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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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한 비교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일 년에도 몇 권씩 책을 만들어내는 다품종 대량생산 작가가 있다면 그와 반대로 데뷔작을 내고 무려 13년(!)만에 두번째 작품을 낸 스콧 스미스라는 소품종 소량생산 작가도 존재한다. 누가 더 낫네 마네는 논외로 하고라도, 오래 기다려야 다음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작가라는 점에서 스콧 스미스의 작품은 아껴 읽을 수 밖에 없다. 작년 여름에 <심플 플랜>을 읽고 곧바로 <폐허>를 읽을까 하다가 망설였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폐허>를 읽고 나서 더이상 스콧 스미스의 작품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할까봐, 그래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리고 오랫만에 독서 휴가를 즐기던 어느 날, 결국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멕시코의 휴양지 칸쿤으로 여행을 떠난 두 쌍의 커플. 그곳에서 독일인, 그리스인 청년들과 어울리며 휴양지가 주는 느긋함에 한껏 빠져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인 청년이 고고학자에게 반해 발굴현장에 간 동생을 찾으러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그들은 무료함을 달랠 작은 '모험'을 꿈꾸며 함께 폐허로 떠난다. 가볍게 피크닉 가는 정도로 준비했던 이들은 동생이 남기고 간 지도를 따라 가던 중 발굴지로 보이는 언덕에 이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을 무심하게 지켜보던 마야인들의 강한 저지를 받게 되고, 그 와중에 엉겁결에 일행 중 한 명이 언덕에 발을 내딛으며 사태는 반전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을 언덕에 들여보내지 않으려 했던 마야인들은 되려 그들을 언덕으로 몰아넣고 그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그 주변에서 경계를 선다.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던 이들. 하지만 곧 그 언덕에 선홍빛 꽃을 피우며 자라고 있는 식물이 식인식물임을 알게 되며 점점 공포에 질리기 시작한다.

  <심플 플랜>을 읽을 때는 이 작품이 '스릴러'라기보다는 일종의 '심리극'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폐허>에서도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공포'를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공포 영화에서 익숙하게 봤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공포',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는 <폐허>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저 자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식물이 아닌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 영리한 식물.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독버섯처럼 너무나 아름답기에 미혹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 이면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공포. 어쩌면 식상해보이는 설정일 지 몰라도, <폐허> 앞에서는 그저 그 작은 묘사와 작은 설정 하나하나에도 흠칫흠칫 하며 자꾸만 차가워진 손을 꼭 쥘 수밖에 없었다. 

  잠들기 전에 가까스로 마지막 장을 덮으며, 여느 때라면 바로 현실세계의 버튼을 온(on)하고 불 끄고 잤을 내가 잠시 불을 끄는 것을 망설였다. 자꾸만 뭔가가 내 몸을 기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폐허> 속의 그놈들이 나의 꿈에 찾아올까봐 겁이 나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다행히(?) 꿈에서 놈들의 집요한 공격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여전히 찜찜함과 오싹함이 나를 감쌌다. 여름밤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지 모를 <폐허>.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 영상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 세밀한 공포 조성에는 실패할 것만 같다. 언제쯤 스콧 스미스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될 지 모르기에, 책을 놓기가 아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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