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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ㅣ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들 중에서도 소련의 붕괴만큼 극적이고 예상치 못한 것은 없었습니다. 냉전의 마지막 퍼즐, 소련의 비극적 해체를 파헤친 <소련 붕괴의 순간>.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교수는 20세기 후반 가장 극적인 정치적 변혁을 마치 스릴러를 읽듯 생생하게 재구성한 역작을 내놓았습니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어떻게 거대한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렸는지 세밀하게 추적합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소련 붕괴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우리 가족은 소련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우리가 탄 귀국행 비행기는 1991년 12월 31일에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국제공항에 착륙했지만, 그때는 러시아연방,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벨라루스) 및 여타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이미 소련을 해체한 후였다. 어둑어둑한 셰레메티예보국제공항은 텅 비어 있었다. (중략) 불변의 국가 구조가 증발해버린 듯했다. 몇 달 전 8월에 내가 떠났던 나라는 갑자기 사라졌다"라고 말입니다.

이 책은 30년간의 방대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분석한 내용을 담은 역작입니다. 소련 고위 정치인, 외교관, 군, KGB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의 인터뷰, 문서, 개인 일기 등을 분석했습니다.
저자는 소련 붕괴가 냉전의 필연적 결과였다고 간주하는 기존의 견해에 도전합니다. 그는 소련의 붕괴가 단순히 경제적 실패나 체제의 모순 때문만이 아니라, 고르바초프라는 지도자의 성격과 선택,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단순히 필연적인 흐름으로 보는 결정론적 시각에서 벗어나, 선택과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해석을 보여줍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의 뿌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렌즈가 됩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제국은 없다"라는 통찰은 현대 지정학적 변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를 다룬 <소련 붕괴의 순간>.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소련(소비에트 연방)은 1922년에 설립된 15개의 구성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였습니다. 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었습니다.
소련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중 가장 큰 공화국은 러시아공화국(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었습니다. 면적이나 인구, 경제력 측면에서 소련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지도자였고,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이었습니다. 1991년 8월, 보수 세력이 고르바초프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일로 소련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독립국가연합(CIS)' 설립에 합의하면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소련 붕괴의 간략한 역사 줄거리입니다.

총 15장으로 구성된 <소련 붕괴의 순간>의 전반부(1장-6장)에서는 1983년부터 1990년까지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재건)와 글라스노스트(개방)가 어떻게 소련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는지 분석합니다.
레닌의 숭배자로서, 소련 사회와 경제를 소생시킬 수단을 모색해야 했던 고르바초프의 딜레마. 공산주의 이상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적 침체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고르바초프의 성격이 소련 붕괴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합니다.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적 열정과 정치적 소심함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비전이 넘치는 외교 정책을 펼쳤지만, 국내에서는 결정적인 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순된 성격은 그의 개혁이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초기에 소련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록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이 목록에는 품질, 금주 투쟁, 빈곤층, 과수원과 텃밭을 위한 토지, 의약품과 같은 표면적인 문제만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 지도자 안드로포프가 강조했던 무역수지 균형 회복, 그림자 경제 단속, 노동력 규율 같은 근본적인 경제 문제는 간과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겁니다.
소련 붕괴의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민족주의와 분리주의라고 합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억압되었던 민족 감정과 분리 독립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습니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독립운동은 소련 붕괴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서방 국가들이 당시 소련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고르바초프가 동포들에게서 왜 그렇게 많은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라는 문장은 서방과 소련 내부의 시각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저 역시 TV로 봤던 고르바초프는 그저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였을 뿐입니다. 서방에서는 고르바초프를 개혁가로 칭송했지만, 정작 소련 내에서는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던 겁니다.
후반부(7장-15장)에서는 1991년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과정과 미국의 영향을 다룹니다. 특히 1991년 8월에 보수파, 군부, KGB 고위층이 벌인 쿠데타는 소련 해체의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KGB 장교들은 휴가 중인 대통령의 별장을 둘러싸며 쿠데타 동안 대통령을 사실상 가택 연금했습니다.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했고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회복했지만, 이미 그의 정치적 명성은 무너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옐친을 비롯한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이 이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 고르바초프의 사임으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보수파의 쿠데타 시도는 역설적으로 소련의 종말을 앞당겼습니다.
저자는 소련 붕괴를 통해 역사의 우연성과 선택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소련의 붕괴가 단순히 체제의 내재적 모순 때문만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특정 지도자들의 선택과 행동, 우연한 사건들의 조합 때문이라고 말이죠. 다른 선택과 상황이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역사가 결정론적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저자의 분석은 오늘날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안겨줍니다. 소련 붕괴 이후 등장한 '새로운 러시아'가 권위주의로 회귀한 것이 필연적이었는지, 아니면 기회를 놓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더불어 겉으로 강력해 보이는 제국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소련의 붕괴가 20세기를 뒤흔든 지각변동 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속성의 '외관상' 확실성을 믿지 말라는 교훈을 던집니다. 겉으로는 안정적이고 영원할 것 같은 체제도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짚어줍니다.
오늘의 러시아를 이해하려면, 어제의 소련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고르바초프의 선의가 가져온 의도치 않은 결과는 초강대국의 몰락입니다. 냉전의 종식과 소련의 해체로 이어지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의 시기를 담은 <소련 붕괴의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지도자의 결정이 국가와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크게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탄핵 정국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는 민주적 제도와 공적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과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기게 됩니다. 권력의 본질, 지도자의 역할, 인간 사회의 취약성에 대한 교훈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