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징역살이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人性)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 온다 하던 비 한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老炎)도 더는 버티지 못할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秋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秋水)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줄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사했던 귀휴 1주일의 일들도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아마 한 장의 명함판 사진으로 정리되리라 믿습니다.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친정부모님과 동생들께도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1985.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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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읽으시는군요..흐흐^^

비로그인 2005-07-25 0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옥중서신. 다시 읽고 싶은 책, 1순위에 꼽히는 책입니다. 아, 그나저나 찌찌뽕! 아무래도 날씨 탓일까요? 며칠 전에 땀이 진득하게 고인 제 팔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무심코 '존재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라는 구절을 떠올렸걸랑요. 미움받지 않으려 자주 씻고 다니려 노력은 하는디, 어째..좀..(거참, 요즘 날씨하곤ㅡㅡa)

진주 2005-07-2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부분이 가장 와닿았어요.-옆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 징역살이....

잉크냄새 2005-07-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드디어가 아니랍니다. 벌써 한달가량 보고 있답니다. 보고 또 보고 의미를 되새기면서...
복돌이님/ 제가 읽자마자 다시 읽고자 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이번 여름휴가에 다시 한번 읽을 요량입니다. 존재로 인하여 기쁘고 존재로 인하여 슬픈 인간의 모습을 참 잘 나타내는 글인것 같네요.
진주님 / 저도 여름 징역살이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외에도 유랑, 문신, 노랑머리 창녀에 관한 글도 기억에 남네요. 이 글이 책 표지에 올라있는 글이죠.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이미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아버지,
나이를 먹고 철이 들수록
아버지란 단어는 이 세상 가장 외로운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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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7-1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은 장영희 교수님의 책에서... 아버지의 고독과 죽음을 말하는 문학 작품으로... ..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을 이야기했었거든요... 어제까지 붙잡고 있었던 책이어선지...기억이 나요 ^^

stella.K 2005-07-1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잉크님도, 이카루님도.^^

진주 2005-07-1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분들이 다 모였네요^^(주제랑 상관없는 얘기)

잉크냄새 2005-07-1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 님의 서재에서 장영희 교수님 책 리뷰를 보고 왔어요. 좋은 책 읽고 계시네요.
스텔라님 /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진주님 / 저도 반가워요.

비로그인 2005-07-1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참..아릿하네요. 돌아가신 아부지 휜 등도 생각나고.. 글고 저두 '반가운 분'들 속에 낑궈 주세요. 같이 놀아요!

파란여우 2005-07-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은 아부지의 꾸부정한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아, 이거 반갑다는 인사 모드인가요? 그럼, 방가방가...^^

Laika 2005-07-1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아부지!!
아부지한테 문자 한번 날려야겠네요...

내가없는 이 안 2005-07-20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님 뵈어요. ^^ 휴가 잘 보내시라고 제 서재에 답글 달았지만... 덕담은 여러 번 해도 입 닳지 않으니깐... 좋은 휴가시간 보내시라구요... ^^
그런데 이 시를 적으실 때 뭔가 쓸쓸한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잉크냄새 2005-07-2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 그런 기억이 떠올랐군요. 글고 님도 반가운 분에 낑궈드렸으니 판 벌리고 놉시다.
여우님 / 님 서재의 아버지에 관한 페이퍼 내용이 잠시 생각납니다.
라이카님 / 아, 그러고보니 님 아버님의 문자 메세지 페이퍼 본지가 꽤나 된것 같네요.
이안님 / 오랫만이죠. 덕담은 아무리 들어도 귀도 닳지 않는답니다. ^^ 뭔가 쓸쓸한 일은 아니고... 일요일날 통화한 아버님의 목소리가 한동안 가슴에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 두고 안타깝던 날이 있었다. 
우체국, 구태여 유치환의 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마냥 그리운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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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7-07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 시집 좋아하는데요. 새삼 이렇게 읽으니 더 좋습니다. ^^

파란여우 2005-07-0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좋아해요^^

Laika 2005-07-0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07-08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7-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 안도현의 시집중 그런 시집이 있었군요. 바닷가 우체국...왠지 낭만적인 냄새가 풀풀 풍겨지는군요.
여우님 / 도현을 활용한 언어유희...멋지구리합니다.
라이카님 / 너무 멋진 사진입니다. 지중해 어느 해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드네요. 이 사진 페이퍼에 삽입할께요. 멋진 합작품입니다.
속삭이신님 / 이제 사막으로 갈 일만 남았군요. ^^ 저도 사막은 특별한 이유없이 한번 정도 다녀오고 싶은 곳입니다.

Laika 2005-07-0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네덜란드"의 "볼렌담" 갔을때 찍은 사진입니다. 맘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미네르바 2005-07-0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우체국에서 편지를 써 보았던 저는 왜 여지껏 인생을 모를까요? ^^

잉크냄새 2005-07-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 아, 어쩐지 눈에 익는다 싶었거든요. 작년 님의 서재에서 보았기에 기억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나 봅니다.
미네르바님 / 전 유치환의 시를 읽고 우체국에서 편지도 쓰고 싶었고, 우체국 창문 너머로 하늘과 행인들을 바라보기도 했죠.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이죠.^^

비로그인 2005-07-1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혼자 잘났다고 폼 재며 살 세상, 아닌 거 같습니다. 이 시 뜨는 거 보자마자 카메라 들고 동네 우체통 찍으러 갔습니다. '바닷가는 아니지만 잉크냄새님, 우체통 통째로 받으세요, 헷..선물이에요."라고 수줍게 올리려는 순간, 더헙! 라이카님이 오리지날 '바닷가 우체국' 사진을!! 눈에서 초강력 레이저빔 발사되면서 슬슬 꽈배기 먹은 사람처럼 심사가 뒤틀리더니 오늘은 그래도 질투심이 쪼까 진압 되는 바람에 글 남깁니다. ㅡㅡa
헤헤..라이카님! 사진 정말 죽여요!!

비로그인 2005-07-1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은 안 달아주셨지만 분명히 몰래 들어와 읽으셨을 거야.. 수상해..어디선가, 먹물 냄새가 난다구..아닌가, 저녁에 쩝쩝거렸던 먹물 오징어튀김 냄샌가..킁킁..

잉크냄새 2005-07-15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 복돌님의 동네 우체통이 무지 궁금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중 하나가 빨간 우체통이라고요. 그리고 아마도 잉크냄새가 아니라 먹물 오징어 튀김 냄새가 맞는것 같아요. 이 기회에 먹물냄새로 아이디 바꿔볼까요? ^^

비로그인 2005-07-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동네 우체통은 아무리봐두 넘 지저분해요. 동네 조무래기들이 다닥다닥 껌을 붙여놔서 술 취한 저녁에 보면 외계인이 서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라구요. 글고 오징어 먹물냄새 비릿하니 안 좋았거덩요. 긍께로 기냥 지금의 닉을 사수하시쪙!

icaru 2005-07-2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물냄새~ 하니까 붓글씨 쓸 때 묵향이...맡아져서...고즈넉했는데... 딱 그앞에 오징어를 들이대니까는... 푸히히... 그래도 오징어는 술 안주로 심심풀이로... 짱이에요 짱!!

잉크냄새 2005-07-2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 그래도 그런 우체통이 더 정겨운 법이지요. 그리고 닉은 사수합니다. 다만 잉크와 냄새를 따로 떼어 뒤의 것으로만 부르지 마세요
이카루님 / 아, 묵향...머릿속에 아련히 떠오르네요. 지금도 애들 붓글씨 쓰는지 모르겠네요. 전 붓보다는 펜글씨를 즐겨썼지만 왠지 나이들면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붓글씨만한 것도 없는것 같아요.

montreal florist 2009-09-19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시군여, 파란색 하는 배경에 빨간색 우체통도 예뿌구여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수 없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아니면 가슴속에 절로 생겨난 의문인지는 몰라도 바닷가에서 바라본 먼 산속의 무지개의 끝이 그리도 궁금했었다. 산맥을 배경으로 펼쳐진 무지개의 한쪽 끝은 지평선을 넘어버려 너무 먼 환상의 세계처럼 느껴졌고 다른 한쪽 끝은 한달음에 달려갈수 있을것만 같은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그 날의 환상과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후 무지개가 또 다시 아치를 그리며 떠올랐을때 동네애들 몇 명이랑 급조한 도시락을 달랑 들고 비가 막 그친 산속으로 떠났다. 원래 꿈과 환상이랑 다가간만큼, 아니 그 배로 멀어지는지라 느린 꼬마들의 걸음에 무지개의 끝은 점점 멀어지고 잠시후 환상이 그러하듯 사라졌다. 걸어온 길이 아쉬운듯 길게 목을 빼고 뒤를 돌아본후 지도상에 점을 찍듯 절벽처럼 펼쳐진 산맥의 한군데를 무지개의 끝으로 정했다. 그곳이 아직도 " 대머리산 "이라 불리는 녹색 잔디를 한삽 퍼낸것처럼 흙빛을 띠던 산이었다. 그곳은 최소한 무지개처럼 달아나지는 않았으나 꼬마들이 도달하기에는 아득한 거리였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길을 달음질쳐 달아나온 것이 그 첫번째 길이었다.

중학교 국어책에 실린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을 나와 동일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산기슭의 작은 집 앞에 앉아 책을 읽다 바라보는 석양에 대한 묘사가 꽤나 공감이 갔던 모양이다. 어느날 지평선으로 붉게 물드는 노을 속에 흡사 그가 앉아 있을것만 같은 곳을 보았다. " 대머리산 ",  아직도 뭉텅 퍼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듯 흙빛이 유독 눈에 띄었으나 묘하게도 석양과는 조화를 이루는 장소였다. 무지개의 끝이 그곳이리라는 어떤 연관성이 떠오른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다만 그곳에는 적어도 그가 앉아있을 의자가 있을것 같았고 그곳에서 같은 풍경을 볼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전거에 올라 힘차게 페달을 밟은 것은 매미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던 여름날이었다. 자전거로 갈수 있는 최대 고지까지 달린후 걸어간 그곳은 또한 발길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조금더 산속에 남아 있을 용기가 있었던 것은 머리가 큰 이유도 있을테고 자전거라는 교통수단에 의지한 탓도 있을 것이다. 버꾸기 소리를 뒤로 모골이 송연해진채 달빛이 비추기 시작한 산길을 미친듯이 달려나온 것이 그 두번째 길이다.

소나기가 막 그친 여름 하늘은 청명했다. 아직도 "대머리산" 은 주변 풍경에 동화되지 못하고 흙빛으로 남아있었다. 소나기가 내리던 횟집 평상에 올라앉아 있을때에도 그곳으로 떠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태여 떠난 이유를 들자면 소나기와 빗줄기에 씻기운 하늘과 유난히 시끄럽던 매미소리였다. 물탱크를 단 친구의 트럭을 끌고 둘이서 떠난 길은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 무색하리만치 변해있었다. 꾸불꾸불 울퉁불퉁하던 흙길이 시멘트 길로 변하여 있었고 발길이 미치지 못하던 길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시멘트 길 뒤로 남은 흙길을 더 달리고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밤나무와 잣나무 몇그루만이 횡하니 서있는 곳이었다. 나무나 식물이 살기에 부적잘한 토양임을 한눈에 알수 있을 정도로 황폐한 느낌이 절로 드는 곳이었다. 그 어떤 흥분이나 감흥도 없었다. 적어도 그곳에는 무지개의 끝이 담긴 연못이 있고 소설속의 주인공이 앉아있던 나무 의자는 있어야 했다. 그런 환상 하나쯤 품고 지낼수도 있었을텐데. 아직도 여름날의 햇빛이 쨍쨍 내리쬐던 산길을 트럭에 실려나온 것이 그 세번째 길이었다. 그 길과 환상은 유독 시끄럽던 매미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이 있듯 떠나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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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바위 얼굴 하니까, 제 아는 동생에게 붙여준 별명이 생각난다는^^
인연의 깨우침을 일찍 아셨군요. 조숙하셔라...점점 더 신기한 잉크님!!^^

내가없는 이 안 2005-06-2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결과를 안다 해도 떠나게 될 것 같은데요. 끝을 보고 싶은 욕망을 뿌리칠 수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끝이 기대와 다르다는 걸 안다 해도 보고 싶은. ^^ 게다가 떠나고 싶게 글을 쓰셨잖아요. 가는 길을 느끼고 싶게. ^^

Laika 2005-06-28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지 말아야 할 길"에 대해 글을 쓰셨는데, 정말 잉크님의 글을 읽으면 무모하게 떠나고 싶어지네요... 잠시 잉크님의 추억 속으로 다녀온 아련한 이 느낌...

잉크냄새 2005-06-2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큰바위 얼굴이란 별명은 좋은거죠? 인연이나 길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것 같습니다.
이안님 / 맞아요. 끝을 보고 싶은 욕망, 그것을 쉽사리 뿌리칠수는 없을것 같아요. 그것이 또한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삶이겠죠.
라이카님 / 전 님의 페이퍼에서 무모하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걸요. 티벳, 이번 여름휴가때 한번 다녀올까말까 목하 고민중입니다.

미네르바 2005-07-08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이 있고, 떠나지 말아야 할 길이 있지만, 그것을 인간은 알 수가 없지요. 또 안다면 재미도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것을 운명이라고 하나 봐요.

잉크냄새 2005-07-0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인생은 그 의외성과 우연성에 맛이 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운명...참 오래도록 품고 살아갈 단어로군요.
 

더 좋은 잔디를 찾다가 결국 어디에도 앉지 못하고 마는 역마(驛馬)의 유랑도 그것을 미덕이라 할수 없지만 나는 아직도 달팽이의 보수(保守)와 칩거(蟄居)를 선택하는 나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마살에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며 바다로 나와버린 물은 골짜기의 시절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의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p180~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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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2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저를 몰라보셔도 추천은 할께요..험험
-이젠 역마살이 두려운 파란여우-

Laika 2005-06-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마.살.......음.....

꼬마요정 2005-06-23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역마살 하니까... 뜬금없게도... 도화살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같은 살이라서? 살... 상충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아~ 주제에서 한없이 비켜나는 나의 한심함...흑흑

플레져 2005-06-2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마살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여요, 제겐.
역마살이 부족해서 뭘 못하고 있단 느낌...ㅎㅎㅎ

chika 2005-06-2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괜찮아요. 저는 심각해지려다가 님 댓글보면서 '물렁살'을 떠올렸네요. ㅎㅎ
바다로 나와 버린 물.... 좋은 글 감사. ^^

잉크냄새 2005-06-23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인데요...
역마살에 이리도 애틋한 감정과 사연 한조각씩 품고 계실것 같은 모습들이라니요...^^

2005-06-24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6-24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6-27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8800

이렇게 하는 거 맞겠죠? 저도 서재지수 잡아주신 거 신기해서 뭘 좀 잡아보까... 둘러봤어요. 큭큭. 출근하기에 이보다 기분 우울한 날도 없겠네요. 비는 좍좍 내리고,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깔렸고, 교통은 꽉꽉 막힐 테고, 음 어쩌면 월요일엔 회의도 있을 수 있겠고... 아이 그림책에 그런 말이 있어요. Monday가 Runday 라나요. 일 주일 열심히 뛰라는 날로 받아들이자구요. ^^


잉크냄새 2005-06-28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 저도 사람들의 바로 그 질문이 두려워 미리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나저나 어서 쾌차하시어 또 자주 뵈어야 할텐데요.^^
이안님 / 가끔은 눈에 와서 확 박히는 숫자가 있더라고요. 제가 그날 잡은 서재지수 10000 이란 숫자도 눈에 와서 확 박히던걸요. Runday....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