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 실업 과목은 수산업이었다. 대부분의 인문계가 상,농,공업이었던 것에 반해 수산업이었던 이유는 신생 학교에 실업 교과 선생까지 배치할 수 없어 수산업고에서 대체 선생으로 선임해 수산업 과목을 배당하기 위해서였다. 임시 선생은 중학교 선배이기도 하여 말도 편하게 하대했다. 그가 처음 교실에 나타났을 때 당시 유행하던 주윤발식 바바리코트를 펄럭이며 안주머니에서 팔각 통성냥을 꺼내 들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가 다소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능글맞기까지한 개인 성격도 한 몫 했지만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던 이유가 더 컸다. 그는 전국 인문계중 수산업을 배우는 학교는 2개 학교 뿐이고 시험 출제자 모두 자기 선배이니 대입시험은 족보로 충분하다고 말하곤 했다. 수업은 주로 삼천포로 빠져 바다 이야기로 흘러들어가곤 했고 그의 수업은 지친 우리들에게 꽤나 재미를 보장했다. 그래도 물고기와 그물에 대해서는 아직도 꽤 기억난다.
그는 선장이라도 된 듯한 포즈로 우리를 제군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모두에게 물었다. "제군들, 삼각측량법에서 이 지역 세 가지 포인트가 어디인 줄 아는가?" 삼각측량법은 기하학의 삼각형을 이용하여 위치와 거리를 측정하는 기법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그 중 하나는 등대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신의 위치를 제외한 한 포인트가 어디일까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주로 지대가 높고 눈에 잘 띄어야 하는 특성을 갖추어야 함은 당연지사. 당시 학생들 답변에 그 곳이 포함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의기양양한 답은 인상적이었다. "그 한 곳은 언덕 위의 성당이다. 그러니까 제군들의 위치는 등대와 성당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마을에서 꽤 높은 언덕 위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 어린 시절 눈만 오면 비료 포대를 들고 눈썰매를 타러 가던 곳이다. 다른 건물도 아닌 성당이 우리 위치를 정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에게 꽤나 인상적이고 낭만적인 일이었다.
그 이후로 친구들 사이에 작고 의미심장한 변화가 한 가지 찾아왔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의 땡땡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가끔은 그 목적지가 등대와 성당이 보이는 바닷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는 동해안 철조망이 아직 철거되기 전이었고 경계병이 실탄을 장착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개구멍을 통해 바닷가로 들어가서 우리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등대와 성당을 보며 모래밭에 누워있곤 했다. 탐조등 불빛과 군인들의 욕설을 피해 도망치곤 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몰아치면 몰래 바닷가로 들어가 말없이 등대와 성당을 쳐다보다 돌아오곤 했다. 조명이 거의 없던 시절 소울음 소리와 불빛으로 어린 시절을 사로잡던 등대와 약간은 어색하지만 왠지 포근하던 성당의 십자가 불빛이 우리의 위치를 자리매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위치를 가늠해 보곤 한다. 등대는 건축 규제상 지금도 시야가 확보되어 있지만 천주교 성당은 성당과 바다 사이에 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밤새 꺼지지 않는 네온빛으로 그 역할을 잃고 말았다. 두 건물 다 100년이 넘었다. 그 긴 세월 배 뿐 아니라 누군가의 길라잡이를 해주며 늙어가고 있었다 생각하면 왠지 정겹고 짠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배들도 GPS로 그 위치를 파악한다. GPS도 원리상 삼각측정법이기는 하나 자신을 제외한 두 가지 포인트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위치도 그렇게 변한 것은 아닐까. 타인 혹은 사물과의 관계로 자리매김하던 우리의 위치도 지금은 네비게이션처럼 단독으로 설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살고 있다. 관계로 규정되던 人이 이제는 그 의미를 상실하여 관계를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철저한 홀로서기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가 허기처럼 허전할 때면 가끔 마음 속 등대와 성당이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