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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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이상 예전이 나일 수가 없다. 그런 만남을 그저 흘려보내놓고 자꾸 딴 데 가서 기웃대며 불운을 탓한다. -4쪽

사제의 정리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아무도 스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가 없다. 물질적 교환가치에 의한 거래만 남았다. 마음으로 오가던 사제의 도탑고 질박한 정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슬퍼한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6쪽

세상에 그저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다. 가는 정 오는 정이 켜켜이 쌓여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심과 성의라야지, 다른 꿍꿍이가 들어앉으면 중간에 틀어지고 만다. -17쪽

궁함을 안 뒤라야 저서할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겠더구나. 반드시 지극히 총명한 인사가 곤궁한 지경을 만나, 하루 종일 흙덩어리처럼 앉아서 사람 말소리나 수레나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지 않게 한 뒤에야, 경전과 예학의 정밀한 뜻을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천하에 이 같은 공교로움이 있겠느냐? 대개 옛 경전을 검토하고서 정현과 가규의 주장을 살펴보니 거의 매번 잘못 풀이해놓았더구나. 독서의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라. -29쪽

-선생님! 그런데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렴.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가르치면 한번만 읽고도 바로 외우지. 정작 문제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 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세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고 대충 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34~5쪽

새해가 되었다. 군자는 새해가 되면 반드시 마음과 행실을 한 차례 새롭게 다잡아야 한다. 내가 젊었을 때 설날이 되면 언제나 미리 1년의 공부 목표를 정하곤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초서할 것인지 등을 말이다. 그런 뒤에 이에 따라 실행하였다. 어쩌다 몇 달 뒤 사고 때문에 예정대로 할 수 없게 되더라도, 선(善)을 즐거워하고 앞을 향해 가려는 뜻만큼은 스스로 또한 덮어 가릴 수 없었다. -50쪽

아이가 글을 읽는 것이 대개 9년이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가 그때다. 하지만 여덟 살부터 열한 살까지는 아는 것이 어리석어 책을 읽어도 맛을 모른다. 열대여섯 살쯤 되면 이미 음양에 대한 기호가 생겨 여러 가지 물욕으로 마음이 나뉜다. 실제로는 열두 살부터 열네 살까지 3년간 독서한다. 하지만 이 3년 중에도 여름에는 무더위로 괴롭고 봄가을로는 좋은 날이 많다. 아이들은 놀기를 좋아해서 모두 능히 독서만 할 수가 없다. 다만 9월부터 2월까지의 180일간이 독서하는 날이 된다. 3년을 합쳐 계산하면 540일이다. 여기에다 세시(歲時)의 놀이와 질병이나 우환으로 방해받는 날짜를 빼면 실제로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3백 일이다. 이 3백 일은 하루하루가 보배구슬 같고, 하나하나가 금옥과 다름없다. -63~4쪽

학문이란 무엇이냐? 우리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옛사람은 학문이야말로 으뜸가는 의리라고 말했지. 내 생각에는 이 말도 문제가 있다. 마땅히 '유일무이한 의리'라고 바로잡아야 한다. 어떤 일이든 법칙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되어서 배움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그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니? 그래서 금수에 가깝게 된다고 하는 것이지. 명심하도록 해라. -66~7쪽

다산은 결코 만만한 스승이 아니었다. 한없이 자애롭다가 새치름 삐치기도 잘했다. 나무랄 때는 만정이 똑 떨어질 만큼 매서웠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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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니가 보고 싶어 tam, 난다의 탐나는 이야기 1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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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이래 모든 언니들의 가르침대로,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남자가 있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지만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 하루를 함께하고 싶은 남자. 재화가 용기를 생각할 때, 용기는 언제나 후자였다. 두 사람은 오래 친구였고, 잠시 연인이었으며, 이제는 멀리서 소식을 듣는 사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재화는 가끔 용기를 생각했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볼일이야 없겠지만, 그 녀석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소행성이 맹렬히 날아오고 있다는 소식에 찾아라도 가지, 하고 말이다. -9~10쪽

이렇게 직구를 던지는 꼬마라니. 용기는 웃고 말았다. 여자친구는 변화구를 던지는 적이 없었다. 여자친구는 변화구를 던지는 적이 없었다. 당돌하게, 온당하게 사랑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처음에는 사실 부담스러웠던 적도 있었지만 이내 쉽고 직선적이어야 진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순리인 양 잘 굴러가야 맞는 거라고 말이다. 꼭 사랑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패기 없는 젊은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역경을 이기고 성취해낸다든가 하는 거,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될 일은 쉽게 된다. 이뤄질 사랑은 쉽게 이뤄진다. 약간 어려워지는가 싶어도 고비조차 순하게 넘어간다. -28쪽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헤어진 지 너무 오래된 거다. 한때의 친밀감을, 단념한 지 너무 오래. 친밀감이란 기분 좋은, 심지어 약간 맛있는 냄새가 나는 향초 같은 거다. 오래 초를 켜두어 드디어 집 안에 향이 밸까 싶었더니 사악한 계절풍이 모두 씻어가버렸다. 그토록 쉽게 사라진다.
단념, 품었던 생각을 아주 끊어버리다…… 그건 사실 꽤 굉장한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생각을, 기억을 잘라버릴 정도의 행위란 스스로를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나 대단한 것이다. -33쪽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54쪽

마음을 얘기하고 사랑을 얘기할 때는 역시 진지해야 해, 재화는 텔레파시를 통해 용기에게 말했다. 어디서 어떤 어린것을 사랑하고 있든 간에 조심해서 사랑을 말하길. 휘발성 없는 말들을 잘 고르고 골라서, 서늘한 곳에서 숙성을 시킨 그다음에, 늑골과 연구개와 온갖 내밀한 부분들을 다 거쳐 말해야 한다고.
그게 아니면, 그냥 하지 말든가. -107쪽

쉽게 사는 것 같아 보이는 행운아들도 사실은 피똥 싸게 어려운 게 아닐까? 정말 쉽다면…… 불공평한 거다. -149쪽

나는 오늘도 네 좌표를 알지 못해. 우리의 좌표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지 못해. 네가 나빴는지, 내가 나빴는지, 우주가 나빴는지 알지 못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164쪽

여튼,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겠다고, 용기는 뒤늦게 생각했다. 영원히 알 수 없을 세계라면 특히. -177쪽

"좋겠다, 언니는. 누군가의 정답이라서."
"정답은 무슨, 오답이면 어떡하나 걱정된다."
"결혼할 용기가 있으면 정답인 거야. 계속 정답으로 지켜나가는 거지. 난 누군가의 유사답 정도는 되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한 번도 정답은 못 되어봤네."
선이가 빨대 종이로 반지를 만들어 재화 손가락에 끼워줬다.
"너도 누군가의 정답일 거야. 그 누가 아직 풀이를 제대로 못한 모양이지."-182쪽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권의 불완전한 책으로 세상을 조금 더 돌아다니는 것. 대단한 책도 아니고 뒤틀린 농담 같은 내용이지만 뭐 어떤가. 사실 세상은 너무 끔찍한 곳이라, 끔찍한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좋은 농담들 몇 개 정도일 것이다. -217쪽

생명력 있는 이야기는 결국 읽는 이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농담이 되는 것 같아요. 몇 년 전, 연하 남자친구를 만나는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메밀꽃 필 무렵」을 인용하여 "너 애숭이 빨문 죄 된다!" 일침하는 걸 보고 깔깔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지나치게 긍정적인 직장 동료를 두고 "쟨 아큐인가?" 하고 비아냥거릴 때의 쾌감이란…… 또 파괴적인 연애에는 『폭풍의 언덕』 농담이 빠질 수 없겠죠. "아주 그냥 히스클리프 났네, 났어!"

이렇게 소설이 종이의 질량마저 버리고, 대신 세기를 뛰어넘는 에너지를 얻으면 농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낯모르는 시간과 공간까지 날아가,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입속에서 슈팅스타처럼 톡톡 터지고 싶어요. 이야기가 그렇게 살아남는 것만큼 놀라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2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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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12-2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재기발랄한 스토리같아요

이매지 2011-12-22 00:32   좋아요 0 | URL
재기발랄한 연애 이야기예요! ㅎㅎ
추천추천! ㅎㅎ
 
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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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악을 왕의 망토처럼 차분하게 두르고 다녀야 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감지하지 못하는 체하는 후광처럼.
대기의 투명한 진흙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는 윤곽은 타락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형식에 관한 최고의 악이다.
- 세자르 모로, 『죽도록 사랑하기』-9쪽

'난 사랑과 관련된 것에는 온갖 종류의 편견을 가지고 있어.' 그는 마음속으로 고백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 어떤 편견도 버릴 마음이 없었다. -47쪽

'그 작은 소리들도 역시 당신이야, 루크레시아. 그것들은 당신만이 지닌 독특한 화성이고 울려 퍼지는 당신의 몸이야.'-51쪽

"행복은 존재해." 그는 매일밤 그러는 것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랬다. 행복이 가능한 곳에서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면 그건 사실이었다. 가령 그곳은 자신의 몸과 살아하는 여인의 몸이었다. 혼자서 목욕할 때도, 그토록 열렬히 갈망하던 사람과 침대에서 몇 시간 혹은 몇 분을 함께 보낼 때도 그랬다. 행복이란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지 결코 집단적이거나 공공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에 행복은 둘로 나뉘고, 극단적으로 드문 경우에만 셋으로 나뉘는 법이었다. 행복은 조개 속 진주처럼 인간에게 완벽함의 신기루나 섬광을 제공해주는 특정한 의식이나 전례의 의무 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는 그런 행복의 부스러기에 만족해야만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고 애쓰면서 고통이나 절망 속에서 사는 것을 면할 수 있다. -52쪽

그녀의 육체를 가장 잘 요약해주는 단어는 바로 '부풀다'라는 말이다. 나의 외설적인 이야기 덕분에 감정이 솟구친 나머지 그녀의 모든 것이 곡선이 되어 부풀고 굽이쳐 올라가며 적절하게 부드러워진다. 그것이 바로 훌륭한 취향의 사람이 사랑을 나눌 때 자기 파트너가 지녔으면 하고 바라는 단단함의 정도이다. 즉 넘쳐흐를 것 같지만 마치 잘 익은 과일이나 갓 치댄 밀가루 반죽처럼 탱탱하고 유연하며 탄력성을 유지하는 부드럽고 풍부한 육체.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런 부드러운 느낌을 '모르비데차'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빵에 쓰일 때조차 음탕하게 들린다. -121쪽

나는 불행하지 않으며, 남들의 동정을 받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나에 만족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다는 사실은 물론 커다란 위안이 된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역사상 지금과 같은 순간에,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일이 일어난 지금, 그런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살아남았고, 이 추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일부가 되었다.
사랑하는 당신, 나를 잘 봐. 나를 알아보고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도록 해. -147~8쪽

불가능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이지.
-204~5쪽

"마리아, 넌 야심이 부족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어났는데 어쩌란 말인가? 나는 사는 것 자체가 좋고, 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단순하고 소박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나는 그렇다. 그건 내가 항상 골치 아픈 일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어느 정도 열렬한 소망은 가지고 있다. 가령 나는 내 산양이 결코 죽지 않기를 바란다. 산양이 내 손을 핥을 때면, 나는 언젠가 그 산양이 죽을 것이고, 그러면 내 가슴은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는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또한 나는 아무도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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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 사진관 - 상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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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내 장르 도서관을 둘러보다가 "미야베 미유키의 중독성 강한 NEW 미스터리!"라는 띠지 문구와 표지의 묘한(?) 분위기에 처음에는 이거 SF 계열인가 하며 갸웃하면서 '뭐 그래도 미미 여사니까' 일단 읽어나보자 하고 선택. 앞서 읽으신 분께서 별 두 개를 주시고 상권만 읽으신 터라 '재미 없으면 어쩌지' 하고 일단 상권만 빌렸는데 상권 다 읽기가 무섭게 하권까지 내리 달렸다. 아무래도 'New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뭔가 새로운 모습을 연상케하는 데 정작 읽다 보면 <누군가>나 <대답은 필요없어>의 고등학생 버전이랄까, '일상 미스터리'에 가까운 아기자기한 네 편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책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하나비시 에이이치(일명 하나짱)의 부모님이 결혼 20주년을 계기로 고대하던 '마이 홈'을 장만하면서 시작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괴짜 같은 구석이 있는 하나짱의 부모님. 그들은 덜컥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낡은 사진관을 구입하는 것도 부족해 간판도 그대로 스튜디오의 장비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생활한다. 가게가 다시 문을 연 지, 아니 하나짱네 가족이 다시 '고구레 사진관'에서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소녀가 이 사진관 때문에 피해를 봤다며 사진 한 장을 하나짱에게 떠넘기고 간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 옆에 슬픈 얼굴의 한 여자의 얼굴. 마치 심령 사진 같은 사진 한 장. 대체 이 가족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유령 같은 이 여자는 누구인 것일까? 하나짱은 사진 속의 몇 가지 단서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사진이 남긴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고구레 사진관>은 고등학생인 하나짱이 주인공(혹은 화자)이지만, 그가 소년 탐정이 되어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이 아니다. 심령사진이 등장하지만 그가 사이킥인 것도 아니다. 그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어하는, 공부는 조금 못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건에 대해 끈기를 지닌,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접한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다양한 상황과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고구레 사진관>의 주가 된다. 'new 미스터리'라는 표현은 물론 기존에 미야베 미유키가 써온 작품과 다른 분위기 때문도 있겠지만, 아마 이렇게 성장소설, 일상 미스터리, 심령물 같은 다양한 층위가 이 책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장르적으로는 경계선상에 놓이지만 <고구레 사진관>에 등장하는 사건은 모두 '가족'과 연결된다. 종교 문제 때문에 끝내 갈라선 부부도,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가족도, 할아버지의 죽음에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가족도, 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부모처럼 직원을 보살펴주는 가족도 등장한다. 하나짱은 이 모든 가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 진정한 삶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간다. 어떻게 보면 <고구레 사진관>은 동생인 후코의 죽음을 가슴 한 켠에 '냉동'시킨 채 살아온 하나짱이 다양한 가족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매듭을 짓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야기다. 하나짱뿐만이 아니다. <고구레 사진관>에는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비밀을 가슴에 묻고, 상처를 숨긴 채 살아오다가 하나짱과 과거의 사진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 삶을 정리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기차역에 잠시 정차는 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출발하게 되는 전차처럼, 현재를 붙잡던 과거의 짐을 내려놓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조금씩 과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상처도, 가슴 아픈 사랑도,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도 스스로 직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고구레 사진관>은 미스터리의 색깔로 그려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는 등장인물이다. 어쩐지 어수룩하고 친구의 연애에 괜한 심술을 내보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하나짱을 비롯해 집 마당에서 취미 삼아 야영을 하는 덴코의 아버지, 친척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파격적인 색깔로 염색을 하는 덴코, 아직 어리지만 똘똘한 하나짱의 동생 피카. 여기에 웃을 때면 동안이 되는 부동산 사장님과 피부가 가무잡잡한 탄빵, 시니컬하지만 나름의 상처를 안고 있는 가기모토 준코까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다양한 일들도 생기게 마련이다. 개중에는 신기한 일도 있다"라는 본문 속의 말처럼 인간사는 다양한 궤적을 그린다. 그 궤적을 가만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조금 성장한 자신을 만나게 될 수 있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는 조금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미미 여사만의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한껏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 작품. 신인 미야베 미유키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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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1-12-20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다 읽었어요.
탄빵이 내뱉었던 말은 참 청춘소설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이거 미스터리를 빙자한 청춘소설인가? 라고 생각도 들었죠.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아플때 읽으니까 좀 더 편한 느낌이 들기는 들더라구용.ㅎㅎ;;; 그런데 아무래도 시대물 미스터리가 더 재미나고 좋아요. 현재 예약주문도 받고 있던데, 메롱이랑 미인도 아직 다 읽지 못해서 그거나 마저 읽어야 겠어요.ㅋ

이매지 2011-12-20 13:11   좋아요 0 | URL
미스터리를 빙자한 청춘소설이라기에 미스터리 요소가 좀 부족하죠. ㅎㅎ
저는 읽으면서 어쩐지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이 생각났어요^^
시대물 쪽도 사건보다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아요.
저도 시대물 쪽을 더 좋아해요^^
(예판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 홍홍홍)

재는재로 2011-12-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이제까지의 미야베 여사와는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죠 심령사진보다는 가족과의 유대 그리고 정
잃어버린 동생 그리고 그것에 얽매이는 인간의 모습 미스테리라기보다 한편의 가족 시네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에요

이매지 2011-12-20 16:37   좋아요 0 | URL
심령 사진이 주가 되는 것처럼 액션만 취하고 가족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죠^^
미미 여사의 사회파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분명 아쉬움이 남겠지만,
저는 꽤 만족하면서 읽었습니다.
재는재로님 리뷰도 봤었는데.. 훈훈하다는 평에 저도 동감! ^^
후속편 저도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재는재로 2011-12-2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보셨다고요 못쓰는글 읽으셨네요 --; 나름 읽고 쓴다고썼지만 제대로 전달됬는지 의문이네요
아무튼 전작과는 다른 스타일의 하지만 이런 훈훈한 가족이야기는 이런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에
더 마음에 와 닿네요 누가뭐래도 인간관계의 첫시작은 가족이죠 피는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왜있겠어요
ㅎㅎ

이매지 2011-12-22 00:08   좋아요 0 | URL
고구레 사진관에 재는재로님 리뷰 밖에 없어서 자연스레 봤어요 ㅎㅎ
가족이 붕괴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의미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ㅎㅎ

재는재로 2011-12-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레 사진관의 히로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탄빵 아니며 부동산의 그녀 저는그녀라고 생각하는데요
읽어보셨을면 제 생각에 공감하실거라 생각해요
위태위태해서 보는 사람을 가만있게만들지 못하는 고독한 모습이

이매지 2011-12-22 00:10   좋아요 0 | URL
저는 고구레 히로인은 역시 부동산 그녀라고 생각^^
그녀 역시 하나짱처럼 가족(친가족) 때문에 상처받고 가족(부동산 사장님 내외와 하나짱의 가족) 때문에 치유받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런 것 같아요.
 
고구레 사진관 - 하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구판절판


인간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타인의 행복만큼 효율적으로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억울해서 게임에서는 실력을 발휘했다. 에이이치는 원래 '노리고 맞히는' 계열의 운동은 잘하는 편이었다. 이성을 노리고 맞히는 시도는 안 해봤지만. -90 쪽

하나짱은 사람을 많이 만나봐라. 세상을 좁게 살지 마.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363쪽

장례식이란 고인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남은 인간들의 본성을 까발리는 장이지. -369쪽

불안이라고 하면, 문장을 쓸 때는 대개 '부풀어 오른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너무 빤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진실이었다. 몸속에서 이상야릇한 풍선 같은 게 생기고, 그것이 점점 부피를 키워갔다. 안쪽에서 내장이 압박당하는 느낌이었다. -4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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