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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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 두고 안타깝던 날이 있었다. 
우체국, 구태여 유치환의 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마냥 그리운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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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7-07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 시집 좋아하는데요. 새삼 이렇게 읽으니 더 좋습니다. ^^

파란여우 2005-07-0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좋아해요^^

Laika 2005-07-0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07-08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7-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 안도현의 시집중 그런 시집이 있었군요. 바닷가 우체국...왠지 낭만적인 냄새가 풀풀 풍겨지는군요.
여우님 / 도현을 활용한 언어유희...멋지구리합니다.
라이카님 / 너무 멋진 사진입니다. 지중해 어느 해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드네요. 이 사진 페이퍼에 삽입할께요. 멋진 합작품입니다.
속삭이신님 / 이제 사막으로 갈 일만 남았군요. ^^ 저도 사막은 특별한 이유없이 한번 정도 다녀오고 싶은 곳입니다.

Laika 2005-07-0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네덜란드"의 "볼렌담" 갔을때 찍은 사진입니다. 맘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미네르바 2005-07-0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우체국에서 편지를 써 보았던 저는 왜 여지껏 인생을 모를까요? ^^

잉크냄새 2005-07-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 아, 어쩐지 눈에 익는다 싶었거든요. 작년 님의 서재에서 보았기에 기억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나 봅니다.
미네르바님 / 전 유치환의 시를 읽고 우체국에서 편지도 쓰고 싶었고, 우체국 창문 너머로 하늘과 행인들을 바라보기도 했죠.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이죠.^^

비로그인 2005-07-1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혼자 잘났다고 폼 재며 살 세상, 아닌 거 같습니다. 이 시 뜨는 거 보자마자 카메라 들고 동네 우체통 찍으러 갔습니다. '바닷가는 아니지만 잉크냄새님, 우체통 통째로 받으세요, 헷..선물이에요."라고 수줍게 올리려는 순간, 더헙! 라이카님이 오리지날 '바닷가 우체국' 사진을!! 눈에서 초강력 레이저빔 발사되면서 슬슬 꽈배기 먹은 사람처럼 심사가 뒤틀리더니 오늘은 그래도 질투심이 쪼까 진압 되는 바람에 글 남깁니다. ㅡㅡa
헤헤..라이카님! 사진 정말 죽여요!!

비로그인 2005-07-1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은 안 달아주셨지만 분명히 몰래 들어와 읽으셨을 거야.. 수상해..어디선가, 먹물 냄새가 난다구..아닌가, 저녁에 쩝쩝거렸던 먹물 오징어튀김 냄샌가..킁킁..

잉크냄새 2005-07-15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 복돌님의 동네 우체통이 무지 궁금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중 하나가 빨간 우체통이라고요. 그리고 아마도 잉크냄새가 아니라 먹물 오징어 튀김 냄새가 맞는것 같아요. 이 기회에 먹물냄새로 아이디 바꿔볼까요? ^^

비로그인 2005-07-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동네 우체통은 아무리봐두 넘 지저분해요. 동네 조무래기들이 다닥다닥 껌을 붙여놔서 술 취한 저녁에 보면 외계인이 서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라구요. 글고 오징어 먹물냄새 비릿하니 안 좋았거덩요. 긍께로 기냥 지금의 닉을 사수하시쪙!

icaru 2005-07-2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물냄새~ 하니까 붓글씨 쓸 때 묵향이...맡아져서...고즈넉했는데... 딱 그앞에 오징어를 들이대니까는... 푸히히... 그래도 오징어는 술 안주로 심심풀이로... 짱이에요 짱!!

잉크냄새 2005-07-2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 그래도 그런 우체통이 더 정겨운 법이지요. 그리고 닉은 사수합니다. 다만 잉크와 냄새를 따로 떼어 뒤의 것으로만 부르지 마세요
이카루님 / 아, 묵향...머릿속에 아련히 떠오르네요. 지금도 애들 붓글씨 쓰는지 모르겠네요. 전 붓보다는 펜글씨를 즐겨썼지만 왠지 나이들면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붓글씨만한 것도 없는것 같아요.

montreal florist 2009-09-19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시군여, 파란색 하는 배경에 빨간색 우체통도 예뿌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