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럭 부스럭 서랍을 뒤지다 훈련소 빛바랜 군인 수첩속의 일기를 발견하다. 희미한 백열등 아래, 달빛 아래 한자 한자 적어간 스물 세살의 소중한 기억이구나. 훈련소 초기는 바쁘고 힘들었나보다. 훈련소 마지막 열흘의 기록이다. 전우라는 단어를 이처럼 어색하지 않게 마구 쓰고 있었다니 왠지 쑥스럽기도 하다.

1993.3.31.수. 24:12

또 다시 불침번의 임무가 나를 깨운다. 꿈의 세계를 막 노크할 찰나 누군가 어깨를 치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지금은 불침번 근무중. 내무반을 왔다갔다 전우의 취침 상태를 조사 그 외의 별다른 일은 없다. 근무중에도 어김없이 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고향 생각. 나의 모든 사랑하는 이들의 생각. 나는 완전한 군인은 되지 못하나 보다. 아직 향수를 잊지 못하다니. 사랑하는 사람들아. 나는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의 꿈속을 왔다갔다 불침번 근무중인지도 모른다.

1993.4.2.금. 05:30

밤새 꿈에 시달리면서도 왠지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전우들의 코 고는 소리에 동요됨이 없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있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에 숨어있는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자고 있는 전우들을 바라보면 벌써부터 작별의 아쉬움이 엄습해오고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훈련기간 속에서 나도 모르는 어떤 시간의 연장을 바라는 묘한 감정이 떠오른다.

1993.4.5.월. 02:17

심한 기침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나다. 어제 한 전우가 폐렴으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며칠전부터 창백해보이고 힘들어했던 그의 모습이 선한데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 못한 것이 죄스럽다. 진정 필요할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한 인간이 어찌 전우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 부끄럽다. 나도 걱정이 된다. 기침이 너무 심하여 가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아무 일 없어야 할텐데. 지금 밖은 달이 무척 밝다. 달에게 전우의 회복을 빈다.   

1993.4.7.수. 23:12

잠을 자는둥 마는둥 뒤척이다 잠을 깨었다. 모두 잠든 내무반에 있으려니 조금 전에 세면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3소대 어느 전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다른 전우들도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버님, 이 곳에서 어머님만큼 그립지는 않지만 고향에서 고생하시고 계신 것을 생각하면 한없이 가슴 아픕니다. 아버님, 불쌍하신 아버님. 오래 오래 건강하십시오.

1993.4.9.금. 02:44

지금은 동초 근무 중. 이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동초 근무가 될것 같다. 달빛에 의존해 글을 쓰면서 오늘 달이 밝은 것에 감사한다. 달빛에 실려온 추위는 내 몸을 휩싸고 전우가 피우는 담배는 빨갛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제 10분 가량 남은 시간. 솔직한 심정으로 기쁨보다 아쉬움이 크다. 때때로 인간의 시간 개념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달빛에 드러누운 나의 총 멘 그림자가 제법 군인티가 난다.

1993.4.10.토 04:29

지금 몇촉인지도 분간할수 없는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펜을 든다. 시간은 지나면 짧은 것인가. 벌써 훈련소의 마지막 날이다. 짧게 깍은 머리를 쑥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때가 어제같은데.  내 머리가 짧음을 잊고 산 지가 벌써. 오! 시간의 위대함에 경배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정확한 시간 개념은 불가능한것 같다. 모두 잠든 전우들의 얼굴 속에 알지 못할 아쉬움이 피어난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오르고 벌써부터 그리움의 꽃망울이 피어난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춤추는인생. 2007-05-2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얼마만의 과장님 페이퍼래요?^^ 희미한 달빛아래 한자한자 적어내려가는 스물셋의 군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요 .
잉과장님. 지금 듣고 싶은 노래 없으세요? 저는 갑자기. 잠못드는밤 비는 내리고가 너무 듣고 싶어졌어요. 그페이퍼읽을때 가슴이많이 아팠어요 저.

잉크냄새 2007-05-2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인생님 / 아, 그 페이퍼요. 훈련소에서 재검후 다시 끌려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듣던 노래였죠. 그날 밤도 비는 주적주적 내리고 참 참담한 심정이었는데, 비 내리는 밤, 얼차레 받느라 잠을 못잤다죠.^^ 이 노래 한번 올려줘요.^^

ceylontea 2007-05-2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갑자기 잉크냄새님.. 나이를 막 계산해버렸다는.. ^^
예전의 잉크냄새님은 여전히(?),, 그때부터 로맨틱하셨군요.. ^^

춤추는인생. 2007-05-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건모-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사실 오늘 페이퍼에는 더 애잔한 음악이 어울릴듯 싶은데.

그래도 이노래. 님께는 남다른 추억을 가지신 음악이시니. 이곳에 올리고 갈께요



초봄에 비까지 왔으니 얼마나 추웠을까요.

그 스물셋의 군인은..


 

어떠세요?

 

이추억은 아름답고 재밌었다기 보다는

좀더 애틋해서 자꾸만 보듬아 주고 싶은 추억이 아니신지요^^



잉크냄새 2007-05-29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 음, 역시 추론하시는군요.ㅎㅎ 알라딘 서재에 둥지를 튼지도 벌써 4년이 다 되어가니 시간의 관념은 역시 여기서도 어렵네요.

춤인생님 / 좋은 노래 감사드려요. 그래요 추억은 아름답던 고통스럽던 자꾸 보듬어 주어야죠. 그래야 먼 훗날 희미한 미소와 함께 떠올릴수 있을테니까요.

비로그인 2007-05-29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이) 춤인생님하고 잉과장님하고 잘 어울리시는데 데이트 한 번 하심이;
3=3=3=3=3

stella.K 2007-05-29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이런 일기도 쓰셨다니...! 남자들 군대 얘기 떠벌릴 줄말 알았지 이렇게 쓰는 군발이는 없지 않을까요? 저도 갑자기 잉크님 나이가 궁금해졌다는...!

잉크냄새 2007-05-2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뜬금없으시기는^^... 노구를 이끌고는 짱구 엉덩이를 5개나 그리면서 뛰어갈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체셔님은 왠지 여전사 타입, 훈련소의 막강 여군 스타일일것 같네요.(뜬금없이 -,.-)

스텔라님 / 남자분들 군대 이야기 하는것 애교로 봐주세요. 그래도 푸르른 날에 2~3년을 보낸 곳인지라 아쉬움과 그리움과 분노와 허전함이 교차하는 미묘한 공간입니다. 김일성 때려잡으러 북한에 파견된 공작원 수준이라는 뻥만 아니면 그냥 웃어주세요.ㅎㅎ

겨울 2007-05-2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뜬금없이 다음 생은 기필코 남자로 태어나 군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비로그인 2007-05-29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유~ 제가 그런 스탈이었음 맘에 둔 남자 그냥 보쌈해버렸을걸요? ㅠㅠ...

파란여우 2007-05-2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읽으면 옛날 남친 생각이 나요...잘 살고 있다 하더이다..흐흐
그나저나 서재개편되면 잉크님의 저 아리따운 지붕이 사라질 위기에!
아유, 내가 저거 만드느라 한여름에 포샵질에 열공했었는데요. 다 까묵었으!!!

paviana 2007-05-29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이 만드신거였어요? 와 잉과장님이랑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93년에 제대하셨군요...그때 모하고 살았나 잠시 생각하다 갑니다..

잉크냄새 2007-05-2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 전 군대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생각하는지라 도시락 싸들고 말리고 싶네요. 다음 생엔 군대가 뭔지도 모르는 세상이기를 바래야죠.^^

체셔님 / 보쌈했다는 소문이 훈련소에 돌던데요.ㅠㅠ

여우님 / 그러게요. 저 지붕 받은지 햇수로 3년이군요. 맞나? -,.- 참 오랫동안 빛바래가며 서재를 지켜온 지붕인데 사라진다니 왠지 아쉽네요. 어떻게 개편될지는 모르지만 모 싸이트의 알록달록 블로그 형식은 아니었음 합니다. 그저 사랑방 그 수준이 딱이죠.

파비아나님 / 93년 제대라니요. 훈련소라고 몇번을 말씀드렸는데. 훈련소와 제대의 차이는 무려 2~3년이나 난다고용!!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희노애락이 적절한 배합으로 항상 유지되어 삶의 긴장을 더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읽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구절, "고칠수 없다면 견뎌야 하는 삶" 이란 구절을 가끔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닌 좀더 관조적인 삶의 시각이 아닌가 싶더군요.


독서 좋아하시는지요?

-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히는 것은 아니고 대략 일주일을 안읽으면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지 않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 그러니 나름 좋아한다고 할수 있지요.

 

그 이유를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평생을 살아가며 내가 가지고 경험할수 있는 삶의 풍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제한된 풍경에 대한 간접 경험이라 할수 있겠지요. 타인의 시각, 타인의 풍경을 경험할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고 축복일겁니다.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 주로 정독하는 스타일이고 한번에 읽는것이 아까운지(?) 어느 정도의 분량을 정하고 읽습니다. 한달이라기보다는 일년 목표가 50권인 소박한 책읽기입니다. 그럼 한달에 4권이 되겠네요.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 주로 산문집을 많이 읽게 되는군요.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책에서 느끼는 타인의 시간과 경험을 소중이 하는지라 산문집을 주로 접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시집은 노력중입니다. 어느날 시가 내게로 파바박 다가오면 삶에 대한 좀더 넓은 안목이 생기지 않을까 싶더군요.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 타인의 삶과 풍경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 타인의 삶과 풍경 바라보기  


한국은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아무래도 책읽기의 습관이 자리잡아야할 청소년기의 교육제도가 아닌가 싶군요.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 책 자체에 대한 개인적 즐거움을 앗아간다고 할수 있지 않을까요. 

 

책을 하나만 추천 하시죠?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입니다.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워낙 유명한 책이니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정된 공간속에서도 자기 논리에 빠지지 않고 바라보는 삶에 대한 관조적인 시각이 너무 매력적인 책입니다.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 오호의 감정을 접하는 벌거숭이 수인의 삶이 그 분의 시각을 그렇게 발전시킨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

-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냐 그림이냐의 문제지 잘 구성된 한권의 만화책이 주는 감동은 어떤 책에 비추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림으로 읽는 세상의 모습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 아무래도 저의 책읽기 습성상 문학쪽을 더 읽게 됩니다. 문학쪽이 더 깊고 넓은 삶의 모습을 품고 있지 않나 싶네요.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소비문학이라는 용어는 처음 듣지만 다분히 비하적인 용어 같네요. 그런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어떻게 품고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 전 각종 보고서, 공문, 품의서의 기안자입니다. 음하하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 그런 적은 없지만 만약 인생의 황혼 즈음에 제 개인의 산문집이나 시집을 한권 정도 만들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합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 역시나 신영복 교수님, 작가 김훈, 니어링 부부의 글이 좋더군요. 요즘은 제인 구달의 글이 가슴에 많이 남는 시기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 님의 글을 통해서 전 참 많은 삶의 경험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영혼을 간직하기에 머리속에 각인된 풍경과 가슴에 각인된 풍경의 괴리감이 때론 저를 힘들게 하지만 어느 순간 제가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의 풍경속에 제가 서는 날이 오리라 믿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바램인데 제 삶도 누군가의 풍경이 될수 있겠죠. 그렇게 님의 풍경이 저를 통해 또 누군가의 풍경이 될수 있겠죠.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 문답의 바톤을 넘기실 분들을 선택하세요. 5명 이상, 단 "아무나"는 안됩니다.

 

이카루님, 춤추는인생님, 은비뫼님, 내가없는 이안님, 우울과몽상님


댓글(8)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5-0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참, 전 한 권의 책으로 성경책인데요,
두 번째로 추천한다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입니다.
제 인생의 작은 경전이라고나 할까요? :)

프레이야 2007-05-0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제인구달.. 저두요^^
님도 김훈을 좋아하시네요. 와, 춤추는인생님 바통 받으세요.

이잘코군 2007-05-09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 님 글에서 냄새가 짙게 풍깁니다. 좋아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제가 아끼는 책 중 하나입니다. 제 인생의 가장 큰 고비에 읽은 책입니다.

icaru 2007-05-0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제 했어요!!!!

잉크냄새 2007-05-09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저도 종교가 있다면 아마 성경도 상당히 좋아했을겁니다. 언뜻언뜻 읽어본 성경구절에 참 소중한 글귀들이 많더군요.
배혜경님 / 제인 구달의 글은 지금 <희망의 이유>를 읽고 있는데 어찌 그리 공감가게 글을 쓰는지 모르겠더군요.
아프님 / 님의 글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인생의 큰 고비에 경험하셨을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들,,,짐작켠대 오래도록 님의 향기를 더해줄것 같네요.
이카루님 / 숙제가 너무 짧아요. 너무 단답형이고,,, 다시 하세요.

춤추는인생. 2007-05-1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영복 교수님을 실제로 뵌적은 없지만. 아마 만나면 제자신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점이 하챦게 느껴져서 고개조차 들지 못할것 같아요. 저도 신영복 교수님. 김훈 작가님 과장님덕분에 알게된 니어링 부부의 글을 좋아하지요.^^
지금은 막 나가야 할참이라서. 다녀온후 과장님이 내주신 숙제 마저 해놓을께요.!
기다려주세요.^^


stella.K 2007-05-1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잉크님다운 면모로군요. 관조와 잉크님은 잘 어울리는 조응 같습니다. 참 잘했어요. 도장 3개. 꽝꽝꽝~!

잉크냄새 2007-05-10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인생님 / 아, 그럼 저의 허접한 리뷰를 통해서 니어링 부부의 글을 만나셨나 보네요. 뭐랄까, 확실히 설명할수는 없지만 제인구달의 글과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숙제 기다립니다.
스텔라님 / 영광스런 자리에 호명해주셔서 이렇게 숙제도 해보네요. 스텔라님도 도장 3개 꽝꽝꽝!!!
 

老母

- 문태준 -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

어버이날, 늙으신 부모님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른다.
그 주름이 아름다운 것은 주름마다에 농익은 삶의 애환을 알기 때문일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7-05-09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이 시가 뭉클하게 합니다.
저, 모셔갈래요^^

비로그인 2007-05-0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과장님,
부모님께 효도하는 좋은 어버이날 보내셨는지요 :)
사진에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잉크냄새 2007-05-09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 이 시에 어울릴만한 사진하나 추천해주세요. 왠지 어울릴만하 사진이 있을것 같아요.
춤인생님 / 그 거칠고 투박한 손과 얼굴, 그 속의 애환과 무늬, 눈물 날만 하죠.
체셔님 / 불효한지라,,,,항상 죄스러운 마음이죠.
 
팔레스타인의 눈물 - 문학으로 읽는 아시아 문제 팔레스타인
수아드 아마리 외 지음, 자카리아 모하메드 엮음, 오수연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동네의 서글픈 일이랍니다. 물질적인 삶의 질은 높지 않지만 나름 만족하며 사는 삶이었지요. 어느 날 1)안개가 무지하게 끼고 비가 많이 내리는 마을에 사는 녀석이 2)동네 패싸움에 가담하는 길에 우리집 앞마당을 지나야 한다며 패싸움이 끝난후 마당은 물론 자기 땅이라 우기던 지역의 마당확장까지 협력해 준다는 조건으로 3)종이조각을 하나 들고 왔더군요. 뭐, 동네 패싸움에 관심도 없던지라 솔깃하여 싸인을 했죠. 좀더 검토하고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한 우리의 실수일수도 있지만 그들이 신의를 저버린건 더 큰 문제죠. 글쎄, 안개처럼 음습한 그넘들이 4)천년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던 양아치에게 5)이중계약을 한겁니다.  패싸움이 끝난후 양아치들은 동네 곳곳에 있던 떨거지들을 규합하며 우리 앞마당으로 들어오더군요. 6)몇몇 뜻있는 동네사람들과 힘을 합쳐 7)항의해 보았지만 원래 저속한 세상의 이치는 이면계약이 힘을 발휘하는지라 항의는 불발되었고, 탄력받은 양아치들은 8)자기 마당인양 줄을 긋고 억압을 하더군요. 뭐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항의 당시 마당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마당에 들어올수가 없다나요. 더 억울한건 대문에 양아치들을 배치하여 마당으로의 진입 자체를 막더니 얼마간 마당에 들어오지 않는 마당의 소유권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네요. 이건 아니다 싶어 9)동네 전체 모임 안건에 의제를 제시했지만 대다수 선량한 동네 주민들의 뜻과는 다르게 양아치와 호형호제하는 10)조폭 출신들에게 가로막혀있는 상태입니다. 가끔 어린애들이 그 금을 지울라치면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대고 좀 철좀 들었다 싶은 청년들이 지울라치면 동네방네에 유언비어를 터트려 마치 자신의 것을 빼앗는 11)파렴치한으로 만들더군요. 아직 저희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어쩌면 희망도 사치일지는 모르지만 사랑방 한구석에서 정신분열에, 절망에 빠진 가족들을 다독여 그 금을 지우고 마당 한켠에 각종 꽃을 심는 날을 상상해 봅니다.

주석)
1) 영국
2) 1차 세계 대전
3) 후세인-맥마흔 서신
4) 유대인
5) 밸푸어 선언
6) 아랍국가
7) 1948 전쟁
8) 부재자 재산법
9) UN / 안전보장이사회
10) 미국
11) 테러범

팔레스타인 작가들이 말하는 그들의 희망과 절망과 자아상실과 자아분열에 대한 글입니다. 그들이 결코 그 끝자락을 놓을수 없는 판도라 상자속의 희망은 필연적으로 상응하는 절망과 상실을 품고 있나 봅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글에서 왜 그리 끝없는 절망과 처절한 상실감을 느껴야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마 절실한 희망은 절박한 절망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본 사진 한장이 생각나네요.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고사리 손에 든 조약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사진이죠.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되어있겠죠. 어떤 꿈을 꿀까요. 아마 악몽이 아닐까 싶군요. 그 작고 따스한 고사리 손과 가슴을 향해 차가운 총탄을 퍼부은 이스라엘을 보면서 자라난 청년이 지금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속칭 테러군요. 물론 그 울분을 표현하는 방법의 정당성 측면에서 결코 자유로울수는 없겠지만 내던질 것이 목숨뿐이라는 사실에는 한번쯤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댓글(8)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4-22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리뷰가 올라왔네요 :) 반갑게 잘 읽고 갑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한 뒤,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안 연후에... 그때야 비로소 하느님이 움직인다고 말들 하더군요.
극과극은 통한다고, 절망의 끝에 희망이 있지요.
죽음을 밟고 서있는 게 삶인 것처럼요...

춤추는인생. 2007-04-23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실한 희망을 절박한 절망에서 나온다는말은 아주 공감되는 표현이네요.
예전 낙안읍성의 글이였던가요? 땅콩사세요를 외치던 그 소녀에게 소녀여! 꿈을 꾸어요. 꿈을 잊지 말아요 라고 말씀하셨듯 . 저역시 어딘가에 있는 그 청년에게 아름다운 꿈을 놓치말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잉크냄새님의 글속에 묻어나는 따뜻한 시선이 저는 참 좋아요.^^

은비뫼 2007-04-23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서평 읽으니 좋네요. ^^
내던질 것은 목숨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네요.

프레이야 2007-04-23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을 지우고 마당 한 켠에 꽃을 심는 기대, 그런 걸 희망이라고 부르겠지요.
님의 온기가 느껴지는 담담한 글이 참 좋습니다.^^

icaru 2007-04-2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쓰신 다른 리뷰들과 어투가 달라서~ 좀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잘 읽었구요.
그들이 물질적인 삶의 질은 높지 않지만 나름 만족하며 사는 그 삶을 어서 되찾기를 저 또한 희망합니다!

잉크냄새 2007-04-23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님 / 진정 절망의 끝에 희망이 있던가요. 가끔은 어설픈 희망이 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것은 아닌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가슴만큼은 그 희망함을 향하여 나아가야겠지요.
춤인생님 / 와, 그 옛날의 페이퍼를 찾아 읽어주시고 여기에 인용을 하시다니.아마 2004년 페이퍼 같은데요.^^ 감격입니다. 그래요, 절박한 상황에서 희망을 찾는 행위가 때론 가진자의 위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엔 분명 희망이 보일겁니다.
은비뫼님 / 예전 예이츠의 하늘의 융단이라는 시에도 나오죠. "내 가난하여 가진것 오직 꿈뿐이라 그대 발밑에 내 꿈 깔았으니...." 그들이 가진것이 오직 목숨뿐이라...
배혜경님 / 우리가 희망이라 부르는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희망은 귀천이 없음을. 어느것 하나 무시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카루님 / 가끔 존대로 쓰기도 한다구요. 그들이 다른 누구의 모습도 아닌 그들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지켜나가길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모습을 바라듯이.

파란여우 2007-04-23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별일이야요. 잉끼냄새님이 이런 책을 다 읽으시다니!
난 또 서정적 시인의 발광체를 최대한 부풀린 요즘이신가 여기고 있었는데...

가난, 전쟁, 추방자, 이주 노동자... 다 열거 할 수 없는 고통이 지구에 있습니다.
제 팔이 아픈것도 고통스러워요.
언능 로또가 대박나야 할텐데....쯥!@.@

잉크냄새 2007-04-24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아시면서요. 전 잡다하게 읽는 습성이라는 것을. 다만 지식이 짧아 이런 류의 책 리뷰는 손이 잘 가지 않죠. 고통을 체화하지 않고 희망을 말한다는 것이 좀 위험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말하고 싶었답니다.
 

무늬들

- 이병률 -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여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이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누구였던가요.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지처럼 접을수 없었다는 시인이.
유리창의 오래된 물자국처럼, 무늬들처럼, 밀어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군요.
시간이 지나니 알겠네요.
그리우면 그냥 그리워하면 된다는 것을.
그냥 흔들리며 그리워한다는 것을.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4-2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 잉과장님 여기 소주 한 병이요! ㅜㅜ
누가 이렇게 심란한 페이퍼 올려달랬어요... 진짜 울고 싶잖아요...
어쨌거나 멋진 글이라 추천.

춤추는인생. 2007-04-2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과장님. 오늘 저랑 통하셨네요^^
이곳 서울은 비가와요. 아침에 빗방울맺힌 창문을 밀다 문득 이시가 생각나서
오전내내 읽고 또 읽었어요.
저도 오늘하루만큼은 마음껏 흔들리는 내자신을 그냥 그대로 봐줄참이예요.
비가 오고 바람이 부니까요.

잉크냄새 2007-04-22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님 / 심란하긴요, 그냥 읽던 시집에서 맘에 쏘옥 드는 시라서요.^^
춤인생님 / 그 페이퍼 저도 읽었어요. 봄비가 통하게 해주었나 보네요. 가끔은 그리 흔들려주는 것도 삶이 부러지지 않는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