찡칭,
네가 전화하지 않았다면 참 삭막한 주말이었을꺼야. 누런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거나 목적지 없는 거리를 걸었을지도 몰라. 네가 사천성 출신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네가 사천요리를 사주고 싶어한다는 전화기 저편의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을꺼야. 벌써 낙엽이 바람에 정처 없이 휩쓸리기 시작한 거리 벤치에서 식당에서 쓰는 중국어 표현을 어눌한 발음으로 연습하는 나를 멀리서 쳐다보는 너를 발견했을 때 순간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더라. 알 수 없는 먹먹함은 중국 식당에서도, 거리로 나오고 나서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어. 내가 그토록 적응하지 못하는 중국음식의 강한 향신료 때문도 아니고, 사천요리 특유의 매운 맛도 아니었어. 물론 향수 때문도 아니었어. 잎을 다 떨구고 겨울을 맞이하는 가로수 옆 너의 모습이 앙상해 보였고, 낡고 닳아 헤어진 소매 자락이 힘없이 나폴거리는 모습이 서글퍼 보였기 때문인지도 몰라. 많은 인파 속에서 네 외투를 가리키며 선물해주고 싶다는 눈치를 보였을 때, 넌 “메이꿘시(괜찮아요)”를 되풀이하였고, 적합한 중국어 표현을 찾지 못한 난 “워~(난~)”만 되풀이하다 너의 손바닥에 “心”자를 적어주었어. 손바닥 위 글자를 따라 내려간 체온이 사라지기 전에 넌 밝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어. 겨울 외투를 사서 나온 거리에서 한번 입어보라는 제안에 넌 지금 신고 있는 운동화에 입는 옷이 아니라며 다소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고, 옷을 고르던 모습이나,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이나, 뽀로통한 모습에서 한국이나 중국이나 여자는 똑같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큰 소리로 웃고 말았어. 광장의 다른 중국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찡칭, 천진의 겨울은 뼛속을 파고든다고 한다. 따뜻한 겨울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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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12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쩡찡이란 분은 아마도 잉크냄새라는 후끈하고 훈훈한 인간난로가 옆에 있었기에
그리 춥진 않았을 듯 싶습니다..^^

잉크냄새 2007-11-12 19:26   좋아요 0 | URL
천진은 향후 중국 산업의 중심이 된다고 합니다. 어디나 그렇듯 급속하게 자본이 침투한 곳은 양극화가 심해집니다. 짝퉁 천국이라는 양허시장과 신문화가 넘치는 탕구?중심을 가보았는데 10위엔을 깍는 양허시장과 달리 탕구에는 3000위엔이 넘는 옷들이 줄비하더군요. 댓글이 좀 빗나갔지만 메피님의 마음도 전해드리지요.^^참, 찡찡은 얼음 깨지는 소리고 찡칭입니다요.ㅎㅎ

가시장미 2007-11-13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찡칭님..... 모습이 마구마구 상상이 돼요! :) 축하드려야 하는건가요? 으흐
겨울.... 따스할 수도 있겠죠? 전 요즘 따스한데 ㅋㅋ

잉크냄새 2007-11-13 09:34   좋아요 0 | URL
겨울은 그래요. 얼어붙을듯한 몸의 촉감으로도,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는 바람의 소리로도, 겨울나무의 냄새로도 겨울을 느낄수 있어요. 올 겨울은 낡고 닳은 그들의 외투자락에서 겨울을 더 느끼지 않을까 싶네요.

겨울 2007-11-13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흐뭇하고 따뜻하면서도 그립고 쓸쓸한 풍경.
지낼만 하신가요? 뼛속을 파고드는 천진의 겨울이 사뭇 궁금하네요.
왠지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그런 겨울이 이곳에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잉크냄새 2007-11-13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님 / 네, 저도 쓸쓸했던 풍경속을, 흑백사진같던 풍경속을 서성인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아직까지는 얼음이 쩌엉~ 쩌엉~ 우는 겨울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곳 겨울 바람이 가히 살인적이라고 하더군요.

殺靑님 / 저도 그래요. 사람사는 냄새, 어찌보면 당연한 냄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참 씁쓸하기도 하더군요.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가시장미 2007-11-1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끼어든 가시장미 -_- 사람냄새... 음.....잉크냄새도 나죠. ㅋㅋㅋ
그나저나.. 중국의 공기나 물에 적응은 하셨나요? 중국가면 그게 가장 힘들다던데...
참 음식도 적응하기 힘드시겠네요. 바쁘시겠지만, 행복한 소식 많이 전해주세요 :)

잉크냄새 2007-11-14 09:45   좋아요 0 | URL
이곳의 공기와 물에 대하여는 이런 말이 있더군요. 여기 있다가 귀국하면 공기와 물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고요.ㅎㅎ 진짜 적응하기 힘든건 음식이네요. 자극성 강한 향신료, 징그러운 음식재료,,, 요즘 음식이 무서워지고 있어요.-,.-

프레이야 2007-11-1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바닥에 새긴 필담 '마음'..
잉크냄새님, 너무 따뜻해져요^^

잉크냄새 2007-11-14 13:48   좋아요 0 | URL
전 옆지기님의 사진에 항상 따뜻해지는걸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11-14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람 사이에서 통하는 건 언어가 아니라 마음인 듯.

icaru 2007-11-14 12:52   좋아요 0 | URL
마음 심 자!
초면이지만 빙고를 크게 외치고 싶었다는.... 2

잉크냄새 2007-11-14 14:23   좋아요 0 | URL
마음님 / 이심전심인가 보죠, 세상 어디든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문이 존재하나 봅니다.

살청님, 이카루님 / 구면이지만 빙고를 크게 외치고 싶었다는....3

잉크냄새 2007-11-14 18:56   좋아요 0 | URL
한때는 이렇게 굴비 엮으며 놀던 것이 유행이었던 적도 있지요.ㅎㅎ

라로 2007-11-1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이 이 계절을 더욱 따뜻하게 해주는것 같아요~.(겨울, 춥지만 따뜻한 계절이라는 느낌~.^^;;;)

잉크냄새 2007-11-15 13:58   좋아요 0 | URL
한국은 지금쯤 늦가을 날씨겠네요. 이곳은 어제부터 초겨울로 진입했네요. 따뜻한 계절 보내시길...

춤추는인생. 2007-11-19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바닥에 심자새기는 부분. 영화에 써도 좋을듯해요.. 저는 과장님 글 읽는 동안 영화 파이란이 생각났어요. 영화속 배경도 겨울로 기억남을만큼 참 시리고 추운 영화면서도 뭔지 모르게 따뜻한 영화니까요.^^

잉크냄새 2007-11-19 20:23   좋아요 0 | URL
파이란, 장백지의 편지를 읽으면서 꺼억꺼억 울던 남자의 모습과 목이 졸려 숨이 넘어가면서도 슬며시 미소짓던 남자의 마지막이 참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영화죠. 복귀,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