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들의 읍에 묻혀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뒤돌아선다. 돌아가신 분이 어느 시절부터인가 준비하셨을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영정, 영혼처럼 피어오르는 향, 지인들이 보냈을 이름이 적힌 화환, 삼베를 두른 상주들의 모습. 상가집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고 본다. 상가집이란 말보다는 장례식장이란 말이 더 어울릴것 같다. 이제는 집보다는 보통 병원이나 일반 장례식장에서 더 많은 상이 치루어진다.
처음 상가집에 간것은 고등학교때이다. 야간 자율학습을 빼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간 친구 어머님의 상가집이다. 그 당시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선생님이 가는 도중 내내 말씀하신 죽음이라든지 허무함이라든지 하는 말들이 가슴에 와닿지 않은것 같다. 그저 친구가 당한 슬픔에 대한 막연한 연민과 측은지심이랄까 현실의 나와는 무관한 별세계의 일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가는 상가집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업무를 마치고 멀리 떨어진 상가집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덜컥 겁이 나는 때가 있다. 서둘러 고향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실없는 놈이라는 꾸지람에도 괜시리 눈물 한방울 찔끔하며 이렇게 살아계심에 감사하며 미소짓는다. <검은양복>이란 단편드라마가 생각난다. 가난한 살림에 마지막으로 어머님의 상에 입을 검은 양복을 준비하는 맏형의 이야기를 보면서 막연한 슬픔에 사로잡혔었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될수도 있다는 불안감, 솔직한 심정이다.
영정에 절을 하고 물러나 자리잡고 있으면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초저녁부터 도착하기 시작한 친구들이 한밤중이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모두 한곳에 모인다. 우리가 슬픔에 대하여 나누는 대화는 적다. 그냥 쳐다보며 편안히 돌아가셨는지를 묻고 어깨 한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슬픔의 표현을 대신하는것 같다. 보통 누가 장가를 갔다든지, 아이를 낳았다든지, 회사에서 승진했다든지, 사업을 한다든지, 때론 오래전 소식이 끊긴 친구의 최근 소식과 그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밤을 새운다.
새벽이 찾아오면 장지까지 따라갈 몇몇 친구를 제외하곤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간다. 오래된 명함을 바꾸고 무사히 돌아가라고 등 두드리며 다음에는 자주 만나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가 다시 이렇게 모두 모이는 자리는 또 어느 친구의 상가집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또 살아온 일들을 이야기할 것이다.인생은 어차피 살아가는 문제이기에 삶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가집, 어쩌면 그곳은 죽음의 연민 대신 삶의 포근함이 자리잡은 곳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 떠나시는 분의 마지막 배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