0 | URL
게스트님. 저도 이 알라딘 서재에 가끔 두드려 놓은 개인적인 글들을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갈무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먼저 하시게 되면 좋은 방법을 알려주세요.

잉크냄새 2025-07-28 21:20   좋아요 0 | URL
네, 유튜브로 노션 배워서 책 관련 자료와 여행 사진을 정리중입니다.
엑셀과 파워포인트의 장점만을 극대화한 느낌이 들어요.

갈무리하는 방법은 저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ㅎㅎ

transient-guest 2025-07-29 04:12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는 막연하게 하나씩 보면서 다시 써볼까 싶은데 언젠가는 그냥 긁어서 다운로드 하는 옵션이 생기지 않을까요?ㅎㅎ
 

고등학교때 실업 과목은 수산업이었다. 대부분의 인문계가 상,농,공업이었던 것에 반해 수산업이었던 이유는 신생 학교에 실업 교과 선생까지 배치할 수 없어 수산업고에서 대체 선생으로 선임해 수산업 과목을 배당하기 위해서였다. 임시 선생은 중학교 선배이기도 하여 말도 편하게 하대했다. 그가 처음 교실에 나타났을 때 당시 유행하던 주윤발식 바바리코트를 펄럭이며 안주머니에서 팔각 통성냥을 꺼내 들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가 다소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능글맞기까지한 개인 성격도 한 몫 했지만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던 이유가 더 컸다. 그는 전국 인문계중 수산업을 배우는 학교는 2개 학교 뿐이고 시험 출제자 모두 자기 선배이니 대입시험은 족보로 충분하다고 말하곤 했다. 수업은 주로 삼천포로 빠져 바다 이야기로 흘러들어가곤 했고 그의 수업은 지친 우리들에게 꽤나 재미를 보장했다. 그래도 물고기와 그물에 대해서는 아직도 꽤 기억난다.


그는 선장이라도 된 듯한 포즈로 우리를 제군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모두에게 물었다. "제군들, 삼각측량법에서 이 지역 세 가지 포인트가 어디인 줄 아는가?" 삼각측량법은 기하학의 삼각형을 이용하여 위치와 거리를 측정하는 기법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그 중 하나는 등대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신의 위치를 제외한 한 포인트가 어디일까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주로 지대가 높고 눈에 잘 띄어야 하는 특성을 갖추어야 함은 당연지사. 당시 학생들 답변에 그 곳이 포함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의기양양한 답은 인상적이었다. "그 한 곳은 언덕 위의 성당이다. 그러니까 제군들의 위치는 등대와 성당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마을에서 꽤 높은 언덕 위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 어린 시절 눈만 오면 비료 포대를 들고 눈썰매를 타러 가던 곳이다. 다른 건물도 아닌 성당이 우리 위치를 정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에게 꽤나 인상적이고 낭만적인 일이었다.


그 이후로 친구들 사이에 작고 의미심장한 변화가 한 가지 찾아왔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의 땡땡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가끔은 그 목적지가 등대와 성당이 보이는 바닷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는 동해안 철조망이 아직 철거되기 전이었고 경계병이 실탄을 장착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개구멍을 통해 바닷가로 들어가서 우리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등대와 성당을 보며 모래밭에 누워있곤 했다. 탐조등 불빛과 군인들의 욕설을 피해 도망치곤 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몰아치면 몰래 바닷가로 들어가 말없이 등대와 성당을 쳐다보다 돌아오곤 했다. 조명이 거의 없던 시절 소울음 소리와 불빛으로 어린 시절을 사로잡던 등대와 약간은 어색하지만 왠지 포근하던 성당의 십자가 불빛이 우리의 위치를 자리매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위치를 가늠해 보곤 한다. 등대는 건축 규제상 지금도 시야가 확보되어 있지만 천주교 성당은 성당과 바다 사이에 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밤새 꺼지지 않는 네온빛으로 그 역할을 잃고 말았다. 두 건물 다 100년이 넘었다. 그 긴 세월 배 뿐 아니라 누군가의 길라잡이를 해주며 늙어가고 있었다 생각하면 왠지 정겹고 짠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배들도 GPS로 그 위치를 파악한다. GPS도 원리상 삼각측정법이기는 하나 자신을 제외한 두 가지 포인트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위치도 그렇게 변한 것은 아닐까. 타인 혹은 사물과의 관계로 자리매김하던 우리의 위치도 지금은 네비게이션처럼 단독으로 설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살고 있다. 관계로 규정되던 人이 이제는 그 의미를 상실하여 관계를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철저한 홀로서기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가 허기처럼 허전할 때면 가끔 마음 속 등대와 성당이 그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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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6-14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닌 성당도 당시 산동네가 있었던 곳의 중심에 지어졌던 탓에 당시만 해도 이정표처럼 동네 어디서든 다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다시 가보니 그 산속까지 다 아파트와 빌라가 들어가버려서 상대적으로 무척 작아보이더라구요. 바닷가에서는 좀 들어간 동네라서 등대는 없었지만 그 청춘시절엔 학교는 싫었고 노래하고 여자애들도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성당이 그야말로 등대였던 것 같습니다. ㅎㅎ 제 위치를 알게 해주는...

잉크냄새 2025-06-15 10:14   좋아요 1 | URL
예전 높은 건물이 없던 시절에는 동네 조금 높은 언덕에 위치한 성당은, 특히 해질녘에는 성경의 어느 한 페이지처럼 성스러운 모습을 풍기는 때가 있었죠. 제가 저 성당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성당 오르는 언덕 길 잔디밭에 앉아서 바라보면 제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집 파란 대문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파란 대문을 보다가 성당 종소리에 울컥해 성당 미사에도 잠시 참여한 기억이 나는군요. ㅎㅎ

2025-06-25 0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25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