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수 없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아니면 가슴속에 절로 생겨난 의문인지는 몰라도 바닷가에서 바라본 먼 산속의 무지개의 끝이 그리도 궁금했었다. 산맥을 배경으로 펼쳐진 무지개의 한쪽 끝은 지평선을 넘어버려 너무 먼 환상의 세계처럼 느껴졌고 다른 한쪽 끝은 한달음에 달려갈수 있을것만 같은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그 날의 환상과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후 무지개가 또 다시 아치를 그리며 떠올랐을때 동네애들 몇 명이랑 급조한 도시락을 달랑 들고 비가 막 그친 산속으로 떠났다. 원래 꿈과 환상이랑 다가간만큼, 아니 그 배로 멀어지는지라 느린 꼬마들의 걸음에 무지개의 끝은 점점 멀어지고 잠시후 환상이 그러하듯 사라졌다. 걸어온 길이 아쉬운듯 길게 목을 빼고 뒤를 돌아본후 지도상에 점을 찍듯 절벽처럼 펼쳐진 산맥의 한군데를 무지개의 끝으로 정했다. 그곳이 아직도 " 대머리산 "이라 불리는 녹색 잔디를 한삽 퍼낸것처럼 흙빛을 띠던 산이었다. 그곳은 최소한 무지개처럼 달아나지는 않았으나 꼬마들이 도달하기에는 아득한 거리였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길을 달음질쳐 달아나온 것이 그 첫번째 길이었다.
중학교 국어책에 실린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을 나와 동일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산기슭의 작은 집 앞에 앉아 책을 읽다 바라보는 석양에 대한 묘사가 꽤나 공감이 갔던 모양이다. 어느날 지평선으로 붉게 물드는 노을 속에 흡사 그가 앉아 있을것만 같은 곳을 보았다. " 대머리산 ", 아직도 뭉텅 퍼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듯 흙빛이 유독 눈에 띄었으나 묘하게도 석양과는 조화를 이루는 장소였다. 무지개의 끝이 그곳이리라는 어떤 연관성이 떠오른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다만 그곳에는 적어도 그가 앉아있을 의자가 있을것 같았고 그곳에서 같은 풍경을 볼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전거에 올라 힘차게 페달을 밟은 것은 매미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던 여름날이었다. 자전거로 갈수 있는 최대 고지까지 달린후 걸어간 그곳은 또한 발길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조금더 산속에 남아 있을 용기가 있었던 것은 머리가 큰 이유도 있을테고 자전거라는 교통수단에 의지한 탓도 있을 것이다. 버꾸기 소리를 뒤로 모골이 송연해진채 달빛이 비추기 시작한 산길을 미친듯이 달려나온 것이 그 두번째 길이다.
소나기가 막 그친 여름 하늘은 청명했다. 아직도 "대머리산" 은 주변 풍경에 동화되지 못하고 흙빛으로 남아있었다. 소나기가 내리던 횟집 평상에 올라앉아 있을때에도 그곳으로 떠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태여 떠난 이유를 들자면 소나기와 빗줄기에 씻기운 하늘과 유난히 시끄럽던 매미소리였다. 물탱크를 단 친구의 트럭을 끌고 둘이서 떠난 길은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 무색하리만치 변해있었다. 꾸불꾸불 울퉁불퉁하던 흙길이 시멘트 길로 변하여 있었고 발길이 미치지 못하던 길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시멘트 길 뒤로 남은 흙길을 더 달리고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밤나무와 잣나무 몇그루만이 횡하니 서있는 곳이었다. 나무나 식물이 살기에 부적잘한 토양임을 한눈에 알수 있을 정도로 황폐한 느낌이 절로 드는 곳이었다. 그 어떤 흥분이나 감흥도 없었다. 적어도 그곳에는 무지개의 끝이 담긴 연못이 있고 소설속의 주인공이 앉아있던 나무 의자는 있어야 했다. 그런 환상 하나쯤 품고 지낼수도 있었을텐데. 아직도 여름날의 햇빛이 쨍쨍 내리쬐던 산길을 트럭에 실려나온 것이 그 세번째 길이었다. 그 길과 환상은 유독 시끄럽던 매미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이 있듯 떠나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