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추

- 백창우 -

나를
옭아매는 것이
내 몸의 단추만큼은 될거다
희망을 박탈당한
불쌍한 사내

=============================================================================

자명종 소리로 맞이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여미면서부터다. 빗질을 하고 서둘러 나서는 현관문, 고요한 아침이 무색한 출근길의 클락션소리,  가벼운 눈웃음마저 사치스러운 호기가 되어버린 아침의 근무풍경, 타다다닥 자판위를 움직이는 공식화된 손놀림, 사각의 틀에 갇혀버린 창밖의 하늘, 노을이 붉은색임을 어느덧 잊어버린 퇴근길 발놀림, 하루종일 육중한 무게를 지탱한 현관문을 열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하루가 마무리되곤 한다.

내 스스로 여미는 단추에 의해 나를 가두고 그렇게 여미어진 단추안의 일상은 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것이라 스스로를 애써 자조하며 단추너머의 바다를 꿈꾸곤 했다. 단추를 풀어헤친 어느날 곱게 여미어진 단추속의 나의 모습에 익숙해진 일상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단추가 있어야할 단추구멍은 오히려 공허함과 나태함이 묻어날 뿐이다. 일상의 나의 모습에 익숙한 내가 주저앉는 소리, 그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오늘도 와이셔츠의 단추를 여미며 생각한다. 단추, 그것은 옭아맴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내 모습이다. 죽는날까지 단추너머의 바다를 꿈꾸겠지만 단추안의 세상, 내 삶이 되어버린 소중한 일상의 흔적들을 또한 바다만큼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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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8-0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여요. 잉크님 휴가 후유증인 거. 힘 내십시오. 홧팅! 아자!

Laika 2004-08-0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글 읽다가 "단추너머 바다"를 보려는듯 저도 모르게 창밖을 보는데...하늘이 안보여요....
저 창밖 건물 안의 누군가도 지금쯤 바다를 꿈꾸며 자판을 두들기고 있겠죠.....
"소중한 일상의 흔적들"을 사랑하며...오늘도 야근을....^^

호밀밭 2004-08-09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추가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부분이 기억에 남네요. 늘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졌다가도 가끔은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요. 늘 앉아 있는 사무실 의자를 벗어나면 어떤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결국은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요. 시도 님의 글도 좋네요.

잉크냄새 2004-08-0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밖에 하늘은 안보여도 잉크 뱃사공이 보이지 않나요? 푸른 창공을 노저어가는 뱃사공...음 어쩌면 삶도 여행과 같아서 결국은 떠남이 아닌 돌아옴인것 같아요.
 

1일 - 춘장대 일몰이 지고

서해, 해안선의 단조로움과 파도가 쉽게 연상되지 않는 바다로 인해 그 동안 한번도 다녀오지 않은 곳이다.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로 잡은 것은 원래의 계획이 서해를 따라 제주도로 넘어가고자 하는 이유였지만 중간에 제주도 계획이 무산되었다. 고속도로의 정체를 예상하여 이천,안산,예산을 잇는 국도를 거쳐 모세의 기적이 존재한다는 무창포로 향했지만 너무 과도한 인파와 바가지 숙박비로 인해 더 아래에 자리한 춘장대로 옮겨가다. 십만원이 넘는 숙박비를 피해 어느 허름한 식당에 여장을 푼후 바로 바다로 달려가다.

처음 가본 서해 바다의 매력은 갯벌의 생명력과 수평선위로 지는 일몰이 아닌가 싶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과 멀리 들락날락거리는 작은 물결, 갯벌 생물들의 작은 움직임을 무한한 대자연의 생명력처럼 느끼면서 갯벌을 걷다.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바라보는 바다위의 일몰과 푸르른 하늘위를 날으는 갈매기, 그것은 차라리 한폭의 그림이었다.


춘장대의 일몰, 바다의 일몰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춘장대 갈매기, 춘장대 갈매기, 너는 벌써 나를 잊었나~  

2일 - 선운사의 밤, 복분자에 취하고

선운사는 몇년전 동백꽃 축제에 다녀온적이 있다. 그 당시 다 떨어진 동백꽃을 뒤로 아쉽게 돌아섰는데 이번에 다시 고창 선운사를 찾아간 것은 고창에 사는 회사 후배가 대접한다는 복분자의 유혹 때문이었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고창 고인돌 유적과 고즈넉한 산세의 고창 읍성, 그리고 녹음이 묻어나는 선운사의 산책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고창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려는 듯 고창 주변의 친구들을 불러 후배가 가져온 복분자에 기분좋게 취해 잠이 들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고창 고인돌 유적


낙안 읍성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고창 읍성

3일 - 동해안 어딘들 아름답지 않으리

당초 전라남도 광주에서 합류하기로 한 일행 한명을 대구로 내려오게 하고 전남 담양에서 88고속도로로 접어들다. 막 개이기 시작한 고속도로위로 펼쳐진 푸르른 하늘을 담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 끝이 동해의 푸르른 바다임을 알리려는듯 푸르른 하늘은 끝이 없었다.대구에서 다시 동해로 국도를 접어들어 달렸다. 동해안에서부터 전국일주를 시작한 후배들과 월포 해수욕장에서 합류하여 여장을 풀다.

바닷가에 자리한 앞이 훤히 트인 간이 식당의 인상이 참 좋은 아주머니와 바닷가 특유의 거친 사투리가 묻어나는 아저씨의 넉살속에 바다 음식의 매력에 빠져들다. 나중에는 주인 아저씨까지 합류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로 밤이 깊어갔다. 간간이 들여오는 파도 부서지는 소리는 암흑을 저 멀리 밀어내듯 마음속의 어둠을 그렇게 밀어내고 있었다. 


동해안의 해안선 풍경 하나

 4일 - 7번 국도의 아름다움을 따라 소금강으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해안선에 자리한 7번 국도만큼 아름다운 도로는 없을 것이다. 바닷가를 달리는가 싶으면 어느덧 산속이고 산속을 달리는가 싶으면 어느덧 눈앞에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작년 여름에도 이 길을 마지막으로 달렸고 올해도 마지막 종착지인 소금강을 향해 7번 국도를 달렸다. 몇번을 멈추어서 7번 국도변에 자리한 풍경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소금강에 도착하다.

소금강, 작은 금강산이라 하여 소금강이라 칭하여진다. 소금강 계곡 초입에 자리한 각종 숙박시설과 음식점들이 그리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차지한 공간이 자연보다 더 크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숙박객들을 위해 급조한 시설이 아닌 그곳에 뿌리내려 살아온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기에 그것은 그냥 자연속에 자리한 사람의 흔적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신라시대 왕과 신하들이 포석정에서 물길에 술잔을 떠내려보내며 운치있게 술잔을 돌렸듯이 우리도 계곡속에서 동동주잔을 떠내려보내며 술을 비우곤 7번 국도의 운명과 사람 살아가는 일상의 소중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소금강의 밤을 맞았다.


7번 국도변의 풍경 한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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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08-08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네요.....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술집" - 저도 가보고 싶어지네요...
잉크님 사진에선 여름 휴가의 복잡함은 안보여서 좋네요.......^^

갈대 2004-08-08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해에서 동해로 바다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네요. 며치간 안 보이시더니 휴가를..^^

호밀밭 2004-08-0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휴가를 다녀오셨네요. 선운사는 전에 한 번 가 보았지만 다시 가야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에요. 소금강은 예전에 가족과 함께 피서를 갔었는데 계곡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자서 더 기억에 남아요. 밤에 별도 많이 있어서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곳이죠. 제가 뭔가 마음속에서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으로만 다녀 오셨네요. 휴가 마무리 잘 하시고, 건강하게 한 주 맞이하세요.

stella.K 2004-08-0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도 한 사진 하시네요. 멋있어요!! 근데 한창 때라 길 많이 막혔을 것 같은데, 사진은 그런 분위기 전혀 아니네요.^^

잉크냄새 2004-08-08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곳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자세히 보아주어야 할것들을 간과할 수 있죠. 그래도 가보고 싶은 곳은 많은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똥마른 강아지마냥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답니다.
저번주가 여름휴가의 절정기였는데 길도 그렇고 다녀온 곳이 사람들이 별로 없었답니다. 호밀밭님 말대로 다음주부터 일상의 시작인데 몇일간은 휴가 휴유증에 시달려야할것 같아요.

icaru 2004-08-09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야...남한 땅의 해안들을 누비셨군요!!!
갈매기 사진 진짜 잘 찍으셨네요...정말 찍기 어렵던데...

비로그인 2004-08-09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에 번쩍! 서에 번쩍~!! ^^
일주일 간의 휴가를 아주 알차게 보내신 것 같아요. 사진..그리고 훈훈한 인심과 객지에서의 낭만이 묻어나는 여행담...좋네요.
오랜 시간 동안 여행 계획하셨던 것 같아요. 제주도도 예정대로 다녀오셨으면 더 좋으셨을 텐데요. 하지만 다음 여행으로의 기약이 될 것이기에.. 아쉬움 달래실 수 있을 듯 해요. ^^
바다 사진 보니....당장이라도 달려 가고 싶네요. 특히 일몰의 바닷 풍경... 일출 때와는 확실히 다른...객창감이 절로 일 것만 같은 풍경이에요.
좋은 여행, 알찬 휴가 ... 아름다운 추억이 되셨으리라 생각해요. ^^

ceylontea 2004-08-0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 잘 다녀오셨군요...
전 파란여우님.. 서재에서 다녀왔다는 인사를 보고 어디 가셨나 했었는데... 휴가 시작일이 저랑 같으시네요..그래도 님은 긴 1주일... 전 아쉬운 3일로.. 지난 목요일 회사에 복귀하고 정신없이 바빴답니다.

잉크냄새 2004-08-09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홍길동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녔죠. 가보고 싶은곳은 많은데 시간이 없으니 다리품이라도 열심히 팔아야지요. 8월 첫째주 휴가가 많았던것 같아요. 복순이 언니님, 냉.열.사님, 실론티님도 거의 같은 시기네요. 혹시 모르겠네요. 어디선가 슬며시 스쳐지나갔는지도....

미네르바 2004-08-1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몰시 사진이 정말 아름답네요. 저도 서해안으로 가서 저녁 노을을 보아야겠어요.
일몰을 볼 수 있는 것이 서해안의 매력인 것 같군요.

잉크냄새 2004-08-12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해의 일몰은 참 아름답더군요. 끝없이 펼쳐진 갯벌과도 잘 어울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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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7-3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 짬밥이 장난아닌 사람이 그린 것이 분명하다. 거의 계급별 행태가 퍼펙트하다.
예비역은 사격표 하나 들고 있으면 딱 좋을텐데, 사격 점수 높은 사람 교통비 몰아주기가 생각난다. 일인당 1500원 주던가 했는데... 회사 입사하고 받은 예비군 훈련은 즐거운 3일간의 꿈같은 휴가였다.
어느덧 예비역도 끝나고 민방위 태세 돌입이라니....

stella.K 2004-07-30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불량티 팍 나는데요...

잉크냄새 2004-07-30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량티나도 예비역 귀엽게 봐주세요.
어리버리해 보여도 막강 전투력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나저나 예비군 훈련때 군복만 입으면 하나같이 저런 몰골로 변하는지 의문입니다.
 

헐거워짐에 대하여

- 박 상 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던가요? 우리는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라고.

낡음, 오래됨 같은 단어에서는 왠지 포근함과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 오랜 세월을 통해 서로에게 편하게 길들여진것 같아요. 낡은 신발속의 발처럼 말이죠.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조금은 헐거워서 편안한 그런 사람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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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도 구두도 낙낙한 것이 좋아요.
사람도 좀 어리숙해서 편한 사랑이 좋고요.
내 몸에 발에 딱 맞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지고 헐거워진 것들이 좋아요.
시 잘 읽고 갑니다.

호밀밭 2004-07-29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가 잘 길들여져서 발이 편안해지면 안심이 되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발 치수보다 하나 정도 큰 것을 사게도 되더라고요. 헐거운 게 좋아서요. 사람도, 인생도 너무 꼭 끼면 숨이 막히기는 할 거예요. 저도 저에게 편안한 사람이고 싶네요.

잉크냄새 2004-07-3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근함, 아늑함... 왠지 낡은 냄새가 나면서도 단어 자체에서 뿜어져나오는 그 따스한 온기를 느낄수 있어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삶에서 조금은 헐거워질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네요.

水巖 2004-07-3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맞는 말씀이군요. 우리는 얼마나 빡빡한 세상을 살고 있었는지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것을 말이죠.
 

상주들의 읍에 묻혀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뒤돌아선다. 돌아가신 분이 어느 시절부터인가 준비하셨을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영정, 영혼처럼 피어오르는 향, 지인들이 보냈을 이름이 적힌 화환, 삼베를 두른 상주들의 모습. 상가집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고 본다. 상가집이란 말보다는 장례식장이란 말이 더 어울릴것 같다. 이제는 집보다는 보통 병원이나 일반 장례식장에서 더 많은 상이 치루어진다.

처음 상가집에 간것은 고등학교때이다. 야간 자율학습을 빼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간 친구 어머님의 상가집이다. 그 당시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선생님이 가는 도중 내내 말씀하신 죽음이라든지 허무함이라든지 하는 말들이 가슴에 와닿지 않은것 같다. 그저 친구가 당한 슬픔에 대한 막연한 연민과 측은지심이랄까 현실의 나와는 무관한 별세계의 일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가는 상가집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업무를 마치고 멀리 떨어진 상가집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덜컥 겁이 나는 때가 있다. 서둘러 고향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실없는 놈이라는 꾸지람에도 괜시리 눈물 한방울 찔끔하며 이렇게 살아계심에 감사하며 미소짓는다. <검은양복>이란 단편드라마가 생각난다. 가난한 살림에 마지막으로 어머님의 상에 입을 검은 양복을 준비하는 맏형의 이야기를 보면서 막연한 슬픔에 사로잡혔었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될수도 있다는 불안감, 솔직한 심정이다.

영정에 절을 하고 물러나 자리잡고 있으면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초저녁부터 도착하기 시작한 친구들이 한밤중이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모두 한곳에 모인다. 우리가 슬픔에 대하여 나누는 대화는 적다. 그냥 쳐다보며 편안히 돌아가셨는지를 묻고 어깨 한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슬픔의 표현을 대신하는것 같다. 보통 누가 장가를 갔다든지, 아이를 낳았다든지, 회사에서 승진했다든지, 사업을 한다든지, 때론 오래전 소식이 끊긴 친구의 최근 소식과 그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밤을 새운다.

새벽이 찾아오면 장지까지 따라갈 몇몇 친구를 제외하곤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간다. 오래된 명함을 바꾸고 무사히 돌아가라고 등 두드리며 다음에는 자주 만나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가 다시 이렇게 모두 모이는 자리는 또 어느 친구의 상가집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또 살아온 일들을 이야기할 것이다.인생은 어차피 살아가는 문제이기에 삶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가집, 어쩌면 그곳은 죽음의 연민 대신 삶의 포근함이 자리잡은 곳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 떠나시는 분의 마지막 배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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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2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가집에 다녀오셨나 봐요. 상가집에 가면 언제나 숙연한 분위기보다는 조금은 들뜬 분위기가 느껴져 놀랐던 생각이 나요. 들뜬 분위기라는 게 꼭 나쁘다는 생각은 안 해요. 실감이 안 나서일 수도 있고, 그냥 영화처럼 축제라는 개념으로 맞이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상가집이 포근함이 자리잡은 곳이라는 말, 저도 동감해요. 포근하다는 말도 여러 가지 의미잖아요. 아기도 엄마의 뱃속에서 포근했을 테니까 죽은 이도 조금은 포근하게 저 세상으로 가도록 남은 사람들이 배려를 해야겠지요.

겨울 2004-07-2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한번 볼까말까한 친지들을 만나 반가운 눈인사를 나누는 곳이기도 해요. 아이적에 헤어졌다가 훌쩍 어른이 된 모습으로 나타난 그들을 보며 내가 먹은 나이를 헤아리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면 죽음을 실감하기도 전이라 슬퍼할 겨를도 없고 몹시 앓다가 돌아가신 경우는 편히 가셨구나 싶어서요.

잉크냄새 2004-07-29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연한 분위기보다는 조금은 들뜬 분위기라는 표현이 맞는것 같아요. 젊어서 요절하거나 급작스런 죽음이 아닌 수명이 다하여 돌아가신 분들의 상가집은 더 그런것 같아요. 가슴속에야 서글픈 맘을 품고 있겠지만 겉으로는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하면서 내색을 잘 안하죠. 상주도 객들도 마찬가지인것 같아요.물론 그 모습뒤에 내재된 슬픔을 느끼지만요...

stella.K 2004-07-2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갓집 아주 가끔씩 다니곤 하지만, 마냥 슬프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오랫만에 그간 못 만난 사람을 만나는 건, 결혼식장에서 보는 것 보다 더 짙은 감동이 있더라구요. 왜 일까요? 그래. 우린 이렇게 살아서 서로 만나는구나. 하는 감동일지...
저도 오래전 아버지를 보내드렸지만, 그때 찾아 온 사람들이 참 반가웠어요.

ceylontea 2004-07-2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가집...제가 처음 갔을때는 초등학교 6학년인가 5학년인가 했을때 같아요..(6학년이었을 것 같아요..)... 같은 반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지요... 지금은 사망원인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저희 부모님도 젊으셨을때라.. 부모가 돌아가신다는 것에 대해 상상조차 못하던 그때였죠...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기억정도만 남아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기억에 남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인 것 같아요... 저랑 친한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셨지요. 중학교때도 같은 학교였고.. 그 중학교 3학년 내내 같은 반을 했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지요... 그리고 친구네 집이 가까워서 가끔 놀러가 뵙기도 했었는데...
그리고 제가 직장인이 되고나서는 정말 상가집에 갈 일이 많이 생기더군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호상이든 너무 어이 없는 죽음이든... 마음이 먹먹해지더군요.

잉크냄새 2004-07-3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우린 이렇게 살아서 서로 만나는구나 하는 감동...
전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음의 순간에 직면했을때 과연 죽음을 또 다른 생의 연장선이라고 볼수 있을까 하는 생각. 니어링 부부의 책을 읽으면서 남편을 떠나보내는 헬렌의 담담한 모습이 왠지 근접할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오더군요. 어떤 사고로 세상을 살면 삶과 사랑과 죽음을 연속선상에서 볼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미네르바 2004-08-12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의 잠언에 보면 지혜있는 자는 상가집에 가라고 하더군요. 상가집에 가면 좀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은 생을 더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거겠지요.

잉크냄새 2004-08-1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 있는 곳에서 삶을 생각한다. 뭔가 모순인것 같으면서도 의미심장하네요. 원래 진리는 모순속에서 더 빛나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