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인생을 선불제로 생각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죽어라 공부만 하며 현재를 ‘지불’하면 그만큼의 괜찮은 미래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밤을 새워 소설을 쓰고 몸을 축내면 그 대가로 편안한 미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덕을 오를 때는 힘들지만 내려올 때는 편하듯이, 고생과 노력은 초반에, 그 과실은 생의 후반에 따먹는 것이려니 했다.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내 인생은 후불제인 것 같다. 어린 날이 오히려 ‘공짜’였고 지금은 계산을 치르는 중이고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만 같다. -p156-







여행을 목적으로 처음 회사를 퇴직했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계속 '왜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관두는지'에 대하여 지겹도록 질문을 받았다. 실질적인 이유는 사십을 넘기면 다시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이대로 삶이 굳어버릴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대로 말해 버리면 뭔가 바보스러울 것 같아 스스로 '왜'에 대한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었다. 그때 변명처럼 떠오른 생각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살짝 비튼 '가치 보존의 법칙'과 김중식의 '이탈한 자가 문득' 이라는 시였다. 질량처럼 가치 또한 형태를 달리할 뿐 세상 어딘가 온전하게 존재하리라는 믿음,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알려준 시인의 위로는 내 선택을 잘 포장해 주었었다. 인생은 후불제란 작가의 글을 읽다 내 인생은 직불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얻기 위해 버려야 함을 인정하는 등가 교환의 법칙이 직불제가 아닐까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6-05-14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5-14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6-05-14 22:56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감은빛 2026-05-15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여행을 목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걸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요. 잉크냄새님의 여행 이야기가 아직 엄청 많이 남아있을 것 같은데 하나씩 하나씩 꺼내주세요. ㅎㅎㅎㅎ

저는 선불제도 후불제도 별로 공감이 가지 않네요. 그냥 그때 그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 인생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