止觀 : 멈춰서 바라보기 IPKU 4
마인드랩 편집부 지음 / (사)마인드랩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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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인문 철학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IPKU Magazine 4호 『지관 止觀: 멈춰서 바라보기』. 속도의 시대에 선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는 어디서 오는지 16명의 필자들과 함께 풀어냅니다. 무의식적으로 쌓아올린 선택과 관계, 감정의 지층을 한 겹씩 벗겨내며 '진짜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사유의 보고와도 같습니다.


평온과 행복을 위한 삶의 기술로서의 지관止觀. 멈출 지(止)와 볼 관(觀). 불교의 고전적 수행법에서 빌려온 멈추고 바라본다는 개념을 현대인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실마리를 이 책에서 펼쳐보입니다.


여유로운 관찰이라는 기술을 바탕으로 뻗어 나온 16개의 에세이는 속도 강박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순간,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마치 파도처럼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1부 생각 멈추기 편에서 필자들이 들려주는 것은 '자동 조종 상태의 깨달음'입니다.





양영순 필자의 「의식, 그리고 알아차림」은 일상 속에서 얼마나 자주 진정한 의도 없이 반응하고 있는지를 진단합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수없이 많은 순간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통과합니다. 신문을 읽다가도, 누군가와 대화하다가도, 그 모든 순간이 기계적 반응의 연속입니다.


관념의 힘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하현주 필자의「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힘」,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자기기만적인지를 보여주는 이준용 필자의 「'망상' in 버드맨」, 자연은 멈춤의 철학적 입문서라고 말하는 최은영 필자의 「자연에서 배우는 수행의 평등성」등 사유가 펼쳐집니다.


2부는 명상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직업 현장, 어둠 속, 신체 감각 영역으로 끌어내립니다. 앤드류 올렌츠의 「사무공간에서의 마음챙김」은 일터라는 가장 각박한 공간에서 명상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흩어진 주의력을 한 점으로 모으는 것, 이메일을 읽을 때도, 회의를 할 때도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적 명상의 형태입니다.


마음챙김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우동필 필자의 「마음챙김 혁명과 그 이면, 진정한 탐진치 뿌리 뽑기」, 편안함과 안정의 권태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 김윤화 필자의 「명상이 삶을 깨우는 '독'이 되려면」, 감각 박탈의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의 본질에 접근한 손수빈 필자의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은 명상은 산꼭대기 수도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 책상 앞에서도,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3부는 명상의 궁극의 현장으로 관계에 대해 보여줍니다. 혼자 눈을 감고 호흡하는 것만이 명상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는 것도 명상이라는 겁니다.


현대 관계의 가장 흔한 병폐인 과도한 질문에 대한 회의를 담은 배태랑 필자의 「우리 사이를 굳이 묻지 않아도」, 종교의 외형을 걷어내고 순수한 염원의 맛을 복원한 유희 필자의 「종교 없는 기도」, 영화 '해피엔드'를 통해 환상에 대한 분석을 펼치는 유슬기 필자의 「'해피엔드', '이대로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이유」, 종교 공동체의 리듬에서 삶의 거룩함을 발견한 정경일 필자의 「수도원에서 배우는 일상의 성화」까지 존재의 리듬에 대한 다양한 글을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4부는 개인의 선택, 감정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 재점토의 시간입니다. 편상범 필자의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합니다」는 일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박수빈 필자의 「삼킨 감정, 소리치는 몸, 이제는 들어야 할 때」는 신체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상민 필자의 「무아와 기억」은 불교의 핵심 교리인 무아(無我)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기억이라는 개념의 충돌을 다룹니다.


이세준 필자의 「그림 동화책에 빠진 어른의 자기 변명」은 어른이 아이의 것에 이끌리는 것을 나름 정당화합니다. 성인이 동화에 매몰될 때, 그것은 때로 현실도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내면의 어린 자아와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이 양가성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지관 止觀: 멈춰서 바라보기』는 가속의 시대에 멈춤을, 생산성의 시대에 사유를, 자아의 강화의 시대에 자아의 해체를 제안합니다.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멈추어 바라보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그 속에서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멈춤이 약함이 아니라 가장 큰 힘이며, 관찰이 수동이 아니라 가장 능동적 참여이며, 현재의 순간에 충실한 것이 미래의 포기가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지관 止觀: 멈춰서 바라보기』. 익숙함을 의심하고 마음을 새로이 읽는 시간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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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 따위 넣어둬 - 365일 퇴직을 생각하는 선생님들께
장정희 지음 / 꿈의지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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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40년을 몸담아오면서 문학과 교직을 병행하셨던 장정희 선생님. 교권 침해라는 단어가 뉴스의 상투어가 된 시대에 오랜 세월 교단을 지켜온 한 교사의 존재는 그 자체로 놀라운 일입니다.


마치 무너져가는 성벽 앞에서 끝까지 분필을 들고 선 사람처럼 장정희 선생님은 교직의 품위를 현장에서 증명해 보인 셈입니다. 『존경 따위 넣어둬』는 교직을 마친 한 사람의 회고록 그 이상입니다. 교사로서 감내해온 감정노동 속에서 교단에 서야만 했던 이유들이 담백하고도 단단하게 담겨 있습니다.


한평생 교사로 살아온 교직 생활 40년. 교직을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의 형식으로 경험해 온 선생님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숨구멍을 찾아야 했음을 고백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보여줍니다. 단지 교사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그 역할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존재로서의 자신의 삶을 성찰합니다.





365일 사표를 품고 다녔다는 고백은 유머 섞인 자조가 아닙니다. 교직 생활이라는 극한 감정노동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야 했던 생존 기록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육 현장에서 마주한 고통과 책임감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교사로서의 무력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제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혼자서는 빛나지 않는다며 하나의 교사, 하나의 아이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함께의 자리로서 교실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제자라는 표현 대신 도반이라는 호칭을 꺼냅니다. 가르치는 자와 피배움의 관계를 넘어서 함께 글을 쓰고 삶을 나누는 공감의 관계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존경 따위 넣어둬』에서는 지쳐가는 교사, 지쳐가는 아이, 지쳐가는 관계 속에서 지탱해 온 힘들이 무엇인지를 조명합니다. 따뜻하고도 현실적인 교실 풍경들로 채워진 이야기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놓이다가도, 마음의 내리막을 붙잡으려 애쓴 흔적이 느껴져 애절하기도 합니다.


문예반을 이끌며 상처 많고 사연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저자는 어느새 문제 학생들의 대모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육 현장에서 드러나는 제도, 제도 밖 아이들의 관계, 교사의 위치가 얼마나 복합적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교사도, 아이도, 함께 걸어가는 길 위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고, 다독이고, 한 걸음씩 내딛는 여정이 얼마나 값진 지 느끼게 됩니다.


작가의 글쓰기 철학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와닿습니다. 교사이자 작가인 그가 어떻게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해석해왔는지를 보여줍니다. 글쓰기가 갖는 치유적, 공명적 힘을 말합니다.


글쓰기란 그저 기록이나 표현이 아니라 살아남는 방식이었습니다. 늘 교단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자신을 지킨 건 결국 학교와 학생들, 그리고 글쓰기였다는 걸 깨닫습니다. 글쓰기의 힘이 내면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과 아이들을 향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가 추천하는 문학, 영화, 에세이 목록과 함께 배움과 나눔의 맥락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부모와 거리 두기, 가난의 대물림, 청년 노동자, 어린 장발장 등 다양한 키워드를 통해 교육은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할 사회의 문턱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존경 따위 넣어둬』는 제목 그대로 존경이라는 거창한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응원과 연대라는 덤덤한 태도로 교사의 일상을 그려냅니다. 교직이라는 자리를 영광이나 희생으로만 형상화하지 않고,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야 하는 현실로서 직시합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글쓰기라는 숨구멍을 스스로 설치하고, 아이들과 함께 쓰고 배우고 자라나려 했던 시간을 진솔하게 풀어냅니다.


존경이 아니라 존중을, 찬사가 아니라 연대를 구하는 절박한 외침으로 들립니다. 『존경 따위 넣어둬』는 교사만을 위한 메모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겪을 수 있는 상처와 희망, 연결과 단절을 공유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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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훈의 랫시티 - 완벽한 세계 유니버스25가 보여준 디스토피아
에드먼드 램스던 외 지음, 최지현 외 옮김 / 씨브레인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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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존 칼훈의 랫 시티』는 그저 과학 실험 보고서가 아닙니다. 미국의 행동학자 존 칼훈(John B. Calhoun)이 수행한 쥐 사회 실험 유니버스25(Universe 25)를 토대로 인류의 도시화와 사회적 붕괴, 나아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현대적 우화입니다.


저자 존 애덤스와 에드먼드 램스던은 과학사와 문화사를 넘나드는 폭넓은 시각으로 칼훈의 연구를 다시 읽으며 그 안에 숨은 인간 문명의 자화상을 드러냅니다.


존 칼훈은 실험쥐들에게 먹이, 물, 청결, 안전까지 완벽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히 주어진 세계에서 생명체는 어떻게 행동할까라는 궁금증으로 시작한 연구입니다.


쥐들은 처음엔 질서정연했습니다. 각자의 둥지를 만들고 번식하며 사회적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자 미묘한 균열이 시작됐습니다. 수컷은 보호 본능을 잃었고, 암컷은 공격적으로 변했습니다. 교미는 줄었고, 새끼는 방치됐습니다.


결국 쥐들은 서로를 해치거나 고립되었고, '아름다운 자들(Beautiful Ones)'만이 남았습니다. 이들은 상처가 없었습니다. 싸우지 않았고, 욕망도 없었습니다. 그저 먹고, 자고, 털을 다듬었습니다. 외형은 완벽했지만, 종은 서서히 멸망했습니다.


존 칼훈은 이 과정을 행동의 붕괴(behavioral sink)라 불렀습니다. 사회적 접촉의 구조가 망가질 때 일어나는 병리적 변화를 뜻합니다. 이 실험은 단순히 동물 실험의 결과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거울이었습니다.


완벽한 환경이 결국 생존 의지를 잠식해버린 겁니다. 욕망의 균형이 깨지며 사회를 파괴하는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라는 존 칼훈의 경고는 1960년대보다 오히려 지금, 출산율 0.7의 한국 사회에서 더 날카롭게 들립니다.


저자는 행동주의 심리학자 존 왓슨의 학문적 맥락에서 칼훈의 연구를 해석합니다. 왓슨은 인간과 짐승 사이에 선을 긋지 않는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인간의 심리도 관찰 가능한 행동으로만 해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존 칼훈의 쥐 실험은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 됩니다.


존 칼훈은 쥐의 개체수를 줄이는 게 어렵다면, 반대로 늘릴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쥐를 더 많이 투입하자 전체 개체수는 오히려 급감했습니다. 사회적 갈등이 극대화되면서 쥐 사회 전체가 붕괴한 겁니다.


1950년대 미국은 급속히 도시화되었습니다. 전후의 번영과 함께 교외 주택단지가 늘어났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고립이 자라났습니다. 존 칼훈은 고층 건물, 공장, 교외 주택을 하나의 연속된 사회적 실험 상자로 봤습니다. 결국 도시의 번영은 곧 인간의 분리였습니다. 개인 공간의 확보는 관계의 붕괴였습니다.





썩어가는 식물과 고인 물이 질병을 퍼뜨리듯, 행동의 붕괴는 사회적 병리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밀도가 문제였습니다. 쥐들은 먹이가 충분했음에도 사회적 관계의 과열로 인해 붕괴했습니다.


공격성, 교미 의식 붕괴, 모성 방치, 동종 포식. 이 모든 것은 공동체가 해체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전기 자극이나 독성 물질이 아니라 단지 과밀한 사회적 접촉만이 실험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쥐들은 자멸했습니다.


인간 사회 역시 비슷한 궤적을 보입니다. SNS의 과잉 연결, 도시의 과밀 그리고 관계 피로.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고립돼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의 문제입니다.


이른바 '아름다운 자들' 욕망이 사라진 세대는 우리 사회의 신인류일지도 모릅니다. 경쟁과 고통을 회피한 채, 자기 관리에만 몰두하는 세대. 이들은 상처가 없지만, 의미도 없습니다.


『존 칼훈의 랫 시티』에서는 존 칼훈의 연구가 도시계획과 건축, 정신의학에 미친 영향을 조명합니다. 연구자들은 동물원이나 교도소, 정신병원에서의 공간 설계가 인간의 불안을 줄일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존 칼훈은 사회적 온도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인간이 최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집단 규모는 8~16명, 이상적 크기는 12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 구조를 무시합니다. 그 결과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과열되거나 냉각됩니다.


존 칼훈의 통찰은 행동학을 넘어섭니다. 문제는 인구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니버스25는 도시 인프라가 아니라, 관계의 생태계가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보여준 실험이었습니다. 인간은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하지만, 더 깊은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처럼요.





가장 충격적인 점은 유니버스25의 개체 곡선과 대한민국의 인구 통계 곡선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급속한 성장, 완만한 정체, 그리고 추락하는 하강선. 존 칼훈의 실험에 따르면 C단계(정체기)에 들어서면 되돌릴 수 없다고 합니다. 사회적 붕괴는 행동학적으로 고착됩니다. 지금 한국은 어느 단계에 있을까요.


경제적 지원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책 설계자들의 뇌를 다시 세팅하라고 말하듯 저출산의 원인은 심리적 냉각입니다. 관계가 피로하고, 미래가 불안한 사회에서 번식은 더 이상 본능이 아닙니다.


존 칼훈의 쥐 사회에서 '아름다운 자들'은 번식하지 않았습니다. 욕망보다 안정을, 관계보다 거리두기를 택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불완전한 관계 위에서 성장해왔습니다.


도시는 인간의 정신적 실험실입니다. 이 실험실에서 우리는 쥐처럼 행동합니다. 공간을 차지하고, 타인을 피하며, 의미 없는 반복 속에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쥐와 다릅니다. 인간은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존 칼훈의 랫 시티』는 한 과학자의 전기이면서 동시에 현대 사회에 대한 경고장입니다. 존 칼훈이 실험의 마지막에서 남긴 새로운 제안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완벽한 물리적 환경을 갖춘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존 칼훈이 마지막으로 수행하려던 것은 과밀한 행성의 축소판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유니버스 실험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시뮬레이션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경제지표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칼훈의 쥐들이 겪었던 것과 동일한 운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존 칼훈이 놓친 답이 여기에 있을 수도, 우리가 찾아야 할 과제로 남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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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유럽 왕국사 -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들끓는 민족들의 땅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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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2,000년의 분열과 통합으로 읽는 『중앙유럽 왕국사』.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지도 위에서 늘 '사이'로만 정의되어온 중앙유럽. 마틴 래디는 이 땅을 주변이 아닌 세계사의 결정적 무대로 복권합니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황제 카를 5세』 등으로 잘 알려진 중앙유럽 분야 최고 전문가인 그의 평생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입니다.


로마 제국의 변경에서 시작된 2천 년의 드라마를 민족, 권력, 사상의 교차로로서 풀어냅니다. 중앙유럽을 지리적 실체가 아닌 개념적 공간으로 다룹니다. 제국과 제국 사이의 완충지대이자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신앙과 이단, 예술과 학살이 교차한 역사의 축소판. 마틴 래디는 이곳을 유럽의 거울이라 부릅니다.


중앙유럽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침략'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앙유럽은 결코 수동적인 희생자에 머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훈족에서 헝가리인으로, 합스부르크에서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침입자이자 개척자였으며, 동시에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낸 주체였습니다.


초기 중앙유럽의 역사는 침입의 연속이었습니다. 로마의 변경에서 훈족, 아바르족, 슬라브족, 몽골-타타르족까지 수많은 세력이 이 땅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마틴 래디는 이를 파괴의 역사가 아니라 혼혈의 탄생사로 읽습니다. 훈족이 로마 제국을 무너트려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렸듯이, 훈족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헝가리인들은 중앙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습니다.


중앙유럽은 어느 한 제국의 식민지로 고정되지 않았고, 침입자들이 남긴 유산이 언어, 제도, 문화에 흡수되었습니다. 이런 다층적 정체성은 훗날 중앙유럽의 민주주의 실험과 문화적 다양성의 토대가 됩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권력이 왕으로 집중되던 13세기, 중앙유럽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중앙유럽 왕국사』는 중앙유럽 정치의 독특한 DNA를 들려줍니다. 귀족들의 총회, 농민들의 자치, 그리고 상인 동맹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권력이었습니다. 의회와 소집회는 공동체의 윤리와 권리를 상징했습니다.


중세 중앙유럽은 공동체 정부와 공화주의적 실험의 본산이었다고 합니다. 서유럽보다 먼저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셈입니다. 상업의 영역에서도 자치 정신이 이어졌습니다. 한자 동맹은 200여 개 도시를 연결한 초국가적 네트워크로 오늘날 EU의 원형이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룩셈부르크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등장하며 이 수평적 권력은 다시 위로부터의 통치로 전환됩니다. 중앙집권적 통치의 마리아 테레지아 개혁은 근대 국가의 탄생을 알립니다. 문제는 그 질서가 곧 관료제와 군사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교육받은 국민을 길러낸다는 명분 아래 국가는 개인의 자율성을 흡수해버렸습니다.


중앙유럽은 단지 정치적 변동의 현장이 아니라 사상의 실험실이기도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루터의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균열들이 모여 거대한 사상의 전환을 이루는 거라는 걸 보여줍니다.


중앙유럽의 학자들은 민족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정체성의 언어학을 발달시켰습니다. 공동의 언어와 문화가 민족의 기본 요소라는 신념은 오늘날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자긍심의 원천이자 배제의 도구로 말입니다.


판화와 인쇄기의 발명 역시 이 지역의 혁신이었습니다. 중앙유럽 예술의 양식과 장르가 국제적으로 보급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논문이 활판으로 복제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듯, 사상은 기술과 손을 잡으며 세계화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근대 중앙유럽의 중심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848년 혁명은 통제 체제에 균열을 냅니다. 역설적으로 민족주의는 다시 억압의 기제가 되었습니다. 헝가리의 마자르 민족이 주도한 혁명은 다른 민족을 배제함으로써 순수한 국민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내며 민족의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 시기 중앙유럽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낭만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흔들렸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그림 형제의 민담, 카프카의 문장은 모두 그 긴장 위에서 태어났다.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동일성 사이의 줄다리기. 결국 이 갈등은 20세기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앙유럽은 절단된 유럽입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등장한 신생국들은 여러 민족이 뒤섞인 불안정한 조합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경을 그었지만 경계는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는 이 지역을 인종학살의 무대로 바꾸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중앙유럽인들만큼 평범했던 공무원, 노동자, 과학자들은 '악의 평범성'을 상기시킵니다. 철도 시간표를 맞추고, 화학 실험을 하던 일상 속에서 학살의 기술이 완성되었습니다.





마틴 래디는 절망의 역사 속에서도 자기 갱신의 힘을 봅니다. 소련 붕괴 이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중앙유럽 국가들은 부패와 언론 통제 같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합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라이바흐가 상징하듯 이 땅의 지성은 언제나 체제의 모순을 비웃으며 살아남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유럽의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은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2,0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앙유럽 왕국사』는 현재의 중앙유럽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입니다.


적재적소에 삽입된 지도 덕분에 중앙유럽의 끊임없이 변하는 정치적 경계를 한눈에 파악하게 해줍니다. 『중앙유럽 왕국사』는 권력과 공동체, 기억과 망각의 관계를 탐구하는 정치철학서이자, 유럽 문명사의 미시적 복제판입니다. 한반도 또한 대륙과 해양 사이, 사이의 지정학을 지닌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묘한 데자뷔를 남깁니다.


마틴 래디는 역사를 승자의 서사가 아니라, 공존을 향한 실패와 재시도의 기록으로 읽어냅니다. 중앙유럽의 흙먼지 속에는 결국 인간의 집념, 사유, 그리고 반복된 재건의 의지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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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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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문학이 어떻게 인간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견디는 힘이 되는지를 증명하는 수잰 스캔런의 『의미들 (원제 Committed: On Meaning and Madwomen)』. 회고록, 정신의학 비판서, 문학비평 세 가지 장르가 콜라주처럼 겹쳐지면서 예상 불가능한 깊이를 담은 책입니다.


수잰 스캔런 저자는 자살 시도 이후 3년간 정신병동에 입원했던 경험을 되짚으며, 의료 체계가 만들어내는 정상과 비정상의 폭력적 경계를 해체합니다. 그리고 실비아 플라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선배 여성 작가들의 글을 통해 자신이 겪은 상실과 광기를 새로운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갑니다.


"나는 책이란 의사소통에 관한 것임을 몰랐다. 한 권의 책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누군가에게 말하는 한 방식이다." p184


저자에게 있어 문학은 병을 고치는 도구가 아니라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장소였습니다. 문학은 그녀에게 치료가 아니라 관계였고, 관계는 곧 의미의 시작이었습니다.





1부에서는 정신병동 입원 이전의 자신을 추적합니다.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톨릭적 엄격함 속에서 성장 후, 뉴욕으로의 이주 그리고 스무 살에 맞닥뜨린 심연까지.


저자는 "전자레인지에 구운 감자 외의 다른 음식들은 절대 삼킬 수 없고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고 여러 날, 여러 주를 보내는 게 일상"이 된 자신을 기술하면서 정신적 붕괴 직전의 모습을 노출합니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절망을 표현합니다. 먹을 수 없는 상태, 말할 수 없는 침묵, 시간이 멈춘 듯한 경험들. 우울증 혹은 불안장애라는 진단명에 앞서 절망의 체성(體性)을 마주하게 하는 문장들이 펼쳐집니다.


1부를 관통하는 핵심은 형성의 과정입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부서뜨릴 정도의 고통으로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되, 그것이 외부 사건이나 명확한 트라우마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무형의 슬픔, 언어화되지 않은 상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중첩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내가 병원에 있던 시기는 '되찾은 기억'에 대한 믿음이 정점에 달한 때였다. 1990년대 초에는 점점 더 많은 환자가 아동기에 성적 학대를 당했던 기억을 되찾았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이런 기억을 찾아내도록 부추겼다."라며 정신의학이 어떻게 환자들을 기억 '만들기'에 동참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정신의료 현장의 윤리적 복잡성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의미들』의 매력은 '미친 여자들'이라 불렸던 여성 작가들의 글을 하나의 문학적 혈통으로 재구성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자기파괴, 샬럿 퍼킨스 길먼의 저항, 오드리 로드의 분노,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슬픔... 모두 자기 서사를 되찾기 위한 자매들의 기록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들로부터 광기의 서사를 빌려와 그 안에 잠든 목소리를 되살립니다. '미친 여자'는 더 이상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의 균열을 감지하고 언어로 기록한 선구자들입니다. 저자에게 광기는 치료되어야 할 병이 아니라,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에 관한 진실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2부에서는 저자가 실제로 입원했던 뉴욕주립정신의학연구소의 5층 병동에서의 3년을 기술합니다. 정신의료 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직면합니다. 병원은 분명히 치료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환자들이 정신과 환자 되기에 점점 더 능숙해지도록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다는 겁니다. 약물 처방, 상담 시간, 진단명의 반복적 확인. 이 모든 절차들이 환자의 정체성을 오히려 환자성(patienthood)으로 견고히 하는 기제로 작동했습니다.


의사의 진단 틀이 환자의 실제 경험을 포착하지 못할 때, 그것은 단순한 오진이 아니라 환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겪었던 외로움과 슬픔은 약물로 치료할 수 있는 화학적 불균형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말해주는 누군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였던 겁니다.


병동에 함께 있던 다른 환자들의 초상화도 펼쳐집니다. 정신병동이 동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적 고통과 저항이 충돌하는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정신의학이 진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일반화의 폭력성에 대한 암묵적 항의로 저자가 선택한 글쓰기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후반부에서 저자는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을 빌려 '사별의 슬픔'을 정신질환으로 환원하는 사회적 폭력을 비판합니다. "크리스테바에게 사별의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위대한 미술과 위대한 문학의 주제였다."라고 합니다. 슬픔의 지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진정한 회복의 시작이라고 말이죠.


정신의학적 진단은 슬픔을 병명으로 가두지만, 문학은 그 슬픔을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인간은 슬픔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슬픔을 언어화함으로써 살아간다는 것, 저자의 글은 바로 그 생의 기술을 증명합니다. 그에게 문학은 감정의 분석이 아니라 감정의 거주입니다.


'읽기'라는 행위를 심리적 회복의 중심에 두는 『의미들』. "읽기의 경험이 나를 다시 삶으로 데려왔다'라고 고백합니다. 읽기는 수동적 감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치유 행위입니다.





이 책은 한 여성이 자신을 병이 아닌 이야기하는 존재로 되돌려놓는 기록입니다. 저자에게 회복이란, 일상의 조각을 조금씩 되살리는 일, 다시 쓰기와 다시 읽기를 반복하는 일입니다. 문학은 삶을 견디게 하는 보루이며, 세계를 다시 믿게 하는 근거가 되어줍니다.


진단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지 않지만 동시에 진단이 유일한 해석 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문학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문학이 어떻게 우리의 내적 경험을 언어화하고 사회화하는 방식을 제공하는지, 그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진단명이 아니라 의미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텍스트라고 말하는 『의미들』.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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