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하게 완전해지다
김나랑 지음 / 상상출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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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잡지 기자 생활을 하다 30대 중반에 병가 겸 퇴사한 김나랑 저자. 당시엔 쉬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기에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곳이 바로 남미였습니다.

남미는 더운 나라인 줄 알고 성급히 떠났다가 얼어 죽을 뻔. 누구도 남미의 가을이 이렇게 춥다고 하지 않았다며 추워서 오들오들 떠는 장면이 꽤 자주 나와요. 남들은 라마 스웨터라도 샀는데 ㅎㅎ.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나를 불확실성의 세계로 밀어 넣고 싶었다. - 책 속에서

 

"이렇게 힘들다고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줬지?"

예쁘고 멋지고 설렘 가득한 시작... 따윈 없습니다. 6개월 동안의 남미 여행 첫 코스부터 제대로 고생입니다. 페루 북쪽 고산지대 트래킹. 백두산이 2,750미터인데 69호수는 4,600미터. 무거운 배낭조차 적응되지 않은 초짜의 발악은 과연 남미 여행이 아무 탈 없이 진행될까 싶을 정도입니다.

 

 

 

볼리비아 명소 우유니 소금사막은 기사 속 사진 같은 분위기 대신 수증기 낀 욕실 거울처럼 뿌옇기만 하더라며 실망하다가, 다음 날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의 모습을 잠깐 목격할 수 있었다 합니다. 우유니 소금사막은 날씨 영향을 많이 받으니 한 번 가보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는 걸 보여줍니다. 

 

여행 중 어려움이 닥칠 땐 긍정의 기운들로 극복하고 싶은, 어쩌면 멋지고 강인한 여행자 강박이 있었던 건 아닐까 고민하는 장면에선 일상의 불안과 나약함을 남미 여행 중에 떨쳐버리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강박도 여행이 일상이 될 때 그제서야 조금 느슨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볼리비아 숙소에서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작곡하던 청년을 보며 몰두할 작은 예술을 로망하게 되고, 칠레의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에서는 젊음과 예술에 대한 욕망을 깨우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여행하는 것만큼이나 시간을 제대로 보내는 방법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타인의 인정과 상관없이 온전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말이죠.

 

 

 

세상엔 안 해서 후회되는 게 더 많다. - 책 속에서

 

일정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여행에서 우연은 축복이 되곤 합니다. 남미의 다채로운 풍경은 그곳에 간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김나랑 저자는 '행복이란, 휴식이란, 삶이란 이런 거구나,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감정을 만끽합니다.

 

 

 

<불완전하게 완전해지다> 책에는 유명 관광지 사진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유독 좋아한 사진들을 모아보니 유적지나 관광지 사진이 아니라 일상의 풍경이더라고요. 빛깔이 수채화 물감을 푼 것처럼 정말 아름답죠~

 

여행 후반엔 여행 레임덕으로 '에라' 모드가 발동해 택시도 과감히 타면서 남미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심신이 지쳐있다 그곳에서 그제야 행복하다, 아름답다, 좋다란 말이 나오더라고 하네요. 하고 싶은 대로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6개월간의 남미 여행. 그동안은 원하지도 않고 딱히 관심도 없는 곳에 시간과 돈을 쏟아왔었다며 보고 싶은 것, 믿는 것 하나를 위해 남미로 떠났던 그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잡지 에디터로 다시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의 끝에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지만,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의 마음은 달라져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여행을 꿈꾸는 것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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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스토리
황장석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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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발전과 혁신의 공간 실리콘밸리. 수많은 정보기술 기업 관계자들이 발도장 찍는 그곳. 세상은 이미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과연 실리콘밸리는 어떤 원리로 움직이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실리콘밸리를 파헤치는 책 <실리콘밸리 스토리>.

 

창업과 혁신적인 기업 문화에 초점 맞춘 기존 실리콘밸리 분석을 넘어 이 책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쌓아온 실리콘밸리의 경험과 역사, 문화에 초점 맞췄습니다. 실리콘밸리 문화를 이끈 사람들의 이야기와 어두운 이면까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샌타클래라밸리 지역에 설립한 반도체 핵심 소재인 실리콘에 빗대어 이 지역을 실리콘밸리라 부르기 시작했었다네요. 이 용어는 1971년 주간지 <일렉트로닉 뉴스> 칼럼을 통해 공식적으로 기사화되었고 이후 기술과 혁신을 상징하는 곳으로 자리 잡히게 됩니다.

 

점차 실리콘밸리라 부르는 곳이 넓어졌습니다. 골드러시를 계기로 폭발적으로 성공한 샌프란시스코도 포함됩니다. 금융의 도시에서 2008년 경제 위기를 기점으로 스타트업의 도시로 변모해 트위터, 우버, 에어비앤비, 핏빗 등의 본사가 이곳에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는 자유분방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1939년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인 HP의 금요일 맥주 파티는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는 사례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캐주얼한 근무 복장, 근무시간 유연제, 수평적 의사소통, 커피 타임 등의 선구자 역할을 한 HP는 차고 창업의 대표적 선례로도 유명합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는 차고가 없어서 실리콘밸리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리콘밸리에서의 차고 창업은 애플, 구글 등 흔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차고 창업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없습니다. 차고 창업은 기술 기업이 창업 초기에 제품을 개발, 생산, 판매하는 것부터 추후에 투자를 받는 것까지 창업자가 회사를 키워가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차고 창업이든 재학 중 창업이든 창업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실리콘밸리 기업과 상생하며 인재를 키워내는 스탠퍼드 대학은 학생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상당하고 교수들도 창업한다고 하면 적극 권장합니다. 문제 해결 방식을 고안하는 스탠퍼드 D 스쿨(디자인연구소) 같은 실사구시 학풍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야후, 구글, 스냅챗, 인스타그램, 선 마이크로 시스템스 창업가들이 모두 스탠퍼드 대학 출신입니다.

 

 

 

벤처 투자의 오랜 전통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투자가로 존경받은 유진 클라이너와 세쿼이아 캐피털을 설립한 돈 밸런타인을 대표적 사례로 소개합니다. 구글에 투자한 유진 클라이너는 제품만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투자하라는 클라이너의 법칙을, 애플에 투자한 돈 밸런타인은 수요 많은 기존 시장에 새로운 제품을 공급하는 회사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투자의 방식과 취향은 다르지만 기술을 이해하며 창업자와 멤버의 핵심 역량을 아는 만큼 투자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실리콘밸리는 IC 위에 만들어졌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계와 중국계를 뜻하는 IC입니다. 실리콘밸리 어디서든 만나게 되는 아시아 이민자들. 1세대 이민자와 달리 이들은 기술을 들고 온 고학력 엔지니어 중심의 2세대 이민자들입니다.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특히 흥미로웠는데요. 강남 8학군에 비견될 만한 학군 좋은 도시로 유명한 쿠퍼티노에서의 아시아계 비중, 중국보다 더 심한 부모 교육열로 대치동 엄마를 능가할 수준인 인도계 부모의 교육열은 생각했던 것보다 높았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어두운 면도 함께 끄집어 냅니다. 가족이 명문대 출신에 고액 연봉자들이다 보니 실리콘밸리 명문고 자살 문제가 심각한 편이었어요. 성공에 대한 압박감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게다가 판자촌, 홈리스 문제도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성장과 더불어 고액 연봉자들이 많아지자 물가가 함께 뛰어 원래 주민들의 생활이 힘들어졌습니다. 고액 연봉자들조차 비싼 월세와 집값을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니까요.

 

 

 

어두운 이면을 지녔지만 기술 변화와 사회 변화를 이끌고 비즈니스의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는 현재 4차 산업혁명을 어떻게 준비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클라우스 슈밥이 언급한 4차 산업혁명 개념보다 오히려 인공지능과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자동화란 개념이 더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실리콘밸리는 기본소득 실험, 쇼핑몰의 경비 로봇, 자율주행차 등 인공지능이 대세임을 일반인들도 체감할 정도입니다.

 

 

 

인사이드 실리콘밸리 코너에서는 실리콘밸리의 소소한 가십을 소개하는데요. 실리콘밸리 문화와 역사를 이끈 인물 스토리, 실리콘밸리 기업의 세금 회피 전통, 기술 절도 사건 등 흥미로운 가십이 눈길 끕니다. 『아날로그의 반격』 책에서 실리콘밸리의 아날로그 방식을 언급한 부분도 소개되었네요.

 

<실리콘밸리 스토리>에서 분석한 실리콘밸리의 숨겨진 컬처 코드 속에는 부러워할 만한 점도, 씁쓸한 점도 있습니다. 회사를 성장시켜 더 큰 회사에 매각하는 엑시트와 처음의 사업을 다른 사업으로 변화시켜나가는 피벗이 일상인 실리콘밸리. HBO 드라마 <실리콘밸리>에서 보여준 인수 전쟁은 드라마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하네요.

 

살벌하지만 기회의 땅이 된 실리콘밸리. 돈과 기술, 아이디어가 어떻게 연결되어 선순환을 창출하는지, 기술 발전과 혁신의 원동력이 된 실리콘밸리 특유의 문화를 살펴본 <실리콘밸리 스토리>.

 

국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12년 스탠퍼드 대학교 후버연구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지낸 후 현재 실리콘밸리에 정착해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황장석 저자의 목소리는 생생한 현실감으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경영전략을 배워 스타트업을 꿈꾸는 이들, 실리콘밸리 유학을 준비하는 분, 저처럼 막연하게 알던 실리콘밸리에 대한 호기심을 풀고 싶은 이들에게 현실적인 이야기가 가득한 <실리콘밸리 스토리>를 경제경영 교양서로 읽어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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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특별기획 통찰 - 예리한 관찰력으로 동서고금을 관통하다
EBS 통찰 제작팀 지음 / 베가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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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2017년 중반까지 방영된 EBS특별기획 통찰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 <통찰>. 여러 학문 분야의 국내 최고 석학들의 강연은 인문과 과학의 융합이라는 콘텐츠로 좋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문사철, 과학, 예술, 종교 등을 넘나들며 생각의 그릇을 키우는 <통찰>. 앎이 삶으로, 지식이 지혜로 익어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책에서는 TV에서 전달하지 못한 관전 포인트를 짚어주며 함께 읽으면 좋은 책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굴의 '동'자와 통찰의 '통'자가 洞 이라는 같은 한자라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되었어요. 동굴 속에서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단군신화 속 동굴, 원효의 동굴, 벽화가 그려진 쇼베 동굴 등은 이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출발시킬 수 있는 '통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동굴과 열정, 자기 성찰은 인생의 심연을 찾아 지혜를 얻게 되는 인류 이야기의 시작을 담은 길가메시 서사시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 과학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복잡한 세상 속 숨겨진 이치와 법칙을 살펴봅니다. 특히 인간은 과학을 통해 미래를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관점을 다루는데, 난해한 양자역학 세계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핵심 이론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방대한 세계사 속에서 <통찰>이 선택한 역사 주제는 지중해 역사와 임진왜란입니다.

십자군전쟁, 대항해 시대, 문화를 바꿔버린 향신료 등 지중해 역사를 통해 유럽사를 살펴봅니다.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들이 사회, 정치, 문화, 종교 전반에 영향력을 끼친 과정을 살펴보면서 르네상스 뒤에 숨은 어두운 그림자와 상업적 논리가 스며든 교회의 면죄부 이야기까지 흥미롭게 이어집니다.

임진왜란 이후 강대국들의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한 한반도. 사드 배치,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 현재 정치적 문제까지 한국의 자세를 고민하게 합니다.

 

 

 

중세 최고의 문학이자 철학서, 신학서인 단테의 『신곡』을 소개하는 예술 파트. 지옥 같은 삶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내용은 실존의 위기에 처한 헬조선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술의 영감에 관한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시대의 시선이 그림을 통해 표현된 미술. 시대마다 주도적인 시각과 해석이 존재하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미술의 의미를 다룹니다.

 

 

 

오늘날 현실을 잘 설명해주는 용어는 '통섭'이죠. 크로스오버, 융합, 인터랙티브 같은 용어가 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기존 경제학에 생물학-심리학적 개념이 적용된 행동경제학의 탄생,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기생충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는데요. 기생충과 손자병법을 함께 다루고 있어요. 무슨 관계일지 호기심 반짝!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켜 이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승리라고 한 손자병법의 상생의 전략. 괜히 전투를 벌여 숙주를 곤란하게 하지 않고 손 안 대고 코푸는 기생충의 생존 전략은 닮았습니다. 오늘날 기생충이 없어 인간이 고생하는 시대에 기생충에 대한 편견을 줄여 인간과 생태계가 공존해야 함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이어 미래에 관한 통찰로 마지막을 맺습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급격히 발전한 인공지능 시대. 로봇의 도덕 문제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의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어요.

 

 

 

주제마다 더 보고 읽을거리를 소개하고 있어 더 깊은 이해를 위한 책과 영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 신간까지 다루고 있어 마음에 듭니다.

 

<통찰>은 인문학자와 자연 과학자가 함께 개별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방식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인류의 핵심 주제를 생각의 폭을 넓히며 살펴봅니다. KBS 명견만리처럼 긴 시간 동안 방영된 강연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인 만큼 알짜배기만 다루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어 대중적인 인문교양서로 읽을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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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1
배명은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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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소설 수준이 언제 이렇게 맛깔스러워졌죠?

황금가지에서 선보인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에 게재된 작품 중 공포소설 수작을 모은 단편집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첫 편, 배명은 작가의 <허수아비>부터 셉니다. 오싹오싹. 한국형 공포소설 맛이 제대로네요. 강에서 뭔가를 건져 올려 허수아비를 만드는 노인 이야기인데요, 이 단편을 읽고 나면 삐에로 공포증 대신 허수아비 공포증이 생길 것이야!

"어차피 강에서 떠돌아다닐 것들, 내가 새 생명 불어넣어 준다는데 마다할 것들이 어디 있겠소. 마다해봤자 자기들이 어쩔 거야?" - 허수아비, 배명은

 

 

 

영혼과 사후세계를 연구하는 연구소에 취직한 이론물리학자. 영혼의 존재는 이미 증명되었다며 그에게 떨어진 연구는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사후세계의 존재를 꿈꾸는 이들의 마음을 무참히 박살 내버린 그의 증명.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이론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도출되는 과정이 신선했어요. 이공계 대학원 출신 작가다운 기질이 묻어난 단편소설입니다. <증명된 사실>은 SF 요소가 가미된 공포물이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맘에 들었고요, 책을 덮고 나서도 문득문득 떠오를 정도로 독자의 상상력을 계속 자극하는 스토리입니다.

"맙소사. 내가 도대체 뭘 증명해낸 거지?" - 증명된 사실, 이산화

 

자전거로 무박 국토 종주 중인 남자에게 닥친 죽음의 위기를 그려낸 <이화령>. 이화령 구간에서 자기보다 더 잘 타는 라이더를 죽여버리는 미치광이를 만납니다. 인과응보적인 결론이 순간 싱거울 수도 있지만 생각할수록 오싹합니다. 자전거 종주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써낼 수 없는 생생한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그쪽 쫓아가서 죽이려고 그러는 건데 내가 먼저 가면 어떡합니까?" - 이화령, 왼손

 

호러 영화 덕후 남자에게 벌어진 호러틱한 사건을 다룬 <위탁관리>. 괴물에게 먹힌다느니 신체강탈 같은 징글맞은 소재를 좋아한다면 취향에 맞을만한 스토리입니다. 생리 현상에 문제가 생기며 자꾸 이상한 게 나오는 장면은 으악, 상상하기 싫어요.

"사람 몸에 한 번 기어들어갔으면 영양분을 뺏어먹든 살을 파먹든 그래야지. 근데 진짜 몸만 잠깐 빌려. 괴물이 도리를 알아. (중략) 내가 괴물이 됐으면 인생 좀 날로 먹겠어요. 은근히 고생하는 괴물 많다니까?" - 위탁관리 / 유사본

 

놀이터에서 놀다 사라진 아이를 둘러싼 기묘한 이야기 <그네>. 그 아이와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아들이 자꾸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익숙한 스토리인듯하면서도 식상하지 않게 끌어나가네요. 왕따, 폭력 등 가정과 학교 문제를 짧은 단편 속에 강렬하게 집어넣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데. 민재 우는 소리는 나밖에 못 듣는데.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데." - 그네, 사마란

 

 

개인적으로 장은호 작가의 <천장세> 작품 무척 좋았어요. 디스토피아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개념을 건져올렸습니다. 천장세라는 개념이라니. 천장. 그 천장 맞습니다. 천장에 세를 놓는 겁니다. 원룸 월세 사는 사람이 화장실을 월월세로 놓을 수 있고, 화장실에서 월월세로 사는 사람은 또 그 집 천장에 월월월세를 놓을 수 있는 세상. 복잡한 권리관계로 도시를 못 떠나게 하는 교묘한 장치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뜨면 어떻게 되겠어? 도시는 세포를 잃는 거지. 도시란 것도 생명체 같아서 죽을 것 같으면 발악을 하거든. 발악 중 하나가 천장세 따위지." - 천장세, 장은호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제목에서 짐작하듯 죽음을 판다는 소재는 흔하지만 살짝 비틀어, 읽는 맛 괜찮았습니다. 죽고 싶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가여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 죽음을 파는 곳. 자신이 죽는 대신 뺑소니 사고로 병원에 누운 딸을 살리고 뺑소니 운전자를 복수하고 싶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처럼 불가해한 존재의 도움으로 이뤄지는 방식은 낯설지 않은 소재이지만,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깜박하고 날짜랑 고통에 대한 합의 없이 보내드렸지 뭡니까." -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지현상

 

<이른 새벽의 울음>은 아기를 키워본 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리얼한 심리 묘사가 일품이었습니다. 아내가 일하고 전업주부가 된 남편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집니다. 사이코 느낌 폴폴~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아기는 정말 내 아기가 맞는 걸까?" - 이른 새벽의 울음, 해도연

 

<고속버스>는 폐쇄 공간이라는 장치가 공포감을 더하네요. 불륜을 하다 끝내려는 남자에게 찾아온 생사의 갈림길. 죄질이 나빠 이 남자에게 감정 이입은 되지 않았습니다. 벌받을만한 놈이랄까요. 오히려 범죄자의 날선 목소리에 더 공감해버렸네요.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곳도 충분히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 고속버스, 엄성용

 

 

 

무명화가들의 유작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남자. 오싹한 분위기의 그림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소재 자체는 익숙합니다. 불 꺼지지 않는 방, 기이한 그림의 비밀만으로는 흔한 스토리가 예상되겠지만 생각 못 한 결말이어서 색다른 재미를 만끽했습니다.

"혼자 있지 마라. 눈 감지 마라. 그리고 잠들지 마라." - 더 도어, 우명희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에 수록된 총 10편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몰고 가다가 미묘한 통쾌함으로 끝내 작품 배치 괜찮았어요. 브릿G에 게재된 수많은 작품을 일일이 읽기 힘든 저로서는 수작을 모아 이렇게 책으로 나온 상태가 무척 만족스럽답니다.

 

공포물에도 수많은 갈래가 있듯 취향에 맞지 않으면 시시하게 읽힐 수 있는데, 처음엔 별거 아니네 싶었던 스토리도 조금 지나니 자꾸 떠오르는 걸 보면 이번 단편집은 전반적으로 괜찮았습니다. 토속적인 소재는 물론 일상 미스터리와 SF에서 판타지까지, 공포소설의 다양한 분위기를 이 한 권으로 재미있게 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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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도 퇴근이 필요해
케이티 커비 지음, 박선령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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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육아서에 지친 맘들에게 필요한 책 <육아도 퇴근이 필요해>. 영국맘 케이티 커비는 육아를 하며 겪은 총체적 불공정성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잘 키우는 법이 아닌, 나만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는 건가 하고 자괴감을 덜 요량으로 블로그에 올린 글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되었네요.

 

 

 

아이를 키운다는 건 온갖 모순이 연이어서 발생하는 하루하루를 겪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골칫거리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은 이 시간이 멈췄으면 바랄만큼 사랑스러워지는 아이들.

 

짜증나게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가 잠드는 순간 힐링을 온몸으로 겪는다면 육퇴가 필요한 건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제발 자라 자라 자라... 얼마나 빌었었는지.)

 

 

 

졸라맨 같은 막대기 인간 그림은 단순 명료하면서 유쾌함을 더하네요.

유산을 한 번 겪기도, 임신 때는 입덧으로 고생하는 부류에 속했고, 첫째 출산 때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과 출산의 경이로움은 중독성 있는 경험이라 결국 둘째까지 낳게 된 케이티 커비.

 

쪼끄만 인간을 집으로 데려온 첫날 기쁨의 흥분은 곧 수유 후에도 자지 않고 우는 아이가 되는 순간 와장창 깨집니다. 갈수록 쉬워진다는 말은 흥! 지나고 보면 갓난아기 때가 그나마 수월했더라는 기억뿐입니다. 사실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었구나 싶은 마음은 비슷할 겁니다. 지금 이 순간 걱정과 불안을 안겨주는 아이들의 지긋지긋한 행동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작은 일에도 감정이 무너져내리며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죠.

 

 

 

육아의 책임은 부부가 균등하게 나누는 게 정상인 시대. 사실 말만 번지르르한 경우가 태반이긴 하지만요. 아빠가 혼자서 아이를 공원에 데려가는 건 '다정한' 행동이 아니라 '당연한' 행동이라고 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폭풍 공감하기도 했네요. 아내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도록 아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다 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남편은 와우... 희귀종처럼 보입니다.

 

 

 

육아의 최고봉은 아이가 밤새 깨지 않고 자도록 하는 것. 물론 아이답게 잠은 잘 잡니다. 품에서 떼어놓지만 않으면. 우리 아이도 두 돌 넘어서까지 최악의 수면 문제를 보여줬습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깨고, 침대에 내려놓기만 하면 발악하고.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렸습니다. 아이 수면 문제로 지쳐 나가떨어졌던 제 멘탈이 억울할 정도로 허탈했던 기억이 나네요. 우리 아이는 이 수면 문제 외에는 사실 무척 키우기 수월한 아이였어요. 보통은 수면 문제 외에도 식사, 배변 등 온갖 문제가 따릅니다.

 

 

 

어쨌든 육아하다 보면 내 정체성을 잃어가는 기분이 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첫 육아를 하는 초보맘은 더 흔들리기 쉽습니다. 육아서에서는 반드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대체 어떻게 시간을 낸다는 건지. 낮의 아이, 밤의 아이로 성향이 다른 남자아이 둘을 키운 케이티 커비 저자에게 '나만의 시간'은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육아서나 전문가들의 말도 내 아이에게는 해당 안 되는 것 투성이입니다.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엄마가 행복해야 한다는 걸 이해는 하지만 내 행복찾기를 할만한 에너지조차 탈탈 털린 상태입니다. 분유를 먹이든 모유 수유를 하든, 직장맘이든 전업주부든 육아의 결정적인 답은 다른 부모가 아니라 실제로 양육하고 있는 나에게 있습니다. 매달리는 심정으로 다른 데서만 해답을 찾다 보면 아이의 문제는 곧 엄마의 문제로 인식하게 됩니다. 내 양육방식을 비판받는 기분이고, 부모로서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이 문제는 집착을 버리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저자는 정말 중요한 이들에게만 집중하자고 합니다. 아이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인 엄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첫째를 키울 땐 완벽을 추구하려고 해서 스트레스받았지만, 둘째 땐 방치 수준으로 될 만큼 겨우 두 번만에 극과 극의 마음을 경험합니다. 물론 아이 하나보다 둘일 때 물리적인 힘은 더 들어가지만, 사소한 일에 스트레스받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내 생활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아이들이 성가신 건 사실이지만, 아이가 자랄 때 엄마도 함께 자란다는 말처럼 엄마는 아이들의 불완전한 부분까지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육아도 퇴근이 필요해>는 정통 육아서처럼 해법을 알려주려고 하진 않습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애가 있어. 난 이런 심정이었어. 그리고 난 이렇게 행동했어.' 식입니다. 그런데 이 엄마의 말과 행동에 점잔 빼는 일은 없습니다. 고백하지 못한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이 엄마는 주저 없이 내뱉습니다. 거기에 공감 포인트가 많습니다.

 

아이 키우면서 똥 이야기는 기본,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에피소드도 과감히. 육아서를 한 권 쓴다면 비스킷으로 아이 키우기라는 제목이 탄생할 거라며 비스킷 뇌물로 아이를 키운 (남들은 불량엄마라고 말하겠지만) 저자. 그렇다고 시니컬함으로만 무장하지도 않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던 육아 에세이입니다.

 

'육퇴가 필요해'를 외치는 맘들에게 폭풍 공감을 안겨줄 육아 에세이 <육아도 퇴근이 필요해>.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드는 육아서에 지친 맘들에게 추천합니다.

 

"오후 6시가 지나도록 여전히 잠옷 차림으로 더러워진 가제 수건과 반쯤 먹다 남긴 시리얼 그릇과 차게 식은 찻잔에 둘러싸여 있다고 하더라도, 온종일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여러분의 아기는 틀림없이 깨끗하고 배부르며, 따뜻하고 안전한 상태일 텐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다. 사실 그게 전부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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