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대화 -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에 들어온 뒤,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들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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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질문하는 힘을 잃어가는 인간이 답해야 할 미래 『서늘한 대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뇌과학자이자 물리학적 언어로 인간의 선택과 마음을 탐구해 온 KAIST 정재승 교수가 《열두 발자국》 이후 8년 만에 신작 『서늘한 대화』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한 인간의 위치를 서늘한 감각으로 짚어냅니다. CES 전시장, 학회장, 강연장, 연극 무대 그리고 챗GPT와의 대화창에서 노벨상 수상자, 기업가, 수도승, 학부모, 인공지능과 나누었던 40개의 생생한 담론을 엮어낸 미래 사유 안내서입니다.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제목에도 들어 있는 '서늘함'입니다. 저자는 〈사용설명서〉에서 이 서늘함을 두려움에 얼어붙지도 낙관에 취하지도 않은 채 아직 바꿀 수 있는 미래를 바라보는 마음의 온도로 정의합니다.





AI를 두고 우리는 대개 뜨겁거나(열광) 차갑거나(공포)의 양극단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서늘하다'는 그 사이의 감각입니다. 한여름에 에어컨 바람을 맞았을 때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상태이기도 하고요. 흥분을 가라앉히되 얼어붙지는 않는, 일종의 각성 온도입니다.


인공지능은 질문에 답하고 해결책을 제안하는 데 점점 능숙해지고 있습니다. 자료를 정리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고, 복잡한 문제를 분석하는 일에서도 인간의 부담을 덜어줍니다. 이런 환경에서 지식의 양과 정답을 찾는 속도만으로 개인의 경쟁력을 설명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서늘한 대화』는 아이의 성장과 학교 교육을 다루면서 호기심, 공상, 딴짓, 전공을 벗어나는 질문의 가치를 짚습니다. 정해진 시간표를 충실히 따르고 주어진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능력만으로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정답을 찾는 일은 인공지능에 맡길 수 있어도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인간이 고민해야 합니다.


기존 교육이 개인의 성취와 문제 해결 능력을 중심으로 설계됐다면, 앞으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공동의 결론을 만들어내는 경험도 중요해진다는 것을 짚어줍니다.


미래의 경쟁력은 인공지능보다 더 빠르게 답을 내놓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기술이 제시한 답을 검토하고, 서로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며,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누는 능력에도 있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교육 역시 기계를 이기는 훈련이 아니라 기계가 제시한 답을 인간 사회에 맞게 판단하는 훈련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공지능을 사용할 때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을 입력하고, 결과를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요청합니다. AI는 우리의 지시를 따르는 도구이고, 최종 판단은 인간의 몫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서늘한 대화』는 이 관계를 뒤집어 보여줍니다. 저자가 늦은 밤 챗GPT와 대화하며 경험한 서늘함은 인공지능이 언젠가 인간을 능가할 것이라는 막연한 예측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인공지능이 자신의 능력을 상당히 정확하게 분석하고, 어떤 능력부터 빼앗아갈지 순서까지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화면 건너편에서 인공지능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시에 우리의 능력을 측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면접하는 동안, 인공지능도 우리를 면접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직장인이 인공지능으로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자료를 정리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기술뿐 아니라 자료를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능력까지 맡기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한다는 것은 사용법을 익히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맡길지, 어떤 과정은 직접 수행할지, 결과를 어떤 기준으로 검증할지 정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기계가 일을 대신하는 동안 인간이 판단 능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기술의 편리함도 오래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인공지능이 우리의 언어를 번역했다. 이제는 우리의 감정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다음 차례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서늘함은 "기계가 빼앗아 갔다기보다 우리가 외로움에 지쳐 마음의 빈자리를 기꺼이 내어줄지도 모른다는 데서 왔다"라고 고백하는 지점입니다. 대개 '빼앗긴다'는 수동태로 말하는데, 저자는 '내어준다'는 능동의 가능성을 건드리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인간이 관계의 어려움을 견디기 힘들어질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짚어보는 부분이 놀라웠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오해와 갈등, 기다림과 책임이 따릅니다. 반면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고, 사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반응을 조정하기도 쉽습니다. 외로움이 깊을수록 이런 편리함은 강한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과 정재승 교수가 나눈 대화도 실려 있습니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행복을 생각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이 즐거운 것과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해주는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그 시간에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한다면, 효율의 향상이 삶의 만족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더라도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수명 연장만으로 행복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기술이 삶의 조건을 바꾸는 동안 삶의 목적은 인간이 계속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남습니다.


『서늘한 대화』를 읽는 내내 좋은 어른과의 늦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에 내 생각이 슬그머니 움직이는 식이거든요. 인공지능이 쓴 미래의 초안이 날마다 도착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빠른 독해가 아니라 이 문장을 고칠 펜을 내가 쥐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다움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 가득합니다. 기계가 잘하는 일을 무조건 인간이 더 잘해야 한다고 고집하기보다, 기계의 능력을 활용하면서 인간의 경험과 개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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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후회 없이 살 것인가 - 하버드 지성들을 사로잡은 가장 뜨거운 질문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제임스 올워스.캐런 딜론 지음, 이영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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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하버드 최고 경영학자가 내린 삶의 진단 『어떻게 후회 없이 살 것인가 (원제 How Will You Measure Your Life?)』. 성공의 함정을 건너뛰는 인생 자원 배분의 기술을 만나보세요.


우리는 연봉 높은 직장, 번듯한 타이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회적 성취를 거두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으며 쉼 없이 달려갑니다.


파괴적 혁신 이론의 창시자이자 생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수많은 지성들을 가르쳤던 고(故)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 교수는 하버드 MBA를 졸업하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동창들이 정작 가정 파탄이나 이혼, 심지어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는 비극을 마주하며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고 밝힙니다.


잘사는 것(Being well-off)과 진정으로 잘 사는 것(Living a good life)은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어떻게 후회 없이 살 것인가』는 경영학의 렌즈를 우리의 일상과 인생에 대입해,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쏟아야 후회 없는 삶을 완성할 수 있는지 파헤칩니다.


돈을 좇는 것은 기껏해야 직장에서의 좌절감을 완화해 줄 뿐이며, 그런데도 부라는 유혹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조차 혼란에 빠뜨려 왔다는 점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세운 의도적 계획만큼이나 우연히 찾아오는 기회, 즉 창발적 전략과 의도적 전략의 균형 속에서 삶의 방향을 유연하게 조정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인간관계와 가정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지키는 지혜로 가득합니다. 저자는 동료의 일화를 인용하며, 유명한 밀크셰이크 이론을 인생의 관계로 확장합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밀크셰이크가 가장 잘 팔리는 시간이 출근길이라는 사실을 통해, 사람들이 지루하고 긴 출근길을 달래기 위해 밀크셰이크를 '고용한다'는 본질적 이유를 찾아낸 것처럼 말입니다.


부부 관계와 가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위해 애쓴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배우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해 좌절을 겪습니다.


아울러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성공만을 강요하기보다, 인생의 시련을 이겨낼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도록 경험의 학교를 설계해 주어야 한다고 짚어줍니다. 저자는 "힘든 순간에 처한 자녀를 무조건 감싸고 돕고 싶은 것이 부모의 본능이다. 그러나 어려운 도전을 직면하지 않고 실패도 경험해 보지 않은 아이는 평생 살아가는 데 필요한 회복탄력성을 키울 수 없다"라며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마지막 3부 감옥에 가지 않는 법 파트에서는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를 막아주는 단단한 방패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인생의 중대한 윤리적 결정이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다가올 것이라 착각하지만, 실제 삶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결정들이 연달아 이어지는 형태로 흘러갑니다.


한계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라며 타협하는 순간, 방어막은 무너지고 걷잡을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짚어줍니다. 저자는 "한계 비용 분석에 근거하여 ‘이번 한 번만’이라는 유혹에 굴복한다면, 결국에는 그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배운 교훈이다. 원칙을 98퍼센트 지키는 것보다 100퍼센트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쉽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삶의 도덕적 정직성은 유연함이 아니라 100퍼센트의 단호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자원 배분의 역설입니다. 기업이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갈리듯, 우리의 인생 자원 역시 주의를 기울여 관리하지 않으면 뇌와 마음에 내장된 기본값에 따라 자동적으로 결정하고 소모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의 무서움은 '기본값'이라는 단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의 기본 설정을 바꾸지 않으면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듯, 삶의 기본 설정도 손대지 않으면 가장 급하고 가장 눈에 띄는 일에 우리 시간이 흘러갑니다. 일은 마감이 있고 성과가 즉시 보입니다. 반면 가족과의 대화나 친구와의 안부에는 마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줄 알면서도 뒤로 밀립니다. 저자가 말하는 자원 배분은 거창한 인생 설계라기보다 내 일상의 기본 설정을 한 번이라도 열어 본 적 있는가라는 점검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삶의 전략, 즉 매일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투자와 같다.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 재능, 부와 같은 ‘자원’을 배우자나 연인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녀를 잘 키우는 것, 일에서 성공하는 것, 교회나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 등 개인적인 삶의 여러 ‘사업’을 성장시키는 데 사용한다"라며 일상적인 자원 배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후회 없는 삶은 모든 선택이 성공으로 끝나는 삶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못한 실패를 겪을 수도 있고, 최선을 다했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그 가치에 맞게 자원을 배분하며, 선택의 결과를 돌아보는 태도는 지금부터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인생이라는 기업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투자하고 있나요? 『어떻게 후회 없이 살 것인가』는 일과 가정, 관계라는 인생의 복잡한 변수들을 경영학적 이론과 프레임워크를 통해 조망하고,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가치 있는 곳에 재배분하는 실천적 지혜를 안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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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잊는 것이 아니다
김수진 지음 / 부크크(bookk)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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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지워야 할 부채가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삶의 자산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김수진 시인의 시집 『슬픔은 잊는 것이 아니다』.


“잊어버려”, “털어버려”, “시간이 약이야”라는 말로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마주할 겨를도 없이 감정을 서둘러 급속 냉동시켜 버리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정말 슬픔을 지워버리는 것이 건강한 삶일까요? 슬픔이라는 감정은 우리 삶에서 퇴출해야 할 부작용에 불과한 것일까요?


문학고을 강원지부에서 활동하며 다사로운 온기와 솔직한 시어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다져온 김수진 시인.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가는 소박한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 감정의 진짜 얼굴을 드러냅니다. 슬픔을 안전하게 소유하고 항해하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슬픔을 망각이 아닌 보유로 바라본다는 관점이 독특합니다. 시인은 슬픔을 부정하거나 빨리 털어내려 애쓰는 대신, 슬픔이 내 삶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하나의 온기나 가락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가만히 관조합니다.


시 「뾰족구두」는 우리 모두의 페르소나에 대한 은유입니다. 남들에게 멋지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 타인의 시선에서 자부심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매일 아침 불편하고 위험한 뾰족구두를 신습니다. 먼 시선 속 멋진 나를 유지하기 위해 발가락이 비틀리는 통증을 참아내며 곡예를 하듯 걸어갑니다.


시인은 편안한 납작이(단화)나 운동이(운동화)를 그리워하면서도, 뾰족구두가 주는 아찔한 유혹과 매력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중적 심리를 포착합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해 그 위태로운 곡예를 이어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위해 견뎌내고 있는 숨은 아픔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이 시집에서 가장 제 마음을 두드린 시는 「숨죽여 우는 새」입니다. 소리 없이 숨죽여 우는 울음 같은 건 없다는 문장에서 한참을 머물게 됩니다. 울지 말고 강해지라고 압박하는 사회에서, 그러나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숨을 죽인 채 아파하는 존재야말로 가장 절실한 삶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들입니다.


시인은 역설적으로 숨죽여 우는 새는 없다는 통념에 맞서, 자기 내면의 아픈 울음을 밖으로 꺼내어 놓습니다. 슬픔을 억지로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발산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된다는 깨달음을 선사합니다.





시인은 윤동주의 시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고단한 삶의 무게 때문에 발버둥 치는 대신 자연의 이치에 가만히 몸을 맡깁니다.


소설가 유영준 작가의 소개글에 따르면 김수진 시인은 목소리가 크지 않고 나직나직하게 말하지만 시어 속에서는 포장 없이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성향이라고 말합니다. 포장지로 자신을 감싸기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산다"라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시인의 태도는, 역설적으로 거짓 긍정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옵니다.


"옷자락 끝 실밥마냥 나풀거린다"라며 미련을 옷 끝에서 흔들리는 실밥에 비유한 이 문장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실밥은 잡아당기면 올이 더 풀릴까 봐 건드리기도 애매합니다. 흔히 말하는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정확한 크기가 아닐까요. 완벽하게 비워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시인은 조금은 실밥처럼 나풀거리는 미련을 달고 살아도 괜찮다는 다정한 허락을 건네는 듯합니다.


슬픔과 공존하는 법을 터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그윽한 평정심이 시집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은 잊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는 감정의 탈출구가 아니라 감정의 착륙지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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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연습 -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순간
니콜라 노바 지음, 성귀수 옮김 / 책사람집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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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관찰은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 훈련으로 습득하는 체계적인 기술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관찰 연습』.


"저 사람은 눈썰미가 좋아"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듯 우리는 관찰력을 타고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관찰 연습』은 반복 가능한 훈련의 문제로 옮겨 놓습니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듯 관찰도 방법을 알고 횟수를 채우면 늘어난다는 겁니다.


인류학자 니콜라 노바(Nicolas Nova)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두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기술과 환경의 변화가 삶과 문화를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해 온 학자입니다. 스마트폰과 AI, OTT 등 시각 정보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지각 능력이 심각하게 둔화되고 있음을 경고하며 이를 감각의 위기와 상상력의 붕괴로 진단했습니다. 2024년 12월 31일 오만 탐사 활동 중 세상을 떠났고, 이 책은 유작이 되었습니다.


관찰이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요? "잘 보세요"라는 말은 사실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다이어트 중인 사람에게 "적당히 드세요"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관찰 연습』은 무엇을 볼지, 어떤 조건에서 볼지, 어떻게 적을지를 쪼개서 알려 줍니다. 조르주 페렉이 강조한 "작은 숟가락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법"처럼 무심코 지나치던 평범한 일상을 독창적인 창작과 기획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19가지의 프로토콜을 소개합니다.





이 책의 탄생 비화가 재밌습니다. 『관찰 연습』은 저자가 밝히듯 레몽 크노의 명작 『문체 연습』을 시선의 차원으로 옮겨온 결과물입니다. 레몽 크노가 버스 안에서 일어난 극히 평범한 하나의 사건을 99가지 서로 다른 문체와 글의 형식으로 변주해 내며 다채롭게 포착했듯, 니콜라 노바는 이 실험적 방법론을 계승하여 19~20세기 개념예술의 규칙과 조르주 페렉 등의 전략을 바탕으로 일상의 사물과 현상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19가지 시선의 프로토콜로 재탄생시켰습니다.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이 하나의 상황을 문장의 형식으로 다변화해 독창적인 감각을 깨웠다면, 니콜라 노바의 『관찰 연습』은 동일한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거리와 자세, 기록의 방식을 다각화함으로써 무심했던 일상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패턴과 의미를 발견하게 만드는 지적 훈련이라는 점에서 유전적 계보를 공유합니다.


『관찰 연습』은 관찰이라는 행위를 감상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자료 생성(Production) → 상호 작용(Interaction) → 편집 작업(Compilation)이라는 단단하고 실용적인 3단계 시스템으로 구축했습니다.


관찰이라고 하면 보통 가만히 지켜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동물 다큐의 카메라맨처럼요. 그런데 저자는 보는 사람이 장면 안으로 들어가고, 심지어 장면을 건드려 봐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화면 속 세상을 관람하는 데 너무 익숙합니다. 스크롤 하는 손가락은 세계를 건드리지 않고, 세계도 나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안전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관찰은 나도 변하고 세계도 달라지는 쌍방향 행위에 가깝습니다. 관찰자의 자리를 재설정합니다.


출근길, 자주 가는 카페, 책상 위 물건이 곧 관찰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가야 비로소 눈이 열린다고 믿습니다. 낯선 도시에서는 간판 글씨 하나에도 감탄하면서, 매일 지나는 우리 동네 편의점 앞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여행자의 눈을 집 앞으로 가져오라는 쪽에 가깝습니다. 비행깃값은 안 들고요.


대화 일람표, 동작과 자세, 구석구석, 사물 데이터베이스 만들기, 관용어 모음. 하나같이 거창하지 않고, 어딘가 귀여운 데가 있습니다. 내 책상 위의 볼펜과 머그컵과 충전기를 학술 대상처럼 취급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이미 관찰은 시작된 셈이니까요.


연습 15 테마 편집 편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버지니아 울프의 비망록을 모델로 삼아 잡다한 수집품에 새로운 미학을 부여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저자가 자신의 스마트폰 메모장에 태양계라는 테마를 만들고, 거기에 태양광 관련 기사, SF 소설 솔라펑크 문구, 노마딕 워커의 인용문 등을 모아두었던 실제 사례를 소개하며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관찰된 단편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맥락과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편집자적 시선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저자는 일찍이 감각의 위기와 상상력의 붕괴를 예감했고, 관찰하는 능력을 인간적 감수성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강조했다고 합니다. AI 시대의 진짜 위험은 틀린 답보다 대신 봐 주는 편안함일지 모릅니다. 요약본이 있으면 원문을 안 읽게 되고, 이미지 생성기가 있으면 머릿속으로 그려 보지 않게 됩니다. 이때 약해지는 건 지식이 아니라 보는 근육입니다. 계산기가 나오면서 암산이 약해진 것처럼요.


그렇다면 관찰 훈련은 AI와 경쟁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AI가 못 하는 일, 곧 '나'라는 구체적인 몸이 이 순간 이 장소에서 마주친 것을 감각하는 일을 지키려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관찰이란, 우리의 감각이나 기억의 허술함을 벗어나 방점을 찍을 만한 일들을 기록하고 소통하는, 보다 더 확실한 방법을 찾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허술함'이라는 표현이 와닿았습니다. 저자는 관찰을 눈으로 보기에서 끝내지 않고 지도, 목록, 용어집, 말풍선, 도면 같은 틀에 담는 일까지 확장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세요"가 아니라 "당신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되니 적어 두세요"라고 하는 셈입니다. 아날로그적이기도 합니다. 기록하는 순간 흐릿한 인상이 문장이나 표로 바뀌고, 그때부터 비로소 남과 나눌 수 있는 자료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관찰의 궁극이 정보 수집이나 아이디어 발굴이 아니라 실존하는 방식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조금 거창하다 싶었지만, 읽다 보니 이해가 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 곁에 있는지를 알아차리며 사는 것, 그게 곧 '여기 있다'는 감각이니까요. 생산성 도구로 포장하기 쉬운 주제인데, 이 책은 끝내 그쪽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최근에 읽은 『패치 인류세』 저자인 인류학자 애나 칭에 대한 언급도 반가웠습니다. 애나 칭이나 바티스트 모리조, 로맹 베르트랑 같은 작가들이 강조하는 생명 세계로의 시선 확장을 끌어옵니다. 오늘날 지구를 채운 생물의 다양성에 주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며, 이에 대해 애나 칭은 섬세한 관찰을 알아차림의 기술이라 칭하며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할 긴요한 능력으로 강조한 바 있습니다.


니콜라 노바 역시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단순히 사물이나 기계를 관찰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생태계와 주변의 미세한 존재들, 그리고 기계·기술적 환경에까지 주의력을 복원시키는 일이 AI와 정보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다움의 필수 조건임을 일깨워 줍니다.


『관찰 연습』은 한 번 읽고 책장에 꽂는 책이 아니라 자주 펼치며 숙제하는 책입니다. 19가지 과제는 읽는 시간보다 해 보는 시간이 길어야 제값을 합니다. 기록하고 분류하는 습관은 아이디어 발상, 글쓰기, 리서치에 두루 쓰일 수 있습니다. 관찰이 곧 질문하는 기술이라는 깨달음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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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도 매이 매이
이폴 지음 / 글고운그림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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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불을 끄고 누워도 "엄마,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 "물 주세요"며 졸음을 참아내는 아이를 볼 때마다 참 애가 타지요. 아이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요? 아이들에게 잠자리에 든다는 것은 신나는 놀이가 끝나는 아쉬움이자, 어둡고 깜깜한 공간으로 혼자 들어가야 한다는 은근한 두려움의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이폴 작가의 그림책 『오늘 밤도 매이 매이』는 잠을 하루의 끝이나 즐거움의 끊김으로 보지 않습니다. 현실보다 더 환상적이고 상상력이 펼쳐지는 신나는 밤 모험의 시작으로 그려냅니다. 2026 대구지역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며 작품성과 가치를 인정받은 이 책은, 아이들의 정서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는 베드타임 스토리북입니다.





『오늘 밤도 매이 매이』는 이제 잘 시간이니 눈을 감아야 한다는 규칙을 은연중에 강조하지 않습니다. 아이 스스로 밤을 기대하게 만드는 감정의 전환을 이끌어냅니다. 달빛 그림자가 소복이 쌓이고 하품 마법이 퍼지면, 방 안의 평범했던 그림자들이 하나 둘 생명을 얻어 살아납니다.


아이는 들판을 달리고 바닷속 축제에 뛰어들며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을 고요히 감싸 안는 반짝이는 어둠 호랑이를 만나며 안도감 속에서 자연스럽게 수면으로 이행합니다. 어둠이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포근한 울타리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몽롱한 달빛 그림자가 방 안에 소복이 쌓여요."라는 문장만으로도 따스해집니다. 달빛을 단순한 빛이 아니라 소복이 쌓이는 질감 있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매이 매이- 간질간질 하품 마법이 퍼지면 그림자 친구들이 살며시 깨어나요." 문장에서는 졸음과 하품을 비밀스러운 친구들을 불러내는 신비한 마법으로 묘사합니다. 풍덩! 풍당. 퐁당. 방울방울 퐁퐁퐁. 다정한 운율감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줍니다.


가장 멋진 장면은 호랑이가 등장하는 페이지였어요. 어둠이란 정말 두려움의 대상이기만 할까요? 작가는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밤의 어둠을 찰나의 반짝임을 품은 호랑이로 탈바꿈시켜 놓았습니다. 왜 이 장면이 제가 손꼽는 하이라이트인지, 그림을 가만히 마주하는 순간 직관적으로 깨닫게 될 거예요. 잠은 신나는 꿈속 모험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밤도 매이 매이와 함께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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