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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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정정당당한 운동경기와 달라서, 패널티를 받아 퇴장하면 자기 대신 뛸 교체선수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바뀌어서 포지션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8쪽

오 년이라. 혼마는 생각했다. 인생이 극에서 극으로 격변하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가즈야의 입으로 들은 세키네 쇼코의 인상과 본인이 근무했던 이마이 사무기기의 분위기로 짐작건대 그녀는 좋은 쪽으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 -60쪽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어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77쪽

"피곤할 때는 설탕을 넣는 게 좋아요. 난 아내에게도 늘 그렇게 말하죠. 다이어트한다고 설탕은 안 넣으면서 피곤하다고 드링크제를 마신다니까요. 그러면서 항상 예민하게 곤두서 있어요.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도 없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피곤할 때는 설탕이 최고예요."-94쪽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 하느냐." -145쪽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소비자신용은 젊은 층 이용자 개척에 힘을 쏟고 있으니까요.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업은 고객에게 달콤한 말밖에 안 합니다. 이쪽이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현 상태에서는 그 부분이 뻥 뚫려 있는 겁니다. 대형 도시은행에서 학생용 신용카드를 발행한 지 올해로 딱 이십 년째인데, 그 이십 년 동안 어느 대학교가, 고등학교가, 중학교가 이 신용사회에서의 올바른 카드 사용법을 지도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죠. 도립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을 모아 메이크업 강습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멋을 부릴 여유가 있으면 신용사회로 나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강습도 같이 해야 옳은 거 아닙니까?"-160쪽

밝은 꽃무늬 벽지 한 장을 뜯어내면 그 안에는 철근으로 지탱되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감춰져 있다. 누구도 쉽게 돌파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는 굳건한 벽이. -189쪽

뭐든 꿀꺽 삼켜서 곧바로 동화시켜버리는 도쿄라는 도시에 들어와도, 간사이 사람만은 신기하게 타고난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간사이 사투리에도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말끝이 이른바 '표준어'로 바뀌어도 억양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금세 간사이 출신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혼마는 그런 면에 일말의 동경을 품기도 했다. 자기는 도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완전한 도쿄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출신의 근거로 삼을 만큼 강렬한 '고향'의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7쪽

그나저나 공공장소에서 휴대전화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왜 하나같이 목소리가 크고 멍청해 보일까. -213쪽

정상적으로 원만하게 달리는 기관차를 서서히 위험한 언덕길로, 썩은 다리가 걸려 있는 벼랑 끝으로 유도하는 조그만 선로 전환기. 하나, 또 하나가 소리도 없이 변환되면서 진로를 바꿔나간다.
채무를 끌어안은 본인도 자기를 움직인 그 전환기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216쪽

이건 역시 일회용 소비 같은 사회 분위기 탓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요. 분에 넘치는 소비 행태 말이에요. 사람들 생활은 모두 풍요로워졌는데, 돈의 사용에 관한 교육은 이뤄지고 있지 않잖아요. -219쪽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모쓰는 은근히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렇지. 엄청나게 노력했잖아. 그렇지만 노력해서 좋아졌다는 건 역시 재능이 있다는 뜻이야. 안 되는 사람은 제아무리 좋아해도 안 돼. 다모짱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게 있었고, 좋아하는 일에 재능이 있었고, 게다가 그 길로 나아가는 데 방해도 없었잖아. 그게 가장 큰 행복 아닐까?" -247쪽

언뜻 반대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알리바이를 더 중요시하는 것은 일반인이 아니라 형사 쪽이다. 제아무리 수상쩍어도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다면 수사하는 측에서는 용의선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서 진범을 찾아낼 궁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은 의외로 고집이 세서, 한번 '이 녀석이 수상하다'고 믿어버리면 "알리바이가 있어도 보나마나 날조했을 거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무고한 죄를 뒤집어쓴 사람이 재수사나 재심에서 무죄가 입증되어도 지역 주민이나 친척들한테는 여전히 범인 취급을 받고 백안시당하는 까닭도 이런 심리 때문일 것이다. 과학수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형사는 혈액형의 미세한 차이에도 영향을 받아 수사 대상을 바꾸지만, 일반인은 '그런 걸 어떻게 믿느냐'며 일축해버리곤 한다. -267쪽

그러나 풍경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만 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도 혼마는 신조 교코가 본 오사카 거리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317쪽

그렇다면 나는 왜 신조 교코를 찾는 걸까?
단순한 습관일까. 어차피 시작한 일이지만, 가즈야에 대한 동정 때문일까. 호기심일까.
그렇다…… 굳이 따지자면 마지막 이유일지도 모른다. 호기심이다.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신조 교코라는 인간을. 그리고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대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을. -329~330쪽

"저기, 뱀이 탈피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탈피?"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혼마보다 앞서 다모쓰가 대답했다. "성장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후미에가 웃었다. "아니에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거기까지가 우리 남편의 학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내 학설인데,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3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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