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럭 부스럭 서랍을 뒤지다 훈련소 빛바랜 군인 수첩속의 일기를 발견하다. 희미한 백열등 아래, 달빛 아래 한자 한자 적어간 스물 세살의 소중한 기억이구나. 훈련소 초기는 바쁘고 힘들었나보다. 훈련소 마지막 열흘의 기록이다. 전우라는 단어를 이처럼 어색하지 않게 마구 쓰고 있었다니 왠지 쑥스럽기도 하다.

1993.3.31.수. 24:12

또 다시 불침번의 임무가 나를 깨운다. 꿈의 세계를 막 노크할 찰나 누군가 어깨를 치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지금은 불침번 근무중. 내무반을 왔다갔다 전우의 취침 상태를 조사 그 외의 별다른 일은 없다. 근무중에도 어김없이 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고향 생각. 나의 모든 사랑하는 이들의 생각. 나는 완전한 군인은 되지 못하나 보다. 아직 향수를 잊지 못하다니. 사랑하는 사람들아. 나는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의 꿈속을 왔다갔다 불침번 근무중인지도 모른다.

1993.4.2.금. 05:30

밤새 꿈에 시달리면서도 왠지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전우들의 코 고는 소리에 동요됨이 없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있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에 숨어있는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자고 있는 전우들을 바라보면 벌써부터 작별의 아쉬움이 엄습해오고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훈련기간 속에서 나도 모르는 어떤 시간의 연장을 바라는 묘한 감정이 떠오른다.

1993.4.5.월. 02:17

심한 기침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나다. 어제 한 전우가 폐렴으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며칠전부터 창백해보이고 힘들어했던 그의 모습이 선한데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 못한 것이 죄스럽다. 진정 필요할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한 인간이 어찌 전우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 부끄럽다. 나도 걱정이 된다. 기침이 너무 심하여 가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아무 일 없어야 할텐데. 지금 밖은 달이 무척 밝다. 달에게 전우의 회복을 빈다.   

1993.4.7.수. 23:12

잠을 자는둥 마는둥 뒤척이다 잠을 깨었다. 모두 잠든 내무반에 있으려니 조금 전에 세면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3소대 어느 전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다른 전우들도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버님, 이 곳에서 어머님만큼 그립지는 않지만 고향에서 고생하시고 계신 것을 생각하면 한없이 가슴 아픕니다. 아버님, 불쌍하신 아버님. 오래 오래 건강하십시오.

1993.4.9.금. 02:44

지금은 동초 근무 중. 이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동초 근무가 될것 같다. 달빛에 의존해 글을 쓰면서 오늘 달이 밝은 것에 감사한다. 달빛에 실려온 추위는 내 몸을 휩싸고 전우가 피우는 담배는 빨갛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제 10분 가량 남은 시간. 솔직한 심정으로 기쁨보다 아쉬움이 크다. 때때로 인간의 시간 개념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달빛에 드러누운 나의 총 멘 그림자가 제법 군인티가 난다.

1993.4.10.토 04:29

지금 몇촉인지도 분간할수 없는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펜을 든다. 시간은 지나면 짧은 것인가. 벌써 훈련소의 마지막 날이다. 짧게 깍은 머리를 쑥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때가 어제같은데.  내 머리가 짧음을 잊고 산 지가 벌써. 오! 시간의 위대함에 경배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정확한 시간 개념은 불가능한것 같다. 모두 잠든 전우들의 얼굴 속에 알지 못할 아쉬움이 피어난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오르고 벌써부터 그리움의 꽃망울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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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7-05-2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얼마만의 과장님 페이퍼래요?^^ 희미한 달빛아래 한자한자 적어내려가는 스물셋의 군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요 .
잉과장님. 지금 듣고 싶은 노래 없으세요? 저는 갑자기. 잠못드는밤 비는 내리고가 너무 듣고 싶어졌어요. 그페이퍼읽을때 가슴이많이 아팠어요 저.

잉크냄새 2007-05-2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인생님 / 아, 그 페이퍼요. 훈련소에서 재검후 다시 끌려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듣던 노래였죠. 그날 밤도 비는 주적주적 내리고 참 참담한 심정이었는데, 비 내리는 밤, 얼차레 받느라 잠을 못잤다죠.^^ 이 노래 한번 올려줘요.^^

ceylontea 2007-05-2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갑자기 잉크냄새님.. 나이를 막 계산해버렸다는.. ^^
예전의 잉크냄새님은 여전히(?),, 그때부터 로맨틱하셨군요.. ^^

춤추는인생. 2007-05-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건모-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사실 오늘 페이퍼에는 더 애잔한 음악이 어울릴듯 싶은데.

그래도 이노래. 님께는 남다른 추억을 가지신 음악이시니. 이곳에 올리고 갈께요



초봄에 비까지 왔으니 얼마나 추웠을까요.

그 스물셋의 군인은..


 

어떠세요?

 

이추억은 아름답고 재밌었다기 보다는

좀더 애틋해서 자꾸만 보듬아 주고 싶은 추억이 아니신지요^^



잉크냄새 2007-05-29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 음, 역시 추론하시는군요.ㅎㅎ 알라딘 서재에 둥지를 튼지도 벌써 4년이 다 되어가니 시간의 관념은 역시 여기서도 어렵네요.

춤인생님 / 좋은 노래 감사드려요. 그래요 추억은 아름답던 고통스럽던 자꾸 보듬어 주어야죠. 그래야 먼 훗날 희미한 미소와 함께 떠올릴수 있을테니까요.

비로그인 2007-05-29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이) 춤인생님하고 잉과장님하고 잘 어울리시는데 데이트 한 번 하심이;
3=3=3=3=3

stella.K 2007-05-29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이런 일기도 쓰셨다니...! 남자들 군대 얘기 떠벌릴 줄말 알았지 이렇게 쓰는 군발이는 없지 않을까요? 저도 갑자기 잉크님 나이가 궁금해졌다는...!

잉크냄새 2007-05-2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뜬금없으시기는^^... 노구를 이끌고는 짱구 엉덩이를 5개나 그리면서 뛰어갈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체셔님은 왠지 여전사 타입, 훈련소의 막강 여군 스타일일것 같네요.(뜬금없이 -,.-)

스텔라님 / 남자분들 군대 이야기 하는것 애교로 봐주세요. 그래도 푸르른 날에 2~3년을 보낸 곳인지라 아쉬움과 그리움과 분노와 허전함이 교차하는 미묘한 공간입니다. 김일성 때려잡으러 북한에 파견된 공작원 수준이라는 뻥만 아니면 그냥 웃어주세요.ㅎㅎ

겨울 2007-05-2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뜬금없이 다음 생은 기필코 남자로 태어나 군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비로그인 2007-05-29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유~ 제가 그런 스탈이었음 맘에 둔 남자 그냥 보쌈해버렸을걸요? ㅠㅠ...

파란여우 2007-05-2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읽으면 옛날 남친 생각이 나요...잘 살고 있다 하더이다..흐흐
그나저나 서재개편되면 잉크님의 저 아리따운 지붕이 사라질 위기에!
아유, 내가 저거 만드느라 한여름에 포샵질에 열공했었는데요. 다 까묵었으!!!

paviana 2007-05-29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이 만드신거였어요? 와 잉과장님이랑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93년에 제대하셨군요...그때 모하고 살았나 잠시 생각하다 갑니다..

잉크냄새 2007-05-2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 전 군대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생각하는지라 도시락 싸들고 말리고 싶네요. 다음 생엔 군대가 뭔지도 모르는 세상이기를 바래야죠.^^

체셔님 / 보쌈했다는 소문이 훈련소에 돌던데요.ㅠㅠ

여우님 / 그러게요. 저 지붕 받은지 햇수로 3년이군요. 맞나? -,.- 참 오랫동안 빛바래가며 서재를 지켜온 지붕인데 사라진다니 왠지 아쉽네요. 어떻게 개편될지는 모르지만 모 싸이트의 알록달록 블로그 형식은 아니었음 합니다. 그저 사랑방 그 수준이 딱이죠.

파비아나님 / 93년 제대라니요. 훈련소라고 몇번을 말씀드렸는데. 훈련소와 제대의 차이는 무려 2~3년이나 난다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