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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기쁨과 슬픔 - 인간이 꿈꾼 가장 완벽한 낙원에 대하여
올리비아 랭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올리비아 랭의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원예 가이드북이 아닙니다. 정원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권력, 배제와 포용, 상실과 희망을 탐색하는 깊이 있는 여정을 선사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해 역사와 문학, 예술을 넘나들며 정원이라는 공간이 지닌 다층적 의미를 풀어냅니다. 책의 부제 '인간이 꿈꾼 가장 완벽한 낙원에 대하여'가 암시하듯, 정원은 단지 식물이 자라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이상, 그리고 가장 깊은 상실이 투영된 공간입니다.
올리비아 랭의 여정은 영국 서퍽으로 이사하면서 시작됩니다. 새 집에는 유명 정원사 마크 루머리가 디자인한 정원이 있었고, 랭은 그곳에서 팬데믹과 브렉시트, 극우 세력의 부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발견합니다.

"나는 시간을 새롭게 이해하고 싶었다. 나선형으로 흐르거나 순환하는 시간, 부패와 비옥함, 빛과 어둠 사이에서 박동하는 시간을. 나는 정원사가 시간을 다르게 이해하는 비법을 전수받았으며, 그것이 지금 종말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우리를 막는 방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처음부터 어렴풋이 생각했다." p30
랭에게 정원은 직선적인 시간이 아닌 순환적 시간,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시간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정원을 가꾸면서 식물과 흙, 계절의 변화와 교감하며 자기만의 에덴을 만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원예 활동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질서와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이자,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이기도 합니다. 랭의 정원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임과 동시에,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직면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 됩니다.
정원은 오랫동안 이상향의 상징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에덴동산,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 프랑스 왕실의 베르사유 정원까지, 정원은 문명 속에서 유토피아의 메타포로 존재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원은 대개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습니다. 배제와 소외의 공간이었던 겁니다.
랭은 정원에서 존 밀턴의 『실낙원』을 읽으며 낙원의 상실이라는 주제를 탐구합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이브의 슬픔과 교차시킵니다. 이브에게 정원의 상실은 공간의 상실을 넘어 정체성과 존재 방식의 상실임을 강조합니다.
존 밀턴의 정치적 실패와 이브의 추방을 현대의 상황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가치가 위협받고, 기후위기로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상황은 또 다른 형태의 낙원 상실로 다가옵니다. 이 상실감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며,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풍경 뒤에 숨겨진 권력과 배제의 역학은 역사 속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18세기 영국의 대정원화 작업과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정원이 어떻게 권력과 계급의 표현이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풍경(landscape)'이라는 개념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시골 경치를 그린 회화를 의미했다는 점을 짚어줍니다. 이러한 미적 관점이 실제 자연을 변형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영국 상류층은 방해 없이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 농장과 마을을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공유지는 사유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고 합니다. 시인 존 클레어는 인클로저로 인해 파괴된 자연과 공동체를 그리워하며, 통제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정원과 식민주의의 관계도 등장합니다. 땅에 구근이나 씨앗을 심는 사람이라는 뜻의 '플랜터 planter' 단어는 16세기 말에 식민지 개척자라는 뜻이 추가됩니다. 이는 플랜테이션이라는 단어 역시 정복당하거나 지배받는 국가에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하는 행위로 의미가 바뀝니다.

유럽인들이 '발견'한 낙원적 풍경이 사실은 이미 원주민들에 의해 오랫동안 가꿔져 온 공간이었음을 짚어줍니다. 랭은 정원이 순수한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차원을 가진 인간의 창조물임을 강조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정원은 타자의 배제와 착취를 통해 유지되었으며, 정원의 아름다움 뒤에는 종종 폭력과 강탈의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랭은 현대의 식물원과 정원이 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유산에 어떻게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 성찰합니다. 정원을 단순히 미적 공간이 아닌 역사적, 윤리적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그러나 정원은 단순히 배제의 공간만이 아납니다. 그것은 또한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정원 가꾸기가 개인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배제의 경험을 치유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영화감독 데릭 저먼이 에이즈로 죽어가며 던지니스의 자갈 해변에 만든 정원을 통해 소외된 이들의 낙원을 탐구합니다. 그곳은 가시금작화와 갯배추 같은 현지 식물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랭은 저먼의 정원이 단순한 위안을 넘어 적극적인 창조와 저항의 행위였음을 강조합니다.
그 외에도 버지니아 울프, 조지 엘리엇, 잔 모리스 같은 작가들이 정원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분석합니다. 정원이 문학에서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탐색하며, 상실과 회복이 정원 속에서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정원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기후위기와 생태적 파괴를 전쟁에 비유하며, 위기 상황에서 정원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많은 식물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정원은 보존과 저항, 그리고 미래를 위한 희망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랭은 배제와 통제의 정원이 아닌, 모두를 위한 공유 정원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완벽함에 대한 강박이 결국 배제의 논리를 반복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개암나무 아래 나뭇가지와 죽은 나뭇잎 껍질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조금 지저분한 경계 화단이 완벽한 화단보다 훨씬 비옥하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합니다. 도시 공동체 정원, 게릴라 가드닝 같은 대안적 정원 활동을 통해 정원이 어떻게 공공의 공간이자 저항과 연대의 장이 될 수 있는지 탐색합니다. 이런 정원은 배제가 아닌 포용, 통제가 아닌 공존, 소유가 아닌 공유의 가치를 실현합니다.
랭은 정원이 단순한 낙원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과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실천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임을 이야기합니다. '모두의 정원'이라는 꿈은 혐오와 배제, 기후위기와 파국의 시대에 가장 매혹적이고 희망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정원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권력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특히 정원의 정치학에 대한 주제가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공공 정원과 개인 정원은 어떤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모두를 위한 정원은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