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와 국교 수교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은 시리아를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터키 국경 도시 안타키아 출입국 사무소 벽에 붙어 있던 비자 발급 비용표에 SOUTH와 NORTH KOREA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좀 신기하고 의아하기도 했지만 비자 비용 지불만으로 인터뷰도 없이 간단히 국경을 통과한 상황이었다. 숙소에서 만난 여행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수교 문제를 처음 듣게 되었는데 수교조차 맺어지지 않아 국가의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곳에서 여권 분실이 가져올 파장이 지레 두려웠고, 이 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분들의 삶이 무척 궁금해지곤 했다.


다마스커스에서 묵던 게스트하우스는 한국 가족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중부 도시 하마에서 내려온 버스가 정차하던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전통 가옥을 그대로 숙소로 사용하던 이층 건물이었다. 삐거덕 소리가 나는 두터운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은 소파와 연탄 난로가 놓여 있는 작은 공간 하나를 지나야 마당이 나왔다. 하얀색 그리스풍 분수가 있는 마당을 포함한 집의 구조는 중국의 자그마한 사합원과 유사했다. 일층은 가족이 생활하면서 부엌 한 쪽 면을 여행객을 위한 한국 식당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외부에 계단을 통해 올라간 이층의 골목 쪽은 일반 객실로 안쪽은 도미토리로 사용했다. 

<오른쪽 건물이 숙소다. 나무 대문을 밀면 삐걱~ 하며 다마스커스의 오래된 골목이 찌뿌둥한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난다>


여사장님은 아담한 체구에 만면에 밝은 웃음을 띈 조용한 분이셨다. 부엌 한 곁에 숙소 손님을 대상으로 음식을 파셨는데 김치찌개를 무척 잘 하셨다. 이스탄불 이후 거의 삼 주 만에 접한 김치찌개는 눈물 나도록 맛있었는데 도착한 첫 날 짐도 풀기 전에 배가 터져라 먹었다. 벽에 걸린 십자가나 종교 관련 그림을 통해 그 분의 종교 성향을 알 수 있었는데 독실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우리와의 일상 대화에서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지는 않는 분이셨다. 남사장님은 아내분과 함께 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가 마주치는 때는 주로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해질녘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오는 입구 작은 방의 조개탄 난로 옆 낡은 소파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사장님과 술 한 잔 할 일이 있었는데 난로 옆에 세숫대가 놓여 있고 양복 차림의 한 중년 남성과 앉아 있었다. '이 곳 사람들은 똥집을 안 먹어요' 라며 세숫대 가득 똥집을 들고 오신 중년 남성은 한국인 사업가로 중동에 실크 히잡을 수출하여 꽤 성공한 분이셨다. 가끔 다마스커스에 들릴 때 사장님과 술 한잔 하는 모양이었다. 네 명이 밤이 이슥하도록 똥집을 구우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었는데, 그는 본인의 의지보다는 아내와 딸의 삶을 위해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마스커스 골목에는 유독 폭스바겐형 경차가 많다. 이디오피아-예멘을 거쳐 유럽으로 올라가던 커피가 머물던 오래된 커피숍들이 자리하고 있다>


고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은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다만 모국어를 사용하는 또래 친구가 없었던 탓인지 저녁 늦은 시간 숙소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계단을 오르는 경쾌한 발소리를 울리며 문을 두드리곤 했다. 도미토리에는 세 명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 영국 유학을 마치고 육로로 귀국길에 오른 여대생과 언니 동생하며 늦은 시간까지 수다를 떨곤 하였다. 여기까지는 영락없는 여고생인데 좀 독특한 면이 있었다. 수교도 맺지 않은 이 낯선 나라에 종교적인 이유로 온 것이다. 동방으로부터 온 메시아가 다마스커스에서 출현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메시아가 자신이라는 신념. 어머니 또한 자신의 딸이 메시아라는 믿음 속에 생활하고 있었다. 


중동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이슬람 의식 아잔으로 시간 기준을 삼게 되곤 한다. 한밤중의 아잔 소리에 창문 밖 어둠을 응시하며 하루를 정리한다든지, 새벽 미명의 아잔 소리에 잠을 깨어 창을 열어 새벽 공기를 맞이하게 된다. 종교 의식 자체가 삶의 한 형태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기분이랄까. 그래서일까. 그들의 꿈이 이질적이지만은 않았다. 종교적 신념은 물론 보통 신념조차 가져본 적이 없는 입장에서는 다소 의아하면서도 경외감마저 들었다. 국가의 보호가 전무한 이 곳에서 삶을 꾸려갈 의지와 용기는 종교적 믿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가족이 선택한 기약 없는 기다림의 끝은 무엇이었을까. 기다림이 그들 가족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함부로 재단할 일은 아닐 것이다. 삶은 옳고 그름의 이분법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다만 삶이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다.


IS가 시리아 유적지 팔미라를 파괴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난 가장 먼저 그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국민에 대한 보호마저 사라진 그 곳에서 그들은 이방인으로써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다마스커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골목골목 비집고 들어오던 햇살은 포근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렸겠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니르바나 2025-12-09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사도 바울이 회심했다는 다메섹에 다녀오셨군요.
여행 중 묵으셨던 게스트하우스 주인 가족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딸과 그것을 믿는 어머니라니 재미(?)있는 모녀입니다.
이 분들은 메시아란 뜻을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요.
개인적인 종교 신념이야 자유의지니까 그렇다쳐도
자칭 메시아로 나섰던 사람들의 뒤끝이 영 개운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거시기합니다.
아무튼 잉크냄새님 덕분에 인간적인 다마스커스 풍경과
거기에 사는 분들의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잉크냄새 2025-12-09 21:17   좋아요 1 | URL
네, 다마스커스는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골목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오래된 골목으로, 기독교인에게는 사도 바울의 회심으로, 커피 애호가에게는 유럽으로 커피가 전해지던 통로로, 이슬람에게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마이야 모스크로...

전 종교가 없다 보니 메시아 이야기도 사실 자체의 진위보다는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바라보았어요.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한 딸, 자신의 딸을 메시아로 생각한 어머니. 누구의 신념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페넬로페 2025-12-09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명한 그곳, 다마스커스에 다녀 오셨군요. 여행을 많이 다닌 저의 지인이 시리아나 이란에 좋은 여행지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최근에 본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을 보고 답답함이 많이 느껴졌어요. 어서 중동이 좀 더 평화롭고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요.

잉크냄새 2025-12-10 13:25   좋아요 1 | URL
시리아에는 티크리스 유프라테스 문명부터 내려온 오래된 유적들이 참 많아요. 창세기, 십자군등 역사의 굵직굵직한 굴곡의 흔적이 많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다마스커스의 골목이 최고였습니다. 중동의 평화는 곧 세계 평화의 시발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힐 2025-12-09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네요. 메시아가 자신의 딸인 것을 안 엄마와 아빠는 어쩌면 계시에 의해 그곳에 머물고 있는 거네요. 그분들이 가진 믿음의 세계, 잉크냄새님 말씀처럼 저도 경이롭네요.

잉크냄새 2025-12-10 13:20   좋아요 1 | URL
여행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삶은 우리 삶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여행자의 삶도 매력적이지만 그곳이 삶의 터전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삶 또한 흥미롭습니다. 가끔 삶이 지지부진할때 문득 그때의 어느 시점을 떠올려보면 삶은 여전히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차트랑 2025-12-10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치 찌개라니, 관심 가는군요!! 그러나, 헐~ 올해 4월에나 국교를 수교했다는 군요!!! 충격이네(요) !! (혼잣말인데 적절하지 않아 첨어합니다^^)

잉크냄새 2025-12-10 13:25   좋아요 0 | URL
전혀 생소한 장소에서 만나는 고국 음식은 눈물겹습니다. ㅎㅎ
시리아 국토 건설을 위해 올해 한국과 수교를 맺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다행이지만 고대 문명의 흔적, 시리아 사람들의 순수함, 옛 도시의 고즈넉함 등은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감은빛 2025-12-10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종교적 믿음으로 수교도 맺지 않은 나라에서 숙박업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이라니!

일단 중동에 대해 지리 감각이 전혀 없어서
시리아는 어딘지, 다마스커스는 어딘지 몰라 지도 검색부터 해봤어요.
제가 정말 중동 지리를 몰랐더군요.
이스라엘 위치만 대략 알고 있었는데, 그 주변을 이렇게도 몰랐을 줄이야.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 기다릴게요.

잉크냄새 2025-12-10 20:52   좋아요 0 | URL
여행을 다니다 보면 우리가 정의한 삶의 범주를 벗어나 자기 주관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더군요. 저도 한때 길 위의 삶을 꿈꾼 적도 있는데 지금은 돌아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ㅎㅎ

예전에는 하나의 도시를 기준으로 여행기를 올렸는데 지금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글을 남겨보고 있습니다. 추억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꾸준히 올려봐야죠.
 

건망증


- 박성우-


깜박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 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 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엔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 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시를 적고 무언가를 끄적이려고 하다 그 무언가를 잊어버렸다. 시인과 완벽한 몰아일체의 경지가 되는 순간이다. 무언가를 잊은 듯 돌아서고 나서도 그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무언가를 잊은 것보다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올 때가 더 서글픈 법이다. 가끔 어딘가 나를 놓고 자꾸 뛰쳐나갈 때가 있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힐 2025-11-20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건망증이 치매 증세로 의심 될 때가 요즘들어 자주 있어요. 그것보다 더 서글픈 것은 잉크냄새님 걱정처럼 나를 놓고 자꾸 뛰쳐 나간다는 것에 공감이 된다는 겁니다. 우산 잃어 버릴 때가 더 좋았네요..ㅜㅜ.

잉크냄새 2025-11-20 21:47   좋아요 1 | URL
건망증은 모세혈관 감소로 인한 것이라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반면 치매는 뇌세포의 죽음 문제라 기억 저장소가 망가진 상태라 하네요. 아직은 건망증 단계인가 봅니다. ㅎㅎ
우산을 어디 놓고 왔는지 모르는 것은 만인의 공통 사항인가 봅니다. 하도 잘 잃어버려서 비가 어지간히 내리기 전에는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페크pek0501 2025-11-30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군가가 얘기하고 있을 때 난 그 얘기를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깜빡 잊어 그게 뭐 였더라, 하고 마는 것입니다. 끝내 생각나지 않다가 집에 오면 떠오릅니다. 제 경험입니다.ㅋㅋ

잉크냄새 2025-11-30 14:34   좋아요 1 | URL
집에 오면 떠오른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ㅎㅎ 우린 아직 희망을 이야기할 때인 겁니다요!!!

감은빛 2025-12-06 15:25   좋아요 1 | URL
저도 집에 와서 생각났다면 다행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미 잉크냄새님께서 쓰셨네요. 저는 비슷한 상황에서 하려던 말을 끝까지 생각해내지 못한 경험이 있어서요. 아마 평생 떠올리지 못하겠죠.

잉크냄새 2025-12-07 09:30   좋아요 0 | URL
아마 평생은 아닐 겁니다. 어느 순간 기억을 건드리는 손길이 닿으면 뜬금없이 다 하지 못한 말들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2025-12-04 1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4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4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6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7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5-12-06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를 두고 다닌다는 생각을 저도 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시네요.

오늘은 갑자기 중국 노래들에 꽂혀서 언젠가 잉크냄새님이 알려주셨던 노래들을 찾아듣고 있어요.

잉크냄새 2025-12-07 09:33   좋아요 0 | URL
나를 어딘가 두고 떠나시는 분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어딘가 두고 또 다른 어딘가로 뛰쳐 나가니 말입니다. ㅎㅎ

중국 노래 2탄도 한번 준비해 볼께요.ㅎㅎ
 
다시 만난 어린왕자
장 피에르 다비트 지음, 김정란 옮김 / 이레 / 199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금발머리를 가진 어떤 사내아이 하나가

 당신에게 다가와 미소를 지어 보인다면,

 그리고 말을 건네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아이가 누군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제게 친절을 베풀어 주십시오.

 날 이토록 슬픔에 잠겨 있게 내버려 두지 마시고

 그 아이가 돌아왔다고 편지를 써서 알려 주십시오...>


여우와의 대화에 워낙 주옥 같은 글들이 쓰여있다 보니 어린 왕자가 사막에 쓰러져 별로 돌아가고 난 후, 쌩텍쥐베리가 그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에 책 말미에 절절하게 쓴 이 편지를 잊고 산다. 어린 왕자만 남고 작가는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소설의 형태일 수도 있지만 어린 왕자의 소식만 기다리는 쌩텍쥐베리 입장에서는 가슴이 타 들어갈 일이다. 가슴 떨리며 몰래 남겨둔 연서를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으니 말이다. 


이 책은 책 말미의 편지를 포착한 작가가 어느 섬에서 어린 왕자를 만나고 그가 돌아왔음을 알리는 편지의 형태를 빌려 전개하고 있다. 답장은 어린 왕자의 별 B612에 우연히 도착한 써커스단에서 탈출한 호랑이로부터 시작된다. 호랑이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호랑이 사냥꾼을 찾기 위해 양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지구에 도착하기 전 여러 행성을 전전한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지구별 인간 군상들을 만나고, 드디어 작가를 만나게 되는 여정을 그린다. 어린 왕자의 플롯을 그대로 빌려와 사용하고 곳곳에 오마주 형태의 글이 숨어있어 점잖은 패러디 혹은 답장을 모방한 표절 아니야 할 수도 있겠지만, 답장을 받은 쌩텍쥐베리가 '이건 어린 왕자가 아니야' 라고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토록 바라던,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머금은 금발머리 소년의 소식을 전해주는 친절을 베풀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답장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또 다른 편지인 셈이다. 어여 우편함을 뒤져 읽어보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5-11-09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인 줄 알았어요. 부분적으로 좋은 문장만 기억하고 있는 작품이라 재독해야 할 책들 중 하나예요. 저에게는.
이 책은 어린 왕자 그 후의 이야기인 셈이군요. 궁금합니다!!!

잉크냄새 2025-11-09 20:26   좋아요 1 | URL
어린 왕자 이후의 이야기보다는 우리가 만난 어린 왕자가 더 적합할 것 같아요. 쌩텍쥐베리가 묘사한 어린왕자의 모습을 더 기억해둬야겠어요 문득 지나쳐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꾸이양贵阳에서 탄 야간 버스가 8시간을 달려 꾸이린桂林에 도착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꾸이린은 '桂林山水甲天下꾸이린산수이쨔텐샤(꾸이린의 풍경이 천하 제일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도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카르스트 지형의 영향으로 둥글둥글하고 나지막한 산들이 작은 어깨를 맞대어 있는 모습이 정겹다. 개인적으로 중국하면 떠오르는 가장 중국다운 풍경으로 여기는데 아마도 무협지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그런 꾸이린의 풍경중에서도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버스로 시간 반을 더 달려 도착하는 양수오阳朔라는 지역이 손꼽힌다. 대나무 땟목을 타고 강을 내려오며 천천히 바라보는 풍경은 압권이다. 리강漓江을 따라 땟목을 타거나 강변을 산보하는 것은 한 폭의 수묵화 속을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둥글둥글하고 나지막하게 어깨를 맞댄 산들이 이어진다. 수묵화처럼 여백이 느껴진다>


저녁 나절 강가에서 늙은 뱃사공을 만났다. 대나무 땟목을 타고 천천히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그는 마침 해 지는 강가에 앉아 있던 나에게 다가왔다. 양수오의 풍경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가마우지 낚시를 보여주겠노라고 제안했다. 해 저문 이후라 잠시 망설이다 좁다란 땟목에 올라탔다. 다시 강을 거슬러 힘겹게 한참을 지나 강변에 위치한 어느 배 옆에 멈추었다. 그 배 위에는 나무집이 올려져 있었고 그 곳에서 가족이 생활하고 있는 듯 했다. 저녁 식사 중이었는지 숟가락을 입에 문 아이가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뒤로 백열등의 붉은 기운이 창문을 통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석양이 마지막 긴 꼬리를 감춰버린 어두운 강가에 창문에서 작게 번지던 불그스름한 기운이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옆으로 타고 온 땟목과 유사한 형태의 땟목이 두 대 가량 메여 있었고 주위에 가마우지 몇 마리가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려 선상가족의 뱃사공과 강으로 다시 나갔다. 낚시용 땟목은 강을 거슬러 온 땟목에 비해 좀 더 넓었고 후미에는 모터가 장착되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물고기를 담을 커다란 둥근 통이 놓여져 있었고 그 중간에 뱃사공이 서서 삿대를 저었다. 선수에는 집어등 역할을 하는 백열등이 'ㄱ'자 형태로 높다란 장대에 매달려 밝게 빛나고 있었고 그 집열등 아래에 목욕탕 의자를 펼치고 내가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아귀의 주둥이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었다. 둥근 대나무가 이어진 위에 의자를 펼쳐야 해서 수평을 잡기가 쉽지 않아 낚시하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대여섯 마리의 가마우지들은 땟목 곳곳에 자리를 잡고 꽥꽥거리고 있었고 낚시 지점에 도착해서야 사공의 삿대에 떠밀려 물로 잠수하였다.

<당시에는 손떨림 방지 기능이 없는 카메라여서 다 흔들렸다>


보통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마우지의 목에 줄을 묶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줄이 묶여져 있지 않았다. 원래 그러한 것인지, 이 지역만의 특성인지, 아니면 이 사공만의 배려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줄이 묶여져 있지 않으니 물고기의 크기에 따라 가마우지들의 행동 양식이 바뀌었는데 그 모습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먼저 작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가마우지들은 배로 다가오지 않는다. 물 위로 떠올라 그 자리에서 가볍게 울대를 움직여 꿀꺽 삼켜버린다. 맛을 음미하는지 잠시 물 위에 둥둥 떠서 노닐다 노동을 재촉하는 뱃사공의 삿대가 다가오고 나서야 다시 물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뱃사공 또한 작은 물고기에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큰 물고기를 잡았을 때는 주변이 온통 떠들썩해진다. 입 안 가득 담고도 모자라 몸통의 절반 정도가 입 밖으로 나와 버둥거리는 물고기를 물고 표면으로 튀어 나온다. 월척을 알리는 신호인지 다른 때에 비해 유독 시끄럽게 꽥꽥 소리를 내는데 그 순간 주변에 잠수 중이던 다른 놈들까지 몰려와 합창으로 떠들어 댄다. 개선 장군의 후광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상금 쟁탈전을 치르려는 것인지, 주인공을 중심으로 몰려드는데 별다른 소요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전자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배 위로 올라온 주인공은 쥴리메 컵을 들어 올리던 펠레처럼 의기양양하게 잠시 두리번거리다 커다란 통에 물고기를 뱉어내고 잠시 숨을 고르는데 월척에 대한 보상인지 사공도 잠시의 휴식 시간을 허락한다. 주변에 몰려들었던 추종자들도 배에 오르려다 삿대에 쫓기어 다시 자맥질 하는데 그걸 바라보는 월척 사냥꾼의 눈빛이 거만하다. 그도 잠시 후 삿대에 떠밀려 다시 자맥질한다. 

<월척을 잡은 애들만이 잠시의 휴식시간이 허락된다. 노동은 가혹하다>


어중간한 크기의 물고기를 잡았을 때는 야밤의 살풍경한 추격전이 벌어진다. 보통 가마우지는 땟목의 집어등을 기준으로 주변을 돌며 자맥질을 하는데 넘어갈 듯 말 듯한 물고기를 문 가마우지는 순간 땟목으로부터 달아난다. 그 순간을 포착하기 어렵지 않은 것은 눈치 없는 주변의 추종자들도 그 뒤를 무리 지어 따르기 때문이다. 사공이 후미의 모터를 켜는 것이 이 순간이다. 한 손으로 모터를 조정하고 한 손으로 삿대를 들어 올려 도망자 가마우지가 숨을 쉬러 나오는 포인트를 사전에 명확히 선점한다. 강물은 맑고 집어등이 밝아 한 밤에도 물 속을 유영하는 가마우지의 날쌘 몸놀림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이리 저리 방향을 트는 가마우지보다 쫓아가는 사공의 실력이 한 수 위다. 물 위로 나오는 지점에 삿대가 먼저 자리 잡아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몇 차례 타이밍을 놏쳐 버린 가마우지는 잠시 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긴 탄식을 쏟아내며 배로 다가온다. 나무통에 물고기를 뱉어내고 애처로이 사공을 바라보는 가마우지에게 이번에는 괘씸죄가 적용되어 휴식 시간의 보장도 없이 삿대에 떠밀러 다시 물 속으로 자맥질한다. 


자맥질에 지친 가마우지와 돌아오는 길, 땟목에 올라타 숨을 고르는 그들을 바라보다 문득 욕망은 인간이나 가마우지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당할 수 있는 욕망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가늠하기 힘든 욕망이 다가올 때이다. 욕망은 절대 불가능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목울대를 넘어갈 듯 부드럽고 젠틀하게, 손만 뻗치고 조금만 노력하면 잡힐 듯 가깝고 친밀하게, 하지만 그건 허상이고 미끼다. 욕망은 허상을 삼키며 그 크기를 키운다. 미늘에 꿰여 끌러갈 때에야 비로소 욕망은 아프고 허탈하다. 삼킬 수 없이 커져버린 욕망 앞에서는 오히려 가마우지가 현명하다. 인간은 이룰 수 없는 욕망 앞에서 좌절하지만 가마우지는 포기할 줄 아는 현명함을 가졌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땟목 위에 엎드린 그들을 보니 놀고 먹는 놈이 뭘 보냐며 다시 꽥꽥거린다. 

<낚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 양수오 시내가 보인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25-10-22 0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떨방이 없느 카메라라고 하시니 오래전에 찍으신 사진이신가 보네요.그나저나 댜큐에세 본 가마우지 낚시는 다시 봐도 신기하긴 한데 너무 동물학대인 것 같아서 보기 안쓰럽네요.

잉크냄새 2025-10-22 18:27   좋아요 0 | URL
네, 십 년 조금 넘었네요. 특히 야밤에 흔들리는 작은 배 위라 더 심했던 것 같아요.

가마우지가 가축의 범주에 속할진 않겠지만 수 만년 동안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의 운명이 서글프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방향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생명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 밖에...

2025-10-26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26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26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26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5-10-30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수묵화네요. ˝저녁 식사 중이었는지 숟가락을 입에 문 아이가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뒤로 백열등의 붉은 기운이 창문을 통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석양이 마지막 긴 꼬리를 감춰버린 어두운 강가에 창문에서 작게 번지던 불그스름한 기운이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멋진 문장입니다.

잉크냄새 2025-10-30 19:34   좋아요 0 | URL
네, 여행을 하다 보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모습들이 있어요. 이 모습도 여행지의 멋진 풍경 못지 않게 기억 속에 남아있던 따뜻한 풍경입니다.
양수오의 풍경은 좀 더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면 진짜 멋진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붓이 이리저리 지나간 느낌이 들곤 합니다.

2025-12-06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7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리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한순간의 소리를 1분, 한 시간, 하루 또는 1년으로 늘려놓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본다. 소리의 총량은 그대로지만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그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로 인식하지 못한다. 유리잔 스스로도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하필이면 깨지는 유리잔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삶은 이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사건의 과정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청년은 노인이 되고 기억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우리는 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연장된 사건의 미세한 파편들로 이루어진 안개 속에 있다. 예감은 어긋나고, 하나의 사건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종결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무슨 일이었는지 안다.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세월의 덧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삶이라는 사건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장된 시간 때문이다. 수만 분의 1초로 분할된 느린 화면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유리잔처럼 순식간에 부서져버릴 것이다. -p51~52- 유리잔


파트리크 쥐스킨트에 따르면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계열 필수인 물리학이 F 학점인 스스로도 영 믿음이 가진 않지만 윗 문단에서 독서 건망증에 대한 합리적 변명과 상대성 이론을 함께 읽어냈다. 그러니까 삶에서 유리잔이 쉽게 깨지지 않는 것은 유리잔이 부딪히고 균열이 가고 산산조각이 나도록 늘어나는 그 시간 동안을 우리가 기어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어져 나가는 시간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 당장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유리잔이 깨지는 시점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을 늘여놓은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느끼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삶이 수동태냐 능동태냐의 차이 정도랄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힐 2025-10-13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우리는 늘 오늘이라는 시간의 늘어남 속에서 있는 거였네요.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시간에 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시간은 빠른 것이 아니였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10-13 21:16   좋아요 1 | URL
시간의 늘어남을 오늘에 대입해보니 과거-현재-미래가 분절되지 않고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더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매듭짓지 못하면 불안에 빠지는 인간의 심리가 하나의 연장선을 과거-현재-미래 라는 단락으로 구분해 버린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transient-guest 2025-10-18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제가 그래서 자신이 늙었다는 걸 모르고 아이처럼 살고 있나봅니다.ㅎㅎㅎ

잉크냄새 2025-10-19 10:45   좋아요 1 | URL
앗, 이것은 철부지에 대한 엄청 철학적인 변명거리가 될 것 같네요. ㅎㅎㅎ

페크pek0501 2025-10-19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과 관련된 위의 글을 읽으니 - 5년, 10년이란 시간은 아주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주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는 평소 생각이 떠오릅니다. 시간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는 듯합니다.^^

잉크냄새 2025-10-20 19:21   좋아요 1 | URL
심리적 시간은 개인적 편차가 크다 보니 다 다를 수 있겠네요. 일직선의 인간 생을 년으로 분류하는 것은 반복되지 않고 이어지는 끝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라는 설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