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벽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7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절판


잡지 일이란 사실 어떻게 보면 무척 쉬운 일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이만저만 어렵게 여겨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 잡지 만드는 일이다. 이 일은 언제나 자기 창의력과 독자에 대한 책임만을 요구한다. 창의력을 포기해버리면 독자에 대해 책임도 면제된다. 자기 창의력이나 독자에 대한 책임을 포기해 버린 채 잡지를 만들어 가자면 또 그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어진다. 잡지에서의 창의력과 책임은 언제까지나 완성되어질 수 없고, 또 결코 완성되어져서는 안 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문의 벽-42쪽

-어디서 만난 얼굴일까. 누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하지만 그런 기억은 첫번에 대뜸 실마리가 잡히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끝내 허사가 되게 마련이다. 아니, 성급하게 굴면 굴수록 그런 일은 더욱 안타깝게 깊은 망각의 수렁 속으로 숨어들어갈 뿐이다. -소문의 벽 -48쪽

소설이란 꾸며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소설가에겐 그것이 그의 현실의 전부이니까요. 소설이란 그것을 현실로 가진 한 개인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소문의 벽 -91쪽

미친 것은 가짜의 삶이고 가짜의 행복이니까. 현실의 그것이 아무리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더라도 거기서밖에는 삶의 진실이 찾아질 수 없거든. -조만득씨-372쪽

미스 윤은 아마 사람의 삶이 무언가를 누릴 권리로만 생각되는 모양인데, 우리의 삶이 그렇기만 하다면 그야 어떤 식으로든지 그걸 행복하게 누리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내겐 그게 권리보다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살아내야 할 어떤 숙명적인 부채 같은 것으로 느껴져 오는 수가 많거든. 그게 만약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 내야 할 숙명의 부채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어차피 누구나 자신의 현실과 정직하게 맞서는 도리밖에 다른 길이 없는거지.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 내야 할 진짜의 짐이란 우리의 현실 바로 그거니까. 그런 뜻에서 조만득씨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어. 그가 비록 자신의 짐 속에 깔려 넘어지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는 진짜 자신에게로 돌아가 자신의 현실과 맞서야만 했으니까. 그게 비록 단 한순간에 그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만이 그의 진짜 삶이랄 수 있겠고, 또 누구의 삶에나 그런 순간은 있어야 하니까. -조만득씨-37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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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벽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7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이청준에 관한 레포트를 쓰기 위해 관련된 소설을 몇 편 읽었는데 다른 책들은 내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는데 이 책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읽어갔다. 그의 등단작인 '퇴원'에서부터 '소문의 벽', '황홀한 실종',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잔인한 도시', '겨울광장', '조만득씨'에 이르는 중단편들은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관념적으로 읽혀갔다.

  이 책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아니 이청준의 소설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이 책에도 등장한다. '퇴원'에서는 자아망실증을 겪는 주인공이, '소문의 벽'에서는 피해망상증을 겪는 주인공이, '황홀한 실종'에서는 가학적 유희욕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 '겨울광장'에서는 미쳐서 있지도 않은 딸을 찾는 주인공이, '조만득씨'에서는 과대망상성 정신분열증을 겪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처럼 이청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실을 회피해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가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감시(전짓불)때문에 공포에 떨기도 한다.

  작가가 이런 주인공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회의 병리적인 모습들을 조금씩 미쳐버린 사람들로 그린 것은 아닐까? 그들은 애초부터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그들을 미치게한 것은 아닐까? '소문의 벽'에서 박준은 촉망받던 작가였고, '조만득씨'는 사람 좋은 이발사였고, '황홀한 실종'에서 윤일섭은 능력있는 은행원이었다. 이들은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환경이 그들을 가만히 냅두지 않았고 그들은 좌절하게 되고 점점 깊이 그들의 내면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됐다.

  이청준의 소설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읽고나면 억압에 대해,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같다. 그리 두꺼운 소설들은 아니었지만 그 깊이와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그 어떤 소설보다도 방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청준의 사유는 끝나지 않았다. 이 책 속에서 등장한 주인공들은 또 다른 소설 속에서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등장하고, 끊임없이 상처받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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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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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전에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감상적 킬러의 고백>으로 만났던 루이스 세풀베다를 다시 한 번 만나봤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는 환경에 관한 문제를 마술적 사실주의로 풀어나갔고, <감상적 킬러의 고백>에서는 느와르적인 냄새를 살짝 풍기는 소설로의 모습이었다면 이 책은 <연애소설읽는 노인>보다는 <감상적 킬러의 고백>쪽에 더 가까운 듯한 느낌을 풍기는 책이었다.

  이야기는 마푸체 인디오 출신의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 형사가 가축도둑을 하다 걸린 권력자인 칸테라스 장군의 아들의 엉덩이에 총알을 한껏 박아넣으면서 시작된다. 이 사건으로 카우카만 형사는 좌천되어 도시에 있는 성범죄 관련 기관의 사무직으로 발령나게 되고, 여기에서 그는 폰 섹스와 관련된 음모에 얽히게 되고 한 걸음씩 그 거대한 음모와 싸우기 위해 다가간다.

  책은 꽤 얇은 편이고 이야기도 짤막짤막해서 제법 빨리 읽어갈 수 있었다. 또 어떻게 보면 스토리가 너무 단순해서 살을 좀 많이 붙여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살짝 빈약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 얇은 책 속에는 권력자에 대한 저항의식, 자연에 대한 사랑, 소시민의 슬픔, 독재, 소수민족의 문제 등 제법 묵직한 소재들이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책은 가벼울지언정 그 책이 주는 무게는 어느 소설 못지 않은 것 같다.

  책의 시작부분에 챈들러의 <호수의 여인>이 인용되지만 챈들러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필립 말로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카우카만 형사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이나 여자와 얽히는 모습이나 좀 거칠다는 점 등의 몇가지를 제외하곤 그렇게 비슷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또 한 편으로는 칠레의 필립 말로쯤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수준에까지는 못 미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 좀 더 살을 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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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10-0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세풀베다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에요. ^^
 

이매지 2006-10-09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은 <소외>를 빌려와야겠군요^^
 
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품절


아니타는 그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자기가 읽은 책들이 크나큰 패배감만 안겨 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책을 읽었다 -54~5쪽

두 사람의 나이를 합하면 여든도 더 되었다. 그렇게 많은 연륜이 쌓이다 보니, 요란스럽거나 서로 상처 주고 쓸데없이 사과하는 일 없이 진정한 사랑으로 쉽게 기울어졌다. 그리고 잃을 것도 더는 없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55쪽

나는 유감을 껴안은 채 사는 법을 배웠어요. -67쪽

현명한 늙은이의 충고를 원하나? 여보게, 어서 도망쳐. 지금 당장 거기에서 멀어져. 기차를 타든지, 버스를 타든지, 배를 타든지, 걷든지 해. 충고는 끝났네. 하지만 현명한 늙은이들이 진짜로 현명해야 할 때는 제대로 된 충고를 못하기 때문에 나는 현명한 늙은이처럼 말하는 게 끔직이도 싫네. 그들은 연륜이 쌓인 편안한 조망대에서 관찰만 할 뿐이지. 자네만이 자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 걸세. 나의 유일한 충고는 자네가 시작한 이상 상황을 이끌고 주도하라는 거네.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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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구판절판


하늘의 비행기가 속력에 의하여 떠 있음에도 알 수 있듯이, 생활에 지향과 속력이 없으면 생활의 모든 측면이 일관되게 정돈될 수가 없음은 물론, 자신의 역량마저 금방 풍화되어 무력해지는 법입니다. -24쪽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 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 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하늘 높이 바람찬 연을 띄워 놓으면 얼레가 쉴 수 없는 법, 안거란 기실 꿈의 상실이기 쉬우며, 오히려 방황의 인고 속에 상당한 분량의 꿈이 추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6쪽

우리들의 불행이란 그 양의 대부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29쪽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서로 어떠한 '관계'를 뜨개질해 왔던가? 하는 담담한 자성의 물음을 간추리게 됩니다. 슬픔에 커진 눈으로, 궁핍에 솟은 어깨로, 때로는 욕탐의 적나라함으로, 때로는 멀쩡하게 발톱 숨긴 저의로, 한몸 인생이 무거워 짐 추스리며, 몸 부대끼며 살아온 이 팔레트 위의 우연 같은 혼거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과연 무엇이 되어서 헤어지는지...-33쪽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사는 행복함을 감사하며, '세상의 슬픔에 자신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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