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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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한 비교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일 년에도 몇 권씩 책을 만들어내는 다품종 대량생산 작가가 있다면 그와 반대로 데뷔작을 내고 무려 13년(!)만에 두번째 작품을 낸 스콧 스미스라는 소품종 소량생산 작가도 존재한다. 누가 더 낫네 마네는 논외로 하고라도, 오래 기다려야 다음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작가라는 점에서 스콧 스미스의 작품은 아껴 읽을 수 밖에 없다. 작년 여름에 <심플 플랜>을 읽고 곧바로 <폐허>를 읽을까 하다가 망설였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폐허>를 읽고 나서 더이상 스콧 스미스의 작품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할까봐, 그래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리고 오랫만에 독서 휴가를 즐기던 어느 날, 결국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멕시코의 휴양지 칸쿤으로 여행을 떠난 두 쌍의 커플. 그곳에서 독일인, 그리스인 청년들과 어울리며 휴양지가 주는 느긋함에 한껏 빠져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인 청년이 고고학자에게 반해 발굴현장에 간 동생을 찾으러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그들은 무료함을 달랠 작은 '모험'을 꿈꾸며 함께 폐허로 떠난다. 가볍게 피크닉 가는 정도로 준비했던 이들은 동생이 남기고 간 지도를 따라 가던 중 발굴지로 보이는 언덕에 이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을 무심하게 지켜보던 마야인들의 강한 저지를 받게 되고, 그 와중에 엉겁결에 일행 중 한 명이 언덕에 발을 내딛으며 사태는 반전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을 언덕에 들여보내지 않으려 했던 마야인들은 되려 그들을 언덕으로 몰아넣고 그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그 주변에서 경계를 선다.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던 이들. 하지만 곧 그 언덕에 선홍빛 꽃을 피우며 자라고 있는 식물이 식인식물임을 알게 되며 점점 공포에 질리기 시작한다.

  <심플 플랜>을 읽을 때는 이 작품이 '스릴러'라기보다는 일종의 '심리극'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폐허>에서도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공포'를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공포 영화에서 익숙하게 봤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공포',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는 <폐허>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저 자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식물이 아닌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 영리한 식물.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독버섯처럼 너무나 아름답기에 미혹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 이면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공포. 어쩌면 식상해보이는 설정일 지 몰라도, <폐허> 앞에서는 그저 그 작은 묘사와 작은 설정 하나하나에도 흠칫흠칫 하며 자꾸만 차가워진 손을 꼭 쥘 수밖에 없었다. 

  잠들기 전에 가까스로 마지막 장을 덮으며, 여느 때라면 바로 현실세계의 버튼을 온(on)하고 불 끄고 잤을 내가 잠시 불을 끄는 것을 망설였다. 자꾸만 뭔가가 내 몸을 기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폐허> 속의 그놈들이 나의 꿈에 찾아올까봐 겁이 나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다행히(?) 꿈에서 놈들의 집요한 공격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여전히 찜찜함과 오싹함이 나를 감쌌다. 여름밤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지 모를 <폐허>.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 영상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 세밀한 공포 조성에는 실패할 것만 같다. 언제쯤 스콧 스미스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될 지 모르기에, 책을 놓기가 아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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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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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면서도 뭔가 딱 이거다 싶은 책이 없어 방황하던 중 트친님과의 대화를 하던 중 이 책이 번쩍 찾아왔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예전에 사두고는 고이 꽂아만 두었던 책. <나의 미카엘>이라는 제목 때문에 어쩐지 어린아이에 대해 쓴 글이 아닐까 지레짐작도 해봤지만, 의외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책은 시작된다. 

  10년 전, 자신이 사랑했던 남편과의 첫 만남.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그녀의 팔꿈치를 한 남자(미카엘)가 잡아주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랑의 시작. 그 설레임. 그녀는 미카엘과 그렇게 사랑에 빠지고, 그렇게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일까. 그녀는 결혼 전날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결혼 후에도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사랑도, 그들의 행복도, 그렇게 어렴풋한 미소만 남긴 채 현실 속에서 조금씩 파묻혀간다. 

  활달하고 몽상적인 성격의 한나, 무슨 일을 겪어도 동요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는 미카엘.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조금씩 조금씩 삐걱거린다.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두 사람.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시도도 해보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진행되는 구조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노라고 이야기하기엔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며 어쩌면 누군가에게 결혼은 가장 고독한 순간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결국 혼자인데, 애써 결혼이라는 계약을 매개로 하나가 아닌 둘이 됨을 강요받고, 그 굴레 속에서 얽매이다가 결국 자기 자신다움을 잃게 하는 것. 그것이 결혼의 본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던지고 깨부수는 격렬함은 없었지만, 한나와 미카엘의 조용한 전쟁 속에서 현실과 이상은 얼마나 타협하기 힘든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나중에 결혼을 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스라엘 최고의 작가라는 아모스 오즈.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이 몇 권 더 있는데, 다른 책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소설이지만 한 편의 서정시 같은 그의 문장. 그 문장의 맛을 다시 느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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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17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저처럼 결혼생활을 해 본 사람이 좀 더 느낄 수 있는 내용이겠군요?
자기 자신다움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고도 모순이 되는지...결혼으로 완전해진다기보다...좀 덜 외로우려고 선택하는 길은 아닌가 싶어요~ㅠ

이매지 2010-11-17 11:40   좋아요 0 | URL
결혼하고 읽으면 정말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아요.
좀 덜 외로우려고 선택하는 길이라고 해도,
한나와 미카엘의 이야기는 참 쓸쓸해요 ㅠㅠ
 
탐정 클럽 - 그들은 늘 마지막에 온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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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워낙에 쏟아져나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갈릴레오 시리즈의 새로운 책이 나왔을 정도로 정말 쉴새없이 나온다. 워낙에 많이 나오다보니, 어느 정도 취사선택을 해서 읽게 되는데, 이번 작품은 평점도 좋은 편이고 '탐정 클럽'이라는 설정에 끌려 골라들었다. 하지만 다섯 개의 단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굉장한 트릭이 숨어 있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탐정 클럽'이라는 캐릭터가 살아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드렁하게 읽어갔다. 

  정재계의 VIP급만 담당하는, 그래서 당연히 보안이 철저한 탐정클럽. 늘 검정옷을 입고 의뢰인을 방문해 "클럽에서 왔습니다"라고 말문을 여는 두 사람. 큰 키에 훤칠한 외모가 돋보이는 남자와 찢어진 눈매에 아나운서 같은 화법을 구사하는 여자. 두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탐정을 시작한 것인지, 탐정 클럽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들은 곤란에 처한 회원들을 방문해 그들의 고민을 은밀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조사해 해결한다. 

  탐정 클럽에서 해결하는 사건은 임신한 딸의 남자를 찾는 문제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는 일, 불륜 관계에 대한 조사, 사라진 시체에 대한 조사 등 어떻게 보면 사소하지만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내용들이다. 하지만 단편으로 다뤘기 때문일까. 읽는 내내 어쩐지 황급히 막을 내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소재 자체도 기존에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이라 신선한 느낌이 없었다. 차라리 이런 내용으로 더 치밀하게 구성해서 장편을 썼더라면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부담없이 탐정물을 즐기고 싶은 독자에게는 만족스러울 듯 싶지만, 개성 넘치는 탐정물을 기대했던 내게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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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11-17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저는 읽게 될게 틀림없어요...^^;

이매지 2010-11-17 11:41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의 감상도 기대할께요 :)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늘 중간은 하잖아요 ㅎ

마녀고양이 2010-11-17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인 저지만, 저는 패스할래요~ ^^
판단 기준을 제공해주신 리뷰 감사드려요. 아하하.

이매지 2010-11-17 11:41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에 좀 질려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ㅎ
앞으로는 갈릴레오 시리즈만 보게 되지 않을까 싶은 ㅎ
 
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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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7쪽

돌아가신 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강한 사람들은 원하는 것은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강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고. 나는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11쪽

돌아가신 아버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통사람이 철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짓은 늘 저절로 드러나버린다고 말이다. 그건 마치 너무 짧은 담요 같은 것이다. 발을 덮으려고 하면 머리가 드러나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삐져나오고. 사람은 그 구실 자체가 불유쾌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 숨기기 위해서 복잡한 구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완전한 진실은 철저하게 파괴적이고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 -47쪽

사실 이 시기에는 우리 사이에 일종의 불편한 타협 같은 것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마치 장거리 기차여행에서 운명적으로 옆자리에 앉게 된 두 명의 여행자들 같았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어야 하고, 예절이라는 관습을 지켜야 하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거나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서로 아는 자신들의 사이를 이용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예절바르고 이해심을 발휘해야 하고. 어쩌면 가끔씩은 유쾌하고 피상적인 잡담으로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야 하고.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절제된 동정심을 보이기도 하면서. -73쪽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일은 얼마나 적은가. 아무리 세심한 사람이라도. 아무것도 잊지 않는 사람이라도.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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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11-16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카엘'..대천사 이름이라는 알고 난 후부터는 그 이름을 참 좋아했습니다.
발음도 이쁘고, 그냥 친근하게 느껴졌거든요. 아마도 14살 전후였을까?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미국에서 같은 철자로 '마이클'이란 이름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났을 때는 '이게 뭐야! 촌스럽게!'를 외친 적도 있죠.(웃음)
.....라고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댓글이 되고 말았군요.-_-;

이매지 2010-11-16 16:58   좋아요 0 | URL
미카엘과 마이클의 느낌은 천지차이 ㅋㅋㅋ
뭐 댓글 내용이야 아무렴 어때요, 오랫만에 댓글 반가운데요? ㅎㅎ
 
대지의 기둥 3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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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의 기둥>을 읽는 동안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작품을 추천하기 바빴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데?"라고 묻는 이들에게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꼬집어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대성당 짓는 이야기'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기엔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너무나 방대했고, '정의를 되찾는 이야기'라고 하기엔 그 이상의 재미가 담겨 있어 나는 번번이 설명할 바를 못 찾고 어버버 하다가 "그냥 일단 읽어봐"라고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면서도 또 다시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은데, 그걸 논리적으로(혹은 열정적으로) 글로 옮기기엔 부족함이 많아 아쉽고 또 아쉽다.

  1123년부터 1174년까지 50여 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중심에는 킹스브리지에 세워질 '대성당'이 놓인다. 일거리가 없어 배를 쫄쫄 굶다가 결국 아내가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이한 석수쟁이 톰. 그에게 대성당은 평생을 바쳐 꼭 도전해보고픈(혹은 이루고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망이다. 작은 수도원의 원장에서 쇠퇴할 대로 쇠태한 킹스브리지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된 필립에게 수도원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부를 벌어다줄 수 있는 기회로, 누군가에게는 어려울 때 선뜻 손을 내밀어주는 고마운 존재로 수도원은 자리잡는다. 긴 세월을 담고 있고,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주연급은 끽해야 10명 남짓한 등장인물들의 오랜 세월 동안 얼키고설킨 이야기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보통 우리가 접하는 현대소설에는 비교적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해져 있다. 악인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그의 악함을 동정해줄 수 있는 설정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지의 기둥>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다. 그중 악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윌리엄 햄리다. 하급 귀족인 퍼시 햄리 경의 아들인 그는 한때 신분상승을 꾀하고자 하는 부모의 계산 하에 바살러뮤 백작의 딸 앨리에너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그녀의 거부로 파혼하며 앙심을 품는다. 그리고 윌리엄 햄리는 아름답고 총명한, 그리고 도도하기까지 한 앨리에너에게 평생 애증의 감정을 품고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괴로움을 주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하고 살아간다. 어찌보면 이 책은 윌리엄 햄리(악)에게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악은 등장인물들을 겁먹게 하고, 그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준다. 

  권력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상황. 이런 상황은 어쩌면 이미 많은 소설에서 만난 빤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대지의 기둥>에서는 그런 모든 이야기가 '성당'과 연계된다. 종교적인 면을 떠나서 '성당'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어쩌면 이 책은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정의로 대치할 수도 있을 듯)을 세우기 위한 지치지 않는 투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채석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자재의 수급이 어려워지더라도, 예정보다 빠른 공사로 인해 성당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도, 폭우로 인해 전에 없는 기근에 시달려도, 윌리엄 햄리의 약탈에 마을이 불타도, 그 모든 방해와 고난을 딛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회의와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성당은 조금씩 쌓아올려진다. 그저 막무가내로 돌을 쌓기만 하는 것이 아닌, 치밀하게 짜여진 비율에 맞춰 세워지는 성당. 그렇게 쌓아올려진 성당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운 경배이며,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축복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인물은 늘 고난을 겪게 마련이다. 특히 그것이 여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지의 기둥>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녀 앨리에너는 그런 면에서 짧은 삶 속에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극단적으로 경험한다. 백작의 딸로 우아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아버지가 역모 혐의로 수감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 속에서 윌리엄 햄리에게 겁탈 당하고, 철 없는 동생을 부양하며 오직 반드시 셔링의 백작을 되찾겠다는 목표로 살아간다. 없는 돈을 탈탈 털어 고생 끝에 양모상으로 성공하지만, 그마저도 윌리엄 햄리의 습격 때문에 모두 불에 타 빈털털이가 되고, 결국은 동생을 위해 불행한 결혼을 택하는 모습. 그러나 결국 자신의 사랑을 되찾는 모습 등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그려진다. 아름다운 외모, 그에 어울리는 총명함.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게 고난을 안겨줬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복수를 수행하느라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답답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그녀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은, 그래도 삶이 아직은 괜찮다고 조금만 더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이 책의 여주인공격이라 그런지 몰라도 남녀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이었던 인물.

  사랑, 음모, 권력, 그리고 정의. 천오백 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 속에는 이 모든 것이 긴장감 있게 녹아 있다. 중세의 암흑. 그 암흑 속에서 조금씩 따뜻한 빛이 새어나오는 모습을, 조금씩 사랑과 정의가 그 어둠을 거둬가고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어쩐지 가슴 뭉클하게 읽어갔다. 이 작품의 속편인 <끝없는 세상>도 나올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 작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책의 아쉬움을 달래며 이제는 드라마로 만들어진 <대지의 기둥>을 보며 감상을 되새김질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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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1-15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들이 극찬하던데~~ 이매지님 리뷰를 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이매지 2010-11-15 10:08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러니까 겁나게 열심히 쓰기는 했는데, 리뷰만으로는 뭔가 부족해요.
일단 읽어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어요 ㅎㅎ

BRINY 2010-11-1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고 추천작인 '수도원의 죽음'도 봤는데, 사실 전 '수도원의 죽음'이 더 끌리더라구요. 킹스브리지 성당 건축과정에 대한 설명을 읽어도 건축지식이 없으니 뭔가 대단한 거 같기는 한데, 뭐가 뭔지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안그려져서요.

이매지 2010-11-15 14:04   좋아요 0 | URL
저도 <수도원의 죽음>도 챙겨서 봐야겠네요. 저도 딱히 건축 지식은 없는데 찾아가면서 읽고 그랬어요^^ 아무래도 드라마를 보면 확 와닿을 것만 같아요 ㅎㅎ

BRINY 2010-11-15 14: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드라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stella.K 2010-11-1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표지가 너무 영화스러워서 좀 그랬는데
이매지님이 확 깨주시네요. 흠..관심이 가요.^^

이매지 2010-11-15 14:05   좋아요 0 | URL
노란 부분이 표지고 드라마 들어간 부분은 띠지예요.
띠지 벗겨내면 덜 영화스러운 표지로 변신 ㅎ
어쨌거나 멋진 작품이예요 :)

마녀고양이 2010-11-1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즈음 같이 사고파했던 분들이,
다들 읽고 리뷰를 올려주시는데... 전 아직 꽂아놓고 손도 못 대고 있으니
아하하, 왜이리 한심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리뷰 감사히 읽었습니다, 더욱 침을 흘리고 있답니다. 이그.

이매지 2010-11-15 23:48   좋아요 0 | URL
저는 10월 중순 즈음에 시작해서 이제서야 끝냈네요 ㅠㅠ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만큼 여운도 남네요.
마녀고양이님도 어여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