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1
배명은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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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소설 수준이 언제 이렇게 맛깔스러워졌죠?

황금가지에서 선보인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에 게재된 작품 중 공포소설 수작을 모은 단편집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첫 편, 배명은 작가의 <허수아비>부터 셉니다. 오싹오싹. 한국형 공포소설 맛이 제대로네요. 강에서 뭔가를 건져 올려 허수아비를 만드는 노인 이야기인데요, 이 단편을 읽고 나면 삐에로 공포증 대신 허수아비 공포증이 생길 것이야!

"어차피 강에서 떠돌아다닐 것들, 내가 새 생명 불어넣어 준다는데 마다할 것들이 어디 있겠소. 마다해봤자 자기들이 어쩔 거야?" - 허수아비, 배명은

 

 

 

영혼과 사후세계를 연구하는 연구소에 취직한 이론물리학자. 영혼의 존재는 이미 증명되었다며 그에게 떨어진 연구는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사후세계의 존재를 꿈꾸는 이들의 마음을 무참히 박살 내버린 그의 증명.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이론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도출되는 과정이 신선했어요. 이공계 대학원 출신 작가다운 기질이 묻어난 단편소설입니다. <증명된 사실>은 SF 요소가 가미된 공포물이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맘에 들었고요, 책을 덮고 나서도 문득문득 떠오를 정도로 독자의 상상력을 계속 자극하는 스토리입니다.

"맙소사. 내가 도대체 뭘 증명해낸 거지?" - 증명된 사실, 이산화

 

자전거로 무박 국토 종주 중인 남자에게 닥친 죽음의 위기를 그려낸 <이화령>. 이화령 구간에서 자기보다 더 잘 타는 라이더를 죽여버리는 미치광이를 만납니다. 인과응보적인 결론이 순간 싱거울 수도 있지만 생각할수록 오싹합니다. 자전거 종주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써낼 수 없는 생생한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그쪽 쫓아가서 죽이려고 그러는 건데 내가 먼저 가면 어떡합니까?" - 이화령, 왼손

 

호러 영화 덕후 남자에게 벌어진 호러틱한 사건을 다룬 <위탁관리>. 괴물에게 먹힌다느니 신체강탈 같은 징글맞은 소재를 좋아한다면 취향에 맞을만한 스토리입니다. 생리 현상에 문제가 생기며 자꾸 이상한 게 나오는 장면은 으악, 상상하기 싫어요.

"사람 몸에 한 번 기어들어갔으면 영양분을 뺏어먹든 살을 파먹든 그래야지. 근데 진짜 몸만 잠깐 빌려. 괴물이 도리를 알아. (중략) 내가 괴물이 됐으면 인생 좀 날로 먹겠어요. 은근히 고생하는 괴물 많다니까?" - 위탁관리 / 유사본

 

놀이터에서 놀다 사라진 아이를 둘러싼 기묘한 이야기 <그네>. 그 아이와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아들이 자꾸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익숙한 스토리인듯하면서도 식상하지 않게 끌어나가네요. 왕따, 폭력 등 가정과 학교 문제를 짧은 단편 속에 강렬하게 집어넣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데. 민재 우는 소리는 나밖에 못 듣는데.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데." - 그네, 사마란

 

 

개인적으로 장은호 작가의 <천장세> 작품 무척 좋았어요. 디스토피아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개념을 건져올렸습니다. 천장세라는 개념이라니. 천장. 그 천장 맞습니다. 천장에 세를 놓는 겁니다. 원룸 월세 사는 사람이 화장실을 월월세로 놓을 수 있고, 화장실에서 월월세로 사는 사람은 또 그 집 천장에 월월월세를 놓을 수 있는 세상. 복잡한 권리관계로 도시를 못 떠나게 하는 교묘한 장치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뜨면 어떻게 되겠어? 도시는 세포를 잃는 거지. 도시란 것도 생명체 같아서 죽을 것 같으면 발악을 하거든. 발악 중 하나가 천장세 따위지." - 천장세, 장은호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제목에서 짐작하듯 죽음을 판다는 소재는 흔하지만 살짝 비틀어, 읽는 맛 괜찮았습니다. 죽고 싶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가여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 죽음을 파는 곳. 자신이 죽는 대신 뺑소니 사고로 병원에 누운 딸을 살리고 뺑소니 운전자를 복수하고 싶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처럼 불가해한 존재의 도움으로 이뤄지는 방식은 낯설지 않은 소재이지만,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깜박하고 날짜랑 고통에 대한 합의 없이 보내드렸지 뭡니까." -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지현상

 

<이른 새벽의 울음>은 아기를 키워본 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리얼한 심리 묘사가 일품이었습니다. 아내가 일하고 전업주부가 된 남편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집니다. 사이코 느낌 폴폴~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아기는 정말 내 아기가 맞는 걸까?" - 이른 새벽의 울음, 해도연

 

<고속버스>는 폐쇄 공간이라는 장치가 공포감을 더하네요. 불륜을 하다 끝내려는 남자에게 찾아온 생사의 갈림길. 죄질이 나빠 이 남자에게 감정 이입은 되지 않았습니다. 벌받을만한 놈이랄까요. 오히려 범죄자의 날선 목소리에 더 공감해버렸네요.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곳도 충분히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 고속버스, 엄성용

 

 

 

무명화가들의 유작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남자. 오싹한 분위기의 그림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소재 자체는 익숙합니다. 불 꺼지지 않는 방, 기이한 그림의 비밀만으로는 흔한 스토리가 예상되겠지만 생각 못 한 결말이어서 색다른 재미를 만끽했습니다.

"혼자 있지 마라. 눈 감지 마라. 그리고 잠들지 마라." - 더 도어, 우명희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에 수록된 총 10편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몰고 가다가 미묘한 통쾌함으로 끝내 작품 배치 괜찮았어요. 브릿G에 게재된 수많은 작품을 일일이 읽기 힘든 저로서는 수작을 모아 이렇게 책으로 나온 상태가 무척 만족스럽답니다.

 

공포물에도 수많은 갈래가 있듯 취향에 맞지 않으면 시시하게 읽힐 수 있는데, 처음엔 별거 아니네 싶었던 스토리도 조금 지나니 자꾸 떠오르는 걸 보면 이번 단편집은 전반적으로 괜찮았습니다. 토속적인 소재는 물론 일상 미스터리와 SF에서 판타지까지, 공포소설의 다양한 분위기를 이 한 권으로 재미있게 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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