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패치 인류세 - 인간과 생태계를 잇는, 인류학의 새로운 자연사
애나 로웬하웁트 칭 외 지음, 김희정 옮김 / 해나무 / 2026년 9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세계적인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을 필두로 시각인류학자 제니퍼 데거, 환경인류학자 올더 켈러먼 색세나, 건축가이자 시각 디자이너 페이페이 저우가 함께 펴낸 『패치 인류세 (원제 Field Guide to the Patchy Anthropocene)』. 초학제적 프로젝트인 페럴 아틀라스(Feral Atlas)의 학문적, 예술적 성과를 담아낸 현장 안내서이자 21세기 새로운 자연사입니다.
곳곳에 수록된 다이어그램과 도판들은 페럴 아틀라스 프로젝트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이 시각 자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오수, 미생물, 인프라, 이탈적 생물들의 얽힘을 직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는 인간이 지구의 생태적, 지질학적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그동안은 인류세라는 단어를 접할 때 지구 전체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온난화되고 있다는 식의 거시적 평준화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정말 지구의 위기가 모든 장소에서 균일하게 터져 나오고 있는지, 연구실 모니터로 보는 자연과학자들의 통계 뒤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묻습니다.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매일 접하면서도 정작 우리 동네의 하천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는 모릅니다. 거대한 담론을 많이 안다고 해서 주변 환경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진짜 현장, 즉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프라와 자연이 부딪히는 사각지대로 걸어 들어갑니다.
『패치 인류세』의 핵심 개념은 패치 인류세(Patchy Anthropocene)와 이탈성(Feral)입니다. 패치 인류세는 인류세의 영향이 지구 전체에 동일한 밀도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댐, 운하, 단일 경작 플랜테이션, 하수도망 같은 특정 인공 인프라가 설치된 장소들을 중심으로 조각보(Patch)처럼 얼룩덜룩하게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조각난 현장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존재들이 폭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를 야생화 혹은 이탈(Feral)이라 부릅니다. 인간이 효율성과 통제를 위해 구축한 인프라가 역설적으로 특정 생물이나 무생물(방사능, 온실가스 등)에게 최적의 번식장이 되어주면서, 그들이 인간의 의도를 비웃듯 제멋대로 팽창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소설보다 더 기막힌 역사적 사실들이 펼쳐집니다. 19세기 프랑스는 베트남 하노이를 식민 지배하며 자신들의 우월한 문명을 자랑하기 위해 첨단 현대식 하수도망을 건설했습니다. 백인 거주지에 청결한 화장실과 목욕탕을 만들어 격조 높은 삶을 누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인프라는 누구에게 가장 유용한 공간이었을까요? 바로 쥐들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정복했다는 자만심은 인프라를 구축할수록 뒤통수를 맞습니다. 아름다운 관상용 식물로 전 세계 식물원과 박람회를 수놓았던 부레옥잠의 역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관리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부레옥잠이 번식하자, 부레옥잠을 걷어내 식물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칠리웅강에 대량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유럽 제국주의의 정원 가꾸기 욕망이 흘려보낸 부레옥잠은 수로를 막아버리고 산소를 고갈시키는 유독한 생태 공학자로 변신했습니다.
쥐는 인간이 만든 환경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자신의 생존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인프라는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이지만 자연은 그 장치를 인간이 예상한 방식으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추상적인 데이터는 현실의 섬뜩함을 가려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들이 빅데이터의 신화를 깨뜨리고 구체적인 패치를 관찰하자고 제안하는 이유입니다.
식용으로 들여온 황소개구리가 토종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후쿠시마의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핀란드까지 날아가 진균류와 인간의 몸에 흡수되는 현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에는 자연을 마음대로 재배치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묻습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신들만의 사건과 정치, 전쟁만을 역사라고 기록해왔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연을 역사 없는 타자로 치부해버린 제국주의적 정착민 식민주의의 유산을 비판합니다. 누가 이 땅을 점령했는가뿐 아니라 무엇이 함께 이동했는가라고 물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인류세를 인간이 자연에 영향을 미친 시대라고만 정의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만든 변화가 다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움직이는 과정까지 살펴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세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 시대라는 표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든 세계에 인간이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들이 참여하기 시작한 시대입니다.
개발도상국에 탄소 배출의 짐을 떠넘기는 선진국의 폭력을 비판했던 볼리비아의 원주민 담론처럼, 지구의 위기는 정치적 역사적 불평등과 완벽히 얽혀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의 역사를 독점하려 했던 세월 동안, 정작 역사의 고삐는 방사능과 변종 미생물, 바이러스, 그리고 이탈한 외래종들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미쳐가는 지구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패치 인류세』는 건축가 라카통과 바살의 철학을 인용하며 대안을 제시합니다. '허물기'와 '짓지 않기'입니다.
새로운 녹색 인프라를 또다시 짓고 개발하는 기술지향적 착각에서 벗어나, 저자는 서로 다른 지식 체계와 생명체들의 삶을 겹쳐 읽는 포개 쌓기(Overlapping)의 태도를 주문합니다. 내 눈앞의 작은 현장, 즉 패치를 유심히 관찰하고, 인간 외 존재들이 보내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며, 인간의 무분별한 개입을 정지시키는 것. 그것만이 인류세라는 대재앙의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출발점입니다.
인류학, 생태학, 건축, 시각 예술이 결합한 독창적인 현장 보고서 『패치 인류세』. 세계를 바라보는 틀 자체를 뒤흔드는 감각을 선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