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 - 《파이돈》에서 《팡세》까지, 삶과 죽음을 읽는 철학 수업
최대환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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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갓생을 살기 위해 노화를 거부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타임라인 속에서 상실의 슬픔은 효율성을 해치는 방해물로 취급받기 일쑤입니다.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에서 고대 철학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신학생들을 양성해온 철학 하는 사제 최대환 신부님은 우리 인생이라는 항해의 종착지를 미리 답사해보는 지적인 모험을 펼쳐 보입니다.


죽음을 말하는 이유는 공포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길의 방향을 다시 묻기 위해서입니다. 메멘토 모리를 삶의 집중력을 높이는 철학적 장치로 재해석합니다. 죽음은 종착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선명하게 만드는 거울이라는 관점입니다.


가톨릭의대 생명대학원에서 의료진과 종종인들을 매료시켰던 명강의 <죽음 이해>를 바탕으로, 소크라테스부터 파스칼까지 서양 철학사 2500년을 관통하는 죽음의 계보를 따라가는 여정이 이 책의 뼈대를 이룹니다.


1부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와 에피쿠로스를 소환합니다.


플라톤의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사형 집행 당일, 독배를 앞에 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토론을 벌이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마당에 무슨 토론이냐 싶겠지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지금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합니다. 이 역설적 태도가 《파이돈》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회피하는 대신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이란 이미 죽은 삶, 즉 자신의 영혼을 방치한 채 욕망과 두려움에 끌려다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삶, 곧 영혼을 돌보고 덕을 쌓으며 살아온 삶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자의 의연함이라면, 에피쿠로스는 아예 다른 방향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에피쿠로스의 논리는 명료합니다. 쾌락과 고통은 모두 감각에 속하고, 죽음은 감각의 소멸입니다. "내가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나는 없다"라는 말은 강력한 현재 긍정론인 겁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지금 이 순간을 망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잘 죽는 것을 준비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노력이며, 오직 잘 사는 것만이 잘 죽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라고 하고, 에피쿠로스는 죽음 같은 건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방향은 달라 보이지만, 목적지는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두려움 없이 살아라.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는 이 두 전통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임을 보여주면서, 죽음을 둘러싼 철학적 대화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줍니다.


2부 죽음의 기예(Ars Moriendi)는 이 책의 중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기예(技藝)라는 표현이 이채롭습니다. 죽음이 어떻게 기예가 될 수 있는 걸까요? 기예란 반복되는 훈련과 실천을 통해 몸에 배는 능력입니다.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 꾸준히 연마해온 삶의 태도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현되는 겁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은 세네카입니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훗날 그 황제에게 자살을 명받은 비운의 스토아 철학자입니다. 세네카는 정작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 '오늘'을 충실하고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대 수명 연장에 열을 올리면서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보입니다. 저속노화가 키워드가 된 시대에 세네카는 오래 사는 것보다 얼마나 충실하게 사는지가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키케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등장합니다. 딸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 공화정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좌절 앞에서 키케로는 철학을 붙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철학이 단지 관념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키케로는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더욱 극적인 사례입니다.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매일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일기를 썼다는 사실은 철학이 권력의 정점에서도 필요한 내면의 실천임을 보여줍니다.


3부는 신학적인 색채가 짙습니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등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개의 죽음'은 인상적인 개념입니다.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합니다. 영혼의 죽음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내면이 죽어버린 상태, 관계가 단절되고 의미를 상실한 상태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적 가난' 개념도 흥미롭습니다. 소유와 집착을 내려놓는 삶이 어떻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미니멀리즘이나 에세이즘이 유행하는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에크하르트가 수백 년 전에 통찰한 것과 유사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덜 가질수록 더 자유롭다는 진리 말입니다.


4부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넘어,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들려줍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비극이자 서사시입니다. 이탈리아 서정시의 정점을 끌어올린 시인이 동시에 정치 투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가 추방당하고, 돌아오면 화형이라는 경고 속에서 유배지를 전전하며 《신곡》을 완성했습니다.


추방당하고 박탈당한 사람이, 죽음 이후에도 개인의 고유성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토록 강렬하게 그려냈다는 사실을 짚어줍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실존적 몸부림을 그려낸 단테의 죽음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이야기도 뭉클합니다. 스토아 철학의 덕과 에피쿠로스적 삶의 향유를 동시에 추구한 인문주의자가 양심과 생명 사이에서 양심을 선택하는 최후를 맞습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삶을 경시한 결과가 아니라 삶을 가장 진지하게 사랑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이상 사회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기쁨을 온전히 누린다는 대목은 토마스 모어 자신의 삶의 방식을 드러냅니다.


몽테뉴와 파스칼은 근대의 문턱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정면으로 응시한 사상가입니다. 몽테뉴는 자기 자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 그 불안정하고 유한한 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파스칼은 그 나약함 앞에서 신앙으로의 도약을 선택했습니다. 두 길은 달라 보이지만, 둘 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했다는 점을 짚어줍니다.


지금 죽어도 허무하지 않을 것인가. 이 물음이 최대환 신부를 철학으로 이끌었고, 그 철학이 이 책이 되었습니다. 허무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공했다는 뜻? 진심으로 살았다는 뜻? 저자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단테, 토마스 모어, 파스칼의 삶과 사상을 경유하면서 우리 스스로 그 답에 다가가도록 이끌어줍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호모 비아토르는 우리말로 길 위의 인간, 여정에 있는 인간, 여행하는 인간, 순례하는 인간 등으로 옮깁니다. 인간 존재를 해석하는 숱한 개념이 있지만, 우리의 인생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보다 더 절실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이죠.


우리는 출발했고 언젠가 도착합니다. 그 사이의 시간이 우리의 삶입니다.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는 목적지를 의식하는 여행자만이 지금 이 길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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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위대한 몸 - 최신 의학이 밝혀낸 면역, 질병, 노화의 비밀 프린키피아 9
줄리아 엔더스 지음, 질 엔더스 그림,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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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kg의 뇌부터 2m²의 피부까지, 줄리아 엔더스가 던지는 인체 해독 패러다임 『이토록 위대한 몸』. 800만 부 이상 팔린 『이토록 위대한 장』으로 전 세계에 장내 미생물 열풍을 일으켰던 독일 의학자 줄리아 엔더스. 이번에는 장 하나가 아닌, 몸 전체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몸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당신과 평생을 함께 조율해가는 경이로운 파트너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몸의 언어를 읽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겁니다.


병원에 가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몸은 분명히 신호를 보냅니다. 만성 피로, 원인 불명의 피부 트러블, 반복되는 소화 불량,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불안. 수치로는 잡히지 않고, 특정 장기로 귀결되지도 않는 이 불편함들. 우리는 그것을 원인 불명이라고 부르거나, 스트레스 탓으로 돌리거나, 그냥 참습니다.


17세 때 원인불명의 피부병을 앓으며 몸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줄리아 엔더스. 이 책은 의학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삶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여동생인 과학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질 엔더스의 위트 넘치는 삽화가 곁들여진 『이토록 위대한 몸』을 통해 우리 몸의 은밀한 네트워크를 파헤쳐 봅니다.





태어나는 순간 첫 호흡을 내뱉고, 죽는 순간 마지막 숨을 멈춥니다. 폐는 하루에 무려 2만 번이나 우리를 살려내는 성실한 일꾼입니다. 폐가 단순히 산소를 들여오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가스 교환기라고 생각했나요? 이 책은 활성산소와 균형의 문제를 짚어줍니다.


우리 몸의 산소 처리 방식은 불완전하다고 합니다. 약 100회 회전할 때마다 한 번씩, 산소 두 조각이 반응하다 말고 빠져나가는 겁니다. 이 녀석이 활성산소입니다. 이 미완성 분자는 원래보다 반응성이 훨씬 더 강해서 우리 몸에는 해롭습니다. 거의 모든 물질과 결합하는 산소가 몸에서 무차별적 연쇄 반응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유지해주는 산소가 동시에 우리를 노화시키고 공격하는 칼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저자는 조화로운 관리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완전한 통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몸은 완벽하게 설계된 기계가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면서도 그 오류를 스스로 조율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체계입니다.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이라는 불청객 속에서 폐가 어떻게 필터링을 수행하는지, 우리가 의식적인 호흡법을 통해 어떻게 자율신경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시간입니다.


잘 작동하는 면역체계는 적이 오면 무조건 섬멸해야 하는 전사로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면역체계의 본질은 공격이 아니라 식별과 협상에 있다고 합니다. 면역이란 게 단순히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만연한 알레르기 역시 면역체계가 왜 그렇게 예민보스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들려줍니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주요 책임자가 비만세포라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줄리아 엔더스가 의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는 피부병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부를 다루는 장은 유독 감성적이고 따뜻합니다.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상실의 경험을 통해 피부가 어떻게 우리의 감정과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피부는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의 최전선이며, 모든 상처와 치유의 기록이 새겨지는 일기장이었습니다.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는 행위부터 누군가의 다정한 어루만짐이 우리 뇌에 어떤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지까지 세밀하게 추적합니다.


근육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울퉁불퉁한 보디빌더의 몸? 저자는 강함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립니다. 근육은 뇌와 소통하며 우리 몸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정교한 센서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개념이 등장하는데, 바로 티틴이라는 단백질입니다.


긴장 상태의 근육을 늘리면 티틴 용수철이 활성화되고, 자주 활성화될수록 근육은 더욱 정밀하게 동작에 맞춰 강도를 조절한다고 합니다. 요가와 필라테스에서 특히 이런 정밀한 조절이 자주 일어나고, 이렇게 훈련된 티틴은 눈에 띄는 근력 강화를 선사하는 겁니다. 격렬한 근력 운동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 이완과 긴장의 워라밸이 근육에도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몸의 컨트롤 타워, 뇌를 다룹니다. 우리는 잠을 활동의 정지라고 생각하지만, 뇌의 입장에서는 관리자 교체의 시간입니다. 잠들었을 때는 주로 내부를 조절하는 늙은 뇌 영역(가장 초기에 진화한)이 통치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잠이 올 때 대뇌가 개입하여 반대 신호를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먼저 부엌을 치워야 해. / 추리극이 지금 너무 재밌어. / 야간 근무 중이야 같은 신호가 충분히 강하면 깨어 있게 되는 겁니다.


잠을 설치는 이유는 내부의 늙은 뇌가 보내는 휴식의 요청을 외부 지향적인 젊은 뇌가 묵살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도파민 중독에 휩싸인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몸은 고립된 부품들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균형을 재조정하는 유기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건강도서로 읽히면서도 몸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에 관한 책입니다.


더 많이 운동하거나, 더 좋은 영양제를 먹거나, 더 철저하게 관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그 신호를 해석하는 언어를 갖추라고 권합니다. 호흡부터 수면까지, 백 년을 버텨낼 당신의 몸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용설명서 『이토록 위대한 몸』. 몸의 언어를 해독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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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 새로 읽는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와 두 편의 시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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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정수를 담은 『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라는 이름 앞에는 의식의 흐름, 모더니즘의 기수 같은 수식어가 붙곤 합니다. 이번 에세이집은 소설가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에세이스트 울프의 서늘하고도 유머러스한 면보를 보여줍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성을 온몸으로 밀어냈던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들여다보면, 뜨겁게 박동하는 혁명가였습니다. 비평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지적 자양분을 섭취하고, 블룸즈버리 그룹을 통해 관습에 저항하며 동성애, 평화주의, 여성의 독립을 외쳤던 생애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전복이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제인 오스틴, 모두가 두려워하는 부지깽이」 글에서는 제인 오스틴을 통해 낡은 관습의 껍데기를 벗겨봅니다. 울프는 오스틴이 처했던 시대적 제약, 즉 거실 한구석에서 몰래 글을 써야 했던 여성의 운명을 연민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갈고닦은 오스틴의 풍자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날카로운지를 주목합니다. 울프에게 오스틴은 문학적 모범인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침묵을 강요받으면서도 문장으로 그 질서를 해체한 전략가였습니다.





"『오만과 편견』이 그 굳은 껍질 속에 숨겨진 귀한 보석을 드러내기 전까지 제인은 난로 옆의 부지깽이나 검불막이만큼도 주목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죠. 여전히 부지깽이 같지만, 이제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부지깽이예요.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 글로 인물 묘사를 날카롭게 하니까 어찌 두렵지 않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제인 오스틴은 조용한 사이다의 원조인 셈입니다.


예술을 논하면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은 멋쩍은 일로 여겨지나 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꽤 현실적입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강조했던 연간 500파운드의 가치가 이 에세이에서도 변주됩니다.


토머스 쿠츠라는 인물을 통해 삶을 지탱하는 두 축, 즉 자본과 감정의 상관관계를 파고듭니다. 사랑은 운명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랑을 유지하고 완성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계급적 한계를 분석하는 울프의 시선이 날카롭습니다.


「추락하는 자에게는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글에서는 특권층의 교육을 받은 작가들이 마주한 내적 갈등을 다루며, 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책임과 연결되는지를 논합니다. 울프는 교육이라는 자원을 독점해온 계층의 부채감을 지적합니다.


추락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민주적 열망과 세습된 특권 사이의 긴장을 묘사하며, 지식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염치를 강조합니다.





「내가 교양속물을 싫어하는 이유」, 「예술가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이들에게」 글도 재밌습니다. 아는 척만 하는 교양속물들의 허위의식을 비웃기도 하고, 예술의 순수성 뒤에 숨어 정치를 외면하는 태도를 꾸짖기도 합니다.


울프에게 예술은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파시즘의 위협과 전쟁의 공포 속에서 예술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하다는 말은 기득권을 옹호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라는 울프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대 지식인들이 영화를 그저 하급 오락으로 치부할 때, 울프는 영화가 인간의 감각을 어떻게 재편하는지 간파했습니다. 문학이 담아내지 못하는 시각적 리듬과 속도감에 주목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인간 정신을 담아낼 새로운 그릇에 대한 모더니스트 작가로서의 학구적 열망이었습니다.


울프가 평생을 바쳐 수행한 여성 계보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그녀에겐 얼굴이 없었다」, 화가 월터 시커트의 작품에 대해 논하는 「월터 시커트에 관한 대화」 등 비평가로서의 울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 흥미진진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미세한 의식의 구조를 뒤흔듭니다.





이 책은 우아한 울프라는 환상을 깨부숩니다. 독설을 내뱉고, 정치를 고민하며, 예술의 계급성을 비판하는 전복적 울프가 서 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던 편견의 감옥을 찢어발깁니다.


『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에는 울프의 시가 두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친필 원고에 남겨진 수정 흔적을 그대로 반영한 시가 실려 있어 작가의 사유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울프의 에세이는 소설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신랄하며, 무엇보다 재밌습니다. 지적 부지깽이로 낡은 관습의 껍데기를 깨부수는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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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내려놓기
도리스 볼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생각의집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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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심리학계의 거장 도리스 볼프가 알려주는 파괴적 죄책감 이별 공식 『죄책감 내려놓기』. 우리 마음속에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시시때때로 우리를 검열하고 채찍질하는 보이지 않는 판사 '죄책감'. 30년 넘게 인지정서 행동치료의 최전선에서 활동해온 도리스 볼프 박사는 우리가 왜 그토록 스스로에게 잔인한 가해자가 되는지를 파헤칩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 잘못했을 때 느끼는 마음의 가책을 당연한 도덕적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이는 멀쩡하고, 어떤 이는 지옥을 맛볼까요?


먼저 용어 정립부터 시작합니다. 흔히 후회와 죄책감을 동일시하지만, 이 둘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감정이라고 합니다. 죄책감은 우리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할 때 느낍니다. 후회는 우리의 행동을 틀렸다고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기지만 그 실수를 용서할 때 느낀다고 합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괴롭히고 손발을 꽁꽁 묶고 에너지를 앗아가지만 후회를 느낄 때는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죄책감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적인 낙인으로 찍어버리는 파괴적인 행위인 반면, 후회는 '행위'에 집중하여 미래의 변화를 도모하는 생산적인 에너지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도리스 볼프 박사는 우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고 강조합니다.


죄책감은 후천적으로 학습된 공포라는 점을 짚어줍니다. 어린 시절 부모나 교육 기관으로부터 들었던 말들이 어떻게 내면의 검열관이 되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인사 안 하면 엄마 창피해. 아우 창피해라! 엄마 아빠가 이렇게 널 위해 애를 쓰는데 그딴 식으로 행동해서 되겠어? 너 때문에 아빠가 어제 한 숨도 못 주무셨다. 너 때문에 화병 나겠다... 처럼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집니다. 부모들이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을 교육의 수단으로 활용한 셈입니다. 사랑받고 싶은 아이의 본능을 볼모로 잡은 이 정서적 압박은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남을 실망시키면 나는 가치 없는 존재'라는 왜곡된 신념으로 자리 잡습니다.


타인은 나의 죄책감을 이용해 나를 조종하고, 나는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스스로를 양심적인 사람이라 자위하거나 처벌을 면제받으려는 무의식적 기제를 작동시킵니다. 그 대가는 혹독합니다. 죄책감은 만성적인 스트레스, 우울증 그리고 자아의 실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볼프 박스는 인지치료 관점에서 실수를 바로잡는 데 필요한 것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 판단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식의 사고, 감정적 추론 등의 오류를 짚어주며, 죄책감에 유독 취약한 완벽주의적 성향의 이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죄책감 내려놓기』는 뇌 구조와 사고 회로를 재편하는 실전 전략을 보여줍니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합당한지 아니면 타인의 기준에 의한 강요인지를 구분하는 가치관 점검 프로세스를 소개합니다.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남의 감정은 당신 탓이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타인의 불행이나 기분 상함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곤 합니다. 볼프 박사는 타인의 감정적 반응은 그의 선택이며, 내가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특히 마음의 평화를 위해 매일 읽어보는 글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뇌의 부정적 편향성을 교정하는 시간입니다. 확언의 힘을 느껴보는 겁니다.


더불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다룹니다. 자녀 교육, 고부 갈등, 연인 관계, 타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죄책감이 침투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아이에게 화를 낸 나는 나쁜 부모일까?, 배우자를 더 사랑하지 못하는 나는 죄인인가? 등에 대해 인지 행동 치료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죄책감은 대개 경계선의 부재에서 온다는 점을 꼬집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과 상대방의 영역을 구분할 때, 비로소 우리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도리스 볼프의 『죄책감 내려놓기』는 평생을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살아온 이들에게 던지는 자유 선언서입니다. 언제까지 과거의 유령과 싸우며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힐 것인가를 묻습니다.


당신은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죄책감은 사실인가, 해석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감정의 노예 자리에서 관찰자의 자리로 이동하게 만듭니다.


생각 바꾸기 5단계와 구체적인 행동 전략들을 통해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자기 자비(Self-Compassion)와 건강한 책임감을 채워보세요. 어느덧 서툴고 부족한 나를 안아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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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시절을 지나는 중입니다 -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이애경 지음 / 섬타임즈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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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서른의 문턱에서 길을 잃었던 수많은 영혼을 구제했던 베스트셀러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을 기억하시나요? 복잡미묘한 심리 지도를 그려냈던 이애경 작가가 10년이라는 시간을 덧입혀 개정증보판 『빛나는 시절을 지나는 중입니다』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애경 작가는 조용필, 윤하 등 시대를 풍미한 아티스트들의 감성을 길어 올린 작사가이자 인스타툰 작가입니다. 10년 전 던졌던 질문들에 대해 이제는 조금 더 단단해진 근육으로 답을 내놓습니다.


'빛나는 시절'이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는 중'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제목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서른 이후의 삶을 통과하며 감정의 체력을 단련해 가는 기록이자 나이 듦을 해석하는 새로운 언어로 다가옵니다.





이애경 작가가 포착한 사랑의 시작은 지극히 불공평하고 압도적입니다. "모든 빛이 너만 비추고 나는 네게 눈이 멀었다."라며 타자라는 블랙홀에 나의 모든 감각이 매몰되어 버린, 지독하게 아름다운 무기력증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랑하며 겪는 시행착오들은 결국 그 눈부심을 견뎌내며 시력을 회복해 가는 과정인 셈입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일까요 아니면 거름일까요? 작가는 이별 이후의 감정을 "어떤 그리움은 빛에 젖은 여름비. 바라볼수록 눈이 시려와 고개 숙이면 목덜미에 내려앉는 다정한 얼음처럼 와락, 마음을 덮치는 빛의 폭풍"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별은 그 사람의 이름이 혀끝에 머물다 결국 삼켜지는 과정입니다. 작가는 이별의 고통을 억지로 털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이 내 몸 안으로 온전히 흡수되어 '나'라는 인간의 무늬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관찰하게 만듭니다.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은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기술입니다. 20대의 눈물이 정제되지 않은 원석이었다면, 30대 이후의 눈물은 내 삶의 불필요한 것들을 씻어내는 세척액에 가깝습니다.


작가는 골드 미스라는 수식어 뒤에 숨은 고독, 질투와 부러움 사이의 미세한 균열, 결혼이라는 시소게임의 피로감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타이밍입니다. 눈물을 그친다는 것은 슬픔이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라, 이제는 그 슬픔을 안고도 걸어갈 수 있다는 항체가 생겼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인생의 난제들 앞에서 자신을 고문하곤 합니다. 이애경 작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끊임없는 질문들이 초침처럼 딸깍거리며 쌓여 가고, 돌무더기에 묶어 놓은 부표처럼 제자리를 맴돈다. (중략) 모르는 것은 10년 후에 묻기로."라고 답을 내립니다. 얼마나 근사한 여유인가요. 모든 질문에 즉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어른의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채워짐과 수용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든다’는 건, 사람이 들고 나듯이 무언가가 채워진다는 것. 단풍에 물이 들고 빠지듯 다른 색깔이 입혀진다는 것. 햇볕이 잘 들듯 많은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고, 밖으로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지금이 참 좋은 나이일 수도 있다"라는 깨달음은 정체된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반전의 시작점이 됩니다.


작가는 인생을 아포가토에 비유합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뜨거운 에스프레소가 만나는 그 순간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맛.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과거의 소중했던 물건들을 미국에 두고 온 에피소드를 통해 소유와 기억에 대한 생각을 전합니다. "내 손에 쥐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도 멀리 밀어 놓고 살아 보니, 없는 대로 살아지게 되었다. 1년의 삶, 상자 두 개로 정리할 수 있다면, 1년과 1년의 삶을 모아도 상자 두 개로 정리할 수 있을 테고, 결국 수십 년의 삶도 상자 두 개쯤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합니다. 그토록 집착했던 성취, 인맥, 상처들조차 결국 상자 두 개의 무게로 수렴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두 비 모두 결국 삶을 적신 뒤 지나갑니다. 이애경 작가가 말하는 빛나는 시절은 봄비 같은 사랑의 순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겨울비 같은 이별의 시간까지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도달하는 상태입니다. 『빛나는 시절을 지나는 중입니다』는 한 편의 인생 OST처럼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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