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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 - 《파이돈》에서 《팡세》까지, 삶과 죽음을 읽는 철학 수업
최대환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갓생을 살기 위해 노화를 거부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타임라인 속에서 상실의 슬픔은 효율성을 해치는 방해물로 취급받기 일쑤입니다.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에서 고대 철학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신학생들을 양성해온 철학 하는 사제 최대환 신부님은 우리 인생이라는 항해의 종착지를 미리 답사해보는 지적인 모험을 펼쳐 보입니다.
죽음을 말하는 이유는 공포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길의 방향을 다시 묻기 위해서입니다. 메멘토 모리를 삶의 집중력을 높이는 철학적 장치로 재해석합니다. 죽음은 종착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선명하게 만드는 거울이라는 관점입니다.
가톨릭의대 생명대학원에서 의료진과 종종인들을 매료시켰던 명강의 <죽음 이해>를 바탕으로, 소크라테스부터 파스칼까지 서양 철학사 2500년을 관통하는 죽음의 계보를 따라가는 여정이 이 책의 뼈대를 이룹니다.
1부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와 에피쿠로스를 소환합니다.
플라톤의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사형 집행 당일, 독배를 앞에 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토론을 벌이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마당에 무슨 토론이냐 싶겠지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지금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합니다. 이 역설적 태도가 《파이돈》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회피하는 대신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이란 이미 죽은 삶, 즉 자신의 영혼을 방치한 채 욕망과 두려움에 끌려다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삶, 곧 영혼을 돌보고 덕을 쌓으며 살아온 삶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자의 의연함이라면, 에피쿠로스는 아예 다른 방향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에피쿠로스의 논리는 명료합니다. 쾌락과 고통은 모두 감각에 속하고, 죽음은 감각의 소멸입니다. "내가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나는 없다"라는 말은 강력한 현재 긍정론인 겁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지금 이 순간을 망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잘 죽는 것을 준비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노력이며, 오직 잘 사는 것만이 잘 죽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라고 하고, 에피쿠로스는 죽음 같은 건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방향은 달라 보이지만, 목적지는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두려움 없이 살아라.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는 이 두 전통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임을 보여주면서, 죽음을 둘러싼 철학적 대화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줍니다.
2부 죽음의 기예(Ars Moriendi)는 이 책의 중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기예(技藝)라는 표현이 이채롭습니다. 죽음이 어떻게 기예가 될 수 있는 걸까요? 기예란 반복되는 훈련과 실천을 통해 몸에 배는 능력입니다.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 꾸준히 연마해온 삶의 태도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현되는 겁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은 세네카입니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훗날 그 황제에게 자살을 명받은 비운의 스토아 철학자입니다. 세네카는 정작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 '오늘'을 충실하고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대 수명 연장에 열을 올리면서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보입니다. 저속노화가 키워드가 된 시대에 세네카는 오래 사는 것보다 얼마나 충실하게 사는지가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키케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등장합니다. 딸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 공화정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좌절 앞에서 키케로는 철학을 붙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철학이 단지 관념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키케로는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더욱 극적인 사례입니다.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매일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일기를 썼다는 사실은 철학이 권력의 정점에서도 필요한 내면의 실천임을 보여줍니다.
3부는 신학적인 색채가 짙습니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등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개의 죽음'은 인상적인 개념입니다.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합니다. 영혼의 죽음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내면이 죽어버린 상태, 관계가 단절되고 의미를 상실한 상태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적 가난' 개념도 흥미롭습니다. 소유와 집착을 내려놓는 삶이 어떻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미니멀리즘이나 에세이즘이 유행하는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에크하르트가 수백 년 전에 통찰한 것과 유사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덜 가질수록 더 자유롭다는 진리 말입니다.
4부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넘어,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들려줍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비극이자 서사시입니다. 이탈리아 서정시의 정점을 끌어올린 시인이 동시에 정치 투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가 추방당하고, 돌아오면 화형이라는 경고 속에서 유배지를 전전하며 《신곡》을 완성했습니다.
추방당하고 박탈당한 사람이, 죽음 이후에도 개인의 고유성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토록 강렬하게 그려냈다는 사실을 짚어줍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실존적 몸부림을 그려낸 단테의 죽음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이야기도 뭉클합니다. 스토아 철학의 덕과 에피쿠로스적 삶의 향유를 동시에 추구한 인문주의자가 양심과 생명 사이에서 양심을 선택하는 최후를 맞습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삶을 경시한 결과가 아니라 삶을 가장 진지하게 사랑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이상 사회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기쁨을 온전히 누린다는 대목은 토마스 모어 자신의 삶의 방식을 드러냅니다.
몽테뉴와 파스칼은 근대의 문턱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정면으로 응시한 사상가입니다. 몽테뉴는 자기 자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 그 불안정하고 유한한 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파스칼은 그 나약함 앞에서 신앙으로의 도약을 선택했습니다. 두 길은 달라 보이지만, 둘 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했다는 점을 짚어줍니다.
지금 죽어도 허무하지 않을 것인가. 이 물음이 최대환 신부를 철학으로 이끌었고, 그 철학이 이 책이 되었습니다. 허무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공했다는 뜻? 진심으로 살았다는 뜻? 저자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단테, 토마스 모어, 파스칼의 삶과 사상을 경유하면서 우리 스스로 그 답에 다가가도록 이끌어줍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호모 비아토르는 우리말로 길 위의 인간, 여정에 있는 인간, 여행하는 인간, 순례하는 인간 등으로 옮깁니다. 인간 존재를 해석하는 숱한 개념이 있지만, 우리의 인생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보다 더 절실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이죠.
우리는 출발했고 언젠가 도착합니다. 그 사이의 시간이 우리의 삶입니다.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는 목적지를 의식하는 여행자만이 지금 이 길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