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죽였다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를 기대했던 것보다는 시큰둥하게 읽어가고 있는데, 요전에 읽은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를 재미있게 읽고는 자연스레 <내가 그를 죽였다>에도 관심이 쏠렸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서는 용의자가 둘이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업그레이드 되어 용의자는 셋 중 하나. 또 하나의 작가와 독자와의 두뇌 싸움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각자 친척집에서 외롭게 자라난 미야코와 간바야시. 어른이 된 후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긴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친남매 이상의 관계를 갖게 된다. 하지만 미야코가 소설가인 호다카와 결혼하게 되며 이 둘의 관계는 마무리된다. 동생의 결혼을 반길 수만은 없었던 간바야시는 호다카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진다. 한편, 호다카와 미야코의 담당 편집자였던 유키자사는 한때 호다카와 불륜을 저질렀고, 결혼을 꿈꿨던 사이였고, 호다카의 개인 비서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스루가는 여자를 농락하고도 뻔뻔한 호다카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세 사람 모두 호다카라는 존재가 없어졌으면 하고 한 번쯤은 생각했을 법한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결혼식 당일 입장하던 중 호다카가 쓰러져 죽는다. 평소 비염이 있었던 호다카가 복용하는 약을 독약이 든 캡슐로 바꿔치기 한 사람은 셋 중 누구일까. 누구에게도 기회와 동기는 있는 복잡하게 꼬인 상황 속에서 가가 형사의 범인을 향한 추적이 시작된다.

  유력한 용의자의 행동과 동기, 이 모두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단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보통 독자에게 도전하는 소설이 어쨌거나 마지막에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범행 수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반해, <내가 그를 죽였다>에는 그런 과정이 배제되어 있다. 가가 형사가 마지막에 그저 결정적인 단서를 툭 던지고 ‘범인은 당신’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독자는 뒤에 봉인된 해설이 없다면 선뜻 누구 한 사람을 범인이라고 지목하기 망설이게 되는 상황. 차근차근 힌트를 곱씹어보니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지만, 그래도 내가 제대로 짚은 건가 싶은 찝찝함이 남았다. 범인 찾기를 즐기는(게다가 꽤 적중률이 높은) 독자라면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보다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범인은 누구?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지만, 죽어도 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못된 피해자, 그리고 믿었던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그의 집 마당에서 자살을 택하는 여자의 모습, 근친상간, 질투 등 드라마에 나올 법한 모든 구성으로 짜여 있어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뭐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대개 그렇듯이 일단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읽고 나면 어쩐지 TV 드라마를 보다가 껐을 때처럼 딱히 여운은 남지 않았던 책. 범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머리 식히기에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가 최고인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Q84> 3권이 드디어 나왔다. 꼭 소설이 어떤 결말을 가져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어쩐지 아쉬움만을 남긴 채 마무리되어버린 <1Q84>의 이야기에 작가는 예정에 없던 뒷 이야기를 내놓았다. 대체 아오마메는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만약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1Q84의 세계는 어떻게 흘러갈까 하는 궁금증을 잔뜩 품고 따끈따끈한 <1Q84>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700페이지가 넘어 전편에 비해 더 두께감이 있었지만 오랜 기다림과 궁금증에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다. 

  전편과 같이 3권도 교차 형식으로 서술이 진행된다. 다만 새로운 것이 있다면, 1, 2권이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여기에 선구의 리더를 저쪽으로 이동시킨 아오마메를 쫓는 우치카와의 이야기가 더해져 총 3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전편과는 달리 동떨어진 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서로를 그리고, 서로를 찾는 모습이 아니라 손 내밀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이제는 서로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때문에 과연 아오마메와 덴고 두 사람이 언제쯤 만날 수 있을런지, 아오마메는 무사히 우치카와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런지, 우치카와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해갈 수 있을 지 등에 집중하며 읽어갔다. 

  3편에서는 아쉽게도, 전편에서 <공기 번데기>라는 작품을 가지고 홀연히 등장한 후카에리의 모습은 많이 만날 수 없다. 묘한 말투 때문에 처음에는 낯설게도 느껴졌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이번에는 그저 덴고에게 경고를 해주는, 그의 오랜 염원이 곧 이뤄질 것임을 알려주는 안내자 정도의 역할을 하고는 자취를 감춘다. 후카에리를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지만, 그런 아쉬움을 벌충하듯 후카에리와는 다른 의미에서 독특한 캐릭터 둘을 더 만날 수 있었다. 일단 보기만 해도 어쩐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선구에 고용된 조사관 우치카와. 1, 2권을 복습하지 못했던 터라 우치카와가 누구?라는 낯선 느낌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미 기존에 잠시 엑스트라처럼 등장했던 인물. 기묘한 생김새를 가져 남에게 호감을 주는 타입은 아니지만, 감 하나는 날카로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아오마메와 덴고의 관계, 노부인과 아오마메의 관계를 알아내기에 이른다. 게다가 아오마메와 덴고를 제외하고는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것을 확인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에 또 한 명, 아오마메가 숨어 있는 방과 후카에리가 머물고 있는 덴고의 집, 그리고 덴고를 감시하는 우치카와의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NHK 수금원이 등장한다. 아마 1984의 세계에서 조금씩 생명이 사그라들어가는 덴고의 아버지가 1Q84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본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집요하리만치 갇힌 상태에 머문 사람들의 신경을 긁는 그의 방문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덴고의 어린 시절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숱한 해설서를 낳은 <1Q84>.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 하루키가 심어놓은 상징, 그것은 독자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어떤 이에게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 이야기로, 어떤 이에게는 1Q84의 세계와 1984의 세계가 혼란스럽게 펼쳐지는 일종의 판타지로, 어떤 이에게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로 닿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1Q84>는 결국 이 폭력이 가득한,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가 좇을 수 있는 것은 '믿음과 희망'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대상이 종교, 자기 자신, 혹은 사랑 어떤 것이라 하던지 결국 믿음이 없는 곳에선 희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애써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서로의 존재를 지켜주고, 함께할 수 있는 것. 비록 그것이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곳이라고 해도, 비록 새로운 세계에서는 무슨 일을 겪게 될 지 몰라도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힘이 되는 것. 인간은 혼자가 아니기에, 아오마메와 덴고처럼 단단한 결속이 아니라 해도, 어딘가에는 덴고 같이(혹은 아오마메 같이) 힘이 되어줄 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3권을 다 읽고 나니 여기서 만족하기엔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덴고가 풀어가는 <공기 번데기>의 후속작도, 1권의 앞 부분에 속할 1~3월의 이야기도, 3권의 뒷 이야기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속작이 나오건, 번외편이 나오건 간에 하루키의 <1Q84>는 이로써 일단락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놓고도 어쩐지 아쉬움에 책을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어쩐지 가슴 한 켠은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만 같다. '하루키 문학의 정점'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1Q84>. 역시 하루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 책이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넷 2010-07-31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왜 그런지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네요.ㅎㅎ;

이매지 2010-07-31 23:01   좋아요 0 | URL
하루키는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인 것 같아요 ㅎㅎ
저야 뭐 하루키 팬이라 :)

lazydevil 2010-08-0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3권은 읽지 못했지만, <1Q84>의 가장 큰 장점은 엄청난 분량이 순식간에 읽힐 정도로 재미있다는 거... 솔직히 이 작품은 분석과 해석을 요할 만큼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루키답게 가벼워요. 그런데 알맹이가 탱글탱글하게 차있는 가벼움이랄까요? 그래서 읽는 내내 즐겁더라구요. 하루키 소설, 흉내낼 순 있을 지 언정, 그만큼 재미있게 쓰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독자로서 이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조만간 3권 볼려구요, 재밌잖아요^^ㅎㅎ

이매지 2010-08-01 01:05   좋아요 0 | URL
1,2권이 좀 스피디하게 진행이 됐다면 3권은 호흡을 가다듬는 느낌이 들었어요. 레이지데블님 말씀처럼 사실 뭐 다른 거 다 떠나서 하루키는 재미있잖아요. ㅎㅎㅎ 전 1,2,3 다시 정독해볼까 생각중이예요:)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라는 제목을 보곤 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이상한 그림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이 표지는 대체 뭔가, 대략 이런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졌더랬다. "일본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기발한 단편집"이라는 카피에 끌려 일단 집어 들어서 저자 소개를 살펴보니 이 작가 굉장히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자신의 이름의 글자 순서를 뒤섞어 만든 필명으로 활동했는데, 원래 직업은 옷에 가문을 그리는 장인인 문장사였으나 이 책에 수록된 단편 <DL 2호기 사건>을 통해 <환영성>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 외에도 그의 이름을 딴 상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마술사였다고. 어쨌거나 이런 독특한 저자 약력과 '아 아이이치로'라는 정체불명의 제목 때문에 읽게 된 책. 거의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은 셈이었는데, 단편 하나하나 읽으면서 정말 감탄 또 감탄을 하며 읽었다. 

  일단 첫 단편을 읽으면 제목에 언급된 '아 아이이치로'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다. 설마 사람 이름일까라고 생각했는데, 그 설마가 사실로 판명. 게다가 이렇게 요상한 이름을 가진 이 양반(혹시나 일본탐정 인명사전이 발간되면 ABC 순으로 하든, 50음도로 하든 맨 먼저 등장하게 하려고 지은 이름이라고), 키도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 탓에 책 속에서 여성들의 무한 호감을 살 뻔 했으나, 절망적인 운동신경과 얼빵함 때문에 일단 움직이기만 하면 파팍 환상이 깨져버리는 사진가다. 하는 행동은 영 미덥지 못하지만, 빼어난 관찰력과 인간에 대한 이해, 추리력 등을 갖춰 진실이란 결코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온 지 30년 즈음 된 책이라 그런지 배경 자체는 약간 촌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코지 미스터리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아기자기한 맛이 느껴져서 좋았다. 살인사건이 발생해도 뭔가 피가 여기저기 뿌려져 있는 듯한 잔인한 느낌보다는 어쩐지 개구쟁이가 죽은 척하고 있는 것 같은 익살스러움이 느껴졌다랄까. 인간 심리의 맹점을 파고드는 <DL 2호기 사건>이나 <G선상의 족제비> 같은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마술가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손바닥 위의 황금가면도>도 만족. <호로보의 신>이나 <검은 안개>는 어쩐지 묵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은 예상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가장 유머러스한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싶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본어를 좀 더 잘 알았더라면 <발굴된 동화>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정도랄까. 전체적으로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던 단편집. 초절정 꽃미남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스러운 순간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 속에서 또 어떤 트릭과 어떤 유머를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jy 2010-07-23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분이었던가..백치미가 흐르는 탐정이라는데~ 막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매지 2010-07-23 14:07   좋아요 0 | URL
정말 생긴 건 완전 훈남에 그리스 조각상인데,
하는 짓은 칠푼이 팔푼이 허당이예요 ㅎㅎㅎ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구판절판


삶이란 별 게 아니다. 젖은 우산이 살갗에 달라붙어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자 한결 견딜 만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녀는 그 문구를 계속 되뇌었다. 삶, 젖은 우산, 살갗, 참고 견딘다. 삶, 젖은 우산, 살갗, 참고 견딘다……-9쪽

큐브 속의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습니다. 웃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맹렬히 웃고 있습니다. 으하하하하하. 큐브 속의 남녀, 큐브 속의 가족, 큐브 속의 친구들은 오직 웃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 큐브들은 불길합니다. 어쩐지 큐브 속의 사람들, 아크릴 큐브 속에 얼굴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그 사람들은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84쪽

어쩌면 인간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의 울음소리를 완벽하게 흉내내는 폴리네시아의 원주민처럼, 자칼의 가면을 쓰고 행진하는 아마존의 어느 샤먼처럼, 인간은 어떤 순간 완벽하게 다른 존재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정말 인간은 삶의 전 순간을 오직 인간으로만 사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개나 돼지, 새나 물고기인 그 어떤 순간, 그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때가 간혹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이 전생을 믿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의 긴 윤회 과정 어디쯤에선가 왜가리나 멧돼지, 코끼리나 흰소였을 수 있다는 믿음은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일까요?-87~8쪽

"……있는 거야?"
그녀가 묻습니다. 나도 궁금합니다. 나는 있는 걸까요? 정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내 육신이 거기 있다고 해서, 응, 있어, 나 여기 있어, 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아, 대저 존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분명 여기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고 그녀가 느낄 고통을 미리 느끼고 있는데, 그런데 나는 과연 없는 것일까요?-99쪽

혹시, 이 남자(혹은 여자) 때문에 내가 타락해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벌써 회복 불가능하게 타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타락해버린 누군가를, 그런 줄도 모른 채 너무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17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절판


마지막 남자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생겼다. 나이는 다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른다섯 살쯤 됐을까. 피부가 하얀 것이 흡사 귀족 수재 같았다. 눈은 학자처럼 지적이고 몸에는 시인처럼 낭만적인 분위기가 감도는데다 입매는 스포츠맨처럼 야무졌다. 갈색 양복에 색이 잘 맞는 줄무늬 넥타이를 단정하게 맸고 넥타이핀과 커프스버튼도 튀지 않는 점잖은 취향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하다 형사는 처음에 그를 선망에 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공항이 비에 휩싸인 순간 그 남자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는데도 그것이 비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몇 초쯤 걸리는 모양이었다. "비다, 비다."하고 소리치면서 두 발을 모으고 깡충깡충 뛰었다., 그 뛰는 모습으로 보건대 운동신경 쪽이 영 절망적인 듯했다.
그것을 보더니 볕에 그을리고 깡마른 카메라맨이 "아아, 아아."하고 소리쳤다. 그제야 하다 형사는 그 남자의 이름이 '아아'라는 것을 알았다. -13~4쪽

우연히 일어날 일을 예측할 때, 인간은 대개 세 가지 사고방식을 따른다고 합니다. 지금 이 주사위로 예를 들자면, 처음에 1이 나왔을 때 다음번에도 1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하나. 진짜 도박사 중에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과 같은 사고방식이죠. 두 번째는 처음 나온 눈을 아예 무시하는 생각입니다.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대단히 지성적이고 인정에 좌우되지 않아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남은 세 번째 사람들의 사고방식 말씀인데, 실은 이 중에 시바 씨도 끼어 있습니다. 이 그룹 사람들은 처음에 1이 나왔으니 두 번째는 1이 또 나올리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오늘 비가 좍좍 쏟아지고 있으니까 내일은 안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43~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