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거워짐에 대하여

- 박 상 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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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던가요? 우리는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라고.

낡음, 오래됨 같은 단어에서는 왠지 포근함과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 오랜 세월을 통해 서로에게 편하게 길들여진것 같아요. 낡은 신발속의 발처럼 말이죠.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조금은 헐거워서 편안한 그런 사람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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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도 구두도 낙낙한 것이 좋아요.
사람도 좀 어리숙해서 편한 사랑이 좋고요.
내 몸에 발에 딱 맞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지고 헐거워진 것들이 좋아요.
시 잘 읽고 갑니다.

호밀밭 2004-07-29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가 잘 길들여져서 발이 편안해지면 안심이 되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발 치수보다 하나 정도 큰 것을 사게도 되더라고요. 헐거운 게 좋아서요. 사람도, 인생도 너무 꼭 끼면 숨이 막히기는 할 거예요. 저도 저에게 편안한 사람이고 싶네요.

잉크냄새 2004-07-3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근함, 아늑함... 왠지 낡은 냄새가 나면서도 단어 자체에서 뿜어져나오는 그 따스한 온기를 느낄수 있어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삶에서 조금은 헐거워질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네요.

水巖 2004-07-3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맞는 말씀이군요. 우리는 얼마나 빡빡한 세상을 살고 있었는지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것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