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 단맛 쓴맛 매운맛 더운맛 다 녹인 18년 사랑
김찬웅 엮음 / 글항아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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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동안 역사스페셜, 역사추적 같은 교양 프로그램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동안 잘 몰랐던 이야기에 대해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는데,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 '조선선비의 육아일기'라는 내용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남녀의 역할이 엄격히 구분되었던 조선시대에 직접 손주를 키워내고, 그것을 기록을 남긴 한 사대부의 남긴 책 <양아록>.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기에 엔딩 크레딧 속에 소개되는 참고 도서에 주의를 기울여 이 책을 만나게 됐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는 이문건의 기구한 삶에서부터 시작된다. 과거 급제자가 수두룩한 명문가 사대부 이문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작은누나와 존경하는 스승 조광조, 두 형, 어머니, 자식들의 잇달은 죽음. 그렇게 이문건은 늘 죽음과 맞닿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고단하고 외로운 삶이었기에 그의 희망은 하나 뿐인 손자였다. 늘그막에 얻은 귀하디귀한 손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손자에게 애정을 쏟았지만 한편으로는 가차 없이 잘못을 꾸짖기도 한 따뜻하지만 엄한 할아버지. 그것이 바로 이문건이었다. 그저 손자가 군자로 자라나 쇠퇴해가는 가문의 계통을 이어주기를, 손자가 인륜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임금을 도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주기를 바라며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손자가 할아버지의 뜻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몇백 년 전의 이야기지만,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는 단순히 사대부의 육아일기라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자식이 있는 부모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 무엇이 참된 가정 교육인지, 무엇이 우리가 아이를 키우며 지켜야 할 원칙인지 이문건은 자신의 손자 뿐 아니라 오늘날 독자에게도 그 메시지를 전한다. 이문건의 손자 숙길은 할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느 아이처럼 공부보다는 놀이에 관심을 가졌고, 덤벙거리고 놀다가 생채기가 나서 돌아오기 일쑤였다. 좀더 나이가 들자 폭음을 하곤 했다. 자꾸만 엇나가려는 손자에게 이문건은 때로는 글로, 때로는 매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아이를 엇나가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도 매를 들어야만 한 할아버지의 모질지만 따뜻한 마음. 그 절절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양아록>에 남아 있었다. 

  이 책은 총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1부에는 이문건의 굴곡진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어떤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는지, 그가 어떻게 <양아록>을 쓰게 된 것인지, 손자와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인지 등 그의 삶을 조망한다. 역사학자 또는 국문학자가 아닌 영화 시나리오 작가, 대기업 사보와 출판사 편집장을 거친 이력 때문인지 이야기는 쉽게 읽힌다. 2부에서는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여묘살이 같은 문화적인 배경이나 고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간다. 2부까지 <양아록>의 원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는 <양아록>을 번역한 책이 아니라 <양아록>을 바탕으로 이문건의 삶을 재구성한 책이기에 <양아록>을 제대로 만나고자 한 독자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 부록으로 <양아록>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한문으로 남은 기록이라 일반 독자가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직접 풀어가며 손주를 향한 할아버지의 따뜻한 속내를 되짚어보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을 듯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마음이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함께 웃고 함께 안타까워하며 읽어나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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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2-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을 지난 지식들은 확실히 존중하고 되새길 값어치들이 있더군요.
사대부의 육아일기라니, 굉장히 흥미가 가네요.

이매지님, 좋은 하루 되세요.

이매지 2011-02-17 13:17   좋아요 0 | URL
손자 하나 바라보는 이문건의 안쓰럽기도 하고,
그 손자를 향한 마음에 애틋해지기도 하고 그랬어요^^
마녀고양이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프로필 사진 바꾸셨네요? ㅎㅎ)

순오기 2011-02-1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 시대에도 손주를 양육하며 기록을 남긴 할아버지가 계셨군요.
역시 선비들은 멋진 구석이 있어요~ ^^

이매지 2011-02-19 09:08   좋아요 0 | URL
선비라면 깐깐한 느낌이 드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미가 느껴졌어요 ㅎ

유부만두 2011-03-1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우리집 막내 홍삼 영양제 이름이 <양아록>인데요!

이매지 2011-03-11 18: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아마 여기서 힌트를 얻은(?) 이름인가보군요 ㅎㅎ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품절


그런데 나는 현대의 우리도 중세에 지지 않을 정도로 범람하는 죽음의 한복판에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텔레비전에서 대량으로 보도되는 죽음, 세상 어디선가 잇달아 터지는 전쟁, 비행기나 열차 사고, 살인, 환경 파괴, 불치병, 아사……. 그리고 20세기 문명 전체가 막다른 곳에 처했다는 문제도 있지. 시대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게야. 중세의 가을이 아닌 20세기의 가을에, 바야흐로 지금 닥쳐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중세인들처럼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좀 염려가 되는구나. -149쪽

하지만 그 감성이라는 놈이 또 문제란 말이야. 텔레비전이 토해내는 대량의 죽음은 매일이다, 알겠느냐? 매일매일 다른 대량 소비재와 똑같은 선반에 진열한 허구화된 죽음을 보여준다면 반대로 감성이 예민한 사람은 방어 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즉 그들은 마비되고 마는 게야. 그렇게 현대인들은 매일같이 죽음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게 되지. -150쪽

죽어버린 그린과 죽어가는 스마일리. 그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은 허스에게 또한 각별한 '죽음'을 의미했다.
자신의 죽음, 이 죽음은 가장 애를 먹는 생각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죽음을 현실적인 현상으로 생각할 수 없으리라. 다음으로 자신과 상관없는 제삼자의 죽음, 이것은 학문적인 대상으로 냉정하게 생각할 수는 있으나 도무지 진심으로 관여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도 '그'도 아닌, '너'라고 부르는 가까운 이의 죽음, 즉 이번 경우와 같은 2인칭의 죽음은 몹시 현실적이라 깊이 생각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에 대한 감정이 사고를 어지럽힌다. -213~4쪽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매일 조금씩 죽어간다. 머리카락은 매일 60가닥씩 빠지고, 식사를 할 때 장벽에서는 음식물이 통과하면서 7백 억 개의 세포가 감소한다. 서른을 넘으면 신경 세포 중 평균 1퍼센트가 해마다 사라진다. 그 밖에도 매일 증오나 분노, 슬픔, 그리고 사랑마저도 육체를 소모시키고, 세포는 화학적 재난이라는 형태로 파괴되어 간다. 대략 60조에 이르는 세포를 가진 인체이지만, 매 24시간마다 스프 접시 가득한 분량의 세포가 사멸하고 있다. -352쪽

"밀실? 마치 그리운 탐정소설 같구먼. 경찰관도 그런 책을 읽나?"
트레이시는 얼굴을 붉혔다.
"뭐, 뭐 그렇죠. 소설은 어쨌든 3백 페이지 정도로 사건이 해결된다는 점이 좋습니다. 현실의 사건은 구두 3백 켤레가 다 닳도록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다른 놈들은 모르지만 탐정소설은 제게 있어 스트레스 해소약이라 할 수 있지요."
"오호라. 우리는 그 책으로 비유하면 몇 페이지에 있을까? 해결이 코앞에 있는 3백 페이지 부근이라면 좋겠는데……. 흠, 어쨌든 보세나."-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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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1-02-1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별찜하고 말았습니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은 마지막 박스에서-
무언가 배울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은 앞의 박스들에서 얻었습니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매지님. 잘 지내셨나요? ^^

이매지 2011-02-13 18:47   좋아요 0 | URL
어디선가 좀비 어쩌고 해서 제 취향에 별로 안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완전 재미있어요! ㅎㅎㅎ
궁극의 블랙 유머.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책! ㅎㅎ

엘신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지구 귀환 하신거예요? ㅎ

L.SHIN 2011-02-15 19:11   좋아요 0 | URL
네,'앞으로는 잠수 안 타요'라고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일단은(응?) 귀환일까요?(읭?)ㅋㅋ

이매지 2011-02-17 00:15   좋아요 0 | URL
일단은, 이라니.
엘신님 아직 혼 좀 나셔야겠어요! ㅋㅋㅋ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 단맛 쓴맛 매운맛 더운맛 다 녹인 18년 사랑
김찬웅 엮음 / 글항아리 / 2008년 4월
절판


내가 늙어서 손자가 없다는 것을 늘 걱정해주었는데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며 너무 귀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 것이니 그 뜻이 참으로 아름답다. 어린아이를 감싸고 아끼는 데 있어 비단과 구슬로 옷을 곱게 꾸미고, 여러 가지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여 아이의 복을 해치는 일이 많다. 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무거우면 조물주가 시기해서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경계하라고 이른 것이다. -75쪽

아이 기르는 일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길 필요는 없지만 내가 그리 하는 것은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귀양살이를 하는데 벗할 동료가 줄어들었고, 살아갈 뚜렷한 방도가 없어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혼자 외롭게 지내는 처지였다. 날이 저물 때까지 손자의 재롱을 보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한가롭게 편지를 펼쳐 읽으면서 그 위에 고을을 다스리는 조희 군과 귀양을 간 조카 이염, 귀양을 온 벗 유감 등이 써서 보내온 차운시를 붙여 훗날 즐길 거리를 만들어놓았다. 아울러 습좌習坐, 생치生齒, 포복匍匐 등의 짧은 글을 적어 그리워하고 연모하는 뜻을 덧붙였다. 손자가 커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문자에 나타나 있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92~3쪽

"네가 전염병을 앓는 것은 사뭇 험한 액운이다. 불길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한 달 남짓 계속되어 내 몸이 대신 아프기를 바랐었다. 다행히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매번 스스로 마음 아파했는데 부모님의 은혜 어찌 갚을까. 하늘같은 어머님 은혜 크고 넓다는 것을 손자를 키워보니 모두 다 알겠다. 내 몸을 위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이 본래 곧기 때문이다. 날마다 다른 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노니 네 자신이 잘 자라서 마침내 군자가 되어 덕망 있는 훌륭한 가문을 이루게 되면 당연히 아름다움 누리고 쇠퇴해가는 가문의 계통을 밝게 이을 수 있을 것이다. -121쪽

자세히, 천천히 깨우쳐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성급하게 다그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때때로 나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가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133쪽

아이를 때리는 것은 내가 모질어서가 아니다
아이의 나쁜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버릇이 들어 끝내는 고치기 어려울 것이다
몸에 익으려는 바로 그 순간
꾸짖고 야단쳐서 바로잡아야 한다
내가 성내며 회초리를 든 이유는
벌을 주어 화를 잘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이가 가엾다고 오냐오냐 한다면
모든 일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161쪽

네 자신이 그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조상님들이 복을 내릴지 어찌 알겠는가. 모든 일이 막힘없이 잘되어가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고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는 얻기 어렵다. 마음을 갈고닦아 덕을 갖추면 모든 행동에 잘못이 없을 것이다. 나이와 신분이 비슷한 사람 중에서 우뚝 서고 빼어나게 되어 행여 할아비처럼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거칠게 대하지 마라. 사내로 태어난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고 지금 사는 세상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꾸준히 나아가고 날마다 깊이 살피며 한순간도 헛된 것에 힘쓰지 마라. 부디 내 바람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된다면 항상 돌이켜보면서 오래도록 본받아라.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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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3 - 상 - 바람치는 궁전의 여왕 밀레니엄 (아르테) 3
스티그 라르손 지음, 박현용 옮김 / 아르테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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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엄 대망의 3부는 2부의 연장선에서 진행된다. 2부가 조직과 맞서는 이야기에 가까웠다면 3부는 국가 권력과의 대결이다. 이야기는 혈전 끝에 살아난 리스베트와 살라첸코가 같은 병원에 이송되어 수술대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총알이 뇌에 박힌 리스베트와 얼굴과 다리를 도끼에 찍힌 살라첸코. 두 사람 모두 위험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법'이라는 심판대에 오를 준비를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살라첸코의 뒷수습을 하기 바쁜 사포 내의 분파인 '섹션'과 섹션과 살라첸코의 비밀스러운 협약을 낱낱이 드러내 리스베트에게 씌워진 오명을 씻겨주고자 하는 미카엘 일파(일명 미친 원탁의 기사들)의 대결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사실 3부 상권까지만 해도 2부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탓인지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쉬기를 반복한 끝에 밤 10시 반이 넘어서야 하권을 읽기 시작했다. 뭐 절반쯤 읽다가 자고 일어나서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슬렁슬렁 읽다가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1시가 갓 지난 것을 발견했다. 2부도 나름대로 흥미로웠지만 3부는 음모론, 법정신, 스토커, 애정관계 등 온갖 엔터테인먼트 적인 요소가 갖춰져 있어 밀레니엄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2부에서 온갖 언론플레이에 먹잇감이 된 리스베트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3부에서 법정에서(그녀가 그렇게도 협조를 완강히 거부했던 공권력 하에) 그동안 그녀를 음해해온 세력이 박살나는 장면을 보는 것은 큰 쾌감을 주었다. 비밀세력 섹션에 의해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또 한 번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각자의 특기(미카엘의 정보수집력, 리스베트의 해킹능력)를 살려내 서로 직접 만나지 않고도 협력관계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또 하나 눈에 들어왔던 것은 리스베트라는 캐릭터의 변화다. 누구도 믿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의 삶을 고수해왔던(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고 그것을 부숴나가면서 미약하게나마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떠나가는 차 꽁무니에 대고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은혜를 갚는 정도였지만 최소한 그녀가 자기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사회, 아니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앞선 작품에서도 배경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스웨덴의 정치, 사회적인 배경도 이야기에 살을 더했다. 물론, 스웨덴 하면 복지국가의 이미지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세세한 상황이나 설정에 대해서는 공감이 다소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사포의 존재를 안기부와 연관시켜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를 위해서란 미명 아래 희생당한 것이 어디 스웨덴만의 이야기겠는가. 그렇게 국가에 의해 짓밟힌 삶을 살았던 한 왜소한 여자가 당당히 국가와 맞서 싸워 자신의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가 바로 <밀레니엄>에는 있었다.

  제임스 본드를 닮은 매력적인 기자 미카엘 블룸크비스트, 어쩐지 레옹의 마틸다가 떠오르는(물론 그보다 좀 파격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리스베트. 이 두 사람의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 기대됐는데 3부로 끝난 것이 너무나 아쉽다. 훗날 스티그 라르손의 뒤를 이어 누군가 밀레니엄 트리뷰트를 이어나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끝내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리스베트의 쌍둥이 여동생 카밀라에 대한 이야기나 미카엘의 연애사의 향방, 마침내 자유롭게 된 리스베트의 삶, 앞으로 또 새롭게 <밀레니엄>이 보도할 '특종' 등 궁금한 것이 너무 많지만 일단은 <밀레니엄>과 이별할 시간이다. 며칠 동안 즐거움을 준 이들에게 아쉬운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덧) 1, 2부의 표지도 안습이었지만 압권은 3부의 표지인 듯. 어디 남 부끄러워서 들고 다니면서 읽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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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2-05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핫! 궁금해서 큰 사진으로 표지 확인하고 왔어요. 그야말로 북커버가 필요한 책이군요.^^;;;

이매지 2011-02-05 02:19   좋아요 0 | URL
집에서 읽었으니 망정이지. 사실 다 읽고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도 좀 부끄러워서 다른 책으로 위에 덮어버렸어요. ㅎㅎㅎ

머큐리 2011-02-05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이거 전철에서 그냥 생각없이 보고 다녔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던데요..^^;

이매지 2011-02-05 15:27   좋아요 0 | URL
아무도 안 봐도 제가 신경 쓰여서 ㅎㅎㅎ
저는 사실 남들 무슨 책 읽나 관찰하는 타입이라 ㅎㅎㅎ

Kitty 2011-02-0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의외로 중요하지 말입니다 ㅋㅋㅋ 저는 그래서 북커버를 샀어요 (쿨럭;;)

이매지 2011-02-05 15:2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북커버가 있지 말입니다 ㅋㅋㅋㅋ
키티님 얼마 전에 올려주신 표지도 안습이던데요 ㅠㅠ

BRINY 2011-02-06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표지에 신경 안썼는데 이런 그림이었요?

이매지 2011-02-06 20:33   좋아요 0 | URL
저만 그림을 자세히 본 것인가요 ㅠㅠ

순오기 2011-02-0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좀 거시기 하군요.ㅜㅜ
이매지님 설에 세뱃돈 좀 받으셨나요?^^

이매지 2011-02-06 21:10   좋아요 0 | URL
부모님께 돈 놓고 세배했어요 ㅎㅎㅎ
시골에 안 내려가서 달리 세뱃돈 받을 분이 안 계셨던 ㅎㅎ
사실 뭐 이제 세뱃돈 받기 민망한 나이죠 ㅠㅠ
 
밀레니엄 2 - 상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 밀레니엄 (아르테)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아르테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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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단 3편의 작품만이 남아 있는 상태. 더이상 후속작을 기대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선뜻 2부를 시작한 것은 <밀레니엄> 시리즈를 한 호흡에 읽어내고 싶어서였다. 느긋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연휴가 아니면 이 책을 찔끔찔끔 감질나게 읽다가 속이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밀레니엄>의 2부와 3부를 연휴를 맞이해 도서관에서 빌려와 방에 콕 쳐박혀 읽기 시작했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리스베트에게 큰 모욕을 당한 리스베트의 후견인인 비우르만 변호사는 리스베트에게 복수를 위해 금발 거구의 한 남자와 접촉한다. 한편, 리스베트는 과거의 모든 일은 잊고 그레나다에서 페르마의 정리를 골똘히 즐기며 여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나날. 하지만 리스베트가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하나씩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밀레니엄>에 다그 스벤손이라는 기자가 여성 인신매매에 대한 글을 갖고 찾아온다. 자신의 여자친구 미아 베리만과 공동 작업을 하는 중으로 그녀가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쓴 논문의 대중 보급판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밀레니엄>에 대박 기사를 터트리기 몇 주 전, 다그와 미아가 누군가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현장에 리스베트의 지문이 남은 총이 발견되면서 또 한 번 <밀레니엄>과 리스베트는 큰 사건의 물살에 휩쓸린다. 

  앞선 이야기가 개인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두번째 이야기인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는 스케일이 좀더 커진다. 일단 겉으로는 3건의 살인사건의 용의자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 대한 이야기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그녀의 인생을 바꾼 '모든 악'에 대한 언급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150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거식증 환자가 의심될 정도로 깡마른 몸매, 몸 곳곳에 있는 문신 등 남에게 호감을 사기 어려운 외모의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가 왜 공권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하나씩 밝혀진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도 그랬지만, 리스베트는 방외자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도 하지만, 작가 스스로도 리스베트에 대해서는 직접 그녀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 이야기되는 쪽을 택하는 듯하다.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도 본질적으로는 리스베트에 대한 이야기지만 여기서 그녀의 과거를 밝히는 것은 타자의 입을 통해서다.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는 리스베트의 능력과 됨됨이를 신뢰하는 몇몇 사람들이 그녀를 보호하려 하고, 언론이 그녀를 아무리 원색적으로 비난해도 그녀의 무죄를 입증해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과거가 드러난다. 사실상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리스베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미카엘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존재로 등장할 뿐,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아무도 믿지 않는 리스베트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지는 3부의 이야기는 2부의 연장선이다. 1부는 개인, 2부는 조직과의 대립이었다면, 3부는 더 나아가 국가 권력과의 대결이다. 2부까지 순조롭게 이야기를 풀어갔던 것처럼 3부에서도 스티그 라르손가 만들어낸 '밀레니엄'의 세계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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